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랑베르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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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신을 증명할 수 있을까? 안셀무스는 신을 존재론적으로 증명하려고 했던 철학자다. 그에게 형이상학적인 존재인 ‘신’을 믿기 위해서는 신이 어느 곳이든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신에게 가장 적합한 곳은 ‘사유’ 속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신은 <우리가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사유할 수 없는> 존재다. 즉, 신은 우리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존재다.”라고 신을 증명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가장 위대한 존재이자 사유인 신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그 발판을 인간의 사유 안에 만들어 놓음으로써 신의 위대함을 추락시켰다. 이것이 바로 불가능함의 증명이다. 부정변증법, 즉 발전하면서 추락하기. 나는 안셀무스와 루이 랑베르의 가장 큰 공통점이 불가능함을 증명하려는 무모한 시도(랑베르식으로 말하자면 가장 높은, 혹은 가장 낮은)라고 생각한다.

 

<위대함의 부정변증법 - 형이상학과 현실 세계의 관계에 대해>

 

1. 사유의 위대함, 그리고 자유로움에 대해

 루이 랑베르는 일찍이 어린 나이에 보다 높은 것을 이해한 천재로 그려진다. 그는 숲에서 혼자 몽상을 하기를 좋아하고, 독특한 사유를 함으로써 ‘천재’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그가 천재였다는 것은 그의 후견인인 스탈 부인과의 대화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스베덴보리의 책을 읽고 있는 그에게 스탈 부인이 묻는다. “너 이 책을 이해하니?” 랑베르는 대답대신 반문을 한다. “신에게 기도하시나요?” “물론이지.” “그러면 신을 이해하시나요?” 일찍이 그는 이해와 기도, 즉 독서를 통한 사유를 구분한다. 이것을 그가 집필하려다 실패한 <의지론>에 자세히 기술되는데, 간략하게 말하자면 행동과 반응의 관계이다. ‘행동’은 능동적 개념으로써 의지가 있어 그 의지로 인해 사유가 되는 것이다. 그에게 기도는 신에게 직접 답을 구하는 능동적 개념으로 진리를 ‘찾아감’, 혹은 ‘찾아나섬’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독서를 통한 사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해는 그에 반해 수동적인 개념인 반응과 상응하는데, ‘텍스트를 보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기계적 행동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고 그 결과 사유불가능성을 야기하여 수동적인 삶을 사는 개인들을 의미하게 된다. 비약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스탈 부인의 질문에 대한 반문으로서 그가 기도를 언급했다는 것이 그 근거가 될 것이다.

 

 이렇듯 그의 사유는 철저히 자유로움, 틀에 갇히지 않음에서 유발한다. 그는 숲에서 사유하고 글자들의 바다에서 사유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해내며 그것을 기술하고, 말하고(logos) 의견을 나눈다. 특히 형이상학적 사유, 즉 천사의 존재에 대한 것을 가장 많이 언급하는데 이 개념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랑베르를 보여줌으로써 그가 불가능을 사유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발자크는 그의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화자를 통해 그가 만약 ‘규제를 받지 않았더라면 위대한 철학자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천재성을 암시하는 동시에 제도 교육을 비판한다. 여기에서 그의 자유로움, 즉 사유의 가능성은 하나의 테제가 된다.

 

