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 - 혁명의 딜레마, 고객이 된 시민, 지식인의 브랜드화
자오팅양.레지 드브레 지음, 송인재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여전히! --- '혁명'이란 단어가 제시해주는 이미지는 저 개인에겐 버겁기만 한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5·16'은 반란인가 혁명인가, '4·19'는 의거로 불리어져야 할까, 혹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난(亂)으로 인지되고 있지나 않을까 등등의 개념적 구분은 차치하고라도 여전히!


저의 일상과는 절대 가깝지 않은 단어이며, 앞으로의 일상과도 결코 가까와지지 않을 것 같은 단어임에는 분명합니다. 단지 --- '유전자 혁명'이니, 'IT혁명'이니 등과 같은, 뭔가 '파격적 변화'만을 의미하는 상징적 단어로서나 일상 속 뉴스 등에서 목격되어질 수 있는 단어일 뿐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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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년의 혁명가와 혁명을 옆에서 목격한 사람이 만났다."(p266)


전자는 프랑스인 저자 레지 드브레를, 후자는 중국인 저자 자오팅양을 일컫는 말입니다. 혁명1을 목격한 이(자오팅양)가 지적하는 "혁명의 부작용"(p266)에 대하여, 혁명을 실천했던2(레지 드브레)가 '저 친구와 끝장 토론을 해보고 싶군!'이란 소망을 가지게 되었고, 편지3로 각자의 생각을 주고 받은 결과물이 바로 이 책입니다.4

【 혁명의 '상상임신'은 끝났다! 】

자오팅양의 지닌 '혁명'에 대한 생각을 먼저 보죠. --- 자오팅양은 "정서적으로는 혁명에 동의합니다. … 그렇지만 이성적으로는 혁명을 신중하게 대합니다."(p25)라는 지극히 완곡한 표현으로 자신의 의견을 밝힙니다. 읽히기에 따라선 '혁명은 잘못된 선택이다'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실제 전 그렇게 이해했더랬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자오팅양이 반대하는 '혁명'이란 과연 어떤 의미인 것일까요?

그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행동이 바로 근대적 의미에서 혁명이라고 생각"(p24)라고 말합니다. 그리곤 '이상'이란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고 있지요.

"저는 이상을 하나의 척도로 간주하기를 희망합니다. 다시 말해, 이상은 실현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측정하는 데 쓰여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현실과 이상의 거리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고, 현실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p24)

​즉! 두 발 딛고 있는 현실이 어디에선가 옳지않다,라 느껴졌을 때, 그렇다면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 옳은 현실이 되는 것인가,를 설계해보는 하나의 기준점으로서만 가능한 것이 이상(理想)이거늘, (근대적 의미의) 혁명은 그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하려 했었5을 뿐 아니라, (옳지않은 현실의) 파괴를 내세우는 방식6으로 진행되었다라는 점에서, 그는 '혁명'이란 단어에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것이지요. 굳이 지금의 옳지 않은 현실을 바꾸겠다면,

"부드러움으로 단단함을 이기는 침투력7은 유연한 대처로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도록 만들어주고, 정서와 정세에 따라 점진적이고 세부적으로 추진해나갈 때 개혁이 더 풍부하게 작용할 것이다. 작은 것이 쌓여 큰 변화를 이룰 때 결국 현실을 복종시킬 수 있으며, 여기서 형성된 변혁의 효과가 훨씬 안정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pp14-15)

​이렇게 하라는 겁니다. 여기에 더해, "혁명이 동원한 대규모 집단 행동은 개인 이성이 모여서 초래한 비이성적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로 비이성적인 집단행동8"(p26)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단정을 내림으로써, '혁명'이란 개념/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피력하고 있지요.9

이처럼 자오팅양은 혁명이란 개념의 사용에 매우 신중합니다. 역사적으로 보였던 여러 사례들 -"사회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일부의 이익과 권력이 분배되는 상황을 바꾸라고 요구하고, 통치집단을 타도해서 그것을 대체하려"(p30)하는 것은 결코 혁명이 아니며, '반란, 봉기, 또는 정변'으로 불리어야 한다라 주장하지요. 그가 정의하는 혁명은 "사회의 총체적 변화'로서, 이는 "사회 전체의 생산양식과 정치법률, 제도의 변화를 요구하고 개개인의 생활방식, 사유방식, 가치관의 변화를 요구"(p31)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오팅양의 정의를 따른다면, 대한민국의 1987년 6월을 단순히 '항쟁'이라 표현하는 것은 우리 스스의 과도한 겸손이 되겠지요.)

​자! 이번엔 레지 드브레의 답변을 들어볼 차례입니다. --- 드브레는 "(혁명이라는) 상상임신은 끝났습니다!"(p56)란 다소 과격한 표현으로, 현대 사회에서 더 이상의 '혁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점에서 자오팅양의 의견에 동의를 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이상과 환상도 필요합니다. 유토피아의 우울한 최후를 겪고도 계속 살겠다는 용기가 남아 있다면 어떤 유감도 없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p57)

라는 것으로, 예의 자신의 일생에서 '혁명을 몸소 주도했었던 자'로서의 혁명의 필요성을 주장하지요. 암튼!

​이 책의 서문엔 "두 사상가는 학술계의 은어나 논조를 사용하지 않았다"(p10)라 쓰여있거늘, 두 사상가10가 주고받은 글의 내용은 이해하기 정말 힘들었습니다. '혁명'에 관해 주고받은 이들의 <첫 번째 편지 : 반혁명을 초래한 혁명의 두 얼굴>은 위와 같은 내용으로, 은근 흥미롭게 읽어낼 수 있었더랬습니다만 --- 두 번째 편지부터는 저의 이해력을 내내 탓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더군요. 은근 자존심이 상해, 작정하고 여러 번, 특정 부분을 계속 읽으며 이해하려 했었음에도 끝내는 두 손을 들고 말 수 밖에 없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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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라는 전통적 원칙11 '남이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로 바꾸고자 합니다.(p196)

어제는 종원군 학교에서 '학급의 날'로 보냈다 합니다. 종원군의 반은 공포 영화를 보기로 했다더군요. 헌데! --- 종원이는 절.대.로 공포영화를 안/못봅니다. <해리포터> 시리즈도 무섭다고 안읽었었을만큼 무지하게 싫어하죠. 그래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고 혼자 운동장에 나와 핸드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답니다. (물론! 게임도 했었겠죠.)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었네요. 핸드폰 사용금지 조항에 걸렸고, 선생님께서는 5일간 핸드폰 압수의 조치를 취하셨답니다. 종원군은 억울한 마음에 울었다 하더군요.

