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사랑한 여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Case 1> 중학교 2학년 때의 세계사 선생님. 중학생의 눈에 보이는 그 분은 뭔가 굉장히 멋진! 분이었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이런 표현이 은사님께는 결례이겠지만) 아마도... 겉멋이 좀 과한 분이 아니었던가,싶기도 합니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저희에게 물으셨지요. 너네들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뭔지 아냐? 아무도 대답을 못하자 앞자리에 앉아있던 한 친구를 교탁앞으로 불러내시더니 갑자기 당신과 팔씨름을 하자 하셨었어요. 당연!히 선생님이 이기셨고, 이게 바로 선생과 학생의 차이이고, 이건 남자와 여자의 차이와 똑같기도 하지,라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땐 그게 뭔 뜻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암튼! '와! 저 선생님 정말 멋있다!'란 감탄을 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사실 지금도 정확히 그 분의 그 말씀이 뭘 뜻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남자와 여자가 가지고 있는 완력의 차이, 그것이 남녀의 차이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상징이라, 중학교 2학년 학생들 수준으로 설명하셨던 게 아닐까하는 추측만 할 뿐이지요. 과연 그 선생님의 설명이 적당한 것이었을까요?

 

Case 2> 종원군이 유치원에도 입학하기 전쯤이었나? 어느 날 저희 셋이 사우나엘 같이 갔는데, 카운터 앞에서까지만이 셋이고 그 이후로 엄마와 헤어지자 종원군이 묻더군요. 왜 엄마는 우리랑 같이 사우나 못해요? 응... 그건... 그건... 엄마는 짬지가 없잖아. 짬지 있는 사람들끼리 사우나하는거고, 짬지 없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끼리 사우나하는거야... 라는, 그 나이의 아이가 알아듣기 쉬운 수준이라 생각했었던, 매우 단순한 대답을 즉흥적으로 해주었건만! 그날 저녁... 자기 전에 무릅꿇고 앉아 하나님께 그날 잘못했었던 거, 칭찬받아야 할 거, 그리고 마음 속 소원 등등등... 으로 기도할 때 종원군이 말이죠. --- 무릅을 꿇고, 두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힘껏 모아 : '하나님! 우리 엄마한테도 짬지 하나만 만들어주세요. 그래서 우리 가족이 다 같이 사우나할 수 있게 해주세요' (종원군의 그 때 모습을 보며 엄청 웃었었지만, 저도 이내 막 기도했지요. 하나님... 우릴 제발 이대로 살게 해주세요!라구요. ^^;;)  문제(?)는... 초등 6학년이 되어있는 종원군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지금 한다해도, 저의 대답은 여전히... 그때와 똑같지 않을까 싶다라는 거지요. 어떤... 더 좋은 대답을 해줘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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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남녀의 경계는 모호하기 때문에, 억지로 선을 그으면 여러 가지 모순이 생기는게 당연하지요. 그래도 일정한 선을 긋고 싶다면, 그것이 본질적으로 남녀는 나누는 게 아님을 보여줄 필요가 있겠지요.

 

「아내를 사랑한 여자」라는 제목에서 전... 아마도 레즈비언에 관한 내용이 아닐까했었습니다만, 이 소설은 '성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소설은 '남자의 마음을 가진 여자'를 내세워 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아직도 제 머릿 속에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팔씨름으로 설명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이, 내 아들에게는 짬지의 유무로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설명할 수 밖에 없는 제가 이런 내용을 가지고 있는 책이라는 걸 알았었다면 아마... 이 책을 사지도 않았을겁니다. 별... 관심이 없는 내용이거든요. 소설 속 당사자인 미쓰키의 말처럼 남자와 여자의 차이라는 건 너무도 명확해, 그것에 대해 고민한다라는 것 자체가 하찮은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팔씨름의 결과야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짬지의 유무는 '억지로 그은 선'도 아니고 그러하기에 결국!엔 '본질적으로 남녀를 나누는 구분'이 되지 않을까요?)

 

작가는 '외모와 정신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였던 「비밀」을 쓰면서, '성정체성'에 대해 고민해보기 시작했다라 적고 있습니다. '산타클로스는 왜 남자여야 하는가? 왜 여자는 산타클로스가 되어서는 안 되는가?'가 대표적인 의문이었다더군요. (작품 속에서 작가는 짧은 우화를 통해 이에 대한 코믹한/가슴 아픈 대답을 내놓고 있기도 합니다. 산타 아줌마 한 분이 들어왔는데, 선물을 배달해야할 크리스마스 이브 날 생리가 터지는 바람에 결국 산타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었노라고 말이죠. ^^;;) 물론! 작가의 이 질문들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잘못된 편견에 대한 있을 수 있는 비판의식이라 생각합니다. 작가는 이에 대해 한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지요.

 

남자와 여자는 뫼비우스의 띠에 있는 안쪽과 바깥쪽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 완전한 남자도 없고 완전한 여자도 없지요. …… 난 세상에 성정체성 장애라는 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치료해야 할 대상은 소수파를 배제하려는 사회지요.

 

김두식의 책 「불편해도 괜찮아」에도 이런 성소수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히가시노 게이고가 700여 페이지의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메세지는 김두식의 책이 훨씬 더 간결하고 정확하게 문제점을 찌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책을 읽고 썼었던 감상문의 일부를, 좀 길지만 옮겨보자면...

 

저자는 동성애자들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먼저 그들은 그저 우리와 '다를' 뿐이고, 또한 그렇게 우리와 다르기에 그 '다름'으로부터 우리가 불편한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말해줍니다. 허나 우리 사회는 그 '다름'이 '우리'는 별 의심없이 또한 별 제재없이 누리고 있는 권리를 '그들'로부터 빼앗고 그들을 경멸하고 무시할 근거가 되는 것이라는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다라 말하고 있지요. 심지어는 '그들'은 환자이기 때문이 치료를 필요로 할 뿐, 권리의 주체는 결코 될 수 없다라는 주장까지도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여기서 "내가 그렇게 살 필요는 없지만, 다른 형태의 사랑이 존재함을 최소한 이해는 해야한다"라 말하며, 동성애자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불편함에 비해 이성애자 위주의 세상에 살면서 그동안 그들 동성애자들이 느껴왔을 불편함은 얼마나 컸었겠냐는, 정녕! 이제껏 제가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역발상의 사고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책이 씌여졌을 당시엔 우리나라에서 동성간의 결혼이란 것이 전혀 없었었지만, 이 책에 나와있는 몇몇의 예를 보고나니, 얼마전의 그 '특이한 결혼'에 대해 솔직히 말해 '역겨워!'라 했었던 저의 표현을 최소한 '그런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군'의 수준까지 꽤나 나름 진일보한 사고의 발걸음을 옮겨놓을 수 있게 되더군요.

 

책은 우리의 곁에도 얼마든지 이런 '다른'사랑을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으며, '난 이제껏 동성애자를 한번도 만나본 적도 없고 이야기해본 적은 더더욱 없어'란 무의식적 사고가 상당히 취약한 것임을 말해주고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동성애자들의 숫자가 유의미할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다'라는 표현이 부적절할 수도 있는 것이... 십여년 전, 제가 우리 나라의 장애인 숫자를 보여주는 통계수치를 보고는 '이렇게나 많다구?'하는 의문을 가졌었던 이유가 결국엔 당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의 앞에 나설 수 있는 현실적인 상황도 아니었었고, 우리 앞에 나선 그들을 우리와 똑같은 '한 인간'으로 보아줄 비장애인인 우리들의 마음 자세 또한 갖춰있질 못했었기 때문이라는, 즉 '없는'것이 아니라 '보여지지 않는'것이란 이야기를 듣고는 상당히 놀랐었던 그때의 제 기억을 떠올려 본다면, 그 똑같은 이유로 지금 '우리가 보는' 이 현실엔 유의미한 수준의 동성애자가 있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그러하기에 그들이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다'라 표현하는 것이 부적절한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무의식적 편견은 부부 사이에서도 존재하는데, 저자는 결혼 직후 맞벌이하는 아내에게 설거지를 '도와주겠다'고 했다가 그냥 '하면'되지 뭘 '도와주냐'는 핀잔을 들었었던 경험을 이야기해주기도, 또한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거론하며 여성의 아름다움을 획일적으로 규정하고 그 범주에 들지 않으면 못생겼다고 차별하는 우리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다양성의 부족'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고도 꼬집고 있습니다. 

 

저도 김두식의 책을 읽고,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그 이전과 약간!이나마 바꾸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이 책 「아내를 사랑한 여자」가 그리 인상깊지 않았던 건 작가가 이 문제를 너무 <개인의 문제>로 표현해내었다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과연 무엇인가, 그 차이는 정녕 중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작가는 가정에서의 남자와 여자의 역할 등 여전히 사회적 관계에 관련된 질문을 던지고 있기도 합니다만, 이 역시 위에서 인용한 '아내에게 설거지를 도와주겠다고 했다가 그냥 하면 되지 뭘 도와주냐는 핀잔을 들었'라는 김두식의 경험 이상의 무엇을 담고 있지는 못합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짧고 임팩트 있게 얼마든지 설명해낼 수 있는 문제를 지나치게 길고 복잡한 소설을 통해, 게다가 그 범위는 너무도 좁게 말하고 있다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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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육체를 갖고 있으나, 그녀(?)의 마음은 남자인 미쓰키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그러한 차이를 극복해보려 했었습니다.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이의 엄마가 되면 자신의 마음 속 남성성도 사라지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가졌었던 거지요. 하지만...

 

오히려 내 육체와 정신의 갭이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되었어. 물론 나름대로 노력도 해보았지. 계속... 계속 연기를 했으니까. 그러면 언젠가 연기가 아니라 현실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소용없었지. 마음은 속일 수 없으니까.

 

별 재미도, 얻은 것도 없었던 이 작품을 읽고, 이 작품 속 위의 독백을 읽자... 바로 전에 읽었던 「비밀」이 여지없이 떠오르더군요. 정녕... 헤이스케는 그 소설의 마지막 장면 이후의 생활을 과연 잘 해내었을까?하는 가슴 아픈 의문 말입니다. ---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점점 그 범위를 확장해가는 일련 작품들 - 「변신」, 「레몬」, 「비밀」 - 의 연장선상에 있다할 수도 있겠는 이 작품 「아내를 사랑한 여자」는... 어떠한 메세지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만큼은 명백!한 실패작이 아닐까 싶네요. 등장인물이 너무 많다, 사건의 전개가 너무 복잡하다, 너무 길다... 는 등등의 불만도 있구요. --;; 암튼!!! "이 책들을 통해 히가시노 게이고의 매력에 푸~욱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라는 옮긴이의 말 중 이 작품 「아내를 사랑한 여자」는 빼야 할 듯.

