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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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973년에 발표되었으며 <독일 청소년 문학상>을 받은 이 작품에 대해, 네이버 지식백과는 '동화 소설'이라는 장르를 부여해 주고 있더군요. '동화(童話) 소설'이라는 단어가 정확히 뭔지 이해되진 않습니다만, ('동화'라니까) 이 소설을 내 아이에게 선뜻 읽어보라 권할 수 있을만큼, 그리하여 이 작품을 다 읽고난 후 내 아이가 묻게될 질문들에 대해 솔직히 대답해줄 수 있을까하는 스스로의 (진짜!) 의문, 그리하여 이 책을 자신있게 자녀에게 권해줄 수 있는 부모님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에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싶기에 --- 사뭇 주저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종원군의 책상에 놓아주었더랬습니다. 인공 모모가 던져주는 그 간단한 의문에 대해 대답해줄 수 있는 자신이 전... 전혀 없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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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일들은 해결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p25)

어느 날 갑자기 한 마을에 나타난 어린 소녀 모모. 그녀는 자신의 나이도, 사는 곳도 모릅니다. 오로지 자신의 이름이 '모모'라는 것만 알고 있지요. 모모를 불쌍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은 모모에게 거처할 공간을 지어주었고, 자신들의 음식을 조금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로부터 모모에게로 향하는 일방적인 동정이 시작되었던 거지요. 하지만 이내 곧!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모모에게 의지하고 모모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왜였을까요? 

꼬마 모모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재주였다.(p22) ……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커다랗고 까만 눈으로 말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었다.(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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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중세 시대 때 공동토지에서 일했던 평범한 농부 한 사람이 연간 15주 정도 일하면 1년 동안 생활하는 데 필요한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200년 동안 유래없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중세시대의 소작농들보다도 더 죽어라고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 데이비드 보일 & 앤드류 심스 共著, 「이기적 경제학 이타적 경제학」중. 사군자 刊, 2012.

이발사 푸지 씨 역시 이 불가사의한 의문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인생을 살려면 시간이 있어야 하겠거늘, 일에 매달리다 보면 제대로 된 인생을 누릴 시간이란 언제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었죠. 이게 뭐 서양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닌겁니다. 저도,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역시 '시간'이란 것이 '나에게 풍족하다!'라 말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모모가 얼마든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 그것은 바로 시간이었다."(p25)


​모모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거나, 혹은 그녀가 타임머신이라도 가지고 있어서였을까요? --- 「이기적 경제학 이타적 경제학」의 두 저자가 경제학적으로 설명해주었던 내용을 작가 미하엘 엔데는 '동화 소설'이라는 장르의 이 작품을 통해 그 핵심을 콕! 집어주고 있습니다. 대체 왜? 우리에겐 항상 시간이 부족하며, 더욱 더 열심히 일을 해도 삶은 그리 쉽게 좋아지지 않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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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여자 친구를 향해 할 수 있는 거라곤, 무작정 기다리는 것밖엔 없던 시절이 저의 20대였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제 시간이 되기도 전부터 어디쯤 왔느냐라 묻는 문자와 전화를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요. --- 20대 때의 하염없는 기다림을 '설레임' 혹은 '아릿함'이라 표현했던 제 여자 동창의 글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당시에도 그건 당황스러움과 불편함이었었으며, 지금의 기준엔 매우 불합리한 행동이라 여겨질 뿐인거죠. (연애감정이란 게 원래 비합리적인 거다라 하면 할 말이 없지만서도. --;;) 

세상은 이처럼 빠르게 변했고, 또 실제로 빨라졌습니다. 3G완 비할 수 없이 빨라졌던 LET도 모자라 LTE-A라는 것이 이내 등장했고, 저 역시 네비게이션에게 짧은 길보다는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해내라 요구하고 있지요. 이러한 빠름에의 갈구 혹은 조급함은 대체 어디서부터 생겨난 것일까요? 우리 민족 고유의 특성인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을 교육의 힘/탓으로 돌리는 것도 뭔가 무책임해보입니다. 대체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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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회색 신사'는 '시간을 빼앗아가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그럴 듯한 논리를 펼치며 사람들에게 시간을 아끼라!라 요구하지요. 그 회색 신사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너무도 완벽하거든요.  


인생에서 중요한 건 딱 한 가지야. 뭔가를 이루고, 뭔가 중요한 인물이 되고, 뭔가를 손에 쥐는 거지. 남보다 더 많은 걸 이룬 사람, 더 중요한 인물이 된 사람, 더 많은 걸 가진 사람한테 다른 모든 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거야. 이를테면 우정, 사랑, 명예 따위가 다 그렇지.(p130)

회색 신사는 바로 '자본주의'를 상징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좀 더 범위를 좁히자면, (어느 상황에서건 항상 욕을 먹기에 일견 불쌍한 생각마저 갖게도 되는) '신자유주의'이지요. --- '자신의 일을 기쁜 마음을 갖고 또는 애정을 갖고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p96)으며, '가능한 한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한 한 많은 일을 하는 것, 그것 만이 중요'(p96)하다라 우리는 가르치는 그 무엇! 경제학을 공부한 저로서는 그 무엇이 다름아닌 '자본주의의 안좋은/불편한 속성'이라고 밖엔 생각되질 않습니다.

자! 이 작품 속에서 회색 신사들이 나쁜 인물로 그려지고 있기에, (위에 인용해 놓은) 그들의 말 역시 당연히 틀린 말일 것이라 간주하고 싶지만, 그렇게 간주하고 싶어도 차마 할 수 없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들은 어떠할 지 모르겠으나) 아빠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전, 이제까지 제 아이에게 바로 위의 말들을 해왔었기 때문이지요. 시간을 아껴라, 허투르 쓰지 마라,라고만 말해주었지, 시간을 아껴야 하는지, 그렇게 아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던, 그런 아빠였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왜 그랬었느냐?란 질문에 하나의 변명을 꺼내어 보자면

저 역시... 몰랐었기 때문이었노라 대답할 수 밖엔 없습니다. 아낀다고 아꼈음에도 시간은 항상 저에게 모자랐었고, 행여 시간이 좀 남았다 하는 경우가 있었더라도, 그것을 위해 행했던 노력의 강도에 비해, 그 '좀 남는 시간'들은 항상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곤 하더군요. 저도 몰랐던 겁니다. 왜 시간을 아껴야 하며, 그 아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말이죠.

결국!!!

이 모든 건 예의 '수단과 목적의 전이(轉移)'때문이 아닐까하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 인간 생활을 편리하게 해줄 목적으로 탄생된 화폐라는 '수단'이 어느 순간부터 (축적해야하는) '목적'이 되어버렸고, 더 나아가 (단지 삶의 수준을 측정하는 수단으로 고안된) GDP라는 것이 만인의 최종 목표가 되어버렸기에 우리는!!! --- '심지어 여가 시간까지도 알차게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주 빠른 시간 내에 가능한 한 많은 즐거움과 휴식을 줄 수 있는 오락을 찾았다. 그랬기에 그들은 축제도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 …… 꿈을 꾸는 것은 죄악처럼 여겨졌다"(p96)의 삶을 살게 된 거죠. 그리하여 예의 내 아이를 위해서조차 시간을 낼 수 없게 된 겁니다. 함께 놀아주고 함께 고민하는 것보다는 아이에게 핸드폰 게임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려주는 식의 간편한 방식을 선호하게 된 거지요. 그렇게! '나는 시간을 아꼈다'라 위로를 받고 싶은 거니까요.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을 더 많은 용돈과 최신식 장난감으로 대치받은 아이들은 '모두들 버림받은 느낌'(p107)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들의 얼굴은 점차 시간을 아끼는 꼬마 어른처럼 되어 갔다. 아이들은 짜증스럽게, 지루해하며, 적의를 품고서, 어른들이 요구하는 것을 했다. 하지만 막상 혼자 있게 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모든 일을 겪은 후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소란을 떠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것은 즐거운 소란이 아니라 미쳐 날뛰는 듯한 고약한 것이었다.(p253)

​이렇게 변할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을 향해 우리 어른들이 내린 결론이란 건 고작 --- '중2병'이라는, 명확하게 질병으로 표현해 버리는 것 뿐이었죠. 어른들의 잘못이 아니라, 순전히 그건 육체적 성장과 정신적 성장간의 불균형이 초래한 '과도기적 질병'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이 진단이 전적으로 틀렸다라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한 과도기를 지날 수 밖에 없는 아이들에게 대체 어른들이 아무 것도 해주질 않으면서 걱정만 하고 있다라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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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무조건! 그리고 당연히 중학 시절과 고교 시절은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좋은 대학엘 들어가서도 예의 좋은 직장을 위해 대학 생활은 변질될 수 밖에 없지요. 좋은 직장엘 들어가면 승진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동안 남아 있고싶다란 것이 스리슬쩍 하나의 목표가 되어버리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청춘들은 그리하여! --- 이도저도 아닌, '한 10억쯤 모으는 것'을 그들의 (꿈의) 목표로 가지게 되는 겁니다. 물론! 그 10억으로 뭘 하려고?란 질문엔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더라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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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건 꿈이 이루어지는 거야. …… 나는 더 이상 꿈꿀 게 없거든."(p281)

적어도! 나의 아이가 이런 생각을 갖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의 아이 뿐만이 아니라, 그대들의 아이들, 그대들의 조카 모두가 이런 생각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아이들이 이런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요? --- 저자 미하엘 엔데가 알려 주고 있는 해답은 예상외로 간단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단지 실천에 옮기지 못해왔을 뿐.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는 전적으로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니까. 또 자기 시간을 지키는 것도 사람들 몫이지."(p217)


'시간'이란 것 역시 일종의 수단일 뿐입니다. 하루는 24시간으로 나누고, 다시 한 시간을 60분으로 나누는 것도, 1년을 12달로 나누는 것 모두 우리의 생활에 편리함을 더해주기 위한 수단적 장치들일 뿐이죠.


