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머스트 리드 : 비즈니스 모델 혁신 하버드 머스트 리드
클레이튼 M. 크리스텐슨 지음, 최성옥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비즈니스의 목적에는 단 하나의 유효한 정의만 존재한다. 그것은 수익성 있게, 만족하는 고객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것이다."1


- 레오나드 셔먼,「개싸움판에서는 고양이가 돼라」중 p119, 처음북스, 2017.


기업의 목적은 '이윤 창출'이라 배웠고, 현재 재직하고 있는 기업에서의 제 역할 또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정당한 방법으로 더 많은 이윤의 창출해내려는 행위의 일부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생산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고객에게 '판매'할 것인가는 업종/업태마다 모두 다르겠으나, 결국에는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이윤을 창출해낸다라는 것 자체에는 차이가 없지요. 그러하기에, 


좋은 비즈니스 모델은 … 모든 경영진이 반드시 답해야 할 근본적인 질문, '우리는 이 비즈니스에서 어떻게 돈을 버는가?', '고객에게 우리가 제공하는 가치와 그에 매기는 가격을 설명하는 기본 경제 논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제공한다.(p10) 


그저 회사에 출근하고 시간되면 퇴근하는 '월급루팡'2이 아닌 다음에야, 본인이 속해 있는 (이윤 추구가 목적인) 조직3의 현재 (위에 인용된 내용의) 비즈니스 모델이 어떠한 것인지 정도는 최소한 알고 있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현재, 월마트를 제외하고 미국 내 슈퍼마켓 체인에서 가장 큰 수입원은 매장 위치에 따라 제품 진열 비용을 달리 책정해 광고비를 받는 입점 수수료다. 상품 판매에서 나오는 이윤은 수입원 중 네 번째에 불과하다. … 슈퍼마켓은 그저 식료품을 들여와 중간 이윤을 붙여 판매하는 업체가 아니다. 브랜드에 대한 관심을 끌고 그런 관심을 판다는 측면에서 보면 소매 업체보다는 미디어 회사4에 가깝다."


- 탈레스 S. 테이셰이라,「디커플링」중 p90, 인플루엔셜, 2019.

 

현재 미국의 (월마트를 제외한) 슈퍼마켓에 근무하는 직원에게, 당신은 어떤 업종에 종사하고 있습니까란 질문을 던졌을 때, 그/그녀가 소매업에 종사한다라 답한다면 그 사람이 본인이 속한 조직의 비즈니스 모델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라 말할 수는 없겠죠. 더 나아가, 


현재의 비즈니스 모델이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거나 혹은 추가적인 이윤의 확보를 위해 별도의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면, 어떠한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 그같은 목적을 달성할 것인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해집니다. 그러기 위해, 현재의 비즈니스 모델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무엇이 필요할 수도 혹은 적절한 수정을 가할 수도 있겠죠. 그런 경우에도, 


"To produce other things, or the same things by a different method, means to combine these materials and forces differently  Development in our sense is then defined by the carrying out of new combinations."


- 이리야먀 아키에,「경영학 수업」중 p125, 에이지, 2019.


조지프 슘페터의 위 주장에 따르면, 현재의 모습에 대한 확실한 인지가 또한 필수불가결함을 알 수 있습니다.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것은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모든 새로운 이야기는 오래된 이야기를 조금 변주하여 쓰여진다즉 인간 경험의 토대를 이루는 보편적인 테마를 새로운 틀로 재구성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은 모든 비즈니스의 토대를 이루는 포괄적인 가치사슬을 변형한 것이다. 대체로 이 사슬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하나는 디자인, 원재료 구매, 제조 활동 등 무언가 만드는 것과 관련된 활동이다. 다른 하나는 고객을 찾고, 제품을 배송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판매와 관련된 활동이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은 여행자수표처럼 충족되지 않은 필요를 만족시키는 신제품이 될 수도 있고, 또는 프로세스를 혁신하여 이미 입증된 제품을 판매하거나 유통하는 더 나은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 될 수도 있다.(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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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R(Harvard Business Review)는 절대 '학술지'가 아니다. … HBR에 발표되는 논문의 주된 목적은 각 분야를 대표하는 연구자가 추진해온 연구 성과를 현실 경영에 응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HBR은 경영학을 연구하는 학자와 현실 비즈니스에서 활약하는 사람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다."


- 이리야마 아키에, 위의 책 pp27~28.


HBR은 ('현실 비즈니스에서 활약하는 사람'인지는 자신 없으나 어쨌든) 현실 비즈니스에 몸담고 있는, 게다가 현재의 매출 감소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내야 하는, 더 나아가 추가적인 이윤의 창출 방안을 고민하여야 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허나! 경영학을 단 한 과목도 배워본 적이 없는 저같은 사람을 위한, 매우 유익한 journal이지요. 지난 해부터 한국어판 HBR을 구독하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특정 주제에 해당하는 article 들만을 모아 편집해 놓은 단행본을 읽는 것이 '집중'이라는 면에서는 참 편리합니다.6 어쨌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비즈니스 모델과 전략이란 용어를 혼용해서 사용하지만, 이 두 가지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비즈니스 모델은 하나의 시스템으로써, 비즈니스를 이루는 구성요소가 어떻게 함께 맞물리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비즈니스 모델은 '경쟁'을 고려하지 않는다.7 모든 기업은 시장에서 경쟁자들과 부딪칠 수밖에 없는데, 그때 어떻게 우위를 점하고 살아남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전략이다. 경쟁전략은 경쟁자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더 잘한다는 것은 차별화에 성공했다는 뜻이다.8 조직은 독특할 때, 다른 비즈니스가 모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무도 하지 않는 것을 할 때 뛰어난 성과를 달성한다. 다시 말해, 전략이란 기업을 차별화하는 방법이다.(pp21~22)9


책의 첫 장()부터 제 무지함의 뼈를 때리면서, 비즈니스 모델의 개념과 전략의 차이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로부터 --- "기업은 어떤 고객을 대상으로 어떤 종류의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할지 전략적으로 결정해야 한다"(p26)라며, 현재 제게 주어진 (일종의) 임무10의 시발점을 알려주지요. 예를 들어, 


기업이 여러 세분회돤 고객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거나 그럴 필요가 있다면, 각 고객별로 비즈니스 모델을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 이외에도 시장에서 경쟁자를 몰아내거나 파괴적인 잠재적 경쟁자를 미연에 방지해야 할 때, 혹은 신규 시장으로 진입을 시도하거나 또다른 수익 원천을 개발하려 할 때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p213)


새로이 계획하고 있는 사업의 계획서를 작성해야는 이유 / 그 계획서의 기본 방향 등을 알려줌과 동시에 그러한 것들이 제 임의적 판단이 아닌 '신뢰할 수 있는 인용처'로 뒷받침되고 있다라는, 일종의 '권위'를 차용해올 수 있게 해준다라는 점은 부록으로서의 보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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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든, 사업이란 매출을 올리고 위험을 관리하는 방법들의 총합이다. 그리고 이런 방법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비즈니스 모델 혁신이다. 제공하는 제품과 서비스, 언제 그리고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사람, 결정을 내리는 핵심 이유 등에서 성공적으로 변화를 이뤄내면 기업의 매출과 비용, 위험이 개선된다.(p80) 


"Everything is obvious. Once you know the answer"11라는 어느 책의 제목12처럼, 위 인용구 중에서 이해되지 않는 단어와 구절은 없습니다. 조직에게 주어진 문제의 해답이란 결국, '혁신'이라 계획했고 결국 추구했던 작업이 과연 진정한 '혁신'이었던가를 확인해 가는 과정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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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적 기업이 니즈를 제대로 충족하지 못한 고객에게 새로운 가치를 제공한 기회를 포착한 이유는 제품 카테고리에 만연한 고정관념과 산업의 관행을 재구성하고 기본적으로 새로운 소구점(appealing point)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 레오나드 셔먼, 위의 책 p39.


