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오이시 에이지 지음, 오현숙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458'의 숫자를 끝으로 마무리 되어지고 있는, 꽤나 두꺼운 소설입니다... 만! --- 도무지 현실에서는 일어날 법하지 않아보이는, 그렇다고 이 이야기를 '황당무계'란 단어로 수식하고 싶지도 않은, 어찌보자면 히가시노 게이고 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도 일맥상통하는 내용과 메세지를 지닌 이 작품 자체에 대해 쓸 수 있는 건 그다지 많지/길지 않습니다. 이 책의 뒷표지에 실려 있는 다음의 구절이 줄거리의 시작이자, 거의 모든 것일 뿐.

"10년 전 실종되었던 비행기가 돌아왔다! 탑승했던 사람들 역시 10년 전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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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1"란 구절이 암시하고 있듯, 그 결론은 소설의 초반부에 제시되고 있는 그대로, 아무런 반전 없이 마무리 되어집니다. --- 10년 전 사라졌던, 하지만 실제로는 (저로서는 뭐가 뭔지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양자의 에어포켓에 빠진"(p151) 거라는 한 대의 비행기와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느닷없이 예전 모습 그대로 되돌아왔고, 이를 예측했던 물리학자의 또 다른 예측대로 그들 모두는 사흘 후 다시 사라져버리게 된다라는 내용이지요. 이처럼!  

독자들에게 이야기의 결론을 스스럼 없이 미리 알려주고 (혹은 독자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고) 전개해나가는 작품에서 작가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독자의 수준인 제가 추측해볼 수 있는 '흥미, 감동, 적당한 자기반성' 등의 그 '무엇'을 이 작품은 (최소한 저의 기대에는) 무엇 하나 모자람 없이 충족해주었습니다. 덜하지만 않았을 뿐 아니라 절대 과하지도 않은 딱! 그만큼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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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그 주어진 3일이라는 시간 동안, 비행기에 타고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그때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의 바램들이 어쨌든 이루어졌다는 상황에서 그 바램들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들이 나오지요. 이 지점에서 작가는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라는 게 적용되지 않는, 문제의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과, 10년의 흐름이 적용되는 가족 혹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각각 나누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 우리가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볼 때, 후회되는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처럼 말이죠.  

 ① (문제의 비행기에 홀로 태워보냈던 6살 짜리 아들을 다시 만난) 회사일에 바빠, 게다가 바람까지 피웠었기에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던 아버지로부터는 "생각해보면 아들과 놀아준 기억이 거의 없어요. 어느 날 문득 봤더니 기엄기엄 기고 있고, 또, 어느 날 문득 봤더니 걷고 있고, 기저귀를 빼고 유치원에 들어가 있었죠"(p244)란 후회를, ②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0년을 살아온 누군가에게선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생각을 했을까란 생각도 들지만, 만약 시간을 거슬러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또 한 번 같은 짓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p212)란 후회없음을 보여주기도, 거기에 더해 ③ "그게 말이지  … 딱히 할 말도 없더라고. 아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말이지 아들한테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았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후회를 했었지. 하지만 막상 본인을 앞에 두니, 뭐 왔으니 됐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p252)라는, 어쩌면 가장 현실적이지 않을까 싶은 토로까지, 상정가능한 일 개인의 있음직한 일반적 반응들의 거의 모든 모습들이 이 소설 속엔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게!

이 작품은 "만약 이 작품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분명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깨웠기 때문일 것이다2" 란 중국 작가 위화의 말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는 작품입니다...만! 이 작품에서 문제의 비행기와 탑승객들이 '양자의 에어포켓'에 빠졌던 시간을 왜 하필 10년으로 설정해놓았을까란 의문은 아마도 --- 일본인이 아니고서는 위에서 제가 '일 개인의 있음직한 일반적 반응'이라 표현했던 것 이상의  무언가를 온전하게 전부 이해할 수는 없을지 않을까란 생각을 가지게만 해줍니다. 작가 오이시 에이지는 소위 일컬어지는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지요.

지난 10년 동안은 차라리 겨울잠이라도 잘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생각이 여실히 들 정도로 일본 전체가 힘든 시기였다.(p138)

그 10년여간, 일본에선 6천 명이 사망했던 고베 대지진이 있었으며, 여전히 그 사회적·개인적 후유증을 심각하게 남기고 있는 마쓰모토 사린 가스 사건이 있었었지요. 그뿐 아니라! --- "쇼팽을 정열적으로 치던 친구가 애들을 상대로 피아노로 호빵맨을 치고 있다는 현실"(p215)은 여전히 일본인들에게는 어찌해서든 잊고 싶은 기억만 남겨놓은 시간이란 걸, 그리하여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10년이란 시간이 결코 '잃어버린' 것들만 있는 시간이 아니라는 위로를 일본인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이 소설을 읽으며 해봤더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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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직관'이란 것이 있기에, 알파고는 이세돌 9단을 이길 수 없다라 말해졌었었지요. 바둑의 룰을 전혀 알지 못하기에, 그 직관이란 것이 바둑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역시 알 수 없었습니다... 만! 일반적 예측관 달리 --- 'Game Theory'(상대의 반응에 대응한다라는 점)와 '확률'에 기초하고 있는 알파고의 작동원리는 예의 이 두 가지 분야에서만큼은 인간의 두뇌가 컴퓨터의 계산능력을 이길 수는 없다란 점이 여실히 보여진 결과를 낳았더군요. 그렇담 이세돌 9단은 한 판의 승리라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요? (아는 것이 없기에 해볼 수조차 없는) 공학적 추론이 아닌, 지극히 단순한 논리로 추측을 해보자면 그건 아마도 '확률'이란 개념이 가지고 있는 빈틈이 아닐까하는 대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하기에!!!


알파고에 '알파신(神)'이란 호칭을 붙이는 건 (물론 이것이 일종의 '유행어'스런 단어임을 알고는 있습니다만 어쨌든) 지나친 비약임에 틀림 없습니다. 신은 '확률적 계산'이 아닌 '수학적 계산'을 하기 때문이죠. 둘 사이에 뭔 차이가 있는 걸까요?


여전히! --- 전 이 작품을 쓴 작가의 의도는 아마도 '잃어버린 10년'에 아파하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위로의 메세지를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그에 더해 A라는 원인으로 인해 B라는 결과가 나타난 것이라는, 즉! 일본에게 '잃어버린 10년'이란 B의 결과가 있었던 것은 그 어떤 A라는 결과가 있었기 때문(수학적 전개)인 것이지, 어쩌다보니 재수가 없어서/의도하지 않았거늘 (확률적 전개) 그렇게 된 게 아니라는, 일종의 자기반성까지를 요구하고 있다라 보게 됩니다. 그러하여!


p430부터 시작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결말이 등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찌릿!한 감정이 저절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장면들을 읽어가면서조차 --- 일본인이 아닌 사람에게 이 소설에 대한 만족도가 최고가 되기는 어렵지 않을까,란 생각을 버릴 수가 없더군요. 이건 마치, 아우슈비츠 수용소나 5월의 광주를 당사자 이외의 사람들이 인류적 차원 이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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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알파고의 다음 종목으로 스타크래프트가 거론되었고, 유명 게이머가 바둑은 이겼지만 스타크래프트는 안될 것이다라 장담했다는 기사가 있더군요. 정말 그럴까요? 물리적 한계만 극복한다면 예의 스타크래프트 역시 알파고의 승리가 되지 않을까, (역시나 스타크래프트를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 란 쪽에 손을 들고 싶습니다. 하지만!!! --- 이제까지 제가 배웠던 그 모든 지식들과 수치화/문자화할 수 있는 그 모든 경험들을 알파고에게 입력해준 후, 이 소설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의 감상문을 출력해보라 한다면 과연... 이 글과 같은 글을 출력해 낼 수 있을까요?설마 그건 아니겠지요? --;;


▶ 짧은 한두 마디 : '잃어버린 10년' --- 누구나 다 가지고 있지 않을까?


