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놀이 - 공지영의 첫 르포르타주, 쌍용자동차 이야기
공지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왜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 것일까를 끊임없이 질문한 책. 펼쳤다 덮었다를 반복하며 잃은 책은 이 책이 처음인 것 같다. 너무나도 극심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 분노에 매장되기 전에 왜 이러한 사태가 발생했는가를 분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끼기에 최대한 객관성을 가진 채로 글을 써 보기로 마음먹는다. 우선 이 사태를 발생시킨 원인은 무엇인가? 즉 가해자는 어떤 자인가를 생각해보고, 이들은 어떻게 피해자가 되었나를 생각해보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해보았다. 또한 왜 우리가, 혹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보호해야 하는 민주주의가 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무능할 수 밖에 없었는가를 생각해보았다. 가장 많이 참고한 책은 조르조 아벤감의 호모 사케르이다.

 

<주권자, 통치와 폭력 사이에서>

 주권자의 역설이라는 것이 있다. 주권자는 법질서의 외부와 내부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주권자는 헌정을 결정할 결정권을 가짐으로써 법 외부에 존재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법을 지켜야하는 것임이 당연하기에 내부에 존재한다. 이 같은 역설은 “나 주권자는 법의 외부에 위치하면서 법의 외부란 없다고 선언한다.”라고 표현된다.(호모 사케르 56p) 이러한 구조를 예외의 구조라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6월, 불법 시위를 근절하기 위해 엄정한 대처를 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그의 결정은 법 외부에 존재하지만, 그 법 자체는 아직 예외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그가 내린 결정의 내면에는 합법의 준수라는 측면에서 긍정성을 띄기 때문이다. 단지 엄정 대처라는 문장에서 폭력을 수반하는 하나의 예외를 발견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적으로 법이 갖는 특성이기 때문에(국가 주권의 적절한 정의는 제재나 처벌의 독점이 아니라 결정의 독점에서 발생한다, 같은 책 57p) 묵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그의 결정은 국민‘들’ 전체의 행복이 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에 발생한다. 그가 말하는 ‘국민들’이라는 추상적인 의미의 대상을 위해 개별적인 국민 몇몇이 법의 폭력에 노출되었다는 점, 그것이 그가 결정한 법이 ‘규칙’이 아닌 ‘예외’가 되는 상황을 발생케 했다. 바꿔 말하자면 주권자인 그는 예외 상태를 통해 법이 유효하기 위해서 필요한 “상황을, 잘못된 방법으로 창출했던 것이다.” 그 결과 특정 개인들은 법 외부에 위치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들은 국민 일반에게 호모 사케르가 되어버렸다. 이 사건이 용산 사태 다음에 일어났다는 것, 그리고 용산 사태의 피해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발생했다는 점을 자세히 보면 시사할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벤감이 우려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곳에서 예외가 규칙이 되는 과정이 존재한다.”

 

<그들, 호모 사케르>

 아감벤이 내린 호모 사케르의 정의는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생명”이다. 법은 그들을 카프카의 단편 <법 앞에서>의 시골 사람처럼 추방령을 내려버린다. 그들에게 법은 효력을 가지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법에 의해 버려진 그들은 국가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게 됨으로써 현대 국가에서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게 되는, 범법자로 낙인찍히게 되어버린다. 그들은 국가의 주관적 해석에 의해 낙인찍힘으로써 말 그대로 살해할 수 있는 생명, 그러나 희생물로 바쳐질 수는 없는 생명이 되어버린다. 국가가 폭력을 금지하면서도 예외적으로 국가에 의해 폭력이 용인되는 자들, 그럼으로써 주권자에 의해 예외가 되어버린 자들, 즉 추방령을 선고받은 자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들, 잠재적 호모 사케르>

 그렇다면 왜 그들은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됐는가? 이것이 우리가 그들의 상황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불손한 사상을 가진 자들도 아니고 국가가 용인하는 차원 이상으로 범법을 저지른 자들도 아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으면서도 단지 국가가 결정짓는 특정 이익이 그들의 이익과 대치되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서 싸운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싸움 역시 객관적으로 봤을 때 불법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인자를 욕할 수 있다. 정신병자들을 배척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와 다른 ‘인간’이라고 자위하면서 그들을 우리의 ‘밖’에 위치시킬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쌍용 자동차의 피해자인 그들은 우리 ‘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같음과 다름의 문제는 피상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을 우리의 밖에 위치시키는 순간, 우리 또한 언젠가 그들과 같아 질 수 있는 잠재성을 띄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 위로 떨어지는 폭력을 묵인하는 순간 언젠가 우리에게도 닥쳐질 폭력을 묵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지금 침묵하고 있는가?

 

<언젠가 나에게도 도래할 폭력에 대한 침묵>

 

1. 민주주의는 얼마나 무능한가, 혹은 왜 민주주의는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하는가에 대한 문제

그것은 그들이 단지 법의 외부에 존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부는 그들을 불법자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그것을 강조하게 위해 우리나라의 치명적인 ‘빨갱이 콤플렉스’를 동원했다(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정부와 우리의 무능력함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정부는 미디어를 통해 그들이 빨갱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들이 돈도 많이 벌면서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불가피한 피해를 막기 위해 불법적으로 파업을 시도하는 귀족 노조들이라고 이중적인 비판을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절대로 같은 범주 안에 묶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부는 그렇게 말했고, 우리는 그것에 속았다). 가장 폭력적인 범주인 "우리" 밖으로 그들을 몰아냈기 때문에 그들은 법뿐만 아니라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호모 사케르가 된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 사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치명적 약점, 아니 민주주의 자체의 치명적 약점을 드러낸다. 이미 '민주화가 완성되었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무한한 희망을 품게 하는 동시에 그것을 비판할 수 있는 발판을 없애버렸다고 할 수 있다. 쌍용 자동차 사건은 진정한 민주주의는 소수의 의견을 들어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민주주의는 도래해야 할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2.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어떤 환상을 보여주는가에 대한 문제.

 다큐멘터리 <용산>을 봤을 때가 떠올랐다. 용산 참사에 왜 우리가 침묵하는가를 묻는 다큐멘터리였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침묵해야만 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보이는 안타까움이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죄송스러움이었다. 가족을 부양하는 그들은 자신들의 삶뿐만 아니라 그들이 부양하는 가족들의 삶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있었다. 그들은 분노했지만, 진정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나 부양가족이 없는 우리들도 그러한가? 왜 우리들은 거리에 나와서 이것은 분명 정부의 잘못이라고, 무능력이라고 말하지 못할까? 왜 우리는 그들이 부당한 피해자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일찍이 환상을 보여주었다. 열심히 하면 누구나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쫒아 달려갔다. 그리고 결국 그 환상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발견한다. 우리는 다른 희망을 만들어낼 수도, 환상을 깨부술 수도 없다. 단지 환상을 보고 그것에 맞춰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가 보여준 환상과, 그 환상 자체가 허상인 현실에서 우리가 분노할 방법은 무엇일까? 진지하게 고민해볼 문제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