다시 확인해 보면, 이 책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들을 많이 접하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제가 기억해내지 못했을 뿐이죠. 학문적 개념이 물론 중요하기는 합니다만, 누군가에게 강의를 하는 입장이 아닌, 그러한 개념들을 현실에 적용하여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야 하는 실무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 이 책의 의의/가치로 '고객의 입장에서 바라본 비즈니스 모델'을 수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볼 수 있었다라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비용을 절감해주는 신생 기업에 빠져들지 않을 고객은 없다. … 고객은 항상 세 가지 '화폐'를 부담한다. 돈, 시간, 그리고 노력이다.(p149) …… 결국엔 고객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새로운 회사가 생겨난다. 단순한 진리다. 비즈니스에 있어서 고객의 필요와 욕구를 거스르는 일보다 더 큰 위험은 없다.(p210)


- 탈레스 S. 테이셰이라, 위의 책 중.


2019년 '올해의 딱 한 권'이었던「디커플링」속 insight가 얼마나 간결하고도 핵심적이었던 것인가를 다시 한 번 더 깨닫게 되네요. 올해엔 이쪽 관련 책들을 좀 읽게/공부해야 할 듯... 





※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 :디커플링」·「경영학 수업」·「전략수립의 신·「경영전략 논쟁사·개싸움판에서는 고양이가 돼라


 


  1. ​"비즈니스 모델은 회사가 가치를 어떻게 (누구를 위해) 창출하고, 가치를 어떻게 (누구로부터) 확보하는지 구체적으로 명기한다." - 탈레스 S. 테이셰이라,「디커플링」중 p87, 인플루엔셜, 2019.
  2. "‘월급’과 도둑의 대명사인 프랑스 괴도소설의 주인공인 ‘루팡(lupin)’을 결합시킨 단어다. 이는 하는 일 없이 월급만 축내는 직원을 가리키는 말로, 월급루팡들은 ‘하는 업무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바쁜 척하기’, ‘업무시간에 다른 일 하기’, ‘자신의 업무를 다른 직원에게 전가하기’ 등의 행태를 보인다." - 네이버 지식백과
  3. 사회복지와 같이 상업적 이윤추구가 목적이 아닌 조직에도 또한 나름의 '마케팅'이 존재하듯, '이윤'이란 것을 굳이 금전적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넓게 본다면 모든 조직은 결국 무언가 '득이 되는 것'을 추구한다 할 수 있겠죠.
  4. 또 다른 사례 --- "코스트코는 원스톱 쇼핑을 극히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면서 가치를 창출했다. 그리고 연회비를 통해서도 가치를 확보했다. 코스트코도 처음에는 제품 판매에 따른 중간 이윤에서 수익 대부분이 발행했지만 점차 양상이 바뀌었다. 코스트코가 발표한 2016년 총이익 23억 5,000만 달러 중 회원에게서 부과한 회비에서 발생한 이익이 몇 퍼센트나 차지했을지 추측해보라. … 자그마치 112퍼센트다. 코스트코는 전통적인 슈퍼마켓 소매 비즈니스 모델에서는 손실을 입었지만 연회비를 통해 손실을 메우고도 남을 만큼 돈을 벌었다. 코스트코는 식료품 소매 부문에서 비즈니스 모델 혁신을 이룬 놀라운 사례라 할 수 있다." - 같은 책 p91.
  5. "인간의 이야기는 딱 두세 가지밖에 없다. 그 이야기들이 마치 전에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인 양 강렬하게 계속 되풀이된다. 지난 수천 년 동안 다섯 가지 음조로 똑같이 노래해 왔던 시골의 종달새처럼 말이다." - 미히르 데사이,「금융의 모험」중 p315, 부키, 2018.
  6. 한국어판 HBR에 실려있지 않은, 오래전 article들도 있다는 이유도 있지요.
  7.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할 때 경쟁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으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비즈니스 모델을 채택하게 될 수도 있다." - <선순환 고리 확실한 Biz 모델 만들기>, DBR 2011년 8월 Issue 2.
  8. ​"전략의 중심에 의미 있는 차별화를 두어야 한다는 말은 낯선 길로 가야 한다는 뜻이다. … 스와치는 단지 저가 시장에서 경쟁한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바라보는 제품의 인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 스와치 제품은 시계라기보다 패션 악세서리로 범위를 넓히며 다시금 자리를 잡았다." - 레오나드 셔먼, 위의 책 pp204~205.
  9. "전략은 경쟁우위를 획득하기 위한 차별화된 활동과 포지셔닝, 그리고 이를 위한 효율적 자원 배분이라고 할 수 있다." - 박경수,「전략수립의 신」중 p18, 더난출판, 2016.
  10. 현재의 매출 감소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내야 하는, 더 나아가 추가적인 이윤의 창출 방안을 고민하여야 하는 업무.
  11. 이리야마 아키에, 위의 책 p354.
  12. 던컨 와츠,「상식의 배반」, 생각연구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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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철학 - 진정한 경제적 자유를 위한 궁극의 물음
임석민 지음 / 다산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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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육체적 · 심리적 자유를 보장한다. … 돈은 궁핍과 고뇌를 면하게 하고 비천한 노역을 면해준다. … 돈은 인격적 자유이다. 돈은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될 자유,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일을 하지 않을 자유, 온갖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돈은 해방과 독립을 뜻한다. … 돈은 선택의 폭이다. 돈은 삶의 균형을 잡아준다. 돈은 자아를 확대한다.(p26)                                                                                                                     


저자 스스로 "돈은 무엇이고 왜 필요하고, 어떻게 벌어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는 책"(p11)이라 소개하고 있는, 제목에 '철학'이라는 예의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는 단어까지 내세워지고 있는 책의 초반부는, 이처럼 (사뭇 지나치리만큼) 솔직합니다. 그렇지만 --- 위 일곱 문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분을 찾아보기 힘들 것 같은, 그러하기에 저자의 솔직함이 사실은 당연함에도, 그 솔직함이 살짝이나마 놀랍기/반갑기도 했었다라는 것은 또한,


우리의 무의식 세계에는 '돈은 나쁜 것'이라는 관념이 자리잡아 많은 사람들이 돈을 혐오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런 혐오는 위선일 뿐이다. 돈은 인간의 욕망 추구에 필요한 자원이며 행복의 중요한 촉매제이다. 돈은 세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강력한 원동력이다.(pp54~55)  


