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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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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책을 읽기 전부터 아주 기대했었다. 반년 전, 『읽는 인간』을 읽고 위로를 얻었기 때문이다. 처음 만나는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작가 인생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고른 단편들은 초기, 중기, 후기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초기 작품들은 오에의 청년기를 반영하는 듯 보다 선연한 색채와 개성이 보인다. 중기의 연작들은 모두 실리진 않았지만 서로 유기성을 보인다. 장애를 가진 장남 히카리(소설에서는 이요)와 아버지인 자신의 관계와 ‘읽기’를 통해 구원을 얻고자 하는 노력들이 작품에 녹아들어 있다. 후기 소설은 중기 작품들보다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많이 덜어졌고,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초기 작품들은 모두 무척 재미있다. 이 시기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고립된 이미지들이다. 오에가 청년기를 보낸 1950년대 이후의 일본 사회 분위기를 예상케 하는 일종의 은유처럼 느껴진다. 독서 중 떠오른 단어들은 개인과 공통체, 무지와 이해, 폭력과 울분 그리고 무기력이다. 「남의 다리」에서의 구분짓기, 「사육」에서의 고립과 야만적 시선,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 전복, 「인간 양」에서 느껴지는 끝없는 수치, 「세븐틴」에서의 정치와 성의 문제... 작품에서 드러나는 현시성을 생각하면 이 작품들이 1957년에서 1961년 사이에 발표되었다는 것이 놀랍게 느껴진다.


문제는 중기 작품들이다. 『읽는 인간』에서 언급된 맬컴 라우리와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들을 탐독하는 시기이다. 오에의 읽기는 개인적 상황과 더불어 작품 속에 녹아든다. 대체로 현실을 소설에 반영하되 그 경계를 흩트리는 식으로 진행된다. 독서에서 얻은 문장과 사유를 발전시키는 과정에 글쓰기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인 트리’ 연작은 오에의 관심사가 모두 담긴, 그만큼 밀도가 높은 작품이기에 읽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이 단편선에서 어떤 작품을 읽어야겠느냐 묻는다면 이 연작을 추천하겠다. 이 작품은 다케미쓰 토오루에게 작곡의 영감을 주었고, 소설에서 음악 발표회에 참석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장남 이요의 머리에 있는 수술 자국은 오에 자신이 어릴 적 얻은 상처와도 비슷한데, 소설 속에서 유년 시절 황어 떼를 보려고 잠수했다가 익사할 뻔 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요 역시 의도했는지 모르겠으나 잠수하다가 목숨을 잃을 뻔 한다. 겐자부로는 어릴 적 사고에서 어머니가 구해주셨음을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정작 장남이 목숨을 잃을 상황에서는 행동을 취하기보다는 블레이크의 시를 떠올리는 것이다. 오에는 죽음에 대해 그리움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는 술을 마시고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 힘이 빠지면 그대로 죽고 싶다는 충동을 행동에 옮기고 이타미 주조(친구이자 아내의 오빠)의 목소리로 깨어나게 된다.


이렇듯 삶에 대한 의지가 약해 보이는 오에를 붙든 것은 (해설에서 언급되듯이) 장남 히카리라고 볼 수 있는데, 아들의 장애는 이십대 후반의 그를 절망에 몰아넣었다. 아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떤 꿈을 꿀까 하는 것은 작가이자 아버지에게 어떤 숙제와도 같은 것이다. 그를 이해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가족들의 모습은 딸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조용한 생활’ 연작에서도 드러나는데, 이요는 모두에게 부담인 동시에 삶의 활력이자 사랑 그 자체다. 예상치 못한 순간, 너무 힘들어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 이요의 한 마디는 오에에게 구원을 준다. 「불을 두른 새」의 마지막 대사처럼 말이다.


오에 겐자부로를 모르고, 그의 작품과 일생동안 벌인 활동을 잘 모르기에 위대한 작가를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글 잘 읽고 왜 딴지냐 하면, 오에의 청년 시절 잘 구비된 세계 문학들을 통해 『읽는 인간』에서 느낀 일본 문화의 자양분이 어디서 왔는가 하는 울분이 슬금슬금 피어오르다 중기작품에 등장하는 ‘원폭 난민’이라는 단어 때문에 터졌기 때문이다. 파리 현대미술관에서 이 ‘원폭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행위예술가의 오리가미 뭐 그런 전시를 마주친 기억이 났다. 그 전시가 있는 그대로 와 닿지 않았던 이유는, 비판의식이 결여된 인류애로 포장한 서양인의 예술 활동이 결국 전범국을 미화하는데 한 몫 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국인이어서 그런 역함이 일었던 것일까. 동행한 이도 같은 의견이었다.