2. 반응과 반응, 그리고 반응. 즉, 규제의 역할에 대해

랑베르가 화자가 다니는 방돔 기숙학교에 온 것은 화자와의 만남을 이루어준 축복이자 그의 재능을 망가트리는 저주라고 화자는 말한다. 화자는 “학교란 자고로 각 개인의 지성이나 육체의 특성을 무시한 채 모든 학생을 규칙에 따르게 해 일괄적으로 규격화한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랑베르가 학교에 입학하고 그의 사유는 무뎌지고(그 전보다) 외부 요인에 방해를 받는다. 그는 바보, 혹은 귀족주의라고 불리며 끊임없이 비교당하고 착취당한다. 랑베르의 존재는 존재-자체로 있을 수 없으며 마치 언어처럼 누군가의 비교대상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그에게 교육의 발전을 약속했던 학교라는 공간이 오히려 그를 약하게 하고 무능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학교는 푸코가 말하는 규율권력과 비슷한 맥락에서 작동하는데, 그는 끊임없이 공간과 시간에 의해 억압받는다. 아마 화자도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으로 예측되는데 그들이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그들 고유의 사유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학교는 오로지 수동성만을 강조하는 삶, 그래서 반응하는 삶(여기에는 행동이 없고 오로지 좋은 반응과 나쁜 반응만 있을 뿐이다)만을 살게 하는 것을 가르치는 곳으로 그려진다. 이처럼 발자크는 학교라는 공간을 개인의 위대함을 망가트리는 장소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학교를 나간 후에도 계속되는데, 다만 그 대상이 바뀔 뿐이다. 랑베르가 절망의 끝을 기술하는, 삼촌에게 편지를 쓴 부분을 보면 그는 처음에 “돈 없이 지내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라고 말함으로써 자본에 대한 규제를, 또는 군중의 시선을 언급한다. 자본과 군중, 즉 현실 세계 자체가 그에게 억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랑베르의 테제에 대한 안티테제이다.

 

3. 부정변증법, 사랑으로 도피하기.

 마지막 장에서는 그가 폴리라는 여인을 만남으로써 사랑을 예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랑베르가 폴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는 너무나 진부해서 왜 이런 부분을 넣었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이 부분을 랑베르가 폴리를 ‘천사’라고 말하는 부분을 보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랑베르가 앞 장에서 언급했던 ‘천사’와 폴리라는 ‘천사’가 과연 같은 것인가를 비교해본 결과 후자의 천사가 그에게 주는 만족은 너무나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루이 랑베르> 그는 현실 안에서 형이상학적 ‘천사’(테제)를 찾다가 현실 세계의 억압(안티테제)에 부딪쳐 결국 사랑이라는 이름의 허상(진테제, 그러나 변증법을 물구나무 세운)를 발견한 랑베르의 부정변증법을 발견했다. 발자크는 이 책에서 결국 외부요인에 굴복할 수 없는 천재를 이야기함으로써 스스로 진짜 형이상학자가 되었다. 필연적으로 랑베르는 광인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여기에서 광인은 화자가 언급한 것처럼 현실을 뛰어넘은 후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미친 천재-광인의 모습이 아닌 현실을 도피한 패배자의 모습일 것이다). 랑베르의 모습을 신을 증명하기 위해 신을 인간의 사유 안으로 추락시킨 안셀무스의 유사성에서 찾는다는 것은 심각한 오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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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 공지영의 첫 르포르타주, 쌍용자동차 이야기
공지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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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 것일까를 끊임없이 질문한 책. 펼쳤다 덮었다를 반복하며 잃은 책은 이 책이 처음인 것 같다. 너무나도 극심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 분노에 매장되기 전에 왜 이러한 사태가 발생했는가를 분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끼기에 최대한 객관성을 가진 채로 글을 써 보기로 마음먹는다. 우선 이 사태를 발생시킨 원인은 무엇인가? 즉 가해자는 어떤 자인가를 생각해보고, 이들은 어떻게 피해자가 되었나를 생각해보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해보았다. 또한 왜 우리가, 혹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보호해야 하는 민주주의가 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무능할 수 밖에 없었는가를 생각해보았다. 가장 많이 참고한 책은 조르조 아벤감의 호모 사케르이다.