저자가 '위선'이라 표현하고 있는, 우리의 솔직하지 못함을 드러내보이는 일종의 반증1이겠죠. 물론 --- 제가 '솔직하지 못함'이라 표현한 부분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돈은 정신을 지배한다. 돈은 단순한 경제적 개념이 아니다. 돈은 감정적 실체이다. … 돈은 생활수준은 물론 정신상태를 좌우한다. 돈은 자신감의 형성에 결정적 작용을 한다.(pp24~25)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인 A와 B가 살치살과 삼겹살을 모두 파는 고깃집의 옆 테이블에 서로 앉아있다 해보죠. --- '돈이 많은' A는 얼마든지 살치살로 배를 채울 수 있지만, 그의 기호 혹은 당일의 선호도가 삼겹살이었기에, '살치살 먹기'에 대한 기회비용은 단순히 심리적인 부분에 머물 뿐인 상태에서 그것을 기꺼이 무시하고 삼겹살은 선택하여 먹고 있습니다. 반면, '돈이 없는' B는 '살치살 1인분'이라도 먹고 싶지만 그의 호주머니 사정이 허락치 않기에 어쩔 수 없이 삼겹살을 먹고 있습니다. 이 때 B 역시 '살치살 먹기'에 대한 기회비용을 무시하고 있습니다만, 심리적인 것 뿐만이 아닌 경제적인 면까지를 고려한다면 그건 '무시'라 말해져서는 안 되는, '(일종의) 불가능(unaffordable)'이라 표현되어야 맞겠죠. 다시 말해, 


누군가에게는 '(경제적인 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취향에 따른 선택'일 수 있지만, 옆 테이블의 누군가에겐 '(취향을 따를 수 없는) 경제적 이유에서의 선택'을 하고 있는 겁니다. 세상은 후자의 심리적 아픔을 위로라도 하듯, 허나 저는 그것이 전혀 위로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는, 다음과 같은 노랫말을 수많은 B들에게 세뇌시켜 주지요. 


뭐니뭐니해도 돈이 많으면 좋겠지만 / 뭐니뭐니해도 맘이 예뻐야 남자지

머니로 뭐든 다 할 수 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있어 / 머니로 예뻐질 수도 있고 사랑도 쉽게 얻을 수 있어

그만 그만 그게 먼데 자꾸 날 울려 / 거짓없고 순수한 사랑을 난 원해 필요해

뭐니뭐니해도 돈이 많으면 좋겠지만 / 뭐니뭐니해도 마음이 예뻐야 남자지


- 왁스, '머니(money)' 중

경제적인 면보다 정신적인 면을 의도적으로 지나치게 대비시킴으로 - 마치 돈이 많은 남자는 '거짓없고 순수한 사랑'을 하지 않/못한다는 뉘앙스로 - 자기위로의 정신승리를 억지로 안겨주는, 그리고 그것이 켜켜이 쌓여/쌓아 종국적으로는 --- 한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하여, 근거가 빈약한, 단지 '1%의 소수가 사회 전체 부(wealth)의 몇 십%를 소유하고 있다'류의, 그 '과정'에 대한 일말의 고찰도 없는, 오로지 '결과/현상'만으로 (비판을 넘어선) 비난을 쏟아내곤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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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럼 당신은 소수가 대부분의 부를 소유하는 불평등이 정당하다는 것이냐?


"불평등은 그 자체로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그 불평등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 불평등에 합당한 이유가 있는가이다."


- 토마 피케티,「21세기 자본」중 p30, 글항아리, 2014.​


토마 피케티 교수가 제기한, '합당한 이유가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또한 여전히 굳게 동의하게 되는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자라는 건 재산내역서의 숫자처럼 단순한 하나의 사실이 아니다.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이자 여러 태도의 집합, 즉 특정한 삶의 방식이다."


 - 박주영,「고요한 밤의 눈」중 p130, 다산책방, 2016.

흔히,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대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겠으나, 통칭 '흔히들 말하는'이라는 부사구를 써보아) '돈이 많은 자들'에 대한 비난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드러냄 없이 막연하게 '나의 노력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나의 부(wealth)에 비해 월등하게 많은 부를 지닌 그들의 (과거를 고려하지 않은 채) 현재를 비난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에 대해 --- 우리 모두에게 가슴 찔림이 있을 수도 있겠는, 위 박주영 소설 속 인용구와 일맥상통하는 충고를 이 책의 저자 또한 해주고 있지요. 


오늘의 당신은 과거에 당신이 취했던 행위의 결과이다. 생각했고, 판단했고, 선택했고, 실행했던 사람은 바로 당신이며, 그 결과 지금의 당신이 있는 것이다.(p304)2 


모든 투자의 결과는 오로지 투자자 본인의 선택에 의한 것이듯, 당시엔 미래였었던 '오늘 저/당신의 모습'에 대한 과거의 모든 선택들에 대한 책임 역시 올곳이 저/당신 본인에게만 있다라는 걸, 결코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제 생각에 --- 이 사실에 대한 동의가 없다면, 돈에 대한 철학이니 뭐니하는 것들에 대한 공부는 아무 소용이 없지요. (위의 '올곳이'라는 표현이 다소 과할 수도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장하준 교수가 쓴「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에 쓰여져 있듯, '자유로은 선택'의 기저에 '보이지 않는 강제'가 있다면 정녕 그것을 자유로운 선택이라 볼 수 있겠느냐란 주장3 역시 충분히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허나, 논의의 범위를 지극해 '일 개인'의 차원으로 한정하여 진행할 때에조차, 그런데 이건 알고 보면 모두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한다라 끝맺음한다면, 세밀한 분석이 아예 필요없어지기도 하지요. 일단 이 감상문에서는 지극히 개인의 범위에서만 논의하겠습니다.) 


돈은 한 인간의 재능 또는 활동의 결과이다. 불평등을 낳는 것은 각자의 재능, 노력, 인간관계, 사회적 제도 등의 상호작용의 결과이지 돈의 속성이 아니다.(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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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시장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 조나단 B. 와이트,「애덤 스미스 구하기」중, 생각의 나무, 2010.


② '돈은 교환의 수단이 아니라 궁극적인 가치요 최종적인 획득 대상이 된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돈만 있는' 삶을 맹렬하게 추구한다.

     - 김찬호,「돈의 인문학」중 p221, 문학과지성사, 2011.


이 책의 저자 역시, "수단이 목적으로 상승한 가장 완벽한 예가 돈"(p8)이라는 게오르그 짐멜의 말을 인용하며, 현대의 우리에게 돈이 어떠한 의미 -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 - 를 지니는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4 허나! --- 이 책「돈의 철학을 통해, 저자가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핵심은, '돈' 그 자체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이해입니다. 


우리는 철학을 통해 지식이 아닌 관점(viewpoint)를 배운다. … 철학의 목적은 바람직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수립하는 데 있다. 이 책「돈의 철학」은 돈에 대한 가치관, 즉 바람직한 금전관의 정립을 돕기 위한 책이다.(p9)


'돈' 자체는 스스로 판단할 수도 가치관도 가지고 있지 않은, 당연히 자신의 주인을 결정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저 인간 사회의 원활한 유지를 위한 도구5일 뿐이죠. 그러하기에, 우리는 '돈 자체'에 대하여 어떠한 선악의 판결을 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돈은 중립적이다. 돈은 아무 죄가 없다. … 돈에 대한 부정직인 믿음들은 돈에 대한 편견 때문이다. 돈에 대한 인간의 집착이 문제이지 돈이 악한 것은 아니다. … 악의 뿌리는 돈에 대한 인간의 집착이다.(p36) 


우리가 비판하고 감시하여야 할 것은 '돈을 버는 방법'이6 어떠한가이지, '돈 그 자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타인의 돈 많음에 배아파할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사회 일부에게 부가 집중되어 있는 현상 그 자체를 무조건 비판만할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해 올바르게 알고 자신의 부가 어찌하여 누군가와 비교했을 때 더 많지 않은가를 (타인/타인의 부와의 비교가 아닌) 자신의 능력/노력 등에서 먼저 찾아보자라는 것이, 제가 이해하는 바 이 책을 쓴 노교수7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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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소득은 그가 제공한 가치에 정비례하며, 그 가치는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인정하는 것이다.(p38)


