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의 따뜻한 손 -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에서 찾은 자본주의 문제와 해법
김근배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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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그 누구도 웃게 하지 못할 듯한 쌍팔년도 아재 개그 하나. --- 간만에 간 서점에서 "이것이 **털이다!"란 제목의 책을 발견한 A. 궁금했으나, 비닐로 싸여 있어 사지 못했고, 다음 날 너무 궁금해 다시 방문해 가려져 있는 일부를 떼어네니 오마낫! "이것이 *지털이다!", 다음 날 도저히 못참겠는 궁금증에 그 책을 사 비닐을 확! 뜯어내니 나온 제목이란 게 "이것이 디지털이다!". --;; 


남자인 A가 상상했을 '지털'앞의 한 글자와, 여자인 A가 상상했을 한 글자가 달랐을 수도 있을 겁니다. 어쨌든, 이 책의 한 글자는 우리가 상상했던 '자'나 '보'가 아닌 '디'의 한 글자를 지니고 있었습니다만!!! --- 못내 그 책을 살 용기까지 내지 못했던 누군가는, '서점에 갔더니 음모(陰毛)에 관한 책이 있더라'라는 잘못된 소문을 낼 것이고, 그게 퍼지고 퍼지다보면 누군가에겐 'Za지털'에 관한 전설적이 책이 있다더라라고, 또 누군가에게는 'Vo지털'에 관한 에로틱한 책이 있다더라라 전해지겠죠. 실제 그러한 책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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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법률)'라는 것은 종종 그것이 만들어내고 합리화할 수 있었던 상황들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효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제도를 만든 이념은 지배자들에 의해 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해 원래 주장한 사람의 의도와 다르게 왜곡되기도 하죠. 앞으로 다룰 애덤 스미스와 공자가 그 대표적 예입니다.(p6) …… 이 책의 가장 큰 목적은 오해와 편견으로 인해 잘못 알려진 애덤 스미스의 경제 사상을 제대로 알려, 위기에 처한 21세기 자본주의의 해법을 구하는 것입니다.(p10)

쉽게 말해 --- 애덤 스미스와 공자1의 사상에 관하여도, 정작 그들은 '디지털'에 관한 책을 썼건만, 후대의 (정치와 경제의) 권력자들에 의해 변질·왜곡되어, 현재 그들의 사상은 남녀의 음모(陰毛)에 관한 책으로 이해되어지고 있다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지요. 음모에 관한 책을 읽어서는 IT를 이해할 수 없지만, 디지털에 관한 책을 읽고나면 IT에 대해 어느 정도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듯, 애덤 스미스가 진짜로 주장하고자 했던 바를 읽어낸다면, 현대 자본주의가 왜 이러한 심각한 문제점들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라는 겁니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사상가의 모습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현재주의가 누적된 결과일 뿐이다. …… 이런 사상의 재해석이 권력과 결부되면 지배권력을 합리화시켜주는 이념으로 전락한다. ……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포장되어 있다 . 그런데 막상 포장지를 벗겨보면 거기엔 애덤 스미스의 사상 대신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옹호하는 '자유방임주의'가 들어 있다. 단언컨데 애덤 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자가 아니다.(p23)


​【 정부는 간섭하지 말고 시장에 맡겨라. - 시장 자유주의자 애덤 스미스? 】

​이러한 의미에서/이러한 이유로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애덤 스미스를 '자유방임주의자'로 설명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두 분의 경제학자인) 밀튼 프리드만은 "애덤 스미스가 자유주의자이며,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라 했다"(p91) 주장했기도, 심지어 게리 베커는 "Let the market do everything!"이란 유명한 말을 하기도 했었지요. 하지만 저자 김근배 교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유로 "애덤 스미스가 자유방임주의자라는 오해는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을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p72)라 단정짓고 있습니다.

① 스미스가 말하는 자유는 신중과 정의가 전제되어 있는 자유다. …… 결국 자유방임의 자유가 아니라, 신중과 정의의 범위 안에서의 자유인 것이다.(p69)

② 스미스는 규제 자체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전체 국민의 이익보다 특수한 계층의 이익을 추구하는 규제에 반대한 것이다. 여기서 특수한 계층이란 정부와 결탁하여 독점을 추구하는 상인과 제조업자를 말하는 것이다.(p91) …… 시장에 맡기자고 한 것은 맞지만 그 목적은 경제적 약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경제적 약자란 중소상공인과 노동자인 일반 국민, 그리고 경제적으로 낙후한 스코틀랜드인을 포함하는 것이었다.(p92)

