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으로 가는 여자, 오른쪽으로 가는 남자 - Turn Left, Turn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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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아바 심보르스카_첫 눈에 빠진 사랑


그들은 둘 다 확신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정열이 그들을 묶어주었음을.
그런 확실성은 아름답다.
그러나 불확실성은 더욱 아름답다.

그들은 만난 적이 없었기에,
그들 사이에 아무 것도 없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거리에서, 계단참에서, 복도에서 들었던 말들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수백만번 서로 스쳐지났을 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묻고자 하니,
정녕 기억하지 못하는가?
어느 회전문에서
얼굴이 마주쳤던 순간을?
군중 속에서 "미안합니다"라고 웅얼거렸던 소리를?
수화기 속에서 "전화 잘못 거셨는데요"라고

뚝뚝하게 흘러나오던 말을?
나는 대답을 알고 있으니,
그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놀라게 되리라.
우연이 몇 년동안이나
그들을 희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운명이 되기에는
아직 준비를 갖추지 못해,
우연은 그들을 가까이 밀어넣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하였으며,
그들의 길을 방해하기도 하고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참으며
한 옆으로 비켜지나갔다.

그들은 읽지 못했으나,
징조와 신호는 있었다.
아마도 삼 년전,
어쩌면 바로 지난 화요일,
나뭇잎 하나 파드득거리며
한 사람의 어깨에서 또 한 사람의 어깨로 떨어지지 않았던가?
한 사람이 떨어뜨린 것을 다른 이가 줍기도 하였으니.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유년 시절 덤불 속으로
사라졌던 공일지도?

문손잡이와 초인종 위
한 사람이 이전에 스쳐갔던 자리를
다른 이가 스쳐가기도 했다.
맡겨놓은 여행가방이 나란히 서 있기도 했다.
어느 날 밤, 어쩌면, 같은 꿈에 들었다
아침이면 어지러이 깨어났을 지도 모른다.

모든 시작은
결국에는, 단지 속편일 뿐.
사건의 책들은
언제나 반쯤 열려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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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정신세계사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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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초겨울 쯤에 읽은 책일 거다, <마니>는.
생각보다 재밌었다. 유럽...아마 프랑스 작가가 쓴 책이었던 듯.
지금은 기억이 아른거리는데 책상정리를 하다 옛날 노트에서
<마니>의 몇 구절을 적어놓은 것을 발견했다.
정리를 위해 노트는 버려야하지만, 일부러 적어놓은 구절까지
버리기 아쉬워...이렇게 내 게시판에 옮겨 놓기로 했다.
그럼 첫번째 구절부터 시작! ㅋ

1.
너한테 몇가지 감춘 것은 있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
내가 자두나무에 핀 꽃을 보고 "저기 자두가 있네" 하고 말하면
그게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니? 그것은 절대 거짓말이 아니야.
난 단지 계절의 진리를 앞서 말한 것 뿐이라고.


2.
음식을 두고 깨끗하니 깨끗하지 않으니 하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인간을 두고 깨끗하니 깨끗하지 않으니 하고 말하는 것 역시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창조물과 무든 인간에게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3.
참은 참이고 거짓은 거짓이니
여러분의 의견이나 제 의견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4.
우주의 법칙은 율법학자로 구성된 위원회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분이 어찌 우주의 법칙을 수정할 수 있겠습니까.


5.
저는 그분의 뜻에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저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이 아닌 인간 마니의 이야기.
그러나 마니의 이름은 종교가 되었다.

마니는 어린시절 한 종교에 빠진 아버지에게 이끌려
속세와 동떨어진 채 그 집단 내에서, 강요당하며 살아야 했다.
종교적으로 비범한 인간이었기에 마니는 힘들었을 것이다.
마니의 아버지는 마침내 아들의 철학을 신봉하며 수행하는 사람이
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마니에게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마니는 그 시절을 잊지 않고 회상하며 어록을 남겼다.


