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펭귄클래식 28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은정 옮김, 앤서니 브릭스 서문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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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윤리학>

 

 죽음은 언제나 존재론적으로 확실하나, 인식론적으로 모호하다. 죽음 그 자체는 행위가 아니며, 또는 어떤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지만 그것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음에 관한 가장 정확한 설명을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죽음은 현존재에게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다. 하이데거는 왜 죽음을 고통, 두려움의 본질 혹은 삶의 대조로 보지 않고 가능성이라는 긍정적인 영역에서 그것을 평가했을까? 톨스토이는 ‘죽음이 가능성’이라는 하나의 명제를 가장 시적으로 다룬 작가이다. 죽음에 관한 소설들(그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다룬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은 좀 더 구체적으로 그것에 대해 다루지만 ‘이반 일리치의 죽음’만큼 설득력 있게 죽음의 본질을 설명하지 못한다. 톨스토이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지, 혹은 작가의 죽음 이후 작가가 더 이상 우리에게 무언가를 전달해주는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이 책을 읽어야하는지 개인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죽음 이전>

 

 이 책을 읽는 중 가장 깊은 감명을 받은 부분은 이반 일리치가 병에 걸리기 전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었다. 이것을 편의 상 죽음 이전이라는 부분으로 나눠볼 때,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삶을 하나의 거대한 거짓말로 묘사한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삶을 의도에 맞게 조절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삶에서는 그 어떤 진정성도 느낄 수 없고 다만 편안 것만 찾아서 살자, 라는 하나의 편협한 실용주의가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묘사가 뛰어나다고 느낀 부분은 그런 의도된 삶(바꿔 말하면 절대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삶)에서 기쁨, 슬픔, 고통 등의 감정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톨스토이는 우리가 진정성이라고 부르는 어떤 숭고한 감정, 삶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어떤 순간 없이도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심지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그가 죽음이나 여타 다른 것들에 의해 스스로에게 한 거짓이 깨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죽음은 실존을 느끼게 한다. 오직 인간만이 죽음을 통해 실존을 느낄 수 있다. 이반 일리치 역시 그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죽음을 사유하기 어려운 이유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보편성과 나에게 직접 다가오기 전까지는 절대 경험할 수 없다는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죽음은 절대 두 번 경험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우리 모두는 죽음에 대한 경험이 없다. 그래서 그토록 우리가 타인의 죽음에 무관심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사실 죽어가는 타인을 동정하지도 못한다. 정확히 이와 같은 현상이 이반 일리치를 둘러싼 타인들에게 일어난다. 의사는 그의 죽음보다 그의 병을 알려고 한다. 가족과 친구들은 그의 죽음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병’이 ‘자신의 삶’에서 하나의 방해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거짓으로 채워진다. 아니, 오히려 자기기만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극 중 등장한 키제베터의 ‘케사르는 사람이다, 사람은 죽는다, 따라서 케사르도 죽는다’는 삼단논법에서 케사르라는 것을 나로 대체하면 나도 결국 죽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진술대로 그것을 알기는 쉽지만 느끼기는 쉽지 않다. 왜냐면 내가 삶을 살고 있는 중에는 절대로 케사르와 내가 같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죽음을 직면한 순간에만 케사르와 내가 같아 질 수 있다. 하나의 장치로 톨스토이는 하인 게라심을 등장시키는데 그는 철저하게 이반을 둘러싼 인물들과 대척점에 있는 특수한 인물이다. 그는 죽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삶 안으로 받아들인 사람으로서 진정으로 그의 고통을 동정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제, 죽음이라는 것의 ‘가능성’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것을 고민해보자. 글을 읽으면서 재미있는 사실 두 가지를 발견했는데, 하나는 이반의 직업이 판사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이반이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점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서부터 라는 것이다. 결국 판단과 질문,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내 삶 안으로 던져진다는 것이 죽음을 직면한 순간이라는 것이다. 판단과 질문이라는 것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한상 삶 안에서 ‘나’와 공존해야할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는 그것을 삶을 다 소비한 순간에 그 질문을 한다. 그리고 이 판단과 질문이라는 두 형식이 이반을 둘러싼 등장인물들과 게라심을 구분 짓게 하는 선으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으 스스로의 실존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즉 인간은 다른 존재와는 다르게 실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죽음을 인식한다는 것 아닐까?

 

<죽음 이후>

 

 키에르케고르는 적어도 내가 아는 한 헤겔의 변증법을 부정한 첫 번째 철학자였다. 그는 정-반-합의 원리가 무효함을 느끼고 오직 반복이라는 것을 통해 현상을 설명하려 하였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역시 반복의 구조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죽음이라는 것이 지극히 실존의 문제임을 설명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소설을 세 부분으로 나누자면 죽음을 알기 전의 이반 일리치가 살아가는 세상, 죽음을 직면한 순간의 그가 살아가는 세상,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의 여전히 문제없이 돌아가는 세상으로 나뉜다. 편의상 나뉜 이 3개의 세계에서 우리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후에도 그 전의 세상과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느낄 수 있다.

톨스토이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처음으로 배치함으로써 결국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다는 것을 다른 등장인물들을 통해 보여준다. 톨스토이가 묘사한 대로 그들은 여전히 잡담을 하고, 거짓말로 자신의 삶을 속이고, 브릿지 게임을 즐길 것이다. 죽음이 개개인을 덮치기 전 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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