우리가 70세까지 살게 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우리가 소유하게 되는 총 시간은 2,207,520,000초입니다. 책에 나와있는 표현 그대로 이 어마어마한 시간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나의 재산'이지요. 이 어마어마한 재산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똑같이 주어집니다. 작가 미하엔 엔데는 이 어마어마하고 공평한 각자의 재산을 다음과 같이 사용하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가능한 한 짧은 시간 내에 가능한 한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마다 무슨 일을 하든 자기가 필요한 만큼,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시간이 다시 풍부해진 것이다.(p360)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며, 모든 사람에게서 공평하게 칼처럼 사라져가기도 합니다. 자! --- 그런 '시간'이란 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시간이 없는지 정말 이상해!'(P109)라 묻는, 단순하지만 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대한 작가 미하엘 엔데의 조언이 궁금하시다면 바로 이 책! 




▶ 짧은 한두 마디 : 바꾸어야 하고, 바뀌고 싶거늘, 과연 난 바뀔/바꿀 수 있을까?

※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한 책들


- 데이비드 보일& 앤드류 심스 共著, 이기적 경제학 이타적 경제학

- 와타나베 이타루 著,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마이클 센델 著,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엄기호 著,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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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한국인 - 대한민국 사춘기 심리학
허태균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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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를 행복한 지옥으로 만든 사람은 바로 우리 한국 사람들 스스로다. 결코 누군가가 몰래 만들어놓은 함정에 우리가 억지로 빠져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은 바로 우리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넘어서, 그냥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p28)

간단하게 혹은 좀 쎄게 말해서 --- (이 표현에 동의하건 하지 않건) '헬조선'이라 불리우(기도 하)는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든 건 바로 대한민국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헬조선'에 살고 있는 까닭은 우리 스스로가 '헬조선인'이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현재의 대한민국이 '헬조선'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의 논리에) 100% 동의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을 다 읽고나면 당신도 역시 100% 동의하게 될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400여 페이지를 읽어가는 동안,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내용들에 단 한 마디의 반박도 할 수 없었었던, (1+1=2라는 수식이) 단지 '진실이기 때문에 진실이라 말하는 것'을 넘어 '이러하기 때문에 그것은 진실이다'라 말해주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이지요. 「어쩌다 한국인」이란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실은 <이래서 한국인은>이라 말해주고있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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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일어난 변화는 인류가 이 지구상에 출현한 이후 몇백만 년 동안 겪은 변화를 능가한다. …… 그러한 변화가 가져다 주는 충격과 혼란은 한국 사회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산업화의 대열에 갑자기 뛰어든 사회일수록 훨씬 증폭되어 나타난다. 우리 사회의 노인들의 체험 속에는 보릿고개의 처절한 기억과 공업화의 힘찬 약진,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정보화와 세계화의 물결이 공존하고 있다. …… (이러한) '비동시적인 것들의 동시성'은 우리 삶의 뚜렷한 발자국이다.

- 김찬호 著 「사회를 보는 논리」 중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여기서 정보사회로. 한국에서는 이 과정이 유난히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다. 서구에서는 전근대와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 비교적 큰 시간차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이 세 가지 시간대가 공존한다. 근대화의 급속함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거리를 좁혀 한국인 몸속에 강한 전근대성을 남겼고, 뒤처졌던 과거에 대한 기억에서 오는 특유의 성급함은 현재와 미래 사이의 거리를 좁혀 한국을 그 어느 곳보다 미래주의적인 나라로 만들었다.

- 진중권 著, 「호모코레아니쿠스」 중

사회학자인 김찬호의 「사회를 보는 논리」, 역시 사회학자인 노명우의 「세상물정의 사회학」 그리고 미학 전공의 진중권이 쓴 「호모코레아니쿠스」 --- 이 세 권의 책이 견지했던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과 이 책의 저자인 사회심리학자가 바라보는 시선은 정확히 일치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차이점이라면, 위 세 권의 책들이 현상을 '설명'하는 데 주안점을 가졌었다면, 「어쩌다 한국인」은 사회심리학의 도구로 (발가벗겼다라 말하고 싶을 정도로) 현상을 '분석'하고 있다라는 것일 뿐.


저자는 현재의 한국 사회를 '사춘기'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회 역시 사춘기의 시기에 접어들게 되면 당연히 가치관의 혼란이 생겨날 수 밖에 없다는 거지요.


심리학적으로 보면 현재의 한국 사회는 한국 전쟁 이후에 새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게 더 합당하다. … 이것은 다시 말해 현재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정치 제도, 교육 제도, 사회 시스템에서 전통의 그것과 유사한 것은 거의 없다는 의미다.(pp7-8) ……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수많은 가치들은 더 이상 그들의 심리와 행동을 지배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의 심리는 극심한 진통을 겪으며 그때 다시 탄생되었다. 이전까지 한국인의 문화와 정신 깊숙이 자리해 잊히지 않았던 가치들은 아마도 아이가 원래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유전자와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신생아기를 거쳐 폭풍같이 성장하는 유아기를 지나면서 한국 사회는 70년 동안 엄청난 성장을 해왔다. 그 폭풍성장기를 막 끝낸 한국 사회의 심리는 지금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다. … 한국 사회가 그런 무서운 질풍노도의 시기에 들어서고 있고 앞으로 거쳐 갈 것이니, 어찌 이 사회가 혼란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pp9-11)

​여기서 필자는 한국인의 유전자, 즉 한국 사회를 한국 사회답게 만드는 동력을 다음의 6가지로 분류합니다. 다른 사회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특성들이기는 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특히 강하게 가지고 있는 그 6가지의 특성들은 --- ①주체성, ②가족확장성, ③관계주의, ④심정중심주의, ⑤복합유연성, ⑥불확실성 회피 

사실 이처럼 특정 렌즈로 모든 것을 분석해내려는 시도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부분'을 설명하는 것에는 유용하지만 '전부'를 설명하려다보면 예의 어거지스러운 무리수가 등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헌데 이 책은!!! ---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에서 장하준 교수가, 현재의 세계 경제 문제들을 풀어내기 위해선 각 학파들의 주장을 사안별로 조합해낼 수 있어야 한다라 했던 것처럼, 이 책은 한국 사회를 분석해감에 있어서 위 6가지의 특성들을 때로는 단독으로, 때로는 절묘하게 조합하여 설명해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갑질 논란, 세월호 사건,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사과 거부, 사교육의 문제점 그리고 인문학 열풍등까지, 최근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거의 모든 문제점들에 대해 더 이상 명쾌할 수 없을만큼 정확히 진단해주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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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상식 속 나라 사이의 관계는 …… 수직적이기만 하다. 수직적 관계만을 머릿속에 담고 있는 사람은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 앞에선 필요 이상으로 당당하지 못하고, 뒤에 있다고 생각하면 근거 없이 깔보기 일쑤다. …… 그래서 입만 열면 어떤 주제든 상관없이 "미국에서는…"이나 "선진국에서는요"를 들먹여야만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아적인 사고방식이 전문가의 식견으로 둔갑하고, 미디어는 정체불명의 유령 기호인 '선진국'을 들먹이며 외국에 대한 열패감을 조장하느라 바쁘다.  

- 노명우 著, 「세상물정의 사회학」 중

​이 책의 저자 역시, 우리 사회가 수직적 집단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여기에 한국인의 <관계주의>와 <주체성>이라는 특질이 더해져 단순한 갑을관계를 고약한 갑질로 전환시켜 버린다는 것이죠.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자라난 한국 기성세대들은 …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정체감과 존재감을 확인할 충분한 기회 없이 지난 60년을 달려왔다. 그래서 사실 한국의 많은 기성세대들의 존재감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누구의 아버지, 누구의 자식, 누구의 친구 등과 같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이런 관계적 존재감이 충분히 느껴지지 않는 상황은 너무나도 불안하고 동시에 좌절스러운 상황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 갑질은 바로 그런 존재감의 상실에서 비롯된 분노가 원인이었다.(p79)

이처럼 <관계주의>의 특성으로 인해 발생된 한국인의 분노는 예의 그것의 해소를 위해 항상 '나쁜 놈' 하나를 찾아내 그 '나쁜 놈'을 때려잡아야만 풀립니다. 현실에서 발생되는 수많은 사고들이 거의 예외 없이 '인재(人災)'라 불리우는 것 역시, '나쁜 놈'을 기어코 찾아냈기에 만들어지는 조어(造語)라는 거지요. 심지어! --- '설사 기계나 시스템의 잘못이라고 밝혀져도, 그렇게 만든 '사람'을 찾는 데 더 집중한다. 만약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날씨가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이 문제를 일으켰다면, 그것을 예측하고 대비하지 못한 사람을 찾는다.'(p178)


철저히 가치 중립적 입장에서 그저 '한국인은 이렇다'라 분석하고 있는 저자는 이 자체를 문제라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정작 문제는 '책임자를 때려잡았으니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연결'(p182)되는 데에 있다라는 거지요.

