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스티븐 달드리 감독, 랄프 파인즈 외 출연 / UEK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왜 영화를 보고 이 책이 났을까? 단순히 나치즘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어쩌면 감독이 한나의 캐릭터를 아이히만에서 가져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아이히만인가, 라는 첫 번째 의문과 왜 아이히만인가, 라는 두 번째 의문에 답하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왜 문을 열어주지 않았나'가 아닌 '왜 그녀가 그 시대에 경비원이었나'의 문제

 

 아이히만과 그녀의 유사점은 이 대목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중 한 장면. 판사가 한나에게 묻는다. “사람이 죽을 것을 알았으면서 왜 문을 열어주지 않았죠?” 한나는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듯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저는 경비원이었으니까요.” 이 지점에서 나는 한나와 아이히만이 겹쳐진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들 말고도 수많은 독일인들이 그것이 ‘명령’이기에 수행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악을 ‘평범성’으로 규정한 후, 그의 악행은 그가 남들보다 사악하지도, 비윤리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가 무고한 유태인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죽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남들보다 조금 ‘천박하거’나 ‘사유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사유의 불가능성, 이것이 그들의 문제이다. 한나가 문 앞에 서 있을 때에 그 문 뒤에는 600명의 유태인이 불에 타 죽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러한 상황은 윤리적으로 선택해야할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명령 체계에 복종하는 것의 문제, 이것이 본질이다.

 

reader와 leader의 사이에서

 

 그렇다면 그녀는 그렇게 되었을까? 그곳에 그녀와 함께 있었던 다른 가해자들을 보자. 그들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행위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과 한나의 차이는 분명하다. 우리는 그들(한나를 포함해서)을 손가락질 할 수 있다. 당신들은 비윤리적이라고, 사람이 못 할 짓을 저질렀다고. 그러나 대답은 다를 것이다. 한나는 나는 나의 할 일을 했다, 라고 대답할 것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한나가 시켰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차이는 단순히 솔직함과 비겁함의 차이가 아니라 혹은 멍청함과 순응력의 차이가 아니라 ‘사유’ 자체의 문제이다.

 

 영화상에서 가장 극명하게 두 그룹 간에 드러나는 차이는 한나가 글을 못 읽는 문맹이라는 것이다. 문맹의 상징은 일방적인 소통의 상징, 즉 주고, 그것을 받는 알레고리로 설명된다. 한나는 절대 교류하지 못한다. 다만 받을 수 있고,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꼭 그와 같은 방식으로만 가능하지 그것이 절대로 다른 것으로는 대체될 수 없다. 예컨대 그녀는 글을 읽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글을 읽어줄 것이다. 이것이 한나의 기능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그 누군가가(reader) 그녀에게 전쟁과 평화를 읽어주면 그녀는 그것을 듣고 울 것이다. 나무위의 남작을 읽어주면 그녀는 웃을 것이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어주면 역겨워할 것이다. 그녀는 전달자가 전달해주는 방식으로만 그것을 이해한다. 비판이 없고 비난 또한 없다. 그저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그녀에게 reader는 그녀의 사유에 있어 leader가 되어 버린다. 이제 그녀에게 왜 문을 열어주지 않았느냐는 물음은 의미가 없다. 그녀에게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그 시대에, 당신은 경비원이 되었느냐고. 혹은 질문 받는 자를 대체해야 한다. 그녀에게 명령을 내린 주체, 혹은 그보다 위에 있는 주체에게.

 

카타르시스는 극장에서

 

 그녀의 죄는 단지 시대를 잘못 타고 났다는 이유, 윤리적 판단을 할 수 없는 멍청이라는 이유로 증발되어야 하는 것일까? 어찌되었든 그들이 한 행동으로 피해자가 발생했다. 그 피해자들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삶의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에 유태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거시적인 것이야 어찌되었든 미시적으로 보자면 분명 피해자가 있고 그것을 가해한 자가 있는데 그들의 죄가 어떻게 -법적이든, 윤리적이든(후자가 더욱 중요하겠지만) - 용서받을 수 있을까? 감독은 한나와 유태인 사이에 마이클을 위치시킴으로써 그들 사이의 인류애적 화해를 만들어내는 이끌어내는 역할을 그에게 주는 것처럼 영화를 만든다. 깜빡하면 속을 뻔 했다. 한나가 자살하고 마이클이 한나의 유품을 가지고 생존자에게 가는 장면에서 나는 마이클이 어쩌면 한나의 죄를 용서받으려고 가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그녀의 죄가 단지 ‘실수’였다고 생존자에게 선처를 부탁하러 가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영화 내에서도 마이클의 행동을 ‘마치’ 그런 것처럼 보인다. 생존자 앞에서 마이클이 사랑이라는 감정에 취해 그녀를 변호할 때, 생존자는 말한다. 카타르시스를 느끼려면 극장으로 가라고. 이것이다. 마이클은 그녀를 용서할 수 있다. 왜냐면 사랑이란 이름의 폭력으로 그녀가 그의 삶을 망가뜨렸더라도 그에겐 그녀에 대한 추억, 향수, 애틋함이 남아있기에. 그렇지만 유태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인가? 고통, 참혹함, 등등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가 카타르시스는 극장에서, 라고 말 할 때 마이클의 화해의 제스처는 오만이 되어버린다. 그는 그만한 고통을 겪지 못했기 때문에. 법에 의해 판단되는 종류의 고통, 수치화 되는 고통, 남에게 이해되는 고통이 아니라 실존 그대로의 고통, 절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고통이 그들에게 있기에, 그녀는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겪은 일은 영화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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