선생님의 핸드폰 압수는 당연한 거라 생각합니다. 여하한 이유로 한 명의 예외를 허용하다보면, 전체의 통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으니까요. 선생님께서 조교수에게 전화를 하셔서, 이러저러한 상황을 설명하셨고 양해까지 구하셨었다더군요. 저나 조교수나 그런 선생님의 제재조치에 그 어떠한 반감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만!!! --- 공포영화를 못보는/보기 싫은 학생은 그럼 어찌해야할까?라는 의문이 위 문장을 읽다보니 떠올랐습니다.

공포영화 보는 것이 반의 결정이기에, 즉 그것이 민주주의가 말하는 다수결의 결과이기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라 말해지는 건 엄연히 '폭력의 정당화'일 뿐입니다. 복숭아 알러지가 있는 사람에게, 이것은 다수결로 결정된 과일이므로 무조건 먹어야 한다!라는 건 말도 안되는 거죠. 복숭아 이외의 과일을 선택할 권리가 없(어졌)다면, 복숭아를 먹지 않을/복숭아 먹기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반드시 주어져야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종원군의 선택이 그 시간에 핸드폰으로 음악을 듣는 것이 잘못된 행동인 것임에는 저 역시 이견이 없습니다만, 또한 그 곳이 학교라는 교육의 현장이었기에 반의 결정이 공포영화 보는 것을 거부한 종원군의 선택에 대해 차마 옳다!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 그 녀석이 제 자식이어서가 결코 아니라,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p231)

마오쩌둥의 이 말이, 이 상황에 적용시켜낼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참 많은 아쉬움을 가지게 해주는 담임 선생님의 결정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을 해보게만 됩니다. 이로써 --- 대체 이런 어려운 책을 왜 읽어야 하나,에 대한 스스로의 답변 하나를 찾아내게 되었지요. 거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해도, 단 하나만의 생각해 볼 꺼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라는 거. 이것 역시, 적잖이 유익한 소득이긴 하겠습니다만, 이런 류의 책에 대한 호기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라는 건 아주아주 오랫동안 제게 큰 상처로 남아있게 될 듯 하네요. 아 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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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마, 아이야
응구기 와 시옹오 지음, 황가한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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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중에 누가 Milli고 누가 Vanilli야?'란 여친의 질문이 그저 한없이 앙증맞게만 보였던 때가 있었었듯1, <2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케냐의 '응구기 와 시옹오2'>란 기사의 제목에 '아, 올해 노벨문학상은 케냐인 2명이 공동수상했나보군'이란 말을 저 스스로도 했었을지 모를, 어지간해선 읽어 볼 생각/기회 잘 갖게 되지 않는 아프리카 문학이었습니다... 만! : "다른 환경에 서 있게 되면, 다른 것들이 보이기도, 다른 것들을 보게 되기도 한다"란 말을 뒤집어보면, 그게 어쩌면 --- "같은 환경에 처해 있다면 같은 생각을 하게 되기도, 같은 행동을 하게 되기도 한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란 의문을 가져보게 해 준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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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부터 시작된다. 당시 케냐는 정치적 긴장이 팽팽하던 시기, 바꿔 말하면 독립 운동을 향한 움직임이 태동하던 시기였다.(p194)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의 1945년 무렵이라는 시간적 배경이 아닌, '독립 운동을 향한 움직임이 태동하던 시기'라는 역사적 배경에 중점을 두어 읽어본다면, 이 작품을 이광수의 「무정」과 거의 1:1로 대입시켜가며 읽어낼 수 있기도, 하지만 예의! --- 아시아의 한국과 아프리카의 케냐라는, 뭔가 접점(接點)이 쉬 보이지 않는 지리적, 따라서 초래되어졌을 문화적 이질(異質)3이 여실히 느껴지기도 하는, 한 마디로 "모든 인간은 같은 '류(類)'로서 이른바 공통된 '유적(類的)'특성을 가지나, 특정 사안에 대한 생각, 특정 사건에 대한 느낌,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은 민족에 따라 …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란 진중권의 서술4이 너무도 잘 들어맞는 한 편의 소설이었고, 으나, 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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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지는 몰라도 키쿠유족(族)은 늘 자신들이 구제받을 길이 교육에 있다고 봤다."(p151)

이러한 생각을 갖는 것이 인간의 '유적 특성'인지, 아니면 대한민국과 케냐 민족 간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 「무정」과 「울지마, 아이야」에서의 핵심적 메세지는 바로 '교육'입니다. 


아버지 세대인 응고토로 하여금 '이 세상은 교육이 전부야'란 생각을 갖게 해준 이유가 "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잃어버린 땅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p60)이었고, 아들 세대인 은조로게에겐 그것이 "미래의 열쇠를 쥔 것"(p74), 그리하여 결국 "언젠가는 자신의 모든 지식을 이용해 백인과 싸울 터"(p120)라는, 이처럼 각자의 현실적 목적이 지향하는 바가 조금씩 다를지라 하더라도 --- "우리가 늙어 죽게 될 때에는 기어이 이보다 훨씬 좋은 조선을 보도록 합시다"5란 형식의 말과 끝내 일맥상통하는 '교육의 필요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 나!


