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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촌 브루스 리 1
천명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월
평점 :
처음 읽은 천명관의 소설이 『고래』였는지, 『고령화 가족』이었는지 확실하진 않다. 비슷한 시기에 읽었는데 『고령화 가족』을 산 날을 기억한다. 약속이 있어 종로에 갔는데 시간이 남아 구경도 할 겸 교보문고에 갔다. 그날은 희한하게도 한국문학 서가를 찾았고, 문학상 수상작을 모아둔 책장 앞에 섰다. 뜨문뜨문 독서하던 때였지만 아마 한국 소설을 한 권 사려고 했던 모양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서가 구석에서 쭈구려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계산하고 마저 읽었다. 그 책은 『고령화 가족』이었다.
『고령화 가족』은 재밌지만 특별하지 않았다. 특별한 건 『고래』다. 설화·신화적 상상력을 전개하는 힘 있고 노련한 필치, 그야말로 수작이다. 근래 읽은 한국문학 중에 최고인데 내가 한국문학을 많이 접하지 않기도 하지만... 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것은 작품이 아니라 문장이다.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에서 성애를 묘사한, 다음 문장. “나는 어둠 속에서 미끈거리는 여옥이의 몸 안으로 남해의 푸르른 물결 하나를 밀어 넣었다.”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이토록 아름다운 문장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 책은 꽤 오래 절판이었고 얼마 전 재출간되었다.
나름대로 한국 소설을 읽어보려 했으나 그다지 끌리는 작품도, 인상 깊은 글도 없다. 아!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있구나. 내가 생각하는 천명관의 장점은 뛰어난 스토리텔링, 그 달변적 서사에 있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 역시 그러하다. 『고래』가 극장,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면 이 소설은 영화의 낭만이 저물어가는 시대를 그린다고 할까. ‘브루스 리’로 상징되는 시절, 그 때에 대한 향수 말이다. 작가가 시나리오를 쓰던 이라 그런지 캐릭터와 장면묘사에 아주 뛰어나고, 그래서인지 포토제닉한 장면들이 많다. 흡입력에 관해서는 말하면 입 아프다.
주인공 권도운(삼촌)은 권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에서 눈총을 받는데, 그가 낫살 지긋한 이복형제들의 아들 뻘인 ‘서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워낙 인망이 두터웠던지라 도운의 존재는 더 충격으로 다가온다. 집안의 어른, 아버지의 아내가 그를 거둠으로써 수근대는 목소리는 잦아들었지만 그래도 눈칫밥 먹기가 어디 쉬운가. 나(권상규)보다 다섯 살 많은 삼촌은 수줍음이 많은데다 말을 더듬어 무시를 당하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불량배 도치와 시비가 붙고 그를 제압함으로써 삼촌을 보는 눈빛들이 조금씩 달라진다.
집에서는 나름대로 삼촌에 대한 미래 계획이 있었다. 농고를 졸업하면 적당한 때 결혼시켜 논을 몇 마지기 떼어주고 독립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삼촌은 꿈이 있었다. 바로 브루스 리 같은 무도인의 길을 걷는 것! 그러나 뒷산에서 홀로 연마한 무술에는 한계가 있었다. 여튼 고교 졸업 후 징집을 기다리던 삼촌은 원치 않는 소동에 휘말리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한다. 이후 꿈을 안고 홍콩으로 가고, 군대에 가고, 삼청교육대에 끌려가고, 그곳에서 원수와 친구가 되고, 고향으로 돌아와 불량배가 되었다가 으악새 배우가 되어 ‘나’와 술잔을 기울인다.
꿈을 좇는 삼촌의 여정은 모퉁이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마주한다.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비극 앞에 가슴이 아려지다가도 피식하게 되는 것은 유머, 아이러니들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삼촌이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게 되는 것은 삼청교육대에서 받은 혹독한 고문 덕이라던가 하는…. 서자로 태어났기에 삶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살지만, 삼촌의 삶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소시민들의 세계에서도 지켜져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삼촌과 비슷한 세대의 나(권상규)는 소인배의 전형같아 보인다. 중3이 된 상규의 치졸한 마음은 종태의 인생을 망가뜨린다.
같은 시간대를 배경으로 한 한국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화자들의 전형을 보는 느낌이었다. 부족함 없이 자라 대학생이 되고, 시대의 부름에 응답할지 어떨지 결정하지 못하고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타입. 자존심은 세지만 능력은 못 미치고, 결국 열등감으로 인해 주변에 피해를 주고 자기연민에 빠져 현실을 회피하는 그런 인물... 아직 2권을 읽지 않았지만 예상이 된다. 지켜본다는 의미에선 독자 또한 포함이 되는 듯 하고.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캐릭터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재미있게 읽히는 것은 작가의 능력이라 할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