 

 

 

 (읽어본)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작품들 :  용의자 X의 헌신」 · 편지」 · 마구(魔球)」 · 「변신」 ·도키오」 · 「레몬」 · 「방황하는 칼날」 · 「비밀

(읽어본)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형사 시리즈" (발간순) :  「졸업」 - 「잠자는 숲」 - 「악의(惡意)」 -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 「내가 그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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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합본)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읽어갈 때는 잘 못느꼈는데, 다 읽고나서도 금방은 잘 느껴지지 않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만 더 기억에 남게 되는 소설들이 있지요. 히가시노 게이고의 「변신」이라는 작품이 바로 그런 소설들 중 하나였었습니다. 우선... 어설프게 써놓은 그 작품의 짧은 감상문을 먼저 읽어보시겠어요? - 히가시노 게이고 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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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작가는 「변신」에서 뇌의 일부가 다른 사람의 것인 주인공을 등장시켜 "나인 나, 내가 아닌 나. 나는 누구인가?"에 관해 물었었습니다만, 이 작품 「비밀」을 통해서는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1인칭의 질문 대신 '나는 아버지이면서 아버지가 아니다. 남편이면서 남편이 아니다. …… 내가 잃어버리는 사람은 아내인가 딸인가!'라는 3인칭의 시점 - 화자를 지칭하는 시점의 의미라기보다는, 「변신」에서는 변화된 당사자를 주인공으로 삼았던 반면, 이 작품에서는 변화된 사람의 남편/아버지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 변화된 사람을 바라보는 자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라는 의미에서의 3인칭 시점 - 을 통해, 즉 관계의 모호함이라는 설정을 통해 「변신」에서와 같은 질문을 다른 각도에서 독자들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뭔... 소리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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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8년이 그랬듯이 오늘도 평범하고 평온한 하루가 될 것이라 믿었다. 아니, 믿고 있었다기보다 그것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피라미드를 움직이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릴 때도 자신이 놀랄 만한 뉴스가 흘러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가령 세상을 떠들썩하게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우리의 하루가 시작될 때, 우리가 하는 생각 그대로 주인공 헤이스케도 이전의 일상과 다름없는 하루가 또 이어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내(나오코)와 초등학교 6학년인 딸(모나미)이 탄 버스가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사고가 났고, 아내는 심한 외상으로 사망하였으나, 딸 모나미는 엄마의 희생으로 외상 없이 뇌에만 손상을 입게 됩니다. 아내를 잃은 헤이스케는 딸마저도 식물인간이 될지 모른다는 절망감에 빠져 있었었는데... 기적적으로 딸 모나미가 깨어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 소설을 읽어감에 있어, 의학적으로 이런 현상이 가능하냐의 여부를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거니와,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방해 요소로까지 작용한다라 생각합니다. --- 의식을 되찾은 딸 모나미. 하지만 그녀의 육체는 모나미의 것이었지만 정신은 완벽하게 자신의 아내 나오코였던 것입니다!!! --- 이런 엄청난/말도 안되는 일을 두 당사자가 너무도 쉽게 받아들였다라는 비판 또한... 이 작품을 제대로 즐기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꺼란 생각을 합니다. 이런 설정을 통해 작가가 독자들에게 안겨주는 잔향이 너무도 길기 때문이지요.

 

이제까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느꼈던 한 가지는 바로... 이 작가가 작품 속 소단락의 제목들을 기가 막히게 잘 짓는다는 것이었었습니다. 이 작품 「비밀」에서도 이러한 작가의 능력은 여지없이 발휘되어, 한 소단락을 다 읽고나면 그 소단락의 제목이 더할 나위 없이 꼭 들어맞는다라는 걸 느낄 수 있었었지요. 작품 속 소단락들의 제목 몇 가지를 인용해... 이 소설을 읽고 제게 남겨진 잔향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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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인가 딸인가>

당연한... 의문입니다. 겉모습은 초등학교 6학년생 딸인데, 하는 행동이나 말은 모두 완벽하게 자신의 아내이니까요. 하지만 소설은 이 도입부, 그러니까 이런 뒤바뀜을 대하는 주인공 헤이스케/나오코의 정신적 충격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작가는 이보다는 다른 부분을 이 소설의 주제로 정하고 싶었기 때문이아닐까하는 막연한 추측만을 해볼 뿐입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비중이 소설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더 좋은 선택이 아니었나 싶더군요. 위에도 적었듯이... 이 소설의 백미는 이런 설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딸의 모습을 보면서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죽음을 눈앞에서 직접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슬픔으로 자리했다. …… 그는 딸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아내 나오코는 자신이 딸의 영혼을 내쫒고 몸을 빼앗은 것이라 자책하지만, 여기서 헤이스케는 오히려 '당신이 모나미의 몸을 구한거야'라는 말로 그녀를 위로합니다. 이런 위로 덕분인지 아내 나오코는 딸의 몸을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것에 오래지 않아 마음의 적응을 하게 됩니다만, 정작 헤이스케 자신은... 여전히 스스로에게 묻지요. '내가 잃어버리는 사람은 아내인가 딸인가!' (이 소설은 철저하게 헤이스케, 즉 제 3자의 시선으로 진행되기에 변화의 당사자인 나오코의 심리 상태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말을 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어쩌면... - 발표 순서는 어느 것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 온전히 「변신」이라는 작품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 추측을 해보게 해주더군요.)

 

 

 <육체의 장벽 / 어색한 부부>

뭐 당연히... 대중소설을 읽는 '대중'으로서 가져보게 되는 의문입니다. 애정이 넘치는 부부사이였던 헤이스케와 나오코가 과연... 부부관계를 어떻게 가졌을까,하는 의문말이죠. 물론!!! 정신적으로는 자신의 아내이지만, 눈으로 보이는 육체는 엄연히 자신의 딸이기에 헤이스케는 (아내이자 딸인) 그녀와 성관계를 가질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능 자체까지를 봉쇄해버릴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헤이스케는 자위로 그 욕구를 해결하는데, 그때마다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여인은 아내의 나오코의 모습이 아니라, 딸 모나미의 담임 선생님인 다에코였었었지요. 하지만!!! 헤이스케는 진심으로 나오코를 사랑하고 있었었기에, 그 이외의 어떠한 성적 일탈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상황도 모르는 채, 재혼하라는 주변의 권유, 심지어 장인의 권유마저도 거절한 채 딸의 모습을 한 아내와 계속 둘이서 살아갔지요. (다에코라는 인물은 이처럼 헤이스케의 심적 방황을 보여주는 일종의 장치로서만 사용되는 인물이었던겁니다. 뭐... 이 정도 스포일러는 별 문제가 안될듯,이라 믿. --;;)

 

이처럼 부자연스러운 상황은 비단 육체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단 둘이만 있을 때에는 서로 부부간의 호칭을 불렀고, 타인들 앞에서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 보여지려 노력했습니다만, 순간순간 발생되는 실수들까지를 완벽하게 막아낼 수는 없었었지요. 모나미(실제로는 엄마인 나오코)의, 그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성숙한 정신 세계는 친구들 뿐 아니라 담임 선생님에게도 이상한 느낌을 줍니다만, 어찌어찌... 둘은 그러한 상황들에 점차 적응해나가게 됩니다.

 

 

 <흔들리는 마음/ 질투>

자... 이제부터가 제가 생각하는 이 소설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에게 혹은 타인에게 '다시 태어난다면?'이라는 질문을 해보지요. 물론! 실현가능성 0%의 상황이기에 상상의 나래는 오히려 더 자유롭게 되며, 그러한 상상의 나래는 대부분...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후회의 재발방지를 다짐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어지곤 합니다. 작품 속 나오코도 또한 다르지 않아서 --- 30대 중반의 정신 연령인 초등학교 6학년생인 나오코는 자신이 나오코의 육신으로는 하지 못했었었던 것들에 도전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간단히 말해, 공부 열심히 해서 뭔가 전문적인 직업을 갖고 싶다는 것이었지요. 그녀는 의대에 진학해 뇌과학 분야를 연구해보겠다는 희망(?)을 남편 헤이스케에게 피력합니다. 그리곤 그 목표를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지요.

 

이제... 헤이스케와 나오코의 사이에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었던 간극이 생겨나게 됩니다. 여전히 흘러가는 시간은 헤이스케에게는 40대의 볼품없는 남자로서의 길을 재촉하는 반면, 나오코에게는 자신의 목표가 조금씩 실현되어나가는 희망의 계단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지요. 여전히 '남자로서의 삶'을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는 헤이스케이지만, 어느덧 고등학생이 된 나오코에게는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들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점점 성숙해져가는 모나미의 모습을 보며, 헤이스케는 여전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아내인지 딸인지, 그것조차 이해할 수 없'어 합니다. (모나미의 몸 속에 존재하고 있는)나오코 또한 어느 순간부터, 이전에는 당연시했던 함께 샤워하는 것을 꺼려하게 되지요. 그녀는 그렇게 변해 있는 자신을 자책하며, 헤이스케 앞에서 울부짖습니다. "이렇게 무너져가는 건가요?"라고 말이죠.

 

이 작품의 전개는 사실 충분히 예상가능한 스토리를 따라가고 있기는 합니다. 육신과 정신의 간극을 보통 사람이 이겨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니까요. 이런 간극을 대하는 헤이스케의 다음 질투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하지만! 이런 말을 한 헤이스케 역시 마음 속으로는 엄청난 갈등을 하고 있을거란 짐작은 일반적인 독자들에게는 모두... 공감되어질 수 있을테고 말이죠.

