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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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영화연구소(AFI)는 《앵무새 죽이기》의 애티커스 핀치를 역대 최고의 영웅으로 선정했다. 미국 자본으로 제작된 영화가 후보작이 되었고, 여기서의 영웅은 <극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용기와 도덕성을 보여주며,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물>을 가리킨다.

 

애티커스 핀치는 눈도 침침하고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린 남매를 키우는 홀아비 변호사다. 소도시 메이콤에 살고 있는 그가, 어떻게 초능력을 가진 영웅들을 제치고 역대 최고의 영웅이 되었을까? 아마도 애티커스가 싸운 악당은 실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져 내려온 관습에서 생긴, 자연스러운 인종적 편견들. 그에 맞서는 무기는 법전 뿐이다. 한밤중 건장한 남성들에 둘러싸여 위협을 당할 때도, 모욕을 당할 때도 애티커스는 맨몸이다. 오직 법이 수호하는 가치에 기대어 약자를 보호한다.

 

스카웃과 젬 남매는 〈된 사람〉인 아버지로부터 이웃을 보살피는 마음을 배운다. 어린이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하다. 그들의 순수함은 옳고 그름을 쉽게 구별하지만, 어른들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재판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톰을 가혹하게 대하는 검사에 딜은 구역질을 느낀다.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건 옳지 않아. 옳지 않다고. 어느 누구도 그런 식으로 말할 권리는 없어. 그게 나를 구역질 나게 만드는 거야.」 368쪽

 

그런 딜을 불러 콜라를 나눠주는 레이먼드 아저씨는 흑인 여성과 결혼했고, 모두들 그를 주정뱅이라 생각한다. 레이먼드는 오해를 부추기며, 미움과 편견에 맞선다.

 

「난 그들에게 구실을 주려는 거야. 사람들은 구실이 생기면 기분이 좋아지지. 내가 아주 어쩌다 읍내에 나올 때, 조금 비틀거리며 이 봉지에 든 뭔가를 마시면, 사람들은 돌퍼스 레이먼드가 술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하는 거야. 저러니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면서 말이야. 저자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고, 그래서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371-372쪽

 

그는 스스로 결점을 만들어 〈백인을 배신한〉 미움을 희석시킨다. 영리하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혼혈아〉로 태어난 2세들은 흑인 편에도, 백인 편에도 설 수 없기 때문이다. 1930년대 미국 남부의 분위기는 그러했다. 핀치 남매와 딜은 〈흑인 피가 단 한 방울만 섞여도 흑인 취급을 받는〉 남부의 〈한방울 규칙One-drop Rule〉을 비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이렇듯 〈어른들의 사정〉으로 뭉뚱그려진 일들, 어른들은 설명하길 회피하지만 아이들은 생각보다 정확히 알고 있다. 〈갈보〉가 무슨 뜻이냐는 스카웃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잭에게, 애티커스는 이렇게 말한다.

 

「잭! 어린애가 뭘 묻거든 반드시 그대로 대답해 줘, 지어내지 말고. 애들은 역시 애들이라지만 대답을 회피하는지는 어른들보다도 빨리 알아차리거든. 그리고 대답을 회피하면 애들은 혼란에 빠지게 되지.」 168쪽 

 

어린애지만, 인격체로 존중하는 애티커스의 교육법은 핀치 남매가 올바른 사고방식을 가지게 한다. 아이들에게 부끄러울 일은 절대 하지 않는 그의 도덕성은, 남매가 당장은 수긍하지 못하더라도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도록 한다. 그래서 모두가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혐의를 받는 흑인 톰을 변호한다〉고 애티커스를 비난해도, 남매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는다. 아빠를 〈깜둥이 애인〉이라 부르며 등을 돌린 지역 사회에서, 스카웃과 젬은 성장하고 있다.

 

커닝햄 집 아이와 어울려서는 안 된다는 고모의 얘기에 우울해진 스카웃. 젬은 가슴 털을 보여주며 위로하고 스카웃은 오빠를 축하한다. 중학생이 된 젬의 성장은 여러모로 확인된다. 쥐며느리를 가지고 놀다 죽이려는 순수한 잔혹을 말리는 젬, 눈꽃동백 꽃잎을 만지작거리는 젬, 법원에서 주먹을 불끈 쥐는 젬, 그리고 필사적으로 여동생을 보호하는 젬.

 

소설 초반, 여섯 살과 열 살이 된 남매는 이웃에 산다는 부 래들리를 상상하며 논다. 왜 아서 아저씨는 밖으로 나오지 않을까? 아이다운 상상으로 연극을 하며 놀리기도 하고, 담력 테스트를 하기도 하고. 그런 래들리 씨네 집 앞에 있는 나무, 그 옹이구멍에 숨겨진 선물들은 핀치 남매를 어여삐 여긴 사랑과 우정이었다. 아이들을 언제나 지켜봤던 아서의 창백한 손은 놀라울 정도로 따뜻했다.

  

하퍼 리는 《앵무새 죽이기》를 통해 진정한 용기와, 앵무새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강조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1930년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것 같지 않다.

 

얼마 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시 한 흑인 교회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희생자 9명은 성경 공부를 하던 중이었다. 백인 우월주의 사상을 가진 백인 청년이 범인이었다. 또 작년 퍼거슨 사태 이후 미 경찰의 흑인 용의자에 대한 과잉 대응, 총격 사건들로 사회가 들끓고 있다. 대통령도 흑인이요, 대중문화를 주도하는 가수들(비욘세, 제이지 등)도 흑인인데 어찌하여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1930년대 메이콤 읍에 대공황의 여파가 남았듯이, 경제위기가 사회적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황폐화시키는 걸까? 이미 공고해진 인종적, 차별적 계급은 극복할 수 없는 걸까? 우리나라는 어떨까?