 

<주권자, 통치와 폭력 사이에서>

 주권자의 역설이라는 것이 있다. 주권자는 법질서의 외부와 내부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주권자는 헌정을 결정할 결정권을 가짐으로써 법 외부에 존재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법을 지켜야하는 것임이 당연하기에 내부에 존재한다. 이 같은 역설은 “나 주권자는 법의 외부에 위치하면서 법의 외부란 없다고 선언한다.”라고 표현된다.(호모 사케르 56p) 이러한 구조를 예외의 구조라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6월, 불법 시위를 근절하기 위해 엄정한 대처를 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그의 결정은 법 외부에 존재하지만, 그 법 자체는 아직 예외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그가 내린 결정의 내면에는 합법의 준수라는 측면에서 긍정성을 띄기 때문이다. 단지 엄정 대처라는 문장에서 폭력을 수반하는 하나의 예외를 발견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적으로 법이 갖는 특성이기 때문에(국가 주권의 적절한 정의는 제재나 처벌의 독점이 아니라 결정의 독점에서 발생한다, 같은 책 57p) 묵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그의 결정은 국민‘들’ 전체의 행복이 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에 발생한다. 그가 말하는 ‘국민들’이라는 추상적인 의미의 대상을 위해 개별적인 국민 몇몇이 법의 폭력에 노출되었다는 점, 그것이 그가 결정한 법이 ‘규칙’이 아닌 ‘예외’가 되는 상황을 발생케 했다. 바꿔 말하자면 주권자인 그는 예외 상태를 통해 법이 유효하기 위해서 필요한 “상황을, 잘못된 방법으로 창출했던 것이다.” 그 결과 특정 개인들은 법 외부에 위치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들은 국민 일반에게 호모 사케르가 되어버렸다. 이 사건이 용산 사태 다음에 일어났다는 것, 그리고 용산 사태의 피해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발생했다는 점을 자세히 보면 시사할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벤감이 우려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곳에서 예외가 규칙이 되는 과정이 존재한다.”

 

<그들, 호모 사케르>

 아감벤이 내린 호모 사케르의 정의는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생명”이다. 법은 그들을 카프카의 단편 <법 앞에서>의 시골 사람처럼 추방령을 내려버린다. 그들에게 법은 효력을 가지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법에 의해 버려진 그들은 국가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게 됨으로써 현대 국가에서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게 되는, 범법자로 낙인찍히게 되어버린다. 그들은 국가의 주관적 해석에 의해 낙인찍힘으로써 말 그대로 살해할 수 있는 생명, 그러나 희생물로 바쳐질 수는 없는 생명이 되어버린다. 국가가 폭력을 금지하면서도 예외적으로 국가에 의해 폭력이 용인되는 자들, 그럼으로써 주권자에 의해 예외가 되어버린 자들, 즉 추방령을 선고받은 자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들, 잠재적 호모 사케르>

 그렇다면 왜 그들은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됐는가? 이것이 우리가 그들의 상황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불손한 사상을 가진 자들도 아니고 국가가 용인하는 차원 이상으로 범법을 저지른 자들도 아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으면서도 단지 국가가 결정짓는 특정 이익이 그들의 이익과 대치되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서 싸운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싸움 역시 객관적으로 봤을 때 불법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인자를 욕할 수 있다. 정신병자들을 배척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와 다른 ‘인간’이라고 자위하면서 그들을 우리의 ‘밖’에 위치시킬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쌍용 자동차의 피해자인 그들은 우리 ‘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같음과 다름의 문제는 피상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을 우리의 밖에 위치시키는 순간, 우리 또한 언젠가 그들과 같아 질 수 있는 잠재성을 띄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 위로 떨어지는 폭력을 묵인하는 순간 언젠가 우리에게도 닥쳐질 폭력을 묵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지금 침묵하고 있는가?

