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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 - 그리스도 이야기
루 월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5년 12월
평점 :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수수께기의 아이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그리스도에게 다가가고, 막판이 이르러 그의 성장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이 세상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된 그리스도다.(p368)
"그리스도 이야기"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 그리고 작가 스스로도 위의 인용구에서처럼 서술하고 있듯이 --- 이 작품은 예수의 탄생으로 시작해 예수의 죽음으로 끝맺음되고 있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제가 기독교 신지이긴 하나) 그처럼 신앙의 잣대가 아닌, 순전히 한 문학 작품을 읽고 난 일반 독자의 시선에서 이 소설을 이야기해보자면 의외로! :
1. 줄거리 자체는 무쟈게 간단합니다. 우리나라의 드라마에서 지겹도록 보아왔던 딱! 그 수준의 '뻔하디 뻔한' 이야기이에요. --- 착한 (게다가 당연히 멋진 외모의!) 주인공이 뜻하지 않은 우발적 사건으로 인해 불행한 인생을 맞이하게 되고, 그의 마음 속에 사그라들지 않고 있는 복수의 감정, 그것도 자신의 (갑자기 표독스럽게 변해버린) 불알친구를 향한 그 증오의 복수가, 예의 지독한 불행 속에서도 때맞춰 등장해주는 은인들의 도움으로 갑자기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 그 결과 복수의 상대는 완전 아작나버리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그 결과 앞에서 그다지 기뻐하지도 않는다는, 뭐 그런 '뻔하디 뻔한' 내용입니다. 이런 <Taken>스러운 복수의 소설에 무려! "교황의 축성"이라뇨?
2. 그쵸. (역자의 표현을 빌자면) '이것은 복수의 로망스인 동시에 종교소설'(p774)이기에, 그것도 ('뻔하디 뻔한'이란 구절이 딱 들어맞는) '센티멘털 소설풍의 회심(回心)이야기'(p773)이었기에 "교황의 축성"이 가능했던 겁니다. ('교황의 축성"이란 구절을 반복인용하고, 거기에 굵은 표시까지 한 것이 비아냥은 아닙니다. 단지, 이 소설을 읽고난 지금, 이 구절이 이 소설을 읽기 이전에 저에게 주었던 기대감을 지나치게 부풀려주었었다는 것에 대한, 뭐랄까 짜증의 표현쯤이랄까요? --;;) 그렇다고, 이 소설이 대놓고 '예수천국, 불신지옥'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당연히! 아니구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당시 유대민족(을, 일제 치하의 우리 민족이라 한번 생각해보죠. 비록 제가 그 당시를 살았던 건 아닙니다만, 역사적 기록 그리고 현재의 이성(理性)적 추론)은 --- 피지배 민족으로 하여금 이 피지배의 상황을 타개시킬 누군가, 소위 말하는 '영웅'의 출현을 간절히 바란다라는 소망을 가지게 해줍니다. 게다가 유대민족에게는 그러한 '메시아'의 등장이 이미 성경(구약)에 계시되어 있었었기에!
유대인들 사이에 메이사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질 때면 그 논점은 언제나 단 하나, 메시아가 '언제' 나타날 것인가 하는 것뿐이었다. 또한 당시의 모든 유대인이 메시아에 대해 품고 있던 또 하나의 견해가 있다. 그것은 메시아가 유대인의 왕으로 나타나 정치적인 왕이나 황제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킨다는 생각이다.(p370)
(예의 '뻔하디 뻔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다 그러하듯) 이러한 대중(大衆)들관 달리, 우리의 주인공 벤허는 한 발 더 나아간 고민으로 괴로워합니다. : "이 세상은 멸망하거나 새 정부가 만들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력이 아닌 다른 원리가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도대체 어떤 원리일까?"(p389) 하지만!
3. 이런 종교적 색채가, 760 페이지에 달하는 본문의 대부분을 차지했었다라면 <1단원 : 집합>에만 마르고 닳도록 밑줄을 치곤 하는, 성경책 마저도 창세기만 폈다마는 것이 어지간한 인간의 본성이라는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겠지만, 제 생각에 이 작품이 미국에서 '50년간 베스트셀러 1위'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 작가 루 윌리스가 이 이야기속에 '복수의 로망스'와 '종교소설'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그야말로 기가막힌 비율로 배합시켜 놓았기 때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걸로 밖에는 보이질 않습니다.