 

당신한테 평범하게 행동할 권리는 없어! …… 잘 들어. 당신은 내 아내야! 아무리 모습이 모나미라고 해도, 당신이 내 아내라는 사실에서는 도망칠 수 없어! 당신은 젊은 육체를 손에 넣어 다시 인생을 시작하고 싶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

 

그녀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완벽한 여고생으로 사람들 속에 융화되어 있는 것을 보기가 두려웠다. 그것을 확인했을 때 자신이 맛보게 될 상실감이나 고독감, 초조감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 자신은 추악한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젊음을 손에 넣은 나오코를 질투하고 있다. 그런 나오코와 청춘을 즐길 수 있는 젊은 남자들을 질투하고 있다. 동시에 나오코에게 연애감정이나 육욕을 가질 수 없는 자신의 입장을 저주하고 있다. …… 그는 화내고 싶어도 화를 낼 수 없었다. 그 대신 나오코와 자기 사이에 놓여 있는, 영원히 메울 길 없는 늪의 존재를 인식하고 견딜 수 없는 서글픔을 느꼈다.

 

헤이스케의 이러한 질투/주장을 독선적이고 이기적이라 생각하는 독자들도 분명 있을 수 있을꺼라 생각합니다만, '만약 내가!!!'라는 상상 속에서는 저 역시... 헤이스케와 똑같은 말을 하게되지 않을까싶었습니다. 이 상황을 어떤 식으로 결말지어내야 하는가 따위는, 최소한 지금 당장엔... 우리의 고려 대상이 아닌거라구 말이죠.

 

그렇다면...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런 엄청난/말도 안되는 상황을 어떻게 수습시켜놓았을까요? 만약... 당신이 작가라면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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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한 길을 선택한다"

 

(제가 생각하는) 이 작품의 결론을 말해주고 있는 메세지입니다. 이 생각에 대해 주인공 헤이스케는 애초에는 분명하게 반대의 입장을 보여주었었어요. 자신은 그렇게는 살지 않겠다라구 말이죠. 하지만!!!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소설을 마무리짓는 장면에서는 결국... 헤이스케가 이 말에 동의하였다라는 것이 은연중에 보여집니다. --- 사고 이후, 이제까지의 삶이 일종의 연극이었었다면, 이제부터는! 그 연극을 진짜 현실로 바꾸어 버리는 것에 결국 헤이스케와 나오코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어찌어찌해도 결코 해피엔딩을 도출해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의 해피엔딩을 선택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과연!!! 이 결말이 둘 중 어느 누구에게 더 커다란 해피엔딩일 것이냐는 독자마다 다 생각이 다를 것 같지만, 얻는 것 없이 잃는 것만을 가지게 되는듯 보이는 헤이스케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한 길을 선택'하게 함으로써 ... (이것을 행복이라 부를 수 있을지/불러도 되는지까지는 자신없으나) 최소한의 불행만을 안겨주는, (그리하여) 가장 행복한 결말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 바로... 소설의 결말이기도 하지요.) 비록... 헤이스케가 이러한 결말을 받아들이면서는 그 자리에 털석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목이 쉴 정도로 소리를 내어 울었!지만 말이죠. (이 마지막 문장을 읽었을 땐, 웬지 제가 헤이스케가 된 듯 꽤나 슬퍼지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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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작가라는 타이틀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이지만... 추리가 등장하지 않는 그의 소설들 - 「변신」, 「레몬」, 「방황하는 칼날」, 「비밀」 등 - 에서도 그의 매력이 「용의자 X의 헌신」이나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등의 추리 소설들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발휘되고 있지 않나, 저 개인적으로는 이런 소설들이 훨씬 더 매력적이라고까지 느끼게도 되는... 그런 작가입니다. 

 

이 작품 「비밀」은... (일반적으로 독자가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기대하는) 스릴넘치는 추리를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그의 다른 작품 「변신」과 마찬가지로... 저에게는 꽤나 오랫동안, 여러 모습의 잔향들을 계속 만들어내줄 듯 싶네요. 어느덧 13편의 작품들을 읽었습니다만, 여전히... 훨씬 더 많은 그의 작품들이 남아 있으며, 여전히 지금도 쏟아지고 있다라는 사실이 못내... 행복!하기만 합니다.  

 

 

 

 (읽어본)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작품들 :  용의자 X의 헌신」 · 편지」 · 마구(魔球)」 · 「변신」 ·도키오」 · 「레몬」 · 「방황하는 칼날

(읽어본)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형사 시리즈" (발간순) :  「졸업」 - 「잠자는 숲」 - 「악의(惡意)」 -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 「내가 그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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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발견 - KTX에서 찜질방까지 문지푸른책 밝은눈 6
김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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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직접 체험해 보지 앉은 사람들은 빈곤을 일반적으로 어렵지만 어찌어찌해서 넘어갈 수 있는, 생존 자체는 위협받지 않는 상태로 이해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곁에 늘 있었으니'말이다.

- 바버라 에런라이크 著, 「노동의 배신」 중

 

● 사실 자기가 자란 배경을 벗어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 사람들을 가난 속으로 밀어넣는 사회경제적 구조에 대해 몸으로 고민해본 적이 없으니, 늘 그저 피상적인 말로 수박 겉핡기만 하고 있을 뿐 입니다. 강남 사는 기자들이 너무 많아서 서민들의 형편이 기사에 반영되기 어렵다고 비판하지만, 강북 사는 저라고 해서 약자들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 김두식 著, 「불편해도 괜찮아」 중

 

● 어느 날 불현듯 금선 할머니와 연구자의 어머니가 불과 세 살 차이의 같은 세대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 어느 순간 연구자의 가족과 할머니 가족을 같이 놓고 비교라도 해 보게 된 것은 '우리 집 아이들'과 '할머니 집 아이들'이 직업을 갖게 되었을 때쯤인 것 같다. 청소년기 때는 '우리 집'과 '그 집'의 아이들이 다른 것은 너무 당연해서 다른 두 세계에 사는 같은 세대라는 생각을 못했다. …… 연구자에게 연구자가 속한 일상과 다른 일상을 경험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수시로 자문해야 했다.

- 조은 著, 「사당동 더하기 25」 중

 

저에게 적지않은 '충격'을 안겨주었던 (읽은 순서대로 인용해 놓은) 세 권의 책들이었습니다. 이 책들을 통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 대한민국, 더 넓게는 이 지구 위에, 나와는 천양지차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 시간에도 존재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지요. 「노동의 배신」과 「불편해도 괜찮아」를 읽고난 후에도 여전히!!! 「사당동 더하기 25」란 책을 읽어보기로 했었던 계기를 전... '정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어떠한 오만없이 이 사회의 무게추에서 나와 반대편의 쪽에서 서 있어주어 지금 지탱하고 있는 이(나마의) 중심을/이라도 잡아주고 있는 쪽의 이야기 또한 알고는 있어야 하지않을까하는 생각'때문이었다라 적었었습니다...만, 그 책을 다 읽고난 후, 이러한 '생각' 또한 '또 다른 오만'을 그 속에 품고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 책들을 읽기 이전까지 그 책들 속에 등장하는 '(다른 두 세계에 사는 같은 세대인) 타인의 삶'을 거의 모르고 살아왔던 것 뿐 아니라!!! --- '나'는 '나'의 얼굴을 매일매일 거울을 통해 바라보기 때문에 '나' 스스로가 나이들어간다든가 살이 (빠)쪘다라든가하는 객관적 사실/주관적 감각들의 거의 대부분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 확인되어지곤 합니다. 이건 '나'의 아이가 자라나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지요. 매일매일 함께 생활하는 '나'의 아이이기에 그의 성장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는 (벽에 금을 그어가며 정기적으로 키를 재보지 않는 한)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랫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그 녀석, 많이 컸네!'라는 말을 많이들 하곤 하지요. 이처럼... 우리는 '타인의 삶' 뿐만 아니라, '나의 삶'에 대해서도 사실은 그다지 많은 것을 알고 있지도 않으며, 알고 있는 것들마저도 그 대부분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야 확인되어진 것이기도 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걸까,하는 생각을 해보게도 되는데...

 

이러한 '타인을 통한 객관적 사실/주관적 감각의 확인'은 '나'의 삶이 '타인'의 삶과 함께 어우러져 펼쳐지고 있는 '공동의 공간'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그렇다면... '나만의 삶'이 펼쳐지는 개인적 공간이 아닌, 타인들과 함께 섞여 지내게 되는 그 '공동의 공간'들에 대해서 '나/우리'는 대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요?

 

사회학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닐 때 존재 이유가 있다. …… 본래 학자는 사유의 대리인이다. …… 사유의 대리인으로 위임장을 받았기에, 학자의 전문성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희한한 조어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을 대리할 수 있는 능력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 노명우 著, 「세상물정의 사회학」 머리말 중

 

한 사회학자의 이러한 고백을 믿고, 과연 사회학은 어떠한 시선으로 '공동의 공간'을 바라보고 있는지, 또 그런 사회학의 시선이 끄집어내는 이야기들은 이제껏 내가 알고 있(다라 생각해왔)던 것들과 어떠한 차이를 가지고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함이 바로 이 책 「문화의 발견」을 펼쳐보게 된 계기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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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30개의 공간을 중심으로 한국인의 삶과 문화를 탐구한 기록이다. 평범한 세계낯선 눈으로 바라보면서 현상의 이면을 들추어가는 생활 견문록이다. …… 이 책은 생활세계의 다양한 현장들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방문하면서 나를 만나는 기행문이다.

- <들어가면서> 중

학부 시절 수강했던 여러 교양 과목의 선생님들 중, 흔치않게 지금도 여전히 그 수업시간을, 그리고 그 분을 기억하고 있는 김찬호 선생님의 이 책 「문화의 발견」은 이처럼... 내/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의 여러 공간/현상들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혹 알고는 있었으나 표현해내지 못했었던, 심지어 알고 있지조차 못했었던' 그 공간/현상들의 겉과 속 이야기들을 (전형적인 먹물스런 표현/서술이 적잖이 등장하기는 하나 비교적) 평범한 언어로 말해주고 있는 책입니다.