"우리의 분노는 나쁜 놈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그놈이 충분히 처벌받는 것을 보면 정의가 실현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p183)

​이처럼, 자신들의 분노를 시스템이나 제도로 해결하기 보다는 나쁜 놈을 찾는데에만 집중하는 한국인의 특성은 새로운 죽일 놈이 등장하게 되면 예의 그 전철을 고스란히 반복할 수 밖에 없게된다라는 데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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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6가지 한국인의 특성들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이 바로 <복합유연성>이었습니다. '자신이 믿거나 생각하는 바와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해도, 그리 크게 불편해하지 않는다'(p281)로 정의되는 <복합유연성>이, 현재 한국인들에게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내려는 무엇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크게 한국 사회에 (부정적인 측면으로) 작동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한국인의 <복합유연성>은 급속한 경제 발전 과정에 있어서, 우리가 지켜냈어야 했던 인간의 존엄성이라든가 정의와 같은 추상적 가치들을 너무도 쉽게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눈앞의 과제들을 위해 포기하도록 작용했습니다. 과거에 그랬을 뿐만 아니라 --- (저자 역시 '유연성'이라는, 사뭇 긍정적인 단어로 이를 표현하고 있기는 하나) 결국 '일관성이 결여된 선택'으로 현시(顯示)되곤 하는 이 <복합유연성>으로 말미암은, 현재 한국 정치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위 '발목잡기' 현상이야말로 한국인들 스스로가 만들어내었다라 저자는 말하고 있지요. 

 


한국인들은 일관성이나 정책의 효율성보다는 조화를 원했다. ……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진보 대통령에 보수 다수당 또는 보수 대통령에 진보 다수당을 가지는 조화로운 비극을 경험해왔다.1  …… 한국 사람들은 한마디로 패자가 없는 승자를 원한다.(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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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책을 통해 저의 기존 사고방식을 가장 크게 흔들어주었던 문구는 '세상에서 가장 옳은 명제는 어쩌면 가장 잔인한 명제인지도 모른다2'라는 말이었더랬습니다. 의문의 여지조차 없이 받아들였던 것에 대한 엄청난 충격이었었지요. 이제 또 하나의 문구가 기억되기 시작합니다. 그건 바로 ---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표현에 대한 저자의 다음과 같은 지적입니다.


이런 제목은 칭찬 때문에 춤을 추는 고래는 원래 춤추고 싶지 않았다는 진실과, 고래의 의도와 상관없이 어떻게든 그 고래를 춤추게 하려 한다는 강제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사실 원래 춤추고 싶어 하는 고래에게는 칭찬이 필요 없다. 춤추고 싶지 않거나 춤출 이유가 없는 고래를 춤추게 할 때만, 칭찬과 같은 외재적 동기가 필요하다. …… 바다의 고래는 그냥 춤추고 싶어서 춤춘다. 이들에게는 칭찬이 아니라 아마 그들만의 음악이 필요할 거다. 그럼 알아서 춤춘다.(p324)


아이의 교육에 있어서 금과옥조스럽게 사용하여 왔었던 이 말에, 내 아이가 진정 춤을 추고 싶어하는가에 대한 본질적 의문 없이 그저 칭찬이면 그를 춤출 수 있게 할 것이라 생각했었던 저에게 저자의 지적은 정말로 가슴 뜨끔하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게 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행해지고 있다라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이 세상에는 춤추고 싶은 고래와 춤추고 싶지 않은 고래가 있는데, 이 모든 고래를 춤추게 하려고 칭찬과 채찍을 휘두르는 것이다. 학생들은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서 너무나도 다양한데, 한국의 교육은 모든 학생이 비슷한 것을 해야한다고 강요한다.(p324) …… 한국은 대부분의 청년들에게 똑같은 세속적인 성공을 위한 삶을 권하고, 강요하고, 칭찬한다. 한귝의 교육체계에서는 세속적 성공과 그것을 위한 학업만이 거의 유일한 가치다. 그래서 한국 청년들은 세속적인 것 외에 다른 가치를 모른다. 그들의 포기는 진짜 포기다. 가진 것도 없이, 아무 의미도 없이, 그냥 실패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회에서는 여전히 … 마치 그들 때문에 한국 사회가 어려운 것처럼 얘기한다.(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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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한국은?"이란 질문에 더 이상 명쾌할 수 없을만큼 정확하게 "이래서 한국은!"이란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는 책이었습니다. 너무도 명쾌하기에 사뭇 슬프다,라는 감정까지도 느껴졌었었지요. 이런 멋진 책에 대한 감상문으로는 너무도 형편없다라는 생각이 (결코 겸손의 립서비스로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들기만 하기에, 한국 사회가 '헬조선'이라 불리우는 것에 공감을 하든, 반감을 가지고 있든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두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할 모두에게 반드시 읽어보시라 권해드리고 싶은 책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대체 왜 이런거야?'라는 질문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책임한 질문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선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에 대해 '우리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겁니다. 그리고 이 책을 --- 바로 그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선 정점(頂點)에 서 있는 책이라 감히 꼽아봅니다.



▶ 짧은 한두 마디 : 한국인이라면 닥치고 부디 필독!!! 


※ 한국, 그리고 한국인에 대해 알려주고 있는 책들

- 김찬호 著,사회를 보는 논리」 · 「문화의 발견

- 노명우 著,세상물정의 사회학

- 진중권 著, 호모 코레아니쿠스

- 김두식 著,불편해도 괜찮아

 

  1. 하지만, 이명박 정권 이후부터 한국인들의 정치적 선택은 대통령과 다수당을 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일관되게(!) 선택하고 있지요. 이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현재의 야당들이 깊이 새겨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 이제까지는 난 짜장면, 너에게는 짬뽕을 선택해주어왔지만, 짬짜면이 새롭게 등장하였기에 더 이상 그런 구분된 선택 자체가 필요 없어졌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극보수로부터 중도좌파스런 이미지의 인물들이 한 정당에 속해 있는, '짬짜면'스런 구성원을 지니고 있는 현재의 새누리당이야말로 한국인들의 기호에 딱 들어맞는다라는 거지요.
  2. 김형민 著, 「그들이 살았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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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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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비교적 간단한 구조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뻔하디 뻔한 줄거리와 진부하기 짝이 없는 주제를 가지고 있는,

사뭇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이야기였기도 하지요.


● 박민우 - 60대의 자수성가한 건축가. 아내와 딸은 미국에 있으나, 가족의 정같은 건 거의 없음.

● 정우희 - 힘든 삶을 보내고 있는, 29세의 예술대학을 나온 초짜 극작가 겸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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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타샹즈1

'비는 부자에게도, 가난한 사람에게도 내린다. 의로운 이에게도, 의롭지 못한 이에게도 내린다. 그러한 사실 비는 공평하지 않았다. 본래 공평하지 않은 세상에 내리기 때문에...'p287)

​「낙타샹즈」의 주인공 샹즈는 아무리 악착같이 일을 해왔어도, 지금도 태어날 때부터 공평하지 않았던 세상은 여전히 조금도 공평해지지 않았다라는 걸 깨닫고 맙니다. 한때는 '애시당초 왜 그렇게 갖은 노력으로 부지런히, 성실하게 살았을까'(p358) 후회도 했었었지만, 가난한 자신에게는 사랑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된 지금에는 후회할 만한 여력조차 그에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샹즈가 선택했던 삶의 방식은 다음과 같았었지요.

'샹즈는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정의가 없는 세상에서 가난뱅이가 개인의 자유, 그것도 정말 보잘것없는 약간의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모진 마음 뿐이었다.'(p309)

스스로를 '산동네 출신'이라 표현하는 박민우의 과거는, (그의 출신지역이 말해주듯) 매우매우 힘든 시절이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힘든 시절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사회적으로는) 성공해있는 현재를 만들어 준 가장 커다란 계기가 되어주었죠. : "나는 … 공부 하나는 열심히 했다. 그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어떻게든 이런 곳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굳은 결심이 있었다."(p50)​

 

 

60대의 박민우가 '주어진 삶의 조건으로부터의 탈출'을 결심하고, 실제 그 탈출을 이루어냄으로써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인물인 반면, 20대의 정우희에게 주어진 삶의 고단함은 어찌해도 피할 수 없는 현재의 상황입니다. 어쨌든 그녀 또한 ('이런 곳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박민우의 목표처럼) '연극'으로부터 '꿈이 주는 위안'(p39)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지요.

과거와 현재라는 시점(時點)이 변했었어도, 예의 비는 공평하게 모두에게 내리고 있으나, 여전히 세상은 그다지 공평해지지 않았노라, 심지어 공평해지기가 훨씬 더 어려워졌노라는 현실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차이점이라면 다만!

'이 동네에서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한다는 굳은 결심을 세우고 대학 입시 공부에 매진했'(p75)던 박민우는 결국 그 꿈을 이룰 수 있었었으나, 즉 신분 변화의 도구란 것이 존재했었었고, 존재했었을 뿐만 아니라 획득 가능했으며 작동까지도 했었던 시대를 살았던 박민우의 시대와는 달리 --- '둘 다 연애질이나 하고 노닥거릴 처지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p83)라면서도 (이것이 연속된 좌절의 결과 생성된 체념인건지 혹은 그것을 이겨낸 '모진 마음'의 결과인건진 알 수 없으나) '정우희'로 대변되는 현재의 청춘들은 그러한 (뭔가 급격한 반등의 여지조차 없기만 한) 처지조차 '알고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즐'(p83)겨낼 수 있을 뿐입니다. '피할 수 없으니 즐기기라도 하자'랄까요?


 

【 무정2   

​"김 장로의 집에 가기도 불쾌하고 선형을 대하기가 불쾌하다 하더라도 그 불쾌한 것이 오히려 아주 사랑하는 자를 잃어버리고 실망하여 슬퍼하는 것보다 나았다. 전신이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보다 한 팔이나 한 다리를 베어 내는 것이 나았다."

