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 벌레 이야기
이청준 지음, 최규석 그림 / 열림원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한때! 사형(私刑)을 대체하는 국가의 사형(死刑)제도에 관련된 소설들에 푹 빠졌던 적이 있었더랬습니다. 그때 읽었었던 작품들 모두, 그 가볍지 않은 주제에 대한 작가들 나름의 시선을 정말로 훌륭하게 보여주었었기 때문이었죠.

● 원신연 감독 作, 영화 <세븐데이즈> :  '死刑을 대신하는 私刑'이라는 이 이상한 문장.을 향한 거부할 수 없는 (다시한번 더!!!) 참 이상한 공감.

다카노 가즈아키 作, 「13계단」 : <세븐데이즈>와는 반대가 되는 '사형(私刑)을 대신하는 제도로서의 사형(死刑)'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

공지영 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사형(死形)제도란 형벌의 정당성에 대한 감성적 의문부호.  

사쿠 다쓰키 作, 「사망 추정시각」 : 사적(私的) 복수가 낳게되는 애꿎은 희생자.   

● 히가시노 게이고 作, 「방황하는 칼날」 : 사형(私刑)이 초래하게 되는 비극적 결말. 

● 카린 지에벨 作, 「너는 모른다」 : 성공과 실패의 구분이 모호한 상황의 사적(私的) 복수. 

위의 작품들이 모두 (전반적으로) '사형(私刑)'이라는 인간의 행위에 이야기의 주초점을 맞추고 있다라면, 이들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그러니까 --- 그러한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인간의 심리에 보다 더 치중한 (제가 읽어 본) 작품들로는

 

   
 

● 미나토 가나에 作, 고백

● 조세희 作, 「뫼비우스의 띠」

● 야쿠마루 가쿠 作, 「천사의 나이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작가 이청준의 작품 「벌레 이야기1」는 위의 작품들보다 훨씬 짧은 분량에, 위의 작품들이 담고 있지 못하는 메시지를, 더 나아가! --- 앞서 읽었었던 작품 「당신들의 천국」에서처럼, 기독교의 교리를 끌어와, '복수'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 인간의 심리의 본질적인 부분까지를 생각케 해주는 소설이라 생각됩니다. 한 마디로 말해, 찌릿!!! 하더군요. (커피를 마시며 책을 다 읽었었고, 이제 그 감상문을 쓰려 왁꾸를 잡다보니 커피로는 도저히 안되겠더군요. 급하게 자리를 <미스터 버티고>로 옮겨, 맥주와 함께 이하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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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사람만이 가야 하고 사람으로서 갈 수밖에 없는 길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람에겐 사람로서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p74)

내 아이가 사라졌습니다. --- 시일이 지남에 따라 이는 단순한 가출이 아닌, 유괴사건으로 방향이 정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부모의 마음은, 작가 이청준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는 심정 그대로일 겁니다.


​보이지 않는 가상의 범인에게서는 전혀 어떤 연락이나 요구가 없었다. 그것이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p20) …… 하지만 우리는 견딜 수밖에 없었다. 어떤 불길함이나 절망감을 견디고서라도 우리는 기어코 아이를 찾아내야 하였다. 그리고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였다. 바로 그 희망과 기원, 어떻게든지 아이를 찾아내고 말겠다는 끈질긴 희망과 기원이야말로 아내에겐 무엇보다 크고 소중한 힘이 되고 있었다. 그것이 그 참담스러운 심사 속에서도 아내가 지쳐 쓰러지지 않고 비극을 견뎌 나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었다.(p21)

​위의 인용문에서 보여지듯 작가는 --- 실종된 아이를 찾아내어야 하고, 그 아이가 아직도 살아있을 거란 희망을 가지는 것을 모두 '당위'로 표현해내고 있으며, 그것이 '당위'이기에2 부모는 여전히 그 '희망과 기원'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다라 보고 있습니다. 100% 동의!!! 헌데 말이죠...


