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왠지 모를 불편함이 있었다. 그가 계몽하려는, 좀 더 약한 표현으로는 꾸중하려는 대상이 바로 ‘젊은이들’이었으니 말이다. ‘젊은이’라는 연령 코호트는 일반적으로 어른들의 말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그들의 말에 반박하는 것을 더 좋아하니 말이다. 그가 말하는 현상들은 (내가 보기에) 거의 대부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아니,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형편없는 젊은이들만 있는 게 아니지’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비판하는 젊은이들의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젊은이 중 하나가 ‘나’일거라는 자만심 같은 것도 섞여 들어 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의 편지는(일반적인 편지와는 다르게) 어떤 개인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세대 일반, 혹은 젊은이라는 이름의 연령 코호트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의 일반화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급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것이라는 생각까지.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는 우리 젊은이들을 비판하려던 게 아니라 젊은이들이 이렇게 된 까닭, 더 나아가 거의 대부분의 세대가 유동하는 근대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파헤치기 위해 미시적인 관점에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책의 구성이 후반부에 갈 수록 거시적인 관점으로 나아가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한 비판이 아닌 세계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이 책에서 얻어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그 이전에 비해 어떻게 바뀌었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바뀐 결과로 우리가 어떤 것을 잃어버렸는가의 문제,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다시 더 좋은 방향으로 이것을 바꿀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동하는 근대>

 

 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우리는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굉장히 많은 사람이 자본주의체제 자체를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대두되고 있는 맑스를 중심으로, 벤야민, 루카치, 지젝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바우만 등등. 그리고 이런 이론적인 토대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치가, 경제학자 등 많은 사람들이 자본을 비판한다. 그리고 후쿠야마가 선언했던 역사의 종언이 미국 발 금융 위기로 인해 어쩌면 무효일지 모른다는 조심스런 추측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지금의 21세기는 불안전한 토대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고 얘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근거가 그렇듯 이 책에서도 매우 중요하면서도, 날카로운 현미경이 되어 세상의 부조리를 낱낱이 파헤친다. 즉, 그가 비판하는 근거는 ‘유동하는 근대’라는 개념인데, 44개의 편지에서 한 번씩은 등장할 정도로 중요하다. 그는 지금과 전 시대를 막스 베버의 언어를 사용하여 ‘가벼운 외투’, ‘강철 외투’로 비유하고 자신의 언어인 유동하는 근대로 규정한 후 액체성을 띄기 때문에 끊임없이 흘러가는, 그래서 아무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은 시대라고 말한다. 액체가 가지고 있는 유동성이라는 특성이 표면적으로 긍정적인 외양을 띄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중심점이 없는, 그렇기에 그 끊임없는 변화가 불변성에 대한 회의를 낳는 결과로의 귀결이다. 불변성의 대한 회의는 지식의 내물림을 불가능하게 하고 더 나아가 ‘진리’를 불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윗세대들이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더 이상 ‘지식’이 아니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마치 토대 없이 집을 짓는 건축가처럼 계속 해서 허물어 질 수밖에 없는 집을 짓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특히 그가 말하는 유동하는 근대는 자본의 흐름이라는 것과 비슷한 양상을 띠는데 자본 역시 한 곳으로 귀착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흐르면서 새로운 착취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이런 규정 속에서 우리(젊은이)는 ‘시대를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태어났을 때부터 유동하는 근대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유동하는 근대의 액체성에 휘말릴 수밖에 없음을 여러 가지의 일례들을 제시하면서 우리(젊은이)는 어쩌면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의 폭이 너무 좁았기 때문에 잃어버릴 수 밖에 없었던 것, 즉 애초부터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만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업을 한다. 그 작업의 의미는 어쩌면 그가 우리에게 내미는 협력의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표제인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처럼 각 편지에서 그는 우리의 세계가 변함으로써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기술한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우리는 고독(편지2), 정체성(편지4;정체성이 인터넷에 의해 언제든 처분 가능한 것이 되어버림으로써 오히려 잃어버리게 되었다), 사유의 가능성(편지5; 글자 제한이 있는 트위터의 주기적 사용으로 인한), 노력의 가치(편지6;인스턴트 섹스; 섹스를 위한 유혹이 오히려 섹스보다 더 결정적인 구성요소라는 사실), 사적 공간(편지 7~9) 등등의 것들이다. 이 모든 분실된 것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시대의 발전이라고 칭송해왔던 인터넷, 소셜네트워크, 과학기술 등에 의해 이루어진다. 또한 조금 더 나아가 소비지상주의에 의해 문화적, 경제적, 신체적으로 우리는 소비할 수 밖에 없음을, 그것도 자의적 선택이 아니라 매스컴이나 유행이 만들어낸 흐름에 따라 소비할 수 밖에 없음을 말함으로써 우리의 삶 자체가 물질로 변화한다고 얘기한다. 가장 쉬운 예로 우리는 자본이 명령하는 유행에 따라 옷을 구매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판단함으로써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고 ‘옷’이라는 물질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렇듯 그가 편지44편 내내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가치의 분실은 우리의 지금까지의 삶이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비본래적인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 해야할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일이 무엇이 있을까?

 

<되찾기, 혹은 전복하기>

 

 결론적으로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마지막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카뮈처럼 반항하기. 그렇다면 그 반항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그는 편지20(신종 플루 공포)에서 자본의 책략에서 발버둥치기, 편지 26(새해 소망)에서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기 등을 권한다. 그는 지금 시대가 이러 이러한 식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주시하고 그 어떤 욕망(만들어진 욕망)에도 휘둘리지 말고 저항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게 옳은 길일지라도 충분한 길일까? 예컨대 조금 더 나아가 지젝이 말한 것처럼 (물론 나는 그의 텍스트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서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지만) 다시 시도하고, 또 실패하고, 더 낫게 실패하는 것이 충분한 길이 아닐까?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자본주의 자체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그래서 지젝의 전복적 방법이 무조건 옳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전 구독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프레데리크 로르동이란 학자가 쓴 ‘푸조-사트로앵, 사회적 파장과 변혁의 시점’이란 칼럼에서 자본주의 내에서 새로운 해결책을 꺼내놓았다. 이 해결책이란 것이 어조 상 조롱적인 면이 있어서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이런 방법도 있다, 라는 것을 얘기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실현된다면 자본주의 내에서도 삶을 이야기 하고 인간을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을 들었다. 결국 지젝이 옳다고 믿는 나의 마음은 자본주의 내에선 아무런 해결책이 없다는 무사유성에 근거한 것이 아닐까? (특별히 지젝처럼 어떤 근거도 없으면서 말이다.) 프레데리크 로르동이 제시한 유토피아적 해결책은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찬양할 주장(물론 그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에 동의하지만)이란 점에서가 아니라, 그와 같이 자본주의 내에서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으면, 또 다른 가능성들도 무수히 많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그 가능성을 찾아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 이것이 바우만이 말하는 현실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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