자신의 가문을 박살내어 버린 원수인 메살라에게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그를 평생 불구로 만들어버렸음에도 주인공 벤허의 복수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행방을 알 수 없는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찾아내야 한다는 더 커다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작가는 이 최종 목적을 이루기 위한 주인공의 노력을 구구절절 써내려 갑니다. 따라서 독자로서는 무의식중에 (작가가 의도한 바 대로) 그 결말이 (물론 그 둘을 찾아낸다는 해피엔딩일 것이겠지만) 어떠한 과정을 거쳐 완결되는가에 촉각을 세우고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복수의 로망스'와 '종교소설'이라는 두 측면의 배합비율에선 (결과적으로) 기가 막힌 능력을 보여주었던 작가가, 이 둘이 접합되는 부분에선 난데 없이 어처구니 없는 뻘짓을 해버리고 맙니다. ---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찾기 위해선 어떤 희생과 노력도 마다하지 않겠다,라 결심하고 열라 노력하는 모습의 주인공이 나오다가, 이제 슬슬 '종교소설'의 부분이 나와야 하는 시점(時點)에 다다르자, 작가는 뜬금없이!
어머니와 누이의 행방을 알아내려는 마음과 이별의 고통이 희미해져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유대의 예언이 실현된다는 뜨거운 기대를 품고 있는 지금은 더욱 그렇다. 그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판단을 내리지 말아달라고 독자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다.(p660)
라는, 마치 <우버 앱>으로 <드론> 불러탄 단군 할아버지가 <아이폰 6S>로 <김기사 앱> 켠 채 <직방>에서 왕검성 소개받아 고조선 찾아가신다라는 식의 카드를 내밀고 있는 겁니다. --- 벤허의 불행이 시작되는 장면에서 '그것은 소년이 남자가 된 순간이었다'(p173)이라는 오글거리는 표현까지 써가며, 뭔가 으다다하게 전개될 듯하다란 '복수의 완결'이란 기대를 한껏 가지고 있는 독자들에게 난데 없이 '부탁'이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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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다고 전체적으로 보아 이 작품 속에 의미있는 메세지가 없다는 건 아닙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었듯,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다라는 상황은 별 어려움 없이, 일제 하의 우리 민족을 대비시켜보게 해주지요. 정치·사회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가치관의 혼란이 극심했었던 말기의 조선을 일본이 별 어려움 없이 손에 넣을 수 있었었듯,
과거의 종교는 이제 신앙이라고 부를 수 없고 기껏해야 하나의 사고방식이나 표현방식의 한 형태가 되어버렸고, 한 줌 밖에 안 되는 자들이 그것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성전을 관리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제사장, 시를 쓰기 위한 방편으로 신들을 노래하는 시인, 그리고 가수 정도가 고작이다. 종교를 대신하여 힘을 갖고 있는 것은 철학이고 …… (p121)
로마 지배하의 유대 민족 역시 (이것이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 원인인지 결과인지는 명확히 구분할 수 없으나)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피지배의 상황 하에서, 이러한 피지배의 상황을 끝낼 수 있게되는 계기로는 아무래도! (위에서도 인용했었듯,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누군가'의 등장이 가장 관심을 받을 수 밖엔 없지요. 주인공 벤허 역시, '다윗에 필적하는 뛰어난 무장이고 솔로몬 같은 지혜와 위엄을 갖춘 지배자'(p387)라는, 즉 자신들의 구원자가 (그 character는 이미 결정된 것이고 단지) '누구냐'일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진정한 구세주는 영혼의 구세주입니다. 즉 구원이란 주님이 다시 한 번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 그리고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p381)
이라 말하는, 예수 탄생의 현장에 가장 먼저 찾아갔었던 동방박사 중 한 명인 이집트인 발타사르의 주장은 선뜻 받아들이 수 없는 견해였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 "이 세상의 것이지만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둘도 없는 영광에 빛나는 지배다"(p388)라는, 계속되는 발타사르의 이같은 가르침은 결국 벤허에게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줄 '누군가'인) '새로운 왕'에 대한 의문에 더해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이후의 모습인) '새로운 왕국'이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고민을 안겨주게 됩니다. 이러던 와중 드디어!!! 예수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요. 그리곤
몇 번을 생각해보아도, 마지막에는 언제나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이스라엘 전체의 거국적인 전쟁만이 로마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다. 나사렛 사람은 누구이고, 그의 목적은 무엇인가?(pp691-692)
'오랫동안 키워서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듯한 기대'(p689)였던, 물리적 위력을 통한 해방을 꿈꾸고 있었던 벤허에게 예수는 예의 "구원은 내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류의 가르침을, 즉 동방박사 중 한 사람이었던 이집트인 발타사르의 주장과 같은 이야기를 할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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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등장과 더불어, 이 작품은 이제 온전히 '종교소설'의 모습만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벤허가 내내 고민해 왔던 문제인 '민족의 구원자'에 대해 작가는 "하느님의 뜻은 우리에게 수수께끼다. 그 뜻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더욱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이고, 그것은 막판이 되어서야 밝혀진다."(pp735-736)이라 자못 능청을 떨고 있습니다만, 사실!