(읽어본) 비슷한 내용/메세지의 소설들 

- 오기와라 히로시 作, 타임 슬립

- 히가시노 게이고 作, 비밀」 ·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1.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라는 말은 양자의 위치는 확률로밖에는 판단할 수 없다는 양자론을 부정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다. - <역자후기> 중, p459.
  2. 「허삼관 매혈기」 한국어판 개정판 서문 중 작가 위화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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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
류동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단 하나뿐인 '진정한 나'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대인 관계마다 드러나는 여러  얼굴이 모두 '진정한 나'다. …… 분인(dividual)이란 대인 관계마다 드러나는 다양한 자기를 의미한다. (p13) …… 나는 분인의 집합체로 존재한다. 그것들은 모두 타자와의 만남의 산물이며,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다. 타자가 없다면 나의 다양한 분인도 없고, 요컨대 지금의 나라는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다.(p127)

일본의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가 쓴 「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들입니다.  2015년의 대한민국이, 이 책 속 이 구절들에 대하여 이른바 일컬어지는 '사상적 의문'이란 걸 던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었지요. 하지만!!! --- 제가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이제까지 (명칭 이상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는) "마르크스주의"를 바라보았던 시선(視線) 속엔 갖가지 사상적 의심, 심지어 종교적 의문까지가 깃들어 있었었음을 이 책,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을 통해 창피한 감정, (이걸 왜 이제야 깨달은걸까?란) 안타까운 감정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까지의 저의 삶이 얼마나 단순했었던가를 반성하게 되었다는 것과 함께 털어놓을 수밖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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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적 본질은 각각의 개인들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이다.1"(p33)


마르크스의 (단지 경제학이라는 특정 학문에 한정된다라기보다는) 사상(思想) 역시 이처럼 ---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에서도 읽을 수 있었던, 바로 그 구절로부터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글이 너무 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책으로부터의 많은 인용구들을 각주로 돌려놓았습니다. 부디 그들에게도 관심 가져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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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

저자 류동민은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인간의 유적(類的) 본질은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데'(p52)있다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바로 이 점,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 불가능하기에 노동자, 더 나아가 인간이 (필연적으로) 소외를 경험하게될 수 밖에 없다2는 결론이 나온다라는 것이지요.3 대체 왜 자본주의 하에서는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라 주장되어지는 것일까요?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4"(p109)


이 인용구는, "I am what I eat!"류의 rhetoric으로 표현되곤 하는, '나'라는 개인이 속해있는 환경으로써 '나'라는 존재가 정의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명제입니다.5 여기서, 물질적 환경이란 조건이 '나'라는 존재를 단지 물질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정신적 본질까지도 규정하게 되어버린다는 점이 바로!!! '소외'를 가져오는 근본적 시작점이 되는 것이지요.6  "



【 물신7(物神),fetish 

"어떤 사람이 왕인 것은 오직 다른 사람들이 그를 받들어 신하로서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대로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신하라고 생각한다.8"(p67)9

 

'수단과 목적의 전이(轉移)'가 초래하는 폐해(에 대하여는, 울궈먹어도 너무 울궈먹는 거 아니냔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을 정도로 여러 번 적었었으나 한번 더!) 는 '물신성'에서도 예의 그 진가(?)를 발휘하고 맙니다.

화폐가 화폐인 것은 원래부터 화폐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너도 나도 상품을 그것과 바꾸려 욕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신이 되어 버린 돈은 이제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필요로 하는 재화나 서비스를 손에 얻기 위한 수단이었던 돈이 그 자체로써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pp67-68) …… 화폐와 교환되었으므로, 즉 팔렸으므로 그것은 가치를 갖는 것으로 믿게 됩니다. 가치를 갖기 때문에 팔리는 것이 아니라 팔렸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pp131-132)

저자는 '정조(情操)를 지키기 위해 자결하는 것, 죽은 남편에 대한 성실의무를 다하기 위해 본능을 억압하고 수절하는 것'(p71) 등의 전근대사회를 지배했던 관습들이야말로, 사랑이라는 감정이 물신이 되어 거꾸로 인간성을 억압하는 비극적 결과10라 적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단과 목적의 전이'는 비단 과거의 일들만은 아니지요. '제대로 가르치고 배웠다는 증거'로서의 시험성적이란 수단이 거꾸로 목적이 되어, '오직 시험결과만으로 배움의 성취도를 평가'하게 되는 작금의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이 그지같은 현실11은 또 어떻습니까.12 


​그렇다면 이러한 '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으며, 어떻게 극복되어질 수 있는 걸까요? 이 과정에 대한 오해야말로 --- 이제까지 제가 (그리고 어쩌면 '당신'도)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잘못된 시선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결정적 원인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 물질의 변화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하느 상황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 하에서 만든다.13"(pp102-103)

여러 가지 사회적 관계의 총합으로 개인의 본질이 규정되지만,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개인이 모든 사회적 관계를 개인 마음대로 선택할 수는 없다는 점'(p109)이라는 것, 즉! ---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사회적) 구조가 존재하여, 개개인의 행동반경의 상한과 하한을 제약한다라는, 쉽게 말해 '용이 개천에서 태어날 수는 없다'라는 구조 속 인간의 한계란 것이 명확하게 존재한다라는 겁니다.14 인간은 이, 마치 삼장법사의 손바닥과도 같은 이 한계를 과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 걸까요?


상부구조물은 그 하부에 있는 구조, 즉 토대 없이 혼자서는 서 있을 수 없습니다. 토대가 무너지면 상부구조물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토대가 A에서 B로 바뀌면 그에 대응하는 상부구조물도 A'에서 B'로 바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세상 모든 일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즉 일체유심조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마음먹기'가 어느 특출한 개인이나 철학자의 머릿속에서 스스로 만들어지는 생각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상식조차도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지금 여기'의 물질적인 조건들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지요. 노예는 노예다운 생각을 할 수밖게 없으며 자본가는 자본가다운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독재자에 의해 정치적으로, 또는 종교적 신념에 의해 정신적으로 철저하게 통제된 체제에 어느 순간 균열이 생겨나고 결국에는 무너지는 것도, 그저 사람들이 생각을 고쳐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각을 고쳐먹게끔 만드는 물질적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pp112-113)

이처럼 물질적 환경이 인간의 정신적 본질까지도 규정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 '물질적 변화'는 과연 어떻게 사회의 토대를 바꿀 수 있는 걸까요? 토대가 바뀔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이 갖추어지기 전까지는, '생각을 고쳐먹은 누군가'가 제기하는 이 '문제적 상황에 대한 문제 제기'는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그저 사회로부터의 왕따가 되고 맙니다.15 하지만!!!


"​①새로운 더욱 높은 생산관계를 그 물질적 존재조건들이 낡은 사회 자체의 품에서 부화되기 전에는 결코 대신 등장하지 않는다. ②따라서 인간은 항상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한다. 자세히 보면 과업 자체가 그 해결을 위한 물질적인 조건들이 이미 주어져 있거나 적어도 생성과정 중에 있는 곳에서만 출현하기 때문이다."(p239) -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 중.

①번과 ②번 문장이야말로, (우리가 잘못 배웠었기에 오해할 수 밖에 없었었던) '역사발전 5단계론'에 대한 마르크스의 본뜻을 담고있다라 생각됩니다. 이에 대한 마르크스 경제학자인 류동민 교수의 설명은 다음과 같지요. --- "인간은 항상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한다"는 문장의 의미를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제기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해당 사회가 이미 일정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갖춘 수준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문제가 '문제'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해결을 위한 과정이 진행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p241)

즉! 러시아라는 후진농업사회가에서 선도적 정치의식을 지닌 소수의 직업혁명가에 의해 시작되었던 20세기 '사회주의 혁명'과 그 실패를 가리켜 '마르크스 역사이론의 실패'라 규정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오해이며, 오히려! --- 마르크스 역사이론의 (정당한) 입증이라 평가받아야 한다라는 것이지요.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라는 것이 있다면, 그 또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하기 전까지는 성립하기 어려우며 우연히 성립하더라도 지속될 수 없습니다.(p121)


【 공산주의  

 

​존재론적으로 현실이 그러하든 그렇지 않든 많은 사람들이 당위론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 나아가 현실도 결국에는 당위를 향해 움직여 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16. 만약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현실은 물론 그렇지 않거니와 앞으로도 당위로부터 점점 더 멀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회는 정상적으로 유지되지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p169) 

​제가 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공산주의는,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란 역사의 발전과정을 기계론적으로 정의해 놓은 '역사발전 5단계설'이 거의 전부가 아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 가설은 정말 유치합니다. 예의!!! --- 이는 소련이라는 특정 사회에 의해 의도적·자의적으로 변질된 마르크스의 사상이라는 것이 저자 류동민 교수의 주장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 부른다."(p248)

- 마르크스·엥겔스 共著, 「독일 이데올로기」중.

저자 류동민을 이를 가리켜 "현실에서 완전하게 달성될 수는 없으나 현실이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가까워지도록 노력하게 만드는 이념적 원형"(p249)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 '공산주의'란 이념을 (우리가 흔히 떠올리게 되는, 사유재산을 전면부정하는 그런 류의 가공된 시뻘건 이미지가 아닌) 현실의 변화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이 구성되어 가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는, 그 연장선상을 따라가 보자면 뜻밖에도! '심지어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도 다양한 수준에서 현재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을'(p250)수도 있다라는 것이 저자의 (반박할 수 없는) 주장이지요.