그들 속에서 나는 지혜롭고 슬기롭게 대처하며 살았다.
나의 메시지는 동방세계와 사람이 살고있는
전세계의 구석구석까지 전해질 것이다.
나는 인류의 가슴에 영원히 남길 말을 하려고
바빌로니아에서 왔다.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내 모습이 실증이 나도록 보아 두어라.
이 모습의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태초에 두개의 세계, 즉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가
따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빛의 정원에 있는 것들은 모두 지혜로운 것들이었고,
암흑의 정원에는 권력욕, 독재욕 같은 무지의 욕심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별안간 두 세계의 경계 부근에서 엄청난 충돌이 일어났지요.
그리하여 빛의 조각들이 어둠의 조각들과 섞이면서
수만은 종류의 것들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늘, 물, 자연, 인간 등의 창조물은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모든 존개 안에는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빛과 암흑이 함께
뒤섞여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깨무는 대추의 살은 여러분의 육신을
살찌우지만 달콤한 맛과 향기는 여러분의 정신을 살찌웁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빛은 아름다움과 지식을 양식으로 삼고 있으니
그 점을 명심해서 육신을 살찌우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감각은 아름다움을 보고, 만지고, 냄새맡고, 맛을 느끼고,
듣고 생각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의 오감은 빛의 증류기이니
향기, 음악, 색깔에 경의를 표하고 악취, 악담, 더러움을
너그럽게 볼 수 있는 마음을 키우십시오.


역대 종교지도자들 중에서 드물게 마니에게는 여인이 있었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 유랑하던 마니가 어떤 마을에서 보고
선택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마니의 충실한 동반자가 되었다.
마니는 그녀의 머리를 매일 빗기고 땋아준다.
난 참 신기했다.   

 

 

 

마니가 설법을 할 때 아버지가 항상 그를 수행한다. 제자처럼.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판이하게 다른 마니의 삶.
하지만 이 부자 역시 어느 순간 갈등은 생긴다.
이때 마니와 아버지의 대화.

아버지가 말한다>

"내 살과 피에서 네가 나왔다는 것을 잊었느냐?"

마니의 대답>

"한 남자가 나의 아버지라며 나타나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습니다. 우리가 애초에 한 몸으로 시작된 것은 숙명이지만 이제는 당신이라도 제가 가는 길을 막는 장애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대단히 명료한 대답이었다.
마니의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언젠가 부모가 몹시 원망되는 날, 이 말을 외워두었던 적이 있다.
잊고 있었는데 마니의 대답은 여전히 번개보다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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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워스 - The Hour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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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을 영화.

버지니아 울프.

한없이 회색에 가까운 우울함.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114분의 러닝타임동안 

버지니아 울프의 단 하루를 통해서

그녀를 너무나 이해할 수 있었고 이해하고 싶어졌다.

황급히 숲을 걸어 강가에 다다른 니콜 키드먼이

코트 자락에 돌을 넣고 강으로 들어간다.

배경으로 그녀의 유서이자 남편에게 남기는 편지가 들렸다.

"나는 다시 미쳐가는데 당신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고..."

그저 사진과 책으로 버지니아 울프를 보았을 때는

왜 저 여자가 저렇게 자기 혼자 힘들게 살다 자살해야만 했을까

황당했는데, 알 수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자살 충동을 느꼈을 그녀를...

세상과 맞서 홀로 온전히 고독할 수 밖에 없던 그녀를...

남편도, 형제도, 조카도, 의사도

그녀의 고통 앞에서 무기력할 수 밖에 없었다.

런던 생활 속에 두번이나 자살을 시도해

요양차 내려온 한적한 시골,

버지니아의 남편은 집 안에서 인쇄소를 차려 아내의 병간호를 한다.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병은 간호로 나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걸.

그녀는 근본적인 고통에 간신히 맞서 싸우는 중인 걸.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며,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할 때마다

남편도, 언니도, 심지어 하녀도 빈정거리는 그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일 것이다.


문득 아무 말도 없이 나가 기차역에 앉아있는 버지니아를 찾아

허겁지겁 달려와, 더이상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소리치는 

남편에게 

"나는 이곳에서 매일 죽어가고 있는데,

내겐 격렬한 도시의 삶이 필요해...런던으로 가고 싶어"

라고 말하며 울음을 담고 있던 그녀...

왜 이렇게 공감이 가는지...나는 서울에 가고 싶다.


시대가 만들어 낸 그런 고통이기에,

그녀는 더욱 힘들지 않았을까.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고통을 끝낸 버지니아 울프.

그녀가 세상을 떠난지 50년 뒤, 100년 뒤 여전히 여자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

1882년 - 1941년

19세기 그리고 20세기 지금 21세기.

변치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똑똑한 여성이 겪을 수 밖에 없는 고통일까.

취업과 같은 생존이 아니라,

지독하게 힘든 자신과의 싸움이란...

언제나 자살로 끝나야 하는 것을까.