이러한 교육의 힘을 믿으며, 지금은 희망이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훨씬 좋은 조선'이란 앞날을 위해 다같이 노력합시다!란 마무리를 보여주는 「무정」관 달리! --- 「울지마, 아이야」는 '어? 왜 이래!'란 생각이 들만큼 심히 뜬금없는 선택을 주인공으로 하여금 하게 하며 끝이 나지요.6이 작품에의 속편이 있다라거나, 아님 이게 아예 「토지」같은 대하소설의 시작이라면 모를까 암튼! 그런 결말은 저에겐, 이 작품의 만족도를 좋게 볼 수 없게 만든 가장 커다란 요인이었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다른 작품 「한 톨의 밀알」을 굳이 사놓은 건 바로 --- 그가 이 작품에서 던져놓은 다음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혹시나 이후의 작품들에서 보여지지나 않을까,하는 궁금증이 적잖았기 때문이었습니다.  



【 그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죽은 것인가? 】

​지금 내가, 이제껏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으나, 지금은 그를 죽이기 위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나의 적(敵), 그가 나의 적이 된 것은, 그리고 내가 그의 적이 된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걸까요? 군인이라면, 양자간에 '적대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건 상관의 명령이겠지요. 이게 정당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엔 이유라도 있죠. 그러나!

그냥, 우리보다 훨씬 힘이 더 세다는 이유만으로 난데없이 우리집에 쳐들어와 그 집에 눌러앉아 살며, 우리에게 일을 시키는, 게다가 --- 흰 색의 피부를 가진 자신들이, 검은 색의 피부를 가진 우리들에 비해, 그저 피부색이 그렇다라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더 우월하며, 이처럼 우리들의 집을 빼앗아도 되는 권리까지도 된다라는 그들에게, 단지 그들의 힘이 너무도 세기 때문에 감히 덤벼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기에, 또 다른 힘 센 누군가와 싸울 때 우리들을 데려다가 같이 싸우게 했고, 그러했기에 우린 대체 왜 저 사람을 죽여야 하는지도 모르며, 저들이 왜 우리를 죽이려 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싸우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죽어야 했고 …… 그런 시간이 쌓이고 쌓여오니, 이제 우리는 어느덧 "피로감으로 가득한 날들이 계속됐다. 그를 지탱해주던 기다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예언의 실현은 이제 불가능해 보였다."(p109)와 같은 체념의 단계를 거쳐 종국엔 나도 뭐가 뭔지 모르는 (에티엔 드 라보에시가 주장했던 바로 그!) "자발적 복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나의 아들 세대가 우리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그자를 계속 섬길 수가 있어요?"(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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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의 우리가, 일제 시대를 살아내었던 당시의 선조들에게 던지는 질문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저 개인적으론 --- 위의 질문에 대한, 「무정」에서 보여졌던 작가 이광수의 답변인 "전신이 불구덩에 들어가는 것보다 한 팔이나 한 다리를 베어 내는 것이 나았다"에 대해 대체 어떠한 이유를 들어 비난하여야하는지 알지 못하기에, 이보다는 오히려/차라리!!!

​"이제 조선 사람들은 원통하지만 자신들이 조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어야 합니다. … 살아 남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람은 우선 살고 봐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 복거일 作 「비명을 찾아서」 하권 중 p229, 문학과 지성사 刊, 1987.

​이처럼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일본인의 주장에, 우리가 왜 그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하는가를 조선의 민중들에게 전혀 설명해 내지 못했다라는 점을 비난하는 것이 올바른 화살의 과녁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고 있기에 --- 이후의 작품들로 인해 이제는, (여기에 대륙별 안배라는 정치적 이유가 들어있다 하더라도 어쨌든) 노벨문학상 수상이 기대되는 작가가 되어 있다는 응구기 와 시옹오가 혹, 어떠한 형태로라도 그에 관한 자신만의 답변을 내놓지 않았을까,하는 기대를 가져봅니다. 암튼!

이 작품 「울지 마, 아이야」는, 이 작품만 놓고 본다면 그다지 매력적인 이야기는 아니었네요. 이 작품에 대해 "식민 통치의 부조리함과 부당함, 정착민들의 잔인함과 원주민들의 억울함을 보여주고 있다"(p195)라 적어놓은 역자의 설명에, '아니 세상에 식민 통치란 것이 부조리하지 않고 부당하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나?'란 질문을 하고 싶을 만큼, 어쩌면 역자 스스로도 이 작품에 대해 딱히 붙여줄 포장지가 없지 않았던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 우리의 이야기 :

- 이광수 作,무정

- 복거일 作,비명을 찾아서」  


 

 

 

 

  1. 물론!!! '가상(假想)의 상황'입니다.
  2. 출판사의 표기는 "응구기 와 티옹오"입니다만, 이 글의 제목은 네이버의 표기를 따라 "응구기 와 시옹오"로 하였습니다.
  3. 이는 작품 속 번역된/번역되지 않고 쓰여진 단어들에서도 여실히 느껴질 수 있었습니다.
  4. 진중권 著, 「호모 코레아니쿠스」, 웅진지식하우스 刊, 2007.
  5. 이광수 作, 「무정」중. 민음사 刊, 2010.
  6. 이와 같은 결말에 대해선 이 작품의 옮긴이마저 "현상의 본질은 파악하고 있으나 이렇다 할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 다소 감정적인 결말"(p195)이라, 아주 완곡한 버젼의 '뜬금없다!'란 표현을 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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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의 따뜻한 손 -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에서 찾은 자본주의 문제와 해법
김근배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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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그 누구도 웃게 하지 못할 듯한 쌍팔년도 아재 개그 하나. --- 간만에 간 서점에서 "이것이 **털이다!"란 제목의 책을 발견한 A. 궁금했으나, 비닐로 싸여 있어 사지 못했고, 다음 날 너무 궁금해 다시 방문해 가려져 있는 일부를 떼어네니 오마낫! "이것이 *지털이다!", 다음 날 도저히 못참겠는 궁금증에 그 책을 사 비닐을 확! 뜯어내니 나온 제목이란 게 "이것이 디지털이다!". --;; 