「거꾸로 선 '레인트리'」에는 핵 폐기 운동과 관련하여, 등장인물 간 논쟁과 결과가 묘사된다. 이 대목에서 해당 사안에 대한 오에의 입장을 짐작케 하는데... 오에가 9조회 활동과 일본 왕가로 상징되는 폭력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혀 왔으나, 원자폭탄 투하라는 사안만을 고려한다면 과연 일본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있냐는 의문이 들었다. 원폭으로 인한 피해자들(개인)과 그 결과를 생각하면 이는 단연 비극이고, 반복되지 않아야 할 역사이다. 그러나 그가 참여하는 핵 폐기 운동이 ‘일본은 피해자’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고 전범국의 역사를 미화하는데 어떠한 영향도 없을 것인가?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는 작가에게 실례이겠으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은 위키의 발언을 참고하였다. 그러나 의문은 작품을 읽고 떠오른 것이며 오에의 다른 저작을 읽지 않았고,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글을 썼음을 밝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집은 오에 겐자부로 입문서로 더할 나위 없다. 초기 단편들부터가 아주 훌륭하고, 진입장벽은 후기작품으로 갈수록 높아지니 부담이 덜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작가 인생을 오에 스스로 정리하는 의미에서 작품들을 추려내고 개고하는 노력을 들인 선집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시간을 들여 좀 더 깊이 읽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쉬움과 의문은 뒤로 하고, 지성의 역사에 존경을 표하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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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6-03-25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익사를 읽으면서 너무 이해가 잘 안갔었는데 그의 삶을 전반적으로 설명해주는 거 같아요. 다 읽고 다시 올께요

에이바 2016-03-25 16:52   좋아요 0 | URL
이 선집으로도 왠만큼 커버가 가능한 듯 해요. 기회가 닿으면 만엔원년의 풋볼, 개인적인 체험 이 정도 작품만 더 읽어 보려고요. 익사, 제목만 들어도 숨이 막히네요 ㅜㅜ 본문에 쓴 일화와 관련이 있으려나요?

CREBBP 2016-03-25 18:27   좋아요 0 | URL
리뷰에 언급하신 중기 작품들의 내용과 후기 작품 내용이 익사의 일화들과 꽤 겹쳐요

맥거핀 2016-04-16 0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나온 소설들만 보자면 오에 자신도 아마 그런 고민들을 내내 해왔던 것 같습니다. 가해자이자 현재에도 어떤 군국주의적 행보를 보이고 있는 일본인으로서 반전과 반핵을 이야기한다는 것의 내재한 어떤 위험들 말입니다. 이런 행보가 본인들은 원치않을지라도 또한 군국주의적 행태를 보이는 일본정부에 이용되는 것도 사실이구요. (비슷하게 소설에도 반전과 반핵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쫓아버렸다는 한 일본남성의 이야기가 나오죠.) 말씀하신대로 한국인으로서 껄끄럽게 여겨지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또 어떻게 생각해보면 과연 간단하게 말해서 그럼 일본인으로서 반전과 반핵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다른 것을 덮기 위한 시도인가, 라고 묻는다면 또 그것에도 예스라고 답하기는 어려운 것도 분명 사실인 듯 합니다. 가해자로서의 일본과 피해자로서의 일본, 그 둘 사이는 분명히 분리하여 짚고 넘어갈 지점이 있지만, 그것이 단순히 분리되지만은 않으니..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아마 이 경우에는 단순화시키는 것이 보다 위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부분이 소설에도 복잡하게 남아있는 것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리뷰 예전에 읽었는데, 시간이 나서 다시 댓글달러 들렀습니다만..처음에 리뷰를 읽었을 때 들었던 생각과는 무엇인가 다른 얘기만을 하고 가는 것 같습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

에이바 2016-04-17 11:56   좋아요 0 | URL
맥거핀의 말씀과 비슷한 내용을 리뷰에 썼다 지워버렸는데요. 그 이유는 원폭 피해자와 반전, 반핵문제에 대한 저의 지식이 피상적이라 느껴서 입니다. 정보를 찾다 겐자부로 위키에서 박유하의 저서 발췌문을 봤는데 가져오면- 한국에서 열린 강연에서 한 청중이 원폭피해에 대한 글은 결국 일본이 피해자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하자 오에가 말하길, 글쎄요 한국인 피해자도 그렇게 말할까요?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답변에서 파생되는 의문은 해당 위키에 잘 전개되어 있고 일부 답변도 되어 적당히 참고하였습니다만 의견을 전개하여 밝히기엔 제가 아는 것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글을 읽으며 가끔 두려워지는 것은 나의 읽기가 오독이진 않을까 하는 것인데요. 오에 겐자부로의 글은 이번이 두 번째라 판단할 깜냥이 되질 않고, 그에 대한 인상은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작가에 대한 존경이고요. 그렇기에 편견, 그러니까 일반화할 수 없는, 일본인과 그 사회에 대한 저의 체험과 오에 겐자부로의 글과 인생에 대한 몰이해가 부당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좀 조심스럽습니다. 그래서 제 체험을 밝히고, 의문점을 제시했는데요. 감정적이군요... 아무튼 이 단편집을 읽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졌기에 반핵운동에 대해 공부할 의욕도 타오르질 않고 무엇보다 아주 방대하더라고요.

그러면 적어도 오에 겐자부로가 쓴 히로시마 노트를 읽어봐야지 했는데 적당한 선에서 멈추고 마는 저의 단점이 발현하여 그만... 이렇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당시에 떠오른 생각은 오에 겐자부로가 성찰하는 지식인이기는 하나 일본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편견을 제하고 조심해서 접근하고 싶다 해도 한국인이기에, 저를 구성하고 있는 정체성에서 오는 한계점이 있듯이 (비교하긴 송구하나) 오에 겐자부로라는 대작가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말씀하셨듯이 복잡한 문제이기에 단순화시키고 싶지 않았고요. 다음에 관련 글을 읽게 되면, 혹은 이 책을 재독하면 지금의 심정과 다르겠지 하는 마음에서, 훗날의 저를 위해 저 문단을 남겼습니다. 맥거핀님의 댓글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