 

사회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몇 권 정도의 책을 읽어보겠다는 수준 이상의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이 책을 대하는 저의 독서는, 관심이 가는 곳에서는 꼼꼼하게, 하지만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회학 특유의 먹물이 잔뜩 낀 부분에서는 대충대충 읽어가기도 했었습니다. 그렇게... 그 중 꼼꼼하게 읽어 본 몇 가지의 이야기들만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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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의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누군가의 시선을 항상 의식합니다. 심지어, 혼자만의 공간에 있다해도 컴퓨터 앞에 앉아있기라도 한다면 인터넷을 통한 보이지 않는 시선까지도 알게 모르게 의식하게 되지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사실... 전 다 쓰여진 이후의 이 글을 읽게 될 '너님들'을 의식!하고 있는 겁니다.) 길거리를 걸을 때나, 지하철에 앉아 있을 때나, 심지어는 벌거벗고 있는 사우나 안에서도 우리는 자신이 타인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가에 매우 신경을 씁니다만, 또한...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 타인의 시선에 연연해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사회학은 이를 '계산된 무관심 calculated unintentionality'이라 부른다는군요. --- 이러한 '계산된 무관심'이 가장 크게 보여지는 장소를 저자는 만원 버스와 지하철을 들고 있는데, 글쵸... 저만해도 지하철에 앉아 있다보면,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안보는척/은연중에 보곤 하는데, 또한... 그 어떤 '누군가'도 또한 그런 모습의 저를 안보는척/은연중에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는겁니다. (제가 잘생겼다는 의미는 아니고요. ^^;;) 자 이제!!! 이런 만원버스와 지하철이라는 '공동의 공간'을 바라보는 사회학의 시선은 우리에게 어떤 (다른) 이야기를 보여줄까요? 

 

만원 버스/지하철 속에서 우리는 철저히 (자발적으로 권력의 지배하로 들어가 있는) '수하물'의 처지에 처해 있게 되는데 - 예를 들어, 마을 버스 내에서의 권력자는 버스 기사이지요. 라디오 채널이라든가 냉난방이라든가 운전 속도라든가 그 모든 것들을 제어할 수 있는 - 이러한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권력을 쥐게 되는 상황, 즉 자신의 차를 직접 운전할 때를 떠올려보게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동차가 우리에게 주는 만족감은 '이동의 편리함'이라는 1차적 기능으로부터 나오는 것 뿐 아니라, (저자의 표현을 따르자면) '자유'를 선사해 주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저자는 이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으로 '찜질방'을 들고 있는데, 화장을 열심히 하는 젊은 여성들도 많은 사람들 앞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스럽게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내는 찜질방이야 말로 체면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일종의 해방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라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복잡하고 치열한 세상에서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런데 운전대를 잡으면 뭔가 상황을 제어하는 듯하다. 그러한 통제감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온전히 혼자서 있을 수 있는 차내 공간 그 자체가 자족감을 준다. 직장이나 가정에서 겪는 참견이나 눈치에서 벗어나 마음껏 음악을 듣고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그곳은 오붓한 휴게실이다.

 

약간은 추상적으로 읽혀지기도 하는 자동차 속 '자유의 획득'은 공항을 바라보는 사회학의 시선을 통해서 매우 극명하게 보여지는데, '만원버스/지하철 - 자가용 - 공항'의 연결 속에서 이러한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라는 건 분명! 사회학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매력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그 회색지대를 통과할 때 우리는 새삼 국적을 의식하며 이방인이 된다. 국제공항은 특정 국가의 영토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그 바깥에 존재한다. …… 한국을 벗어난다는 것 그리고 외국으로 나간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해방감, 그리고 낯선 곳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출국 신고를 마치고 나면, 여객들은 묘연한 무중력 상태에 접어든다. 숨 가쁘게 달려가던 시간은 느긋하게 굴절된다. 탑승권을 지니고 있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 …… 승객들이 들고 있는 쇼핑백에는 'Duty Free'라는 글씨가 큼직하게 씌어져 있다. 국내에 얽힌 수많은 일들과 그 '의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시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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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 책은 평소에 저도 가지고는 있었던, 그러나 말이나 글로 어떻게 표현해내지 못했던 감정/사실들을 적절한 수준의 있어 보이는 언어로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공감은 비단 있어 보이는 언어로 보여주는 것으로부터 뿐 아니라, 또 다른 공간을 바라보는 (사회학의) 시선으로부터도 또한 느낄 수 있습니다.

 

동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편의점들. 그 편의점의 공통점들 중 하나가 매장이 매우 밝다라는 것, 그래서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편의점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화려함과 더불어 심리적 안정감을 찾게된다라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편의점이라는 공간에서 사회학자가 주목한 것은 바로 '무관심의 배려'라는 것이더군요. 즉, 점원은 간단한 인사만 건넬 뿐, 손님이 말을 걸기 전에는 입을 열지도 않을뿐더러 시선도 건네지 않습니다. (CCTV가 그 시선을 대신하지요.) 이러한 점이 (역설적으로) 인간 관계에 목말라하는 듯 하면서도 또한 그로부터 발생되는 번거로움을 꺼려하는 현대인들의 심리에 안정감을 준다라는 거지요.

 

이러한 편의점의 '무관심의 배려'와 대비되는 곳이 바로 백화점입니다. 백화점에서는 구매력 하나로 대접받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으며, 단순히 물건을 구매하는 것 이상의 만족감, 즉 똑같은 물건을 샀다해도 그것을 백화점에서 샀다고 하면 (고객의) 기분이 달라지게 만드는 곳이 바로 백화점이라는거지요. 카지노에는 창문과 시계와 거울이 없다라는 것으로부터 저자는 '그 안에서는 세상과 시간과 자아를 망각하고 도박에 몰입할 수 있다'라 말하지만, 창문과 시계는 없으나 거울은 많은 백화점에서 우리는 '세상과 시간을 잊고 자아에 마음껏 도취하고 탐닉'하게 된다라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백화점이라는 곳은 물건을 구매하는 곳이 아닌, 구매 행위 자체를 소비하는 곳이라는 겁니다. (비슷한 예일지 모르겠으나, SONY 또한 제품만을 파는 것이 아니라 '예판까지도 판다'라는 말을 저같은 SONY빠들은 종종 합니다.)

 

이처럼 백화점은 우리에게 '현실을 벗어난 또 다른 세계'로 다가오는데, 이보다 훨씬 더!!! '현실을 벗어난 또 다른 세계'가 있으니, 바로 놀이공원(테마파크)입니다. 테마파크들의 공통점 하나가 바로 출입구가 하나 뿐이라는 것이라는군요. 그 의도는 모든 손님들이 동일한 문으로 들어왔다가 나감으로써 놀이공원에서의 하루를 완결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관람객들 모두는 이 문을 통과해 놀이공원에 입장하는 순간 모두 어린아이가 되고, 동화의 세계 속에 빨려들게 됩니다. 미국 디즈니랜드의 여자 화장실에는 거울이 없다는데, 이는 자기의 얼굴을 보고 현실로 돌아와버리지 않도록 하는 배려(?)라는군요. 이것이 진정한 배려인지 극도의 상술인지의 판단에 앞서, 이 사실 자체는... 백화점에서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형태/의미로 '우리'로 하여금 그곳에 머무는 시간만큼은 당신의 현실을 완벽하게 잊으라!라 말해주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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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의 감상에 있어 아는 만큼 보이고, 또 아는 만큼 들린다라는 말을 듣곤 하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현상/구성원/공간 등, 우리가 매일 겪는 우리의 일상에도 이 말이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라는 걸 이 책을 통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완전히 모르던 것을 새롭게 배운 것도, 알고는 있었지만 하나의 문장/언어로 표현해낼 수 없었던 것들을 읽을 수도 있었었지요. (이 감상문에서는 제게 관심을 주었던, 지극히 일부의 내용만을 정리해 보았습니다만, 읽는 이의 관심사에 따라서는 다른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더 흥미로울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들이 살았던 오늘」, 「썸데이 서울」 그리고 「삶을 만나다」를 읽으면서는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인간적인 시선을 느낄 수 있었었다면, 「불편해도 괜찮아」와 「사당동 더하기 25」를 통해서는 나와 반대편/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배울 수 있었었다면, 「사회를 보는 논리」와 「호모 코레아니쿠스」 그리고 「세상물정의 사회학」을 통해서는 대한민국의 의식에 대해 아주 깊은 이해를 구할 수 있었었다면... 이 책 「문화의 발견」은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나와 가까이에 있는 공간/현상들에 대해 '나'아닌 '누군가'는 또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있는가를 공감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다만!!!... 너무 많은 주제들을 담고 있다보니, 각 주제들에 대해 그다지 깊게 들어가지 못했다는 점은, 심지어 몇몇 주제들에 대해서는 '빼도 괜찮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했던 저에게는 많은/결정적!인 아쉬움으로 남았네요.

 

저로 하여금... 여전히/아직도!  당신의 존함과 당신의 얼굴 표정과, 그 때의 수업 시간 속 당신의 몇 마디 가르침들을 기억하고 있게 만들어주신 김찬호 선생님의 '시선'은 또한... 그만큼의 시간이 앞으로 흐른다 해도, 여전히/아직도! 지금의 기억을 기억하고 있도록, 기억하고 싶어하도록... 만들어 줄 듯 싶습니다. (뭐... 그때 학점 잘주셨다고 이러는 건 아닙니다. ^^;;)

 

  

 

 

