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김을한 지음 / 페이퍼로드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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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배웠던 조선시대의 그 마지막은 아무래도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로 기억된다라고 말할 수 밖엔 없습니다. 그렇게 잊혀지기 시작한 조선왕조의 끝은 가끔 황실의 후손이 광고모델이 되었다는 등의 가십성 기사로만 접할 수 있었을 뿐이었죠. 500년 왕가의 마지막 모습이란게 참 씁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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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영친왕은 나의 백부가 고종황제의 시종으로 오래 있었다는 사실 외에는 별다른 인연이 없다. 단지 가장 어려웠던 시절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마친 내가 도쿄에 있게 된 연유로 영친왕을 자주 뵙게 된 때문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 이 책은 언론인이었던 저자가 이러한 연유로 일본에서 영친왕을 만날 수 있었었고, 그 이후 계속된 영친왕과 저자와의 인연을 바탕으로 씌여진 책입니다. 새로이 출간된 책은 아니고, '이 책은 1970년 5월부터 반 년 넘게 <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것을 이듬해 <한국일보>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이다. 39년이 지난 지금(2010년) 다시 출간……'된 것이더군요. 그런 이 책을 조선의 마지막 왕도 아니고, 마지막 황제도 아닌, '마지막 황태자'란 문구에 끌려 그저 별 생각없이 사서 읽어보게되었던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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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에게는 4남매가 있었다(원래는 7남매)고 합니다. 정실인 명성황후는 큰아들 순종밖에 낳지 못했고 둘째아들 의친왕은 장귀인이, 셋째아들 영친왕은 엄비가, 막내딸 덕혜옹주는 양귀인이 각각 낳았는데, 헤이그 밀사사건 직후 일제의 강압으로 고종황제가 양위하게 되자 장자인 순종이 고종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고, 둘째 의친왕이 비록 뛰어난 재질과 영특했었다고는 하나 순종과의 나이차가 너무 없어, 이미 성인이 된 그를 황태자로 삼기보다는, 셋째인 영친왕을 황태자로 삼는 것이 자연스럽고 장래성도 있으리라는 이유를 들어 고종은 셋째인 영친왕을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게합니다.

 

그의 나이 열한 살때, 일본은 끈질긴 요구끝에 결국 영친왕을 일본으로 데려가는 데 성공합니다. 뿐만 아니라 고종황제가 끔찍이도 아꼈다는 막내 딸 덕혜옹주도 일본으로 데려가지요. 명목상의 이유는 왕가의 자손들을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이는 단지 구실일 뿐 그들은 '인질'로서 일본으로 갔던 것이며, 이후 영친왕은 그들의 계획대로 일본 왕실의 규수인 마사코와 강제적으로 정략결혼을 했고, 그렇게 그의 일본 생활은 기약없이 흘러가게됩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결코 오래지 않은 우리의 역사임에도 참으로 가슴 아프고,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많이 만나게됩니다. '어처구니없는'의 일례로... 사실 영친왕은 한국에 있었을 당시, 일본인과의 강제결혼을 예감한 고종에 의해 민 규수라는 처자와 비밀리에 약혼을 한 상태였었는데, 이를 알게 된 일본의 종용으로 그 약혼은 결국 파혼이 되었지요. 민 규수는 그의 나이 열한 살 때 간택을 받아 스물 두살의 나이에 파혼을 당했던 겁니다. 그녀는 왕가의 며느리가 될 예정이었으므로 그 십일 년 간 문밖 출입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삶을 살았었건만, 난데없는 파혼을 당하게 되고, 한 번 왕가에 의해 간택당한 여성은 그 간택이 취소된다하여도 차후 평생동안 혼인을 올릴 수 없다는 왕실의 규범에 따라 그녀의 일생을 그저 그렇게 처녀의 몸으로 보내야만하게 됩니다. 이것도 억울한데, 또한 당시의 관습은 형제간의 '역혼', 즉 동생이 손위보다 먼저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었기에, 결혼을 할 수 없는 민 규수의 동생들 또한 평생 결혼을 할 수 없게 되고말이죠. 그 부모의 마음이란 어찌했었을지 참... --;; (영친왕과 혼인을 올린 이방자 여사의 집안 또한... 내심 일본의 황태자와 결혼하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그녀의 부모들에겐 영친왕과의 혼사가 날벼락같은 일이었다고도 하네요.)

 

기본적으로 일 개인의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씌여진 책이고, 그러하기에 저자 개인의 주관에 의한 서술로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여타 역사서를 읽을 때와는 달리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두고 읽을 수 밖엔 없는 책입니다. 조선의 멸망이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그리고 대원군의 실정때문이었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이 책의/이 책을 읽는 목적일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저 5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이어온 한 왕조의 몰락, 그 비참한 마지막 모습들을 보며 오래전이지도 않은 우리의 근대역사가 참으로 가슴아픈 것이었었음을 영친왕이라는 한 개인의 삶을 통해 다시 한번 쓰라리게 깨닫게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책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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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을 통해 본국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고자 했던 상해임시정부, 또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에 행여나 타격을 입을까하여 영친왕의 환국을 끝끝내 허용하지 않았던 이승만 대통령, 4·19 혁명 이후 영친왕의 환국에 호의적이었던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 그러나 곧이어 발발한 5·16군사혁명으로 그 또한 무산이 되고야마는... 그런 수많은 우여곡절등의 와중에 영친왕 내외는 아이러니하게도 여러 일본인들에 의해 많은 도움을 받으며 일본에서의 삶을 근근히 지냈던 것으로 책은 서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영친왕에 대해 단 한 점의 단점도 거론하지 않고 있지요. 혹여나 드러나는 영친왕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에 대해서까지도 저자는 그 이면의 속사정등을 통해 철저하게 영친왕의 행적들을 보호(?)합니다. 그러한 저자의 관점을, 또한 영친왕의 우유부단하다라 말해질 수도 있겠는 여러 행적등에 대한 평가를 거론하는 것은 저의 능력 밖이겠습니다만(다만 저 개인적으로, 왕가의 후손으로서의 영친왕이 아닌 '개인 이은'에 대해서만큼은 솔직이 인간적 결점이 꽤나 많은 사람이라 생각할 수 밖엔 없었습니다), 단 한 가지!!! 영친왕의 부인이 되어 평생 그의 곁을 지켜준 이방자 여사(일본명 마사코)에 대해서만큼은 이 책을 읽고나니 아무리해도 지나치지않을 호의(?)를 표하게만 되더군요. 일본의 패전, 그리고 곧이어 이루어진 대한민국의 독립... 이 과정을 바라보는 일본인인, 그러나 (아무리 허울뿐이라해도) 조선왕실의 일원이 된 그녀가 받았을 심적 고통이 미루어 짐작이 됨에도, 적어도 책에 나와있는 그녀는 그런 모든 것들을 끝까지 '조선왕실의 일원'으로서 이겨냅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후, 영친왕은 자신의 국적문제로 - 이 또한 영친왕의 '대책없이 사는 방식'의 일례입니다 -  반드시 한국에 한 번을 들어와야했었음에도 끝내 이승만 대통령의 불허로 한국에 오지를 못하지요. 그러다 결국 5·16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볼모로 잡혀간지 50여년 만인 1963년 11월에 드디어 완전한 환국을 하게 됩니다만, 안타깝게도 당시 영친왕의 건강은 자신의 두 발로 모국땅을 밟을 수조차 없는 상태였었지요. 그는 그렇게 병상에서의 생활을 결국 떨쳐내지 못한 채 1970년 5월 1일 사망하여, 아버지 고종황제의 옆에 안장됩니다.

 

책은 영친왕과 더불어 고종황제가 끔찍이도 아꼈다는 막내 딸 덕혜옹주에 대해서도 적지않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말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내고 있던 덕혜옹주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에 대해 저자는 '도쿄 하네다 공항에는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궁내청과 외무성 관계자들이 많이 나와서 환송했다. 특히, 30여 년 전에 덕혜옹주가 학습원을 졸업할 당시의 학우들 십 수 명이 손에 손에 꽃을 들고 나와서, 말도 못하고 사람도 잘 알아보지 못하는 그 가엾은 이국의 왕녀는 위해 눈물의 전별을 했다'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또한 영친왕의 환국날 실렸다는 다음과 같은 일본 신문의 기사 내용을 인용하고 있기도 한데...   