 

<언젠가 나에게도 도래할 폭력에 대한 침묵>

 

1. 민주주의는 얼마나 무능한가, 혹은 왜 민주주의는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하는가에 대한 문제

그것은 그들이 단지 법의 외부에 존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부는 그들을 불법자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그것을 강조하게 위해 우리나라의 치명적인 ‘빨갱이 콤플렉스’를 동원했다(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정부와 우리의 무능력함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정부는 미디어를 통해 그들이 빨갱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들이 돈도 많이 벌면서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불가피한 피해를 막기 위해 불법적으로 파업을 시도하는 귀족 노조들이라고 이중적인 비판을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절대로 같은 범주 안에 묶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부는 그렇게 말했고, 우리는 그것에 속았다). 가장 폭력적인 범주인 "우리" 밖으로 그들을 몰아냈기 때문에 그들은 법뿐만 아니라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호모 사케르가 된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 사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치명적 약점, 아니 민주주의 자체의 치명적 약점을 드러낸다. 이미 '민주화가 완성되었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무한한 희망을 품게 하는 동시에 그것을 비판할 수 있는 발판을 없애버렸다고 할 수 있다. 쌍용 자동차 사건은 진정한 민주주의는 소수의 의견을 들어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민주주의는 도래해야 할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2.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어떤 환상을 보여주는가에 대한 문제.

 다큐멘터리 <용산>을 봤을 때가 떠올랐다. 용산 참사에 왜 우리가 침묵하는가를 묻는 다큐멘터리였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침묵해야만 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보이는 안타까움이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죄송스러움이었다. 가족을 부양하는 그들은 자신들의 삶뿐만 아니라 그들이 부양하는 가족들의 삶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있었다. 그들은 분노했지만, 진정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나 부양가족이 없는 우리들도 그러한가? 왜 우리들은 거리에 나와서 이것은 분명 정부의 잘못이라고, 무능력이라고 말하지 못할까? 왜 우리는 그들이 부당한 피해자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일찍이 환상을 보여주었다. 열심히 하면 누구나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쫒아 달려갔다. 그리고 결국 그 환상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발견한다. 우리는 다른 희망을 만들어낼 수도, 환상을 깨부술 수도 없다. 단지 환상을 보고 그것에 맞춰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가 보여준 환상과, 그 환상 자체가 허상인 현실에서 우리가 분노할 방법은 무엇일까? 진지하게 고민해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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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가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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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불가능함, 혹은 불가능한 욕망>

 

 나귀 가죽은 무엇일까? 욕망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는 조건으로 목숨을 앗아가는 것. 이것은 메피스토펠레스를 생각하게 만들기도 하고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던 악마의 계약을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전해져오는 전설이든 대작가의 소설의 주제이든 이것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욕망이란 한계가 없다는 것, 그리고 이룰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 것의 대가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줘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발자크처럼 욕망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메피스토의 욕망은 아름다움을 보는 것, 이었다. 구전 문학의 욕망은 목숨을 주는 대신 다른 어떤 꿈을 이루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귀 가죽의 라파엘은 그저 ‘욕망’한다. 그렇기에 그는 가장 빨리 후회한다. 그는 특별히 어떤 다른 것을 욕망하지 않았기에 만족을 하지 못했고 그저 욕망했기 때문에 두려움을 가장 빨리 알았다. 실질적으로 그가 소설에서 나귀 가죽을 사용할 때 그것이 자의로 이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첫 번째의 사용은 나귀 가죽을 시험하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에밀에게 자신이 우연히 소유한 절대적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혹은 나귀 가죽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더군다나 세 번째의 욕망은 이미 이루어진 상태였다. 이렇듯 그가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자의에 의해서 욕망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이 발자크가 보여주는 욕망의 성격이 아닐까? 다시 말하자면 욕망이란 텅 빈 기호라는 것, 대상이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라파엘의 욕망은 매개가 없는 순수한 욕망이었기에 그에게 나귀 가죽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불가능한 욕망을 욕망했기에 욕망을 하지 못하는, 욕망의 불가능함을 낳았다. 이것으로 발자크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한 남자의 죽음을 통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페드라와 폴린, 디스토피아와 파라다이스를 사유하며>