(감상문을 적어놓은) 본문에 인용된 책들 : 불편해도 괜찮아」 · 「사당동 더하기 25

※ 대한민국이라는 공간 속, 타인들의 이야기 : 그들이 살았던 오늘」 · 「썸데이 서울」 · 「삶을 만나다

※ 김찬호의 (읽어본) 다른 책 : 사회를 보는 논리

※ 대한민국에 관한 사회학적 시각 : 호모 코레아니쿠스」 · 「세상물정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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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경제학 이타적 경제학
데이비드 보일 & 앤드류 심스 지음, 조군현 옮김 / 사군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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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에서부터 아주 대놓고, 자신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다 까발려놓고 시작하는 책입니다. 장하준 교수가 (이제 막 읽으려 하는 책인) 「경제학 강의」의 처음에 써놓은 "이 책을 읽는 법"을 카피해본다면, <들어가는 말>과 <1장. 뿌리 : 경제학이 문제다>만 꼼꼼하게 읽는다면 이 책의 핵심은 모두 다 이해하게 될 정도로 말이죠. --- '왜 우리는 중세의 농부들보다 더 오래 일을 해야하는가?, '왜 영국은 초콜릿 와플을 수출하고 또 그만큼 수입하는가?', '왜 월마트가 들어선 지역의 투표율은 하락하는가?' 등의, 매우 흥미로운 8가지의 주제들을 담고 있는 이 책의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해 본다면... '전통경제학'(이기적 경제학)을 호되게 비판하며, '새로운 경제학 The New Economics'(이타적 경제학)라는 이름으로 그에 대한 대안들을 내놓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 <들어가는 말>에서 제시된 전통경제학의 문제점들 중 (제가 생각하기에) 뼈대가 되는 세 가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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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출현한 이래 200년이 흘렀다. 그동안 자본주의를 지지한 전통경제학의 주장이 옳았다면, 그들이 말한 경제성장으로 이미 오래 전에 지구상에서 빈곤이 사라졌어야 했다. 그러나 지난 200년 동안 전 기간에 걸쳐 빈부 격차가 좁혀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확대되어 왔다. 전 세계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빈부 격차도 '확장과 분산'의 과정을 거치면서 더 넓게 퍼져나갔다. …… 경제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중세 시대 때 공동토지에서 일했던 평범한 농부 한 사람이 연간 15주 정도 일하면 1년 동안 생활하는 데 필요한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200년 동안 유래없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중세시대의 소작농들보다도 더 죽어라고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200년 간의 경제성장의 결과로 우리의 삶이 더 가혹해졌다고 주장한다하여, 저자들이 '성장' 자체를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 - '새로운 경제학' - 역시 성장은 앞으로도 가능하며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전통경제학이 이제껏 우리에게 제시해왔던 '성장에 대한 해석'에 중대한 오류가 있었다라 지적하고 있는, 즉 전통경제학의 근본에 대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는 거지요.


저자들은 전통경제학이 경제성장을 오로지 물질적 가치로만 평가하고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말하고 있습니다. 대학의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일반적으로 화폐의 근원적 기능을 '가치의 척도'와 '교환의 수단'으로 적고 있는데, 저자들은 이러한 기능을 지니고 있는 화폐는 엄연히! 인간의 생활을 더욱 편리하게 해주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었음을 전통경제학이 잊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일 년에 한 국가에서 생산되고 교환되는 재화와 서비스를 돈으로 환산한 수치'인 국내총생산(GDP)는 분명 국가 경제의 활동 수준을 측정하는 수단으로 고안된 것인데, 현재에는 이 <수단>이 국가 경제활동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지요. (매년 '목표 경제성장률'이라는 게 발표되지요. 심지어 대통령 선거의 공약으로도 등장하는. --;; ) 이러한 수단과 목적의 전이는 열대우림의 파괴, 공해, 범죄 등을 경제성장의 대가로 치러야하는 부작용들을 (그 이름으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외부효과'라는 이름으로 간단히 제외시켜버리는 반면, 이러한 부작용들을 교정하기 위한 경제활동들 - 예를 들어 농약, 총기류 등의 제조 - 은 오히려 경제성장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요인으로 상정하게 되는 역설적 상황을 낳게합니다. 이런 기준의 '경제성장'은 결코 발전이 아니며, 오히려 (전통경제학자들이 변화 혹은 진보라 칭하는) 경제성장으로 인해 삶의 질은 ,어떤 면에서는 실질적 소득마저도, 더 저하되었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입니다. 


저자들의에 따르면, 유럽에서만도 천이백만 명에 이르는 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전통경제학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이른바 '다운시프팅(downshifting)' - 더 큰 행복을 위해 돈을 적게 벌고 적게 쓰는 현상 - 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헌데 문제는 이러한 '다운시프팅'의 삶은 전통경제학에서 상정하고 있는 '합리적 인간'의 '합리적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전통경제학은 '소득의 극대화를 통한 소비(효용)의 극대화'를 하나의 공리(axiom)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류경제학만을 배웠었고, 그러하기에 (저자들의 표현을 따르자면) 전통경제학적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저에게, 저자들의 이 주장은 진심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이제껏 단 한 번도 이러한 '수단과 목적의 전이' 현상을 알아채지 못했었기 때문이지요. 저자들은 전통경제학은 여전히 '다운시프팅'과 같은 현상에 대해 극히 예외적인 일부라 폄하하고 있다지만, "사회학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닐 때 존재 이유가 있다"라는 「세상물정의 사회학」의 저자 노명우 교수의 말을 떠올려 볼 때, 엄연히 사회과학의 한 분야인 경제학은 현재 현실에서 보여지고 있는 사회현상에 대해 그 원인부터 시작되는 설명을 할 수 있어야 / 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전통경제학의 내용에 적잖은 수정이 가해져야한다는 저자들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만 됩니다. (다만! 저자들의 주장대로 과연 전통경제학이 이러한 비난을 받아들이느냐/받아들일 것이냐의 문제는 또 다른 영역이겠지만서도...)


이러한 전통경제학의 오류를 저자들은 '벽 자체보다는 벽지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 것과 같다'라 비유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고방식의 전통경제학은 '성장의 목적은 빈곤 퇴치이다. 하지만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선 성장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니 일단 경제를 성장시키자! 그러려면 우선 가진 자들을 (더 많이 가지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돈을 쓰게 하자/이미 부자가 된 국가들의 국민이 소비량을 더 늘리게 하자'는 '낙수효과(trickle down)'를 주장한다는 것이지요. - 사실 이 '낙수효과'의 실효성에 대해서는 전통경제학 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Five Zombie Economic Ideas That Refuse to Die" 참조 -


새로운 경제학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낙수효과'와는 반대로, 저소득층에 대한 지원을 직접적으로 늘려 소득을 증가시키면 결국 '소비증가 - 생산투자'로 이어지게 됨으로 경제활성화와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게 된다라는, '분수효과(fountain effect/trickle up)'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경제성장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자는 '낙수효과'는 경제성장 과정에서 발생되는 환경 파괴나 공해등의 비용을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가시킬 뿐, 정작 경제성장의 과실은 온전히/여전히 부자들의 몫으로 돌아가게한다는 것이지요. 전통경제학도 지지않고 '그렇다면 경제가 성장하지 않는 대가로 치러야 할 비용은 어떻게 하란 말이냐?'라 되묻는데, 이에 대한 새로운 경제학의 대답은 한 마디로 매우 시니컬합니다. : "하기야 100층 건물에서 떨어지는 사람도 마지막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까지는 하나도 안 다치고 멀쩡하긴 하지."

 

이처럼 전통경제학의 '수단과 목적의 전이'를 비판하는 새로운 경제학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그렇다면 과연 무엇일까요?

 

 

지금의 경제시스템은 인간이 가치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돈이 가치 기준이 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더 소중한 사람과 생태환경이 지닌 가산 가치는 보지 못한다. …… 전통경제학에서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의 목표가 어떤 상황에서든 물질적인 부를 극대화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즉 (GDP의 증가로만 대변되는) 경제성장이 최선이라고 가정하는 바람에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다양한 가치들 가운데 돈보다 더 소중한 가치는 없다는 좁은 의미로 세상을 제한하였다. …… (다시 말해) 전통경제학이 갖는 근본적인 문제는 '부 wealth'로 인식하는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 '부'의 개념을 물질적인 측면으로만 좁게 정의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삶의 폭도 좁게 만들어버렸다. …… (그 결과) 돈으로 결코 살 수 없는 가치들이 깡그리 무시되고 있다. …… 이런 생각이 사회 조류 속에 강하게 스여들어서 일반 사람들도 얼마나 많이 물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느냐가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주요 원천이 되었다. …… (그 결과) 사람들은 소득이 늘어나면 행복의 크기도 늘어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더 많은 행복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일한다. …… 현재와 같이 물질적인 부만 추구하는 경제시스템에서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요구되고, 이런 경제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욕망을 부채질해야만 한다. 그 결과 개인들은 새로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을 계속해서 또 벌어야하지만, 결코 채울 수 없는 욕망과 박탈감으로 사람들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불만이 쌓여가며 삶의 환경이 악화되고 있다. …… 따라서 더 이상 이런 무의미한 '경제성장'으로 '삶의 질'을 맞바꾸는 것은 공정하지도 않고 비효율적이며 자원을 낭비하는 태도인 것이다.

 

새로운 경제학이 주장하고 있는 것들을 읽으며,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가 내내 떠올랐었습니다. 와타나베 이타루도 "(마르크스 사후) 150년이 지나 사회는 확실히 편리해지고 물자가 넘치게 되었다. 그래도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강요되는 가혹한 환경은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다. 어째서 우리는 이렇게까지 일을 해야만 하는가?"라 는 물음으로 책을 시작하였고, "사람들은 돈이라는 이름의 비료를 대량으로 투입해 경제를 뒤룩뒤룩 살찌게 한다. 내용물이야 어떻든 이윤만 늘면 된다. GDP만 키우면 된다,"라는 비판 의식도 가지고 있었었지요.     


새로운 경제학은 '물질적 부'와 '진정한 부' 사이에 놓여있는 거리를 좁히자라는, 즉 명목상의 성장보다는 인간의 삶의 질을 더 중요시하는 '실질적인 부'를 추구하자는 주장을 하며, 이를 위해 GDP를 대체할 대안을 개발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삶에 대한 만족도 ·자기실현의 삶 ·사회적인 삶의 질 등이 우선시되는, 그럼으로써 물질적인 부를 원래의 올바른 위치로, 즉 물질적인 부를 단지 삶의 필요한 수단으로만 평가하자라는 것이지요. 이럴 때에야 (현실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는, 하지만 전통경제학의 시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비로소 돈은 적게 벌더라도 자신의 마음에 맞는 일을 즐기면서 생활의 여유를 가지고 삶의 만족을 찾으려는 다운시프트족이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고 윤리적 선택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려는 결정들이 이해/설명될 수 있다는 겁니다.  


"새로운 경제학은 부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한다. 물질적인 부는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 삶에 필요한 유일한 수단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데서 경제학의 실마리를 풀어낸다." (p38)      


'물질적인 부를 삶의 필요한 수단으로 평가하자'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역시나 '수단과 목적의 전이'를 되돌리자라는 점에서 동의를 할 수 있습니다만, 정서적으로는 여전히 '물질적인 부'와 '실질적/정신적인 부'간의 우선 순위를 무엇으로 해야하느냐에 관해서는 선뜻! 새로운 경제학의 주장에 제 발을 옮겨놓게는 되지 않더군요.