 

조선에서 왕가를 약탈하고 사육해서 죽였다는 감정을 한국 국민에게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도 이은 씨의 건강에 만전의 배려를 해서 고국으로 보내는 것이 일본인의 의무이며, 그리하여 하루하도 빨리 예의를 다해서 고국으로 가게 하는 것은 또 일본인의 정리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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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자본가의 대표격 인물로 거론되기도 하는 화신 백화점 창업주 박흥식이 영친왕을 위해 금전적 도움을 주었었다라는 이야기도 이 책에는 나옵니다. 심지어 저자는 '개인'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조차도 호의적인 서술을 하고 있기도 하지요. 덕혜옹주의 환국날, 일본 관계자들과 덕혜옹주의 동창들까지 공항에 나와 환송해준 것 자체는 참으로 감동스러운 장면이라고 할 수도 있을겁니다. 이 모든 것들을 백 번의 양보로 다 "좋아요!"로 표현할 수는 있다해도, 영친왕을 돌려보내는 시점에서까지도 '일본인의 의무와 일본인의 정리'를 거론하는 일본이란 나라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더군요. 영친왕이 그의 일 평생을 일본에서 보내야만 하게된 그 시초를 알고도 '일본인의 의무와 일본인의 정리'를 운운할 수 있는 그들의 배짱은 오로지... 우리나라의 힘이 미약해서였었고, 우리의 조상들 중 오로지 자신만의 사욕을 위해 나라를 개판으로 만들었던 인물들이 있었었기 때문이며, 자신의 정치적 영향을 위해 조선의 마지막 왕손의 귀국을 막았던 사람이 '대한민국의 국부'라 불리우고 있다라는 거. 또한 마지막 황손의 귀국조차도 우리 현대사에 '군사정권'의 시작을 가져왔던 인물에 의해 이루어졌다라는 거. 고종의 손자가 되는 사람이 생계가 어려워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었다라는 2013년의 현실(조선왕실의 후손들에게 대한민국이 경제적 보조를 해주어야하느냐의 문제는 생각해볼수록 제 결론은 왔다갔다. --;;)...들 때문일지도 모른다라는 자책일 수 없는 자책탓에 이래저래 머릿속이 정리되지도 않았던, 그렇게 마음마저도 서글퍼졌던 한 권의 독서가 될 수 밖엔 없었습니다.

 

"대개는 그렇게들 잃어버리고 살아가는데, 정확히는 잃어버린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데..."란 김형민의 문구가 사뭇 더 가슴아프게 읽혀지더군요. 우리의 근현대사는 이처럼 슬프기도 하거니와 너무도... 많은 것들을 그렇게 '잃고 잊으며' 온 것이었기에 말이죠.

 

 

 

 

 

 

"후회함이 없이 자기가 발견한 길을 자신의 책임과 의지로 마음껏 가보아라. 만약 그 길이 적당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또 자기 생각으로 다시 하면 된다. 지금에 와서 나더러 마음대로 해보라고 한대도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슬픈 일이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장구한 세월을 두고 틀 속에 갇혀 어떻게 하면 자기를 속이고 살아가느냐를 교육받아 왔기 때문에, 이제 그만 밖으로 나오려고 해도 여간해서는 나올 수가 없다. 나의 마음과 뜻이 벌써 굳어져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이 아비를 뛰어넘어서 자유롭게 너 자신을 시험해보거라."

 

- 영친왕이 미국 유학을 떠나는 아들 이구에게 해주었다는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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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황제의 외교고문이었으며, 헤이그 밀사 파견 당시 동행했었던 미국인 헐버트 박사에 대한 서술을 읽고나니 가슴이 짠~해졌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에 오게된 헐버트 박사는 한국에 도착한 다음 날 사망했고, 생전 고인의 뜻대로 한국땅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이 책을 읽다보니 종원군 데리고... 그 분의 묘소에 꼭! 한 번 참배드리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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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네껜 아이들 푸른도서관 33
문영숙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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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회사 일로 만나게 되었던 조선족 한 분이 있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무역회사에서 일하시다가 중국에서 자신의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분이었었죠. 경상남도 어딘가에 사셨었다는 그 분의 할아버지가 중국으로 가신 이후, 그 분은 그렇게 '조선족'이 되어버린거였다시더군요. 그 분이 말씀하시길... '조선족'이란 단어는 중국 한족들이 자신들에게나 쓰는 말이지, 왜 한국사람들까지도 자신들을 조선족이라 부르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셨었죠. 생각해보면니 미국이나 일본에 사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재미교포'나 '재일교포'란 단어를 쓰면서 유독 중국에 사는 한국사람들을 향해서는 '조선족'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쓰고 있더군요. 우리는... 과연 그들 '조선족'을 우리와 같은 한국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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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의 일대기를 읽으며 힘없는 나라의 서글픔은 지배계층도 피해갈 수 없었다라는 걸 배웠었다라면, 그 '힘없음의 서글픔'이란 사실 일반 민초들에게 더더욱 가혹했었다라는 걸 이 책 「에네껜 아이들」을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1905년 4월 1,033명의 조선인들이 화물선 '일포드 호'에 실려 머나먼 땅 멕시코로 건너가게 됩니다. 1,033명의 조선인들 모두 제각기의 이유로 조선 땅을 떠났고, 또한 나름의 꿈을 가득 안은 멕시코행 이었습니다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다름아닌 노예시장과 그렇게 팔려간 농장에서의 가혹한 노동과 채찍질이었지요.

 

멕시코로 이민 간 사람들은 자신이 원해서 이민을 택한 이민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사람들이었다. 바로 영국인 중개업자 마이어스와 일본인 다시노 가니찌에게 완전히 사기 이민을 당한 사람들이었다. 계약노동을 주선한 이들은 비밀협정을 맺고 이민자들이 분홍빛 환상을 가지도록 이민자 모집 과정에서부터 거짓 선전을 했다. 거짓 선전에 속아 계약서에 서명한 사람들은 대부분은 모국어조차도 글로 쓰지 못하는 문맹인이었기 때문에 계약서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이들의 사기 음모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들을 낯선 땅으로 떠나 보냈고, 그들이 돌아오려고 했을 때는 이미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뒤였다. 그들은 멕시코에 버려지고 만 것이었다. 멕시코에 도착한 이민자들은 낯선 나라의 환경과 생활과 문화에 적응할 시간도 없이 고된 노동에만 시달려야 했다. …… 결국 그들은 순수 이민자들이 아니라 노예로 팔려 가서 기민(棄民)이 된 기막힌 디아스포라였다.

- <작가의 말> 중

  

소설은 4년간의 계약기간동안 조선인들이 서로를 도와가며 온갖 시련을 결국 이겨내고, 농장에서 풀려나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뱃삯 마련을 위해 사탕농장에서 일을 하지만, 결국 조선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게되고, 이후 자신들만의 힘으로 멕시코에 조선인 학교를 세운다라는 지극히 '전형적인 스토리의 이민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형적인 스토리의 이민사'는... 이것이 실제 오래전이지도 않은 우리의 선조들이 겪어야 했던 역사적 사실이었었으며, 그들이 그러한 삶을 살았어야 했던 이유는 오로지 그들이 '힘없는 나라'의 백성이었기 때문이었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쁨이 기쁨으로, 슬픔이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 감정 이전의 상태. 그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사는 체념의 모습"으로 살아갔던 그들 멕시코의 조선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갈구하며, 자신들을 먼 이국 땅으로 보냈던 그 조선으로 다시 돌아가길 꿈꾸었지요. 도대체... '나라'라는 게 무엇이기에 그들은 떠날 때의 마음과 달리 자신들의 나라, 조선으로 되돌아가고가 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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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조들의 가슴아픈 이야기를 읽고 나니, '이 나라가 나를 위해 해준 게 뭐 있다고!'의 푸념을... 과연 이 시대의 우리가 해도 되는걸까, 그럴 자격이나 있나?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소중함, 그리고 그 대한민국의 역사는 대체 어디까지 아픈 건지... 에 대한 다시한번 더!의 확인이었다고나 할까요?

 

 

 

★ More "Food for Thought"  

- 김을한 著,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 나라 잃은 왕실의 후손의 인생은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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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스카프 아침이슬 청소년 2
지앙지리 지음, 홍영분 옮김 / 아침이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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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중국 공산당은 경제건설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은 흐루시초프와 사이가 나빠지면서 소련의 지원은 점점 줄어들었다. …… 중국 공산당은 중국에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자체적으로 철강을 생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자력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해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1958년 제2차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을 제시했다.

 

중국 공산당은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등 세 가지 경제정책을 내걸고 삼면홍기(三面紅旗)운동이라는 전국적인 대중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2차 경제계획 첫 해인 1958년에 농업과 공업 생산 총액이 전년 대비 48퍼센트나 증가했으며 …… 마오쩌둥은 삼면홍기운동은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진입하는 초기 단계이(라 말했으)며  …… 그러면서 자작농들을 인민공사에 가입시켜 거대한 단일조직으로 통제했다. 경제 · 군사 · 행정을 포함하는 종합적인 사회조직을 만들려는 마오쩌둥의 야망에는 공산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농촌 말단까지 확대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 아무런 기술적 고려 없이 '혁명적 열정'만 가지고 덤벼드는 '사회주의 생산은'은 비참한 결과만 남겼다. ……  마오쩌둥은 책임을 지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 1960년 실용파인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가 등장하면서 중국 경제는 겨우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당권파는 공업과 전문가를 우선시하고 농민의 토지 소유를 인정했다. ……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물러난 마오쩌둥은 호시탐탐 권력을 다시 장악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오랜 침묵 끝에 드디어 반격을 시도했다. 1962년 마오쩌둥은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외의에서 계급투쟁을 강조하고 수정주의를 비판함으로써 당권파를 비판했다. 마오쩌둥의 보복은 몇 년 후 1965년부터 시작된 문화적 논쟁에서 비화된 문화대혁명을 통해 시작되었다. …… 5월 29일 칭화대학교 부속중학교에서 최초로 홍위병이 조직되었다. 6월 28일 홍위병들이 마오쩌둥에게 제국주의자들의 숙청을 요구하는 공개편지를 보내자 8월 5일 마오쩌둥은 '사령부를 공격하라'라는 친필로 쓴 대자보를 게재해 홍위병의 행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리하여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 이들은 낡은 문화를 없앤다는 명목하에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학교를 폐쇄하고 전통의 가치와 부르주아 문화를 공격했다. '반란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말하며 홍위병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 결국 홍위병은 류사오치를 감금하고 전국을 무정부상태로 만들었다. 마오쩌둥의 '반란'은 마침내 성공했다.