물론 그 예외는, 논자에 따라 그것이 예외일 수 없다라고 할 수 있을만큼 많겠으나, 신고전학파 경제학을 공부한 저로서는 "가치를 갖기 때문에 팔리는 것이 아니라 팔렸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8이라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주장과 위 인용구 중 하나를 선택하라 한다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주저없이 '나의 가치는 타인이 인정하는 것'이라는 쪽의 손을 들어주게 됩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사회적 동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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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역시, 모두가 '돈이 많다라는 의미로서의 부자'일 수 없다는 점을 극복할 수 없음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 제 생각에 적잖이 상반되는 의미의 (일종의) 조언과 위로를 동시에 건네어 주고 있다는 아쉬움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내가 하는 일에 의미가 있느냐 없는냐는 그 일 자체가 아니라, 내가 그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달려 있다. … 미항공우주국을 방문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빗자루를 든 잡역부에게 하는 일을 물었다. "대통령 각하, 저는 인간을 달에 보내는 걸 돕고 있습니다."(p395)


「소서」의 저자 황석공이 일갈했듯9, '일'이 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가 그 일의 의미를 만들어 가야한다라는 점은 '역시!' 노교수로부터 배울 수 있는 인생의 참 지혜라 하겠으나,  


돈이 적어도 부유한 사람이 많다. 돈이 없어도 부자라고 생각하면 부자가 된다. 부유의 빈궁은 의식의 문제다. (p406)


초반의 솔직함에 비해,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인문학'에 문외한에 저에게는) 뜬구름 향해 손 젓는 내용의 글들만 읽어졌다라는 건. '어쩔 수 없이' 노교수로부터 배우게 되는 내용이 아니었나라는 아쉬움이었네요. 어쨌든!


"돈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표로 절대화되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실종되어버렸다."


- 김찬호10, 위의 책 p179.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돈은 그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주어진/인간이 발명한 도구일 뿐, 그 자체로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점 --- 우리가 진정 고민해야 할 것은 그 돈들로 무엇을 할 것인가이지, (물론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 것인가의 고민은 필요하겠으나)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야 하나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는 점! 


허나 현실에서는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압도적으로 크다라는 점.




※ 함께 읽을면 좋을 책들 :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돈의 인문학」·「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1. "​어떤 사실과 모순되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것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는 사실" - 네이버 국어사전
  2.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간다"(p372) by 사르트르 / "모든 존재는 내가 만든 것이다."(p372) by 우파니샤드
  3.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과연 그 선택을 하게 된 상황이 바뀌어야 하는지, 그리고 바뀔 수 있는지이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조건이 '좋지 않은' 일이라도 차선책이 굶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 일을 선택할 것이다. …… 이런 상황에서 한 선택을 '자유 의지'로 했다고 할 수 있을까? (먹어야 한다는 생리적 조건 때문에) 그 일자리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한 게 아닌가? …… 가난한 사람들이 조건이 '좋지 않은' 일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만큼 절박하게 만든 환경을 용인할 것인가를 물어야하는지도 모른다." - 장하준,「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중, 부키, 2014.
  4. "돈은 행복 조건의 하나가 아닌 행복 자체가 되었다. … 인간은 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지극한 행복감을 느낀다. 돈이 우리를 즐겁고 여유롭게 한다. 돈이 있으면 어떤 곤란한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p33)
  5. "화폐는 신뢰를 새겨놓은 대상" - 니얼 퍼거슨,「금융의 지배」중 p34, 민음사, 2010.
  6. "돈을 버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해 부를 창조(wealth creation)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면서 돈을 버는 부의 이전(wealth transfer)이다. - '몇초만 보유한 주주에게도 같은 의결권 부여해야 하나?', 콜린 메이어 교수의 강연 중, DBR 131호, 2013.
  7.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태길, 안병욱, 김형석 등 3인의 저명한 철학교수들이 '인생의 노른자 시기'를 65~75세로 규정했다고 한다. 지금 바로 '인생의 노른자 시기'를 살고 있는 나는 …"(p409)
  8. ​"① 화폐가 화폐인 것은 원래부터 화폐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너도 나도 상품을 그것과 바꾸려 욕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신이 되어 버린 돈은 이제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필요로 하는 재화나 서비스를 손에 얻기 위한 수단이었던 돈이 그 자체로써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pp67-68) …… ② 화폐와 교환되었으므로, 즉 팔렸으므로 그것은 가치를 갖는 것으로 믿게 됩니다. 가치를 갖기 때문에 팔리는 것이 아니라 팔렸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pp131-132)" - 류동민,「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중, 위즈덤하우스, 2012. --- ①의 논지는 이 책의 주장과도 동일합니다만, ②의 내용은 신고전학파 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 간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지요.
  9. ​"내가 감동할 만큼 내 스스로 정성을 다했는가? 하늘이 감동할 만큼 내 정성이 지극했는가? 정성이 지극해 진심으로 내가 감동하고 또 하늘이 감동할 정도라면 이루지 못할 일이란 없을 것이다. 설사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정성을 다했다면 결과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며 후회란 게 남아 있을 리 없다. 자신의 부족함에 좌절하지 않고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도전하면서 그 과정을 즐기다 보면 어느덧 나 자신이 탄복할 만한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원하는 결과를 덤으로 얻으면서 말이다." - 황석공,「소서」중 pp137-138, 동아일보사, 2015.
  10. 김찬호 선생님 또한 어느덧 '노교수'의 부류에 속하실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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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골 1 The Goal - 당신의 목표는 무엇인가?, 30주년 기념 개정판 번역본
엘리 골드렛 지음, 강승덕.김일운.김효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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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소설입니다.



#2.

내용은 경영 이론서스럽지만 어쨌든 소설이지요. 소설의 형태를 선택한 것에 에 대해 저자는 세 가지의 이유를 들고 있는데, 그 첫 이유가 본인이 (창안하여) 제시하는 원리들을 독자들이 더 쉽게 받아들이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이 가진 의도가 해롭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알기에, 우리는 그 이야기꾼에게 어느 정도의 재량을 부여한다. 이렇게 해서 이야기꾼은 그가 행하는 재량과 관련해서 면책된다."


- 조나단 B. 와이트,「애덤 스미스 구하기」중 p6, 북스토리, 2017.



#3.

이 책의 원서는 1984년 미국에서 출간되었습니다.  


"보통 기업들은 잘나가는 회사의 성공 사례나 '베스트 프랙티스'를 적용해 자신의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기를 기대한다. 식스시그마의 대유행이 그랬다. 모토로라에서 시작된 이 품질경영 기법은 잭 웰치가 제너럴일렉트릭에 도입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졌다. … 하지만 식스시그마에서 이야기하는 품질 문화를 달성한 기업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외에도 GWP, TQM, TPS, Workout, ToC, TRIZ, Design Thinking 등 유행처럼 뜨거웠다가 확 식어버린 경영 전략들이 한둘이 아니다. 실적을 위해 일회성으로 도입했따가 금세 없애는 방식으로는 진정한 혁신은 이뤄질 수 없다."


