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2disc)
이창동 감독, 윤정희 출연 / UEK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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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시인이 사과를 꺼낸다. 일부러 준비해왔단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가 언제 사과를 본 적이 있냐고. 사과의 그림자도 관찰하고, 이리저리 만져도 보고, 한 입 베어 물어도 보고. 그렇다. 우리는 사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난 한 번도 사물을 그렇게 관찰한 적이 없다. 그저 그렇게 있다고 믿을 뿐. 사물들은 존재론적으로 확실하고 인식론적으로 모호하다. 우리는 그것들을 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순전히 우리들의 오해인 것이다. 확장시켜보자. 안다는 것은 어쩌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소통(서로 안다고 가정하고 상호 교류하는 것)이란 근본적으로 오해를 기초로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시인이 다시 말한다. 무엇이든 진짜로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고. 그 이후에 시가 쓰이는 것이라고.

 

소통이라는 이름의 오해

 영화는 집요하게 소통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마치 세상을 안다고 가정된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예컨대 아네스와 5명의 중학생들이 그렇고, 양미자 할머니와 학부모들이 그렇고, 양미자와 그녀의 딸이 그렇고 양미자와 종욱이가 그렇다. 그들은 주고, 받는다. 그렇지만 주고받지 않는다. 그들의 대화는 교류하지 않는다.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서로 소통이 가능하다는 자기기만으로 애써 무시해버린다. 그들의 행동, 말이 전달 될 때 그것들을 가로막는 것은 '폭력(아네스/중학생들, 양미자/학부모들) 혹은 '사랑(양미자/딸, 양미자/종욱)이라는 이름의 벽이다. 처음에 나는 집요하게 시를 쓰려는 양미자 할머니의 시도는 마치 현실의 도피로 보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도피할 현실이 있는가? 역으로 그녀는 현실은 가상이고 시를 쓰려는 시도가 현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려는 것이라고 믿는 것 아닐까?

 

시를 쓰는 양미자의 방법

 시를 너무나 쓰고 싶은 양미자 할머니는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돌아다닌다. 그녀는 꽃을 보고 꽃말을 찾고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빛을 보고 땅에 떨어진 열매를 본다. 그녀는 그것들을 관찰하고 만져보고 느끼려한다. 그리고 글을 써본다. 이상하게 글들, 시구들은 써지지만 시가 써지지 않는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세상은 가혹하다. 시를 쓰려고 마음을 먹은 순간, 그녀에게서 낱말을 빼앗아 간다. 옥타비오 파스는 주저 활과 리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말은 인간 자신이다. 우리는 말로 이루어져 있다. 말은 우리의 유일한 실재이거나 혹은 적어도 우리의 실재를 표현하는 유일한 증거이다." 그녀에게 말을 잃는다는 것은 '앞으로 말을 못한다.'라는 일차원적인 문제가 아니고 그녀의 실존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반면 세상은 공정하다. 그녀에게 말을 빼앗아 간 후 그것을 슬퍼할 시간도 주지 않고 시를 쓰는 다른 방법을 알려준다.

"시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찾는 거잖아요. 그런데 만날 저런 와이당이나 하고. 꼭 시를 모독하는 것 같아요."

 그녀는 시를 아름다움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그녀는 '시의 그림자도 관찰하고, 이리저리 만져도 보고, 한 입 베어 물어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이것들을 하기 전에는 시 = 아름다움이라는 하나의 공식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 잡아 있을 뿐이다. 그녀는 이제 시를 쓰기 위해 만지고 관찰하고 먹어봐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아니 그런 자연스러운 순간이 찾아온다.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 창조 이전의 세계가."

 

법과 합의

 한 소녀가 죽었다. 그녀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이 침묵한다. 그들은 '진정성 있는 사죄'를 제외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죽음을 덮으로 현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성공할 것이다. 이제 그들은 죽음을 덮음으로써 그에 따른 의무 역시 '덮어버렸다.' 합의라는 이름의 창은 그들을 안전이라는 성으로 대려가 양심의 가책이라는 불청객을 쫒아낼 것이다. 종욱이는 낄낄거리며 다시 무한도전을 볼 것이고 세상은 예전처럼 잘 돌아갈 것이다. 양미자 함머니는 아네스의 사진을 본 후에 그것이 잘못됐다고 느끼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는 깨닫는다. 부모들과의 합의는 죽은 아네스에게 어떠한 사과도 하지 못한다고. 그 고통이 그녀에게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이다.