 

 소설 나귀가죽에서 2장은 페드라에 대한 묘사와 그런 페드라를 사랑하는 라파엘의 줄다리기로 채워진다. 라파엘은 페드라가 보여주는 매력, 그리고 사교계에서의 영향력, 남자를 제압하는 기교 등으로 그녀에게 빠져든다. 그러나 그녀의 한 마디 말에 사랑에 빠졌다가 증오 했다가를 반복하며 진자운동을 하는 라파엘의 모습에서 페드라는 과연 누구인가?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페드라는 디스토피아다. 어원적으로 설명하자면, 유토피아를 먼저 볼 필요가 있다. 유 토피아, 즉 유(없는 ou-) 토피아(장소 toppos)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단어인데, 이 단어에는 2가지의 의미가 함축되어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없다는 것과 없기 때문에 가질 수 없는 실현 불가능성. 그렇다면 유토피아의 역은 유토피아의 부정, 즉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가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이런 차원에서 페드라를 살펴보자면 그녀는 분명 존재한다. 더구나 그녀는 도처에 존재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가질 수 없다. 라파엘도, 라스티냐크도, 수많은 남자들도 그녀를 원했지만 그녀는 아무도 가질 수 없는 유령과 같이 존재한다. 보이지만 없는 것, 만질 수 있지만 가질 수 없는 것이 페드라의 상징이라면 그녀는 있지만 다다를 수 없는 어떤 곳을 나타내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절망적인 공간으로서의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지만 절대로 가질 수 없다는 의미에서 디스토피아가 아닐까? (결국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욕망의 문제와 결합되어 더욱 복잡한 논의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폴린을 보자. 그녀는 라파엘의 연인이 된다. 그것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리고 그녀를 만나서 라파엘은 너무나 행복해진다. 이것이 파라다이스다. 존재하지만 가질 수 없는 것, 혹은 가장 이상적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이것들 사이에 존재하지만 가질 수 있는 어떤 것으로서 나타나는 파라다이스는 욕망을 넘어서는 한계 이전에 존재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욕망이라는 것에 한계가 있다면, 그리고 그 한계를 넘어서면 만족할 수 없을 정도로 욕망한다면, 파라다이스는 그 경계에서 욕망을 만족시켜주면서(욕구라는 표현이 더 옳겠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게 하는 문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발자크는 폴린을 라파엘의 파라다이스로 배치함으로써 그에게 폴린을 만나기 전에 행했던 과오를 비판하는 장치로서 사용한다. 이미 완결된 이야기를 재배치하자면 라파엘이 가난함을 견딜 수 있었다면, 그래서 폴린을 사랑할 수 있었다면 그는 죽지도 않았을 것이고 괴로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한계를 넘는 욕망은 그의 신체를 훼손시키고 그의 육체를 파괴했다. 결국 나귀 가죽의 가장 큰 테마, 가죽은 욕망할 때마다 줄어든다는 것, 그리고 욕망은 늘어나야 하지만 줄어드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리고 그 관계를 라파엘, 페드라, 폴린을 통해 구체화시킴으로써 욕망의 반어법을 설명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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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펭귄클래식 28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은정 옮김, 앤서니 브릭스 서문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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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죽음의 윤리학>

 

 죽음은 언제나 존재론적으로 확실하나, 인식론적으로 모호하다. 죽음 그 자체는 행위가 아니며, 또는 어떤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지만 그것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음에 관한 가장 정확한 설명을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죽음은 현존재에게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다. 하이데거는 왜 죽음을 고통, 두려움의 본질 혹은 삶의 대조로 보지 않고 가능성이라는 긍정적인 영역에서 그것을 평가했을까? 톨스토이는 ‘죽음이 가능성’이라는 하나의 명제를 가장 시적으로 다룬 작가이다. 죽음에 관한 소설들(그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다룬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은 좀 더 구체적으로 그것에 대해 다루지만 ‘이반 일리치의 죽음’만큼 설득력 있게 죽음의 본질을 설명하지 못한다. 톨스토이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지, 혹은 작가의 죽음 이후 작가가 더 이상 우리에게 무언가를 전달해주는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이 책을 읽어야하는지 개인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죽음 이전>