남자인 A가 상상했을 '지털'앞의 한 글자와, 여자인 A가 상상했을 한 글자가 달랐을 수도 있을 겁니다. 어쨌든, 이 책의 한 글자는 우리가 상상했던 '자'나 '보'가 아닌 '디'의 한 글자를 지니고 있었습니다만!!! --- 못내 그 책을 살 용기까지 내지 못했던 누군가는, '서점에 갔더니 음모(陰毛)에 관한 책이 있더라'라는 잘못된 소문을 낼 것이고, 그게 퍼지고 퍼지다보면 누군가에겐 'Za지털'에 관한 전설적이 책이 있다더라라고, 또 누군가에게는 'Vo지털'에 관한 에로틱한 책이 있다더라라 전해지겠죠. 실제 그러한 책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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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법률)'라는 것은 종종 그것이 만들어내고 합리화할 수 있었던 상황들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효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제도를 만든 이념은 지배자들에 의해 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해 원래 주장한 사람의 의도와 다르게 왜곡되기도 하죠. 앞으로 다룰 애덤 스미스와 공자가 그 대표적 예입니다.(p6) …… 이 책의 가장 큰 목적은 오해와 편견으로 인해 잘못 알려진 애덤 스미스의 경제 사상을 제대로 알려, 위기에 처한 21세기 자본주의의 해법을 구하는 것입니다.(p10)

쉽게 말해 --- 애덤 스미스와 공자1의 사상에 관하여도, 정작 그들은 '디지털'에 관한 책을 썼건만, 후대의 (정치와 경제의) 권력자들에 의해 변질·왜곡되어, 현재 그들의 사상은 남녀의 음모(陰毛)에 관한 책으로 이해되어지고 있다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지요. 음모에 관한 책을 읽어서는 IT를 이해할 수 없지만, 디지털에 관한 책을 읽고나면 IT에 대해 어느 정도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듯, 애덤 스미스가 진짜로 주장하고자 했던 바를 읽어낸다면, 현대 자본주의가 왜 이러한 심각한 문제점들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라는 겁니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사상가의 모습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현재주의가 누적된 결과일 뿐이다. …… 이런 사상의 재해석이 권력과 결부되면 지배권력을 합리화시켜주는 이념으로 전락한다. ……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포장되어 있다 . 그런데 막상 포장지를 벗겨보면 거기엔 애덤 스미스의 사상 대신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옹호하는 '자유방임주의'가 들어 있다. 단언컨데 애덤 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자가 아니다.(p23)


​【 정부는 간섭하지 말고 시장에 맡겨라. - 시장 자유주의자 애덤 스미스? 】

​이러한 의미에서/이러한 이유로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애덤 스미스를 '자유방임주의자'로 설명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두 분의 경제학자인) 밀튼 프리드만은 "애덤 스미스가 자유주의자이며,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라 했다"(p91) 주장했기도, 심지어 게리 베커는 "Let the market do everything!"이란 유명한 말을 하기도 했었지요. 하지만 저자 김근배 교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유로 "애덤 스미스가 자유방임주의자라는 오해는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을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p72)라 단정짓고 있습니다.

① 스미스가 말하는 자유는 신중과 정의가 전제되어 있는 자유다. …… 결국 자유방임의 자유가 아니라, 신중과 정의의 범위 안에서의 자유인 것이다.(p69)

② 스미스는 규제 자체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전체 국민의 이익보다 특수한 계층의 이익을 추구하는 규제에 반대한 것이다. 여기서 특수한 계층이란 정부와 결탁하여 독점을 추구하는 상인과 제조업자를 말하는 것이다.(p91) …… 시장에 맡기자고 한 것은 맞지만 그 목적은 경제적 약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경제적 약자란 중소상공인과 노동자인 일반 국민, 그리고 경제적으로 낙후한 스코틀랜드인을 포함하는 것이었다.(p92)

​즉! --- 애덤 스미스가 주장했던 '정부의 시장 개입 반대'란 정부의 개입으로 인한 독점체제의 형성에 대한 반대였었고, 독점으로 인한 "갑의 횡포를 없애 을도 자유롭게 (시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자고 한 것"(p109)이지, 결코 경제적 강자의 자유를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거늘, "애덤 스미스의 가면을 쓰고 세계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이념"(p7)은 이를 의도적으로 (혹은 무지하여)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2의 저자인 페르낭 브로델의 사상은 여러 면에서 중요한 깨달음을 안겨주더군요. 브로델은 "자본주의는 시장경제가 아니다!"라 봅니다. 유사 이래의 그 어떠한 체제하에서도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으며, 따라서 '자본주의 = 시장경제'라는 등식은 무리라는 거지요. 브로델이 주장하는 '자본주의'의 실체는 다름아닌 '독점'입니다. 즉 "상인과 권력이 서로 결합하는 것"(p101)이 바로 '자본주의'라는 것이지요.3 이와 같은 브로델식의 견해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독점을 통해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분명 '반시장적'인 개념이 되는 것이며, "독점을 철폐하여 정의로운 시장을 만들자"(p102)라 했던 애덤 스미스를 향해, 그가 '시장주의자였었다'라 지칭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가 되는 겁니다. 아니 어쩌면! --- (페르낭 브로델의 주장을 읽고 나니, "시장 자본주의를 그 내부로부터 해체하고 사회를 인본주의적 원리에 따라 재건"4하는 것을 '진보'의 목표라 설명했던, 그리하여 2010년 당시의 민주당을 가리켜 "자본주의 극복의 의지가 없다라는 점에서 진보는 아니다"라 규정지었던 김상봉의 서술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보자면) 애덤 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자'가 아닌 '진보주의자'로 분류하/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요.5  