버지니아 울프 역의 니콜 키드먼은 

코에 실리콘을 넣어 못생기게 만들고

머리를 회색으로 염색해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재여성을 연기하기에 너무도 아름다웠다.

하긴, 까미유 끌로델의 이자벨 아자니도 있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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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으로 간 사나이 - A Man Who Went to Mar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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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아, 넌 역시 CF와 드라마의 여왕이야.

미소가 고운 남자 신하균의 정통 멜로 <화성으로 간 사나이>

나라면, 시골 우체부가 신하균이라면 사랑에 빠질 수 있겠다.

한동안 그냥 몹시 결혼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더랬다.

이 세상 어디라도 좋으니 그저 '지금 - 그러니까 당시-' 로부터

무조건 멀리 떨어져 쉬고 싶었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곳으로 가서...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생각하고 싶을 때 생각하고........

신하균같은 시골 우체부랑 결혼한다면 

그때 꿈꾸던 생활이 조금은 가능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만 된다면...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도 같다.

ㅋㅋㅋ

그치만, 부질없는 생각이겠지.

나는 지금 분당에서도 고통스러워하는데...

그렇게 살게 된다면 며칠이나 견딜 수 있을까.


결론 : 참, 재미 없는 영화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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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흐른다
이미륵 지음, 전혜린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이미륵.

한때 큰언니가 몹시 즐겨읽던 전혜린의 작품들 속에서

우연히 건진 책이다.

교과서에 금아선생의 글을 있었지만

이미륵이라는 작가는 언급되지 않았으니까,

혼자서 우연히 알지 않고는 발견하기 쉽지 않은 책이었다.


처음 이 책을 읽고 마구마구 울어버렸었다.

서정적인, 너무나 서정적인 문체와 흐름에

그냥 아름답다고 느끼면서도 눈물이 자꾸 났다.


어린 시절 많은 누이들 사이에서 성장한 미륵의 자전적 이야기.

처음 붓글씨를 배우던 것.

함께 자란 사촌 수암과 칠성.

친구들의 이야기.

아버지와의 추억과 죽음.

아련한 기억 속의 누이들과 어머니.

한일합병과 학생운동.

그리고 독일 유학까지.

내가 읽다가 울음을 터트린 장면은 

미륵이 아버지와 술을 마시는 내용이었다. 

아니, 처음 술을 배우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달 밝은 밤, 살구나무 아래서 어머니는 웃고 계셨으며,

미륵은 아버지에게 술 한잔을 받아 마시고 

익숙하지 않은 독한 맛에 눈물이 쏙 배어나오려고 할 때 

아버지가 입에 넣어준 대추를 씹으며 간신히 정신을 차린다.

"아버지, 당신은 아십니까"

라며 작게 부린 주정이 너무 고와서.

그 밤의 풍경이 그냥 절로 그려져서.

홀로 밤에 마시는 술맛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도

<압록강은 흐른다>를 읽고 나서였다.

특별히 주도를 배운 적은 없었지만 이후로 나는 술만큼은

꼭 선비처럼 마시려고 아직까지도 노력하고 있다.

풍류
풍류
풍류도.


- 압록강은 흐른다 중 <병석에 누운 아버지> 중 일부 발췌 -

아름다운 달밤에는 샘뜰 살구나무 아래에 아버지가 자리를 펴게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적인 이야기는 끝날 줄을 몰랐고 이따금 소리높여 시를 읖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가 늘 지녔던 근엄함도 사라지고, 만약 좋은 운이 떠올라 기분이 내키면 나와 농까지 했다.
한번은 아버지가 술병에서 한잔 가득 따라 나에게 마셔보라고 한적도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우리 옆에 없던 어느 아름다운 달밤이었다. 어머니가 옆에 없었던 것은 잘된 일이었다. 어머니는 결단코 내가 아버지와 술을 마시도록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술에 대해서는 엄한 반대자였고, 아버지는 이 독한 물을 무척 즐겼다. 그 때문에 둘 사이가 종종 불쾌해지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관대하였고 매일 밤 아버지에게 쌀술을 한병 가득 갖다 주곤 했다. 아버지와 내가 자리를 같이할 때면 술병이 놓여있는 자그만 상에는 두 개의 술잔과 쟁반 가득 담긴 과일이 놓여 있었다. 보통때 어머니는 밤이 이슥하게 깊에 술병이 거의 비게 될 때까지 우리 곁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해 여름밤엔 모든 아낙네들의 독서회가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옆에 없었던 것이다.
달은 어느덧 빈 서당의 지붕 위에 올라와 있었으며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텅 빈 이 큰집에는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없었고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모든 생명, 모든 인식이 나에게는 그처럼 잘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웃는 얼굴에서 빛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아버지는 술잔을 더 기울렸고 그럴수록 이야기는 더욱 생생해지만 했다. 수많은 시들이 인용되었고 읖어졌다.
" 너, 위대한 시인 김삿갓을 아느냐?"
"모릅니다."
나는 새오운 이야기에 대한 행복스런 기대에 차서 대답했다.

