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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평점 :
두 명의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비교적 간단한 구조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뻔하디 뻔한 줄거리와 진부하기 짝이 없는 주제를 가지고 있는,
사뭇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이야기였기도 하지요.
● 박민우 - 60대의 자수성가한 건축가. 아내와 딸은 미국에 있으나, 가족의 정같은 건 거의 없음.
● 정우희 - 힘든 삶을 보내고 있는, 29세의 예술대학을 나온 초짜 극작가 겸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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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타샹즈 】
'비는 부자에게도, 가난한 사람에게도 내린다. 의로운 이에게도, 의롭지 못한 이에게도 내린다. 그러한 사실 비는 공평하지 않았다. 본래 공평하지 않은 세상에 내리기 때문에...'p287)
「낙타샹즈」의 주인공 샹즈는 아무리 악착같이 일을 해왔어도, 지금도 태어날 때부터 공평하지 않았던 세상은 여전히 조금도 공평해지지 않았다라는 걸 깨닫고 맙니다. 한때는 '애시당초 왜 그렇게 갖은 노력으로 부지런히, 성실하게 살았을까'(p358) 후회도 했었었지만, 가난한 자신에게는 사랑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된 지금에는 후회할 만한 여력조차 그에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샹즈가 선택했던 삶의 방식은 다음과 같았었지요.
'샹즈는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정의가 없는 세상에서 가난뱅이가 개인의 자유, 그것도 정말 보잘것없는 약간의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모진 마음 뿐이었다.'(p309)
스스로를 '산동네 출신'이라 표현하는 박민우의 과거는, (그의 출신지역이 말해주듯) 매우매우 힘든 시절이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힘든 시절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사회적으로는) 성공해있는 현재를 만들어 준 가장 커다란 계기가 되어주었죠. : "나는 … 공부 하나는 열심히 했다. 그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어떻게든 이런 곳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굳은 결심이 있었다."(p50)
60대의 박민우가 '주어진 삶의 조건으로부터의 탈출'을 결심하고, 실제 그 탈출을 이루어냄으로써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인물인 반면, 20대의 정우희에게 주어진 삶의 고단함은 어찌해도 피할 수 없는 현재의 상황입니다. 어쨌든 그녀 또한 ('이런 곳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박민우의 목표처럼) '연극'으로부터 '꿈이 주는 위안'(p39)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지요.
과거와 현재라는 시점(時點)이 변했었어도, 예의 비는 공평하게 모두에게 내리고 있으나, 여전히 세상은 그다지 공평해지지 않았노라, 심지어 공평해지기가 훨씬 더 어려워졌노라는 현실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차이점이라면 다만!
'이 동네에서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한다는 굳은 결심을 세우고 대학 입시 공부에 매진했'(p75)던 박민우는 결국 그 꿈을 이룰 수 있었었으나, 즉 신분 변화의 도구란 것이 존재했었었고, 존재했었을 뿐만 아니라 획득 가능했으며 작동까지도 했었던 시대를 살았던 박민우의 시대와는 달리 --- '둘 다 연애질이나 하고 노닥거릴 처지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p83)라면서도 (이것이 연속된 좌절의 결과 생성된 체념인건지 혹은 그것을 이겨낸 '모진 마음'의 결과인건진 알 수 없으나) '정우희'로 대변되는 현재의 청춘들은 그러한 (뭔가 급격한 반등의 여지조차 없기만 한) 처지조차 '알고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즐'(p83)겨낼 수 있을 뿐입니다. '피할 수 없으니 즐기기라도 하자'랄까요?
【 무정 】
"김 장로의 집에 가기도 불쾌하고 선형을 대하기가 불쾌하다 하더라도 그 불쾌한 것이 오히려 아주 사랑하는 자를 잃어버리고 실망하여 슬퍼하는 것보다 나았다. 전신이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보다 한 팔이나 한 다리를 베어 내는 것이 나았다."
'정다운 마음과 사랑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여인 영채와, 그런 영채는 자신에게 선사해줄 수 없는 인생의 극적인 반전을 줄 수 있는 여인 선형과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 형식은 결국 --- '한 팔이나 한 다리를 베어 내는 것이 나았다'라는 말로써 선형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작가 이광수는 "장래의 희망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현재를 가장 가치 있는 듯이 보려 하되 장래에 큰 희망을 가진 형식에게는 현재는 아주 가치 없는 것이라"라는 말로 변명을 해주고 있지요.