결국 유괴된 아이가 끔찍하게 살해된 채 발견됩니다. 아이의 귀환과 생존을 '당위'의 차원으로 바라(願)고 있었던 부모는 그 순간 이후, 말 그대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과 자기 숨이 끊어지는 고통의 순간'(p39)으로 전환되는 거지요. 이 상황에선 그 누구나 '복수'라는 행위를 떠올리게 될 수밖엔 없을 겁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심리리인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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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범인이 잡혔습니다. : 「천사의 나이프」 속 주인공 히야마는, 자신의 부인을 살해한 범인들에 대해 (그들이 14세 미만이었기에) "국가가 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제 손으로 직접 범인을 죽이고 싶습니다"라 말했었지요. (히야미의 절규가 '인간의 심리'에 그쳤을 뿐이라면)  「방황하는 칼날」 속 주인공 나가미네는 실제로!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 한 명을 죽였고, 또 한 명을 죽이기 위해 총을 들고 나섰(으나 죽이지는 못했)던, 즉 '절반의 성공'에 그쳤었으며, 「고백」 속 주인공 유코의 복수 역시 완벽한 성공이 되지는 못했더랬습니다. 암튼!!! --- '당연하다'라 말해져도 될 법한 그 인간의 심리는 예의, 이 작품 「벌레 이야기」의 주인공인 '알암이 엄마3'에게도 생겨나게 되지요.

아내는 범인을 붙잡은 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눈깔을 후벼파고 그의 생간을 내어 씹고 싶어하였다. 아이가 당한 것 한가지로 손목을 뒤로 묶어 지하실에 가두고 목을 졸라 땅바닥에 묻고 싶어하였다.(p57)

​이러한 '사적(私的)복수'가 (그나마) 성공하는 경우는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조차도 그리 흔치 않은 듯 합니다. (제가 본/읽은 작품들 중) 완벽!한 성공은 영화 <세븐데이즈>가 유일하며, 「너는 모른다」 정도가 어쨌든 성공이라 불리어질 수 있을 뿐이니까요. 이처럼 상상조차 쉬이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 현실에서의 사적 복수는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다'가 아니라, 아예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도 하지요. 위에서 언급했던 작품들은, 이 상황 이후를 다룸에 있어서 각기 자신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다음 각 작품에 대한 저의 코멘트는 제 오역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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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데이즈> : (법의 헛점을 노려 결국) 사적복수를 완벽하게 성공시켰고, 물론! 그 사적복수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그럼으로써 피해자의 증오/분노/슬픔 등은 (적지않게)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었다. 

「고백」 : 사적복수를 어쨌든 해내었다. 헌데, 정작 끝내고 나니 성공한 복수라해도 그것이 아픈 기억 자체를 없애주지는 못한다라는 걸 깨닫게 되더라. 

「방황하는 칼날」 · 「뫼비우스의 띠」 : (완벽하지는 못한) 사적복수를 하긴 했다. 하고나니 나 또한 가해자가 되어있더라. 

「너는 모른다」 : 사적복수란 게 결국엔 이루어졌다. 하지만 나 역시 좇되고 말았다.