 

- 김윤태 著, 「교양인을 위한 세계사」 pp 351- 356 중 발췌인용

They hoped that I would be the happiest girl in the world. And I was. …… I never doubted what I was told : "Father and mother are dear, but dearer still is Chairman Mao." …… That year, 1966, I was twelve years old, in sixth grade. That year the Cultural Revolution started.

 

초등학교의 교감선생님이셨었던 할머니, 연극배우인 아버지와 배우일을 그만두고 상점에서 일하시는 어머니와 두 동생.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고싶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던 12살의 주인공(이자 저자인) 지리지앙은 그렇게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도 잘했던 그녀는 Central Liberation Army Arts Academy의 배우 후보자로도 뽑혔습니다만, 그녀의 출신성분이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셨던 부모님의 강한 만류로 결국 후보자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하게됩니다. 이 때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했었던 그녀의 출신성분은 다름아닌... 그녀의 아버지가 일곱 살때 돌아가셨다는 그녀의 할아버지가 대지주였었다라는 사실이었었지요. 그걸 알게 된 후 지리지앙은 구체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앞날이 뭔가 자신의 꿈대로 흘러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됩니다.

 

I was afraid that the rest of my life would not be what I had imagined. …… Until now I had never doubted that I could achieve anything I wanted.  The future had been full of infinite possibilities. Now I was no longer sure that was still true.

 

Our beloved Chairman Mao had started the Cultural Revolution in May. Every day since then on the radio we heard about the need to end the evil and pernicious influences of the "Four Olds" : old ideas, old culture, old customs, and old habits.

 

어린 지리지앙과 그녀의 친구들에게 문화대혁명이란 건 처음엔 아주 재미있는 '놀이'의 하나로 다가왔었었습니다. "Great Prosperity Market"라는 이름의 상점이나 "Good Fortune Photo Studio"라는 이름의 사진관 간판들을 보며 자기네들끼리 토론(?)하길... '많은 돈을 벌고 싶다'라는 뜻을 가진 이 간판들은 마오 주석의 말에 의하면 '착취'를 통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기에 당연히 '4대 구악'중의 하나인 것이며, 한 술 더떠 "Innocent Child Toy Shop"의 'Innocent'란 단어 역시 계급성을 결여하고 있으므로 그 장난감 가게의 이름은 마땅히 "Red Child Toy Shop"이 되어야하지 않겠냐는 등의 의견개진(?)을 하는... 그런 '놀이'의 수준이었던 거지요.   

 

전 세계 어느 나라의 일반적인 열두 살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당시의 지리지앙 또한 학교의 선생님들로부터 배웠던 중국의 역사, 특히나 구악과 외세에 맞서 싸운 결과 중국을 그것들로부터 지켜냈었던 공산당을 존경하고 있었었으며, 여전히 자신들의 삶을 무의식중에 지배하고 있는 낡은 사상과 악습들을 없애야한다라고 굳게 믿고 있는 학생이었었습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시간들이 흐르던 어느 날, 학교 선생님들을 만날 때마다 인사를 드리는 지리지앙에게 누군가가 선생님께 인사를 하는 것 또한 구악의 하나인데 이처럼 교사에게 인사를 꼬박꼬박 잘하는 지리지앙은 마땅히 버려야 할 구악을 아직 버리지 못한 학생이란 말을 합니다. 그들은 선생님을 존경하는 것이 왜 구악이 되어야하느냐는 지리지앙의 질문에 '교사에 대한 존경'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말도 안되는 것이라는 그들의 대답을 듣고는 처음으로... '세상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대자보가 출현했다. …… 이는 아마도 중국 유사 이래 가장 규모가 큰 서예 전시회였을 것이다. …… 대자보에 쓰인 것은 대동소이한 혁명의 언어였지만 평소에 대단한 위세를 보이던 간부들을 거명하면서 비판하는 대자보가 나타나면 이를 읽는 군중은 몹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대자보의 출현은 약자인 군중이 강자인 간부들에게 도전하는 최초의 행위였을 것이다. 이런 행위가 나타난 것은 그들이 중국공산당 중앙과 베이징에 있는 일부 고관들의 압제를 받은 이후의 일이었다. 마오쩌둥이라는 절대권력자는 자신이 가진 지고지상의 권위를 이용하여 뭔가를 바로잡지 않고 항상 약세인 군중과 똑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그 역시 '사령부를 포격하라'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써붙인 것이다. …… 중국의 역사를 종합해보면 귀족 출신이건 풀뿌리 출신이건 일단 황제가 됐다 하면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황제의 입과 얼굴, 언행을 재현했다. 마오쩌둥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 그는 손쉽게 문화대혁명을 광풍의 경지로 몰아갔다.

 

- 위화 著,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pp44 - 46 중 발췌 인용

곧이어 학교의 휴업이 결정되고, 학생들은 선생님들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대자보를 쓰도록 지시받습니다. 지리지앙은 그간 신문을 통해 수정주의적 교육이 어린 학생들을 물들게 했다라는 내용을 여러 번 읽어보았었었고, 그 내용 자체에 대해 분노하기도 하였었으나, 막상 자신을 가르쳐주셨던 선생님들을 비판할만한 것을 찾지는 못하였지요. 그런 그녀완 달리 다른 아이들 (주로 공부 못/안했던 아이들 --;;)은 매일 열심히 터무니 없는 내용들의 대자보를 연신 붙입니다. --- '우리 담임은 우리들에게 책을 많이 읽게한 결과, 시력이 나빠져 결국 우리가 인민군에 지원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반동이다.'  '왕 선생님은 점심을 안싸가지고 와 굶은 학생에게 빵을 사주었는데, 이는 그 학생의 혁명정신을 훼손시키는 반동적 행위이다.'

 

이런 뭔가 말도 안되는 상황의 연속인 시간이 계속되었으나 지리지앙은 여전히 공산당 이념 자체에는 충실한 소녀였었고 그녀 역시 '홍위병(Red Guards)'이 되고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었습니다만!!! --- 최소한 고등학생은 되어야 될 수 있는 홍위병의 예비단계(?)로 'Red Successors'가 생겨났고, 지리지앙은 예의 그 자리에 도전을 하지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옛 지주계급, 옛 부농, 반혁명분자, 범죄자, 우파분자'를 지칭하는 '흑오류'의 자식들은는 홍위병이 될 수 없었었는데, 지리지앙의 할아버지가 옛 지주였었다는 사실이 살고 있는 지역의 모든 사람들에게 밝혀지면서 그녀는 'Red Successors'에의 지원자격조차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친구들로부터 심한 따돌림과 질책까지를 받게 됩니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실제 지주계급이었음을 알게 된 그녀는 이후 할아버지를 원망하게 되지요.

 

Was it my fault that my family was a little better off than theirs? Many a time I had wished that my parents were workers in a textile mill and that we were poor. …… Suddenly I wished that I had been born into a different family. I hated Grandpa for being a landlord.

 

 

사회학적으로 보면, 홍위병의 대중운동은 사회주의혁명 이후에도 공산당 간부, 대도시 지식인, 중간층이 새로운 특권층이 되면서 비간부층, 도시 하층민, 농민의 자제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지고 저항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전통문화, 유교경전, 서구문화에 대한 공격은 기득권층의 '상징권력'에 대한 도전일 수도 있다.

