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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나
바스티앙 비베스 지음, 임순정 옮김 / 미메시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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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땀- 여섯 살 소년의 인생 스케치
데이비드 스몰 지음, 이예원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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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 것인가 - 하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 지음, 서정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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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예찬
에라스무스 지음, 김남우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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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온 사나이
벨라 타르 감독, 틸다 스윈튼 외 출연 / 무비플렉스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지루했다. 엄청나게 지루했다. 문득 시계를 보니 2시간이 지나가있었다. 벌써? 

영화에서는 대사가 나오고 있었다. "제가 어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대충 이런 대사였던 것 같다. 어제라고? 아직도? 


 로베르 브레송에 대한 강의에서 김성욱 프로그래머님이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브레송은 리얼리즘의 재현을 거부했다. 그는 영화가 단지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파편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현실을 재구성하려고 했던 것 같다. (정확하게 이런 말을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에는 이런 식으로 들렸다.) 벨라 타르는 브레송과 정반대의 지점에서 리얼리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현실의 재현" 이라는 기준이 있다면 그것을 파편화하는 방법이 있는 반면(브레송) 그 재현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가 우리의 행동 - 집을 나서서 목적지에 가는 행위, 술을 마시는 것, 시선 등 보통 영화에서 생략하는 것 - 을 해부학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방법(벨라 타르)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의 영화는 런닝 타임이 150분이나 될 이유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150분이다. 보통 영화에서 어떤 사건을 보여주는 것에 중점을 맞추는 것에 반해 이 영화는 사건의 시작부터 사건 이후의 시간까지 모든 시간을 다 보여준다. 불필요하다, 라고 관객이 느낄 때까지. 


 초반에 목격 스퀀스를 보면 알 수 있다. 영화사에서 어느 감독도 벨라 타르처럼 그 장면을 찍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한 컷으로 스퀀스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어느정도 지루함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그 지루함을 정확히 일상적인 것임을 말해주는 피사체도 함께 보여준다. 우리는 영화를 우리의 삶과는 멀리 떨어져있는 '주인공의 삶'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극장에 간다. 그곳에서는 기쁨도, 슬픔의 극복도, 쾌감도 발생하지만 살인도, 강간도, 신성 모독도, 죽음도 발생한다. 그것들은 우리의 삶이 아니기 때문에 가치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도로에 죽어있는 비둘기의 시체를 불쾌하다고 생각하지만 프레임 안에 있는 사람의 시체는 불쾌함보다는 (영화에 따라) 쾌락, 고통, 슬픔의 감정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나 벨라 타르의 영화에서는 '특별한 사건'들보다는 '일상적인 반복'이 주를 이룬다. 이 영화를 보고 지루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것뿐이다. 목적없는 목격. 누구도 아무 이유없이 타인을 관찰하지 않는다. 사랑, 증오, 관심이라는 감정적인 렌즈를 통해서만 우리는 '재미있게' 어떤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벨라 타르의 영화는 영화의 목적 자체를 전복시킨 것을 수도 있다. 


 언젠가 벨라 타르의 영화(토리노의 말)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일주일의 반복을 보여주면서 2시간 20분 내내 지루함을 유발하다가 마지막 10분으로 생각지도 못한 충격을 준 영화였는데, 극장을 나오면서 문득 아, 나는 정말 감정을 소모하는 방법을 몰랐구나. 라는. 왜냐면 나는 극장에 갈 때(혹은 책을 볼 때, 친구를 만날 때, 연인을 만날 때, 사람들을 만날 때, 밥을 먹을 때 등등) 항상 즐거움만을 생각하고 행동한다. 고통, 슬픔 등의 부정적인 감정(지루함까지)은 즐거움을 목적으로 했지만 상황이 따라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느끼는 부차적인 감정인 것이다. 그러나 벨라 타르의 영화를 보면 누구나 지루함을 돈 주고 경험할 수 있다. 억울하다고 느끼기 전에, 먼저 반성할 것. 나는 왜 즐거움'만을' 위해 영화를 보고 있는가? 말도 안되지만, 어쩌면 즐거움이라는 감정이 어떤 한계가 있어서 계속 그곳에만 물을 주다보면 죽어버리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술 영화라는 것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 영화에는 예술이 없다. 어쩌면 모든 영화가 예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기준도 세우고 싶지 않고 누군가의 기준에 따르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냥 나에게 좋은 영화, 나에게 나쁜 영화만 있을 뿐이다. 어떤 점에서 런던에서 온 사나이는 나에게 좋은 영화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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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7 0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mvbelt 2014-08-17 0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성욱 프로그래머님의 해설은 언제나 좋지요:)
바이바이몽키 저도 보고싶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이미 지나갔더군요 부럽습니다 ㅠ
도발적, 인 수식어를 가진 감독 중 요즘 가장 관심있는 사람은 고다르인데 언제 한번 아트시네마에서 특별전이나 해줬으면 좋겠네요
 

천만 영화의 공식이 깨졌단다. 어느 잡지의 헤드라인이었다. 문제는 천만 관객의 영화가 공식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누구보다 먼저 아니오라고 대답할 영화기자들이 왜 이런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걸었는가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천만 영화라는 신화에 코미디-천만영화라는 새로운 신화를 덧붙인 것뿐이니까. 