 

 

자 이제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왜 전통경제학이 현재처럼 '수단과 목적의 전이'라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 것일까요? 이에 대해 새로운 경제학은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습니다.

 

원래 경제학은 도덕 철학의 한 분야로 시작되었으며, 경제학이란 사람들을 빈곤에서 탈출하도록 도와주기 위한 학문이다. 이것이 경제학의 본질이다. 그러나 전통경제학은 인간의 도덕과 인본주의적 면을 거추장스럽게 여기고 무시한다. 그 결과 경제성장이나 확대만을 강조하는 현재와 같은 이런 편협한 경제시스템을 낳았고, 진짜 추구해야 할 세계의 가치들을 반영하지 못하고 인간과 환경의 가치를 소진하는 데 돌진해왔다. …… 새로운 경제학은 시장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 사이에 소통이 필요한 것처럼 재화와 서비스를 배분하기 위해서는 시장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시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장을 움직이는 요인에 가격보다 더 중요한 다른 가치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돈보다고 가치 있는 일을 하려하고, 이타적, 윤리적 및 친환경적 소비행태 등 가격과는 상관없는 요소들이 시장을 움직이고 있음을 본다.

 

전통경제학은 '시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야말로 경제의 궁극적 작동 원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경제학 제국주의'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모든 사회현상을 경제학적으로 설명해내려 하고 있는 거지요. 이 책에서는 헌혈의 경우를 예로 들어 전통경제학이 인간을 이성적이고,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하는 합리적인 존재로 가정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잘못된 가정들 때문에 경제현실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고 정책 실패를 가져오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 나와있는 헌혈의 경우는 전통경제학에서도 '역선택'이라는, 일종의 시장실패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시각으로 전통경제학을 비판하는 것은 이 책보다는 오히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저자 마이클 센델의 설명이 더 정확하지/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센델 교수는 '시장의 교환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재화의 가치를 변질시킨다'라고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성적이 좋으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돈을 주겠다는, 일종의, 성적과 돈의 '시장 교환거래'는 공부를 잘하게 하려는 부모들의 본래의 의도완 달리, 아이들로 하여금 돈을 받기 위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시장적 인센티브(좋은 성적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돈)가 비시장적 인센티브(학습 자체에 대한 열정의 결과/부산물로서의 좋은 성적)를 밀어내기 때문이라는 게 센델 교수의 설명이지요.  이처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까지 모두 '시장의 교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게 되면 결국 시민적 참여, 공공성, 우정과 사랑, 명예 등 인간사회의 모든 도덕적 덕목은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게 그의 지적입니다. 결국 '시장의 공정성을 통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 모두에게 이로울 것'이라는 전통경제학의 주장은 틀렸다는 것이지요.

 

이와 관련하여는, 조나단 와이트의 「애덤 스미스 구하기」에 나오는, 현세에 환생한 아담 스미스의 발언들을 옮겨 놓는 것이 더 깊은 이해를 도와주지 않을까 싶네요. 좀 길지만 인용해 보자면...

 

심지와 밀랍만 있으면 뭐 하나. 정작 산소가 없으면 양초는 탈 수 없지. …… 나는 전반적으로 자유시장 체제로 전환되고 있는 지금의 움직임에 만족하네. 내가 다시 돌아온 이유는 …… 시장이 돌아가도록 만드는 핵심 요소를 자네들이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야. …… (핵심 요소는 바로)사람들끼리의 상호작용이 사회를 구성하는 중추적인 힘이 되고, '모종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도덕적 행동의 기초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는 얘기야. …… 나는 과도한 노동 분업은 사람을 바보로 만들 수 있다는 얘기도 했네. 인간의 고귀한 본질이 소멸되고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야. …… 시장은 절대 사람들과 동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어. 사람들과 공존하며, 바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지. 시장의 힘이 비인간적이라고 해서 사람들까지 비인간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거야! …… 시장의 메커니즘이라는 것이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고 해서 사람인 나까지 그럴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는 뜻이지.  

 

사람들은 부자가 되려고만 안달이지. 부가 삶의 최종 목적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건 잊은 채 말이야. …… 어떤 중요한 목표가 하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언제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될까? …… 행복을 가져다주는 건 바로 '마음의 평화'라네. 평온한 존재감! 그거야 말로 행복의 근원이지. …… 인간은 분명 물질적인 발전 뿐 아니라 도덕적 성숙을 위한 방법 역시 터득할 필요가 있어.

 

이제 읽기 시작한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에서 장하준 교수 또한 경제 문제가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에 직접 와닿지 않는 이야기 (p14)'가 되어있다고 말하고 있더군요.  새로운 경제학이 주장하고 있는 바는 결국 위에서 인용한 아담 스미스의 말처럼, 심리학적이고 생물학적이었던 원래 경제학의 위치로 다시 돌아가 경제학의 도덕적 뿌리를 되찾자는 것이라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잘못된 경제학이 낳은 문제점들을 다시 경제학으로 풀어야 한다는 자신들의 주장이 일견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저자들은 '나와 너가 함께 공존한다'는 의미의 '이타적 경제학'이야말로 '이기적 경제학'이었던 전통경제학이 낳은 문제점들을 해결해낼 수 있다라 말하고 있습니다.

 

………………………………………………

 

전체적으로, 학자가 아닌 언론인들이 쓴, 그리고 영국인들이 쓴 책인지라 영국의 현실이 주로 등장하는 점에서 보자면, 우리나라의 현실과 과연 합치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드는 부분도 적잖게 있기도 했었었네요. 또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이상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지않느하는 의문이 드는 부분도 몇몇 있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표현을 따르자면) 전통경제학만을 배웠었던 저에게 이 책의 주장들은 적잖이 신선했었고 유익하기도 했었다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이외에도 신자유주의라 불리우는 현재의 글로벌 경제시스템에 대한 비판 또한 상당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통경제학에 대한 거의 모든 비판이 2007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으로 촉발된 세계적 금융 위기 이후의 현상들에 대해 집중되어 있다라는 것이, 뒤집어 보자면 이 책이 주장하고 있는 '새로운 경제학 The New Economics'의 약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는 되더군요.

 

'소득이 많이 늘어나는데도 불구하고 그에 상응하게 삶의 질이 향상되지 않는 주된 이유는 늘어나는 개인 빚과 국가부채 때문이다'라는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에 이보다 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을까도 싶은) 저자들의 일갈을 다시 한번 「애덤 스미스 구하기」를 읽고 적었던 감상문의 일부를 인용하는 것으로 이 (졸라 긴 --;;) 감상문을 마칠까 합니다. 아담 스미스를 '경제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가, 단지 그가 「국부론」의 저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다음의 표현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듯 싶네요.

 

21세기에 팀스의 몸을 빌어 등장한 애덤 스미스는 "행복이란 평온함 가운데 존재한다. 건강하고, 남에게 갚아야 할 빚도 없으며, 명석한 의식을 소유한 자가 지닌 행복에 그 무엇을 더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 사람에게 부의 증대란 오히려 불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오두막이 아니라 호화로운 저택에 살면 응당 속도 편안하고 잠도 달게 잘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오히려 그와 반대인 경우가 너무도 분명하고, 빈번하게 발생한다"라는 구절을 설명해 주며, 질적 풍요가 지속되면 반드시 심각한 심리적·정신적 문제에 빠지는 사람들이 생기는 법이고, 부의 무절제한 추구는 반드시 '부패로 연결되기' 마련이며, 나아가 결국에는 삶에 궁극적인 의미와 행복을 안겨 주는 핵심 요소인 도덕적 양심까지를 앗아간다 말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한 책들


- 조나단 B. 와이트 著, 「애덤 스미스 구하기

- 장하준 著,「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 와타나베 이타루 著,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마이클 센델 著,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엄기호 著,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 홍기빈 著,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 유시민 著,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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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약하는 중국 - 천안문 2층에 올라 중국을 보다
정인화 지음 / 북코리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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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4개의 인접 국가들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 오래 전부터 세계 최다 인구를 자랑하고 있는 나라. 그뿐 아니라, 현 시점에서의 국제관계 속에서 미국에 대하여 "아니다"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 --- 바로 중국입니다. 

 

1994년 7월 8일, 북한의 김일성이 사망한 날 처음으로 밟았던 중국 땅은, 제겐 그야말로 이해되지 않는 모습들의 전시장과도 같았었지요. 이후 출장, 여행 등으로 중국을 여러 번 가보았었습니다만, 겉으로 보이는 하드웨어적 모습을 뺀 소프트웨어적 모습들은 여전히... 저에게 이해되지 않는 면들이 많았었습니다. 헌데 중국 작가들의 소설을 몇 편 읽고나니, 제가 '이해되지 않는'이라 생각했었던 것들이 사실은 그들을 몰랐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중국 작가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나, 영국 언론인 마틴 자크의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 등을 통해 그 이해의 부족을 많은 부분 메울 수 있었습니다만, 그 두 권 모두 단편적/한정적인 시대/상황의 중국을 이야기하고 있는 성격의 책들이었던 것에 비해, 이 책 「도약하는 중국」은 그런 점에서 보자면 매우! 다양한 면면들의 중국을 보여주고 있는, 일종의 간략한 백과사전식의 책이었습니다.

 

………………………………………… 

 

중국, 그리고 중국인들을 나타내는 여러가지 단어들이 나옵니다만, 그 중... '현실주의/실용주의'라는 단어가 가장 와닿더군요. 중국 하얼빈의 송화강변에 있는 공중화장실을 보고 기겁을 했었던 1994년 저의 기억을, 저자 또한 말해주고 있습니다. 공중화장실에 문이 없다라는 거 말이죠. 이에 대해 한 중국인의 답변이 어쩌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현실주의/실용주의'의 (물론! 매우 극단적이기는 하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문이 달려있으면 사람들이 꾸물대고 잘 나오지 않는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이 화장실 문을 발로 차는 바람에 문이 파손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화장실에 문을 없앴다. --;;)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국의 여러 고사성어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도 있습니다만, 그 중 '동가식 서가숙'이란 말 또한 중국인들의 실용주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중국인의 현실주의를 잘 나타내는 말이 "동가식 서가숙 東家食西家宿"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말이, 오갈데 없이 떠돈다는 말이지만 그 원뜻은 전혀 그렇지 않다. 조나라의 처녀 얘기다. 이 처녀에게 혼처가 나왔는데, 동쪽의 총각은 부자이나 못생긴 신랑이고, 서쪽의 총각은 가난한데, 잘생겼다. 어디로 시집가야할 것인가? 이때 조나라 처녀는, "밥은 동쪽 집에서 먹고, 잠은 서쪽 집에서 자겠다"라고 하여, 실용주의적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 덩샤오핑의 유명한 말인, "흑묘백묘론"이야말로, 실용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말이다.