일류 대학에 합격한 박민우는, 사회의 주류에 속해 있는 부잣집에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감으로써 자신에게는 굴레였었던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오게 됩니다. 스스로 고백하고 있듯, '고등학교 무렵가지만 가족의 일원'(p50)이었다라는 건 결국 그 스스로의 선택이었다라는 것이죠. 예의 '읍사무소의 서기였던 아버지의 신분으로는 좀처럼 접근하지 못할 사람들의 세계에 들어설 기회'(p112)라 표현하고 있는 입주과외 역시 (신분이동이라는 그의 목표를 위한) 그 스스로의 선택이었습니다. 여기서,
박민우가 털어놓고 있는 --- 자신 그리고 (자신의 세대가 겪어왔던 시대와, 그 시대 속에서 이루어졌었던) 자신의 선택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아니 변명스러운 변명은 차라리!!! 전신이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보다 한 팔이나 한 다리를 베어내는 것이 낫다 생각하기에 한 팔을 베어냈다라 말하는 형식에게 (그리고 춘원에게) 오히려 더 인간적임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역할만을 할 뿐이었습니다. 자신이 선택해던 행로의 결과에 대해 박민우라는 인물이 '좌절과 체념'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숨가쁜 가난에서 한숨 돌리게 되었던 때인 팔십년대를 거치면서 이 좌절과 체념은 일상이 되었고, 작은 상처에는 굳은살이 박혀버렸다. 발가락의 티눈이 계속 불편하다면 어떻게든 뽑아내야 했는데, 이제는 몸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어쩌다가 약간의 이질감이 양말 속에서 간신히 자각될 뿐.(P112)
【 아가(雅歌) 】
한줌도 안 되지만 정채(精彩)와 영화(榮華)를 타고난 존재들, 우리보다 잘나고 날래고 똑똑하여 운명의 편애를 받는 이들은 또한 얼마나 자주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하고 속절없는 열패감(劣敗感)이나 천박한 시기로 스스로를 쥐어뜯게 하는가. 그런 그들에 비해 우리보다 못나고 더디고 모자라는 이들은 존재 그 자체가 큰 위로이다. 그들로 하여 우리는 안도 속에 자신의 삶의 돌아볼 수 있고 성실과 경건의 결의까지도 다질 수 있게 된다. 유식한 말로 하위모방(下位模倣)이나 아이러니 양식이란 것의 효용도 이에 다름없을 것인데 당편이는 옛 고향 사람들에게 바로 그 살아 움직이는 효용이 아니었는지.(p115)
이문열의 소설 「아가」에 대해, 사실 비난에 가까운 감상문을 남기긴 했었습니다만, 예의 위 인용문과 같은 한 시대와 사회에 대한 적나라한 분석을 보여주는 작가 이문열의 매력까지를 비난할 순 없습니다. 작가 황석영 역시 이 작품 「해질 무렵」을 통해, 어려웠던 시절에 좋아했었던 차순아와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박민우의 심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함으로써, (한때는 자신도 그 집단의 일원이었었으나) 박민우의 '(벗어났다는 것으로부터의) 안도와 (벗어난 이 상황을 계속 유지하겠다라는) 결의'를 보여주고 있지요.
산동네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차순아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 나를 언제든 그곳으로 다시 데려다놓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었는지도 모른다. … 이미 다른 세계로 넘어온 자의 익숙했던 자기 세계에 대한 불편함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 더 이상 우스꽝스런 빈민가의 아이들 놀음에 한통속으로 끼어들기가 싫어졌다.(p146)
당시의 박민우는 드디어 '이제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내 삶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다'(p152)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었던 겁니다. 하지만 --- 작가 이문열이 한 사회와 시대를 대상으로 하여 적나라하게 그 (필연적) 속성을 말해주고 있다라면, 이 작품에서 작가 황석영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속성으로 (게다가 매우 적극적으로) 한정짓고 있으며, 그마저도 뭔가 주인공이 선뜻 말해내지 못하고야 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한 마디로 작가가 솔직하지도 못하며, 대범하지도 못했다라는 겁니다.