중략

아버지는 술잔을 보더니 얼른 다 마셔버렸다, 나는 다시 잔을 채우려 했지만 병이 텅 비어버렸다.
"더 없느냐?"
그때 약간 - 내가 그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 아버지는 슬프게 보였다.
"더 가져오겠습니다."
나는 병을 들고 일어났다.
아버지는 웃으면서 내 손을 쥐었다.
"넌 참 대단하구나. 어머니께 잘 말해 봐라, 아마 너에게 줄지 모르겠다."
"술을 꼭 가져다 드리겠어요."
나는 야무지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곧 병 하나 가득 가져와서는 아버지의 잔에 따랐다.
아버지는 무척 좋아하였다.

중략

"저 같으면 할아버지를 도왔을 텐데요."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아직 그걸 모른다. 임금께 충성을 맹세한 이상 결코 불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김삿갓은 자기 할아버지께도 복종을 약속하였으니 그것 또한 거부할 수 없지 않아요."
"물론이지."
아버지는 나의 논리에 기뻐하면서 동의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할아버지에게 반대 행동을 하지 않았고 시인이 되어서 이 세상과 결별하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전 할아버지를 도와야 된다고 생각해요."
나는 말했다. 나는 임금 때문에 자기 조부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야, 이 고집쟁이야!"
아버지가 소리쳤다.
"아닙니다. 아버지는 그냥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저는 아버지가 어른이라고 해서 저보다 그걸 더 잘 아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잘 말했어! 자, 이 똑똑한 녀석아. 어디 우리 한잔 같이 마셔보자."
아버지는 사용하지 않던, 확실히 치레만을 위해서 놓아두었던 다른 잔에 술을 따랐다.
나는 깜짝 놓았다. 이때까지 나는 어머니가 언제나 반대하여 이야기하였기에 취하게 하는 음료를 적으로 여기는데 익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손으로 술잔을 잡았다.
"자, 마셔라."
나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러나 잠시 후에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술은 무척 독했다. 아버지가 얼른 대추를 입에 넣어주었기 때문에 훨씬 나아졌다.
"맛이 좋았지?"
"좋았어요."
"그것 봐! 자, 한잔 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 가슴속은 울렁거렸고, 목은 마치 졸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신음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으려고 애를 썼다.
아버지는 그동안 김삿갓의 시를 하나씩 읖었다.
우리들이 둘째잔을 비웠을 때는 나는 손에 대추를 두 개 쥐고 있었다. 이번은 그렇게 나쁘지가 않았다. 나는 유쾌하고 사내답게 대추를 씹었다. 그러자 곧 머리가 빙 돌기 시작했다. 참으로 이상스럽고도 기묘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물러나지 않고 마치 편한 것처럼 앉아 있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돌아와서 내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물론이지, 그럴 수밖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두 잔이나 마셨거든!"
어머니는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시선은 그렇게 엄격하지도 꾸짖는 것 같지도 않았고 약간 비웃는 듯했다.
"한잔 더 마셔도 되나요?"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말이 되는 소리냐?"
어머니가 소리치며 술잔을 빼앗았다.
"제발 그렇게 무참하게 하지 마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한두잔의 술은 결코 해롭지 않아. 나는 이 외로움 속에서 친구를 가져야 하지 않겠소?"
"오늘 한번만은 마음대로 하세요."
어머니는 조용히 잔을 채웠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세째잔을 비웠다. 왠지 나 자신이 무척 자랐고 큰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아버지의 친구가 되다니! 저렇게 현명하고도 그렇게 아름답게 이야기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 아버지, 너는 아니 참 당신은 아십니까 - 나는 이제부터는 존대하여야겠습니다 - 어머니가 시인에게 술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아시기만 한다면!"
"그래!"
아버지가 말했다.
어머니는 옆에서 감긴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머니가 놀라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정말 상관이 없었다.
달은 아주 밝았고 살구는 향그러웠으며, 나는 술상 앞에 앉아 아버지의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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