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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심영길 외 옮김 / 생각정원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자발적 복종"
뭔가 '있어 보이는' 류의 제목으로는 이보다 더 멋진 것도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 첫인상을 가장 원초적으로 말해보자면) 한 마디로 '알아서 긴다'쯤의 의미를 이렇게 "자발적 복종"이라 찍어 놓으니, 정말 읽지 않고는 못베기겠는 책의 제목이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 읽어보려 했었습니다만, 정확히 1년 전에 있었던 첫 번째의 시도 이후, 세 번째만에 드디어 이 길지도 않은 책을 완독할 수 있었었네요. 대체 전 왜... 그랬던 걸까요? (지나치게 많은 부분을 인용하여 감상문을 쓰는 것이 독자가 가져야하는 예의에서 많이 벗어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이 글을 쓰는 데에서만큼은, 이 예의를 지킬 수 있을만큼 저의 능력이 되지못함을 먼저 털어놓겠습니다. 이 글은 『자발적 복종』이란 책을 읽고 쓴 감상문이 아닌, 『자발적 복종』이란 책에 대한 소개의 글, 혹은 요약의 글이라 보아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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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8년, 프랑스의 귀옌에서 일어난 폭동에 당시의 권력은 무자비한 진압으로 맞섰었다 합니다. 이를 본 라 보에시는 '절대군주가 행사하는 절대권력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게'(p17)되었고, 이것이 바로 그로 하여금 이 책 『자발적 복종』을 쓰게 한 직접적 동기였었을 것이라 역자(목수정)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때 라 보에시의 나이 겨우 18세!) 그러하기에!!! --- 2016년 대한민국의 독자인 제 입장에선,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저자의 주장들에 대해 '시대의 착시(錯視)', 예를 들어 "시대적 환경, 정치적 환경 등의 변화로 인해, 2016년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주장들"이 적잖이 들어있을 것이다란 막연한 선입견을 가지고 본문을 읽기 시작했었었거늘.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던 Leviathan』(1651)을 통해, '인간은 자연 본성에서 오는 자만과 교만으로 인하여 서로 협력하여 질서 있는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한 피조물이기에 그들의 순조로운 사회생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구로 '국가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하였었지요. 하지만 이보다 100년 년 전, 라 보에시는 이미! 그처럼 '인간 본성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생겨난 기구로서의 '국가'가 현실에서 작동되기위해 필요로 하는 '권력, 권력자'가 지니게 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점들을 간파하고 있었던 겁니다. --- 기본적으로 '정치권력'에 대한 복종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그 복종을 크게 보아, 다시 ①'권력'에 대한 복종과 ②'권력자'에 대한 복종의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을 다 읽고나니, 읽기 전 제가 가졌던 (시대적 착시라는) 막연한 선입견이라는 것이 완전히 박살나버렸다는 점이지요. 16세기 초, 프랑스의 (우리나라로 치자면 고삐리인) 한 청춘이 써놓은 이 책이, 대한민국의 지나온 길과 걸어가고 있는 오늘까지를 어찌 이토록 소름돋게 묘사하고 있을 수 있을까,하는 놀라움으로 인해 말입니다.
【 권력 】
'권력'을 바라보는 라 보에시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입니다. 권력을 손에 넣은 군주는 근본적으로 그가 선인(善人)일지라 하더라도 '언제든 악인(惡人)으로 돌변할 수 있'(p35)다라고 , 심지어는 '권력자'란 지위를 '잘못할 수밖에 없는 자리'(p39)라고까지 보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 권력을 손에 넣은 군주, 즉 권력자는 (라 보에시의 견해대로라면 필연적으로) 악인이 되어버리고야 마는 것일까요?