그런데 그 기준은 왜 항상 천만이 되어야 하는가, 이다. 어떤 영화가 극장에 걸렸을 때 관객이 많이 들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가장 큰 것은 투자자일 것이다. (물론 감독, 배우, 스텝 등도 같은 바람일 것이지만 그 바람은 질적 차이가 있을거라 믿는다.) 우리는 왜 그들에게 동화되어 천만 영화에 열광하는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관객의 수는 단순히 관객의 수만 나타낼 뿐이다. 그것은 어떤 것의 비유이거나 상징일 수 없다. 천만이라는 숫자는 '많이 보았다'라는 의미 이상의 것을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한 가지 더 '그 영화는 돈을 많이 벌었다'라는 것. 


어떤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고 해서 그 영화가 좋다, 라고 말할 순 없다. 그 호/불은 개인적 취향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어떤 절대적 기준도 없기 때문이다. 관객의 수는 단순한 양화이다. 마치 성적표가 숫자의 평균 분포로 좋은 학생 / 나쁜 학생의 기준을 가르는 것 처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라는 영화도 관객 수에 따라 그 행복이 결정된다면 이보다 더 한 아이러니가 어디있겠는가? 


관객의 수는 관객을 제외한 모든 영화적 환경의 조건을 결정짓는다. 감독은 또 다른 영화를 찍을 수 있고 제작자는 좋은 감식안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될 것이며 배우들이 일자리를 잃을 걱정을 당분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지 관객들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것을 파시즘의 징후라고 보는 것은 억지 중의 억지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를 선택하는 것에 있어 그 영화의 관객수가 절대적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 알고 있겠지만 나라도) 한 번 상기하고 가자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또 관객의 수로 영화를 판단하는 저 위에 계신 배급사/투자사 분들은 그만 좀 하라고, 귓 속에 얘기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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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기로서의 예술? 권리를 획득하는 예술이 모든 것 위에 선다? 선행의 옹호자로서의 예술? 누가 너에게 이런 걸 가르쳤나? 누가 너에게 예술이 선전문구라고 가르쳤지? 누가 너에게 예술은 '민중'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지? 예술은 예술에게 봉사하는 거다. 그렇지 않은 예술은 사람의 관심을 끌 가치조차 없어. 주커맨 군, 진지한 문학작품을 쓰는 동기가 무엇인가? 물가를 통제하는 적을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서? 진지한 작품을 쓰는 동기는 진지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야. 사회에 반역하고 싶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말해주지. 잘 쓰는 것이다. 잃어버린 대의명분을 끌어안고 싶어? 그럼 노동계층을 대신해서 싸우지 마라. 그들은 잘 해나갈거다. 노동자들은 플리머스에서 그들 심장에 들어갈 내용을 가득 채울 거야. 노동자가 우리 모두를 정복할 거다. - 생각없는 값싼 감상이 넘쳐흘러 이 속물 같은 나라의 문화적 운명이 될 거다. 우리는 머지않아 노동자와 농부의 정부보다 더 나쁜 것을 갖게 될 거다. - 농부와 노동자의 문화를 갖게 될 거야. 잃어버린 대의명분을 위해 싸우고 싶나? 그럼 '말(言)'을 위해 싸워라. 과장된 말, 고무시키는 말, 이건 좋고 저건 싫다는 말, 억압 받고 짓밣히는 사람들 편에 선 네가 보다시피 훌륭하고 존경스럽고 인정 많은 인간이라는 것을 광고하는 말이 아니다. 이 땅에 사는 빌어먹을 소수의 지식인에게 너는 말의 편이라고 알려주는 단어를 위해 싸워라! 네가 쓴 이 극본은 쓰레기다. 끔찍하고 짜증난다. 이건 조잡하고 원시적이고 단순하고 선동적인 쓰레기다. 단어들로 세계를 흐리고 있어. 너의 고결함은 저 하늘 높은 곳까지 악취를 풍긴다. 자신이 좋은 사람임을 증명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욕망보다 예술에 더 사악한 효과를 미치는 것도 없다. 관념론의 끔찍한 유혹이지! 무엇보다 너는 네 과념론뿐만 아니라 너의 미덕, 너의 부도덕을 지배할 줄 알아야 한다. 너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드는 모든 것에 대해 심미적인 통솔력을 갖춰라. - 너의 분노, 너의 정치, 너의 슬픔, 너의 사랑! 자리 잡고 설교를 하자면, 그리고 윗사람으로서 너의 관점을 바라본다면 너는 예술가로서 가치도 없고 우스꽝스럽다. 왜 이런 선언문을 썼나? 네가 세상을 둘러보고 '충격'을 먹었기 때문이냐? 세상을 둘러보고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이야? 민중은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자기감정을 둘러댄다. 그들은 즉시 느끼고 싶어 하기 때문에 '충격'이나 '감동'을 주는 일이 가장 쉬운 일이다. 가장 어리석은 일이기도 하지. 주커맨 군,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충격은 항상 가짜'다. 선언문. 선언문에 쓰일 예술은 없다! 그러니 자네의 사랑스런 쓰레기 작품을 들고 이 사무실에서 나가주게."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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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는 거대하다. 그는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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