덩샤오핑에 의해 본격적으로 추진된 중국의 개혁·개방은 이러한 중국인들의 실용주의적 사고방식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어,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헌데 경제지상주의와 무책임한 개인주의의 이 조합이 지나칠 정도로 현실의 이익만을 강조하는 사회풍조를 낳았다는 것이지요. 이는 결국 개혁·개방 이래 중국 내에 매우 심각한 양극화 문제를 초래하게 됩니다. 1978년 0.18이었던 지니계수가 2005년엔 무려 0.5까지 높아졌지요.

 

 

 

 

 

 (「도약하는 중국」, p 80-81) 

 

 

이에 따라 중국정부는 그동안 추진해 왔던 '선부론(先富論)을 폐기하고 '균부론(均富論)을 채택하게 되는데, 서구에서는 이러한 중국의 급격한 양적 성장을 얕잡아보는 시각이 우세하지만, 마틴 자크의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에서와 같이 '양적 성장이 본 궤도에 오르면 질적 성장 또한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된다'라며 극도의 경계를 보이는 시각도 존재하지요. (이러한 중국의 '양적 성장'도 과연 그것이 실질적으로 중국의 경제성장으로부터 나타난 수치인가에 대한 의문도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중국의 8-9%에 달하는 중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중국 내 유치된 외자기업들의 성장률을 빼면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주장이 이 책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 나타난 양극화, 민주주의, 민족분열 등의 문제점을 과연 중국정부가 어떻게 해결해낼 것이며, 이 중에서도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중국의 사회주의적 체제와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이냐에 중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저자는 적고있습니다...만! 이와 관련하여,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의 감상문에 써놓았던, 마틴 자크의 주장이 제게는 다시 한번 더! 설득력있게 다가왔습니다.

 

어쨌든 거대한 중국이 이처럼 강력히 경제 성장을 추구하기 시작했을 때만해도 서구 국가들은 중국의 부상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을 것이다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가정이 깔려 있었었지요. 첫째, 중국의 부상은 주로 경제적인 측면에 한정될 것이다. 둘째, 중국은 적당한 때가 되면 전형적인 서구 국가가 될 것이다. 셋째, 국제 사회는 지금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것이며, 중국은 주어진 현상을 그대로 따르는 유순한 국가가 될 것이다. --- 허나... 저자 마틴 자크는 이 세 가지 가정이 모두 틀렸다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정들이 틀렸다는 근거로 저자는 '중국의 역사'를 들고 있지요.)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르는 국가는 반드시 자신의 경제력을 정치적, 문화적, 군사적 목적에 이용하게 되며 이는 중국에게도 예외는 아닐 것이지만, 서구의 시각에서 보아 이러한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것이라는 상상은 결코 쉽지 않지요. 오랫동안 헤게모니를 장악해 왔던 서구는 자신들만의 가정 속에 갇혀 있기에 다른 기준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보는 항상 서구화의 기준에서만 정의되어 왔으며, 따라서 서구는 개념상 가장 서구화된 사회이기 때문에 인류 발전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다른 사회는 서구화의 정도를 기준으로 진보의 정도를 평가받아야 한다라 생각하고 있다는 거지요. 저자는 여기서 '맥도널드 버거를 찾는 중국인이 많아졌다고 해서 중국의 음식 문화가 서구화되었다고 보는 것'은 어리석을만치 섣부른 판단이라는 단적인 표현으로 이러한 서구의 시각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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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형상 중국은 한족漢族을 포함한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이지만, 그 중 93%정도가 한족으로 이루어져있는, 실질적인 단일민족국가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역사상 한족이 아닌 이민족에 의해 다스려졌던 건 몽고족인 원나라와 만주족인 청나라 뿐이었지만, (한족의)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분열, 외세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은 외국인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지요. 현재에도 위구르나 티벳의 독립 운동에 대해 중국 정부가 그토록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 그들의 독립을 허용하게 되면 여타 소수민족들의 요구 또한 들어줄 수 밖엔 없으며, 그로 인해 결국 중국은 분열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 저자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일반 사실, 고전, 문화예술 등에 관한 간략한 소개를 담고 있는 1-3부에 이어지는 <중국이 걸어온 길>이라는 제목의 4부야말로, 제가 원했던,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좀 기~일게 정리해봅니다.)

 

중국의 차와 도자기 등을 수입했던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일구어낸 자신들의 상품인 직물이 생각만큼 중국에 판매되지 않아 막대한 무역적자를 입게 됩니다. (중국에는 이미 면이나 비단같은 더 좋은 직물들이 있었으니까요.) 이러한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영국은 이른바 '삼각무역'이라는 것을 통해, 인도에서 재배된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게 됩니다. 1729년에서 1800년 사이 중국의 아편 수입량은 20배나 늘어났고, 1839년 중국의 아편 수입량은 이미 천만 명의 중독자가 사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지요. 이처럼 중국내 빈민층에게까지 확산되어진 아편 중독은 마침내 농촌경제의 파탄과, 이로인한 구매력의 상실을 가져왔고, 관료와 병사들의 아편 중독은 국가의 기능마저 마비시킬 정도가 됩니다. 아편 수입대금으로 지급하는 은의 국외 유출이 커짐에 따라 중국 내 은값이 올랐고, 이에 따라 은으로 조세를 납부해야 하는 농민들의 부담이 증가되어 결국 조세미납사태와 이로 인한 재정궁핍이 초래되기에 이르렀지요. 이 와중에, 중국은 18세기 중엽 이후, 외국과의 무역은 오로지 광저우 한 곳만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제한해왔는데, 영국은 더 많은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기 위해 이에 대한 트집을 잡게 되고, 이 트집의 결과가 바로 아편전쟁(1840)이었으며 이 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은 결국 남경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영국과 맺게 됩니다.


아편전쟁은 --- ①산업혁명으로 원료조달과 해외판매시장을 개척해야 했던 서구 열강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지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의 일례였고, ②중국에서는 이로 인해 세계의 중심이라 생각해왔던 중화사상이 무너졌으며, ③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는 굴욕적인 현실을 가져왔습니다만, 역설적으로 ④중국이 근대화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전쟁 패배 직후 중국의 몰락이 시작되었습니다만, 떨어지는 순간 다시 튕겨 올라올 수 있는 바닥이 가까와지는 것처럼, 아편전쟁이 결과적으로 중국에게는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라는 점에서는 이러한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밖엔 없지 않을까요?)

 

아편전쟁의 패배 이후, 중국 내에는 (청나라의 지배계층인) 만주족에 대한 (한족의) 반감이 높아졌고, 이후 '태평천국의 난' 그리고 '중체서용론', '변법자강운동' 등의 개혁운동이 농민·관료·지식인들 사이에서 순차적으로 있었습니다만, 이 모두 부패한 지배층에 의해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중체서용론과 변법자강운동은, 청일전쟁 와중에도 '이화원'이라는 별장을 만들었던 서태후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다더군요. 현재는 이러한 과거를 훌륭한 관광명소로 탈바꿈시켰다라는 이 아이러니는 세계 역사에서 일관되게 보여지고 있는 듯. --;;)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청조가 무너지고, 손문 등에 의해 중국최초의 공화정부가 들어섰지만, 오래지않아 이 역시 원세개를 중심으로 하는 북방 군벌 세력들에 의해 무너졌고, 1915년 원세개는 다시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왕정복고를 시도합니다. 이후 1차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이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청도를 물려받으며, 중국정부에 새로운 '21개 조항'을 요구하자, 북경의 대학생들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반일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5·4 운동'으로 불리우는, 중국이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게 되는 역사적인 사건이지요.

  

(열강에 항거한 애국적 저항운동이라는, 우리의 '3·1 운동'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이 '5·4 운동'이 왜 중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느냐는, 이 운동으로 인해 현재 중국의 국가체제가 정립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 당시 '5·4 운동'을 이끌었던 인물들로 하여금, 열강들의 계속되는 제국주의적 야욕을 경험을 통해, 그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 대신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게 만들었고, 이 때 채택된 체제가 지금까지도 중국을 이끌어오고 있다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입니다. (이것이 저자만의 해석인지, 학계에 널리 퍼져있는 해석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이 책을 통해 제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습니다.)


5·4 운동 이후 1919년 결성된 장개석 중심의 국민당과 1921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은 그 이념의 대립으로 많은 갈등을 겪는다. 손문이 죽은 후, 그 뒤를 이은 장개석은 북쪽의 북벌세력을 견제하는 동시에 공산당까지 토벌한다. 그 결과 공산당의 홍군은 국민당 군대에 쫒겨, 12,000km 에 이르는 이른바 '대장정'을 감행하며 1935년 옌안을 새로운 활동의 거점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중일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일본이 1930년 세계 경제 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부가 재벌과 손잡고 대륙침략에 나선 것이 원인이었다. 일본 육군은 만주지역을 침략하여 괴뢰 만주국을 세운 후 다시 1937년 중국침략을 감행한다. 그 후 난징으로 쳐들어간 일본군이 민간인을 대략 학살하고(난징대학살), 왕자오밍을 주석으로 하는 친일정권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1937년 결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다시 손을 잡고 (2차 국공합작) 항일전쟁에서 일본의 항복으로 승리하게 된다. …… 항일전쟁에서의 승리 후, 각각 중경과 남경에서 국민당과 공산당대표가 협상을 벌인 끝에 장개석은 대만으로 후퇴하고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만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국민당이 중국을 집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국민당 군대는 공산당 홍군의 근거지인 연안을 포위하여 마지막 타격을 가하기 직전, 중일전쟁이 발발하였고 따라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2차 국공합작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마오쩌둥은 '공산주의'를 중국의 공식 이념을 채택합니다. 마오쩌둥의 자력 갱생적 경제발전전략은 (당연한 이치겠지만) 평등주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한솥밥을 먹으며 공동노동, 공동분배를 통해 자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공동체의 형성이 마오쩌둥이 추구했던 이상적이 사회였었었지요. 이를 위해 그는 철저한 당의 지도로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게 함으로써, 사회주의적 평등을 이룩하려 했었습니다. 이처럼 '공산주의'의 기본 이념을 바탕으로 하고는 있었습니다만, 마오쩌둥의 공산주의가 가졌던 소련 공산주의자들의 그것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바로 노동자가 아닌 '농민'들의 역량을 조직화해내는 데에서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을 찾으려 했다라는 것이었지요. 이를 '마오이즘'이라고 부르는데, 한 마디로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쯤이라고나 할까요?