 

 이 책을 읽는 중 가장 깊은 감명을 받은 부분은 이반 일리치가 병에 걸리기 전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었다. 이것을 편의 상 죽음 이전이라는 부분으로 나눠볼 때,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삶을 하나의 거대한 거짓말로 묘사한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삶을 의도에 맞게 조절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삶에서는 그 어떤 진정성도 느낄 수 없고 다만 편안 것만 찾아서 살자, 라는 하나의 편협한 실용주의가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묘사가 뛰어나다고 느낀 부분은 그런 의도된 삶(바꿔 말하면 절대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삶)에서 기쁨, 슬픔, 고통 등의 감정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톨스토이는 우리가 진정성이라고 부르는 어떤 숭고한 감정, 삶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어떤 순간 없이도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심지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그가 죽음이나 여타 다른 것들에 의해 스스로에게 한 거짓이 깨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죽음은 실존을 느끼게 한다. 오직 인간만이 죽음을 통해 실존을 느낄 수 있다. 이반 일리치 역시 그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죽음을 사유하기 어려운 이유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보편성과 나에게 직접 다가오기 전까지는 절대 경험할 수 없다는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죽음은 절대 두 번 경험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우리 모두는 죽음에 대한 경험이 없다. 그래서 그토록 우리가 타인의 죽음에 무관심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사실 죽어가는 타인을 동정하지도 못한다. 정확히 이와 같은 현상이 이반 일리치를 둘러싼 타인들에게 일어난다. 의사는 그의 죽음보다 그의 병을 알려고 한다. 가족과 친구들은 그의 죽음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병’이 ‘자신의 삶’에서 하나의 방해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거짓으로 채워진다. 아니, 오히려 자기기만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극 중 등장한 키제베터의 ‘케사르는 사람이다, 사람은 죽는다, 따라서 케사르도 죽는다’는 삼단논법에서 케사르라는 것을 나로 대체하면 나도 결국 죽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진술대로 그것을 알기는 쉽지만 느끼기는 쉽지 않다. 왜냐면 내가 삶을 살고 있는 중에는 절대로 케사르와 내가 같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죽음을 직면한 순간에만 케사르와 내가 같아 질 수 있다. 하나의 장치로 톨스토이는 하인 게라심을 등장시키는데 그는 철저하게 이반을 둘러싼 인물들과 대척점에 있는 특수한 인물이다. 그는 죽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삶 안으로 받아들인 사람으로서 진정으로 그의 고통을 동정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제, 죽음이라는 것의 ‘가능성’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것을 고민해보자. 글을 읽으면서 재미있는 사실 두 가지를 발견했는데, 하나는 이반의 직업이 판사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이반이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점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서부터 라는 것이다. 결국 판단과 질문,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내 삶 안으로 던져진다는 것이 죽음을 직면한 순간이라는 것이다. 판단과 질문이라는 것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한상 삶 안에서 ‘나’와 공존해야할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는 그것을 삶을 다 소비한 순간에 그 질문을 한다. 그리고 이 판단과 질문이라는 두 형식이 이반을 둘러싼 등장인물들과 게라심을 구분 짓게 하는 선으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으 스스로의 실존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즉 인간은 다른 존재와는 다르게 실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죽음을 인식한다는 것 아닐까?