'정다운 마음과 사랑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여인 영채와, 그런 영채는 자신에게 선사해줄 수 없는 인생의 극적인 반전을 줄 수 있는 여인 선형과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 형식은 결국 --- '한 팔이나 한 다리를 베어 내는 것이 나았다'라는 말로써 선형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작가 이광수는 "장래의 희망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현재를 가장 가치 있는 듯이 보려 하되 장래에 큰 희망을 가진 형식에게는 현재는 아주 가치 없는 것이라"라는 말로 변명을 해주고 있지요.3

일류 대학에 합격한 박민우는, 사회의 주류에 속해 있는 부잣집에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감으로써 자신에게는 굴레였었던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오게 됩니다. 스스로 고백하고 있듯, '고등학교 무렵가지만 가족의 일원'(p50)이었다라는 건 결국 그 스스로의 선택이었다라는 것이죠. 예의 '읍사무소의 서기였던 아버지의 신분으로는 좀처럼 접근하지 못할 사람들의 세계에 들어설 기회'(p112)라 표현하고 있는 입주과외 역시 (신분이동이라는 그의 목표를 위한) 그 스스로의 선택이었습니다. 여기서,

박민우가 털어놓고 있는 --- 자신 그리고 (자신의 세대가 겪어왔던 시대와, 그 시대 속에서 이루어졌었던) 자신의 선택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아니 변명스러운 변명은 차라리!!! 전신이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보다 한 팔이나 한 다리를 베어내는 것이 낫다 생각하기에 한 팔을 베어냈다라 말하는 형식에게 (그리고 춘원에게) 오히려 더 인간적임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역할만을 할 뿐이었습니다. 자신이 선택해던 행로의 결과에 대해 박민우라는 인물이 '좌절과 체념'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숨가쁜 가난에서 한숨 돌리게 되었던 때인 팔십년대를 거치면서 이 좌절과 체념은 일상이 되었고, 작은 상처에는 굳은살이 박혀버렸다. 발가락의 티눈이 계속 불편하다면 어떻게든 뽑아내야 했는데, 이제는 몸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어쩌다가 약간의 이질감이 양말 속에서 간신히 자각될 뿐.(P112)     


 

【 아가(雅歌)4

한줌도 안 되지만 정채(精彩)와 영화(榮華)를 타고난 존재들, 우리보다 잘나고 날래고 똑똑하여 운명의 편애를 받는 이들은 또한 얼마나 자주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하고 속절없는 열패감(劣敗感)이나 천박한 시기로 스스로를 쥐어뜯게 하는가. 그런 그들에 비해 우리보다 못나고 더디고 모자라는 이들은 존재 그 자체가 큰 위로이다. 그들로 하여 우리는 안도 속에 자신의 삶의 돌아볼 수 있고 성실과 경건의 결의까지도 다질 수 있게 된다. 유식한 말로 하위모방(下位模倣)이나 아이러니 양식이란 것의 효용도 이에 다름없을 것인데 당편이는 옛 고향 사람들에게 바로 그 살아 움직이는 효용이 아니었는지.(p115)

 

이문열의 소설 「아가」에 대해, 사실 비난에 가까운 감상문을 남기긴 했었습니다만, 예의 위 인용문과 같은 한 시대와 사회에 대한 적나라한 분석을 보여주는 작가 이문열의 매력까지를 비난할 순 없습니다.5 작가 황석영 역시 이 작품 「해질 무렵」을 통해, 어려웠던 시절에 좋아했었던 차순아와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박민우의 심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함으로써, (한때는 자신도 그 집단의 일원이었었으나) 박민우의 '(벗어났다는 것으로부터의) 안도와 (벗어난 이 상황을 계속 유지하겠다라는) 결의'를 보여주고 있지요. 

산동네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차순아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 나를 언제든 그곳으로 다시 데려다놓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었는지도 모른다. … 이미 다른 세계로 넘어온 자의 익숙했던 자기 세계에 대한 불편함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더 이상 우스꽝스런 빈민가의 아이들 놀음에 한통속으로 끼어들기가 싫어졌다.(p146)

​당시의 박민우는 드디어 '이제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내 삶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다'(p152)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었던 겁니다. 하지만 --- 작가 이문열이 한 사회와 시대를 대상으로 하여 적나라하게 그 (필연적) 속성을 말해주고 있다라면, 이 작품에서 작가 황석영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속성으로 (게다가 매우 적극적으로) 한정짓고 있으며, 그마저도 뭔가 주인공이 선뜻 말해내지 못하고야 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한 마디로 작가가 솔직하지도 못하며, 대범하지도 못했다라는 겁니다.   




【 투명인간6

이문열의 「아가」가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다라면, 성석제의 「투명인간」은 그 '시대'를 살아왔던/만들어왔던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두 작품은 각기의 뚜렷한 초점을 가지고 있었죠. 헌데 말입니다 --- 이 작품 「해질 무렵」은 이도 저도 아닌 매우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자연환경이 악화돠면 한 집단에 속한 들소 가운데 약한 개체는 맹수들에게 사냥당해 죽고만다. 그럼으로써 전체 집단의 안전과 건강함이 유지된다. …… 만수는 약하고 보기 싫기까지 한 들소였다. 곧 도태되고 말 운명이었다.(pp147-148)

「투명인간」의 주인공 김만수는 일생을 통해 약자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끝내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타인으로부터 위와 같은 평가를 받는 삶을 살아가게 된 이유를 작가 성석제는 '가난이라는 조건 탓에 그의 가치관이 그렇게 성립될 수 밖엔 없었다7'라 분명히 말하고 있었죠.8 그렇다면 작가 황석영의 시선은 어떠할까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늘 똑같애. 나아지는 것두 없구 달라지는 것두 없어."(p120)


일견! 그 역시 성석제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만 --- '산동네에 사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이를테면 오르지 못할 나무처럼 보였을'(p66) 여고생 차순아를 '등하교의 버스 안이나 길에서 흔히 마주치는 애들'(p66)이라 생각했었던 박민우를, 그리고 결국 (물론 그의 노력이 있었었지만 어쨌든) 이 사회로부터 '자넨 강자야'(p30)란 평가를 받는, 한 마디로 기적을 이루어낸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은연중에 '우리 같은 사람들은 늘 똑같애'라 말하고 있는 가난한 자들의 처지를 여전히 '우스꽝스런 빈민가의 아이들 놀음'쯤으로 이해해버릴 수 있는 여지를 마구 던져주고 있는 겁니다. 솔직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자신의 본심을 완전히 감추지도 못한 그런 작품이란 생각밖엔 들지가 않는 결정적인 부분이었지요. 게다가!!!

【 사당동 더하기 259  

'나로서는 형편없는 산동네의 가난을 벗어나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며, 그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의 내면은 좀 더 복잡할 수밖에 없다.'(p143)

​위와 같은 반투명의 가림막스런 구절을 넣어놓음으로써, 현 사회의 강자로서 자신이 저질러왔던 모든 행동들에 대해 독자의 동정을 구걸하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 '샛바위에 붙은 패류의 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던 꼬방들은 사라지고, 거대한 시멘트의 산 같은 아파트들이 장벽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p180)과 같은 진부하기 그지없는 문장으로 분위기를 잡고서는, '그때에 우리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꿈을 꾸며 자랐을 것이다'(p181)라며 그토록 거부했었던 '산동네 빈민가' 사람들과의 느닷없는 동류의식을 은근 슬쩍 꺼내어 놓다가는 결국 '내가 간직했던 기억은 거기 살던 사람들이 식구들과 함께 간직했던 추억과는 다른 것이다. 내 것은 주민들의 기억을 한꺼번에 밀어붙이고 휩쓸어서 말살해버린 과정일 뿐이다'(p181)라는 말년의 억지 춘향스런 반성을 보여주는 끝맺음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제가 왜 이토록 이 작품을 형편없다 말하느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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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발전'이라 불리우든, 혹은 '문명의 진보'라 불리우든, 한 사회가 유지되고 점차 변화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 누군가는 반드시 악역을 맡아야 한다라 생각합니다. '필요악'이란 단어의 존재가 그걸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지요. 여기서 하나의 심각한 '사회적 착각'이 등장합니다. 바로 --- '악역'의 인물이 상대하는 자는 의심의 여지 없이 '선역'일꺼라는 판단이 바로 그것이죠.

이 소설의 주인공 박민우는, 이루고자 했던 거의 모든 것을 이루어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있어 결혼이란 건 예의 자신의 성공 가도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었더랬습니다. 그랬던 그가 --- 말년에 와 되돌아보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라 느낀다 하여, 우리가 그에게 어떤 동정심 같은 걸 가져야 할 이유는 전혀 없지요. 적어도 전 그렇다라 생각합니다.

'나는 왜 여기에 서 있나'


 

 

정말로 코미디같은 문구입니다. 일생을 통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목표에 도달하고 나니 생각보다 별 것 없고, 그 과정에서 잃었었던 것들을 되돌아보니 내심 아깝기도 하다라 하여, 그 사람에게 '나는 왜 여기에 서 있나'라 자문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근데...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주인공 박민우에게 그 자격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라 꼬득이고 있지요. 게다가 어이없게도!!!


'나는 그애가 우리처럼 어렵고 가난해도 행복했으면 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뭘 잘못한 걸까요. 왜 우리 애들을 이렇게 만든 걸까요.'(p177)

일생을 가난하게 살다 간 차순아가, 인생의 1/3정도만 가난하게 살았던, 나머지 2/3은 자신이 원했던 바를 다 이루고 살아왔던 박민우에게 위와 같은 자책 어린 질문을 합니다. 차순아가 잘못하긴 뭘 잘못했다는 겁니까. ①박민우가 그토록 '우리'로 엮이길 거부했던 계층이었던 차순아의 입에서 '우리'라는 단어라 나오게 했으며, ②이 질문을, 박민우가 아닌 차순아로 하여금 하게 만들어 놓았다라는 것이 이 소설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이며, 결국 작가가 원하는 건 독자들의 얊은 동정일 뿐이라 제가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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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소설의 끝이, 주인공 박민우가 스스로 '그래도 내 인생, 꽤나 즐거웠었고 나는 내 인생을 성공이라 말할 수 있어'류의 분위기로 지어졌었더라면 그 솔직함을 나름 좋게 보아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결코 어줍지 않는 작가 황석영이 주려 했던, 어줍기 짝이 없는 위안은 결국 저로 하여금...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급작스레 생겨난 다른 약속을 핑계로) '작가와의 만남'에 참석하는 것을 취소하게 해주었네요. 박범신에 이어... '이젠 안녕!'을 고하게 된 또 한 분의 노작가(老作家)의 추가라는 의미만을 가졌던 독서였었다라 생각합니다. 작가 성석제의 다음 문학관(文學觀)에 공감하는 독자라면 아마도, 이 작품 「해질 무렵」에 좋은 느낌을 가질 수는 없지 않을까 싶기도...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함께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p370)


- 성석제 作, 「투명인간」, <작가의 말> 중

 
   



 

▶ 짧은 한두 마디 : 이 소설이 신인 작가의 작품이었대도 이런 관심과 인기를 얻을 수 있었었을까? 지구가 네모로 변한다면 어쩌면... 