라 보에시는 어떠한 유형의 권력자이건, 라 보에시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위대함이라 불리는 그 무엇에 홀려 기고만장'(p64)해진다라 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통치 권력에 도달하는 방법은 달라도 통치하는 방식은 항상 거의 동일하다. 선거로 권력을 쥔 지배자들은 민중을 마치 사나운 황소를 길들이듯 취급한다. 정복자들은 백성을 노획물로 여기며, 권력을 세습받은 자들은 백성을 그들의 당연한 노예로 간주한다.(p65)
'권력'이란 단어는 기본적으로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 즉 지배계급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권력자가 행사하는 '권력'에 대해 그 대상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그것을 '순응'이라 부르던, '수용' 혹은 '인정' 등 그 어떤 단어로 표현하건, 의미상으로는 오로지 한 가지일 수밖엔 없지요. --- 기본적으로 '권력자'와 '독재자'를 구분하지 않는 라 보에시의 인식을 바탕으로 하자면, 그것은 '복종' (혹은 '굴종')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대체 왜? 민중들은 권력, 그리고 권력자에게 '복종'하는 것일까요?
【 권력에의 복종 】
라 보에시는 '자유'를 인간에게 주어진 '천부(天賦)의 권한'(p47)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그것을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p48)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간단한 자유의 획득방법은, 어느 새 우리로 하여금 이 자유에 대한 열망을 '원하기만 한다면 취득할 수 있고, 원하기만 하면 쉽게 누릴 수 있는 것'(p50)으로 약화시켜 버렸으며, 그 결과 우리가 '소유하길 희망하는 재산의 목록'(p49)에서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다라 생각하기에, 역설적으로 그리 원하지 않게 되어) 늘 '자유'란 것이 빠지고 말게 된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라 주장합니다. 그리하여!
관습은 매사에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특히 복종의 의무를 알게 하는 데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한다. …… 관습은 우리가 굴종을 거부감 없이 삼키게 함으로써 더 이상 굴종의 독으로부터 쓴맛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p70)
'자유란 것이 천부의 인권'이라는 것을 잊게 되었고, 그것이 관습으로까지 굳어지게 되었을 때, 여기에 인간 고유의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연약함이 더해지게 되어 결국 --- "우리는 여기서 자발적 복종의 일차적 근거가 습관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말이 길드는 과정과 같다. 말에 재갈을 채우면 처음에는 재갈을 물어뜯다가 나중에는 익숙해져 재갈을 갖고 장난질한다. 말에 안장을 얹으면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항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장비와 장신구를 뽐낸다."(p81)
이러한 변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심각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복종에의 관습'이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의 본성 자체를 변질시킨다라는 점이라 라 보에시는 지적합니다. --- 자, '복종의 관습화'란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위험스러운 사태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만, '복종'이란 것이 단순히 '관습'에만 머물며 끝나는 것이 아닌, 그러니까 '관습'이란 것을 단순히 '잘못 들어선 길'의 수준이 아닌, '원래부터 가기로 했었고, 가야할 길'이라는 '당위'로 만들어 버린다라는 재앙이 일어난다라는 것에 라 보에시는 주장하지요.
처음에는 강요에 의해 힘에 눌려 복종하지만 그 다음 세대들은 자유를 전혀 보지 못했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후회도 유감도 없이 앞선 세대들이 강제적으로 해야만 했던 일들을 자발적으로 행한다.(p68) …… 멍에를 지고 태어나 노예 상태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전 세대가 어떤 삶을 누렸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 태어난 대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재산,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도 하지 않고 출생 당시부터 주어진 삶의 조건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기게 된다.(p69)
강남의 아이들이 '원래 인생이란 학원을 뺑뺑 도는 것'이라 생각한다는 우스개 소리도 정말 우스개 소리로 넘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택의 자유조차 없는) '복종'이란 것이 세대 전체에 '자연스러운 상태'로 인이 박혀 버리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조차 개입되지 못한 '자발적' 복종을 권력에게 스스로 바치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은 가져본 적 없는 것을 갈구하지는 않는다. 아쉬움은 즐거움을 안 뒤에 오고, 지나간 기쁨에 대한 기억이 있는 까닭에 불행을 인식하는 것이다.(p80)
천부의 인권인 자유라는 것이 어느새 '가져본 적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단계에 이르르면, '자발적 복종'은 더 이상 '복종'으로 인지되지도 못하는 겁니다. 드디어 '인생이란 원래 이런 것!'의 인식이 민중들에게 전반적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그들 중 일부는 그러한 것을 거부하려 하기도 할 겁니다.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 '폭군은 자신의 치하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하고 말하는 자유, 심지어는 생각하는 자유마저 박탈한다.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생각 속에만 머물러 있도록 억압한다.'(p84) '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쟁을 겪어본 2016년의 대한민국에게는 무척이나 낯익은 구도 아닙니까?