 어쩌면 양미자 할머니는 종욱이에게 시를 쓰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에게 법적 처벌은 합의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이게 토론에서 가장 논쟁이 있었던 부분이었던 같은데요. 그녀가 종욱이를 자발적으로 신고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녀는 종욱이가 법적 처벌을 받는 것에 아무런 감흥이 없었을거라 예상합니다. 왜냐하면 합의와 마찬가지로 그것도 아네스를 뺀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이렇게 사죄는 가장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방법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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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스티븐 달드리 감독, 랄프 파인즈 외 출연 / UEK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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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왜 영화를 보고 이 책이 났을까? 단순히 나치즘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어쩌면 감독이 한나의 캐릭터를 아이히만에서 가져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아이히만인가, 라는 첫 번째 의문과 왜 아이히만인가, 라는 두 번째 의문에 답하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왜 문을 열어주지 않았나'가 아닌 '왜 그녀가 그 시대에 경비원이었나'의 문제

 

 아이히만과 그녀의 유사점은 이 대목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중 한 장면. 판사가 한나에게 묻는다. “사람이 죽을 것을 알았으면서 왜 문을 열어주지 않았죠?” 한나는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듯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저는 경비원이었으니까요.” 이 지점에서 나는 한나와 아이히만이 겹쳐진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들 말고도 수많은 독일인들이 그것이 ‘명령’이기에 수행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악을 ‘평범성’으로 규정한 후, 그의 악행은 그가 남들보다 사악하지도, 비윤리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가 무고한 유태인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죽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남들보다 조금 ‘천박하거’나 ‘사유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사유의 불가능성, 이것이 그들의 문제이다. 한나가 문 앞에 서 있을 때에 그 문 뒤에는 600명의 유태인이 불에 타 죽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러한 상황은 윤리적으로 선택해야할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명령 체계에 복종하는 것의 문제, 이것이 본질이다.

 

reader와 leader의 사이에서

 

 그렇다면 그녀는 그렇게 되었을까? 그곳에 그녀와 함께 있었던 다른 가해자들을 보자. 그들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행위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과 한나의 차이는 분명하다. 우리는 그들(한나를 포함해서)을 손가락질 할 수 있다. 당신들은 비윤리적이라고, 사람이 못 할 짓을 저질렀다고. 그러나 대답은 다를 것이다. 한나는 나는 나의 할 일을 했다, 라고 대답할 것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한나가 시켰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차이는 단순히 솔직함과 비겁함의 차이가 아니라 혹은 멍청함과 순응력의 차이가 아니라 ‘사유’ 자체의 문제이다.

 

 영화상에서 가장 극명하게 두 그룹 간에 드러나는 차이는 한나가 글을 못 읽는 문맹이라는 것이다. 문맹의 상징은 일방적인 소통의 상징, 즉 주고, 그것을 받는 알레고리로 설명된다. 한나는 절대 교류하지 못한다. 다만 받을 수 있고,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꼭 그와 같은 방식으로만 가능하지 그것이 절대로 다른 것으로는 대체될 수 없다. 예컨대 그녀는 글을 읽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글을 읽어줄 것이다. 이것이 한나의 기능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그 누군가가(reader) 그녀에게 전쟁과 평화를 읽어주면 그녀는 그것을 듣고 울 것이다. 나무위의 남작을 읽어주면 그녀는 웃을 것이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어주면 역겨워할 것이다. 그녀는 전달자가 전달해주는 방식으로만 그것을 이해한다. 비판이 없고 비난 또한 없다. 그저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그녀에게 reader는 그녀의 사유에 있어 leader가 되어 버린다. 이제 그녀에게 왜 문을 열어주지 않았느냐는 물음은 의미가 없다. 그녀에게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그 시대에, 당신은 경비원이 되었느냐고. 혹은 질문 받는 자를 대체해야 한다. 그녀에게 명령을 내린 주체, 혹은 그보다 위에 있는 주체에게.