 

 

 

 


 

 

"공산주의는 단지 사적 소유(사유 재산)를 철폐하고 국가계획을 도입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본질이 온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지는 상태, 인간과 인간의 충돌이 진정으로 해결되는 상태여야 하는 것입니다."(p265)



【 마르크스의 꿈 

​이 책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를 읽고 나니 결국!!! --- 마르크스를 '인간의 자기 소외, 더 나아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 전체의 소외라는 불행을 어떻게 극복해낼 수 있는가하는 가를 말하고 싶었던 인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제시했던 해결책이 바로 '인간의 자기소외가 없는 상태'로 정의되는 공산주의라는 것이었지요.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란 표현이야말로 --- (자본주의 하에서) 아파하고 있는 우리에게 마르크스가 진작에 제시했던 하나의 처방전을 소개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문장이라 생각합니다. 위에 소개한 '소외, 물신, 공산주의'라는 개념들 이외에도 이 책은 '국가17, 종교18'등에 대한 마르크스의 사상과 대중의 오해를 소개 및 교정해주고 있습니다. 자! 이제 마르크스가 얼마나 인간의 소외 문제에 대하여 천착했었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어찌보면 저 스스로의 공부를 위한 정리일 뿐인) 이 감상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마르크스라는 인물과 그의 사상에 대한 오해를 교정해주었을 뿐 아니라, 마르크스라는 인물을 사뭇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란 생각을 갖게 해주신, 이 책의 저자 류동민 교수님께 여전히 변함없는 감사의 말씀을 이 감상문에서도 역시 빼놓을 수는 없네요.  

​"네가 사랑을 알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즉 사랑으로서의 너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네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너의 생활표현을 통해서 너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너의 사랑은 무력하며 하나의 불행이다."(p260)

- 「경제학·철학 초고」중

▶ 짧은 한두 마디 : "난 아직 젊기도 하며, 또한 그 시절을 보낸 40대 중후반이기도 합니다!" --- '젊어서 마르크스에 빠지지 않으면 바보지만, 그 시절을 보내고도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으면 더 바보'라 말한 칼 포퍼에게 건네는 나의 한 마디.

 

 


※ 반드시! 함께 읽어보길 권하는 책들

- 홍기빈 著,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 류동민 著, 「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


※ 읽어본, 류동민 교수님의 다른 책들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기억의 몽타주

 




 

  1.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중 여섯번째 테제.
  2. "오랫동안 열정적으로 추구하던 목표를 이루지 못하였을 때,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관계의 총체 중에서 어느 한 측면을 잃게 됩니다."(pp36-37)
  3. "마르크스와 주류경제학의 차이라면, 시대와 사회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언제가 일하는 것을 싫어하느냐하는 물음에 어떠한 대답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p53) …… 마르크스가 다루는 것은 노동력의 매매 과정입니다. 즉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것은 노동자이고 권력은 그 노동력을 사줄 자본가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본질적인 문제는 '파는 순간'의 얘기가 아니라 '팔고 나서'의 얘기라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른바 자유무역론자들은 다른 상품이나 노동력이나 별로 차이가 없는 똑같은 상품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파는 순간'과 '팔고 나서'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노동력과 다른 일반적인 상품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마르크스 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p145)"
  4.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 중.
  5. "마르크스의 사상은 인간이 하나의 동물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먹고 마시며 살아가느냐 하는 특정한 생활양식, 그것을 지탱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느냐 하는 생산양식이 우리의 삶, 나아가 우리의 사고방식까지도 규정하게 된다는 것,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야말로 마르크스의 공헌이라 할 수 있습니다."(p63)
  6. "노동의 개념을 정신적 활동으로까지 확장한다면, 인간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사유조차도 자신의 독립된 사유로 만들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독립적인 하나의 존재가 되는 셈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정해 놓은 사유의 방식에다 자신의 사유를 끼워 맞추는 사람은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스스로의 힘으로 주체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그는 하나의 독자적인 인격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p64)
  7. ⁠"사람은 나면서부터 유한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갖지 못한 모든 미덕을 완전하게 갖춘 존재를 갈망하며 상상했습니다.…… 신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믿음만으로는 충분한 위안이 되지 못합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돌이나 나무를 쪼아 신의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물건으로 만들어진 신, 즉 물신=페티시fetish입니다."(pp65-66)
  8. 「자본론」 1권 중.
  9. "권력을 갖는 자는 실상은 다른 사람들이 그의 권력을 인정해 주기 때문에 비로소 권력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권력의 인정이 일상화하면, 권력을 가진 자는 자신의 권력이 스스로의 내적 특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 반대로 권력에 지배당하는 이들은 스스로가 그 권력을 부여한 원천임을 깨닫지 못하고 일상적으로는 권력을 두려워하고 그에 기꺼이 복종합니다."(p69) --- 얼마 전 읽었던 에티엔 드 라 보에시 著, 「자발적 복종」의 명쾌한 요약!
  10. ​"화폐는 원래 상품의 가치를 나타내기(represent)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상품은 그것과 교환됨으로써만 가치가 있음을 입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화폐로 교환되지 않는 모든 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 마찬가지로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결혼이나 성교가 이제는 그것으로 표현되지 않는 모든 사랑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릅니다."(pp178-179)
  11. "마르크스는 경쟁이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 의식을 낳으며 결국 현실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 경쟁은 좋은 성과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필요한 것인데, 거꾸로 경쟁을 거쳤으므로 성과 역시 틀림없이 좋을 것이라는 식의 뒤집어진 의식이 생겨나곤 하는 것이지요. 또는 성과가 좋지 않은 것은 경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현상 때문에 정작 내재되어 있는 현실의 문제를 왜곡하거나 은폐하기까지 합니다."(pp159-160)
  12. ​"흔히 말하는 '역사는 민중의 힘으로 발전한다'는 명제는 피지배자들의 저항이 임계점에 이르러 권력의 물신성을 깨뜨리는 순간에 성립하는 것입니다. 독재자들의 동상이 거리에 내팽개쳐지는 장면들은 바로 권력의 본질이 물신성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 (또한) 정조나 순결과 같은 개념 대신에 성적 자기결정권을 강조하는 것은 물신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첫걸음이 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pp70-71)
  13.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중.
  14. "마당쇠나 언년이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의식을 결코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노예는 스스로 노예됨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에만 고통스러운 삶을 그럭저럭 견딜 수 있기 때문이지요.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즉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순간, 노예는 개인적인 삶을 견디기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배제당하게 될 것입니다."(p112)
  15. 저자 류동민은 1990년대 초반, 성의 자유라는 문제를 제기했던 마광수 교수를 일례로 들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성의 자유라는 문제가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사회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그가 제기했었다"라는 것이지요.
  16. (일반적으로 어떠한 특정) 명제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존재론적 측면과, 비록 현실은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규범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론적 측면입니다. 앞의 것은 흔히 'sein의 문제'라고 부릅니다. 현실이 '그러하다'라는 뜻입니다. 뒤의 것은 역시 독일어로 'sollen의 문제'라고 부르는데 …… '마땅히 그러해야만 한다'는 뜻이지요.(pp168-169)
  17. "국가가 무색무취한 중립적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환상입니다. 마치 국가대표 축구팀이 외국 대표팀과 일대일로 맞붙는 A매치 경기를 볼 때처럼, 국가가 동질적인 하나의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것은 국가가 특정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관측일 따름입니다. 국가기구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국가라는 이름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는 끊임없는 견제와 토론의 대상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에만 국가가 공공의 명분으로 사적 이익을 도모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pp208-209)
  18.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폐기는 바로 인민의 현실적 행복에 대한 요청이다. 인민의 상황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청은, 이 환상을 필요로 하느 상황을 포기하라는 요청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 기원에서 본다면, 종교를 자신의 후광으로 삼고있는 간난의 삶에 대한 비판이다."(p206)- <헤겔 법철학 비판>의 서문 중 : 권력의 소유자가 신격화되고 정확하게는 물신이 되면, 그 앞에 엎드리는 이들은 현실의 불확실성과 미래의 불투명성 때문에 생겨나는 고통을 권력의 소유자에게 맡겨 버림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권력에 대한 복종이 그저 환상이라고 깨우쳐 주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이해하고 그에 기초하여 극복을 도모할 때 비로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은 그러므로 종교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모든 물신과 환상에 대한 비판입니다. 동시에 그것들을 낳을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먼저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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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
목수정 글, 희완 트호뫼흐 사진 / 레디앙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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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가면서, '현재 나의 삶'에 만족감을 느끼는 순간보다는 뭔가 아쉽고, 안타깝다라 생각하게 되는 시간들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더 속상한 건 --- 이제까지 제가 가져왔던, 지켜왔던 사고(思考)와 생활방식​이란 게 혹 잘못 선택되었던 건 아닌가하는 의심마저 들고 있다라는 점이죠. 이렇게 많이 살아왔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일들 - 결혼을 했고, 한 아이를 이 세상에 탄생시킨 - 도 적지않은 나이가 되었건만, '현재 나의 삶'을 만들어 준, 그 모든 과거를 지탱했었던 저의 사고와 생활방식이란 것에 이제와서야 의심어린 의문이 든다라는, 그리하여 어쩌면 저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후회를 하게될지도 모르겠단 불안감이 점점 커져가고 있는 요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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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왜 어느 한순간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살지 못하고, 왜 늘 다른 곳에서 보상받기를 원하는지 가슴치며 물었다.(p112)