 

《앵무새 죽이기》가 위대한 이유는, 소설에 나타난 문제가 단순한 인종문제가 아니라 약자에 대한 프레임으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유색인종,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노인들- 이 모든 약자들이 〈앵무새〉다. 지금 앵무새를 죽이고 있는가, 아니면 살리고 있는가? 그들의 어려움을 이성적으로 〈이해한다〉고 믿을 뿐, 제대로 된 자기 인식은 못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퍼 리의 처녀작이자 두번째 소설, 《파수꾼》이 전 세계적인 관심을 갖는 것도 그녀가 사회에 던진 화두 때문일 것이다.(물론 출판계의 불황도 있겠지만...) 일생 단 한 편의 소설로 퓰리처상을 받고, 많은 편견들을 희석시켰다는 공로를 얻은 리 여사. 《앵무새 죽이기》가 스카웃의 유년기 중 3년을 다뤘다면, 《파수꾼》에서는 성인이 된 스카웃이 등장한다고 한다.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배웠던 스카웃. 어떤 방식으로, 성숙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기대된다.

 

핼러윈 축제, 그레이스 메리웨더 아줌마가 쓴 연극의 제목은 『메이콤 군: 아드 아스트라 퍼 아스페라』였다. 라틴어 〈Ad astra per aspera〉는 〈고난을 헤치고 별을 향하여〉라는 뜻이다. 내 스스로를 돌아보고 존중하는 마음, 불의에 맞설 용기... 리 여사는 어린 화자를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책장을 덮어도 교훈은 남는다.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거야. (...) 말하자면 그 사람 살갗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다니는 거지.」 65쪽

 

「아빠, 우리가 이길까요?」

「아니.」

「그렇다면 왜―」

「수백 년 동안 졌다고 해서 시작하기도 전에 이기려는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할 까닭은 없으니까.」148-149쪽

 

「난 네가 뒷마당에 나가 깡통이나 쏘았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새들도 쏘게 되겠지. 맞힐 수만 있다면 쏘고 싶은 만큼 어치새를 모두 쏘아도 된다. 하지만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라.」 174-175쪽

 

「... 손에 총을 쥐고 있는 사람이 용기 있다는 생각 말고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말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 승리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지만 때론 승리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 213쪽

  

밤공기가 더운데도 몸이 덜덜 떨렸습니다. 이런 느낌이 점점 강해지더니 마침내 법정 안의 공기가 마치 2월의 추운 아침과 똑같아졌습니다. 앵무새가 침묵을 지키고, 모디 아줌마네 새집에서 목수들이 망치질을 멈추며, 이웃에 있는 모든 나무문들이 래들리 아저씨네 집의 문처럼 굳게 닫혀 있는 바로 그런 아침 말이지요. 누구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길거리는 인적이 뚝 끊긴 채 텅 비어 있었고, 법정 안은 사람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여름밤은 한겨울 아침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389쪽

 

「스카웃, 이제 뭔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왜 부 래들리가 지금까지 내내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말이야, 아저씨가 집 안에 있고 싶어 하기 때문이야.」 420쪽

    

「스카웃, 결국 우리가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멋지단다.」 5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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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5-07-01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안읽어서(읽을 예정) 다 읽거덩 답글놀이 하러 다시 올께요. 기대됩니다

에이바 2015-07-01 23:23   좋아요 0 | URL
네! 기네스님 언제나 환영해요!!! 손가락을 꼽아보니 거의 20년만에 읽은 듯 해요.

AgalmA 2015-07-02 06:37   좋아요 0 | URL
이분들 요즘 책 싱크로율 장난 아닌 듯ㅎㅎ💘

AgalmA 2015-07-02 0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 발레단에서 첫 흑인 수석 발레리나가 나왔다는 뉴스를 보았어요. 아픔과 차별 속에 발레밖에 없었다는 그녀는....이제 시작이라고 말하더군요. 우리는 모두 개인이지만 이렇게 역사를 만드는 계기가 된다는 걸...

에이바 2015-07-02 10:26   좋아요 1 | URL
검색하고 왔어요. 솔리스트에서 멈추지 않고 수석 무용수가 되다니, 정말 멋집니다. 생각해보니 동양인은 종종 봐도 흑인 발레리나/발레리노는 보기 힘들었네요. 발레계도 인종의 벽이 무너질 때가 되었죠.. 한편으론 부담도 크겠어요. 처음이란 그 무게 때문에요.

라로 2015-07-03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웨스트 헐리우드라는 곳에 `애티커스`라는 예쁜 카페가 있어요. 랜드마크라는 유명한 극장 앞에 있죠. 그 카페를 볼 때마다 앵무새 죽이기를 생각하는데 에이바님이 멋진 글을 써주셨네요!!^^

에이바 2015-07-03 14:21   좋아요 0 | URL
오! 검색해보고 왔어요. 맛집이군요!! 혹시나 가게 되면 저도 <앵무새 죽이기> 생각하며 아이스크림과 파이를.. 댓글에 사진등록이 안 되는게 아쉽네요! 비비님이 말씀해주신 카페, 다른 분들을 위해 링크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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