 

<죽음 이후>

 

 키에르케고르는 적어도 내가 아는 한 헤겔의 변증법을 부정한 첫 번째 철학자였다. 그는 정-반-합의 원리가 무효함을 느끼고 오직 반복이라는 것을 통해 현상을 설명하려 하였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역시 반복의 구조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죽음이라는 것이 지극히 실존의 문제임을 설명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소설을 세 부분으로 나누자면 죽음을 알기 전의 이반 일리치가 살아가는 세상, 죽음을 직면한 순간의 그가 살아가는 세상,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의 여전히 문제없이 돌아가는 세상으로 나뉜다. 편의상 나뉜 이 3개의 세계에서 우리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후에도 그 전의 세상과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느낄 수 있다.

톨스토이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처음으로 배치함으로써 결국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다는 것을 다른 등장인물들을 통해 보여준다. 톨스토이가 묘사한 대로 그들은 여전히 잡담을 하고, 거짓말로 자신의 삶을 속이고, 브릿지 게임을 즐길 것이다. 죽음이 개개인을 덮치기 전 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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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왠지 모를 불편함이 있었다. 그가 계몽하려는, 좀 더 약한 표현으로는 꾸중하려는 대상이 바로 ‘젊은이들’이었으니 말이다. ‘젊은이’라는 연령 코호트는 일반적으로 어른들의 말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그들의 말에 반박하는 것을 더 좋아하니 말이다. 그가 말하는 현상들은 (내가 보기에) 거의 대부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아니,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형편없는 젊은이들만 있는 게 아니지’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비판하는 젊은이들의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젊은이 중 하나가 ‘나’일거라는 자만심 같은 것도 섞여 들어 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의 편지는(일반적인 편지와는 다르게) 어떤 개인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세대 일반, 혹은 젊은이라는 이름의 연령 코호트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의 일반화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급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것이라는 생각까지.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는 우리 젊은이들을 비판하려던 게 아니라 젊은이들이 이렇게 된 까닭, 더 나아가 거의 대부분의 세대가 유동하는 근대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파헤치기 위해 미시적인 관점에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책의 구성이 후반부에 갈 수록 거시적인 관점으로 나아가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한 비판이 아닌 세계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이 책에서 얻어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그 이전에 비해 어떻게 바뀌었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바뀐 결과로 우리가 어떤 것을 잃어버렸는가의 문제,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다시 더 좋은 방향으로 이것을 바꿀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동하는 근대>

 