(애덤 스미스 사상에  깔려 있는) 첫 번째 전제 조건은 시장에서 특혜나 억제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억제란 경쟁을 제한하는 독점을 말한다.(p107) … 두 번째 전제조건은 '누구든지 정의의 법을 어기지 않는 한'이라는 것이다. …… 이런 두 가지 전제조건을 무시하고 '완전한 자유에 맡긴다'만 강조하니, 스미스를 자유방임주의자로 오해하게 된다.(pp109-110)

 


​【 개인의 이기심이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시장의 조정기능을 통해 사회와 경제를 발전시킨다? 】

"시장은 절대 사람들과 동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어. 사람들과 공존하며, 바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지. 시장의 힘이 비인간적이라고 해서 사람들까지 비인간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거야! …… 시장의 메커니즘이라는 것이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고 해서 사람인 나까지 그럴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는 뜻이지."6

저자 김근배 교수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어쩌면 「도덕감정론」의 각론일지도 모른다라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국부론」을 통해 '인간은 자기 이익을 추구한다'라 설파했으나, 이는 사실 "인간은 동감을 통해 타인을 고려하는 본성을 타고났다"는 「도덕감정론」의 주장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 '과학'이 되고자 한 '경제학'은, 그 '과학'의 테두리 안에 담아낼 수 없는, 즉 "수학7으로 다룰 수 없는 이타심이나 동감을 제거하고 이기심에 관한 행동만을 경제학의 대상으로 제한"(p164)해 놓음으로써, '인간은 이기심에 의해 행동한다'라는 잘못된 전제하에 전개된 모습을 띠고 맙니다.8 게다가!

애덤 스미스에게 "이기심(sefishness)은 탐욕이지만 자기이익(self-interest)추구는 타인과 동감하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p159)임이 분명함에도, 그러하기에 그가 'their own interest'라 적어놓은 부분을 '이기심'으로 잘못 번역한 결과, 우리에겐 ---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benevolence)때문이 아니라 그들 이기심(their own interest)에 대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라는 문구가 주어지게 되었다라 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단지 영문의 국문번역상에만 문제가 있다란 주장이 아닌,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의도적 이해(理解)라는 거지요.)

 "이기심에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다. 자기이익추구는 이기심과는 달리 타인에 대한 배려가 따르며, 상호성이 존중된다. 즉 동감이 수반되는 것이다."(p116)

​이처럼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인간은 이기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재단된 가정(假定)을, '당위'의 수준으로 변질시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해 왔고, 그 결과 현재와 같은 "이기심의 자본주의"(p175)가 탄생되었고, "이것이 바로 주류 경제학이 오늘날 경제에 끼친 가장 잘못된 영향"(p152)라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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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경제학이 애덤 스미스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으나, 이는 "자본가들이 이윤은 적게 갖고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후하게 주자고 했"(p249)던 애덤 스미스의 사상과는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지요. 이처럼 저자는 "지난 30년 동안 애덤 스미스의 가면을 쓰고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신자유주의 이념을 극복하는 것이 경제를 살리는 길"(p250)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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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스코틀랜드의 학자가 써낸, 이 책의 독서가 저에게 안겨 준 가장 커다란 가름침이기도 한 다음의 글이, 2016년의 대한민국에서도 의아하리만큼 한 문장 한 문장 그대로 받아들여지게된다라는 점이야말로, 경제학이 애덤 스미스를 '경제학의 아버지'로 지칭하여야하는 본질적 이유가 아닐까 싶네요.


"사회가 쇠퇴하는 시기에는 노동자보다 더 고통받는 계급은 없을 것이다. 노동자의 이익이 사회의 이익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회의 이익을 파악할 수 없고, 자신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 사이의 관계를 인식할 수도 없다. …… 그 까닭에 정부의 정책적 논의에서 노동자의 목소리는, 다만 노동자의 이러저러한 불평이 그의 고용주의 의해, 노동자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용주의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 고무·선동·지지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경청되지 않으며 별로 존중되지도 않는다."(p289) 



※ 좀 더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애덤 스미스의 사상 : 조나단 B. 와이트 作애덤 스미스 구하기





 

  1. 이 책에서 저자는 애덤 스미스의 사상과 공자 사상간의 유사점을 비교하고 있는데, 저 개인적 관심사가 아닌 관계로 공자의 사상에 관한 부분은 감상문에서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2. 정말 읽고 싶은 저작이지만, 그 방대한 양에 선뜻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책이죠.
  3. "국가가 지원하고 감독하며 항상 얼마간 국가에 의해 좌우되는 어떤 뚜렷이 구분되는 집단 안에서가 아니면, 자본주의란 있을 수 없다."(p101)
  4. 강수돌 外 共著, 「리얼 진보」중 p56. 레디앙 刊, 2010.
  5. "스미스는 시장경제만큼이나 중요하게 정부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통념 중 하나가 그가 작은 정부를 주장했다는 것인데, 이 역시 스미스를 오해한 것이다. 현재 기준에서는 작은 정부일지 몰라도 스미스 당시에는 큰 정부였다 …… 스미스가 가장 작은 정부를 이상적으로 본 것처럼 비춰지는 이유는, 당시 영국 정부가 낭비와 사치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 현재주의적 관점을 버리고 그 시점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스미스는 최소한의 정부 역할이 아닌 큰 정부를 주장한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예컨대 상비군제도나 의무교육제도에 대한 주장은 당시에는 대단히 진보적인 생각이었다."(pp128-130)
  6. ​조나단 B. 와이트 作, 「애덤 스미스 구하기」중. 생각의 나무 刊, 2010.
  7. 사실 경제학에서 사용되고 있는 거의 모든 가정(假定)은 이러한 수학적 전개에의 필요성 때문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물론! 수업시간에 그 가정들을 말로 풀어 듣노라면, 수학을 떠올리지 않아도 마치 너무도 당연한 가정들처럼 이해되기도 하지요. 그러한 수학적 전개의 필요성에 의해 전제되어 있는 가정들을 조금씩 제거해 가는 학문이 바로 '행동경제학'입니다.
  8. 이와 관련하여, 마이클 센델 著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김동춘 교수의 추천사 중 다음 서술은 경제학에 대한 가장 가슴아픈 비판이라 생각합니다. --- "경제학자들은 불평등하거나 강압에 의한 거래만 아니라면 시장의 공정성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난에 못 이겨 신장을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은 부당하지만, 그 거래가 한 생명을 살리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당장의 먹을거리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말한다. …… 센델은 시장의 공정성을 통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 모두에게 이로울 것이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이 사회에는 돈으로 구매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는데, 돈으로 구매해서는 안 되는 성, 입학자격, 노벨상, 환경, 사회봉사까지 돈으로 사고팔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적 가치가 밀려난다고 주장한다. 즉, 시장의 교환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재화의 가치를 변질시키게 된다는 말이다. 성적이 좋은 아이들에게 돈을 주면, 공부를 잘하게 하려는 본래의 의도는 사라지고 아이들은 돈을 받기 위해 공부할 것이다. 시장적 인센티브가 비시장적 인센티브를 밀어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시장에서 교환가능한 것으로 만들면 시민적 참여, 공공성, 우정과 사랑, 명예 등 인간사회의 모든 덕목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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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의 거짓말
게르트 보스바흐.옌스 위르겐 코르프 지음, 강희진 옮김 / 작은책방(해든아침)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①통계 자체가 사악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②통계 기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데 있다. 나아가 ③특정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통계를 함부록 활용하고 해석하는 것이 문제의 원천이다."(p241)