※ 이 소설의 말하고자 하는 더 진솔한 표현들

- 라오서 作,낙타샹즈

- 이광수 作,무정

- 이문열 作, 아가(雅歌)

- 성석제 作,투명인간

- 조은 著,사당동 더하기 25

- 바버라 애런라이크 著, 「노동의 배신」 


 

  1. 라오서 作, 심규호·유소영 譯, 황소자리 刊, 2008.
  2. ​이광수 作, 민음사 刊, 2010.
  3. 이 말만 떼어놓고 본다면 틀린 말이라 할 수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결국 --- 해방의 징후가 요원한 당시 조선의 상황으로는 춘원 자신이 (형식을 빌어) 주장했던 신문명의 학습이 불가능해 보였고, 그러하기에 '현재는 아주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르겠다라는 (그리하여 친일을 결심하게 되었다라는 사뭇) 위험한 비약까지를 가능하게도 해줍니다.
  4. 이문열 作, 민음사 刊, 2000.
  5. 우리보다 못나고 더디고 모자라는 이들로부터 단순히 '위로'만을 받았다라는 것에 비난을 할 수는 없겠지만, 「아가」에서 작가가 이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위로'를 만들어내었다라는 점은 여전히 비난 받아 마땅하다라 생각합니다.

  6. 성석제 作, 창비 刊, 2014.
  7. 바버라 애런라이크 作, 「노동의 배신」은 이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당연한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8. '가난'이라는 조건하의 누군가는, '풍족함'이라는 조건을 지닌 다른 누군가와는 분명! 다른 '가치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을 수 밖엔 없습니다. 그것이 '가난한 이들' 특유의 가치관 때문이라, 즉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에 가난해질 수 밖에 없다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며, 혹은 그 반대로 '가난'이라는 조건 탓에 그들의 가치관이 그렇게 형성될 수 밖엔 없다라 말해질 수도 있을 겁니다. 이건 마치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질문과도 같은 것이지요. 여기서!!! --- 작가 성석제는 단언코, '가난이라는 조건 탓에 그들의 가치관이 그렇게 성립될 수 밖엔 없다'의 편에 서 있습니다. : '조건이 환경을, 환경이 인간을 바꾼다.'(p215) - 「투명인간」의 감상문 중.
  9. 조은 著, 또하나의 문화 刊,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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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 벌레 이야기
이청준 지음, 최규석 그림 / 열림원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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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사형(私刑)을 대체하는 국가의 사형(死刑)제도에 관련된 소설들에 푹 빠졌던 적이 있었더랬습니다. 그때 읽었었던 작품들 모두, 그 가볍지 않은 주제에 대한 작가들 나름의 시선을 정말로 훌륭하게 보여주었었기 때문이었죠.

● 원신연 감독 作, 영화 <세븐데이즈> :  '死刑을 대신하는 私刑'이라는 이 이상한 문장.을 향한 거부할 수 없는 (다시한번 더!!!) 참 이상한 공감.

다카노 가즈아키 作, 「13계단」 : <세븐데이즈>와는 반대가 되는 '사형(私刑)을 대신하는 제도로서의 사형(死刑)'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

공지영 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사형(死形)제도란 형벌의 정당성에 대한 감성적 의문부호.  

사쿠 다쓰키 作, 「사망 추정시각」 : 사적(私的) 복수가 낳게되는 애꿎은 희생자.   

● 히가시노 게이고 作, 「방황하는 칼날」 : 사형(私刑)이 초래하게 되는 비극적 결말. 

● 카린 지에벨 作, 「너는 모른다」 : 성공과 실패의 구분이 모호한 상황의 사적(私的) 복수. 

위의 작품들이 모두 (전반적으로) '사형(私刑)'이라는 인간의 행위에 이야기의 주초점을 맞추고 있다라면, 이들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그러니까 --- 그러한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인간의 심리에 보다 더 치중한 (제가 읽어 본) 작품들로는

 

   
 

● 미나토 가나에 作, 고백

● 조세희 作, 「뫼비우스의 띠」

● 야쿠마루 가쿠 作, 「천사의 나이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작가 이청준의 작품 「벌레 이야기1」는 위의 작품들보다 훨씬 짧은 분량에, 위의 작품들이 담고 있지 못하는 메시지를, 더 나아가! --- 앞서 읽었었던 작품 「당신들의 천국」에서처럼, 기독교의 교리를 끌어와, '복수'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 인간의 심리의 본질적인 부분까지를 생각케 해주는 소설이라 생각됩니다. 한 마디로 말해, 찌릿!!! 하더군요. (커피를 마시며 책을 다 읽었었고, 이제 그 감상문을 쓰려 왁꾸를 잡다보니 커피로는 도저히 안되겠더군요. 급하게 자리를 <미스터 버티고>로 옮겨, 맥주와 함께 이하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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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사람만이 가야 하고 사람으로서 갈 수밖에 없는 길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람에겐 사람로서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p74)

내 아이가 사라졌습니다. --- 시일이 지남에 따라 이는 단순한 가출이 아닌, 유괴사건으로 방향이 정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부모의 마음은, 작가 이청준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는 심정 그대로일 겁니다.


​보이지 않는 가상의 범인에게서는 전혀 어떤 연락이나 요구가 없었다. 그것이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p20) …… 하지만 우리는 견딜 수밖에 없었다. 어떤 불길함이나 절망감을 견디고서라도 우리는 기어코 아이를 찾아내야 하였다. 그리고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였다. 바로 그 희망과 기원, 어떻게든지 아이를 찾아내고 말겠다는 끈질긴 희망과 기원이야말로 아내에겐 무엇보다 크고 소중한 힘이 되고 있었다. 그것이 그 참담스러운 심사 속에서도 아내가 지쳐 쓰러지지 않고 비극을 견뎌 나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었다.(p21)

​위의 인용문에서 보여지듯 작가는 --- 실종된 아이를 찾아내어야 하고, 그 아이가 아직도 살아있을 거란 희망을 가지는 것을 모두 '당위'로 표현해내고 있으며, 그것이 '당위'이기에2 부모는 여전히 그 '희망과 기원'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다라 보고 있습니다. 100% 동의!!! 헌데 말이죠...


결국 유괴된 아이가 끔찍하게 살해된 채 발견됩니다. 아이의 귀환과 생존을 '당위'의 차원으로 바라(願)고 있었던 부모는 그 순간 이후, 말 그대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과 자기 숨이 끊어지는 고통의 순간'(p39)으로 전환되는 거지요. 이 상황에선 그 누구나 '복수'라는 행위를 떠올리게 될 수밖엔 없을 겁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심리리인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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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범인이 잡혔습니다. : 「천사의 나이프」 속 주인공 히야마는, 자신의 부인을 살해한 범인들에 대해 (그들이 14세 미만이었기에) "국가가 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제 손으로 직접 범인을 죽이고 싶습니다"라 말했었지요. (히야미의 절규가 '인간의 심리'에 그쳤을 뿐이라면)  「방황하는 칼날」 속 주인공 나가미네는 실제로!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 한 명을 죽였고, 또 한 명을 죽이기 위해 총을 들고 나섰(으나 죽이지는 못했)던, 즉 '절반의 성공'에 그쳤었으며, 「고백」 속 주인공 유코의 복수 역시 완벽한 성공이 되지는 못했더랬습니다. 암튼!!! --- '당연하다'라 말해져도 될 법한 그 인간의 심리는 예의, 이 작품 「벌레 이야기」의 주인공인 '알암이 엄마3'에게도 생겨나게 되지요.

아내는 범인을 붙잡은 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눈깔을 후벼파고 그의 생간을 내어 씹고 싶어하였다. 아이가 당한 것 한가지로 손목을 뒤로 묶어 지하실에 가두고 목을 졸라 땅바닥에 묻고 싶어하였다.(p57)

​이러한 '사적(私的)복수'가 (그나마) 성공하는 경우는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조차도 그리 흔치 않은 듯 합니다. (제가 본/읽은 작품들 중) 완벽!한 성공은 영화 <세븐데이즈>가 유일하며, 「너는 모른다」 정도가 어쨌든 성공이라 불리어질 수 있을 뿐이니까요. 이처럼 상상조차 쉬이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 현실에서의 사적 복수는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다'가 아니라, 아예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도 하지요. 위에서 언급했던 작품들은, 이 상황 이후를 다룸에 있어서 각기 자신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다음 각 작품에 대한 저의 코멘트는 제 오역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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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데이즈> : (법의 헛점을 노려 결국) 사적복수를 완벽하게 성공시켰고, 물론! 그 사적복수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그럼으로써 피해자의 증오/분노/슬픔 등은 (적지않게)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었다. 

「고백」 : 사적복수를 어쨌든 해내었다. 헌데, 정작 끝내고 나니 성공한 복수라해도 그것이 아픈 기억 자체를 없애주지는 못한다라는 걸 깨닫게 되더라. 