「천사의 나이프」 : (복수하고픈 마음은 있으나,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기에) 가해자가 일평생 겪게 될 양심의 가책을 닦아줄 수 있는 건 자신이 상처 입힌 피해자나 그 가족뿐이다. 하지만! 이 때, 즉 피해자나 그 가족이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게되기 위해선 '가해자의 진심어린 참회와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갱생'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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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벌레 이야기」는 「천사의 나이프」가 다다른 결론과 동일한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하지만 한 발 더 나아가지요. 바로!!! ---  '가족이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선'이라는 지점에서, 작가 이청준은 인간을 '자기 존엄성이 지켜질 때 우주의 주인일 수 있고 우주 자체'4일 수 있는 존재, 하지만 '그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힐 때 한것 벌레처럼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5 존재로 규정지음6으로써, '용서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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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짓고 감방에 들어간 이가 출소 후 목사가 되었다라는 적지 않은 대한민국 현실은 기독교 신자로서 정말 쪽팔리기만 합니다. ('단언컨데'라는 표현까지는 차마 쓰지 못하겠지만)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목사'라는 타이틀은 다 면피용으로 내세운 구라일 뿐이니까요. 목사되기 그렇게 쉽지 않아요. 회개하고 기도한다고 목사된다면 저도 진작에 명함에 목사 타이틀 팠지요. 그렇게 '목사'되었다라는 사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감방에 있으면서 자신이 행했던 죄를 뉘우치고 종교에 귀의했다라는 예는​ 아주 지겨울 정도로 흔합니다. 뭐, 그들로서도 손해나는 일은 아니겠지요. 우리나라에선 사형(死刑) 집행이 없어졌다 하지만, 어쨌든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으로선 '죽고나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란 한 마디만으로도 신자(信者)인 척할 충분한 매력을 느끼게 될 테니 말이죠. 이처럼 그들의 종교적 귀의가 정녕 진심인가에 대한 숱한 의문이 있기도 하지만 (이 작품이 매개로 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한) 더 큰 문제는 바로!!!

그들의 종교적 귀의가 진심(眞心)일 경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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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주인공 '알암이 엄마'는 알암이의 유괴와 죽음이라는 과정에서 종교(기독교)에 의지하고, 신앙을 가지게 되었으며 결국 --- "인간에겐 도대체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 … 인간을 마지막으로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며, 사람에겐 오직 남을 용서할 의무밖에 주어지지 않았다"(p63)라는 권언(勸言)을 받아들여, 자신의 딸을 살해한 범인을 용서할 수 있겠노라, 심지어는 용서하고 싶다라는 마음까지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면회를 갔지요. '당신을 용서합니다'란 말을 스스로/직접 하기 위해서. 헌데 말입니다...


범인 역시 이미 진즉에 종교(역시 기독교 --;;)에 귀의해 있는 겁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이미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모든 죄과를 참회하고 그 주님의 용서와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하였다. …… 그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오히려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마지막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였다.(p84)

('김집사 아주머니'로 대변되고 있는) 기독교는 이러함으로써 범인이 이미! 주님의 용서를 받았다라 말해줍니다. --- 「천사의 나이프」의 결론대로라면, 이제 피해자의 가족인 알암엄마는 가해자인 범인을 역시 용서해주어야/용서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진심어린 참회'라는 필수적 전제조건이 구비되었으니까요. 여기서! 작가 이청준은 (알암엄마의 입을 통해) 이 작품의 핵심적 메세지이기도 한,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살인자가 그 아이의 어미 앞에서 어떻게 그토록 침착하고 평화스런 얼굴을 할 수가 있느냔 말이에요. 살인자가 어떻게 성인 같은 모습으로 변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에요. 절대로 그럴 수는 없은 일이에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전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p88) ……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가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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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원군이 어렸을 적, 오로지 이 아빠가 좋아한다라는 이유만으로 그는 항상 바가지 모양의 헤어스타일을 해야만 했었더랬습니다. 근데 말이죠 --- 어느 날, 새로이 갔던 미장원에서, (왼쪽을 자르고 나니 오른쪽이 좀 길고, 그래서 오른쪽을 더 잘라내니 이번엔 왼쪽이 더 길고... 하는 어이없는 과정을 거쳐) 애를 아주 바보천치 스타일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당연히 열 받아서 꽥꽥대고 나왔고, 홈페이지에 '아무나 가위잡게 하지마시라'라는 아주 격한 항의의 글을 써놓았었습니다. 바로 전화가 오더군요. 환불해드리겠다라고. 환불 필요없고, 아이 머리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아달라고만 말했습니다. 물론!!! 안되는 거 저도 알았죠. 하지만 그렇게 '환불'이라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그들의 사과가 저를 더 열받게 했었었기에, 무조건 원상태로 돌려놓아라라고만 소리쳤었던 겁니다. 한 30분 쯤 지랄하고 나니 속은 다 풀리더군요. 전화 끊고 나선, 조교수와 '이런 스타일... 언제 또 해보겠냐'라는 농담도 하게되구 말이죠.