그냥...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저 역시 (정말!) 가슴치며 울고싶어지더군요. --- 원하는 대학의 원하는 학과에 들어가기 위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 이전의 모든 생활들을 단순화해가며 지낼 수 있었더랬습니다. 별로 힘들지도 않았었어요. 그 목표를 이루고 나니, 근데 또 다른 바램이 생기더군요. 뭐, 또 그 바램을 얻어내기 위해 희생시킬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은 다 희생시키는 생활을 했더랬지요. 그 바램마저 이루어냈거늘, 그냥 한 순간의 무언가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사라지게 해버리더군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계속 진행형이기만 한 이 모든 것들이 이젠 저를 심히 초조하게 만들어줍니다. 제 앞에 있는 '선택의 여지'는 예전처럼 그렇게 넓지가 않기 때문이죠. 어쩌면 아예 없는 걸지도 모릅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란 말은 예의, 나이 먹어가는 이에게 그의 초라함을 잊게 해주려는 미사여구에 불과할 뿐이죠. --- 일하다가, 주말에 쉬고, 아이와 복닥거리며 공부시키고, 그렇게 대학엘 보내고, 그리고도 끊나지 않을 '양육'의 과정이, 제 미래가 가질 수 있는 (아마도!) 유일한 선택지가 아닐까라 생각했더랬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이루어내지 못했던, 이루어낼 수 없었었던, 그리하여 지금도 여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절반 이상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아빠'완 달리, '너만큼은 너의 바램을 이루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란 말을 자꾸만 아이에게 건네어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곧 '강요'로 변해버렸으며, 그 순간 이후 아이에게 왜? 지금 학원엘 다녀야하고 게임할 수 있는 시간을 줄여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마저 사라지게 만들어 주었지요. 저의 삶 자체가, 아이의 삶 자체가 목적이 되지 못한, 제가 이루지 못했던 것을 아이라도 이루어내게 함으로써 '나의 보상'을 받고자 했었었음을 도저히 부인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 어떤 세월도 또 다른 세월을 위한 볼모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의 20대, 30대, 40개는 모두 똑같이 소중하고, 나의 모든 시간들에 적당한 노동과 적당한 즐거움을 배분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다.(p110)

​왜 그리 일찍 남아있는 미래의 선택지가 별로 없다라 생각하느냐라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도 했었습니다만, 그 이외의 선택지를 상상해낼 수 없었었기에, 결국 나에게 남아있는 건 별로 없다라 결론내릴 수 밖엔 없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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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은 터뜨리고 욕망은 충족시키면서 사는 것이 건강한 삶이다. 그러나 내가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진정한 나의 욕망인지 아니면 모두가 욕망해야 하는 것이라고 정해진 일반적 욕망의 리스트일 뿐인지를 가늠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p100)

이 책,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이 --- '이제까지 제가 가져왔던, 지켜왔던 사고(思考)와 생활방식​'이란 것에조차 변화될 수 있는 선택의 여지란 것이 거의 없는 것일까하는 부분을  다시금 생각해보도록 만들어 주는겁니다. 이제와서야 어렴풋하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었다라는 거죠. 저로 하여금 옳다가 옳지않다의 판단을 내리게 해왔던 기준을 과연 나 스스로가 만들었던 것인가하는 의문 말입니다.


보수주의자는 기존의 지배적 사유습성과 생활양식을 그대로 따르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서 보수주의가 기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환경의 변화에 의해 강요당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모두 영원이 보수주의자로 살아갈 것이다. 보수주의는 특정한 계급의 독점적 특성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속성이다.

- 유시민 著, 『국가란 무엇인가』, 돌배게 刊, 2011. p189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 속성'이라 하더라도, 이제까지 제가 지켜왔던 '보수성'이란 것을, 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취했었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었던가에 대해서까지는 '그렇다'란 자신있는 대답을 못하겠는 겁니다. 이 책의 저자 목수정이 정의한 바 --- '주어진 길을 가는 사람'(p289)의 우파적 사고가 이제까지의 저를 지배해왔다면, 그렇게 해 살아온 이제까지의 삶이 이처럼 결국엔 '아쉽고, 안타까운 것'으로 밖엔 설명되지 못한다라면!!!

이젠 '현상을 까뒤집어보고 다른 각도에서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람'(pp289-290)이란 의미로서의 '좌파'로 살아보는 것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겁니다. '주어진 길'을 가야겠다라 살펴보니, 남아있는 선택의 여지가 뻔한 이 상황에서 '좌파로의 변신'은 매력적이지 않을까? 막 이러면서 말이죠.


대의를 위해 자아를 희생하거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적인 지향과 욕망에 충실한 선택으로서의 좌파, 자유롭고 당당한 생활좌파가 많을수록 미래가 밝다는 게 내 생각이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투쟁의 깃발을 높이 올리는 모습만이 좌파의 전부는 아니며, 그런 자세가 좌파의 승리를 앞당긴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p213)


………………………………………………………………………​ 

몇몇 구절들을 이 책으로부터 인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이 감상문이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로지 저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부분에 대한, 저의 이야기만을 담고 있지요. 이 책, 정말로 매력적입니다. 그러하기에, 이 책에 대한 내용을 쓰고 싶지 않았으며, 사실 이 책에 담겨있는 내용을 요약한다는 게 별 의미가 없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저 --- "저자 목수정의 글을 읽어가는 것 자체가 이 책의 매력이며, 그러다보면, 저완 또 다른 곳에서 각자 자신에게 필요한 깨달음/발상의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란 한 문장으로 이 책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주장에 대해 읽는 이로 하여금 '틀렸다'라 반감을 가지게 하기 보다는, '나와는 조금 다르기 한데, 관심이 가네!'의 호기심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정말로 뛰어난 작가라 생각합니다. 여러모로...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의 저자이고, 그만큼 매력적인 내용의 책입니다. 그녀와 젊은 시절, 소개팅을 했었더라면 어떤 일이 있었을까?하는 '바지속까지 정치적인' 상상을 해보게 되었을만큼 말이죠. ^^;;


  

※ 번역가로서의 목수정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著, 심영길·목수정 共譯 『자발적 복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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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심영길 외 옮김 / 생각정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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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발적 복종" 

 

뭔가 '있어 보이는' 류의 제목으로는 이보다 더 멋진 것도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 첫인상을 가장 원초적으로 말해보자면) 한 마디로 '알아서 긴다'쯤의 의미를 이렇게 "자발적 복종"이라 찍어 놓으니, 정말 읽지 않고는 못베기겠는 책의 제목이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 읽어보려 했었습니다만, 정확히 1년 전에 있었던 첫 번째의 시도 이후, 세 번째만에 드디어 이 길지도 않은 책을 완독할 수 있었었네요. 대체 전 왜... 그랬던 걸까요? (지나치게 많은 부분을 인용하여 감상문을 쓰는 것이 독자가 가져야하는 예의에서 많이 벗어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이 글을 쓰는 데에서만큼은, 이 예의를 지킬 수 있을만큼 저의 능력이 되지못함을 먼저 털어놓겠습니다. 이 글은 『자발적 복종』이란 책을 읽고 쓴 감상문이 아닌, 『자발적 복종』이란 책에 대한 소개의 글, 혹은 요약의 글이라 보아주시길.)

​…………………………………………………………………………

​1548년, 프랑스의 귀옌에서 일어난 폭동에 당시의 권력은 무자비한 진압으로 맞섰었다 합니다. 이를 본 라 보에시는 '절대군주가 행사하는 절대권력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게'(p17)되었고, 이것이 바로 그로 하여금 이 책 『자발적 복종』을 쓰게 한 직접적 동기였었을 것이라 역자(목수정)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때 라 보에시의 나이 겨우 18세1!) 그러하기에!!! --- 2016년 대한민국의 독자인 제 입장에선,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저자의 주장들에 대해 '시대의 착시(錯視)', 예를 들어 "시대적 환경, 정치적 환경 등의 변화로 인해, 2016년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주장들2"이 적잖이 들어있을 것이다란 막연한 선입견을 가지고 본문을 읽기 시작했었었거늘.3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던 Leviathan』(1651)을 통해, '인간은 자연 본성에서 오는 자만과 교만으로 인하여 서로 협력하여 질서 있는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한 피조물이기에 그들의 순조로운 사회생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구로 '국가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하였었지요.4 하지만 이보다 100년 년 전, 라 보에시는 이미! 그처럼 '인간 본성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생겨난 기구로서의 '국가'가 현실에서 작동되기위해 필요로 하는 '권력, 권력자'가 지니게 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점들을 간파하고 있었던 겁니다. --- 기본적으로 '정치권력'에 대한 복종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그 복종을 크게 보아, 다시 ①'권력'에 대한 복종과 ②'권력자'에 대한 복종의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을 다 읽고나니, 읽기 전 제가 가졌던 (시대적 착시라는) 막연한 선입견이라는 것이 완전히 박살나버렸다는 점이지요. 16세기 초, 프랑스의 (우리나라로 치자면 고삐리인) 한 청춘이 써놓은 이 책이, 대한민국의 지나온 길과 걸어가고 있는 오늘까지를 어찌 이토록 소름돋게 묘사하고 있을 수 있을까,하는 놀라움으로 인해 말입니다.  



