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중에 누가 Milli고 누가 Vanilli야?'란 여친의 질문이 그저 한없이 앙증맞게만 보였던 때가 있었었듯, <2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케냐의 '응구기 와 시옹오'>란 기사의 제목에 '아, 올해 노벨문학상은 케냐인 2명이 공동수상했나보군'이란 말을 저 스스로도 했었을지 모를, 어지간해선 읽어 볼 생각/기회 잘 갖게 되지 않는 아프리카 문학이었습니다... 만! : "다른 환경에 서 있게 되면, 다른 것들이 보이기도, 다른 것들을 보게 되기도 한다"란 말을 뒤집어보면, 그게 어쩌면 --- "같은 환경에 처해 있다면 같은 생각을 하게 되기도, 같은 행동을 하게 되기도 한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란 의문을 가져보게 해 준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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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부터 시작된다. 당시 케냐는 정치적 긴장이 팽팽하던 시기, 바꿔 말하면 독립 운동을 향한 움직임이 태동하던 시기였다.(p194)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의 1945년 무렵이라는 시간적 배경이 아닌, '독립 운동을 향한 움직임이 태동하던 시기'라는 역사적 배경에 중점을 두어 읽어본다면, 이 작품을 이광수의 「무정」과 거의 1:1로 대입시켜가며 읽어낼 수 있기도, 하지만 예의! --- 아시아의 한국과 아프리카의 케냐라는, 뭔가 접점(接點)이 쉬 보이지 않는 지리적, 따라서 초래되어졌을 문화적 이질(異質)이 여실히 느껴지기도 하는, 한 마디로 "모든 인간은 같은 '류(類)'로서 이른바 공통된 '유적(類的)'특성을 가지나, 특정 사안에 대한 생각, 특정 사건에 대한 느낌,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은 민족에 따라 …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란 진중권의 서술이 너무도 잘 들어맞는 한 편의 소설이었고, 으나, 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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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지는 몰라도 키쿠유족(族)은 늘 자신들이 구제받을 길이 교육에 있다고 봤다."(p151)
이러한 생각을 갖는 것이 인간의 '유적 특성'인지, 아니면 대한민국과 케냐 민족 간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 「무정」과 「울지마, 아이야」에서의 핵심적 메세지는 바로 '교육'입니다.
아버지 세대인 응고토로 하여금 '이 세상은 교육이 전부야'란 생각을 갖게 해준 이유가 "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잃어버린 땅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p60)이었고, 아들 세대인 은조로게에겐 그것이 "미래의 열쇠를 쥔 것"(p74), 그리하여 결국 "언젠가는 자신의 모든 지식을 이용해 백인과 싸울 터"(p120)라는, 이처럼 각자의 현실적 목적이 지향하는 바가 조금씩 다를지라 하더라도 --- "우리가 늙어 죽게 될 때에는 기어이 이보다 훨씬 좋은 조선을 보도록 합시다"란 형식의 말과 끝내 일맥상통하는 '교육의 필요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 나!
이러한 교육의 힘을 믿으며, 지금은 희망이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훨씬 좋은 조선'이란 앞날을 위해 다같이 노력합시다!란 마무리를 보여주는 「무정」관 달리! --- 「울지마, 아이야」는 '어? 왜 이래!'란 생각이 들만큼 심히 뜬금없는 선택을 주인공으로 하여금 하게 하며 끝이 나지요.이 작품에의 속편이 있다라거나, 아님 이게 아예 「토지」같은 대하소설의 시작이라면 모를까 암튼! 그런 결말은 저에겐, 이 작품의 만족도를 좋게 볼 수 없게 만든 가장 커다란 요인이었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다른 작품 「한 톨의 밀알」을 굳이 사놓은 건 바로 --- 그가 이 작품에서 던져놓은 다음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혹시나 이후의 작품들에서 보여지지나 않을까,하는 궁금증이 적잖았기 때문이었습니다.
【 그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죽은 것인가? 】
지금 내가, 이제껏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으나, 지금은 그를 죽이기 위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나의 적(敵), 그가 나의 적이 된 것은, 그리고 내가 그의 적이 된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걸까요? 군인이라면, 양자간에 '적대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건 상관의 명령이겠지요. 이게 정당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엔 이유라도 있죠. 그러나!
그냥, 우리보다 훨씬 힘이 더 세다는 이유만으로 난데없이 우리집에 쳐들어와 그 집에 눌러앉아 살며, 우리에게 일을 시키는, 게다가 --- 흰 색의 피부를 가진 자신들이, 검은 색의 피부를 가진 우리들에 비해, 그저 피부색이 그렇다라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더 우월하며, 이처럼 우리들의 집을 빼앗아도 되는 권리까지도 된다라는 그들에게, 단지 그들의 힘이 너무도 세기 때문에 감히 덤벼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기에, 또 다른 힘 센 누군가와 싸울 때 우리들을 데려다가 같이 싸우게 했고, 그러했기에 우린 대체 왜 저 사람을 죽여야 하는지도 모르며, 저들이 왜 우리를 죽이려 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싸우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죽어야 했고 …… 그런 시간이 쌓이고 쌓여오니, 이제 우리는 어느덧 "피로감으로 가득한 날들이 계속됐다. 그를 지탱해주던 기다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예언의 실현은 이제 불가능해 보였다."(p109)와 같은 체념의 단계를 거쳐 종국엔 나도 뭐가 뭔지 모르는 (에티엔 드 라보에시가 주장했던 바로 그!) "자발적 복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나의 아들 세대가 우리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그자를 계속 섬길 수가 있어요?"(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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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의 우리가, 일제 시대를 살아내었던 당시의 선조들에게 던지는 질문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저 개인적으론 --- 위의 질문에 대한, 「무정」에서 보여졌던 작가 이광수의 답변인 "전신이 불구덩에 들어가는 것보다 한 팔이나 한 다리를 베어 내는 것이 나았다"에 대해 대체 어떠한 이유를 들어 비난하여야하는지 알지 못하기에, 이보다는 오히려/차라리!!!
"이제 조선 사람들은 원통하지만 자신들이 조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어야 합니다. … 살아 남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람은 우선 살고 봐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 복거일 作 「비명을 찾아서」 하권 중 p229, 문학과 지성사 刊, 1987.
이처럼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일본인의 주장에, 우리가 왜 그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하는가를 조선의 민중들에게 전혀 설명해 내지 못했다라는 점을 비난하는 것이 올바른 화살의 과녁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고 있기에 --- 이후의 작품들로 인해 이제는, (여기에 대륙별 안배라는 정치적 이유가 들어있다 하더라도 어쨌든) 노벨문학상 수상이 기대되는 작가가 되어 있다는 응구기 와 시옹오가 혹, 어떠한 형태로라도 그에 관한 자신만의 답변을 내놓지 않았을까,하는 기대를 가져봅니다. 암튼!
이 작품 「울지 마, 아이야」는, 이 작품만 놓고 본다면 그다지 매력적인 이야기는 아니었네요. 이 작품에 대해 "식민 통치의 부조리함과 부당함, 정착민들의 잔인함과 원주민들의 억울함을 보여주고 있다"(p195)라 적어놓은 역자의 설명에, '아니 세상에 식민 통치란 것이 부조리하지 않고 부당하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나?'란 질문을 하고 싶을 만큼, 어쩌면 역자 스스로도 이 작품에 대해 딱히 붙여줄 포장지가 없지 않았던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 우리의 이야기 :
- 이광수 作, 「무정」
- 복거일 作, 「비명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