- 디터 호흐슈테터 著, 「통계기법학」중에서 인용된 문구

제가 이해했던 바의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에서 저자 데이비드 핸드가 말하고자 했던 한 마디는 결국 "확률에 대한 직관적 이해가 부정확"1하기 때문에 사회를 바라보는/해석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혼란/혼동이 시작되는 것이며, 끝내 잘못된 판단/결론을 내리게 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책이 보여주려 했던 관점이 '조금만 알고 나면 별 놀랄 일 아니고, 좀 더 많이 알고 있다면 꽤 정확한 예측도 할 수 있게 된다'라는, 즉 '통계학적 사고(思考)'의 중요성을 대중(大衆)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라면! --- 이 책 「통계의 거짓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게 되는 통계(수치)가 지니고 있는 '의도적 주관성'의 실상과 폐해에 관해 폭로(!)해주고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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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두 저자는 기업이나 정부, 그리고 언론 등이 만들어 낸 '숫자와 통계의 함정들'(p11)로 인해 '내'가 손해를 볼 수도/보고 있다라 주장합니다. 물론! 그 '함정들'이란 것이 대부분은 특정한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들이지만, 때로는 그들의 단순무식함 때문에 발생되기도 한다라는 점에서, 결국 '나 스스로'를 지키는 것은 '나 자신'이어야 하기에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이건, 무지함에서 발생된 것이건 그러한 함정들을 피해갈 수 있는 ('능력'이라고까지 표현하긴 그렇고) 최소한의 '눈썰미'정도는 가지고 있자,라는 거지요. 근데 말이죠! - 이 책에서 저자들이 제시하고 있는 최소한의 '눈썰미'는 말 그대로 '눈썰미'이고, 그러하기에 결코 장착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란 겁니다.  

【 인과관계(causation)의 중요성

제가 쓴 감상문에 은근 자주 등장했던 '수단과 목적의 전이(轉移)'가 초래하는 잘못된 판단/인식과 동일한 맥락에서! --- '통계(수치)'를 대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의 구분'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이건 비단 통계를 논할 때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 그리고 일상적 사고(思考)에서도 매우매우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내지요.   

'상관관계(correlation)'이란 "동시에2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p58)라는 뜻입니다. 이 때! --- 동시에 발생한 A와 B라는 사건들의 관계는, A가 원인이 되어 B가 발생된 것일 수도,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도, 심지어는 쌍방향의 인과관계가 존재3할 수도 있으나, 그저/단순히 둘이 동시에 성립되는 경우4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요. (아~주 단순한) 예를 들어, 어느 반(反)재벌 논조의 신문사에 근무하는 (당연히! 반재벌 정서의) 경제부 기자가 기사에 쓰길

​"S그룹 직원들의 연봉과 신발 사이즈 사이에는 양(positive)의 상관관계가 성립한다"

라 했다 치죠. 그냥 여기서 그쳤었다면 괜찮았겠거늘, 그 기자가 한 발 더 나아가 "이처럼 신발 사이즈가 크다라는 이유만으로 더 많은 연봉을 지급하고 있는 엉터리 S그룹에 과연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어간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이런 재벌들을 과감히 개혁해야 한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라면, 그 기자에게는 당장! 그 직(職)을 내려놓는 권고가 주어져야 마땅합니다. 왜일까요?

S그룹에 '연봉과 신발 사이즈 사이에 양의 상관관계'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건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복잡하게 말할 것 없이, "남자들은 대개 여자들보다 발 사이즈가 크고 연봉도 더 높"(p73)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 A라는 사건(event)과 B라는 사건 간에 존재하는 '배경변수5'를 인지하지 못하여, A와 B간에 존재하는 상관관계를 자칫 인과관계로 오해하는 경우가 너무도 빈번하게 우리의 일상에서 발생되며, 때때로 그것이 언론에 오르기도, 심지어는 국가의 정책 결정에조차 영향을 미치게 된다라 이 책은 쓰고 있습니다.  