 

- 김윤태 著, 「교양인을 위한 세계사」 p356 중

이후 문화대혁명은 점차 폭력적인 양상을 보이게 되었고, 홍위병들은 구악의 잔재라는 명목으로 개인의 집으로 쳐들어가 개인 소유의 옛 물품들을 파괴하고 압수하는 행동들을 벌이게 됩니다. 몰락했다고는 하나 그래도 옛 지주 출신인 지리지앙의 집안에도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값나가는 물건들이 몇몇 있었었기에,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는 그런 물품들 뿐 아니라 심지어 값비싼 옷을 걸치고 있었던 채 찍었던 옛 사진들까지도 모두 몰래 불태우며 홍위병들의 수색을 피해보려 합니다만, 그들의 그런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집 또한 홍위병들의 수색에 엉망진창이 되고 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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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보다 일년 반이나 늦게 지리지앙은 다시 개교한 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학교에서의 수업은 그녀가 꿈꾸었었던 그런 것들이 아니었더랬습니다. 교육과정을 실생활과 연계시키라는 마오 주석의 교시에 따라 물리, 화학, 생물과목의 선생님들이 갑자기 난데 없는 공업이나 농업을 가르쳐야만 했고, 이미 예전부터 '선생님에 대한 존경'을 구악의 하나로 생각해왔던 학생들은 그나마의 수업조차도 제대로 듣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화대혁명은 그렇게 학교에만 영향을 미쳤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마저도 혁명의 이름으로 갈라놓는 상황을 지리지앙의 주위에서 발생하게도 했었었지요. 비록 자신의 가문에 대해 심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지리지앙은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를 사랑하는 소녀였었.습니다만!!!... 자신의 가문이 가지고 있는 계급적 결함을 자신의 능력으로 반드시 극복해내리라 마음먹고 있었던 그녀는, 그러나 그 극복의 중대한 계기가 될 수도 있었던 'Class Education Exhibition'에서조차 자신의 할아버지로 인해 그토록 열과 성의를 다해 준비해왔던 안내요원의 자리를 박탈당하고나자, 자신의 성(姓)을 바꾸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마저도 하게 되고맙니다. (실제 당시의 중국 공산당은 그처럼 성씨를 바꾸는 것을 혁명적 행동이라 부추기기도 했다합니다.)

 

지리지앙의 아버지는 결국 재직 중이었던 극단에서 우파 반동분자로 몰려 감옥을 가게 되었고, 그녀의 엄마 또한 시아버지와 남편때문에 직장에서 쫒겨나게 됩니다. 그녀의 할머니는 연로하신 몸으로 매일 동네 청소를 하게 되지요. 한 때나마 자신의 할아버지는 너무 원망했던 나머지 자신의 성을 바꾸고도 싶어했었던 지리지앙은 그러나... 끝내!!! 자신의 소중한 가족을 버리지 않습니다.

 

Once my life had been defined by my goals : to be a da-dui-zhang, to participate in the exhibition, to be a Red Guard. They seemed unimportant to me now. Now my life was defined by my responsibilities. I had promised to take care of my family, and I would renew that promise every day. I could not give up or withdraw, no matter how hard life became. I would hide my tears and my fear for Mom and Grandma's sake. I was my turn to take care of them.

 

……………………

  

흔히 일컬어지는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은 어쩌면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일지도 모른다라는 의문, 그것은 2013년 현재 40대 중반의 한국 남자인 저에게만 드는 생각은 아닌 듯 보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지리지앙 또한 'In the three months since the Cultural Revolution had started, changes had been so constant that I often felt lost. One day the Conservative faction were revolutionaries that defended Chairman Mao's idea ; the next day, the opposite Rebel faction became the heroes of the Cultural Revolution.'이라 쓰고 있으니까요. 

 

이처럼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은 상황이나 시대에 따른 상대성만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념 자체로부터의 상대성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보수'는 'status quo'를 주장하기 마련이며, '진보'는 그것으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하지요. '시장의 힘'을 중시하는 것을 그 탄생의 근원으로 하고 있는 경제학에서의 'conservatives'는 (일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개념과는 반대로) 그 탄생의 이유인 '시장의 힘을 중시하는 것'에의 status quo, 즉 정부나 국가의 개입을 극도로 제한하는 주장, 혹은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현재 우리나라 현실 정치에서의 '보수'가 보여주는 행동과는 사뭇 다르지요?)  

 

When I was a small boy, my grandmother told me about a distant uncle who was living in China during the Cultural Revolution. He promised to send a picture of himself to his relatives in America.. If conditions were good, he said, he would be standing. If they were bad, he would be sitting. In the photo he sent us, my grandmother whispered, he was lying down! 

 

- <Foreword> written by David Henry Hwang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란 소설을 통해 '문화대혁명'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되었더랬습니다. 주인공의 아들이 그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결국 병에 걸리게도 되고, 허삼관의 아내 또한 거리에서 동네사람들로부터 공개비판을 받는, 이후 허삼관의 가족들이 모여 한 방에서 서로를 비판하는 장면들이 묘사되어 나오는 것을 보며, 도대체 '문화대혁명'이란게 무엇이길래?하는 의문을 처음 가졌었지만, 위화 특유의 '심각하지도 않으며, 어떤 서술은 심지어 웃기기까지도 했던' 이란 이유로 사실 그것이 실제의 역사에서는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더랬지요. 헌데... 그 사실은 심각했었던 상황을 David Hwang마저도 (물론 그가 직접 만든 표현은 아닐지라도) 위에서처럼 희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더군요. 앉아있는 것조차 모자라 바닥에 나자빠져 있는 사진이라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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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y friends have asked me why, after all I went through, I did not hate Chairman Mao and the Cultural Revolution in those years. The answer is simple : We were all brainwashed. 

To us Chairman Mao was Gold. He controlled everything we read, everything we heard, and everything we learned in school. We believed everything he said. Naturally, we knew only good things about Chairman Mao and the Cultural Revolution. Anything bad had to be the fault of others. Mao was blamless. 

When I started to wrtie this book, I asked An Yi's mother if she had hated Mao when she was forced to climb the factory chimney. "I didn't hate him," she told me. "I believed that the Cultural Revolution was necessary to prevent revisionism and capitalism from taking over China. I knew that I was wronged, but mistakes happen under any system. If the country was better for the movement that persecuted me, I was still in favor of it. It was only after Mao's death that I knew I was deceived." 

It was only after Mao's death in 1976 that people woke up. We finally learned that the whole Cultural Revolution had been part of power struggle at the highest level of the Party. Our leader had taken advantages of our trust and loyalty to manipulate the whole country. This is the most frigntening lesson of the Cultural Revolution : Without a sound legal system, a small group or even a single person can take control of an entire country. This is as true as it was then.

 

- <Epilogue>

이 책의 <Foreword>를 쓴 재미 중국계 극작가 David Hwang은 '문화대혁명'은 분명 권력투쟁의 산물이었었으며, '문화대혁명'이란 이름으로 가려진 그... '기실은 한낱의 권력 투쟁(이었던 것)'의 도구로 이용되었을 뿐인 당신의 젊은 세대들이 결국 'lost generation'으로 불리우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그 모든 것이 '과거'가 되어버린 것에 대한 현재의 시선일 뿐이지요. 

 

David Hwang의 서술이 '과거가 되어버린 문화대혁명'을 현재 시점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라 한다면, 저자가 직접 쓴 <Epilogue>에 나와있는 위의 서술은 '현재의 현실로서의 문화대혁명'을 바라보았던 한 지식인의 시선을 보여주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위에 등장하는 An Yi 의 어머니는 수년 동안 모범교사상을 받았던 선생님이셨지요) 그녀는 마오쩌둥의 죽기 이전까지는 문화대혁명의 대의에 자신이 직접적인 피해자였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전적인 동의를 했었다 말하고 있는 이것을 보며, 도대체 정치적 이념으로서의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정녕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나더군요. 대학의 '정치학 개론' 수업시간에 배우게 되는 구분이 아닌, 현실 정치에서 투표로서 보여진다는 진보와 보수의 구분 또한 아닌... 그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일 개인에게의 '보수'와 '진보'의 구분이란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환경 파괴와 도덕 상실, 빈부격차 증가, 부패현상 만연 등이 오늘날 중국 사회의 갈등을 갈수록 격화시키고 있다. ……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마오쩌둥 시대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사람들 대부분이 막연한 그리움 때문이 그렇게 느낄 뿐, 정말로 그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마오쩌둥 시대는 비록 생활이 궁핍하고 인간 본성에 대한 압박이 심했지만 보편적인 잔혹함이나 생존경쟁은 없었다. 단지 공허한 계급투쟁이 있었을 뿐이었다. 사실 당시의 중국에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따. 때문이 이런 투쟁은 그저 구호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의식주를 절약하면서 함께 어울리며 무난하게 지냈다. 모두 조심스러워하긴 했지만 대체로 평안하게 일생을 보낼 수 있었다.   …… 하지만 오늘날의 중국은 완전히 다르다. 극심한 경쟁과 거대한 압력이 수많은 중국인의 생활과 생존을 전쟁으로 만들고 있다. …… 가치관의 변화와 재화의 재분배가 사회분열을 조성하고 사회분열은 사회충돌을 가져온다. 오늘날의 중국이야말로 계급과 계급투쟁이 만연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 어쩌면 중국이 발전한 이후에 너무 많은 사회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마오쩌둥이 끊임없이 '부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위화 著,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pp56 - 57 중 발췌 인용

보다 더 근본적인 중국의 모습을 알 수 있었다 생각했었던 위화의 책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을 읽으면서 사뭇... 작가 위화의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전체적으로 그리 나쁘지 않은 것같다란 생각을 개인적으로 했었더랬고, 사실은 그게 좀 의아하기도 했었지요. 헌데 지리지앙의 이 책 「Red Scarf Girl」을 읽고나니 문화대혁명을, 그리고 마오저뚱을 바라보는 두 사람, 위화와 지리지앙의 생각에 적지않은 차이가 있지않나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저는 위화나 지리지앙이 '진보'와 '보수' 그 어느 쪽의 사상을 각기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시 한번 더!) 적지않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David Hwang의 서술과 An Yi 엄마의 회상 중 어느 것이 '보수'이고 '진보'인지 또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보수'와 '진보' 중 어느 쪽이냐는 의미가 담긴 질문을 (어쩌면 차라리 '자주'라 말해도 될 만큼, 심지언 한 편의 영화를 보고나서도 그에 대한 감상에까지도 강요(?)되는 진보와 보수의 택일이 존재할만큼) 종종 받게 되는 요즈음의 한국을 살아가다보니, 문득... '문화대혁명'의 시기는 1969년,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던 저의 삶, 그 초창기의 이 땅에도 있었던 것일지 모르며, 그렇게 머지도 않은 과거의 우리나라의 역사를 말함에 있어 과연 나의 정치적 견해는 어떠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않을 수 없게 만들어준 독서가 되어준 듯 합니다. 아무래도... 조만간 위화의 책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다시 차근/차분하게 읽어봐야 할 듯, 그리도 또한! 다시 읽는 「허삼관 매혈기」는... 분명!!! 첫 독서때완 분명히 다른 느낌일 것... 은 물론이고요!!! 