- "공동목표 설정하고 일 쪼개서 하기" 중, DBR Vol.273 (2019년 5월 issue 2)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ToC (제약이론 : Theory of Constraints) 입니다. ('유니코 사'의 유니웨어 사업부라는 가상의) 특정 사업부에서 고안되고 대성공을 거둔 ToC를 섣불리 '이론'이라 칭할 수 있느냐의 논쟁은 논외로 하더라도, 출간 후 31년이 지난 지금에는 (일부의 견해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유행처럼 뜨거웠다가 확 식어버린 경영 전략들'의 일례로 소개되는 처지에까지 이르러 있기도 하군요.1  



#4.

1984년 당시의 경영자/경영학자들보다 제가 더 똑똑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저 --- 1987년 즈음으로 기억되는, 제 방에 있었던 30MB 용량의 하드디스크를 지닌 IBM 컴퓨터를 보고, 당시 전자공학도였으며 현재엔 모 대학 전자공학과 교수가 되어 있는 제 친구가 했던 말, '너, 이 하드 뭘로 다 채울꺼냐?'라 했던 옛 추억마냥, 세월의 흐름이란 게 그냥 시간만 흘러가는 게 아니라는, 그만큼 인류의 지식과 기술도 진보하는 것이기에, 


1984년에 미국에서 첫 출간된 이 책은 한국과 일본 기업의 무서운 성장세를 두려워한 저자의 의지대로 무려 17년 동안이나 번역을 허락하지 않았다가 200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국내에 소개될 수 있었다. (p561)


아니 대한민국과 일본에 이 책을 원서로 읽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만 모여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책의 내용을 회사에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위치의 인물 정도라면 누본인이 읽건 누굴 시켜 요약 보고서를 읽어보건 얼마든지 접할 수 있었을 (어쨌든!) '소설''이, 2001년에 번역되어 나왔을 때 당시의 반응이 좀 궁금하긴 합니다. 우리나라 경영계가 막 충격에 빠지고 환호하고 그랬었나요? 


………………………………………………………………………………… 


생산성이란 바로 기업의 목표 면에서 무언가를 완수하는 것 … 생산성이란 한 회사가 그 회사의 목표치에 점점 다가가는 일련의 행위 … 회사가 목표치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행위를 생산적이라고 한다면, 그 반대의 행위는 비생산적 (P83)


아, 뭐... 1984년에 출간된 책이라 하여, 모든 내용이 고리타분한 건 절대 아닙니다. 이 책 역시, --- 당신이 기업의 오너이건 경영자이건 그 무엇이건, 당신이 속해 있는 '조직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인지하는 것으로부터 모든 행위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한 마디고 '기본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고 있지요. 책에는 제조업의 예가 소개되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모든 '사()기업'의 목표는 동일하겠죠. 



제조 공장의 목표는 돈을 버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고 있는 그 밖의 모든 일들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p123)


(사상/이념에 따라 동의하지 않는 이도 있겠으나, 현 시대의 지배적 사상인 자본주의를 인정한다면) 위 두 문장을 이해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 이해한다라는 것과 현실에서 이해한 바대로 행동한다/할 수 있다라는 것에는 적잖은 괴리가 발생되죠. 


"인간의 활동에서 목적의 추구는 무한하지만 수단의 양은 그 목적에 의해 제한된다."


- 홍기빈,「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중 p97, 책세상, 2001.


이 책의 저자 역시, "'목적 합리성'이 독립되어 따로 노는 것을 피하고 철저하게 '가치 합리성'의 차원에 복무하도록 묶어두"2어야 한다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경제관에 부합되는 내용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 "전 직원이 쉬지 않고 일하는 공장의 효율성은 최악"(p167)이라는, 처음 접했을 땐 뭔가 아리송한 구절이 그것이죠. 조직의 목적을 잊고, 부분의 효율성에만 매달릴 때 발생될 수 있는 문제점을 지적한 위 인용문은 다시금, 


"획득의 기술이 가정생활에 종속되는 하위 기술이라면 물자를 조달하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가족 성원들의 행복한 삶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한도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 획득의 기술도 가정의 행복이라는 상위의 목적을 무시한 채 '돈벌이의 한계에 도전한다'고 굴어서는 안 된다. 혹시라도 두 기술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더 많은 부의 획득을 목적으로 가정생활을 관리한다면, 가정의 행복은 사라지고 가정인지 공장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가족 모두가 혹사당하게 될 것이다."


- 홍기빈, 위의 책 p95.


옛 현인들(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너무 오래 전 인물들이지만 암튼)의 선구적 혜안 - 마치 단군 할아버지가 스마트폰의 원리에 대해 설명해 놓은 역사서를 보는 것과 같은 - 에 그저 놀라움 어린 존경을 갖게 만들어 주네요. (이 책의 마지막에, 주인공 또한 플라톤의「대화편」을 읽는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


#5.

독자들의 쉬운 이해를 위해 소설의 형식을 빌어왔다는 저자의 의도에 충실하게, 책은 술술 읽힙니다. 거진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단 하루(의 10시간)만에 읽어냈었을만큼, 막 머리 싸매고 고민해야하는 부분도 거의 없습니다. 그 내용들 중에서,  


우리 대원들은 속도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반면 속도를 줄이거나 정지하는 데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다. 이것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적용되는 논리다. 따라서 대원 중 누군가가 속도를 한없이 늦춘다면, 속도는 무한대로 늘어질 것이다. 문제는 변동의 평균치가 아니라, 바로 변동의 '축적'이었다. 현재 우리 대원들은 종속적인 제약 조건 때문에 느린 속도를 축적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누적 시간만큼 목표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p195)


단연코 위 문장이 제게 가장 와닿았었습니다. --- 현재의 문제란 것에, 방금 전에 발생된 것만 있는 게 아니라는, 과거 잘못들의 모든 잔재/잔상/잔향이 어우러져 있다라는 점, 이 별 것 아니게 보이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2020년 3월의 어느 토요일에 투자했던 10시간의 노동은 충분히 보상받았다가 자평하게 되네요. 



#6.

역시나! --- 1984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 속에는, 2020년의 대한민국 독자에게 불편한 감정을 안겨주는 시대적 문제점을 보이고 있기도 합니다. 주인공이 뭔 음주 운전을 그리 하는지, 심지어 낮술 마시고도... --;; (1984년의 대한민국에서도 그랬었???)



※ 소설의 형식을 빌고 있는 경제서 : 금의 홍수」,「애덤 스미스 구하기 




  1. 아, 물론 역자는 ToC가 우리나라의 몇몇 기업들에 도입되어 엄청난 성과를 올렸다고 실례를 소개하고 있기는 합니다. (pp559~560)
  2. "마취를 행하는 의사의 목적은 분명히 수술이 이뤄지는 일정 시간 동안 환자가 의식을 잃도록 하는 것이므로 그 목적에 합당안 양이 투여되도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 (마취의사가 '마취의 한계에 도전한다'면서) 너무 많은 양이 들어가면 환자가 엉뚱하게 수술대 위에서 황홀경 또는 사경을 헤매는 전혀 다른 목적이 달성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홍기빈, 위의 책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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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바꾼 이야기의 순간 - 우리 삶 깊숙이 스며든 상식과 만나는 시간
이현민 지음 / 북스고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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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아나키스트는 다른 부류의 사람과 구분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사회 조직에서 권위주의를 부정하고 이를 토대로 설립된 제도의 모든 규제를 증오하는 것이다. 따라서 권위를 부정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나키스트다."

- 하승우,「아나키즘」중 p44, 책세상, 2008.