【 권력 】

'권력'을 바라보는 라 보에시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입니다. 권력을 손에 넣은 군주는 근본적으로 그가 선인(善人)일지라 하더라도 '언제든 악인(惡人)으로 돌변할 수 있'(p35)다라고 , 심지어는 '권력자'란 지위를 '잘못할 수밖에 없는 자리'(p39)라고까지 보고 있는 겁니다.5 그렇다면 대체 왜? --- 권력을 손에 넣은 군주, 즉 권력자는 (라 보에시의 견해대로라면 필연적으로) 악인이 되어버리고야 마는 것일까요?

​라 보에시는 어떠한 유형의 권력자6이건7, 라 보에시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위대함이라 불리는 그 무엇에 홀려 기고만장'(p64)해진다라 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통치 권력에 도달하는 방법은 달라도 통치하는 방식은 항상 거의 동일하다. 선거로 권력을 쥔 지배자들은 민중을 마치 사나운 황소를 길들이듯 취급한다. 정복자들은 백성을 노획물로 여기며, 권력을 세습받은 자들은 백성을 그들의 당연한 노예로 간주한다.(p65)

'권력'이란 단어는 기본적으로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 즉 지배계급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권력자가 행사하는 '권력'에 대해 그 대상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그것을 '순응'이라 부르던, '수용' 혹은 '인정' 등 그 어떤 단어로 표현하건, 의미상으로는 오로지 한 가지일 수밖엔 없지요. --- 기본적으로 '권력자'와 '독재자'를 구분하지 않는 라 보에시의 인식을 바탕으로 하자면, 그것은 '복종' (혹은 '굴종')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대체 왜? 민중8들은 권력, 그리고 권력자에게 '복종'하는 것일까요?


【 권력에의 복종 】

라 보에시는 '자유'를 인간에게 주어진 '천부(天賦)의 권한'(p47)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그것을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p48)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간단한 자유의 획득방법은, 어느 새 우리로 하여금 이 자유에 대한 열망9 '원하기만 한다면 취득할 수 있고, 원하기만 하면 쉽게 누릴 수 있는 것'(p50)으로 약화시켜 버렸으며, 그 결과 우리가 '소유하길 희망하는 재산의 목록'(p49)에서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다라 생각하기에, 역설적으로 그리 원하지 않게 되어) 늘 '자유'란 것이 빠지고 말게 된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라 주장합니다. 그리하여!


관습은 매사에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특히 복종의 의무를 알게 하는 데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한다. …… 관습은 우리가 굴종을 거부감 없이 삼키게 함으로써 더 이상 굴종의 독으로부터 쓴맛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p70)

'자유란 것이 천부의 인권'이라는 것을 잊게 되었고, 그것이 관습으로까지 굳어지게 되었을 때, 여기에 인간 고유의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연약함10이 더해지게 되어 결국 --- "우리는 여기서 자발적 복종의 일차적 근거가 습관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말이 길드는 과정과 같다. 말에 재갈을 채우면 처음에는 재갈을 물어뜯다가 나중에는 익숙해져 재갈을 갖고 장난질한다. 말에 안장을 얹으면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항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장비와 장신구를 뽐낸다."(p81)11


이러한 변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심각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복종에의 관습'이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의 본성 자체를 변질시킨다12라는 점이라 라 보에시는 지적합니다. ---  자, '복종의 관습화'란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위험스러운 사태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만, '복종'이란 것이 단순히 '관습'에만 머물며 끝나는 것이 아닌, 그러니까 '관습'이란 것을 단순히 '잘못 들어선 길'의 수준이 아닌, '원래부터 가기로 했었고, 가야할 길'이라는 '당위'로 만들어 버린다라는 재앙이 일어난다라는 것에 라 보에시는 주장하지요.


​처음에는 강요에 의해 힘에 눌려 복종하지만 그 다음 세대들은 자유를 전혀 보지 못했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후회도 유감도 없이 앞선 세대들이 강제적으로 해야만 했던 일들을 자발적으로 행한다.(p68) …… 멍에를 지고 태어나 노예 상태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전 세대가 어떤 삶을 누렸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 태어난 대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재산,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도 하지 않고 출생 당시부터 주어진 삶의 조건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기게 된다.(p69)

강남의 아이들이 '원래 인생이란 학원을 뺑뺑 도는 것'이라 생각한다는 우스개 소리도 정말 우스개 소리로 넘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택의 자유조차 없는) '복종'이란 것이 세대 전체에 '자연스러운 상태'로 인이 박혀 버리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조차 개입되지 못한 '자발적' 복종을 권력에게 스스로 바치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은 가져본 적 없는 것을 갈구하지는 않는다. 아쉬움은 즐거움을 안 뒤에 오고, 지나간 기쁨에 대한 기억이 있는 까닭에 불행을 인식하는 것이다.(p80)

천부의 인권인 자유라는 것이 어느새 '가져본 적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단계에 이르르면, '자발적 복종'은 더 이상 '복종'으로 인지되지도 못하는 겁니다. 드디어 '인생이란 원래 이런 것!'의 인식이 민중들에게 전반적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그들 중 일부는 그러한 것을 거부하려 하기도 할 겁니다.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 '폭군은 자신의 치하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하고 말하는 자유, 심지어는 생각하는 자유마저 박탈한다.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생각 속에만 머물러 있도록 억압한다.13'(p84)  '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쟁을 겪어본 2016년의 대한민국에게는 무척이나 낯익은 구도 아닙니까?

설 연휴에 TV로 <국제시장>이란 영화를 보았더랬습니다. 엄청나게 흥행했었던 영화라기에 뭔가 대단한 감동을 가지고 있을 줄 알았었거늘! 그 영화가 관객들에게,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은연중에 심어주고자 하는 메세지가 너무도 역겨워, 감독이 이 영화에 그 어떤 정치적 의미가 담겨져 있지 않다라고, 그저 문화적 코드로만 이 영화를 보아달라 말한다라면 그건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공개적 표현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듯 합니다. --- 스스로도 '너무나 힘들었다'라 토로하는 자신의 지나간 인생, 하지만 막상 그 인생이 현재의 시점이었을 때에는 무조건적인 희생이 주인공에게 (그것이 설혹 천형(天刑)이었다라 해도) 부여된 거부할 수 없는 의무라도 되는 양14 거침없이, (내 인생은 왜 꼭 이래야만 하나라는) 의문조차 없이 이행해 냈었던 그 인생에 대해, 그러했기에 이렇게 단란한 가정을 이룬 것으로 보상받지 않았느냐는 식의 억지스런 해피엔딩을 만들어 낸 것은 은연중에! '지금 우리들은 배부른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라는 자책, 혹은 '요즘 젊은 것들은 하여간!'이란 책망을 (아주 대놓고!) 만들어내길 요구하고 있다고 밖에는, 다시 말해 (이 책의 저자 라 보에시가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 '자발적 복종의 세대 이전(移轉)'을 영화 <국제시장>은 아주 대놓고 강요하고 있다라고 전 생각합니다.15 같이 영화를 봤던 종원군에게 사뭇 미안한 마음이 진심! 들더군요. --;;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보면!

 


 【 권력자에의 복종 】

다음으로 라 보에시는 이러한 '악의적 독재 권력'이 어떻게 지탱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를 '흔히 말하듯, 나무를 쪼개기 위해서는 나무 쐐기를 먼저 막는 법'(p113)이란 말로 간단하게 표현하고 있지요. 즉, 작은 특혜를 자신 주변의 추종자들에게 허락하고, 그러한 관계가 일종의 먹이사슬이 되도록 그 숫자를 늘려감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게 된다라는 겁니다.