 

 

영어 교과서로 사용해도 될만큼 매우 모범적(?)인 영어로 씌여져 있는 책입니다. 요즘 수준이라면 중딩들도 쉽게 읽어낼 수 있을 듯.

 

More "Food for Thought"

 

- 장안거 著,붉은 땅의 기억 : 비슷한 나이, 다른 성별, 그리고 훨씬 더 짧은... 그러나 같은 이야기. 

- 위화 作, 허삼관 매혈기 : '문화대혁명'을 알기 이전에도 충분히 재미있었던 소설. 그러나 알고나면 꼭! 반드시!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어지는 책. 

- 위화 著,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작품 입문서. 그의 그 어떤 소설을 읽기 전에 반드시 이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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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눈박이 원숭이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윤수 옮김 / 들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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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에 있는 것들도 뚜뚜뚜두... 소리만 나면 모조리 다 땡겨볼 수 있는 망원렌즈.스런 눈을 가지고 있었었던 육백만불의 사나이. 그리고 그의 애인(?)이란 소문이 당시의 국삐리들사이에 파다했었던(--;;) 소머즈에겐 밤말, 낮말 뿐이 아니라 그녀가 듣고자하는 소리는 다 들을 수 있는 신비의 귀가 있었었지요. 그 둘이 합치면 정말 최강무적일꺼야!란 상상이 저를 포함한 당시의 거의 모든 국삐리들에겐 있었었구말이죠. 아마 감사해요님도 그러셨을... ^^ (제 기억에 두 시리즈의 인기가 한참 시들고난 후 언젠가 특별판으로 한두 편, 육백만불과 소머즈가 동시에 등장하는 드라마가 나왔었던 걸로....)

 

 

 

이런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다면? 게다가 그 주인공들의 직업이 만약 탐정이라면?

 

길 건너편 건물 속 사람들의 이야기까지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미나시는 '팬텀'이라는 이름의 도청전문 탐정회사의 탐정이자 사장입니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도 다른 도시에서 일어난 비행기 추락사고의 현장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후유에는 미나시의 스카웃 제의에 바로 팬텀의 직원이 되지요. 자... 이렇게 육백만 불의 사나이와 소머즈의 합체가 일본의 소설에서 이루어집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특별한 눈과 귀의 주인공의 성별이 바뀌었다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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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시는 한 악기회사의 의뢰를 받았습니다. 경쟁회사에서 자신들의 디자인을 도용하는 것 같은데 그 증거를 잡아달라는 거였죠. 그 활동의 와중에 살인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미나시는 그 현장을 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목격자(?)가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미나시는 탐정이라는 직업상 자신이 들었던 그날 밤의 진실, 즉 범인의 이름과 살인과정 등등을 경찰에 신고할 수 없지요. 그렇게 미나시는 그 살인사건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 손을 떼기로 합니다.

 

그러하기에 살인사건의 범인을 쫒는 과정이 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이 소설의 주된 내용을 한 마디로 무어라 할 수 있는지 잘 떠오르지가 않네요. 육백만 불의 사나이와 소머즈가 이렇게 다시 결합했는데, 뭐... 두 사람의 그 특별한 능력들을 이용해 멋지게 해결해내야할 특별한 사건이란게 당췌 생겨나질 않아요!!! --;; 

 

미나시는 그처럼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귀를, 그리고 후유에 또한 그녀의 특별한 눈을 모두 항상 헤드폰과 썬글라스로 각각 가리고 다닙니다. 모두 외관상의 결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미나시의 탐정 사무실이자 주거지가 있는 '로즈 플랫'이란 오래된 연립주택 비슷한 곳에 살고 있는 이웃들 또한 범상치가 않습니다. 미나시의 탐정 스승이었던 노하라 영감, 밤에도 항상 집을 컴컴하게 해놓고 사시는 마키코 할머니, 언제나 둘이 붙어다니는 쌍동이인 도우미와 미나미, 그리고... 뇌이상으로 정상적인 사고는 할 수 없으나 신비의 카드마법술의 능력을 지닌 도헤이가 그들이었지요. 거기에 한 명 더... 미나시의 옛 애인(?)이었으나 미나시를 떠난 후 자살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던 아키에까지.

 

…………………………

 

옛날에 원숭이 구백아흔아홉 마리가 사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의 원숭이들은 모두 외눈박이였다. 얼굴에 왼쪽 눈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나라에 딱 한 마리, 두 눈이 모두 달린 원숭이가 태어났다. 온 나라의 원숭이들이 그 원숭이를 놀리고 비웃었다. 고민 끝에 그 원숭이는 결국 자신의 오른쪽 눈을 빼버려서 다른 원숭이들과 똑같아졌다.

후유에는 점차 미나시를 비롯한 로즈 플랫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외모에 대해 그들은 진심으로 개의치 않았었으며, 미나시는 심지어 그녀의 눈이 너무너무 아름답다라고까지 말했으니까요. 미나시는 위의 외눈박이 원숭이 이야기를 후유에에게 해주며 그 때 두 눈 가진 원숭이가 빼버린 건 단순히 오른쪽 눈만이 아니라 그의 '자존심'이 아니었을까싶다는 말을 해줍니다. 즉, 두 눈 달린 원숭이는 나머지 구백아흔아홉 마리의 외눈박이 원숭이들이 자신을 놀리는 것이 말도 안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거지요. 그럼에도 그는 기꺼이 자신의 한 쪽 눈을 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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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까지 여기 써놓은 이 글의 거의 모든 내용은 당신이 이 책의 거의 마지막을 읽게 될때까지도 (제가 그러했었듯이) 그렇게 믿었었었을, 그러나 책을 덮기 얼마전에야 사실은 이 모든 추측이 틀였었던거구나!!!라 알게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도 '반전'이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지 전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엔 여타의 추리 소설에서와 같은 닭살 돋는 소름도 없습니다. 치밀한 구조의 이야기... 뭐 이런 것도 결코 아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다 읽고난 다음 날에도 이렇게... 이 소설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우와! 이 소설 정말 참...'이란 말을 아니할 수 없게되요.

 

 

"이 아파트 사람들은 사람을 보면 단지 '사람'이라고 느낀다. 그게 전부다. 간단하지만, 가슴으로 체득하기 쉽지 않은 감각. 이곳 사람들은 그 소중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출판사는 이 책을 "감성 미스터리"라고 소개하고 있더군요. 이 표현에서의 방점은 당연히 미스터리가 아닌 '감성'에 찍혀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의식중에 지니게 되는 선입견이라는 거. 그건 타인을 향한 시선을 통해서도 나의 머릿속에 생겨나기도하며, 이런 소설을 읽으면서조차도 그 내용에 대한 선입견이란게 생겨나기도 합니다. 이 소설 「외눈박이 원숭이」는... 그렇게 우리가 타인에 대해 가지게 되는 선입견에 대해, 그리고 소설의 줄거리를 예측해나가는 데 있어서의 선입견까지도 모두 '감성적'으로 박살!!!내 줍니다. 소름끼치는, 또는 독자의 허를 보기좋게 찔러대는 류의 반전을 통해서가 아닌, 오로지 '감성'이라는 단 하나의 도구를 통해서말이죠.

 

가끔... 이렇게 감상문으로 정리해내기 어려운 책들이 있더군요. 너무 길어서도 아니고, 별 내용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뭔가... 오묘하고, 그래서 그런 '오묘'한 생각을 할 수 없는 저의 머리로 그 오묘함들을 정리해낼 수가 없어서인듯... 이라 말할 수 밖엔 없는 그런 책들이 있지요. --- "외눈박이 원숭이라는, 이 책의 제목으로 표현될 수 있겠다싶었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이 책을 다 읽고나면 (소설의 한 챕터 제목이기도 한) "근사한 원숭이 집단"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게 이 소설의 주된 줄거리라고 말하는 게 제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인듯 하네요. 초라한 모습의 등장 인물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근사해지는 그런 성장소설이 아닌, 독자의 선입견이 깨어지면서 소설 속 (원래 근사했던) 등장 인물들의 그 근사한 모습들이 비로서 독자의 눈에 보이게되는... 무지무지 멋진!!! 소설 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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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 홍신 세계문학 7
존 스타인벡 지음, 맹후빈 옮김 / 홍신문화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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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역사 소설이란?