「방황하는 칼날」 · 「뫼비우스의 띠」 : (완벽하지는 못한) 사적복수를 하긴 했다. 하고나니 나 또한 가해자가 되어있더라. 

「너는 모른다」 : 사적복수란 게 결국엔 이루어졌다. 하지만 나 역시 좇되고 말았다.

「천사의 나이프」 : (복수하고픈 마음은 있으나,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기에) 가해자가 일평생 겪게 될 양심의 가책을 닦아줄 수 있는 건 자신이 상처 입힌 피해자나 그 가족뿐이다. 하지만! 이 때, 즉 피해자나 그 가족이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게되기 위해선 '가해자의 진심어린 참회와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갱생'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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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벌레 이야기」는 「천사의 나이프」가 다다른 결론과 동일한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하지만 한 발 더 나아가지요. 바로!!! ---  '가족이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선'이라는 지점에서, 작가 이청준은 인간을 '자기 존엄성이 지켜질 때 우주의 주인일 수 있고 우주 자체'4일 수 있는 존재, 하지만 '그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힐 때 한것 벌레처럼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5 존재로 규정지음6으로써, '용서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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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짓고 감방에 들어간 이가 출소 후 목사가 되었다라는 적지 않은 대한민국 현실은 기독교 신자로서 정말 쪽팔리기만 합니다. ('단언컨데'라는 표현까지는 차마 쓰지 못하겠지만)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목사'라는 타이틀은 다 면피용으로 내세운 구라일 뿐이니까요. 목사되기 그렇게 쉽지 않아요. 회개하고 기도한다고 목사된다면 저도 진작에 명함에 목사 타이틀 팠지요. 그렇게 '목사'되었다라는 사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감방에 있으면서 자신이 행했던 죄를 뉘우치고 종교에 귀의했다라는 예는​ 아주 지겨울 정도로 흔합니다. 뭐, 그들로서도 손해나는 일은 아니겠지요. 우리나라에선 사형(死刑) 집행이 없어졌다 하지만, 어쨌든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으로선 '죽고나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란 한 마디만으로도 신자(信者)인 척할 충분한 매력을 느끼게 될 테니 말이죠. 이처럼 그들의 종교적 귀의가 정녕 진심인가에 대한 숱한 의문이 있기도 하지만 (이 작품이 매개로 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한) 더 큰 문제는 바로!!!

그들의 종교적 귀의가 진심(眞心)일 경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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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주인공 '알암이 엄마'는 알암이의 유괴와 죽음이라는 과정에서 종교(기독교)에 의지하고, 신앙을 가지게 되었으며 결국 --- "인간에겐 도대체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 … 인간을 마지막으로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며, 사람에겐 오직 남을 용서할 의무밖에 주어지지 않았다"(p63)라는 권언(勸言)을 받아들여, 자신의 딸을 살해한 범인을 용서할 수 있겠노라, 심지어는 용서하고 싶다라는 마음까지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면회를 갔지요. '당신을 용서합니다'란 말을 스스로/직접 하기 위해서. 헌데 말입니다...


범인 역시 이미 진즉에 종교(역시 기독교 --;;)에 귀의해 있는 겁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이미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모든 죄과를 참회하고 그 주님의 용서와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하였다. …… 그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오히려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마지막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였다.(p84)

('김집사 아주머니'로 대변되고 있는) 기독교는 이러함으로써 범인이 이미! 주님의 용서를 받았다라 말해줍니다. --- 「천사의 나이프」의 결론대로라면, 이제 피해자의 가족인 알암엄마는 가해자인 범인을 역시 용서해주어야/용서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진심어린 참회'라는 필수적 전제조건이 구비되었으니까요. 여기서! 작가 이청준은 (알암엄마의 입을 통해) 이 작품의 핵심적 메세지이기도 한,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살인자가 그 아이의 어미 앞에서 어떻게 그토록 침착하고 평화스런 얼굴을 할 수가 있느냔 말이에요. 살인자가 어떻게 성인 같은 모습으로 변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에요. 절대로 그럴 수는 없은 일이에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전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p88) ……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가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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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원군이 어렸을 적, 오로지 이 아빠가 좋아한다라는 이유만으로 그는 항상 바가지 모양의 헤어스타일을 해야만 했었더랬습니다. 근데 말이죠 --- 어느 날, 새로이 갔던 미장원에서, (왼쪽을 자르고 나니 오른쪽이 좀 길고, 그래서 오른쪽을 더 잘라내니 이번엔 왼쪽이 더 길고... 하는 어이없는 과정을 거쳐) 애를 아주 바보천치 스타일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당연히 열 받아서 꽥꽥대고 나왔고, 홈페이지에 '아무나 가위잡게 하지마시라'라는 아주 격한 항의의 글을 써놓았었습니다. 바로 전화가 오더군요. 환불해드리겠다라고. 환불 필요없고, 아이 머리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아달라고만 말했습니다. 물론!!! 안되는 거 저도 알았죠. 하지만 그렇게 '환불'이라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그들의 사과가 저를 더 열받게 했었었기에, 무조건 원상태로 돌려놓아라라고만 소리쳤었던 겁니다. 한 30분 쯤 지랄하고 나니 속은 다 풀리더군요. 전화 끊고 나선, 조교수와 '이런 스타일... 언제 또 해보겠냐'라는 농담도 하게되구 말이죠.

아이의 머리는, 비록 지금 보기싫다 하여도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다시 자라납니다. 환불을 받았다면 경제적으로도 제게 손해나는 건 없구요. 하지만!!! --- 아이의 죽음은 시간이 흐른다 하여 되돌려지는 것도 아니며, 특정 금액의 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

「고백」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성공한 복수라 할지라도 ​그것이 아픈 기억 자체를 없애주지는 못한다'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리하여/게다가 「천사의 나이프」가 말하는 것처럼, 범인의 진심 깃든 참회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용서'라는 '인간의 심리적 작용'이 정녕 가능한 것일까하는 의문은 여전히 제게 남아 있거늘 --- 범인에게의 '용서'가, 피해자의 가족이 아닌 신(神)으로부터 먼저 주어질 수 있느냐, 주어졌다라는 걸 받아들인다 해도 인간인 나 역시 (신께서 이미 용서하셨으므로) 무조건 용서하여야 하느냐... 라는 질문은, (이것이 대중으로부터 욕을 먹는다 할지라도, 솔직하게 말해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라는 방어기제를 어쩔 수 없이 작동시키게만 되는 이기적 존재인 저로서는) 이 상황을 단순히 소설적 작위7(作爲)로만 이해한다 할지라도 선뜻 답해낼 수가 없기만 합니다.

"주님께선 그를 먼저 용서하시구 … 하지만 그것이 과연 주님의 뜻일까요? 당신이 내게서 그를 용서할 기회를 빼앗고, 그를 먼저 용서하여 그로 하여금 나를 용서케 하시고8 … 그것이 과연 주님의 공평한 사랑일까요?"(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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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이야기」의 '벌레'는 범인을 지칭하는 것이리라 생각했었더랬습니다만, 이 단어가 ---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에 대해, '복수'라는 실체적 행위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용서'라는 심리적 행위에서마저도 (분명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피동적으로 되고마는, 한 마디로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힌' 주인공 알암엄마를 의미한다라는 걸 알고나니 (그리하여 맥주가 없이는 이 감상문을 쓸 수 있으려면 맥주가 필요하다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 이 감상문의 본문 첫 머리에 인용해 놓은 다음의 구절이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더군요.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가야 하고 사람으로서 갈 수밖에 없는 길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람에겐 사람로서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p74)

(심정적으로야 유괴살해범은 이유 불문! 육시랄로 죽여버리는 형벌을 내려야 한다라 소리치고 싶지만) 가능하다면 목사님과 함께 (물론, 맥주를 앞에 놓고!) 차근차근 저의 의문들을 여쭈어보며 이야기해보고 싶은 소설이었습니다. 정말로! --- 내 아이를 유괴살해한 범인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라면, 그와 저는 진짜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아들딸이 된 것'인가라는, 사뭇 격렬하게 저항하고 싶은 이 황당하기만 한 점에 대해 말이죠. (정녕 그런 자리가 가능하다면, 앞의 의문을 포함하여 더 넓은 범위의 의문을 던지고 있는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어쩌면 위스키나 소맥을 필요로 할지도 모르겠네요.)




▶ 짧은 한두 마디 : "섭리자의 사랑 앞에 사람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과 권리란 무엇인가! 이 소설은 사람의 편에서 나름대로 그것을 생각하고 사람의 이름으로 그 의문을 되새겨본 기록이다." - <작가 서문> 중.


※ 본문에서 인용 · 언급되었던 작품들의 감상문.

- 히가시노 게이고 作, 「방황하는 칼날

- 미나토 가나에 作, 「고백

- 야쿠마루 가쿠 作, 「천사의 나이프

- 다카노 가즈아키 作, 「13계단

- 사쿠 다쓰키 作, 「사망추정시각 

- 카린 지에벨 作, 「너는 모른다


※ 읽어본, 작가 이청준의 다른 작품 : 당신들의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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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멸망사 한말 외국인 기록 1
H.B.헐버트 지음, 신복룡 옮김 / 집문당 / 199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라는 장(場)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그에 대한 '해석'이라는 주관적 작용은 한시도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경우만 보더라도, 한국과 일본에서 양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야말로 극과 극이지요.1 그렇다면 혹! --- 당사자가 아닌, 제 3자가 바라보는 시선이라면 그 ('팔은 안으로 굽는다' 류의) '주관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가 (조금이나마)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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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방(誹謗)이 그 극에 이르고 정의(正義)가 점차 사라지는 때에

 나의 지극한 존경의 표시와 변함 없는 충성의 맹세로서 대한제국의 황제 폐하(陛下)에게,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역사가 그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지만 장치 이 민족의 정기(精氣)가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이란 죽음의 가상(假像)이기는 하나"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의 국민에게 이 책을 드립니다.