궁사, 경호원, 창기병들도 이따금 군주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 그들이 이 상황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이 받은 모멸을 누군가에게 돌려줄 수 있기 때문인데, 불행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에게 불행을 초래한 군주를 향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처럼 불행을 참고 견디며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는 약한 존재들에게 악습을 그대로 반복한다.(pp113-114)
위의 서술이 과거의 그리고 현재진행형이기도 한 대한민국의 정치판의 바로 그 이야기이다라는 것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듯 합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소위 말하는 '갑질 현상'이라는 것까지를 16세기 중반 프랑스의 젊은이가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라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갑질'에도 여러가지의 종류가 있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것만으로 한정한다면) 내가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나에게 당할 수 밖에 없는 이에게 당하게 해주겠다라는 이 유치한 행태가 혹! 인간의 본성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암튼!
독재군주는 자신의 눈에 들고자 애쓰며 호감을 구걸하는 아첨꾼들을 항상 본다. 이런 자들은 독재군주가 말하는 대로만 해서는 안 된다. 그가 원하는 것을 알아채야 한다. 군주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그의 생각을 미리 알아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의 환심을 사야 한다.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학대해가며, 심지어는 목숨까지 내놓고 군주의 일을 위해 자신을 던져야 한다. 군주의 즐거움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찾아야 하며 군주의 취향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본래의 취향 따위는 버려야 한다. 체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고 본성은 완전히 내던져야 한다. 군주의 말과 목소리, 그의 눈짓과 사소한 표정의 변화에 유의해야 한다. 군주의 뜻을 살피고 그의 생각을 알아내는 데 첨병 역할을 하지 못하는 눈과 손, 발은 군주에게 쓸모가 없는 것이다.16(pp116-117)
'궁사, 경호원, 창기병'보다는 훨씬 더 권력자와 가까이에 있는 자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더 많은 권력으로부터 하사되는 특혜가 주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먹이 사슬마냥 계속 그 범위를 넓혀가게 되지요. ('대머리 논쟁'과도 비슷한 논리로) ​이것이 계속 진행되다 보면! --- "큰 특혜가 작은 특혜의 먹이 사슬로 이어지고, 독재자와 결탁해 얻은 이익이 또 새끼 이익을 가져와 자유인의 신분을 기꺼이 선호하는 사람 수 만큼이나 독재 권력의 배를 불려주는 사람 수도 늘어나게 된다."(p111) 


라 보에시는 마지막으로 --- 독재자에게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불어넣은 사람들이 바로 이 측근의 신하들이라 지적하고 있습니다.  


독재자에게 접근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 스스로 자유로부터 멀어지는 행위가 아니던가. 다시 말하자면 제 양손으로 기꺼이 노예의 자리를 끌어안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p115) …… 그들은 자신의 영혼을 헌상한 대가로 의식주에는 궁핍함이 없지만 자유가 전혀 없는 삶을 살고 있으며(p116) …… 그들은 재화를 차지하고자 애쓰지만 바로 자신들이 독재자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을 수 있는 권력을 줬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못한다.(p118) 

​…………………………………………………………………………

 

● 대체 언제부터 이 검은 물은 우리의 발밑으로 밀려오기 시작한 것일까? 그 원죄는 우리가 한 번도 깨끗이 밀어내지 못한 유교적·봉건적 질서에서 찾을 수 있다.…… 20세기에 이르러 마침내 붕괴되고 만 이 봉건의 질서를 대신한 것은 일제 35년. 이 치욕의 시절과 해방 이후 친일파들에게 다시 권력을 맡기게 된 치명적 역사의 오류는 기회주의가 가장 현명한 삶의 해법임을, 힘 있는 자 밑에 엎드려 마름 노릇을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생존의 전략임을 제대로 주입했다.(pp8-9)


● 영원한 을 乙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자본가들의 갑 甲질을 성토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 익명의 네티즌으로서의 성토일 뿐, 막상 현실에서는 을이라도 되는 상황을 감지덕지 끌어안는다. 갑질을 당할 수 있는 을의 입장에 있다는 건 적어도 여전히 링크 안에 함께 서 있음을 의미하므로, 아예 그 링크에서 낙오되는 일이 있을까 경계한다. 이런 현상은 투표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가진 게 없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이해를 대변해줄 사람에겐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그자에게선 내가 떠나온 비참한 출신 성분의 향기가 풍긴다. 중요한 건 누가 가장 힘이 센가,이다. 비밀투표일지언정, 내가 강자의 편이라고 느껴야 안심이 된다.(pp10-11)

위와 같은, 역자 목수정의 역사 인식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라 말할 수 있는 근거를 끝내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위의 지적이 너무도 잔인하기에, 어찌해서든 이를 거부해낼 수 있는 논리나 이유를 찾아보려 했습니다만, 그리하여 이 감상문에 이토록 오랜 시간을 매달려 있었습니다만 결국엔, '저 역시 동의합니다'란 말을 할 수 밖엔 없네요. 심지어!!!


나의 아이에게, ​이 아빠의 의식 중에도 위와 같은 원죄가 흐르고 있었다할지 모르겠으나, 너의 세대부터는 '내가 강자의 편이라고 느껴야 안심이 된다'라는 인식을 버려야 한다라 말할 자신이 있기는 한 건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너 스스로 강자가 되어라' 혹은 '사회의 주류에서 멀어지지 말아라'를 네 인생에서 잊지 말고 살아가거라란 충고를 - 이러한 충고들이 틀린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닌, 혹여 역자 목수정이 지적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과 같은 결과를 낳게될 지 모르기에 주저스러운 것인 - 과연 저 스스로는 제 아이에게 해줄 수 있을까, 심히 자신없기만 합니다. (그러했기에, <역자 서문>만 세 번 읽고 정작 본문을 읽어나갈 용기(?)를 내지 못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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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현재의 관점에서 보아 새로이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2016년 독서의 첫 ★을 표하게 된 이유는 --- 우리가 매일 목격하고 있는, 그러하기에 어느덧 그것에 익숙해져 마치 이 현실이 '발생가능한 가장 최선의, 혹은 당연한!' 결과로 생각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 기저에 깔려있는 탄생 배경을 '글로써 표현'해 내주었기 때문이며, 이 당연함이, 즉 이 '자발적'이라는 것이 왜 '당연하지 않으며, 자발적이어서는 아니되는 것인가'를 새삼스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있다라는 점에서, 16세기 프랑스의 고삐리 청년 지성에게 창피함 어린 감사의 마음을 / (그 전부에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몇 번을 읽어보아도 (당연히 매우매우 긍정적인 의미로서) '지린다!'란 생각을 갖게 해주었던 <역자 서문>을 써주신 목수정C에게 감탄 만땅의 감사함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진정, 이 '복종의 자발성'에 대해 잊고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 네가 이런 책을 읽었고, 이런 감상문을 썼다니!!!'라며 놀랄 제 친구들 좀 있을 듯. ^^;;)


▶ 짧은 한두 마디 : ​바야흐로! 새로운 권력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기.

※ 함께 읽어보면, 묘한 대비가 느껴지게될 책 : 모이제스 나임 著, 『권력의 종말 


 