 

실제의 역사적인 시대를 배경으로 특정의 실존인물이나 역사적 사건을 재창조 또는 재현한 소설. 역사로부터 빌려온 사실과 소설적 진실성을 지니는 허구를 접합하여 역사적 인간의 경험을 그 의미를 부각시키는 보편적 인간의 경험으로 전환하는 문학양식이다. 이러한 전환에 필요한 작가의 상상력이나 의도를 조절하는 주제는 역사적 사실을 변형, 수정, 가감하는 기준이 되므로 고정된 소재로서의 역사적 사실이 다양한 모습으로 재현되는 이면에는 늘 작가의 역사관이나 세계관이 매개변수로 존재한다.

- 출처 : 네이버 <국어국문학 자료사전> 중 일부 인용

"특정의 실존인물이나 역사적 사건을 재창조 또는 재현한 소설'이라는 역사 소설의 기본된 정의를 따른다면, 이제껏 제가 읽어보았던 '역사 소설'은 바로 이전에 읽은 「왕자와 거지」이외는 없지않나 싶습니다(「무정」과 「황제를 위하여」가 역사 소설의 범주에 속할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건 제 능력 밖의 일인듯). 그래 이왕 이 쪽 소설을 읽어본 김에 한 권 더.의 역사 소설을 읽어보기로 했지요. 그 만만치않은 두께에 읽고 싶은 마음관 달리 선뜻 읽으려 집어들기를 계속 미루어만 두었던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가 바로 그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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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의 대공황(Depression of 1929) 또는 1929년의 슬럼프(Slump of 1929)라고도 한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월가(街)의 ‘뉴욕주식거래소’에서 주가가 대폭락한 데서 발단된 공황은 가장 전형적인 세계공황으로서 1933년 말까지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이 여기에 말려들었으며, 여파는 1939년까지 이어졌다. 이 공황은 파급범위 ·지속기간 ·격심한 점 등에서 그 때까지의 어떤 공황보다도 두드러진 것으로 대공황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것이었다.

- 출처 : 네이버 <두산백과> 중 일부 인용

소설 「분노의 포도」는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경제를 강타했던 1930년대 '대공황' 시대의 미국을 이야기의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경기의 싸이클이라는 게 뭔 올림픽 폐막식처럼 몇월 몇일날의 정해져 있는 끝이 있는 건 물론 아니겠습니다만, 이 소설은 (이걸 우연이라 해야할지 모르겠으나) '우연히'도 일반적으로 대공황이 끝났다라 일컬어지는 바로 그 해인 1939년에 출간되었더군요. 소설 「왕자와 거지」가 왕자와 거지라는 극단의 사회적 계층이 바라본 당시 16세기 영국의 '일반적인' 사회상을 묘사하고자 하였다라면, 이 소설 「분노의 포도」는 '대공황'이라는 특별한 변수가 없었었다면, 그냥 그렇게... 이제껏 살아오던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었던 평범했던 한 가정이 그 특별한 변수로 인해 어떠한 삶의 변화를 겪었어야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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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품이 사실주의/리얼리즘 소설인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은데, 이 소설들의 특징은 첫 번째로 전형성이고 두 번째는 디테일 즉 '세부 묘사'입니다. 전형적 인물들이 등장하고 세부 묘사를 갖춘 소설을 보통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부릅니다. 작품 속에 대단히 자세한 세부 묘사가 있어 마치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현실을 엿보는 듯합니다. 말하자면 '리얼리티 환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 이현우 著, 「아주 사적인 독서」 중

이 소설은 본문만 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긴 소설입니다. 그렇다고 활자가 시원시원하게 크고, 행간도 널찍하느냐하면 그것도 아니지요. 소설의 뒷표지에 이 소설을 가리켜 '대공황 시대를 그린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이라 적혀 있는데, 이처럼 '리얼리즘 소설'이라는 장르가 보여주는 그 극단적인 세부 묘사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이 소설의 분량이 이처럼 엄청난 것이 된겁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똑같은 내용과 주제를 가지고 만약 요즘에 한 편의 소설을 써낸다라면 이렇게까지는 길지 않을꺼라는거죠. 예를들어, 주인공 가족이 오클라호마로부터 서부 캘리포니아로 향해가는 한 과정 중에 나오는 도로변 식당에의 묘사를 잠깐 볼까요?

 

"앨은 메이의 쾌활한 울림에 가끔 얼굴을 쳐드는 일은 있어도, 이내 눈길을 돌려 주걱으로 철픈을 문지르고 둘레의 홈에 기름을 떨어뜨린다. 찌직찌직 소리를 내고 있는 햄버거를 주걱으로 누르고, 반으로 쪼갠 둥근 빵을 철판 위에 올려놓고 굽는다. 철한에 흩어진 양파를 긁어모아 고기 위에 올려놓고 주걱으로 우겨 넣는다.빵 반 조각을 고기 위에 얹고 나머지 절반에 녹인 버터를 칠한 다음, 맛을 돋우기 위해 새콤달콤하게 절인 채소를 그 위에 엷게 편다. 빵으로 고기를 덮고 주걱으로 훌렁 뒤집어 버터를 바른 빵을 그 위에 올린다. 이렇게 다 된 햄버거를 작은 접시에 달랑 올려놓는다. 그 빵 옆에 피클 몇 개와 검은 올리브 열매를 두 개쯤 곁들인다. 앨은 그 접시를 마치 쇠고리를 굴리듯이 카운터 쪽으로 미끄럼을 태운다. 그리고 주걱으로 철판을 북북 긁고는 묵묵히 스튜 냄비를 본다."

 

마치 '찾아라 맛있는 TV'에나 나올법한 주방 속 풍경을 작가는 이렇게나 자세히 묘사해놓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 묘사는 소설의 주제나 이야기의 전개에 하등!의 비중을 갖고 있지 못한 부분이지요. 이처럼 영화의 대본 마냥 세세한 묘사들이 넘쳐나다보니 당연히 그 분량이 길어질 수 밖엔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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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가장 관심가는 부분인 '사회주의'라는 건 대체 이 소설에서 어떤 모습으로 부각되어 보여지게 되는걸까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관리, 자본에 의한 임금 노동의 착취와 그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 자본주의적 시장생산의 무정부성 등에 반대하여 생산수단의 공동소유와 관리, 계획적인 생산과 평등한 분배를 주장하는 이론 또는 사상, 운동 그리고 그와 같은 구상을 실현한체제를 말한다. 사회주의란 용어는 1827년 영국 오언파의 출판물에서 처음 쓰였으며, 사회주의 사상은 산업혁명 이후 산업혁명에서 비롯된 생산의 무정부성, 불평등, 빈곤 등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하였다.

- 네이버 검색, <매경닷컴> 인용

얼마전 친구에게 「분노의 포도」와 「에덴의 동쪽」을 너무 읽고싶은데, 두께에 질려 사뭇 집어들 엄두가 나지 않는다란 말을 했더니 친구가 말하길 '너 이젠 미국 좌파 소설까지 읽을라그러냐?'라 하며 웃더군요. 사실 전 그때까지 이 두 소설이 어떠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건지도 몰랐었었고, 존 스타인벡이라는 작가가 좌파(?)적 성향이었다라는 것 또한 알지 못했었지요. 그냥 단지 뭔가 좀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소설을 읽고 싶었었을 뿐이었건데말이죠.

 

자... 이렇게 <'작가의 역사관이나 세계관이 매개변수로 존재하는 역사 소설'이고, 그 역사의 배경은 '대공황'이며, 이때 작용되는 작가의 역사관은 '사회주의'인, 지극히 자세한 묘사들이 등장하는 '리얼리즘 문학'>으로 분류되는 「분노의 포도」는 도대체 어떤 이야기인지 한 번 들여다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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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들이 이 토지를 개척한 거야. 할아버지들은 인디언을 쫒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아버지는 여기서 태어났어. 아버지는 잡초나 독사들과 싸웠단 말이야. 그리고 흉년이 들어서 돈을 꾸지 않으면 안 되었지. 다음에 우리가 여기서 태어난 거야. 저기 저 방에서 말이야. 애들도 여기서 태어나고, 그리고 아버지는 또 돈을 꾸어야 했지. 그때 이 땅이 은행 소유가 된 건데, 우리는 여기 그대로 머물러서 우리가 거둔 걸 조금씩 얻어먹고 있는 거야. …… 이건 우리 땅이야. 우리가 측량을 해 우리 손으로 부친 땅이야.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나서 이 땅에서 죽어갔어. 쓸모없는 땅이라 하더라도 역시 우리들 것이요. 그게 정말 소유권이지 숫자를 적은 종이 따위가 소유권이 아니란 말이요.

