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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김을한 지음 / 페이퍼로드 / 2010년 8월
평점 :
학교에서 배웠던 조선시대의 그 마지막은 아무래도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로 기억된다라고 말할 수 밖엔 없습니다. 그렇게 잊혀지기 시작한 조선왕조의 끝은 가끔 황실의 후손이 광고모델이 되었다는 등의 가십성 기사로만 접할 수 있었을 뿐이었죠. 500년 왕가의 마지막 모습이란게 참 씁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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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영친왕은 나의 백부가 고종황제의 시종으로 오래 있었다는 사실 외에는 별다른 인연이 없다. 단지 가장 어려웠던 시절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마친 내가 도쿄에 있게 된 연유로 영친왕을 자주 뵙게 된 때문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 이 책은 언론인이었던 저자가 이러한 연유로 일본에서 영친왕을 만날 수 있었었고, 그 이후 계속된 영친왕과 저자와의 인연을 바탕으로 씌여진 책입니다. 새로이 출간된 책은 아니고, '이 책은 1970년 5월부터 반 년 넘게 <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것을 이듬해 <한국일보>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이다. 39년이 지난 지금(2010년) 다시 출간……'된 것이더군요. 그런 이 책을 조선의 마지막 왕도 아니고, 마지막 황제도 아닌, '마지막 황태자'란 문구에 끌려 그저 별 생각없이 사서 읽어보게되었던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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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에게는 4남매가 있었다(원래는 7남매)고 합니다. 정실인 명성황후는 큰아들 순종밖에 낳지 못했고 둘째아들 의친왕은 장귀인이, 셋째아들 영친왕은 엄비가, 막내딸 덕혜옹주는 양귀인이 각각 낳았는데, 헤이그 밀사사건 직후 일제의 강압으로 고종황제가 양위하게 되자 장자인 순종이 고종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고, 둘째 의친왕이 비록 뛰어난 재질과 영특했었다고는 하나 순종과의 나이차가 너무 없어, 이미 성인이 된 그를 황태자로 삼기보다는, 셋째인 영친왕을 황태자로 삼는 것이 자연스럽고 장래성도 있으리라는 이유를 들어 고종은 셋째인 영친왕을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게합니다.
그의 나이 열한 살때, 일본은 끈질긴 요구끝에 결국 영친왕을 일본으로 데려가는 데 성공합니다. 뿐만 아니라 고종황제가 끔찍이도 아꼈다는 막내 딸 덕혜옹주도 일본으로 데려가지요. 명목상의 이유는 왕가의 자손들을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이는 단지 구실일 뿐 그들은 '인질'로서 일본으로 갔던 것이며, 이후 영친왕은 그들의 계획대로 일본 왕실의 규수인 마사코와 강제적으로 정략결혼을 했고, 그렇게 그의 일본 생활은 기약없이 흘러가게됩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결코 오래지 않은 우리의 역사임에도 참으로 가슴 아프고,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많이 만나게됩니다. '어처구니없는'의 일례로... 사실 영친왕은 한국에 있었을 당시, 일본인과의 강제결혼을 예감한 고종에 의해 민 규수라는 처자와 비밀리에 약혼을 한 상태였었는데, 이를 알게 된 일본의 종용으로 그 약혼은 결국 파혼이 되었지요. 민 규수는 그의 나이 열한 살 때 간택을 받아 스물 두살의 나이에 파혼을 당했던 겁니다. 그녀는 왕가의 며느리가 될 예정이었으므로 그 십일 년 간 문밖 출입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삶을 살았었건만, 난데없는 파혼을 당하게 되고, 한 번 왕가에 의해 간택당한 여성은 그 간택이 취소된다하여도 차후 평생동안 혼인을 올릴 수 없다는 왕실의 규범에 따라 그녀의 일생을 그저 그렇게 처녀의 몸으로 보내야만하게 됩니다. 이것도 억울한데, 또한 당시의 관습은 형제간의 '역혼', 즉 동생이 손위보다 먼저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었기에, 결혼을 할 수 없는 민 규수의 동생들 또한 평생 결혼을 할 수 없게 되고말이죠. 그 부모의 마음이란 어찌했었을지 참... --;; (영친왕과 혼인을 올린 이방자 여사의 집안 또한... 내심 일본의 황태자와 결혼하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그녀의 부모들에겐 영친왕과의 혼사가 날벼락같은 일이었다고도 하네요.)