설 연휴에 TV로 <국제시장>이란 영화를 보았더랬습니다. 엄청나게 흥행했었던 영화라기에 뭔가 대단한 감동을 가지고 있을 줄 알았었거늘! 그 영화가 관객들에게,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은연중에 심어주고자 하는 메세지가 너무도 역겨워, 감독이 이 영화에 그 어떤 정치적 의미가 담겨져 있지 않다라고, 그저 문화적 코드로만 이 영화를 보아달라 말한다라면 그건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공개적 표현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듯 합니다. --- 스스로도 '너무나 힘들었다'라 토로하는 자신의 지나간 인생, 하지만 막상 그 인생이 현재의 시점이었을 때에는 무조건적인 희생이 주인공에게 (그것이 설혹 천형(天刑)이었다라 해도) 부여된 거부할 수 없는 의무라도 되는 양 거침없이, (내 인생은 왜 꼭 이래야만 하나라는) 의문조차 없이 이행해 냈었던 그 인생에 대해, 그러했기에 이렇게 단란한 가정을 이룬 것으로 보상받지 않았느냐는 식의 억지스런 해피엔딩을 만들어 낸 것은 은연중에! '지금 우리들은 배부른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라는 자책, 혹은 '요즘 젊은 것들은 하여간!'이란 책망을 (아주 대놓고!) 만들어내길 요구하고 있다고 밖에는, 다시 말해 (이 책의 저자 라 보에시가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 '자발적 복종의 세대 이전(移轉)'을 영화 <국제시장>은 아주 대놓고 강요하고 있다라고 전 생각합니다. 같이 영화를 봤던 종원군에게 사뭇 미안한 마음이 진심! 들더군요. --;;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보면!
【 권력자에의 복종 】
다음으로 라 보에시는 이러한 '악의적 독재 권력'이 어떻게 지탱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를 '흔히 말하듯, 나무를 쪼개기 위해서는 나무 쐐기를 먼저 막는 법'(p113)이란 말로 간단하게 표현하고 있지요. 즉, 작은 특혜를 자신 주변의 추종자들에게 허락하고, 그러한 관계가 일종의 먹이사슬이 되도록 그 숫자를 늘려감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게 된다라는 겁니다.
궁사, 경호원, 창기병들도 이따금 군주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 그들이 이 상황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이 받은 모멸을 누군가에게 돌려줄 수 있기 때문인데, 불행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에게 불행을 초래한 군주를 향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처럼 불행을 참고 견디며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는 약한 존재들에게 악습을 그대로 반복한다.(pp113-114)
위의 서술이 과거의 그리고 현재진행형이기도 한 대한민국의 정치판의 바로 그 이야기이다라는 것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듯 합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소위 말하는 '갑질 현상'이라는 것까지를 16세기 중반 프랑스의 젊은이가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라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갑질'에도 여러가지의 종류가 있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것만으로 한정한다면) 내가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나에게 당할 수 밖에 없는 이에게 당하게 해주겠다라는 이 유치한 행태가 혹! 인간의 본성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암튼!