  1. '몽테뉴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이름을 후세에 남긴 『자발적 복종』의 초고를 쓴 것은 대학 입학 즈음이다.'(p138) - <역자 후기> 중.
  2. 제 눈에 보였던 '시대적 착시'중 하나는 --- 라 보에시는 기본적으로 '권력자', '군주'란 단어와 '독재자'란 단어를 의미 구분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2016년의 기준에서 보자면 '권력자'가 들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라 보에시는 종종 '독재자'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요.
  3. 물론, 이 '시대적 착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 "모두가 노예가 되길 거부하는 순간, 이 굴욕적인 세상은 사라진다. 스스로 복종한 자, 그들은 독재자와 공범이다. 아무도 복종하지 않는다면, 독재자는 결코 그 어떤 권력도 발휘할 수 없다. 그가 지닌 모든 권력은 바로 자발적 복종을 바친 자들이 건네준 것이기 때문이다. 복종을 멈춰라, 그 순간 당신은 자유인이다.(p30)"라 역자 목수정이 정리해 놓은 저자 라 보에시의 주장은 'prisoner's dillemma'와 맞닥뜨리게 되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환상일 뿐이 되고 말지요.
  4.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5. 라 보에시가 '선한 권력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 "자연은 왕으로 태어난 그들은 범인과는 다르게 만든 듯하다.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전능한 신이 국가를 다스리고 왕국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기기 위해 그들을 선택한 듯 하다"(p105)라는 주장에서 볼 수 있듯, 그 역시 권력자가 선천적으로 악인이라고는 보지 않지만, '권력'이라는 것이 '권력자'를 악인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지요.
  6. 라 보에시는 (이것이 역자의 선택인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권력자', '군주', '독재자'란 세 단어를 큰 의미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제 판단에 따라 세 단어 중 하나를 선택하여 사용하였습니다.
  7. '독재자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민중의 선출로 권력을 부여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자, 무력으로 나라는 차지해 통치하는 자, 권력을 상속받아 군림하는 자'(p63)
  8. 개인적으론 '민중'이란 단어에 사실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역사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니 이 단어가 참으로 넓디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비록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더군요. 대한민국이라는 특정 공간의, 저의 청춘시절이라는 특정 시기에 사용되었던 한정된 의미가 아닌, 일반적 표현으로서의 '민중'은 꽤나 매력적입니다.
  9. '자유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인간은 단지 자유인으로 태어날 뿐 아니라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맹렬한 열망도 함께 가지고 태어난다.'(p58)
  10. '인간은 약한 탓에 복종을 강요당하는 경우도 있다.'(p37)
  11. "노예가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묶여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 등. 그리고 쇠사슬에 묶여있지 않은 자유인을 비웃기까지 한다. 하지만 노예들을 묶고 있는 것은 사실 한 줄의 쇠사슬에 불과하다. 그리고 노예는 어디까지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 by Leloi Jones, 1968년, NY할렘.
  12. 라 보에시는 '교육'의 역할을 매우 중요시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 역시 교육에 의해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게 된다라 주장하고 있지요. --- '자연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씨앗들(인간의 본성)은 너무 작고, 고착된 것이 아니어서 그것을 억압하는 아주 작은 교육의 타격만으로도 싹트지 못하고 사라져버릴 수 있다. 그 씨앗들은 지극히 잘 보전되지 못하면 톼화하고 녹아버려 결국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다.'(pp70-71) ……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며, 또한 그 상태로 계속 존재하길 희망한다. 그러나 그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교육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받아들이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지니는 모든 것을 - 무엇을 먹고 살며 어떤 습관을 갖고 있는지 등 - 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타고난 것처럼 보이지만 단지 타고난 본성이 그러할 뿐, 이후 사람이 갖추게 되는 성품은 교육과 양육 방식에 의해 길들여지는 것이다.'(p81) : 각주로 처리해버리기엔 너무도 중요한, 그리고 어쩌면 매우 위험한 방향의 논지일지도 모르겠으나, 전 위와 같은 라 보에시의 '교육의 역할'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며, <세월호 사건>에 있어서 우리가 눈에 보이는 문제점을만을 논할 것이 아니라, (배가 기울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었을, 그리하여 생명에 위협이 가해지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인지하였었을) 학생들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배 안에 앉아있도록 강제한 것은 다름아닌 '우리 대한민국의 교육'이었다는 점을 훨씬 더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정부는 이것을 '해양수산부'만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지 않나요?
  13. "간혹 고개를 치켜드는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붙는 만국 공통어는 빨갱이. 노예가 되어 편안하게 주인이 던져주는 푼돈을 챙기고 종종 그의 발길질을 견디기로 한 사람들에게, 노예를 해방하겠다고, 당신들을 구하겠다고 나서는 그자는, 가장 위험한 적이다."(p7)
  14. "삶은 그저 살아내야하는 고통의 과정일 뿐이다. 인생의 계획자도 실행자도 아니다. 거대한 기계를 굴리기 위해 박혀 있는 나사 하나에 불과하다."(p28)
  15. 이 영화가 흥행이었을 때, 영화 제작사가 자신들의 오너를 위해 정권에 바치는 헌사란 뭔가 우스갯 소리 같은 이야기를 들었었습니다만, 당시엔 그저 설마!로만 넘겼었지요. 정작 영화를 보고나니 그게 설마!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란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16. '서구의 근대화는 …… 토론과 대화로 정신을 설득하는 관념론적 과정이 아니라, 감시와 처벌의 채찍으로 신체를 길들이는 유물론적 과정이었다'라는 말을 통해 푸코는 사실 '근대화 자체에 대한 비난'하고자 했었음에도, 대한민국의 우익은 이를 '서구의 근대화도 어차피 감시와 처벌, 군대식 훈육의 결과였었단다'라는 의도적 오역(誤譯)을 통해 '한국적 근대화의 폭력성을 옹호'해 왔었었지요. 마찬가지로 --- 라 보에시의 이러한 지적은 분명 '권력 주변에 대한 비판'이지만, 이를 의도적으로 '권력자를 항해 가져야 하는 당연한 덕목'정도로 변질시켜내는 사람들이 분명 많을 겁니다. 얼마 전 제가 어디선가 읽었던 '임원의 의무'라는 글 내용이 딱! 이 내용들을 회사와 오너를 향해 가지고 있어야 할 덕목으로 써놓고 있더군요. 뭐 또 있죠. '진실'이니 어쩌니 하는 말장난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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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 - 그리스도 이야기
루 월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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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수수께기의 아이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그리스도에게 다가가고, 막판이 이르러 그의 성장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이 세상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된 그리스도다.(p368)

"그리스도 이야기"라는 부제2에서도 알 수 있듯, 그리고 작가 스스로도 위의 인용구에서처럼 서술하고 있듯이 --- 이 작품은 예수의 탄생으로 시작해 예수의 죽음으로 끝맺음되고 있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제가 기독교 신지이긴 하나) 그처럼 신앙의 잣대가 아닌, 순전히 한 문학 작품을 읽고 난 일반 독자의 시선에서 이 소설을 이야기해보자면 의외로! :

1. 줄거리 자체는 무쟈게 간단합니다. 우리나라의 드라마에서 지겹도록 보아왔던 딱! 그 수준의 '뻔하디 뻔한' 이야기이에요. --- 착한 (게다가 당연히 멋진 외모의!) 주인공이 뜻하지 않은 우발적 사건으로 인해 불행한 인생을 맞이하게 되고, 그의 마음 속에 사그라들지 않고 있는 복수의 감정3, 그것도 자신의 (갑자기 표독스럽게 변해버린) 불알친구를 향한 그 증오의 복수가, 예의 지독한 불행 속에서도 때맞춰 등장해주는 은인들의 도움으로 갑자기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 그 결과 복수의 상대는 완전 아작나버리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그 결과 앞에서 그다지 기뻐하지도 않는다는, 뭐 그런 '뻔하디 뻔한' 내용입니다. 이런 <Taken>스러운 복수의 소설에 무려! "교황의 축성"이라뇨? 

2. 그쵸. ​(역자의 표현을 빌자면) '이것은 복수의 로망스4인 동시에 종교소설'(p774)이기에, 그것도 ('뻔하디 뻔한'이란 구절이 딱 들어맞는) '센티멘털 소설풍의 회심(回心)이야기'(p773)이었기에 "교황의 축성"이 가능했던 겁니다. ('교황의 축성"이란 구절을 반복인용하고, 거기에 굵은 표시까지 한 것이 비아냥은 아닙니다. 단지, 이 소설을 읽고난 지금, 이 구절이 이 소설을 읽기 이전에 저에게 주었던 기대감을 지나치게 부풀려주었었다는 것에 대한, 뭐랄까  짜증의 표현쯤이랄까요? --;;) 그렇다고, 이 소설이 대놓고 '예수천국, 불신지옥'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당연히! 아니구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당시 유대민족(을, 일제 치하의 우리 민족이라 한번 생각해보죠. 비록 제가 그 당시를 살았던 건 아닙니다만, 역사적 기록 그리고 현재의 이성(理性)적 추론)은 --- 피지배 민족으로 하여금 이 피지배의 상황을 타개시킬 누군가, 소위 말하는 '영웅'의 출현을 간절히 바란다라는 소망을 가지게 해줍니다. 게다가 유대민족에게는 그러한 '메시아'의 등장이 이미 성경(구약)에 계시되어 있었었기에!


유대인들 사이에 메이사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질 때면 그 논점은 언제나 단 하나, 메시아가 '언제' 나타날 것인가 하는 것뿐이었다. 또한 당시의 모든 유대인이 메시아에 대해 품고 있던 또 하나의 견해가 있다. 그것은 메시아가 유대인의 왕으로 나타나 정치적인 왕이나 황제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킨다는 생각이다.(p370)

(예의  '뻔하디 뻔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다 그러하듯) 이러한 대중(大衆)들관 달리, 우리의 주인공 벤허는 한 발 더 나아간 고민으로 괴로워합니다. : "이 세상은 멸망하거나 새 정부가 만들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력이 아닌 다른 원리가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도대체 어떤 원리일까?5"(p389) 하지만!

3. 이런 종교적 색채가, 760 페이지에 달하는 본문의 대부분을 차지했었다라면 <1단원 : 집합>에만 마르고 닳도록 밑줄을 치곤 하는, 성경책 마저도 창세기만 폈다마는 것이 어지간한 인간의 본성이라는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겠지만,  제 생각에 이 작품이 미국에서 '50년간 베스트셀러 1위'6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 작가 루 윌리스가 이 이야기속에 '복수의 로망스'와 '종교소설'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그야말로 기가막힌 비율로 배합시켜 놓았기 때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걸로 밖에는 보이질 않습니다.