【 투명인간】
이문열의 「아가」가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다라면, 성석제의 「투명인간」은 그 '시대'를 살아왔던/만들어왔던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두 작품은 각기의 뚜렷한 초점을 가지고 있었죠. 헌데 말입니다 --- 이 작품 「해질 무렵」은 이도 저도 아닌 매우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자연환경이 악화돠면 한 집단에 속한 들소 가운데 약한 개체는 맹수들에게 사냥당해 죽고만다. 그럼으로써 전체 집단의 안전과 건강함이 유지된다. …… 만수는 약하고 보기 싫기까지 한 들소였다. 곧 도태되고 말 운명이었다.(pp147-148)
「투명인간」의 주인공 김만수는 일생을 통해 약자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끝내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타인으로부터 위와 같은 평가를 받는 삶을 살아가게 된 이유를 작가 성석제는 '가난이라는 조건 탓에 그의 가치관이 그렇게 성립될 수 밖엔 없었다'라 분명히 말하고 있었죠. 그렇다면 작가 황석영의 시선은 어떠할까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늘 똑같애. 나아지는 것두 없구 달라지는 것두 없어."(p120)
일견! 그 역시 성석제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만 --- '산동네에 사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이를테면 오르지 못할 나무처럼 보였을'(p66) 여고생 차순아를 '등하교의 버스 안이나 길에서 흔히 마주치는 애들'(p66)이라 생각했었던 박민우를, 그리고 결국 (물론 그의 노력이 있었었지만 어쨌든) 이 사회로부터 '자넨 강자야'(p30)란 평가를 받는, 한 마디로 기적을 이루어낸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은연중에 '우리 같은 사람들은 늘 똑같애'라 말하고 있는 가난한 자들의 처지를 여전히 '우스꽝스런 빈민가의 아이들 놀음'쯤으로 이해해버릴 수 있는 여지를 마구 던져주고 있는 겁니다. 솔직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자신의 본심을 완전히 감추지도 못한 그런 작품이란 생각밖엔 들지가 않는 결정적인 부분이었지요. 게다가!!!
【 사당동 더하기 25 】
'나로서는 형편없는 산동네의 가난을 벗어나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며, 그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의 내면은 좀 더 복잡할 수밖에 없다.'(p143)
위와 같은 반투명의 가림막스런 구절을 넣어놓음으로써, 현 사회의 강자로서 자신이 저질러왔던 모든 행동들에 대해 독자의 동정을 구걸하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 '샛바위에 붙은 패류의 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던 꼬방들은 사라지고, 거대한 시멘트의 산 같은 아파트들이 장벽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p180)과 같은 진부하기 그지없는 문장으로 분위기를 잡고서는, '그때에 우리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꿈을 꾸며 자랐을 것이다'(p181)라며 그토록 거부했었던 '산동네 빈민가' 사람들과의 느닷없는 동류의식을 은근 슬쩍 꺼내어 놓다가는 결국 '내가 간직했던 기억은 거기 살던 사람들이 식구들과 함께 간직했던 추억과는 다른 것이다. 내 것은 주민들의 기억을 한꺼번에 밀어붙이고 휩쓸어서 말살해버린 과정일 뿐이다'(p181)라는 말년의 억지 춘향스런 반성을 보여주는 끝맺음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제가 왜 이토록 이 작품을 형편없다 말하느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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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발전'이라 불리우든, 혹은 '문명의 진보'라 불리우든, 한 사회가 유지되고 점차 변화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 누군가는 반드시 악역을 맡아야 한다라 생각합니다. '필요악'이란 단어의 존재가 그걸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지요. 여기서 하나의 심각한 '사회적 착각'이 등장합니다. 바로 --- '악역'의 인물이 상대하는 자는 의심의 여지 없이 '선역'일꺼라는 판단이 바로 그것이죠.
이 소설의 주인공 박민우는, 이루고자 했던 거의 모든 것을 이루어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있어 결혼이란 건 예의 자신의 성공 가도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었더랬습니다. 그랬던 그가 --- 말년에 와 되돌아보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라 느낀다 하여, 우리가 그에게 어떤 동정심 같은 걸 가져야 할 이유는 전혀 없지요. 적어도 전 그렇다라 생각합니다.
'나는 왜 여기에 서 있나'
정말로 코미디같은 문구입니다. 일생을 통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목표에 도달하고 나니 생각보다 별 것 없고, 그 과정에서 잃었었던 것들을 되돌아보니 내심 아깝기도 하다라 하여, 그 사람에게 '나는 왜 여기에 서 있나'라 자문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근데...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주인공 박민우에게 그 자격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라 꼬득이고 있지요. 게다가 어이없게도!!!