 

카타르시스는 극장에서

 

 그녀의 죄는 단지 시대를 잘못 타고 났다는 이유, 윤리적 판단을 할 수 없는 멍청이라는 이유로 증발되어야 하는 것일까? 어찌되었든 그들이 한 행동으로 피해자가 발생했다. 그 피해자들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삶의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에 유태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거시적인 것이야 어찌되었든 미시적으로 보자면 분명 피해자가 있고 그것을 가해한 자가 있는데 그들의 죄가 어떻게 -법적이든, 윤리적이든(후자가 더욱 중요하겠지만) - 용서받을 수 있을까? 감독은 한나와 유태인 사이에 마이클을 위치시킴으로써 그들 사이의 인류애적 화해를 만들어내는 이끌어내는 역할을 그에게 주는 것처럼 영화를 만든다. 깜빡하면 속을 뻔 했다. 한나가 자살하고 마이클이 한나의 유품을 가지고 생존자에게 가는 장면에서 나는 마이클이 어쩌면 한나의 죄를 용서받으려고 가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그녀의 죄가 단지 ‘실수’였다고 생존자에게 선처를 부탁하러 가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영화 내에서도 마이클의 행동을 ‘마치’ 그런 것처럼 보인다. 생존자 앞에서 마이클이 사랑이라는 감정에 취해 그녀를 변호할 때, 생존자는 말한다. 카타르시스를 느끼려면 극장으로 가라고. 이것이다. 마이클은 그녀를 용서할 수 있다. 왜냐면 사랑이란 이름의 폭력으로 그녀가 그의 삶을 망가뜨렸더라도 그에겐 그녀에 대한 추억, 향수, 애틋함이 남아있기에. 그렇지만 유태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인가? 고통, 참혹함, 등등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가 카타르시스는 극장에서, 라고 말 할 때 마이클의 화해의 제스처는 오만이 되어버린다. 그는 그만한 고통을 겪지 못했기 때문에. 법에 의해 판단되는 종류의 고통, 수치화 되는 고통, 남에게 이해되는 고통이 아니라 실존 그대로의 고통, 절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고통이 그들에게 있기에, 그녀는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겪은 일은 영화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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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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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쉘 우엘백은 이 소설을 통해 하나의 유토피아를 건설했다. 우엘백이 만들어난 유토피아는 너무나 현대적이어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삶에서도 그것을 받아 들일 수 있다. 우선 그는 우리가 어떻게 변화했는가(유토피아를 어떻게 필요로 하는가)에 대해 분석한 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한 후에 하나의 유토피아를 건설하였다.

 

 '과학적'이라는 말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형이상학적 돌연변이'가 발생하기 이전에 우리는 과학을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도 하나의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에 지나지 않았고 과학이 낳은 합리주의와 개인주의는 우리가 유토피아를 더욱 더 절실히 필요하게 만든 요인일 뿐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왜냐면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필요에 의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한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는 인간의 최초의 역사부터 지금까지 3번에 걸쳐 일어난다. 처음으로 일어난 것은 중세의 기독교 사싱이다. 중세에 종교가 부흥하자 로마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멸항했고 그 이후에 그들은 '신'이라는 개념을 그들의 삶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 후부터 그들은 신에게 요구하고 구하는 동시에 절제받고 억압받는 삶은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기쁨을 느꼈다. 그들에게 자유는 '마음대로 할 권리'가 아닌 '신이 정해주신 대로 살 권리'였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고 기독교 사상 역시 고전적인 것이 되기 마련이다. 종교는 너무나 많은 개인들에게 필요 이상의 것을 요구했고 그것에 불만을 가진 개인들이 집단을 이루기 시작했다. 단순화 해서 말하자면 그것이 과학화다.

 종교를 로마의 선례에 따르게 한 것은 과학이었다. 과학은 설명하지 못했던 많은 것을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우리가 믿는 것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우리를 설득시킬 수 있는 힘도 뒤따랐다. 종교의 억압에 힘들어하는 자와 과학이 결합되어 개인주의가 나왔고 더 이상의 신비를 믿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들만 믿는 자들이 과학과 결합되어 합리주의를 낳았다. 그들은 자신의 '개인적 삶을 유지 시켜주는 것은 돈, 저택, 교육 등등의 현실적인 것들이라고 믿었다. 여기서 유물론이 다시 발견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정답'으로 여겨졌다. 이제 우리를 억압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고 우리는 우리의 의지에 따라, 혹은 능력에 따라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 후에 수 많은 자유를 요구하는 사상, 문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성 억압에서의 해방을 낳은 68운동이었다. 이런 현상들은 '정답'이 아니었다. 우리가 바라던 무제한의 자유는 방종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 왔다. 그 전에 것들이 그랬던것 처럼.