H.B.H.

대한제국의 황제와 국민을 향해 이처럼 감동스런 헌사를 바친 이 책의 저자 헐버트가 조선/대한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종이 설립한 신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사 자격으로 1886년 조선에 첫 발을 내디디면서 시작되었더랬습니다. 이후 그는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워싱턴을 방문하기도 했었었으며,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도 했었었던, 말 그대로 대한제국이 멸(滅)해가는 과정의 한 가운데에서 그 현장을 목격했었던 인물이었지요.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조선을 '심한 역경에 빠져 있을 때 종종 악의에 찬 외세에 의해 시달림만 받을 뿐 옳은 평가를 받아본 적이 없는 한 국가'(p17)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경력을 고려해보면, 이 책 역시 완벽하게 '객관적'인 제 3자적 시선에서 쓰여진 조선의 기록이라고는 볼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피해 당사자(조선)와 가해 당사자(일본)가 아닌, (일정 부분 관찰자적 시점에서 본) 제 3자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과연 '조선에 대한 옳은 평가'라는 건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지가 사뭇 궁금했었었다라는 점이 바로 제가 이 (참으로 재미는 없어보이는) 책을 펼쳐들게 된 이유였었습니다.

물론! 이 책에서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은 역시나 저자가 고종의 측근으로서 겪었었던 당시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사이겠습니다만, 저자는 간략하게나마 우리의 고대사를 다루는 것부터 이 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가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사실 이러한 기술(記述)은 딱히 고유의 장점을 가지지도 못할 뿐 아니라, 군데군데 역자(譯者)에 의해 지적되고 있듯이 사실과 다른 부분들이 있기도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 '제 3자'로서 가질 수 있는 의문에 대한 답변들은 나름 매력적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 민족은 원시 시대에서 목축 시대를 거치지 않고 바로 농경 시대로 발전했다. 따라서 그들은 우유나 그 밖의 여러 가지 축산물을 약재 이외로는 쓰는 법을 알지 못한다.(p36) …… 한국에 소가 들어온 지는 벌써 3,500년이나 되는 데도 한국인들이 우유나 고기를 잘 먹지 않는 것은 희안한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인이 유목민의 과정을 겪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p41) …… 한국에는 양(羊)이 없다. 제물로 수입하는 이외에는 전혀 양을 볼 수가 없다는 사실은 한국에 유목 시대가 없었다는 추측을 확실하게 해 준다.2(p43)

와 같은 부분은, (현재는 이렇지 않지만, 당시의) 조선인 스스로는 가져보기 쉽지 않은 의문이었었을 겁니다. 당시의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우유나 소고기를 잘 먹지 않는 것은 '희안한 일'이 아닌, 당연한 (혹은 어쩔 수 없는) 이었을 테니까요. 이처럼! --- '서양 외국인'의 눈에 비추어진 당시 조선의 생활상에서 보여지는 '희안한' 일들의 기록은, '당시의 조선'과 '당시의 서구'의 간극 사이에서 이제는 '당시의 그리고 현재의 서구' 쪽으로 많이 변화되어 있는 삶을 살고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 독자인 저에게도 역시 '희안하게' 보여지기만 합니다. (다만!!! 그가 기술하고 있는, 즉 서양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당시 조선의 일상의 '희안함'이 결코 현재의 우리가 짊어져야 할 부끄러움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그러한 과정을 겪었었지요. 단지, 헐버트는 당시의 조선보다 많이 진보/개선된 문명에서 살아온 이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을 뿐, 이것을 당시 조선과 서구 사이의 우열의 근본 원인이었다라 보는 것은 지나친 자기 비하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희안함'을 그저 희안하게만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라는 점은 이 책이 나름의 가치를 지니게 된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일례로 모반(謀反)한 죄수의 경우 그 가족까지 형벌을 내리는 연좌제에 대한 저자의 분석과 결론은, 조선에 대한 서구의 오해를 불식시키려는 그의 애정어린 노력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라 생각합니다. --- 당시의 조선에는 범인을 이른 시간 내에 체포할 수 있을 만한 경찰력이 존재하지 않았었습니다. 고작 할 수 있는 거라곤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가족들을 가혹하리만큼 들볶는 일 뿐이었었지요. 즉, 모반의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사회 전체에게 보여줌으로서 모반을 계획하고 있는 자들에게 일종의 사인(sign)을 내비친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단순히 범죄를 방지하려는 것이지 응보하려는 것은 아니다."(p89)

저자 헐버트의 조선/조선인의 일상에 대한 세세한 관찰은 이처럼 우리의 창피한 모습을 비교적 냉정하게 알려준다(①)라는 긍정적 기술(記述)로 나타나고 있기도 합니다만, 지나친 일반화/단순화(②,③) 또는 개인적 관찰의 기록이 흔히 지니고 있는 상반된 기술들(④VS⑤)이 보여지기도 합니다.


이 나라에서는 돈과 권력은 사실상 동의어로 되어 있어서 재판이란 이에 제공되는 금액에 따라서 결정되며, 재판관을 위협할 만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뒤에서 밀어주거나 또는 상당한 돈을 가진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판결이 유리하게 내려진다는 인식이 일반화되어 있다.(p84)


② 한국인들이 만약 곤경에 빠지게 되거나 위급한 일에 직면하게 되거나, 또는 자기가 계획하고 있는 것의 성패 여부가 진실을 어느 정도 왜곡시키면 호전될 수 있는 경우에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데에 있어서 조금도 망설임이 없다.(p65)

③ 일본인들은 이상주의적이며 중국인들은 실리주의적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가 있다. 한국인은 그 나라가 중국과 일본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질도 두 나라의 중간 성격을 띠고 있다. 이와 같이 두 가지의 성격이 조화됨에 따라서 한국인들은 합리적인 이상주의자가 되었던 것이다.(p54)


④ 한국인은 매우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로서 두 사람 사이의 싸움이 패싸움으로 변하여 난투극을 벌이는 예란 거의 없다.(p67)

⑤ 한국인들은 어려서부터 자기의 기분을 억제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 않다. 어린이들까지도 어른들로부터 그와 같은 습성을 배워서 만약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무서울 정도로 화를 내어 그 일을 끝장을 내던가 아니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세를 망쳐버리고 만다.(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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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저자 헐버트가 조선에 대해 애정어린 시선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일지라 하더라도, 이 책을 찬찬히 읽어보면 그의 '애정'이란 것이 '안으로 굽는 팔'의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그저 '동정어린'의 수준이 그 한계였었을 뿐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역시 이 책에 대한 저의 '주관적 해석'에 기인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어차피 '감상문을 적는다'라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의 표출이니) 저자의 논리 전개를 간략하게, 제가 이해한 바대로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일단 저자는 조선 멸망의 근본적 원인을 중화사상(中華思想)으로 보고 있습니다.

애당초부터 한국인들은 과연 어떻게 움직여 왔나를 돌이켜보라. 300년 이상이나 신라는 전 반도를 다스렸지만 그 300년은 급속한 영락의 세월이었다. …… 그와 같은 서글픈 조락(凋落)현상은 중화사상이 들어오면서부터 비롯된 것이다.(pp106-107)

이처럼 조선의 조락은 오래 전 과거로부터 기인되었고 이미 그 과정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전개되었지만, 그나마! 근래 들어 서양의 문물과 종교가 들어오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뉘앙스의 기술을 전개하고 있지요.


사태가 이처럼 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서울에서는 매우 낙관적인 측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필요한 개혁은 철저하게 수행되었으며 …… 미국의 한 회사는 서울과 제물포 사이의 철도 부설권을 획득했으며 …… 지난해에 광산 채굴권을 얻은 미국은 작업을 시작했으며 각급 학교가 창설되어 대체로 보아 조선의 장래는 그 미래가 매우 밝았다. 이제까지 국가를 곤경에 빠뜨렸던 여러 가지의 난제에 대한 해결책이 발견된 듯이 보였으며 비교적 계몽된 통치 시대의 문이 열리는 듯이 보였다.(p189)3

​저자 헐버트가 피해자도 아니고 가해자도 아니라는 사실로 인하여, 그로부터 피해자인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객관적인 서술'을 기대했었던 바램은 이처럼 무너지고 있을 뿐 아니라 --- 객관적임이라는 것이 결국엔 피상적인 관찰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라는, 그리하여 애초의 기대가 지나친 순진함이었다라는 실망을 안겨주는 것으로 진행이 되기도 합니다.


왕이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대한이라고 한 것은 …… 전에도 얼마 동안 생각해 오던 것이었는데 조선이 외국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자 이 때가 적시임을 알고 제국의 선언을 서두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절차는 단시일 내에 조약국에 의해 승인을 받았으며 이에 따라 대한은 중국이나 일본과 동일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p197)

저자 헐버트의 시각은 이처럼 단순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예의 '동정어린 시선'뒤에 감추어진 어쩔 수 없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4에 대한 헐버트의 앞뒤 설명없는 주장은, 가히 이러한 인물이 우리 역사에 있어 한 시대의 비극적 멸망을 기록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심각한 회의마저도 안겨주더군요.