'권위(authority)'라는 것이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또한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누군가/무엇인가의 '권위'를 빌어올 때가 있기도 합니다. 경제학 학위 논문을 쓸 때, (권위있는) AER 이나 Econometrica 에 실린 논문을 인용할 수는 있어도, (논리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일반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 시민 기자가 작성한 신문 기사를 근거 자료로 내세우는 사람이 없듯,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본인 지식/주장의 정당성을 상당 부분 누군가/무엇인가의 '권위'에 의존하게 되듯 말이죠. 그런 점에서 보자면,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깊이 있는 인문학적 소양이 아니며 내 실력 또한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다만 여러분의 머릿속에 파편으로 남아 있는 역사의 순간순간들을 선형으로 이어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p5) 


상세한 이력이 딱히 알려지지 않은 저자1의 이 책「일상을 바꾼 이야기의 순간」에 실려있는 역사의 이면들이란 것에, 그 옳고 그름을 정색한 채 따져가며 읽어내는 건 그리 합당한 독서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출판사에서 보내온 메일에도 "요즘같이 집에만 있는 날 재미있게 보기 좋은 책"이라고 소개되고 있더군요.) 그러하기에,  


"'신을 믿는 것과 믿음을 믿는 것을 구분'하여야 한다는 데닛의 말처럼 … 'X는 참이다'와 X가 참임을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듯한 사람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다. … 감정이냐 진리냐, 둘 다 중요하겠지만 둘은 같은 것이 아니다."


- 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중, 김영사, 2012.


저 또한 이 책 속 내용들을 논문 속 내용들을 받아들이 듯 하지는 않았습니다. 걍 가볍게 속독하며...


………………………………………………………………………… 


로마시대 … 외과의사들에게는 이발과 면도의 기술이 없었지만 이발사들은 외과치료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느 직종이 살아남았을 수 있었는지는 자명하다. 당시 이발사들은 수술이나 사혈 중 나온 피 묻은 붕대를 이발소 밖에 걸어두고 수술 중임을 표시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현재 이발소를 표시하는 삼색등의 기원이 되었다는 설도 전해진다.(pp 175~176)


사실의 전달보다는 이런저런 여러가지 '설'의 소개가 주를 이루고 있는 책입니다. 제가 역사책을 읽을 때 항상 마음 속에 되새겨 보곤 하는 곰브리치의 다음 구절이, 이 책에 실려있는 과거의 사례들에서도 또한 되살아나기도 하더군요. 


"내가 세계사에서 가장 재미있게 여기는 점은 그 모든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그 모든 일이 당신과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엄연한 현실로 존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신기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은 꾸며 낸 이야기보다 더 흥미로워서 절로 경탄을 자아낸다."


- 에른스트 H. 곰브리치,「곰브리치 세계사」중, 비룡소, 2010.


사회적으로도, 또한 개인적으로도 맘 편치 않는 상황들이 이어지는 요즈음입니다. 가볍게 읽어낼 수 있었던, 허나 그 속에서도 예의 무언가, 읽는 이에 따라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는 생각들 - 예를 들자면, 길로틴의 유래나 에어컨의 역사 등 - 을 건질 수도 있을, 그런 책이 아닐까 싶네요. 


​"역사는 어차피 과거의 사례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쌓아나가야 하는 건 과거 어느 시점에도 존재하지 않는 미래죠. 전례가 없다면 우리가 만들면 됩니다."


- 야마다 무네키,「백년법 下」중 p350, 애플북스, 2014.

역사란... 그 속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란,

이렇게 이해되는 것이 좋을테니까요.

※ 일상 속 사소한 지식들 :메이드 인 공장」,「고전에서 길어올린 한식 이야기, 식사



  1. "15만 유투버이자 잡다한 지식 정보를 제공하는'티슈박스'" - 저자에 대한 출판사의 소개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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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장
윤흥길 지음 / 현대문학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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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다른 집단과 개인들의 현재 또는 미래의 행동을 지시하거나 막을 수 있는 능력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권력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여 그들이 하려던 것이 아닌 방식으로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 모이제스 나임,「권력의 종말」중 p50, 책읽는수요일, 2015.


우리가 살아가고/내고 있는 인간 사회란 것이 어쩔 수 없이 여러 (권력) 관계의 얽힘으로 구성되어 있다라는 사실이, '권력'에 관한 이야기 - 권력의 시작과 종말 - 를 풀어내고 있는 '완장'이라는 제목의, 꽤나 오랫만에 접해본 문학 작품이었던 이 책을 그저 '한 권의 소설'로만 한정지어 이해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인간적 본질은 각각의 개인들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이다."

- 류동민,「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중 p33, 위즈덤하우스, 2012.

   

……………………………………………………………………………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 류동민, 위의 책 p109.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사상적 업적에 대해 감탄을 금할 수 없게되는) 칼 마르크스가 쓴「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 중 한 구절인 위 문장이 이 소설의 핵심 줄거리를 단적으로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 이곡리 마을의 한량이었던 임종술이란 인물이, 널금 저수지의 감시원이 되고, '감시원'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권력의 행사'라는 달콤한 '그 무엇'이 임종술의 생각과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기본적인 줄거리로 하는 이 소설에서, 작가는 도대체 '그 무엇'이 어떠한 것인지를 독자들에게 생각해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위대함이라 불리는 그 무엇에 홀려 기고만장해지고 …"

- 에티엔 드 라 보에시,「자발적 복종」중 p64, 생각정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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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의 소유 】 


"권력은 네 개의 서로 다른 통로, 즉 어떤 일을 강제로 하게 하는 완력, 윤리적 의무감을 부여하는 규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선전, 원하는 행동을 이끌어내는 보상을 통해서 작동한다. 이 가운데 완력과 보상은 사람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하려고 유인책을 바꾸고 상황을 새롭게 만든다. 반면에 선전과 규범은 유인책을 바꾸는 일 없이, 상황에 대한 평가를 바꾼다. 권력의 장벽은 완력, 규범, 선전, 보상이 효과를 발휘하는 한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


- 모이제스 나임, 위의 책 p150.


이 소설에서 보여지는 '권력의 구조'는 ①널금 저수지의 주인(최사장)과 주인의 대리인(최익삼)으로부터 주인공 임종술에게 작동하는 권력과, 임종술이 마을 사람들에게 행하는 권력의 두 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 우리는 (당연히) ①번의 권력 구조에 보다 더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 ②번의 권력 구조가 어찌 보면 훨씬 더 넓은 범위에서 보여진다 하여도, 그 권력 구조의 근원은 결국 ①번으로부터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지요.  


최사장/최익삼이 임종술에게 부여한 '감시원'의 권력에, 임종술이 빠져버리게 된 것은 (다른 요인들도 어느 정도는 작동하였으나) 단연코 '선전'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완장 때문에 녹아나는 건 늘 제 쪽이었다. 제각각 색깔 다르고 글씨도 다른 그 숱한 완장들에 그간 얼마나 많은 한을 품어왔던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완장들을 얼마나 또 많이 선망해 왔던가.(p20)


종술 자신의 과거에서 '완장'이라는 하나의 물건으로부터 받아왔던 수많은 피해들을, 본인이 그 '완장'의 주인이 됨으로써 보상받으려 했던 것이지요.