 소립자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2번째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의 현상의 최대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브루노는 이 책의 등장인물이다. 그는 청소년기에 자유에 의한 피해를 심하게 겪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혼한 부모를 가진 자식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굉장히 소심한 아이로 자란다. 그는 동년배의 친구들에게 모욕과 구타를 당하며 청소년기를 지낸다. 그들에게 맞는 다는 이유보다 성기가 더 작다는 이유로 수치심을 느낀 브루노는 장년이 되어서도 항상 성기에 콤플렉스는 가지고 있다. 콤플렉스는 반발성을 낳게 되고 사회적 흐름에 따라(68운동) 그는 항상 성적 욕망을 풀 대상을 욕망하며 살아간다. 또한 나이가 들 수록 작은 성기 뿐 아니라 늙어가는 몸 마저도 그에게 불행의 원인이 되고, 아이러니 하게도 그렇기에 그가 원하는 여자는 20대의 젊은 소녀들이다. 그의 삶과 시대에서 젊은이란 중요한 가치다. 젊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평등하지만 반면에 누구나 쉽게 잃어버리기에 또 한번 평등함을 낳는다. 평등함이란 자신이 유리한 곳에 있을 때는 그것이 가장 좋지만 불리한 곳에 있을 때는 가장 증오스러운 것이 된다. 부르노는 불평등한 불평등함을 꿈꾸며 젊음을 불멸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것이 성적 욕망과  관계가 있음은 물론이고 사실 상 모든 사회 현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 속에서 우리가 하나의 귀속된 존재였을 때 우리는 그 사회의 구성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주체가 개인으로 바뀐 후엔 우리는 '필요'에 의해 사회적인 관게를 형성한다. 젊음이란 사회적 관게를 맺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되고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가치를 얻게된다. 브루노는 이미 누구에게도 소용이 없어졌지만 자신의 욕망은 더욱 더 커지는 것을 느끼며 불행해진다. 그러나 부르노는 크리스티안을 만나게 됨으로 인해 불행에서 탈피하고 행복해진다. 그녀는 그의 결점을 감싸줄 수 있었고 실제로 그들은 '사랑'을 함으로 인해 행복을 겪게 된다. 하지만 브루노의 말대로 사랑은 작은 위안이 되지만 희망이 될 수 없었다. 성관계를 너무나 많이 가진 크리스티안은 죽어버리고 그녀의 죽음 앞에 브루노는 무너져버리고 만다.

 또 다른 주인공 미쉘은 브루노와 반대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새로운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도 역시 정상적인 삶을 살지는 못한다. 왜냐면 그는 욕망이 제거됬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받아 들였기 때문에 아예 욕망이라는 감각이 제거되어 버린다. 과학자라고 하는 직업을 하나의 사명으로 삼고 있던 그는 이나벨에 의해 새로운 흐름을 만들 생각을 하게 된다. 이나벨의 죽음으로 인해 미쉘은 젊음을 잃지 않는 세상을 과학적으로 제현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미쉘 우엘백은 새로운 유토피아를 제시한다. 우리가 이렇듯 욕망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은 우리가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무한하게 바꾸자. 이것은 유전자의 조작으로 인해 현실이 되어 제 2의 인류가 탄생하게 된다. 우리는 역사에 의해 반성할 줄 알며 발전할 수 있는 동물이기에 우리를 희생하며 새로운 우리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은 소설이라는 것이고 유토피아의 어원은 '존재할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에 의해 반성할 줄 알며 발전할 수 있다. 이 책은 현실을 역사처럼 만들었다. 개인을 통해 전체의 문제를 설파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하며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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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영광 열린책들 세계문학 146
그레이엄 그린 지음, 김연수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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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론자와 유물론자의 정의>

  역사적으로 인간의 모든 행동은 믿음에 기초한다. 그것은 신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념의 기초한 행동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하다. 여기 두 명의 인물이 있다. 사제와 경위. 둘 다 자신의 신념을 시행하기 위한 권력이 있다. 하지만 경위에 의해 사제의 신념은 제한을 받는다. 왜냐하면 경위는 사제의 신념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위는 그런 의미에서 유물론자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신과 싸울 수도 있고(왜냐하면 신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을 인질로 잡을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죽일 수도 있다. 그가 보기엔 신이 ㅏ난한 자들을 ㅜ이해 해준 것이 아무 것도 없기에.