【 의도된 목적성 

위와 같은 통계/확률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그나마 의도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겠)지만 진짜 문제는 바로 --- "수치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고"(p13)마는 우리의 약점(?)을 악용하여, 통계를 "현상을 미화하고, 허풍을 떨고, 대중을 호도하고, 현실을 조작하는 수단"(p13)으로 악용하는 경우이겠지요. 물론,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통계를 악용하는 이들에게 더 큰 문제가 있겠으나, 저자들은 그들의 그러한 목적을 알아채지 못하는/않으려는 이들 역시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라 말해주고 있습니다.6

우리들이 흔히 접하게 되는 '여론조사'의 경우를 함 보죠. 여론조사가 지닐 수 밖게 없는 근본적 문제점을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 롯데자이언츠가 3만 명의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LG 트윈스를 20:0으로 박살내버린 (야호!!!) 경기 직후, 그날 사직구장에 있었던 3만 명 중 딱 한 명!만을 골라 그날의 경기가 어떠했느냐,를 물어본다 치죠. 그 딱 한 명이 저였었다면 당연히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준 날이었다며 10점 만점을 주었을 테고, 같은 롯데팬이라 해도 한국 프로야구에서 롯데자이언츠같은 슈퍼강자가 홀로 존재하는 것이 그리 좋은 현상은 아니다라며 7점만 주는 혹자도 있을 수도, 또는 그 딱 한 명이 '알리오님'이셨었다면 LG의 패배에 눈물 흘리시며 0점을 주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이처럼 표본조사가 지니고 있는 한계는 비교적 명확하며, 그 한계는 널리 알려져 있고,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여론조사기관들의 기술적 대처 역시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합니다만!!!


정치, 경제 사회 등 분야를 불문하고 모든 설문조사의 중심은 설문 대상자가 아니라 설문 의뢰자이다. …… 가장 명심해야 할 부분은 바로 모든 설문이 질문을 받는 우리가 아니라 질문을 제시하는 사람 위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p131)

부산의 지역신문 기자라면 당연히 홈팀 관중들이 드나드는 출입구 앞에 서서 그 날의 딱 한 명을 골라냈었을 것이고, LG 트윈스 담당 기자는 예의 원정팀 관중들이 드나드는 출입구에서 (아마도 가급적 눈이 벌겋게 부어있는) 그 날의 딱 한명을 골랐겠지요. 이렇듯 --- 조사자의 '의도된 목적성'은 3만 명이라는 모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여론조사에서 얼마든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조사결과를 애초부터 만들어낼 수7 있는 겁니다. 더 큰 문제는,

이처럼 '의도된 목적성'을 가지고 행한 여론조사결과를 마치 전체 사회의 여론인 양 포장하여, 국가의 특정 정책 결정 방향을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이끌어내려는 데 있다라 저자들은 주장합니다.  2010년 독일 실업급여의 문제점을 오도했던 한 신문 기사를 예로 들며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지요.


빈곤층을 악의적으로 모함하는 정치가나 가난한 이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신문 기사들이 목적하는 바는 뻔하다. 경제적 상황을 불문하고 인권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인식, 가진 것이 많은 이들이 연대의식을 발휘해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여론, 인권 수호와 연대의식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라는 주장에 반기를 들고 싶은 것이다. … 어쩌면 그 뒤에 또 다른 음흉한 의도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 … 중산층의 관심을 부유층이 아니라 빈곤층에게 돌리는 것이다.(pp21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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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교양서'는 자고로 이렇게 쓰여져야 한다,의 최고치를 보여주고 있는, 쉽고도 재미있게 읽히는 통계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제가 배웠던 수준의) 통계학 교과서에선 배울 수 없었던 '윌-로저스 현상'이나 '심슨의 역설'등은 정말 재미있었고, 만약 그러한 위치에 처하게 된다면 꼭 한 번쯤은 써보게 될 듯한 '의도된 목적성'이 저도 모르게 심어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통계의 거짓말」이란 책의 제목이 의미하고 있듯, 저자들은 (마치 마술계의 '타이거 마스크'처럼) 통계가 지니고 있는 수많은 속임수들과 그 뒤에 숨어 있는 동기들에 관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만, 예의 "모든 통계를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태도는 모든 통계를 곧이곧대로 믿는 것만큼이나 어리석다"(p271)란 말로 끝맺음을 하고 있지요. 비록 이 책에서 거론된 예들이 거의 모두 독일의 현실들 뿐인지라, 단번에 와닿지는 않았으나, <14장>에서처럼 일반화된 경우에선 그 어떤 책보다 직관적인 설명을 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타고난 지성은 거의 모든 수준의 교육을 대체할 수 있지만, 그 어떤 교육도 타고난 지성을 대체할 수는 없다."(p286)

 

 

저자들이 인용하고 있는 쇼펜하우어의 위 일성(一聲)이야말로 저자들이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얻을 수 있는 무엇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속임수를 까발렸으니 앞으로는 속지 않을 수 있어야겠고, 또한 자신들의 속임수가 까발려졌으니 속이려는 더 은밀한 수법들을 개발하려 하겠지요. 어쩜 그러한 순환이 이런 류의 책들이 반드시 개정판을 내어야 하는 이유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걸 선순환이라 해야할 지 아님 악순환이라 해야할 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독자들에게 즐거운 일임엔 틀림 없을 듯. ^^ 