종술은 저녁 햇살을 온몸에 담뿍 받아가며 허리를 꼿꼿이 펴고 당당한 자세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 위에 그는 군림하기 시작했다. 마치 시장 경비원이 수많은 목판 장수와 포장마차 집과 노점상들 위해 군림하듯이, 또한 방범대원이 도로교통법과 통금 위반자들 위에 군림하듯이 이번에는 그가 판금 저수지에 딸린 모든 것들에게 무조건의 복종을 요구할 차례였다.(p35) …… 마치 그것 하나만 차고 있으면 널금 저수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사생활까지고 무소불통으로 간섭할 권한이 생긴다는 듯이 당당한 태도였다.(p249)

 

종술은 자신의 왼팔에 차여져 있는 '완장'을, '자신이 갖지 못한 모든 미덕을 완전하게 갖춘 존재'로서 기능하는 일종의 '물신(fetish)1이라 믿고 있습니다. '완장'이 있기에 자신은 권력을 갖고 있다고, 더 나아가 그 '완장'의 소유자가 본인이기에 권력 또한 자신의 소유물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2 이 지점에서 독자는, 


"권력을 갖는 자는 실상은 다른 사람들이 그의 권력을 인정해 주기 때문에 비로소 권력을 갖는 것입니다. … 그러나 권력의 인정이 일상화하면, 권력을 가진 자는 자신의 권력이 스스로의 내적 특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 류동민, 위의 책 p69.


주인공 임종술이 '완장'과 본인의 존재를 동일시하는3 모습, 더 나아가 임종술이 완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완장이 임종술을 조종하고 있는 모습까지도 목격하게 됩니다.4 


"화폐가 화폐인 것은 원래부터 화폐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너도 나도 상품을 그것과 바꾸려 욕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신이 되어 버린 돈은 이제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필요로 하는 재화나 서비스를 손에 얻기 위한 수단이었던 돈이 그 자체로써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pp67-68) …… 화폐와 교환되었으므로, 즉 팔렸으므로 그것은 가치를 갖는 것으로 믿게 됩니다. 가치를 갖기 때문에 팔리는 것이 아니라 팔렸기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pp131-132)


- 류동민, 위의 책



【 권력의 근원 】 


"어떤 사람이 왕인 것은 오직 다른 사람들이 그를 받들어 신하로서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대로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신하라고 생각한다."5


- 류동민, 위의 책 p67.


내 주머니 속에 있는 자동차키 때문에, 내가 차에 다가가면 차문이 자동적으로 열립니다. 물론 그 차와 차에 딸려있는 자동차키는 나의 소유이고, 실제 그 차문을 열게 하는 것은 자동차키입니다만, 나의 아이는 '우리 아빠가 차에 다가갔기에 차가 열렸으니, 우리 아빠가 차 문을 연 것이다'라 생각하게 됩니다. --- 자동차의 소유주인 아빠는 자동차의 문을 열고 닫을 (일종의) 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권력의 원천은 아빠가 돈을 지불하고 그 자동차를 구입하였기 때문이죠. 그리고 자동차의 구입과 함께 '딸려온' 자동차키는 그저 차의 문을 열고 시동을 켜는 것에 국한된 기능만을 부여받았을 뿐입니다. 물건인 자동차키는 단순히 자신이 부여받은 기능에 충실할 뿐이지만, 


"우리 저수지를 더럽히는 놈은 누구든지 가만 안 놔둘라요!" 저도 모르게 종술은 우리 저수지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 … '앞으로는 내 저수지 꾸정거리는 놈은 누구든지 가만 안 둘 작정이요!" 이번에는 한술 더 떠서 내 저수지라는 말을 사용해버렸다.(p65)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로 규정되는 인간인 임종술은, 타인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본인 스스로에게서 생겨난 권한으로 착각하게 되고 맙니다. 작가는 이를 설명함에 있어 임종술의 과거사 하나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못해 매번 나머지 공부를 해야했던 임종술은 구구단을 끝내 외우지 못해 반장에게 매를 맞곤 했었죠. 


말 안 듣는 놈은 때려도 좋다는 허락과 함께 녀석은 담임으로부터 선생의 권한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처지였다. (p61)


선생의 권력이란 그가 '선생임'이라는 그 자격으로부터 발생되는 것이기에, 그 '선생의 권력'은 선생이 아닌 다른 자에게는 이양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임종술의 과거는 그같은 권력의 이양이 일종의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게 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 작가가 이 소설을 "80년대 군부독재 시절에 태생부터 잘못된 권력을 야유할 속셈"(pp5~6)으로 집필하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부분입니다. (사실 이건 '대의제'에 내포되어 있는 태생적 한계라 생각됩니다. 각 개인의 의사를 '투표'라는 제도를 통해 특정 집단/특정인에게 이양하는 과정에서 '취사선택'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요.)



【 권력의 하수인  


완장은 원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만석꾼의 권력을 쥔 진짜 주인은 언제나 완장 뒤편 안전한 곳에 숨어 있었다. … 중간에 마름을 세우거나 머슴을 부리는 형식이었다. 완장은 대개 머슴 푼수이거나 기껏 높아봤자 마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완장은 제가 무슨 하늘같은 벼슬이나 딴 줄 알고 살판이 나서 신이야 넋이야 휘젓고다니기 버릇했다. 마냥 휘젓고다니는 데 일단 재미를 붙이고 나면 완장은 대개 뒷전에 숨은 만석꾼의 권세가 원래부터 제 것이었던 양, 바로 만석꾼 본인인 양 얼토당토 않은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었다. 소작인을 다루는 마름의 태도가 정작 지주보다도 오히려 더 혹독하고, 똑같은 머슴처지였으면서도 완장만 팔에 둘렀다 하면 다른 머슴들을 사정없이 구박하게 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바로 그 때문이었다.(pp105~106)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문단이라 생각합니다. 작가가 꼬집고자 했던 80년대의 상황에서, 진짜 권력을 쥔 자들은 그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으나, 그들에게서 일정 부분의 권력을 위임받은 자들(당시의 안기부, 검찰, 경찰 등)은 기꺼이 권력자들을 위해 본인들의 손에 피묻히기를 주저하지 않았죠.6 칼 마르크스가 설파했던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라는 주장, 어쩌면 인류의 역사에서 내내 이러져 왔던 인간 본성과도 같은 악습이, 아주 생생하게 1980년대의 대한민국에서도 또한 보여졌던 겁니다. 


"궁사, 경호원, 창기병들도 이따금 군주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 그들이 이 상황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이 받은 모멸을 누군가에게 돌려줄 수 있기 때문인데, 불행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에게 불행을 초래한 군주를 향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처럼 불행을 참고 견디며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는 약한 존재들에게 악습을 그대로 반복한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위의 책 pp113-114.