 반면에 사제는 다른 방법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로한다. 사제가 말하길, '구원'은 죄의 사함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는 사제이기에 고해 성사를 통해 신도들을 구원해 줄 수 있다. 물론 돈을 받는다. 그에네는 돈보다 구원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 둘은 가난한 자를 위해 희생하면서까지 도움을 주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방법이 다르기에 대치 할 수 밖에 없다. 이 대치점에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차페크의 말처럼 투쟁은 고상한 진실과 사악하고 이기적인 잘못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진실에 그에 못지 않는 진실이 대립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배경이 멕시코라는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 또는 햄릿의 덴마크, 멕시코>

 그레이엄 그린이 묘사하는 멕시코의 모습은 이미 신이 사라진 도시와 같은 모습니다. 죽음으로 상징되는 독수리는 호시탐탐 죽어가는 사람들을 노린다. 그것에서는 수 많은 사람들이 고해 성사를 한다. 그만큼 죄가 많은 곳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멕시코를 떠나고 싶어한다. 치과 의사 텐지 씨가 멕시코에 남아있는 이뉴는 단지 이곳에 투자를 했는데 그만큼에 이익을 남기지 못해서이다. 그리고 수많은 사제들이 멕시코를 떠났다. 멕시코의 정권이 신을 거부했기에. 남은 사제는 단 두명. 호세와 위스키 사제 뿐이다. 그들은 멕시코에 남아 절망을 경험한다. 살아남기 위해 결혼한 사제인 호세는 신을 배교함으로서 아이들에게 까지 조롱받는 인물이다. 자신의 자만심으로 멕시코에 남은 위스키 사제는 유수같이 지나간 시간 속에서 범죄의 손짓에 순식간에 휘말리게 된다. 멕시코는 모든 사람들이 그림자를 바라보며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플라톤의 동굴 처럼, 혹은 자살 아니면 고통 속에 살아야하는 삶을 선택해야 하는 햄릿의 덴마크처럼 보인다. 사제는 덴마크에서 고뇌하는 햄릿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자와 배교자의 사이>

 젊은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을 때, 사제는 야심만만한 사내였다. 그는 또한 자만하기까지 했다. 제대회에서 평신도가 주도권을 많이 가지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는 말을 알았고, 그것을 지키면서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고 권의적으로 피력할 수 있는 사내였다. 먹시코의 정권이 바뀌고 교회를 탄압하자 그늬 위치도 바뀌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 존경받는 사제가 아니라 경찰과 붉은 셔츠단을 피해 도망가야하는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다. 그는 그곳에서 방황한다. 방황은 그의 신앙을 약하게 한다. 육욕의 유혹에 빠지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기도 한다. 그는 죄인이 된 것이다. 경찰은 그를 잡기 위해 마을에 인질을 잦는다. 이제 그는 이방인이 된다. 그에게 갈 곳은 없다., 그는 긿을 잃어버린 자가 된다. 또한 신앙까지. 그는 말한다. 기쁨은 언제나 고통 위에 서 있다고. 우리는 굶주림 후에 마침내 얼마나 음식을 누릴 수 있는 지 알게 된다고. 하지만 그것은 설교일 뿐 진실은 이것이다. 우리에게는 고통이 추하게 느껴진다는 것. 왜냐면 우리는 성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절대로 성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죄를 지어서가 아니다. 육욕이 사랑으로 바뀌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죄의 결과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고해 성사를 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고해 성사를 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처형이 있기 전날에 마지막 회개가 찾아온다. 자신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빈손으로 하나님께 가야 한다는 사실이 좌절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성인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믿음, 그 선택의 기로에서>

 기독교에는 사효적 효력과 인효적 효력이 존재한다. 사효적 효력이란 범죄자가 해준 세례라도 정확한 규칙만 지킨다면 그 세례는 유효하다는 것, 반대로 성자가 해준 세례라도 규칙이 어긋난다면 그 세례는 무효라는 것이다. 인효적 효력은 사효적 효력의 반대되는 의미이다. 중요한 것은 교회는 인효적 효력을 부정하고 사효적 효력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호세에게 장례 미사를 부탁하는 것과 위스키 사제에게 고해 성사를 하는 것은 교회가 사효적 효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라면 우리의 구원 - 죄의 사함이 - 범죄자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도 있는 것이다.