 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우리는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굉장히 많은 사람이 자본주의체제 자체를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대두되고 있는 맑스를 중심으로, 벤야민, 루카치, 지젝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바우만 등등. 그리고 이런 이론적인 토대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치가, 경제학자 등 많은 사람들이 자본을 비판한다. 그리고 후쿠야마가 선언했던 역사의 종언이 미국 발 금융 위기로 인해 어쩌면 무효일지 모른다는 조심스런 추측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지금의 21세기는 불안전한 토대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고 얘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근거가 그렇듯 이 책에서도 매우 중요하면서도, 날카로운 현미경이 되어 세상의 부조리를 낱낱이 파헤친다. 즉, 그가 비판하는 근거는 ‘유동하는 근대’라는 개념인데, 44개의 편지에서 한 번씩은 등장할 정도로 중요하다. 그는 지금과 전 시대를 막스 베버의 언어를 사용하여 ‘가벼운 외투’, ‘강철 외투’로 비유하고 자신의 언어인 유동하는 근대로 규정한 후 액체성을 띄기 때문에 끊임없이 흘러가는, 그래서 아무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은 시대라고 말한다. 액체가 가지고 있는 유동성이라는 특성이 표면적으로 긍정적인 외양을 띄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중심점이 없는, 그렇기에 그 끊임없는 변화가 불변성에 대한 회의를 낳는 결과로의 귀결이다. 불변성의 대한 회의는 지식의 내물림을 불가능하게 하고 더 나아가 ‘진리’를 불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윗세대들이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더 이상 ‘지식’이 아니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마치 토대 없이 집을 짓는 건축가처럼 계속 해서 허물어 질 수밖에 없는 집을 짓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특히 그가 말하는 유동하는 근대는 자본의 흐름이라는 것과 비슷한 양상을 띠는데 자본 역시 한 곳으로 귀착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흐르면서 새로운 착취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이런 규정 속에서 우리(젊은이)는 ‘시대를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태어났을 때부터 유동하는 근대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유동하는 근대의 액체성에 휘말릴 수밖에 없음을 여러 가지의 일례들을 제시하면서 우리(젊은이)는 어쩌면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의 폭이 너무 좁았기 때문에 잃어버릴 수 밖에 없었던 것, 즉 애초부터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만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업을 한다. 그 작업의 의미는 어쩌면 그가 우리에게 내미는 협력의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표제인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처럼 각 편지에서 그는 우리의 세계가 변함으로써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기술한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우리는 고독(편지2), 정체성(편지4;정체성이 인터넷에 의해 언제든 처분 가능한 것이 되어버림으로써 오히려 잃어버리게 되었다), 사유의 가능성(편지5; 글자 제한이 있는 트위터의 주기적 사용으로 인한), 노력의 가치(편지6;인스턴트 섹스; 섹스를 위한 유혹이 오히려 섹스보다 더 결정적인 구성요소라는 사실), 사적 공간(편지 7~9) 등등의 것들이다. 이 모든 분실된 것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시대의 발전이라고 칭송해왔던 인터넷, 소셜네트워크, 과학기술 등에 의해 이루어진다. 또한 조금 더 나아가 소비지상주의에 의해 문화적, 경제적, 신체적으로 우리는 소비할 수 밖에 없음을, 그것도 자의적 선택이 아니라 매스컴이나 유행이 만들어낸 흐름에 따라 소비할 수 밖에 없음을 말함으로써 우리의 삶 자체가 물질로 변화한다고 얘기한다. 가장 쉬운 예로 우리는 자본이 명령하는 유행에 따라 옷을 구매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판단함으로써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고 ‘옷’이라는 물질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렇듯 그가 편지44편 내내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가치의 분실은 우리의 지금까지의 삶이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비본래적인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 해야할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일이 무엇이 있을까?

 

<되찾기, 혹은 전복하기>

 

 결론적으로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마지막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카뮈처럼 반항하기. 그렇다면 그 반항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그는 편지20(신종 플루 공포)에서 자본의 책략에서 발버둥치기, 편지 26(새해 소망)에서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기 등을 권한다. 그는 지금 시대가 이러 이러한 식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주시하고 그 어떤 욕망(만들어진 욕망)에도 휘둘리지 말고 저항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게 옳은 길일지라도 충분한 길일까? 예컨대 조금 더 나아가 지젝이 말한 것처럼 (물론 나는 그의 텍스트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서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지만) 다시 시도하고, 또 실패하고, 더 낫게 실패하는 것이 충분한 길이 아닐까?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자본주의 자체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그래서 지젝의 전복적 방법이 무조건 옳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전 구독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프레데리크 로르동이란 학자가 쓴 ‘푸조-사트로앵, 사회적 파장과 변혁의 시점’이란 칼럼에서 자본주의 내에서 새로운 해결책을 꺼내놓았다. 이 해결책이란 것이 어조 상 조롱적인 면이 있어서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이런 방법도 있다, 라는 것을 얘기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실현된다면 자본주의 내에서도 삶을 이야기 하고 인간을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을 들었다. 결국 지젝이 옳다고 믿는 나의 마음은 자본주의 내에선 아무런 해결책이 없다는 무사유성에 근거한 것이 아닐까? (특별히 지젝처럼 어떤 근거도 없으면서 말이다.) 프레데리크 로르동이 제시한 유토피아적 해결책은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찬양할 주장(물론 그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에 동의하지만)이란 점에서가 아니라, 그와 같이 자본주의 내에서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으면, 또 다른 가능성들도 무수히 많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그 가능성을 찾아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 이것이 바우만이 말하는 현실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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