"천국은 칼의 힘이나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믿음과 사랑과 선행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가르침이죠."(p47)
이처럼, 동방박사들의 입을 빌어 소설의 도입부에 이미! 그 '하느님의 뜻'에 대해 정확하게 밝혀놓고 있었었지요. 그렇다면 대체 이 소설은 무엇을 이야기하기 위해 장장 760여 페이지를 할애받았던 것일까요? 제 생각에 그건 바로 :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보다도 더 좋은 것이 있다. 아무리 약한 남자라도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을 얻어 죽음조차 마다하지 않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현세의 삶보다 훨씬 순수한 다른 삶이 있다. …… 그렇다면 예수의 소명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현세와 내세의 경계까지 인도하여 그 경계선을 넘어서게 하는 것, 경계선 너머에 세워진 그의 왕국으로 인도하는 것이다.(p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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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육신의 아픔으로 인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p749)라 울부짖었었어도 결국엔 "다 이루었다"(p749)는 한마디를 남기고 십자가에 매달려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맞이했던, 그리하여 우리에게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핵심적 메시지를 알게 해준 예수의 일생/삶에 대해, 이보다 더 명확한 설명은 없지 않을까... 싶네요. (이 작품을 가리켜, '이른바 순문학 본위의 문학사에서는 거의 무시당해왔다'(p782)라 쓰고 있는 역자의 주장이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을 정도로, 단순히 문학 작품으로만 바라보자면 아쉬운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닌 이 소설로부터, 그래도 별 세 개의 만족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온전히 이 인용구절 때문이었다라는.)
암튼 뭐 이 정도면! --- (무사히 신종플루를 이겨낸 듯 보이는 종원군의 쾌차와 더불어) 나름 멋진 5일간의 연휴였다란 만족감이. ^^
※ '예수'에 대한 다양한 상상 :
- 니코스 카잔차키스 作, 『최후의 유혹』
- 주제 사라마구 作, 『예수복음』
- 칼릴 지브란 作, 『사람의 아들 예수』
- 원작에는 없다는 이 부제는 'Wordsworth Classic'판(1995년)에서 빌려왔다라 역자는 밝히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A Tale of the Christ"란 문구와 이 작품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 건지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네요.
-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어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이 원수를 무릎 끓게 하고야 말겠다.'(p509)
- '복수는 유대의 권리이고 법입니다.'(p469)
- 이 작품을 1970년대나 1980년대 초중반에 번역해 내놓았다면, 과연 무사히 판매될 수 있었을까요? 이런 측면에서만 본다면, '보통 사람들의 시대'라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던 노태우 정부는 시대를 정말로 잘 읽었었다라 말해도 될 듯.
- 이런 류의 형용구가 너무도 많아, 사실 딱히 믿음이 가는 건 아닙니다. '성경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팔린','성경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등등이, 딱히 주눅을 선사하는 권위를 스스로 발하지 못하는 그런 류의 형용구이지요.
- 이처럼 이 소설에서 작가는 꽤나 자주 --- "이번에는 독자 여러분을 시온 산의 궁전 앞으로 데려가겠다"(p118)라든가, "동방에서는 옥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기서 독자 여러분에게 설명해두겠다"(p137)는 식의 노골적 개입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 우리의 해방이 비록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이후 한국전쟁 등을 거쳐 결국에 우리에게 주어진 '누군가'라는 것이 '김구' 아니면 '이승만' 중 하나일 수 밖엔 없었다라는 점이 불행 중 더 불행이었었죠. 뭐,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 ① 이러한 바램은 니코스 카잔차키스 作, 『최후의 유혹』에서도 똑같이 등장했었었죠. 그 작품에서 열심당원이었던 유다가 기대했었던 메시아 역시 "칼을 든 메시아를, … 유대인들의 말과 낙타들고 소생시켜서, 보병과 기마병이 다같이 진격해 로마 놈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p598)"라 명령하는 메시아였었습니다.
- ② 니코스 카잔차키스 作, 『최후의 유혹』, p537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이 작품 『벤허』에는 예수의 가르침이 직접적으로 예수의 입을 통해 서술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p724)
- "그분이 되살아났을 때, 부활을 믿으려면 그전에 반드시 죽어야 하고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pp734-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