이야기의 전개가 시작되는 갈등은 바로 이렇게 생겨납니다. 위에서 인용했던 '사회주의'의 정의에 비추어보자면 바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관리'라 표현할 수 있겠지요. 이때 등장하는 '생산 수단의 새로운 소유자'는 바로 '은행'이라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조직이었으며 그렇게 구체적 일 개인이 아닌, 그러하기에 항의조차 마주앉아 할 수 없는 보여지지조차 않는 미지의 상대에게 자신의 선조때부터 살아왔었던 땅을 빼앗기게 되면서 소설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들 삶의 터전을 빼앗기게 된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 건 <캘리포니아로 오세요! 캘리포니아엔 일자리가 넘쳐나며 그 일자리들은 오렌지나 포도를 따는 아주 낭만적인 것이랍니다. 품삯도 아주 높지요!!!>란 광고전단지였지요. 주인공 톰의 가족은 그렇게 타의에 의해 절망밖에는 남지않게된 정든 고향 오클라호마를 떠나 아무 기약도 없는, 허나 (광고전단지가 선사해준) 희망으로 가득차있는 캘리포니아행 여정을 떠나게 됩니다. 

 

'대공황'이라는 사회적 충격, 거기에 더해진 '가뭄'이라는 자연적 충격에 못이겨 그렇게 캘리포니아행을 선택한 톰의 가족에게 닥친 첫 번째 변화는 바로 '가족의 해체'라는 시련이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가족은 함께여야한다'라는 신념을 우선시했던 톰의 어머니의 바램도 여행 도중에 닥친 할아버지의 사망과 뒤이은 할머니의 사망, 그리고 첫째 아들인 노아의 이탈을 막아내지는 못했었지요. 급성 중풍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자신의 남편을 잃은 슬픔에 정신 이상을 겪게된 할머니의 뒤이은 죽음은 얼핏 지극히 개인사적인 차원의 일이라 여겨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작가는 등장인물 중 하나인 케이지 전도사의 말을 빌어 할아버지의 죽음은 결코 개인의 육체적 한계에 다다른 자연적 끝맺음이 아닌, 어쩌면 인위적 재촉의 결과물이었을지도 모른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오늘 밤에 돌아가신 게 아니야. 집을 떠나시던 그 순간에 돌아가신 거야. …… 할아버지는 곧 그 땅이었고, 자신도 그것을 알고 계셨지요."

 

톰의 가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캘리포니아에서의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실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자기를 괴롭히는지도 모른다'는 소설 초반 전도사 케이지의 독백처럼, 괴로움이 닥치긴 했으나 앞으로 펼쳐질 그들의 꿈을 상상해보자라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죽음, 그리고 장남의 행방불명조차도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어주어야만 했던거지요. 이처럼 톰의 가족들이 가진 '희망'은 어쩌면 첫째 딸인 로저샨의 뱃속 아기로 대변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저샨과 그의 남편 코니는 그야말로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잠재력 가득한 의지로 장차 뱃속의 아이와 함께 맞게될 캘리포니아에서의 자신들의 삶을 그 어떤 가족 구성원보다 더 희망차게 꿈꾸고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톰의 가족이 품고 있는 희망의 원천은 지극히 단순했습니다. <일자리가 넘쳐나는 캘리포니아로 오세요!>라 적혀 있는 노란색 광고전단지 한 장이 그 모든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 여정의 과정에서 그 단순한 희망의 원천마저도 온전한 것이 아니었음을 톰의 가족은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캘리포니아로 향하고 있는 수많은 인파의 행렬들 중에서, 자신들과는 반대로 오히려 캘리포니아로부터 다시 되돌아와 그들의 고향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입을 통해 '일자리와 오렌지와 포도가 넘쳐난다'는 캘리포니아의 현실을 비로서 듣게 된겁니다. 

 

원래 한 8백명 쯤 필요한건데 …… 광고지 5천장을 찍어 동부에 뿌렸고 …… 그걸 한 2만명 정도가 보았을테고 ……  2-3천 명의 가족이 그것만 믿고 서부로 …… 캘리포니아의 농장 주인은 이젠 2백명정도 밖에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는데도 …… 5백명쯤의 텐트치고 죽치고 있는, 먹을 것이 다 떨어져가는 사람들에게 일자리 주겠다, 내일 어디로 나와라 …… 하면 그 말이 돌고돌아 아침엔 천명 쯤 몰려와있을테고 …… 농장 주인은 광고지의 약속관 달리 한 시간에 20센트밖에는 줄 수 없다 말하며 싫으면 관두라 하고 …… 사람이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특히 굶주린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임금이 싸게 먹히는 거요. 또 그놈은 되도록 아이가 딸린 사람을 쓴다오. …… 내가 당신들에게 가르쳐주려고 한 것은 거의 1년이나 걸려서 겨우 깨우친 거요. 새끼를 둘씩이나 죽이고 마누라까지 잃고서야 겨우 깨달은 거였소. 

이게 바로 '희망의 유일한 원천'이었던 그 광고지의 진실이자 현실이었던 겁니다. 그들이 꿈꾸었던 희망의 땅 캘리포니아에는 그저 '자본에 의한 임금 노동의 착취'만이 있었을 뿐이었던 거지요. 이 과정에서도 또한 '가족의 해체'는 필수옵션이었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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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톰의 가족이 겪는 세세한 일상과 더불어 중간중간 '전지적 시점'에서 바라본 '사회의 전반적 모습'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톰의 가족이 내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보며 살아가고 있다면, 전지적 시점의 누군가는 그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사회의 전체적인 구조를 설명해주고 있다고나 할까요? 톰의 가족이 드디어 캘리포니아에 도착했을 때, 이 전지적 시점의 화자는 독자들에게 앞으로 그들이 어떠한 험난한 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걸 다음과 같이 미리 암시해줍니다.   

 

지주는 이미 농장에서 일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을 서류 위에서만 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흙을 잊고, 흙의 향기와 흙의 감촉을 잊었다. 단지 자기들이 그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 기억했고, 땅에서 돈을 벌고 손해를 본다는 것만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떤 농장은 너무 커져서 이미 한 인간의 머리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 이윽고 그러한 농장주들은 상인이 되어 상점을 경영했다. 그들은 농장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고, 그들에게 식량을 팔아 지급한 돈을 되찾았다. 얼마 안 가서 그들은 노동자에게 전혀 돈을 지불하지 않게 되었으며 장부를 만드는 성가신 일을 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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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없는 굶주린 사나이가 아내를 옆자리에, 빼빼 마른 아이들을 뒷자리에 앉히고 길을 달리노라면 곳곳에서 돈벌이는 되지 않을지 모르나 식량은 충분히 생산할 수 있는 놀고 있는 땅을 항상 보게 된다. 그럴 때 그 놀고 있는 땅이 뼈만 남을 정도로 여윈 아이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죄악이며 범죄인가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네!!! 작가 존 스타인벡은 이처럼 당시 캘리포니아(크게는 미국 전체)의 사회·경제상에 대한 간략한 서술을 통해 톰의 가족들 또한 장차 '자본에 의한 임금 노동의 착취와 그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독자들에게 넌지시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예의 톰의 가족이 바로 그 '자본에 의한 임금 노동의 착취와 그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의 혹독한 현실을 맞이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지요. 허나 이러한 '착취'는 비단 톰의 가족과 같은 노동자 계층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농장주들은 통조림 회사를를 만들었고 …… 소지주들은 빚이 밀물처럼 그들에게로 밀려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 이 조그만 과수원도 내년이면 대지주의 손에 넘어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빚이 소유주의 숨통을 막아놓고 있을 테니까. 이 포도원은 은행으로 넘어가겠지. 오직 대지주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통조림 공장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과수원에서 수확한 배는 5파운드  마흔 개에 5달러밖엔 안 되지만, 껍질을 벗겨 반 토막씩 내어 익혀서 통조림한 배는 네 개에 15센트(씩이나 한)다. 그리고 통조림 배는 썩지도 않는다.

이처럼 '자본의 힘'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 소유하지 못한 자들에게만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소유하고 있는 자가 덜 많이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도 또한 똑같은 모습으로 발휘되고 있는게 현실이었던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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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사회주의'가 극복하고자 했던 그 마지막 대상인 '자본주의적 시장생산의 무정부성'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꼬집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물을 가지고 강물에 버려진 감자를 건지러 오면 감시원이 그들을 쫒아낸다. 사람들이 산더미처럼 버려진 오렌지를 주우러 털털거리는 차를 몰고 오지만 거기엔 석유가 뿌려져 있다. 사람들은 우두커니 서서 감자가 떠내려가는 것을 지켜본다. 구덩이 속에서 죽어 생석회가 뿌려지는 돼지들의 비명을 들어야 하고, 썩어 문드러져 물이 흘러나오는 오렌지의 산을 지켜본다. 사람들의 눈에 패배의 빛이 떠오르고, 굶주린 사람들의 눈에 분노가 서린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노의 포도가 한 가득 가지가 휘게 무르익어간다. 수확의 때를 향하여 알알이 더욱 무르익어간다.  