※ 다른 관점에서 설명되어지는 '확률의 함정' : 데이비드 핸드 著,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1. 데이비드 핸드 著,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중 p210, 더 퀘스트 刊, 2016.
  2. 이 책의 저자들은 '동시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좀 더 느슨하게 보아 굳이 '동시'가 아니더라도, 즉 두 사건 사이에 시차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상관관계는 성립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반드시 유의해야 할 점은 역시나! --- "A가 일어난 뒤부터 B라는 사실이 일어났다는 말 속에는 분명이 함정이 내포되어 있다. 시간적 순서가 맞아떨어진다 하더라도 A가 반드시 B의 원인이 되라는 법은 없기다!"(p73)
  3. "인과관계가 쌍방향으로 성립하는 경우를 두고 통계학자들은 '동등성equivalence'이라는 표현을 쓴다. A가 B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B가 A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p64)
  4. "통계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두 가지 변수를 조합할 경우에도 둘 사이에 상관관계가 성립될 확률이 5%는 된다고 한다. A때문에 B가 늘어나거나 줄어들 확률이 5%는 된다는 것이다."(p66)
  5. '배경변수'란 두 사건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를 말합니다. 이 예에서의 배경변수는 '성별'이지요.
  6. "숫자로 남을 속이는 가해자 중에는 선한 의도를 품은 사람보다는 부와 명예, 권력, 개인적 영달이 목적인 이들이 더 많다. 피해자 중에도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물게 순수하고 착해서 당하는 사람보다는 게을러서 혹은 편한 것만 추구해서 혹은 눈곱만큼의 비판도 없이 권위를 맹신한 탓에 속는 이들이 더 많다."(p241)
  7. 저자들은 ​여론조사기관 역시 '기업'이라는 점을 들어, 이러한 목적성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라 서술하고 있습니다만, 이보다는 "통계란 주어진 데이터들에서 특정 명제를 이끌어내는 과정"(p221)이란 인식이 어쩌면 더 위험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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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잔혹동화
국수경 엮음 / 백암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라는 질문에 대해, 동일 제목의 책에서 저자 박현희는 "백설공주는 외로웠던 것이다"1라는 대답을 제시해주었더랬습니다.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이라는 부제(副題)에 걸맞게 저자는 이 백설공주의 "외로움은 난쟁이들이 백설공주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나와는 관계가 없다"2라 단정지으며, "현대 사회에서 관계가 결핍된 자리는 소비로 채워진다"3라는 (사뭇 심히 프랑스적 분위기를 풍기는) 시사적 진단까지를 동원해 백설공주를 변호해주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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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이란 단어가 '피 철철'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만, 그보다 훨씬 더 센 강도로 '잔혹'하게 느껴졌더랬습니다.  --- '백설공주', '인어공주', '재크와 콩나무', '신밧드의 모험' 등의 (주로 그림 동화 원작의) 외국 동화들을 중심으로 '신 별주부전'(한국)이나 '딱딱산'(일본) 그리고 '노생의 꿈'(중국)등의 동양 이야기들에 심지어,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카프카의 '변신'까지 담고 있는 이 책에서!

(편역(編譯)이란 단어가 정확히 어떤 작업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지만) 편역자 국수경은 각각의 이야기들 맨 뒤에 한 줄로 된 자신의(?) 교훈을 적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 편역자의 한 줄 교훈을 읽어보는 것이야말로 이 책을 읽는 것의 진수(珍秀)라 할 만큼 재미가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노생의 꿈>에 달려 있는 "인생은 깨어나지 않는 악몽이다"(p97)과 같은 한 줄 교훈엔 동감을 아니표할 수 없었었으며, <아이들이 돼지잡기를 흉내낸 이야기>의 "정의는 여론이 만든다"(p71)와 같은 교훈에선 '과연 나는 이 이야기를 읽고 이런 한 줄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란 생각이 들었을 만큼의 촌철살인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 책의 '교훈'들이 주는 진짜 재미는!!!

​"세월이 흐르면 여자는 마귀로 변한다"(p149)라는 한 줄로 원작 <신밧드의 모험>은 대체 어떤 내용인걸까란 심한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하며, <엄지둥이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 후 "Small은 Beautiful이 아니다"(p108)라 정리해는, 이것이 정녕 sex를 대하는 여성들의 진심이지 않을까 싶은 유머코드를 뿜어내기도, 반면 <개구리 왕자>이야기를 "참사랑은 추한 것을 사랑하는 것, 즉 불가능한 일이다"(p115)와 같은 시니컬함으로 요약해 내는 편역자의 기발(!)한 발상들을 읽는 데 있습니다. 뭔가 (정상적으로 일반화시키기엔 무리가 있다,라는 의미에서의) B급스런 교훈스럽지 않은 <교훈>들이야말로 차라리/오히려! ---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과 같이 "정색을 하지 않은 소설에 정색을 하고 이러니저러니 하"4는 것보다 훨씬 우리의 삶에 유익한 윤활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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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는 난쟁이들의 잠자리 시중을 들면서 이 집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백설공주는 … 금새 침실 기술에 능숙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난쟁이들과 백설공주는 즐거운 나날들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p11)

​원작 <백설공주>가 대체 어떤 이야기인지 정확히 알아낼 수가 없네요. 검색을 해보니 어디에선 백설공주가 쫒겨난 이유가 (계모왕비때문에 아니라) 아버지와의 근친상간때문이란 버젼도 있고, 키스의 주인공인 왕자가 백설공주와 결혼하려 궁전으로 컴백했으나 계모왕비와 눈이 맞아버렸다는 버젼도 있고 암튼! 뭔가 우리가 알고 있는 'white snow'란 이미지의 원작이 아닌 것 같기는 하거늘! ---  "침실 기술에 능숙"한 백설공주를 등장시키는 (그러니까 이게 맞느냐 틀리느냐, 혹은 유익하냐 유해하냐와 같은 잣대의 판단을 떠나, 낯설지만 웃음이 지어지는) 이 정녕 B급스런  버젼의 한 줄 교훈인 "어리석은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다"(p16)("현대 사회에서 관계가 결핍된 자리는 소비로 채워진다"류의 정색(正色)보다는 / '빨고 핥고 싸고'류를 좋아하는) 제 감성에 훠~일씬! 더 잘 들어맞네요. 조만간... 이런 B급 소설들 찾아 읽지않을까 싶!

※ 정색을 하고 있긴 하지만, 유익한 부분도 있는 동화 이야기 :  박현희 著,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줄까

 

 

  1. 박현희 著,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중 p135. 뜨인돌 刊, 2011.
  2. <각주 1>과 동일.
  3. 박현희 著,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중 p141. 뜨인돌 刊, 2011.
  4. 주제 사라마구 作, 「죽음의 중지」중 p282,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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