독재군주는 자신의 눈에 들고자 애쓰며 호감을 구걸하는 아첨꾼들을 항상 본다. 이런 자들은 독재군주가 말하는 대로만 해서는 안 된다. 그가 원하는 것을 알아채야 한다. 군주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그의 생각을 미리 알아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의 환심을 사야 한다.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학대해가며, 심지어는 목숨까지 내놓고 군주의 일을 위해 자신을 던져야 한다. 군주의 즐거움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찾아야 하며 군주의 취향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본래의 취향 따위는 버려야 한다. 체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고 본성은 완전히 내던져야 한다. 군주의 말과 목소리, 그의 눈짓과 사소한 표정의 변화에 유의해야 한다. 군주의 뜻을 살피고 그의 생각을 알아내는 데 첨병 역할을 하지 못하는 눈과 손, 발은 군주에게 쓸모가 없는 것이다.(pp116-117)
'궁사, 경호원, 창기병'보다는 훨씬 더 권력자와 가까이에 있는 자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더 많은 권력으로부터 하사되는 특혜가 주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먹이 사슬마냥 계속 그 범위를 넓혀가게 되지요. ('대머리 논쟁'과도 비슷한 논리로) 이것이 계속 진행되다 보면! --- "큰 특혜가 작은 특혜의 먹이 사슬로 이어지고, 독재자와 결탁해 얻은 이익이 또 새끼 이익을 가져와 자유인의 신분을 기꺼이 선호하는 사람 수 만큼이나 독재 권력의 배를 불려주는 사람 수도 늘어나게 된다."(p111)
라 보에시는 마지막으로 --- 독재자에게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불어넣은 사람들이 바로 이 측근의 신하들이라 지적하고 있습니다.
독재자에게 접근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 스스로 자유로부터 멀어지는 행위가 아니던가. 다시 말하자면 제 양손으로 기꺼이 노예의 자리를 끌어안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p115) …… 그들은 자신의 영혼을 헌상한 대가로 의식주에는 궁핍함이 없지만 자유가 전혀 없는 삶을 살고 있으며(p116) …… 그들은 재화를 차지하고자 애쓰지만 바로 자신들이 독재자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을 수 있는 권력을 줬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못한다.(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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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 언제부터 이 검은 물은 우리의 발밑으로 밀려오기 시작한 것일까? 그 원죄는 우리가 한 번도 깨끗이 밀어내지 못한 유교적·봉건적 질서에서 찾을 수 있다.…… 20세기에 이르러 마침내 붕괴되고 만 이 봉건의 질서를 대신한 것은 일제 35년. 이 치욕의 시절과 해방 이후 친일파들에게 다시 권력을 맡기게 된 치명적 역사의 오류는 기회주의가 가장 현명한 삶의 해법임을, 힘 있는 자 밑에 엎드려 마름 노릇을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생존의 전략임을 제대로 주입했다.(pp8-9)
● 영원한 을 乙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자본가들의 갑 甲질을 성토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 익명의 네티즌으로서의 성토일 뿐, 막상 현실에서는 을이라도 되는 상황을 감지덕지 끌어안는다. 갑질을 당할 수 있는 을의 입장에 있다는 건 적어도 여전히 링크 안에 함께 서 있음을 의미하므로, 아예 그 링크에서 낙오되는 일이 있을까 경계한다. 이런 현상은 투표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가진 게 없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이해를 대변해줄 사람에겐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그자에게선 내가 떠나온 비참한 출신 성분의 향기가 풍긴다. 중요한 건 누가 가장 힘이 센가,이다. 비밀투표일지언정, 내가 강자의 편이라고 느껴야 안심이 된다.(pp10-11)
위와 같은, 역자 목수정의 역사 인식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라 말할 수 있는 근거를 끝내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위의 지적이 너무도 잔인하기에, 어찌해서든 이를 거부해낼 수 있는 논리나 이유를 찾아보려 했습니다만, 그리하여 이 감상문에 이토록 오랜 시간을 매달려 있었습니다만 결국엔, '저 역시 동의합니다'란 말을 할 수 밖엔 없네요. 심지어!!!