'나는 그애가 우리처럼 어렵고 가난해도 행복했으면 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뭘 잘못한 걸까요. 왜 우리 애들을 이렇게 만든 걸까요.'(p177)
일생을 가난하게 살다 간 차순아가, 인생의 1/3정도만 가난하게 살았던, 나머지 2/3은 자신이 원했던 바를 다 이루고 살아왔던 박민우에게 위와 같은 자책 어린 질문을 합니다. 차순아가 잘못하긴 뭘 잘못했다는 겁니까. ①박민우가 그토록 '우리'로 엮이길 거부했던 계층이었던 차순아의 입에서 '우리'라는 단어라 나오게 했으며, ②이 질문을, 박민우가 아닌 차순아로 하여금 하게 만들어 놓았다라는 것이 이 소설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이며, 결국 작가가 원하는 건 독자들의 얊은 동정일 뿐이라 제가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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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소설의 끝이, 주인공 박민우가 스스로 '그래도 내 인생, 꽤나 즐거웠었고 나는 내 인생을 성공이라 말할 수 있어'류의 분위기로 지어졌었더라면 그 솔직함을 나름 좋게 보아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결코 어줍지 않는 작가 황석영이 주려 했던, 어줍기 짝이 없는 위안은 결국 저로 하여금...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급작스레 생겨난 다른 약속을 핑계로) '작가와의 만남'에 참석하는 것을 취소하게 해주었네요. 박범신에 이어... '이젠 안녕!'을 고하게 된 또 한 분의 노작가(老作家)의 추가라는 의미만을 가졌던 독서였었다라 생각합니다. 작가 성석제의 다음 문학관(文學觀)에 공감하는 독자라면 아마도, 이 작품 「해질 무렵」에 좋은 느낌을 가질 수는 없지 않을까 싶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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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함께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p370)
- 성석제 作, 「투명인간」, <작가의 말> 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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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한두 마디 : 이 소설이 신인 작가의 작품이었대도 이런 관심과 인기를 얻을 수 있었었을까? 지구가 네모로 변한다면 어쩌면...
※ 이 소설의 말하고자 하는 더 진솔한 표현들
- 라오서 作, 「낙타샹즈」
- 이광수 作, 「무정」
- 이문열 作, 「아가(雅歌)」
- 성석제 作, 「투명인간」
- 조은 著, 「사당동 더하기 25」
- 바버라 애런라이크 著, 「노동의 배신」
- 라오서 作, 심규호·유소영 譯, 황소자리 刊, 2008.
- 이광수 作, 민음사 刊, 2010.
- 이 말만 떼어놓고 본다면 틀린 말이라 할 수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결국 --- 해방의 징후가 요원한 당시 조선의 상황으로는 춘원 자신이 (형식을 빌어) 주장했던 신문명의 학습이 불가능해 보였고, 그러하기에 '현재는 아주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르겠다라는 (그리하여 친일을 결심하게 되었다라는 사뭇) 위험한 비약까지를 가능하게도 해줍니다.
- 이문열 作, 민음사 刊, 2000.
- 우리보다 못나고 더디고 모자라는 이들로부터 단순히 '위로'만을 받았다라는 것에 비난을 할 수는 없겠지만, 「아가」에서 작가가 이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위로'를 만들어내었다라는 점은 여전히 비난 받아 마땅하다라 생각합니다.
- 성석제 作, 창비 刊, 2014.
- 바버라 애런라이크 作, 「노동의 배신」은 이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당연한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 '가난'이라는 조건하의 누군가는, '풍족함'이라는 조건을 지닌 다른 누군가와는 분명! 다른 '가치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을 수 밖엔 없습니다. 그것이 '가난한 이들' 특유의 가치관 때문이라, 즉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에 가난해질 수 밖에 없다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며, 혹은 그 반대로 '가난'이라는 조건 탓에 그들의 가치관이 그렇게 형성될 수 밖엔 없다라 말해질 수도 있을 겁니다. 이건 마치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질문과도 같은 것이지요. 여기서!!! --- 작가 성석제는 단언코, '가난이라는 조건 탓에 그들의 가치관이 그렇게 성립될 수 밖엔 없다'의 편에 서 있습니다. : '조건이 환경을, 환경이 인간을 바꾼다.'(p215) - 「투명인간」의 감상문 중.
- 조은 著, 또하나의 문화 刊,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