기본적으로 일 개인의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씌여진 책이고, 그러하기에 저자 개인의 주관에 의한 서술로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여타 역사서를 읽을 때와는 달리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두고 읽을 수 밖엔 없는 책입니다. 조선의 멸망이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그리고 대원군의 실정때문이었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이 책의/이 책을 읽는 목적일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저 5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이어온 한 왕조의 몰락, 그 비참한 마지막 모습들을 보며 오래전이지도 않은 우리의 근대역사가 참으로 가슴아픈 것이었었음을 영친왕이라는 한 개인의 삶을 통해 다시 한번 쓰라리게 깨닫게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책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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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을 통해 본국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고자 했던 상해임시정부, 또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에 행여나 타격을 입을까하여 영친왕의 환국을 끝끝내 허용하지 않았던 이승만 대통령, 4·19 혁명 이후 영친왕의 환국에 호의적이었던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 그러나 곧이어 발발한 5·16군사혁명으로 그 또한 무산이 되고야마는... 그런 수많은 우여곡절등의 와중에 영친왕 내외는 아이러니하게도 여러 일본인들에 의해 많은 도움을 받으며 일본에서의 삶을 근근히 지냈던 것으로 책은 서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영친왕에 대해 단 한 점의 단점도 거론하지 않고 있지요. 혹여나 드러나는 영친왕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에 대해서까지도 저자는 그 이면의 속사정등을 통해 철저하게 영친왕의 행적들을 보호(?)합니다. 그러한 저자의 관점을, 또한 영친왕의 우유부단하다라 말해질 수도 있겠는 여러 행적등에 대한 평가를 거론하는 것은 저의 능력 밖이겠습니다만(다만 저 개인적으로, 왕가의 후손으로서의 영친왕이 아닌 '개인 이은'에 대해서만큼은 솔직이 인간적 결점이 꽤나 많은 사람이라 생각할 수 밖엔 없었습니다), 단 한 가지!!! 영친왕의 부인이 되어 평생 그의 곁을 지켜준 이방자 여사(일본명 마사코)에 대해서만큼은 이 책을 읽고나니 아무리해도 지나치지않을 호의(?)를 표하게만 되더군요. 일본의 패전, 그리고 곧이어 이루어진 대한민국의 독립... 이 과정을 바라보는 일본인인, 그러나 (아무리 허울뿐이라해도) 조선왕실의 일원이 된 그녀가 받았을 심적 고통이 미루어 짐작이 됨에도, 적어도 책에 나와있는 그녀는 그런 모든 것들을 끝까지 '조선왕실의 일원'으로서 이겨냅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후, 영친왕은 자신의 국적문제로 - 이 또한 영친왕의 '대책없이 사는 방식'의 일례입니다 - 반드시 한국에 한 번을 들어와야했었음에도 끝내 이승만 대통령의 불허로 한국에 오지를 못하지요. 그러다 결국 5·16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볼모로 잡혀간지 50여년 만인 1963년 11월에 드디어 완전한 환국을 하게 됩니다만, 안타깝게도 당시 영친왕의 건강은 자신의 두 발로 모국땅을 밟을 수조차 없는 상태였었지요. 그는 그렇게 병상에서의 생활을 결국 떨쳐내지 못한 채 1970년 5월 1일 사망하여, 아버지 고종황제의 옆에 안장됩니다.
책은 영친왕과 더불어 고종황제가 끔찍이도 아꼈다는 막내 딸 덕혜옹주에 대해서도 적지않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말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내고 있던 덕혜옹주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에 대해 저자는 '도쿄 하네다 공항에는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궁내청과 외무성 관계자들이 많이 나와서 환송했다. 특히, 30여 년 전에 덕혜옹주가 학습원을 졸업할 당시의 학우들 십 수 명이 손에 손에 꽃을 들고 나와서, 말도 못하고 사람도 잘 알아보지 못하는 그 가엾은 이국의 왕녀는 위해 눈물의 전별을 했다'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또한 영친왕의 환국날 실렸다는 다음과 같은 일본 신문의 기사 내용을 인용하고 있기도 한데...