나의 아이에게, 이 아빠의 의식 중에도 위와 같은 원죄가 흐르고 있었다할지 모르겠으나, 너의 세대부터는 '내가 강자의 편이라고 느껴야 안심이 된다'라는 인식을 버려야 한다라 말할 자신이 있기는 한 건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너 스스로 강자가 되어라' 혹은 '사회의 주류에서 멀어지지 말아라'를 네 인생에서 잊지 말고 살아가거라란 충고를 - 이러한 충고들이 틀린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닌, 혹여 역자 목수정이 지적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과 같은 결과를 낳게될 지 모르기에 주저스러운 것인 - 과연 저 스스로는 제 아이에게 해줄 수 있을까, 심히 자신없기만 합니다. (그러했기에, <역자 서문>만 세 번 읽고 정작 본문을 읽어나갈 용기(?)를 내지 못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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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현재의 관점에서 보아 새로이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2016년 독서의 첫 ★을 표하게 된 이유는 --- 우리가 매일 목격하고 있는, 그러하기에 어느덧 그것에 익숙해져 마치 이 현실이 '발생가능한 가장 최선의, 혹은 당연한!' 결과로 생각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 기저에 깔려있는 탄생 배경을 '글로써 표현'해 내주었기 때문이며, 이 당연함이, 즉 이 '자발적'이라는 것이 왜 '당연하지 않으며, 자발적이어서는 아니되는 것인가'를 새삼스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있다라는 점에서, 16세기 프랑스의 고삐리 청년 지성에게 창피함 어린 감사의 마음을 / (그 전부에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몇 번을 읽어보아도 (당연히 매우매우 긍정적인 의미로서) '지린다!'란 생각을 갖게 해주었던 <역자 서문>을 써주신 목수정C에게 감탄 만땅의 감사함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진정, 이 '복종의 자발성'에 대해 잊고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 네가 이런 책을 읽었고, 이런 감상문을 썼다니!!!'라며 놀랄 제 친구들 좀 있을 듯. ^^;;)
▶ 짧은 한두 마디 : 바야흐로! 새로운 권력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기.
※ 함께 읽어보면, 묘한 대비가 느껴지게될 책 : 모이제스 나임 著, 『권력의 종말』
- '몽테뉴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이름을 후세에 남긴 『자발적 복종』의 초고를 쓴 것은 대학 입학 즈음이다.'(p138) - <역자 후기> 중.
- 제 눈에 보였던 '시대적 착시'중 하나는 --- 라 보에시는 기본적으로 '권력자', '군주'란 단어와 '독재자'란 단어를 의미 구분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2016년의 기준에서 보자면 '권력자'가 들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라 보에시는 종종 '독재자'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요.
- 물론, 이 '시대적 착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 "모두가 노예가 되길 거부하는 순간, 이 굴욕적인 세상은 사라진다. 스스로 복종한 자, 그들은 독재자와 공범이다. 아무도 복종하지 않는다면, 독재자는 결코 그 어떤 권력도 발휘할 수 없다. 그가 지닌 모든 권력은 바로 자발적 복종을 바친 자들이 건네준 것이기 때문이다. 복종을 멈춰라, 그 순간 당신은 자유인이다.(p30)"라 역자 목수정이 정리해 놓은 저자 라 보에시의 주장은 'prisoner's dillemma'와 맞닥뜨리게 되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환상일 뿐이 되고 말지요.
-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 라 보에시가 '선한 권력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 "자연은 왕으로 태어난 그들은 범인과는 다르게 만든 듯하다.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전능한 신이 국가를 다스리고 왕국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기기 위해 그들을 선택한 듯 하다"(p105)라는 주장에서 볼 수 있듯, 그 역시 권력자가 선천적으로 악인이라고는 보지 않지만, '권력'이라는 것이 '권력자'를 악인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지요.
- 라 보에시는 (이것이 역자의 선택인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권력자', '군주', '독재자'란 세 단어를 큰 의미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제 판단에 따라 세 단어 중 하나를 선택하여 사용하였습니다.
- '독재자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민중의 선출로 권력을 부여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자, 무력으로 나라는 차지해 통치하는 자, 권력을 상속받아 군림하는 자'(p63)
- 개인적으론 '민중'이란 단어에 사실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역사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니 이 단어가 참으로 넓디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비록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더군요. 대한민국이라는 특정 공간의, 저의 청춘시절이라는 특정 시기에 사용되었던 한정된 의미가 아닌, 일반적 표현으로서의 '민중'은 꽤나 매력적입니다.