과잉생산되어 버려지는 감자를 강물에 버리고 오렌지에는 석유를 뿌려 사람들이 그것들을 못 먹게 한 이유는 똑같은 상품들이 여전히 시장을 통해 거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를 몰고 조금만 교외로 나가면 감자와 오렌지를 공짜로 주워올 수 있다면 그 누구도 그것들을 시장에서 돈을 내고 사려하지 않을테니까요. <경제학 원론>에서 신앙처럼 받들어지는 '시장 기구를 통한 수요와 공급의 조절'은 (최소한 1930년대 당시엔) 이와 같이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이룩되고 있었던거지요. 그 반면...에!!!

 

한정된 숫자의 일자리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거의 무한정으로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정상적인 수준의 임금이 성립될 리가 없겠죠. '시장'은 이럴 때엔 예의 자신의 역할, 즉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통한 가격의 결정'이라는 메커니즘을 기가 막히게 수행해냅니다. 톰의 가족이 받을 수 있는 임금은 계속 떨어져만 가 결국 요즘 말로 '최저 생계비'에 못미쳐도 한참을 못미치는 수준까지 떨어지게 되지요.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개인'이 아닌 '단체'의 필요성을 서서히 느껴가게 됩니다. 물론... '자본' 또한 이러한 상황을 그저 바라만보고 있지는 않지요. 노동조합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한 '자본'은 그 주동자들을 '빨갱이'라는 한 단어로 낙인찍었고, 이때 보안관으로 대변되는 '국가'는 그런 '자본'의 편을 들어줍니다.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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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에 누구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다. 그리고 하나라도 놓서는 안 될 일은, 조금이라도 좋으니 앞으로 나간다는 것은 더러는 다소 뒷걸음질하겠지만, 아주 후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일이 올바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얼핏 보아 헛수고를 하는 것 같아도 실은 결코 헛일이 아닌 것이다."

 

반전(?)의 실마리는 이 한 마디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실마리에 기름을 붓게 되는 건 다름아닌 성경 속 구절들이지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으니라. 그것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더 나은 상을 얻기 때문이니라. 쓰러질 때는 한 사람이 그 벗을 일으켜 줄 것이다. 혼자 쓰러진 자는 불쌍하도다. 이는 일으키는 자가 없음이니라. …… 또 둘이 같이 자면 따뜻하도다. 혼자 자면 어찌 따뜻하리오. 그리고 한 사람이면 패하지만 둘이서는 이를 막을지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도다.

성경 <전도서>에 쓰여있다는 이 구절로부터 톰은 드디어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노동조합'만이 계속되는 임금의 하락을 막아낼 유일한 길임을, 그리고 '자본'에 고용된 깡패들에게 맞아 죽었던 전도사 케이지의 뒤를 이어 자신 또한 '노동조합'의 건설을 위한 선동가 - '자본'의 용어로는 빨갱이 - 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이죠.

 

"대개의 설교는 가난한 사람들만 얘기해요. 앞으로도 쭉 같이 살아갈 가난뱅이 말이죠. 설령 한 푼도 없더라도 그저 가만히 팔짱을 끼고 얌전하게 견디고 있으면 죽어서 금쟁반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얘기밖에 가르쳐주지 않아요. 그런데 <전도서>라는 건 두 사람이 함께 일하면 혼자보다 더 나은 상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 어머니, 나는 곰곰이 생각했죠. 돼지처럼 살아가는 우리들 가난뱅이가 있는가 하면 아주 기름진 땅이 그냥 놀고 있고, 혼자서 1백만 에이커나 갖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몇십만이 될지 모르는 건실한 농민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죠. 만일 우리가 모두 단결해서 전번의 그 사람들처럼 아우성치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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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가족의 희망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었던 로저샨의 뱃속 아기마저도 사산되고야 마는, 이런 상황하에서도 과연 '사람이 살아야할 이유를 가질 수 있는걸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의 비참함으로 마무리되지요. 물론, 그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어쩌면 이 소설의 핵심 주제라 할 수도 있겠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으니라'라는 메시지는 끝까지 지켜집니다. (다소간의 상투적인 작위가 보이기는 합니다만, 이 작품이 1930년대에 나온 것임을 감안하다면 그 '상투적'이란 표현도 감히. --- 허나 소설의 맨 마지막 장면에 만큼은 이 '상투적'이라는 표현을 정말 아니쓸 수 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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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는 삶의 조건을 개선해 가는 끊임없는 진보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이 어느 시기에나 동일하게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기나긴 정체의 시대가 있는가하면 가파른 발전의 시대를 맞기도 한다. 심지어 소용돌이치며 역류하는 물처럼 간혹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아가는 시대가 나타나기도 한다. ……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와 역사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계급은 토지나 자본과 같은 그 시대의 주요한 생산수단을 어느 특정 집단이 독점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생산수단을 독점한 집단(지주와 자본가)은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집단(농노와 임금노동자)에게 생산수단을 빌려 주고 일을 시켜 그 결실의 상당 부분을 가로채기 때문에 일하지 않고도 잘살 수 있다. 반면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집단은 항상 고된 노동과 빈곤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토지나 공장과 같은 생산수단을 일하는 사람들의 공동소유로 만들어 버린다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의 계급적 차별은 사라지고, 그와 동시에 인간의 선한 마음을 왜곡시켜온 온갖 질시와 오만, 증오와 비애도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 「붉은 땅의 기억」의 말미,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 김세걸 서강대 교수 씀> 의 일부

 

중국은 이러한 '자본'의 폐해에 대한 해결책으로 소유권의 강제 이전, 즉 '공산주의'를 선택했습니다만, 이 소설의 배경인 미국은 뉴딜 정책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에의 수정'을 통해 그것을 극복해 냈지요. 그 '자본주의의 수정' 속에는 물론 '노동조합'도 포함되어 있고말이죠. (물론 중국 또한 '공산주의에의 수정'을 했다고도 할 수 있을겁니다. '주식시장'을 가진 공산주의! --;;) 작가 존 스타인벡은 과연... 이러한 결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었을까.가 문득 궁금해집니다. 보통... 이때 가해진 '자본주의에의 수정'은 다름아닌 사회주의적 성격의 가미를 의미하곤 하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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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만약 지금 발표되었다면 그다지 특별한 주목을 받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물론 제 생각에) 이 작품은 한 가지 큰 결점(?)을 가지고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바로 할아버지들은 인디언을 쫓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라는 문장이지요. '자본의 힘'에 철저하게 유린당할 수 밖에 없는 '가지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를 이 소설은 하고 있습니다만, 대상을 표현하는 단어들만이 바뀌었을 뿐인 미국인들에 의한 인디언들에 대한 무자비한 제압을 이 소설은 또한 "쫓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단 한 문장으로 그 역사적 당위를 주장하고 있지요. 물론 소설의 중간에 "우리 할아버지는 인디언한테서 빵을 빼앗았지. 그렇지만 그건 좋지 않은 짓이야."(p361)의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만, 작가가 무려 700여 페이지의 이야기를 통해 '자본의 힘'에 대해 비판하려 한 것에 비한다면, 과연 위 두 문장을 반성다운 반성이라 할 수 있을까요? 

 

오랫만에 읽어본 아주아주 두꺼운 책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다 읽고나니 무척 뿌듯.했었었. ^^;;) '재미있다'란 표현은 결코 어울리지 않겠습니다만, (그것에 동의하든 동의하지않든) 작가의 뚜렷한 주제를 볼 수 있었었다라는 점에서만큼은, 또한 그것으로 인해 독서에의 집중력이 떨어질 겨를조차 없을만큼 쉬임없이 읽어내고 싶다란 생각을 갖게 해주었던 것만큼은 틀림없다 말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고전"이란 타이틀이 결코 과장이 아닌 작품이란 것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듯 싶네요.  

 

 

 

 

 

 

 

 

성장하고 일하고 창조하고자 열망하는 결정적인 인간의 기능, 곧 일하기를 열망하는 근육, 어떤 단순한 욕구를 통해 필요 이상의 것을 창조하기를 열망하는 정신, 이것이 인간이다. 벽을 쌓고 집을 세우고 댐을 건설하는 것, 그리고 그 벽과 집과 댐 속에 인간 자신을 투자하는 일, 또한 벽과 집과 댐이 갖는 어떤 힘을 인간 자신에게 환원하는 일, 그 건설 자체에서 강건한 근육을 얻고, 구상을 통해 명확한 선과 형체를 끌어내는 일은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우주의 모든 유기체나 무기체와 달리 자기가 창조한 것을 넘어서서 성장하고, 자기의 사고의 범주를 딛고 넘어 자기가 이룩한 업적보다 앞서 나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 인간을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 인간은 고통을 겪으면서 때로는 과오를 범하기도 하고 비틀거리면서 전진한다. 앞으로 발을 내디디다가 뒤고 미끄러지는 일도 있지만, 그것은 고작 반 발짝일 뿐이며 한 발짝 그대로 후퇴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말할 수 있고 누구나 알 수 있다. 

 

 

  

 

 

   

 더... 두꺼운 「에덴의 동쪽」(게다가 무려 두 권!)에의 기대를 더.더욱 커지게만 해주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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