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성향 커뮤니티 일베의 공격적 혐오성을 시작으로 최근에 일어난 강남역 여성혐오 사건등 이제는오늘날 한국에서 더이상 '혐오'는 낯선 단어가 아니다.
강남역 사건을 많은 언론에선 묻지마 범죄로 명명하지만 개인적으로 묻지마 범죄라는게 실제로 있는지 의문이 든다. 어느 한 특정한 집단(여성)을 노린 사건이기 때문에 무차별적으로 벌인 사건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그런 시선은 동의하고 싶지 않다.
특히 한국을 살면서 우리나라는 유독 다양성이나 차별에대해 의외로(?) 무지한 나라라고 생각이 든다. '혐오'같은 경우도 일베라는 사이트가 활발해지기 전에도 젊은이들이 많이 활동하는 커뮤니티사이트라던지 온라인 게임사이트에서는 간간히 혐오적 발언을 서슴없이 써오던게 인터넷문화 속성상 희화화되고 정치화와 결합되면서 일베라는 사이트가 전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혐오적 발언이 실제 가해자가 희화화된 발언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하나의 놀이로 받아들이고 쉽게쉽게 내밷는 것이다. 내밷는 자신도 큰 죄책감을 받아들이지 못한채 '재밌으라고 하는건데?'나 관심을 끌기위해 더 자극적인 말을 사용하는 점도 인터넷 커뮤니티상에서나 포털사이트의 뉴스댓글에 혐오발언이 별 생각없이 쉽게 나오는 것이다.
며칠전 슬로우 뉴스에서 흥미있는 기사(http://slownews.kr/54921)를 읽게 되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근 최근까지 유행이 되었던 '프로불참러'드립이 있었다. 이'프로불참러' 드립을 탄생시켜준 공신은 단연 방송인 김흥국씨 특유의 맥락도 없는 막무가내식 질문이다. 00 000에 왜 안왔냐? 라는 드립은 기사와 같이 한국에서 유독 많이 반문을 듣게되는 화법이다.
"그땐 왜 가만히 있었어?"
"이 문제는 왜 외면하는데?"
최근 강남역 사건, 신안 집단 성폭행 사건으로 목소리를 높인 여성주의자들에게 여전히 뜬금없는 막무가내식 반문은 들려왔다.
"왜 양성평등을 말하면서 정작 남성들의 역차별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죠?"
"성매매 여성들을 감싸면서 왜 가정을 지키려는 주부는 우습게 보나요?"
비판자들은 여성주의자들이 늘 다른 문제에 대해 간과하거나 침묵하거나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하기 일쑤였다. 해법을 내놓지 못하는 여성주의 자체의 문제라며 나아가 모든 비난이 여성의 문제로 옮겨갔다.
이런 빌어먹을 상황에 책장에서 집어든 책은
일본도 한국 못지않게 차별이나 혐오로 치면 아직 성숙하지못한 국간데 특히 일본 내에 벌어지는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혐오발언을 토대로 혐오에 대한 개념이나 일본의 상황을 엿볼수 있는 책이다.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혐오발언 규제에 반대하는 이들은 차별표현을 할 자유도 보장되어야 하며, 피해자가 불쾌한 표현을 참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혐오발언이 소수자에게 끼치는 해악을 말하고자 한다. 이런 해악을 사회, 즉 주류사회가 소수자에게 참으라고만 할 수 있는 것일까? 혐오발언이 표적으로 삼는 소수자는 노예제도, 신분제도, 식민 지배 등 역사적으로 형성된 차별 구조 속에서 민족적, 인격적 존엄과 정체성에 상처를 입고 고통받는다. 또 몇 세대에 걸쳐 차별당한 체험과 기억을 짊어진 채로 일상생활에서도 불합리하게 차별당한다. 실제로 차별적 속성을 이유로 학살, 배척, 폭행, 차별을 당해온 경험이나 가족과 공동체의 기억이 소수자에 속하는 개개인의 정체성 일부를 형성한다. 또 지금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갖가지 차별을 당하기도 하니, 소수자에 속하는 이들은 싫든 좋든 그 속성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 P87
혐오발언도 이러한 차별 구조의 요소이다. 소수자의 심신에 극히 심각한 해악을 불러일으킨다. 혐오발언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말에 의한 공격이라고만 할 수 없다. 그것은 사회 전체가 가하는 차별의 공포와 폭력의 고통을 되살아나게 하여 후세대에 영향을 준다. 소수자 자신들에게도, 그리고 후세대 아이들에게까지도 평생 되풀이 될지도 모를 절망을 심는다. - P89
혐오발언은 소수자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효과가 있다. 소수자는 자괴감과 무력감 탓에 반론할 말을 잃는다. 뿐만 아니라 소수자가 피해를 호소하고 반론을 제기하면 이로 인해 새로운 공격을 유발하는 표적이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소수자는 피해를 호소하거나 반론하기를 두려워한다. - P95
소수자의 고통은 사회적으로 나타나기 어렵다. 소수자가 발언할 기회가 없다거나 상대적으로 억압되어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수자는 약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피해를 말하는 것을 주저하기도 한다. 설사 소수자가 가능한 한 잊고 싶은 차별의 고통을 떠올리면서 힘들게 호소하더라도, 이런 모습을 보이면 더욱 기세등등해져 공격하는 이들이 있으며, 이들을 추종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소수자가 차별의 고통을 표현하더라도 주류 사회는 소수자의 고통을 깨닫지 못하거나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분별없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소수자는 이런 경험들이 쌓여온 결과, 발언해봤자 상처만 더 커질 뿐이니 참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고 절망을 느낀다. - P97
혐오발언이 초래하는 또 다른 해악은 편견을 확산시켜 고정관념으로 만들고, 편견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하여 결국 차별구조를 강화하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자 고든 월러드 올포트에 따르면 혐오발언은 증오를 사회에 퍼뜨리고 `폭력과 협박을 증대시키는 연속체의 일부`이며 궁극적으로는 제노사이드나 전쟁으로 이끈다. - P98
폭력 행위를 선동하는 절박한 위험성이 있을 경우에만 한정해서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혐오발언 자체의 해악을 경시하는 것이다. 혐오발언 자체가 언행에 의한 폭력이다. 더욱이 소수자의 존엄과 평등권, 협박 없이 사회에 참여해 평온하게 살아갈 권리를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것이다. 혐오발언 자체가 소수자에게 실제로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사실은 교토조선학교 습격 사건을 다룬 민사재판 판결에서 인정된 바이다. 또 혐오발언은 폭력 행위 자체를 선동하지 않더라도 차별을 선동하여 사회 전반에 차별을 확산시키고, 소수자에게는 물리적 폭력을 불러올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폭력 행위 선동만으로 규제 범위를 한정하는 것은 혐오발언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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