조선에서 왕가를 약탈하고 사육해서 죽였다는 감정을 한국 국민에게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도 이은 씨의 건강에 만전의 배려를 해서 고국으로 보내는 것이 일본인의 의무이며, 그리하여 하루하도 빨리 예의를 다해서 고국으로 가게 하는 것은 또 일본인의 정리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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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자본가의 대표격 인물로 거론되기도 하는 화신 백화점 창업주 박흥식이 영친왕을 위해 금전적 도움을 주었었다라는 이야기도 이 책에는 나옵니다. 심지어 저자는 '개인'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조차도 호의적인 서술을 하고 있기도 하지요. 덕혜옹주의 환국날, 일본 관계자들과 덕혜옹주의 동창들까지 공항에 나와 환송해준 것 자체는 참으로 감동스러운 장면이라고 할 수도 있을겁니다. 이 모든 것들을 백 번의 양보로 다 "좋아요!"로 표현할 수는 있다해도, 영친왕을 돌려보내는 시점에서까지도 '일본인의 의무와 일본인의 정리'를 거론하는 일본이란 나라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더군요. 영친왕이 그의 일 평생을 일본에서 보내야만 하게된 그 시초를 알고도 '일본인의 의무와 일본인의 정리'를 운운할 수 있는 그들의 배짱은 오로지... 우리나라의 힘이 미약해서였었고, 우리의 조상들 중 오로지 자신만의 사욕을 위해 나라를 개판으로 만들었던 인물들이 있었었기 때문이며, 자신의 정치적 영향을 위해 조선의 마지막 왕손의 귀국을 막았던 사람이 '대한민국의 국부'라 불리우고 있다라는 거. 또한 마지막 황손의 귀국조차도 우리 현대사에 '군사정권'의 시작을 가져왔던 인물에 의해 이루어졌다라는 거. 고종의 손자가 되는 사람이 생계가 어려워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었다라는 2013년의 현실(조선왕실의 후손들에게 대한민국이 경제적 보조를 해주어야하느냐의 문제는 생각해볼수록 제 결론은 왔다갔다. --;;)...들 때문일지도 모른다라는 자책일 수 없는 자책탓에 이래저래 머릿속이 정리되지도 않았던, 그렇게 마음마저도 서글퍼졌던 한 권의 독서가 될 수 밖엔 없었습니다.
"대개는 그렇게들 잃어버리고 살아가는데, 정확히는 잃어버린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데..."란 김형민의 문구가 사뭇 더 가슴아프게 읽혀지더군요. 우리의 근현대사는 이처럼 슬프기도 하거니와 너무도... 많은 것들을 그렇게 '잃고 잊으며' 온 것이었기에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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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함이 없이 자기가 발견한 길을 자신의 책임과 의지로 마음껏 가보아라. 만약 그 길이 적당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또 자기 생각으로 다시 하면 된다. 지금에 와서 나더러 마음대로 해보라고 한대도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슬픈 일이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장구한 세월을 두고 틀 속에 갇혀 어떻게 하면 자기를 속이고 살아가느냐를 교육받아 왔기 때문에, 이제 그만 밖으로 나오려고 해도 여간해서는 나올 수가 없다. 나의 마음과 뜻이 벌써 굳어져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이 아비를 뛰어넘어서 자유롭게 너 자신을 시험해보거라."
- 영친왕이 미국 유학을 떠나는 아들 이구에게 해주었다는 말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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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황제의 외교고문이었으며, 헤이그 밀사 파견 당시 동행했었던 미국인 헐버트 박사에 대한 서술을 읽고나니 가슴이 짠~해졌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에 오게된 헐버트 박사는 한국에 도착한 다음 날 사망했고, 생전 고인의 뜻대로 한국땅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이 책을 읽다보니 종원군 데리고... 그 분의 묘소에 꼭! 한 번 참배드리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