……………………………………………………………………………


임종술의 삶은, 적어도 소설 속에서 보여지는 부분에서만큼은 불행한 결말을 맞고 있습니다. '완장'으로 인해 자신에게 허여되었던 권력이 그 생명을 다하자, 술집 작부인 부월과 함께 마을을 떠난 후의 삶이 어떠한 모습으로 진행될지에 대해 작가는 전혀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다만, 


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볼일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 권력 중에서도 아무 실속없는 넘들이 흘린 뿌시레기나 줏어먹는 핫질 중에 핫질이 바로 완장인 게여! 진수성찬은 말짱 다 뒷전에 숨어서 눈에 뵈지도 않는 완장들 차지란 말여! 우리 둘이서 힘만 합친다면 자기는 앞으로 진짜배기 완장도 찰 수가 있단 말여!(p314)


임종술과 부월의 소설 밖 삶이 '진짜배기 완장'을 차기 위해 노력으로 점철될 것이라는 짐작을 어렵지 않게 하게 됩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저의 어렴풋한 이해로는 어쩌면! --- 정말로 작가가 비판하고자 했던 부분이, 1980년대의 상황 그 자체가 아닌, 그러한 상황이 자아낼 이후의 역사가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자식 세대한테까지 못난 조상처럼 살게 할 수는 없다던, 그래서 도둑질을 해서라도 큰자식을 가르쳐서 기필고 그 손에 붓대를 쥐어주고 싶었노라던 김준환의 그 울부짖음을 어금니 사이에 넣고 껌처럼 질겅질겅 씹다가 종술은 느닷없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 "완장이구나, 완장!" 그렇다. 그것은 완장이었다. 준환이놈은 그때 다름아닌 그 완장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 팔에다 차는 것만이 완장의 전부는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도둑질도 서슴지 않으면서까지 김준환이 필사적으로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것 또한 완장의 하나였던 것이다. "권력 한 가지가 다는 아니여" 이 세상에는 빛깔 다르고 소리와 냄새도 아른 수많은 완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 땅도 완장이었다. … 남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것, 남들을 큰소리로 부리고 남들 앞에서 마냥 뻐겨댈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완장이었다.(pp147~148)


본인의 경험, 거기에 더해지는 그 경험과 동일한 타인의 현실을 목격할 때 우리는 그 상황을 별 저항 없이 일반화시켜버리게 됩니다. 본인 임종술의 과거에서 완장들로부터 받았던 고통들, 본인이 그 완장을 차고 휘두르는 권력, 그리고 그 권력에 고통받는 친구 준환의 모습을 보며 --- 현재 자신의 쥐고 있는 그 한 줌의 권력에의 집착이 더더욱 강해지며, 이후의 삶에서도 더 커다란 권력을 탐하는 것이 (일견) 정당화되어버리죠. 


"현 세대에서의 소득 격차가 다음 세대에서의 기회의 격차가 된다면, 경제적 불평등은 영속적인 계급 격차로 고착된다.(p27) … 철학자 클레어 챔버스가 말했듯이 '각각에서의 결과는 그 다음에서의 기회'다. … 좋은 고등학교에 가면 좋은 대학에 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좋은 대학에 가면 좋은 일자리를 잡기 위한 경쟁에 더 잘 준비할 수 있다.(p124) … 계급이 인위적인 형태의 상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시장에서 인정받는 능력을 통해 재생산될 때, 승리자들은 그 결과로 발생하는 모든 불평등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확신하기 쉽니다. 패배자들에게 자원을 재분배하는 것이 오히려 불공정하게 느껴진다. 자신이 공명정대하게 승리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p123)


- 리처드 리브스,「20 VS 80의 사회」중, 민음사, 2019.


'완장'의 역사가 일제 치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주장의 진위와 관계 없이, 1980년대의 권력 구조가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일종의 계급 격차라는 유산을 통해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 그가 똑똑해서 서울 법대 교수가 된 것인지, 혹은 그가 그의 자녀에게 안겨 준 살뜰한 '배려들'을 그 역시 그의 부모로부터 받았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라는 의구심까지를 자아낸, (그럼에도 불구하여 여전히!) 본인을 사회주의자라 자칭하는 사이비 진보 인사의 예에서 여실히 보여졌었듯, 


(이 사회에서 '만석꾼의 권력을 쥔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에 상관없이) 보이지 않는 '완장'을 차고 이 대한민국 사회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이들의 속내란 것이, 16세기 초 프랑스의 한 청춘이 지적했던 '궁사, 경호원, 창기병'들의 수준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목수정이 칼날처럼 지적했던 바, "기회주의가 가장 현명한 삶의 해법임을, 힘 있는 자 밑에 엎드려 마름 노릇을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생존의 전략임"7은, 비단 1980년대의 군부 정권 시절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2020년에도 여하히 부인할 수는 없네요. 


오로지 '소설'로만 보자면, 읽어내는 재미가 있었다라는 점을 빼고는 크게 좋은 평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야기의 시종(始終)이 애초의 예상과 큰 오차없이 그려지는 점도 그렇고, 인물의 내면에 대한 묘사도 그다지 세밀하지는 않았다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덜 양심적이고 덜 진지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회는 잘못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가 속한 이 세상에서 틀렸다고 느끼면서도 더 이상 싸우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누군가는 먹고 살기 바빠서, 누군가는 더 잘 먹고 더 잘 살기 위해서. 다만 지켜보고 기다리다가 결국에는 사회뿐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도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고 그냥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기를 바라게 되고 만다.(pp45~46) ……  문제가 있을 때는 시비를 걸어야 하는데 그들은 그 방법을 모른다. 아예 싸울 줄 모를뿐더러 비록 이번에는 싸워서 승리하지는 못해도 승리에 한 걸음 가까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한다.(p164)"


- 박주영,「고요한 밤의 눈」중, 다산책방, 2016.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참으로 진부한 표현이기는 합니다만, '현재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희망찬' 미래를 그려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예의 이 작품을 '한 권의 소설'로만 이해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이 지구를 들쥐와 바퀴벌레들이 지배하는 날이8 오기 전 언젠가 반드시,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소설이다. 지금은 소설이 아닌 그 무엇처럼 보일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소설이다."


- 박주영, 위의 책 p322.


작가 윤흥길 역시 가졌었을, 이러한 바람(願)이 이루어질 날이 올거라, 우리 모두 믿고 있으니까요. 




※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주제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자발적 복종」,「권력의 종말」,「20 VS 80의 사회 




  1. "사람은 나면서부터 유한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갖지 못한 모든 미덕을 완전하게 갖춘 존재를 갈망하며 상상했습니다.…… 신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믿음만으로는 충분한 위안이 되지 못합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돌이나 나무를 쪼아 신의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물건으로 만들어진 신, 즉 물신=페티시fetish입니다." - 류동민, 위의 책 pp65-66
  2. "널금 저수지와 거기에 딸린 모든 부속물 하나하나를 그는 마치 자기 소유인 양, 제 살점이나 다름없이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p208)
  3. "그는 자신의 더렵혀진 자존심을 닦았다. 그는 자신의 망그러진 권위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완장을 원상으로 회복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으로 자신의 인생도 끝이라는 비장한 결심이었다."(p57)
  4. "익삼 씨는 운이 좋았다. 완장 덕분에 종술은 가까스로 참을 수가 있었다. 제발 고정하시라고, 자기 체면을 봐서 요번 한 번만 용서해주라고 매달리는 완장의 속삭임을 종술은 빤히 듣고 있었다."(p55)
  5. 「자본론」 1권 중.
  6. 주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쩌면 그러한 상황을 즐기기까지 했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7.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위의 책 <역자 서문>중 pp 8~9.
  8. "자연은 파괴되지 않는다. 6,500만년 전, 소행성이 공룡을 쓸어버렸지만, 그럼으로써 포유류가 번성할 길이 열렸다. 오늘날 인류는 많은 종을 멸종으로 몰아넣고 있으며 심지어 자신조차 멸종시킬지 모른다. 하지만 매우 잘 버티고 있는 생물들도 있다. 가령 들쥐와 바퀴벌레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이 끈질긴 생명체들은 아마도 핵무기로 인한 아마겟돈의 폐허의 바닥을 헤치고 기어 나올 공산이 크다. 자신들의 유전자를 퍼뜨릴 능력과 준비를 갖춘 상태로. 어쩌면 지금부터 6,500만 년 후 지능 높은 쥐들은 인류가 일으킨 대량 살해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이켜볼지도 모른다." - 유발 하라리,「사피엔스」중 p497, 김영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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