아이의 머리는, 비록 지금 보기싫다 하여도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다시 자라납니다. 환불을 받았다면 경제적으로도 제게 손해나는 건 없구요. 하지만!!! --- 아이의 죽음은 시간이 흐른다 하여 되돌려지는 것도 아니며, 특정 금액의 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

「고백」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성공한 복수라 할지라도 ​그것이 아픈 기억 자체를 없애주지는 못한다'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리하여/게다가 「천사의 나이프」가 말하는 것처럼, 범인의 진심 깃든 참회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용서'라는 '인간의 심리적 작용'이 정녕 가능한 것일까하는 의문은 여전히 제게 남아 있거늘 --- 범인에게의 '용서'가, 피해자의 가족이 아닌 신(神)으로부터 먼저 주어질 수 있느냐, 주어졌다라는 걸 받아들인다 해도 인간인 나 역시 (신께서 이미 용서하셨으므로) 무조건 용서하여야 하느냐... 라는 질문은, (이것이 대중으로부터 욕을 먹는다 할지라도, 솔직하게 말해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라는 방어기제를 어쩔 수 없이 작동시키게만 되는 이기적 존재인 저로서는) 이 상황을 단순히 소설적 작위7(作爲)로만 이해한다 할지라도 선뜻 답해낼 수가 없기만 합니다.

"주님께선 그를 먼저 용서하시구 … 하지만 그것이 과연 주님의 뜻일까요? 당신이 내게서 그를 용서할 기회를 빼앗고, 그를 먼저 용서하여 그로 하여금 나를 용서케 하시고8 … 그것이 과연 주님의 공평한 사랑일까요?"(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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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이야기」의 '벌레'는 범인을 지칭하는 것이리라 생각했었더랬습니다만, 이 단어가 ---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에 대해, '복수'라는 실체적 행위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용서'라는 심리적 행위에서마저도 (분명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피동적으로 되고마는, 한 마디로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힌' 주인공 알암엄마를 의미한다라는 걸 알고나니 (그리하여 맥주가 없이는 이 감상문을 쓸 수 있으려면 맥주가 필요하다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 이 감상문의 본문 첫 머리에 인용해 놓은 다음의 구절이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더군요.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가야 하고 사람으로서 갈 수밖에 없는 길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람에겐 사람로서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p74)

(심정적으로야 유괴살해범은 이유 불문! 육시랄로 죽여버리는 형벌을 내려야 한다라 소리치고 싶지만) 가능하다면 목사님과 함께 (물론, 맥주를 앞에 놓고!) 차근차근 저의 의문들을 여쭈어보며 이야기해보고 싶은 소설이었습니다. 정말로! --- 내 아이를 유괴살해한 범인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라면, 그와 저는 진짜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아들딸이 된 것'인가라는, 사뭇 격렬하게 저항하고 싶은 이 황당하기만 한 점에 대해 말이죠. (정녕 그런 자리가 가능하다면, 앞의 의문을 포함하여 더 넓은 범위의 의문을 던지고 있는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어쩌면 위스키나 소맥을 필요로 할지도 모르겠네요.)




▶ 짧은 한두 마디 : "섭리자의 사랑 앞에 사람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과 권리란 무엇인가! 이 소설은 사람의 편에서 나름대로 그것을 생각하고 사람의 이름으로 그 의문을 되새겨본 기록이다." - <작가 서문> 중.


※ 본문에서 인용 · 언급되었던 작품들의 감상문.

- 히가시노 게이고 作, 「방황하는 칼날

- 미나토 가나에 作, 「고백

- 야쿠마루 가쿠 作, 「천사의 나이프

- 다카노 가즈아키 作, 「13계단

- 사쿠 다쓰키 作, 「사망추정시각 

- 카린 지에벨 作, 「너는 모른다


※ 읽어본, 작가 이청준의 다른 작품 : 당신들의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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