- '자유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인간은 단지 자유인으로 태어날 뿐 아니라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맹렬한 열망도 함께 가지고 태어난다.'(p58)
- '인간은 약한 탓에 복종을 강요당하는 경우도 있다.'(p37)
- "노예가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묶여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 등. 그리고 쇠사슬에 묶여있지 않은 자유인을 비웃기까지 한다. 하지만 노예들을 묶고 있는 것은 사실 한 줄의 쇠사슬에 불과하다. 그리고 노예는 어디까지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 by Leloi Jones, 1968년, NY할렘.
- 라 보에시는 '교육'의 역할을 매우 중요시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 역시 교육에 의해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게 된다라 주장하고 있지요. --- '자연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씨앗들(인간의 본성)은 너무 작고, 고착된 것이 아니어서 그것을 억압하는 아주 작은 교육의 타격만으로도 싹트지 못하고 사라져버릴 수 있다. 그 씨앗들은 지극히 잘 보전되지 못하면 톼화하고 녹아버려 결국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다.'(pp70-71) ……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며, 또한 그 상태로 계속 존재하길 희망한다. 그러나 그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교육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받아들이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지니는 모든 것을 - 무엇을 먹고 살며 어떤 습관을 갖고 있는지 등 - 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타고난 것처럼 보이지만 단지 타고난 본성이 그러할 뿐, 이후 사람이 갖추게 되는 성품은 교육과 양육 방식에 의해 길들여지는 것이다.'(p81) : 각주로 처리해버리기엔 너무도 중요한, 그리고 어쩌면 매우 위험한 방향의 논지일지도 모르겠으나, 전 위와 같은 라 보에시의 '교육의 역할'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며, <세월호 사건>에 있어서 우리가 눈에 보이는 문제점을만을 논할 것이 아니라, (배가 기울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었을, 그리하여 생명에 위협이 가해지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인지하였었을) 학생들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배 안에 앉아있도록 강제한 것은 다름아닌 '우리 대한민국의 교육'이었다는 점을 훨씬 더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정부는 이것을 '해양수산부'만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지 않나요?
- "간혹 고개를 치켜드는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붙는 만국 공통어는 빨갱이. 노예가 되어 편안하게 주인이 던져주는 푼돈을 챙기고 종종 그의 발길질을 견디기로 한 사람들에게, 노예를 해방하겠다고, 당신들을 구하겠다고 나서는 그자는, 가장 위험한 적이다."(p7)
- "삶은 그저 살아내야하는 고통의 과정일 뿐이다. 인생의 계획자도 실행자도 아니다. 거대한 기계를 굴리기 위해 박혀 있는 나사 하나에 불과하다."(p28)
- 이 영화가 흥행이었을 때, 영화 제작사가 자신들의 오너를 위해 정권에 바치는 헌사란 뭔가 우스갯 소리 같은 이야기를 들었었습니다만, 당시엔 그저 설마!로만 넘겼었지요. 정작 영화를 보고나니 그게 설마!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란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 '서구의 근대화는 …… 토론과 대화로 정신을 설득하는 관념론적 과정이 아니라, 감시와 처벌의 채찍으로 신체를 길들이는 유물론적 과정이었다'라는 말을 통해 푸코는 사실 '근대화 자체에 대한 비난'하고자 했었음에도, 대한민국의 우익은 이를 '서구의 근대화도 어차피 감시와 처벌, 군대식 훈육의 결과였었단다'라는 의도적 오역(誤譯)을 통해 '한국적 근대화의 폭력성을 옹호'해 왔었었지요. 마찬가지로 --- 라 보에시의 이러한 지적은 분명 '권력 주변에 대한 비판'이지만, 이를 의도적으로 '권력자를 항해 가져야 하는 당연한 덕목'정도로 변질시켜내는 사람들이 분명 많을 겁니다. 얼마 전 제가 어디선가 읽었던 '임원의 의무'라는 글 내용이 딱! 이 내용들을 회사와 오너를 향해 가지고 있어야 할 덕목으로 써놓고 있더군요. 뭐 또 있죠. '진실'이니 어쩌니 하는 말장난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