"물론 한인들로서도 화가 났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되지만 이 사건에 있어서는 조선이 어느 정도의 비난을 면할 수 없다."(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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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헐버트의 철저한 '제 3자적 관점'은 일본이 조선을 종속국으로 삼게 된 결정적 계기였었던 러일전쟁의 시종을 다룬 부분에서 그 절정에 다다릅니다. 조선을 독립국으로 유지시키며 단지 무역의 거래로부터만 이익을 얻기 원했었다라고 일본의 의도를 규정한 저자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러일전쟁의 발발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그러한 정책에 의거해 활동하려고 과거 30년 동안 노력해 왔다. …… 일본은 사태의 해결을 무력 행사에 의존하기 전에 러시아로 하여금 극동에서의 욕망을 자제하도록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다. 세계로부터 칭찬을 받을 정도로 참아 가면서 일본은 적절한 문제점을 골라 러시아에게 질문을 던졌으나 러시아는 자신이 원하던 만주를 요리하려는 의사를 가졌으며 … 일본은 그와 같은 참을성이 있는 태도를 버렸다. …… 드디어 때가 이르자 일본은 국민들의 열광이 식지 않게 함으로써 그들의 극성스러운 요구에 정부가 굴복했다는 유리한 비평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선전 포고를 했다.(pp23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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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의미를 가지고 있는 부분은 저자가 조선에 발을 내디뎠던 1886년 이후부터일꺼라는 제한적 기대를 가졌더랬습니다만, 그러한 기대에도 딱히 크게 부응했다라 생각되지 않는 독서였었습니다. 이것이 (전문 역사학자가 아닌) 저자의 개인적 한계로부터 기인되는 부분도 있겠습니다만, 무엇보다! --- 저자 헐버트가 이러한 시각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우리 스스로가 제공했기 때문인 것 같다는 (창피한) 의구심을 더 크게 가지게 되었다라는 것이, 그러니까 저자의 시각이나 기술 방식에 대한 불만때문이라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 - 우리 역사에 있어 몇몇 인물들의 행적 - 에 대한 창피함 때문이었다라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듯 싶기도 합니다. 

(민비 시해 사건 이후) (고종)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 두세 명의 외국인들이 매일 밤 대궐로 들어와서 사건이 일어날 때에는 당신의 옆에 와 있도록 부탁했는데, 이러한 그의 판단은 그들이 당신의 옆에 있음으로써 당신의 신변을 해치려고 음모할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대해 저지 효과를 나타낼 수 있으리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p182)

제 아무리 국력이 쇠할대로 쇠한 나라일지라도, 일국의 황제가 외국인들 몇 명에 기대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 했다라는 위의 서술은, 부지불식간에 (그 당사자였던) 이 책의 저자 헐버트가 조선/대한제국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일정 부분 적잖은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수뇌부가 덕수궁에 집결해 있다라는 첩보를 접한 미군 해병본부는 덕수궁을 포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한국의 유적지를 포격할 수는 없다5'라며 명령을 거부했던 한 미군장교(제임스 해밀턴 딜) 덕분에 우리의 덕수궁이 지금처럼 보존될 수 있었다라는 역사의 한 일화6를 또 다른 예로 들어보죠.


물론! 그 미군 장교에 대해서는 고마움을 가져야겠지만, 과연 그 고마움이 일 개인에 대한 고마움의 차원을 넘어설 수 있느냐라는 의문엔, 그 전쟁을 뒤에서 부추긴 주체가 (혹은 방조한 주체가, 또는 자신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떠넘긴 주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본다면, 그 전쟁으로 인해 온 국토와 국민이 겪은 피해를 떠올려볼 때, 덕수궁의 보존이라는 사건에는 '고작!'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보게 됩니다. 이 '고마움'이란 것이 진정으로 '고마움'일 수 있는, '고마움'이어야 하는 것일까요?


헐버트씨가 죽어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다 하지만 --- 이 책의  (한국의 장래를 위해서는 '자기 민족에 대한 교육에 전념'(p532)해야 한다라는 의견에 뒤이어 나오는) 마지막 문장인 다음 구절을 읽노라면, 그 역시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는 외국인'이기는 했었으나, 그러하기에 우리가 개인 헐버트에 대해 특정 부분에선 고마움의 감정을 가질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역시 어쩔 수 없이 '외국인' (그리고 '특정 종교의 선교사7')이라는 한계를 벗어난 인물은 아니었다라는 생각을 하게만 됩니다.

교육에 투자된 자본이 더 크고, 더 확실하고, 더 유익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곳으로서는 이 세상에서 한국밖에는 없다는 말은 한국인의 마음씨를 가장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제시할 수 없는 의견인 것이다.(p535)

어느새 ---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을 읽고선, 종원군을 데리고 헐버트의 묘소가 있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가보고 싶다라 했던 저의 바램(願)이, 이 책을 다 읽고나니 어느새, 사라져 버려 있더군요. --;;


▶ 짧은 한두 마디 : 다양한 해석이 깃든 교과서란 것이 정말 교육적인 것인가, 더욱이 오로지 수능 점수로만 평가받는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과정에서도 '교육적'일 수 있을 것인가? --- 이건 일개 정치꾼들이 결정할 문제는 절대 아닐 듯. --;;


※ 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한 책들

김을한 著,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 역사채널e 著, 「역사e 

 

 




 

  1. "실제로 일본의 역사에서 이토는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인물로 큰 존경을 받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조선 침략을 주도한 원수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중근도 역시 조선에서는 항일투쟁의 상징적 영웅이며 어린이 위인전에 등장하는 단골 멤버지만 일본에서는 민족의 영웅을 살해한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이렇게 한 인물에 대한 평가도 나라와 민족에 따라 엇갈릴 수밖에 없다면, 역사에서 객관적인 관점이란 대체 뭘까?" - 남경태 著, 「종횡무진 한국사 下」, p419 ,그린비刊, 2009.
  2. 이와 비슷한 주장은 복거일 著, 「비명을 찾아서」에도 나옵니다. : "논에서 벼를 재배하는 동양에서는 소는 사람에게 가장 소중하고 가까운 가축이었으며, 당연히 아낌을 받았다. 따라서 농사에 별 소용이 되지 않는 개가 상대적으로 천시되었고, 개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혐오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반면 목축이 중요한 서양에서는 개가 아낌을 받았다." - 「비명을 찾아서」 하권, p76,
  3. 이 밖에도 저자는 '600마일에 이르는 철도부설권(경의선 - 프랑스, 경부선 -일본)이 일본인 회사와 프랑스인 회사에게 각각 반씩 부여되었으며, … 채광권은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및 일본인 회사가 획득했는데 그들 중의 2개 회사는 상당히 성공했다. 러시아인들은 반도의 동부에서 채벌권과 포경권을 얻었으며 일본인들은 중요한 어업권을 획득했다.(p207)'라는 문장을 아주 자연스럽게 "조선에서 있었던 좀 더 중요한 물질적인 진보에 관한 기술(p207)"이라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4.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오리라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그 해 8월 정체 불명의 이양선(異樣船) 1척이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왔다. 이것이 바로 제너럴셔먼호였다. … 셔먼호는 80급 증기선으로 12파운드의 대포 2문을 갖추고 선원은 완전 무장하고 있었다. 메도즈상사는 셔먼호에 조선과 교역할 상품을 싣고, 영국인 개신교 선교사 토머스(Thomas,R.J.)를 통역관으로 채용한 뒤 8월 9일 즈푸(芝芣)를 출항, 조선으로 출발하게 하였다. 셔먼호의 승무원 구성을 보면 … 총 24명이었다. 이 중에서 셔먼호 승조원 중의 주역은 토머스였다. 토머스는 셔먼호를 타기 전에 이미 조선 포교의 꿈을 가지고 조선 해역을 두 차례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때 조선이야말로 선교의 최적지임을 확신하고 다시 조선으로 들어갈 날을 학수고대하던 끝에 때마침 셔먼호 통역으로 채용되어 대망의 조선행 꿈을 실현했던 것이다. 셔먼호는 … 거침없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셔먼호의 승조원들은 프랑스 신부를 학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올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통상과 교역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조선 관리는 통상·교역은 조선의 국법에 절대 금지되어 있으며, 외국선의 내강 항행(內江航行)은 국법에 어긋난 영토 침략·주권 침해 행위라고 지적, 대동강 항행을 강력히 만류했다. 그러나 중무장한 셔먼호는 이를 뿌리치고 항행을 강행, 드디어 평양 만경대(萬景臺)까지 올라왔다. 조선 관리는 이러한 무법 행위에도 불구하고, 낯선 사람을 잘 대접한다는 유원지의(柔遠之義)에 따라 세 차례나 음식물을 후하게 공급하는 등,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셔먼호는 장맛비로 불어난 강물을 타고 평양까지 올라왔으나 장마비가 그치자 갑자기 수량이 줄어들어 운항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셔먼호 승조원들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중군 이현익(李玄益)을 납치하는 등 난폭한 행위를 자행, 평양 군민과 충돌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셔먼호의 대포에 맞아 조선 군민 중에 사상자가 발생하자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가 화공으로 셔먼호를 불태우고, 선원은 몰살하였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 "덕수궁을 포격하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국가의 유물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포격 개시란 말이 떨어지면 단 몇 초만에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 역사채널e 著, 「역사e」, p331, 북하우스刊, 2013.
  6.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역사채널e 著, 「역사e」, pp 328-339, 북하우스刊, 2013.

  7. 감상문의 본문에서는 이 부분 - 선교사로서의 헐버트 - 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이 책의 곳곳에서 그는 선교사로서의 시선을 굳이 피하지 않고 기록해놓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 "기독교는 인간에 있어서의 모든 허식을 떼어 버림으로써 한국인의 합리주의적인 감정적 기질을 완전히 사로잡게 되다고 나는 감히 주장할 수가 있다. 기독교가 그토록 빠르게 한국인에게 흡수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면에서 볼 때에 이와 같은 완전한 적응성 때문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종교 중에서도 가장 합리적이고도 가장 신비한 것이므로 인간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한국인에게 가장 적합한 종교이었다."(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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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람 2020-06-16 2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진도를 나가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