 위스키 사제가 경계를 넘어 마을로 갔을 때 그는 옛날 자만했던 사제로 다시 돌아간다. 그리고 그는 라스카사스로 가기 위한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해 성사의 값을 흥정한다. 그기 적당한 자금을 가지고 마을을 떠나려는 순간에 혼혈인이 나타나서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이 지점에서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사효적 효력의 영향 아래서의 신앙 생활과 인효적 효력으로의 신앙 생활. 또는 덴마크 왕자의 선택 - '덴마크 왕자는 자살해야 할 지 그러지 말아야 할 지 궁금했다. 부왕의 모든 의심을 안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게 옳은 것인지, 아니면 일거에 -'. 사제는 혼혈인을 따라가는 것이 자살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다. 혼혈인은 유타이므로. 하지만 그 길이 자신의 죄를 마주하는 길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이것은 햄릿에 죽음, 자긍심의 죽음이다. 반면에 사제가 라스카사스로 간다면 그것은 자신의 죄에서 회피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햄릿의 삶, 즉 수치의 삶이다. 그는 이 갈림길에서 고귀한 죽음, 사효적 효력의 부정, 성인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이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믿음이고, 텐치 씨의 말처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도' 기도해 줄 수 있는 믿음이고, 자신의 죄를 사랑한다고 인정할 수 있는, 그래서 지옥으로 갈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다.

 우리는 그의 선택을 영웅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이 선택은 이미 초반두터 암시되어 있는 것이었다. 한 아이의 어머니가 죽어갈 때 그는 이미 떠나는 것보다 아이의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선택했으니까. 바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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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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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다보면 인생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인생의 스승이 있다. 유명한 일례로 영화감독 팀 버튼에게는 에드 우드가 있었다. 헐리우드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당대 최고의 상상력을 가진 감독에게, 실패한 영화를 만들고 실패한 인생을 살아간 에드우드가 인생의 스승이라니. 카잔차키스도 마찬가지다. 조르바의 표현대로 젊겠다, 돈이 있겠다, 건강하겠다, 사람 좋은 가잔차키스의 스승이 늙고 가난한 노동자 조르바라니. 그 연유가 궁금하여 팀버튼의 영화 '에드 우드'를 보니 다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카잔차키스는 어떤 점에서 조르바를 위해 책을 쓰면서도 '조르바라는 위대한 자유인을 위해서 겨우 책 한권을 썼다'라고 표현했을까?

 

지문과 경험에 차이에서의 깨달음

 조르바를 만나기 전 카잔차키스는 친구에게 책벌레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는 그 친구의 말에 항변하기 위해 행동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크레타로 떠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노동을 하려고 계획한다. 그리고 그 여행 중간에 만난 조르바를 대리고 간다. 그가 처음으로 본 조르바는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이자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다. 작가의 인생이 책의 지문으로 정의 된 인생이었다면 조르바의 인생은 행동으로, 경험으로 정의된 인성인 것이다. 작가는 인생을 삶과 경험을 통해 겪이 위해 그에 적합한 인생을 산 조르바와 동승한다.

 일을 시작한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통해 배워가며 발전한다. 한 예를 보자. 작가는 젊은 나이에 많이 배워 똑똑한 사람이다. 그는 탄광 사업을 통해 하나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편의를 봐주고 좀 더 그들에게 다가가는 인정 많고 훌륭한 자본가가 되려한다. 그 순간에 조르바가 그를 말린다. 조르바는 작가에게 말한다. 인간은 짐승이라고. 사납게 대하면 존경하고 친절하게 대하면 눈이라도 뽑아갈 것이라고. 또한  작가가 노동자들에게 비참한 삶에 대해 계몽을 하려는 순간에 조르바가 다시 한번 나선다. "사람들을 좀 그대로 나둬요. 그 사람들 눈 뜨게 해주려고 하지 말하야. 혹 눈을 떴다고 치면 당신은 지금의 암흑 세계보다 더 나은 세계를 보여줄 수 있어요?" 조르바는 현미경을 통해 물 속의 기생충을 보는 것 보다 현미경을 부수고 물을 먹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것을 몸으로 아는 사람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계몽의 불필요성을 삶으로 증명하는 자인 것이다.

