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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선 : 카페 프란스 ㅣ 아티초크 빈티지 시선 9
정지용 지음 / 아티초크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정지용 시인이라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향수'인데, 여기서는 시가 아니라 가곡이다. 학창시절 라디오를 들으며 녹음을 하곤 했다. 어느 오후 가곡 「향수」가 소개되었고, 기계적으로 녹음 버튼을 누르고 그 테이프의 존재를 잊고 있을 무렵이었다. 국어 선생님이 「향수」 노래를 가지고 있는 사람 있느냐 물으셨고 나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 수업 시간, 테이프를 재생하고 다들 기대하고 있는데 전주가 길어도 너~무 길었다. 한 1분 정도... 선생님은 당황하시고 친구들은 웃는다고 난리고, 내 얼굴은 빨개졌던 기억이 난다. 결국 빨리감기를 했지...
그런 추억이 있는 시인 정지용이 바로 아티초크에서 소개하는 세번째 한국 시인이다. 월북시인이라 분류되어 시인의 작품을 볼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고 나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이번에 제대로 알게 된 것이다. 현대사의 비극은 시인의 가족을 피하지 못했다. 집을 나선 후 행방불명이 된 아버지를 찾기 위해 북으로 갔던, 시인의 삼남 정구인 씨가 51년만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가족을 만난 것이다. 결국 시인의 사망 원인과 장소는 밝혀지지 않았다. 시인의 가족들은 군 수사대에 의뢰하여, 시인이 월북이 아니라 납북되었음을 알았지만...
충북 옥천이 고향인, 시인의 가정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지만 출신 학교(휘문고)에서 유학 비용을 대주어 일본 도시샤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다고 한다. 시집 『카페 프란스』의 구성을 보면 서정적이고 토속적인 시들, 「카페 프란스」, 「슬픈 인상화」, 「파충류 동물」, 「향수」, 「바다」 연작과 「유리창」, 「종달새」, 「호수」 등으로 이어지는 시인의 작품 경향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와 더불어 「가톨릭 청년」의 편집을 맡아 종교적 신앙을 드러내는 시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에서도 등장했던 윌리엄 블레이크를 보니 반가웠는데, 정지용 시인의 졸업 논문이 「윌리엄 블레이크 시에 있어서의 상상력」이고 그의 초기 시에 영향을 끼쳤다 한다. 타고르와 위트먼에도 관심이 있었고, 귀국 후에는 모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하며 '정종'이란 애칭을 얻었다고 한다. 애주가이기도 했다 하니 이보다 더 귀여운 애칭이 있었을까? 요즘이라면 영어교사이니 영어 정지용을 줄여 영정, 영지라 불렸을지도.
김영랑의 「시문학」 동인으로 이후 「구인회」 활동에도 참여했고, 「문장」의 편집위원으로 청록파 시인들을 등단시키기도 했다. 「가톨릭 청년」 시절에는 시인 이상을 알렸고, 카프의 임화와도 친분이 있었다. 이러한 친분으로 좌익 계열 문인단체 소속이기도 했는데 광복 이후엔 작품 활동이 뜸했다. 아마 순수시를 지향하는 그와 맞지 않아서인 듯 하다. 시선집의 제목이기도 한 「카페 프란스」는 당시 젊은이들에게 애송된 작품이다. '자작의 아들도 아닌' 나라도 집도 없는 식민지 청년들의 하소연, 아무도 반기지 않는 처지를 그리고 있다. 잘 알려져 있고,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는 「유리창」. 이 시는 폐렴으로 잃은 자식에 대한 슬픔을 노래하는데, 감정의 노출을 자제하고 절제미를 보여준다. 「옥류동」, 「 비로동」, 「백록담」에선 제목에서와 같이, 자연을 소재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소개하고 싶은 시는, 아티초크의 다음 시선으로 예정된 폴 발레리의 「석류」와 비교할 수 있는 시. 그리고 일부만 소개할 「우리나라 여인들은」 시인이 바라보는 여인들에 대한 애정과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마티스의 「춤」이 생각났다. 그리고 요즘 유행인 먹방도. 어울릴 음악은 역시 가곡 「향수」이겠지만 그토록 전주가 길었던 버전은 웹 상에 없나 보다. 아, 선생으로서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세 편의 산문도 아름답다.
석류
장미꽃처럼 곱게 피어가는 화로에 숯불,
입춘 때 밤은 마른 풀 사르는 냄새가 난다.
한겨울 지난 석류 열매를 쪼개어
홍보석 같은 알을 한 알 두 알 맛보노니,
투명한 옛 생각, 새론 시름의 무지개여,
금붕어처럼 어린 여릿여릿한 느낌이여.
이 열매는 지난해 시월 상달, 우리 둘의
조그마한 이야기가 비롯될 때 익은 것이어니.
작은 아씨야, 가녀린 동무야, 남몰래 깃들인
네 가슴이 졸음 조는 옥토끼가 한 쌍.
옛 못 속에 헤엄치는 흰 고기의 손가락, 손가락,
외롭게 가볍게 스스로 떠는 은실, 은실,
아아 석류알을 알알이 비추어보며
신라 천년의 푸른 하늘을 꿈꾸노니.
Henri Matisse, Danse (1910) 사진 출처
우리나라 여인들은
우리나라 여인들은 오월달이로다. 기쁨이로다.
여인들은 꽃 속에서 나오도다. 짚단 속에서 나오도다.
수풀에서, 물에서, 뛰어나오도다.
여인들은 산과실처럼 붉도다.
바다에서 주은 바둑돌 향기로다.
난류처럼 따뜻하도다.
(중략)
여인들은 생률도, 호두도, 딸기도, 감자도, 잘 먹는도다.
(중략)
여인들은 소프라노로다. 바람이로다.
흙이로다. 눈이로다. 불이로다.
여인들은 까아만 눈으로 인사하는도다.
입으로 대답하는도다.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