자신의 가문을 박살내어 버린 원수인 메살라에게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그를 평생 불구로 만들어버렸음에도 주인공 벤허의 복수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행방을 알 수 없는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찾아내야 한다는 더 커다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작가는 이 최종 목적을 이루기 위한 주인공의 노력을 구구절절 써내려 갑니다. 따라서 독자로서는 무의식중에 (작가가 의도한 바 대로) 그 결말이 (물론 그 둘을 찾아낸다는 해피엔딩일 것이겠지만) 어떠한 과정을 거쳐 완결되는가에 촉각을 세우고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복수의 로망스'와 '종교소설'이라는 두 측면의 배합비율에선 (결과적으로) 기가 막힌 능력을 보여주었던 작가가, 이 둘이 접합되는 부분에선 난데 없이 어처구니 없는 뻘짓을 해버리고 맙니다. ---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찾기 위해선 어떤 희생과 노력도 마다하지 않겠다,라 결심하고 열라 노력하는 모습의 주인공이 나오다가, 이제 슬슬 '종교소설'의 부분이 나와야 하는 시점(時點)에 다다르자, 작가는 뜬금없이!


​어머니와 누이의 행방을 알아내려는 마음과 이별의 고통이 희미해져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유대의 예언이 실현된다는 뜨거운 기대를 품고 있는 지금은 더욱 그렇다. 그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판단을 내리지 말아달라고 독자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다.7(p660)

라는, 마치 <우버 앱>으로 <드론> 불러탄 단군 할아버지가 <아이폰 6S>로 <김기사 앱> 켠 채 <직방>에서 왕검성 소개받아 고조선 찾아가신다라는 식의 카드를 내밀고 있는 겁니다. --- 벤허의 불행이 시작되는 장면에서 '그것은 소년이 남자가 된 순간이었다'(p173)이라는 오글거리는 표현까지 써가며, 뭔가 으다다하게 전개될 듯하다란 '복수의 완결'이란 기대를 한껏 가지고 있는 독자들에게 난데 없이 '부탁'이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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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다고 전체적으로 보아 이 작품 속에 의미있는 메세지가 없다는 건 아닙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었듯,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다라는 상황은 별 어려움 없이, 일제 하의 우리 민족을 대비시켜보게 해주지요. 정치·사회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가치관의 혼란이 극심했었던 말기의 조선을 일본이 별 어려움 없이 손에 넣을 수 있었었듯,

과거의 종교는 이제 신앙이라고 부를 수 없고 기껏해야 하나의 사고방식이나 표현방식의 한 형태가 되어버렸고, 한 줌 밖에 안 되는 자들이 그것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성전을 관리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제사장, 시를 쓰기 위한 방편으로 신들을 노래하는 시인, 그리고 가수 정도가 고작이다. 종교를 대신하여 힘을 갖고 있는 것은 철학이고 …… (p121)

로마 지배하의 유대 민족 역시 (이것이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 원인인지 결과인지는 명확히 구분할 수 없으나)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피지배의 상황 하에서, 이러한 피지배의 상황을 끝낼 수 있게되는 계기로는 아무래도! (위에서도 인용했었듯,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누군가'의 등장이 가장 관심을 받을 수 밖엔 없지요.8 주인공 벤허 역시, '다윗에 필적하는 뛰어난 무장이고 솔로몬 같은 지혜와 위엄을 갖춘 지배자9'(p387)라는, 즉 자신들의 구원자가 (그 character는 이미 결정된 것이고 단지) '누구냐'일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진정한 구세주는 영혼의 구세주입니다. 즉 구원이란 주님이 다시 한 번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 그리고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p381)

이라 말하는, 예수 탄생의 현장에 가장 먼저 찾아갔었던 동방박사 중 한 명인 이집트인 발타사르의 주장은 선뜻 받아들이 수 없는 견해였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 "이 세상의 것이지만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둘도 없는 영광에 빛나는 지배다"(p388)라는, 계속되는 발타사르의 이같은 가르침은 결국 벤허에게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줄 '누군가'인) '새로운 왕'에 대한 의문에 더해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이후의 모습인) '새로운 왕국'이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고민을 안겨주게 됩니다. 이러던 와중 드디어!!! 예수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요. 그리곤


몇 번을 생각해보아도, 마지막에는 언제나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이스라엘 전체의 거국적인 전쟁만이 로마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다. 나사렛 사람은 누구이고, 그의 목적은 무엇인가?(pp691-692)

​'오랫동안 키워서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듯한 기대'(p689)였던, 물리적 위력을 통한 해방을 꿈꾸고 있었던 벤허에게 예수는 예의 "구원은 내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10"류의 가르침을, 즉 동방박사 중 한 사람이었던 이집트인 발타사르의 주장과 같은 이야기를 할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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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등장과 더불어, 이 작품은 이제 온전히 '종교소설'의 모습만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벤허가 내내 고민해 왔던 문제인 '민족의 구원자'에 대해 작가는 "하느님의 뜻은 우리에게 수수께끼다. 그 뜻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더욱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이고, 그것은 막판이 되어서야 밝혀진다."(pp735-736)이라 자못 능청을 떨고 있습니다만, 사실!


"천국은 칼의 힘이나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믿음과 사랑과 선행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가르침이죠."(p47)

이처럼, 동방박사들의 입을 빌어 소설의 도입부에 이미! 그 '하느님의 뜻'에 대해 정확하게 밝혀놓고 있었었지요. 그렇다면 대체 이 소설은 무엇을 이야기하기 위해 장장 760여 페이지를 할애받았던 것일까요? 제 생각에 그건 바로 :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보다도 더 좋은 것이 있다. 아무리 약한 남자라도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을 얻어 죽음조차 마다하지 않게11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현세의 삶보다 훨씬 순수한 다른 삶이 있다. …… 그렇다면 예수의 소명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현세와 내세의 경계까지 인도하여 그 경계선을 넘어서게 하는 것, 경계선 너머에 세워진 그의 왕국으로 인도하는 것이다.(p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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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육신의 아픔으로 인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p749)라 울부짖었었어도 결국엔 "다 이루었다"(p749)는 한마디를 남기고 십자가에 매달려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맞이했던, 그리하여 우리에게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핵심적 메시지12를 알게 해준 예수의 일생/삶에 대해, 이보다 더 명확한 설명은 없지 않을까... 싶네요. (이 작품을 가리켜, '이른바 순문학 본위의 문학사에서는 거의 무시당해왔다'(p782)라 쓰고 있는 역자의 주장이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을 정도로, 단순히 문학 작품으로만 바라보자면 아쉬운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닌 이 소설로부터, 그래도 별 세 개의 만족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온전히 이 인용구절 때문이었다라는.)

 

암튼 뭐 이 정도면! --- (무사히 신종플루를 이겨낸 듯 보이는 종원군의 쾌차와 더불어) 나름 멋진 5일간의 연휴였다란 만족감이. ^^


※  '예수'에 대한 다양한 상상 :

​- 니코스 카잔차키스 作, 최후의 유혹

- 주제 사라마구 作, 『예수복음

- 칼릴 지브란 作, 『사람의 아들 예수

 

 



 

  1. 원작에는 없다는 이 부제는 'Wordsworth Classic'판(1995년)에서 빌려왔다라 역자는 밝히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A Tale of the Christ"란 문구와 이 작품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 건지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네요.
  2.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어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이 원수를 무릎 끓게 하고야 말겠다.'(p509)
  3. '복수는 유대의 권리이고 법입니다.'(p469)
  4. 이 작품을 1970⁠년대나 1980년대 초중반에 번역해 내놓았다면, 과연 무사히 판매될 수 있었을까요⁠? 이런 측면에서만 본다면, '보통 사람들의 시대'라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던 노태우 정부는 시대를 정말로 잘 읽었었다라 말해도 될 듯.
  5. 이런 류의 형용구가 너무도 많아, 사실 딱히 믿음이 가는 건 아닙니다. '성경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팔린','성경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등등이, 딱히 주눅을 선사하는 권위를 스스로 발하지 못하는 그런 류의 형용구이지요.
  6. 이처럼 이 소설에서 작가는 꽤나 자주 --- "이번에는 독자 여러분을 시온 산의 궁전 앞으로 데려가겠다"(p118)라든가, "동방에서는 옥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기서 독자 여러분에게 설명해두겠다"(p137)는 식의 노골적 개입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7. ⁠우리의 해방이 비록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이후 한국전쟁 등을 거쳐 결국에 우리에게 주어진 '누군가'라는 것이 '김구' 아니면 '이승만' 중 하나일 수 밖엔 없었다라는 점이 불행 중 더 불행이었었죠. 뭐,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8. ① 이러한 바램은 니코스 카잔차키스 作, 『최후의 유혹』에서도 똑같이 등장했었었죠. 그 작품에서 열심당원이었던 유다가 기대했었던 메시아 역시 "칼을 든 메시아를, … 유대인들의 말과 낙타들고 소생시켜서, 보병과 기마병이 다같이 진격해 로마 놈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p598)"라 명령하는 메시아였었습니다.
  9. ② 니코스 카잔차키스 作, 『최후의 유혹』, p537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이 작품 『벤허』에는 예수의 가르침이 직접적으로 예수의 입을 통해 서술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10.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p724)
  11. "그분이 되살아났을 때, 부활을 믿으려면 그전에 반드시 죽어야 하고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pp734-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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