 작가는 조르바에 대해 말한다. 조르바는 뱀과 같이 대지의 비밀을 배로, 꼬리로, 머리로 느끼는 자라고. 그리고 교육받은 우리는 공중에 나는 새처럼 골이 빈 것이라고.

 

쾌락의 자유

 조르바를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여자다. 그는 여자 앞에서 꼼짝하지 못한다. 여자를 꼬시고 같이 자는 것이 인생이라고 표현하는 그는 자신의 말처럼 그 자유를 여과 없이 누린다. 그의 사랑에는 구속이 없다. 어떤 여자를 만나고 있어도 더 좋은 여자를 만나면 그 여자에게 몸을 내주고 자신이 만나는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가도 그저 슬퍼할 뿐 구속하지 않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여자는 과부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천성적으로 성자이다.(물론 자신의 표현이지만). 과부는 항상 남자를 원하며 그는 저 위대한 신 제우스처럼 과부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르바는 자신의 쾌락을 누리는 데에 있어서 인간이 만들어낸 도덕이나 관습, 더 나아가 신의 계명조차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인 것이다. 게다가 그는 마을의 과부와 서로 눈이 맞았으면서도 자지 않는 카잔차키스에게 그건 죄라고까지 말한다. 부끄러움과 관습에, 도덕에 의해 과부와 동친하지 않았던 작가는 어느날 우연히 과부의 집에 가 과부와 동침을 하고는 조르바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만다. 이렇듯 조르바는 쾌락의 자유를 누리는 데에 있어 카잔차키스의 선구자 역할을 한다. 육체가 영혼의 감옥이라는 플라톤적 생각에서 육체 또한 영혼이라고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선 긋기

 작가가 외치던 <국가>와 <인간>의 개념은 또 한번 조르바에 의해 수정된다. 그것을 초월하는 <초국가>와 <인간성>의 인생을 사는 조르바가 작가 카잔차키스에게 하나의 교훈을 준 것이다. 그는 작가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쓰여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조르바의 말을 증명할 수 있는 사건이 마을에서 발생한다. 두 번의 죽음이 마을을 덮친 것이다. 첫 번째 죽음은 파블리의 자살로 마을 전체가 자살의 원인이 된 과부를 증오한다. 그리고 죄악인 것을 알면서도 과부를 살해할 정도로 파블리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아쉬워한다. 하지만 외국인 오르탕스의 죽음에서 이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죽기 전에 곡을 하기도 하고 무엇을 훔칠까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비극적 죽음을 옆에서 바라보면서 낄낄거리는 크레타인을 보며, 작가는 이들이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학 된다. 같은 국가, 다른 국가라는 마음의 선이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태도 마저 차별화 시킬 수 있음을 조르바는 진작에 파악한 것이다.

 

실패자의 성공

 조르바가 마지막으로 카잔차키스에게 일려준 것은 해방감이었다. 그들은 일획천금을 꿈꾸며 사업이 성공하길 빈다. 그들을 성공의 갈망으로 괴롭히던 사업의 승패가 마침내 판단의 기로에 섰을 때 그들은 실패를 경험한다. 즉, 빈털털이가 된 것이다. 작가와 조르바는 그곳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큰 자유는 느낀다. 그들은 실패를 통해서 영혼의 문에 자물쇠를 하나 더 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을 막기 위한 문에. 그로 인해 그들은 외부적으로 참패하면서도 정복자가 되었고 그것은 지고의 행복으로 바뀐다.

 

 작가는 조르바를 통해 야만의 세계를 확인하고 자유를 느낀다. 그는 위대한 사상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진정한 행복은 맑은 공기, 태양, 바다, 빵, 사랑과 같은 단순하고 영원한 것에 있다는 것을 터득한 것이다.

 이제 나에게 조르바는 단순히 늙고 가난한 노동자가 아니다. 자유를 아는 제대로 된 '인간'이자 언어, 예술, 순수성을 사랑하고 열정이 있는 자, 진리를 발견한 자가 된 것이다. 이런 그에게 작가가 말한 것처럼 책 한권은 '겨우'가 아닐까? 그를 위한 경배는 당연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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