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랑베르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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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신을 증명할 수 있을까? 안셀무스는 신을 존재론적으로 증명하려고 했던 철학자다. 그에게 형이상학적인 존재인 ‘신’을 믿기 위해서는 신이 어느 곳이든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신에게 가장 적합한 곳은 ‘사유’ 속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신은 <우리가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사유할 수 없는> 존재다. 즉, 신은 우리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존재다.”라고 신을 증명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가장 위대한 존재이자 사유인 신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그 발판을 인간의 사유 안에 만들어 놓음으로써 신의 위대함을 추락시켰다. 이것이 바로 불가능함의 증명이다. 부정변증법, 즉 발전하면서 추락하기. 나는 안셀무스와 루이 랑베르의 가장 큰 공통점이 불가능함을 증명하려는 무모한 시도(랑베르식으로 말하자면 가장 높은, 혹은 가장 낮은)라고 생각한다.

 

<위대함의 부정변증법 - 형이상학과 현실 세계의 관계에 대해>

 

1. 사유의 위대함, 그리고 자유로움에 대해

 루이 랑베르는 일찍이 어린 나이에 보다 높은 것을 이해한 천재로 그려진다. 그는 숲에서 혼자 몽상을 하기를 좋아하고, 독특한 사유를 함으로써 ‘천재’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그가 천재였다는 것은 그의 후견인인 스탈 부인과의 대화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스베덴보리의 책을 읽고 있는 그에게 스탈 부인이 묻는다. “너 이 책을 이해하니?” 랑베르는 대답대신 반문을 한다. “신에게 기도하시나요?” “물론이지.” “그러면 신을 이해하시나요?” 일찍이 그는 이해와 기도, 즉 독서를 통한 사유를 구분한다. 이것을 그가 집필하려다 실패한 <의지론>에 자세히 기술되는데, 간략하게 말하자면 행동과 반응의 관계이다. ‘행동’은 능동적 개념으로써 의지가 있어 그 의지로 인해 사유가 되는 것이다. 그에게 기도는 신에게 직접 답을 구하는 능동적 개념으로 진리를 ‘찾아감’, 혹은 ‘찾아나섬’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독서를 통한 사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해는 그에 반해 수동적인 개념인 반응과 상응하는데, ‘텍스트를 보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기계적 행동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고 그 결과 사유불가능성을 야기하여 수동적인 삶을 사는 개인들을 의미하게 된다. 비약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스탈 부인의 질문에 대한 반문으로서 그가 기도를 언급했다는 것이 그 근거가 될 것이다.

 

 이렇듯 그의 사유는 철저히 자유로움, 틀에 갇히지 않음에서 유발한다. 그는 숲에서 사유하고 글자들의 바다에서 사유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해내며 그것을 기술하고, 말하고(logos) 의견을 나눈다. 특히 형이상학적 사유, 즉 천사의 존재에 대한 것을 가장 많이 언급하는데 이 개념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랑베르를 보여줌으로써 그가 불가능을 사유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발자크는 그의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화자를 통해 그가 만약 ‘규제를 받지 않았더라면 위대한 철학자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천재성을 암시하는 동시에 제도 교육을 비판한다. 여기에서 그의 자유로움, 즉 사유의 가능성은 하나의 테제가 된다.

 

2. 반응과 반응, 그리고 반응. 즉, 규제의 역할에 대해

랑베르가 화자가 다니는 방돔 기숙학교에 온 것은 화자와의 만남을 이루어준 축복이자 그의 재능을 망가트리는 저주라고 화자는 말한다. 화자는 “학교란 자고로 각 개인의 지성이나 육체의 특성을 무시한 채 모든 학생을 규칙에 따르게 해 일괄적으로 규격화한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랑베르가 학교에 입학하고 그의 사유는 무뎌지고(그 전보다) 외부 요인에 방해를 받는다. 그는 바보, 혹은 귀족주의라고 불리며 끊임없이 비교당하고 착취당한다. 랑베르의 존재는 존재-자체로 있을 수 없으며 마치 언어처럼 누군가의 비교대상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그에게 교육의 발전을 약속했던 학교라는 공간이 오히려 그를 약하게 하고 무능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학교는 푸코가 말하는 규율권력과 비슷한 맥락에서 작동하는데, 그는 끊임없이 공간과 시간에 의해 억압받는다. 아마 화자도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으로 예측되는데 그들이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그들 고유의 사유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학교는 오로지 수동성만을 강조하는 삶, 그래서 반응하는 삶(여기에는 행동이 없고 오로지 좋은 반응과 나쁜 반응만 있을 뿐이다)만을 살게 하는 것을 가르치는 곳으로 그려진다. 이처럼 발자크는 학교라는 공간을 개인의 위대함을 망가트리는 장소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학교를 나간 후에도 계속되는데, 다만 그 대상이 바뀔 뿐이다. 랑베르가 절망의 끝을 기술하는, 삼촌에게 편지를 쓴 부분을 보면 그는 처음에 “돈 없이 지내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라고 말함으로써 자본에 대한 규제를, 또는 군중의 시선을 언급한다. 자본과 군중, 즉 현실 세계 자체가 그에게 억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랑베르의 테제에 대한 안티테제이다.

 

3. 부정변증법, 사랑으로 도피하기.

 마지막 장에서는 그가 폴리라는 여인을 만남으로써 사랑을 예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랑베르가 폴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는 너무나 진부해서 왜 이런 부분을 넣었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이 부분을 랑베르가 폴리를 ‘천사’라고 말하는 부분을 보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랑베르가 앞 장에서 언급했던 ‘천사’와 폴리라는 ‘천사’가 과연 같은 것인가를 비교해본 결과 후자의 천사가 그에게 주는 만족은 너무나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루이 랑베르> 그는 현실 안에서 형이상학적 ‘천사’(테제)를 찾다가 현실 세계의 억압(안티테제)에 부딪쳐 결국 사랑이라는 이름의 허상(진테제, 그러나 변증법을 물구나무 세운)를 발견한 랑베르의 부정변증법을 발견했다. 발자크는 이 책에서 결국 외부요인에 굴복할 수 없는 천재를 이야기함으로써 스스로 진짜 형이상학자가 되었다. 필연적으로 랑베르는 광인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여기에서 광인은 화자가 언급한 것처럼 현실을 뛰어넘은 후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미친 천재-광인의 모습이 아닌 현실을 도피한 패배자의 모습일 것이다). 랑베르의 모습을 신을 증명하기 위해 신을 인간의 사유 안으로 추락시킨 안셀무스의 유사성에서 찾는다는 것은 심각한 오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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