 

중국은 반식민지 반제국주의 투쟁, 장개석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간의 내전과 항일투쟁을 거쳐,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 이래, 사회주의적 개조와 경제개발정책을 통해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1950년대 말과 1060년대 초에 걸친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중국은 경제위기에 봉착하게 되고, 중국지도부 내에서는 노선갈등을 겪게 된다. …… 300만 명의 아사자를 내면서 비참하게 끝난 대약진운동은 사실 미오쩌둥이라는 독재자의 무모한 경제계획이 빚은 결과였다. …… 마오쩌둥의 권위는 실추되고 주석 자리도 류사오치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러한 노선투쟁과정에서 마오쩌둥은 '홍위병'을 동원하여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문화대혁명을 전개한다. …… 문화대혁명은 1966년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딛고 권력을 정비하려고 일으킨 정치투쟁이었으나 '문화'라는 말로 포장되어 있었다.  …… 1966년부터 마오쩌둥이 사망하는 1976년까지 10년 동안 계속된 이 문화대혁명을 통해 지식인, 자본가 등은 큰 고초를 당하게 된다. …… 지식인은 비판과 자아비판을 하고 농촌과 공장으로 내려가야했으며, 돈을 버는 것은 죄악으로 취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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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개인적으로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점을 논하는 것이, 2014년 현재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차이는 지금도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시대에 따라 혹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관점의 변화에 따라 적지않은 중요성을 가진, 의미있는 논쟁을 낳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의 중국의 경우가 바로! 그렇지요.

 

중국이 개혁·개방을 통해 자본주의 국가보다도 더한 자본 중심의 국가로 변해있는데도, 왜 여전히 중국을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는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해 '바로 소유제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근본적으로 개인은 부동산 등의 사용권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 소유권은 여전히 국가에게 귀속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규정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국을 자본주의적 성격이 짙은 국가로 변모시킨 출발점이 되었던 '개혁·개방'은 경쟁과 물질적 보상을 통해 생산성과 능률을 높이려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는데, 이 개혁·개방의 아이콘이 바로 마오쩌둥 사후에 중국 권력의 핵심으로 재등장했던 덩샤오핑이었었지요.

 

마오쩌둥의 이데올로기와 정책에 반대하는 현실주의 정책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말미암아 초래된 최악의 경제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였습니다. '혁명적 정열에의 의존과 심리적 보상에 의한 생산력 발전운동'이라는 마오쩌둥의 사상이 현실적 한계를 드러내자, 덩샤오핑은 '경제적 유인과 과학지식'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주장합니다. 마오쩌둥 사후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은 사회주의적 제도에 시장 법칙 등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는 개혁을 펼치기 시작하는데, 그는 마오쩌둥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에서 ('흑묘백묘론'으로 대표되는) 실용주의 노선으로 급선회 하며, 사상해방, 실사구시를 통해 공산주의를 중국의 실제 상황과 결합시키겠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개혁·개방 정책을 이른바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로 규정하였지요.  

 

경제체제개혁, 대외개방 및 기업활성화 등을 수단으로 했던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은, 하지만 정책오류로 인하여 인플레이션, 실업, 부패, 범죄 등 사회주의체제에서는 사뭇 용인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낳게 되었고, 이에 맞서 덩샤오핑은 '정치에서는 통제, 경제에서는 자율'이라는 이른바 신권위주의 체제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는 또한 인권, 언론자유, 다당제, 선거 등 정치적 자유화를 요구했던 국민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사회주의는 '신념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지요.

 

하지만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의 추진의 가장 큰 오점은, 그가 주장했던 선부론(先富論) 오히려 지역/계층간의 격차만 더욱 벌려놓고 말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러한 격차와 여전히 요원한 정치의 현대화에 대한 중국 국민들의 불만이 점차 쌓여가게 되지요. 중국의 지도자들 중 이러한 국민들의 불만을 인식하고, 민주화의 필요성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이가 바로 후야오방이었는데, 그는 그러한 이유로 1987년 실각되었다가 1989년 4월에 사망합니다. 천안문 광장에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대학생들을 위시한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었는데, 여기서 보통선거, 다당제 등에 관한 요구가 분출되자 중국 지도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천안문 광장에 모여있던 군중들에 대해 발포를 명령합니다. 이로인해 자오즈양 총서기가 해임되었으나, 그 후임에 민주화 운동 확대를 저지했다고 평가되는 장쩌민이 총서기로 취임하게 되지요. (이후의 중국 정치체제에 대한 설명은 복잡하기도 하거니와, 별로 흥미롭지도 않아 대충대충 읽었기에 따로 정리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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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재난'이라고까지 평가된 문화대혁명을 이끌었던 마오쩌둥. 그의 사상이 덩샤오핑 시대를 지나 현재에도 중국인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이유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마오쩌둥의 사상은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정책이 시행된지 10여년 만에 재평가되어져야 할 만큼 그 생명력을 지속한다. 개혁.개방 정책에 따른 중국국민의 정신문제오멸문제, 관료의 부패 문제, 그리고 새로운 계급 구조의 형성 등은 바로 마오쩌둥 사상이 가장 경계하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 p376

저자는 경제효율을 높이는 개혁·개방을 확대하되, 민주주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하는 고민, 즉 개인의 자유, 인권, 정책결정의 투명성, 다당제, NGO, 권력분산, 자유언론, 법의 지배 등으로 표현되는 서구적 민주주의의 도입 요구에 대해 중국 지도부가 과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하는 딜레마야말로 현재 중국이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당면 과제라고 설명하며 이 책을 마무리 짓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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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도약하는 중국」에 대한 감상문이라기보다는, 중국에 대한 공부를 위해 남겨놓는 저의 정리라 생각하며 이 포스트를 썼습니다. 그래서 많이 길어졌죠. --- 무척!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그리 어렵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지나치게 수박 겉핥기식도 아닌, 나름 일반인에게 이 정도면 중국에 대한 개관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정도라 말해도 될만큼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었습니다...만!!!

 

제가 쓰는 블로그에 올리는 글도, 다 쓰고 나면 두 번정도는 다시 꼼꼼하게 읽어봅니다. 어색한 표현은 없는지, 틀린 글자는 없는지, 중복된 내용은 없는지 등등을 확인하고자 함이지요. 개인 블로그에 올리는 글도 이 정도의 확인이 되건만! 돈 받고 팔 목적으로 내놓은 책이 이렇게 형편없는!!! 편집과 교정·감수를 해놓았다라는 걸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수도 없이 발견되는 오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지어는 주요 연도마저도 1800년대와 1900년대를 틀리게 적어놓는 등, 이외의 통계수치들이나 연도들에 대해서도 심각한 의문을 가지고 받아들이게될 수 밖엔 없었던, 이해를 돕기 위해 실려있는 사진들이 어디 인터넷에서 대충 복사해와 붙인 것 같은 조악함은 오히려 애교로 보여지기까지 했던... 그런 심각한 문제점을 아니지적할 수 없네요.

 

이런 출판사의 무능·나태 뿐 아니라, 책의 내용도 군데군데 자신/타인의 저작에서 짜집기해 붙여넣어놓다보니 표현/내용의 반복이 어느 부분에서는 짜증마저 자아낼 정도로 나타나고 있는데, 솔직히 이는 저자의 무관심/조급함에서 비롯되었다라고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좋은 내용들이... 이런 부실한 외피에 가려지는 것이 참 많이 안타깝게... 만 여겨졌네요.

 

다시 한번 쓰자면, 이러한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책의 내용 자체는 중국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이 책을 읽고 마틴 자크의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을 읽었었다면, 그 책을 훨씬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지 않을까 싶을 만큼 말이죠. 중국의 과거와 현재... 는 이래저래 - 소설을 이해하기 위함이건, 혹은 현재의 국제 정세를 이해하기 위함이건 -  저에게 상당한 흥미를 던져 준다는...

 

 

 

★본문과 각주에 소개된 책들의 감상문   

- 위화 著,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마틴 자크 著,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

- Ji Li Jiang 著, Red Scarf Girl

- 장안거 著, 붉은 땅의 기억

- 류전윈 作, 1942년을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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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4-09-06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글을 정독했습니다.남께서 책을 인용한 부분을 보니 저자 정인화 씨가 대장정과 2차 국공합작, 그리고 마지막 국공내전에 대해서 순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서 알려드리고자 합니다.이런 뒤죽박죽이 된 원인은 장학량이 장개석을 사로잡은 서안사변의 시기를 넣지 않고 있어서입니다.대장정 끝나고 공산당이 연안에 정권 수립-장개석의 국민당이 소탕작전 실시-장학량이 장개석에 반기 들며 서안사변(1936년 12월 12일)발발-국공 교섭-항일을 위한 국공합작 성사 그리고 난 다음에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의 노구교 습격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납니다.즉 중일전쟁 이전에 2차 국공합작이 성사된 겁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도 국공 간 교섭이 결렬되고 대규모 내전이 몇 년 간 일어난 다음 장개석이 대만으로 쫓겨갑니다.저자는 이 대규모 내전을 빼고 서술했군요.역사에 대해 서술할 땐 사건의 선후관계가 파악되지 않으면 독자가 헷갈리게 됩니다.저자가 아무래도 중국 근현대사 자체에 대한 기본 지식을 파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살가죽 2014-09-06 17:25   좋아요 0 | URL
정성스런 덧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일단... 저자가 잘못 기술했다 단정짓기보다는 제가 인용을 잘못,. 혹은 지나치게 압축해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라는 걸 먼저 말씀드리고 싶네요.

지금은 다시 확인할 수 없기에, 며칠내로 다시 확인해보고 답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4-09-06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랬군요. 답글을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