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 가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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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불가능함, 혹은 불가능한 욕망>

 

 나귀 가죽은 무엇일까? 욕망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는 조건으로 목숨을 앗아가는 것. 이것은 메피스토펠레스를 생각하게 만들기도 하고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던 악마의 계약을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전해져오는 전설이든 대작가의 소설의 주제이든 이것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욕망이란 한계가 없다는 것, 그리고 이룰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 것의 대가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줘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발자크처럼 욕망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메피스토의 욕망은 아름다움을 보는 것, 이었다. 구전 문학의 욕망은 목숨을 주는 대신 다른 어떤 꿈을 이루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귀 가죽의 라파엘은 그저 ‘욕망’한다. 그렇기에 그는 가장 빨리 후회한다. 그는 특별히 어떤 다른 것을 욕망하지 않았기에 만족을 하지 못했고 그저 욕망했기 때문에 두려움을 가장 빨리 알았다. 실질적으로 그가 소설에서 나귀 가죽을 사용할 때 그것이 자의로 이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첫 번째의 사용은 나귀 가죽을 시험하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에밀에게 자신이 우연히 소유한 절대적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혹은 나귀 가죽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더군다나 세 번째의 욕망은 이미 이루어진 상태였다. 이렇듯 그가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자의에 의해서 욕망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이 발자크가 보여주는 욕망의 성격이 아닐까? 다시 말하자면 욕망이란 텅 빈 기호라는 것, 대상이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라파엘의 욕망은 매개가 없는 순수한 욕망이었기에 그에게 나귀 가죽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불가능한 욕망을 욕망했기에 욕망을 하지 못하는, 욕망의 불가능함을 낳았다. 이것으로 발자크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한 남자의 죽음을 통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페드라와 폴린, 디스토피아와 파라다이스를 사유하며>

 

 소설 나귀가죽에서 2장은 페드라에 대한 묘사와 그런 페드라를 사랑하는 라파엘의 줄다리기로 채워진다. 라파엘은 페드라가 보여주는 매력, 그리고 사교계에서의 영향력, 남자를 제압하는 기교 등으로 그녀에게 빠져든다. 그러나 그녀의 한 마디 말에 사랑에 빠졌다가 증오 했다가를 반복하며 진자운동을 하는 라파엘의 모습에서 페드라는 과연 누구인가?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페드라는 디스토피아다. 어원적으로 설명하자면, 유토피아를 먼저 볼 필요가 있다. 유 토피아, 즉 유(없는 ou-) 토피아(장소 toppos)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단어인데, 이 단어에는 2가지의 의미가 함축되어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없다는 것과 없기 때문에 가질 수 없는 실현 불가능성. 그렇다면 유토피아의 역은 유토피아의 부정, 즉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가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이런 차원에서 페드라를 살펴보자면 그녀는 분명 존재한다. 더구나 그녀는 도처에 존재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가질 수 없다. 라파엘도, 라스티냐크도, 수많은 남자들도 그녀를 원했지만 그녀는 아무도 가질 수 없는 유령과 같이 존재한다. 보이지만 없는 것, 만질 수 있지만 가질 수 없는 것이 페드라의 상징이라면 그녀는 있지만 다다를 수 없는 어떤 곳을 나타내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절망적인 공간으로서의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지만 절대로 가질 수 없다는 의미에서 디스토피아가 아닐까? (결국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욕망의 문제와 결합되어 더욱 복잡한 논의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폴린을 보자. 그녀는 라파엘의 연인이 된다. 그것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리고 그녀를 만나서 라파엘은 너무나 행복해진다. 이것이 파라다이스다. 존재하지만 가질 수 없는 것, 혹은 가장 이상적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이것들 사이에 존재하지만 가질 수 있는 어떤 것으로서 나타나는 파라다이스는 욕망을 넘어서는 한계 이전에 존재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욕망이라는 것에 한계가 있다면, 그리고 그 한계를 넘어서면 만족할 수 없을 정도로 욕망한다면, 파라다이스는 그 경계에서 욕망을 만족시켜주면서(욕구라는 표현이 더 옳겠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게 하는 문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발자크는 폴린을 라파엘의 파라다이스로 배치함으로써 그에게 폴린을 만나기 전에 행했던 과오를 비판하는 장치로서 사용한다. 이미 완결된 이야기를 재배치하자면 라파엘이 가난함을 견딜 수 있었다면, 그래서 폴린을 사랑할 수 있었다면 그는 죽지도 않았을 것이고 괴로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한계를 넘는 욕망은 그의 신체를 훼손시키고 그의 육체를 파괴했다. 결국 나귀 가죽의 가장 큰 테마, 가죽은 욕망할 때마다 줄어든다는 것, 그리고 욕망은 늘어나야 하지만 줄어드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리고 그 관계를 라파엘, 페드라, 폴린을 통해 구체화시킴으로써 욕망의 반어법을 설명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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