​즉! --- 애덤 스미스가 주장했던 '정부의 시장 개입 반대'란 정부의 개입으로 인한 독점체제의 형성에 대한 반대였었고, 독점으로 인한 "갑의 횡포를 없애 을도 자유롭게 (시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자고 한 것"(p109)이지, 결코 경제적 강자의 자유를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거늘, "애덤 스미스의 가면을 쓰고 세계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이념"(p7)은 이를 의도적으로 (혹은 무지하여)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2의 저자인 페르낭 브로델의 사상은 여러 면에서 중요한 깨달음을 안겨주더군요. 브로델은 "자본주의는 시장경제가 아니다!"라 봅니다. 유사 이래의 그 어떠한 체제하에서도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으며, 따라서 '자본주의 = 시장경제'라는 등식은 무리라는 거지요. 브로델이 주장하는 '자본주의'의 실체는 다름아닌 '독점'입니다. 즉 "상인과 권력이 서로 결합하는 것"(p101)이 바로 '자본주의'라는 것이지요.3 이와 같은 브로델식의 견해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독점을 통해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분명 '반시장적'인 개념이 되는 것이며, "독점을 철폐하여 정의로운 시장을 만들자"(p102)라 했던 애덤 스미스를 향해, 그가 '시장주의자였었다'라 지칭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가 되는 겁니다. 아니 어쩌면! --- (페르낭 브로델의 주장을 읽고 나니, "시장 자본주의를 그 내부로부터 해체하고 사회를 인본주의적 원리에 따라 재건"4하는 것을 '진보'의 목표라 설명했던, 그리하여 2010년 당시의 민주당을 가리켜 "자본주의 극복의 의지가 없다라는 점에서 진보는 아니다"라 규정지었던 김상봉의 서술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보자면) 애덤 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자'가 아닌 '진보주의자'로 분류하/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요.5  


(애덤 스미스 사상에  깔려 있는) 첫 번째 전제 조건은 시장에서 특혜나 억제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억제란 경쟁을 제한하는 독점을 말한다.(p107) … 두 번째 전제조건은 '누구든지 정의의 법을 어기지 않는 한'이라는 것이다. …… 이런 두 가지 전제조건을 무시하고 '완전한 자유에 맡긴다'만 강조하니, 스미스를 자유방임주의자로 오해하게 된다.(pp109-110)

 


​【 개인의 이기심이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시장의 조정기능을 통해 사회와 경제를 발전시킨다? 】

"시장은 절대 사람들과 동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어. 사람들과 공존하며, 바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지. 시장의 힘이 비인간적이라고 해서 사람들까지 비인간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거야! …… 시장의 메커니즘이라는 것이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고 해서 사람인 나까지 그럴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는 뜻이지."6

저자 김근배 교수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어쩌면 「도덕감정론」의 각론일지도 모른다라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국부론」을 통해 '인간은 자기 이익을 추구한다'라 설파했으나, 이는 사실 "인간은 동감을 통해 타인을 고려하는 본성을 타고났다"는 「도덕감정론」의 주장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 '과학'이 되고자 한 '경제학'은, 그 '과학'의 테두리 안에 담아낼 수 없는, 즉 "수학7으로 다룰 수 없는 이타심이나 동감을 제거하고 이기심에 관한 행동만을 경제학의 대상으로 제한"(p164)해 놓음으로써, '인간은 이기심에 의해 행동한다'라는 잘못된 전제하에 전개된 모습을 띠고 맙니다.8 게다가!

애덤 스미스에게 "이기심(sefishness)은 탐욕이지만 자기이익(self-interest)추구는 타인과 동감하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p159)임이 분명함에도, 그러하기에 그가 'their own interest'라 적어놓은 부분을 '이기심'으로 잘못 번역한 결과, 우리에겐 ---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benevolence)때문이 아니라 그들 이기심(their own interest)에 대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라는 문구가 주어지게 되었다라 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단지 영문의 국문번역상에만 문제가 있다란 주장이 아닌,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의도적 이해(理解)라는 거지요.)

 "이기심에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다. 자기이익추구는 이기심과는 달리 타인에 대한 배려가 따르며, 상호성이 존중된다. 즉 동감이 수반되는 것이다."(p116)

​이처럼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인간은 이기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재단된 가정(假定)을, '당위'의 수준으로 변질시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해 왔고, 그 결과 현재와 같은 "이기심의 자본주의"(p175)가 탄생되었고, "이것이 바로 주류 경제학이 오늘날 경제에 끼친 가장 잘못된 영향"(p152)라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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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경제학이 애덤 스미스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으나, 이는 "자본가들이 이윤은 적게 갖고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후하게 주자고 했"(p249)던 애덤 스미스의 사상과는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지요. 이처럼 저자는 "지난 30년 동안 애덤 스미스의 가면을 쓰고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신자유주의 이념을 극복하는 것이 경제를 살리는 길"(p250)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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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스코틀랜드의 학자가 써낸, 이 책의 독서가 저에게 안겨 준 가장 커다란 가름침이기도 한 다음의 글이, 2016년의 대한민국에서도 의아하리만큼 한 문장 한 문장 그대로 받아들여지게된다라는 점이야말로, 경제학이 애덤 스미스를 '경제학의 아버지'로 지칭하여야하는 본질적 이유가 아닐까 싶네요.


"사회가 쇠퇴하는 시기에는 노동자보다 더 고통받는 계급은 없을 것이다. 노동자의 이익이 사회의 이익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회의 이익을 파악할 수 없고, 자신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 사이의 관계를 인식할 수도 없다. …… 그 까닭에 정부의 정책적 논의에서 노동자의 목소리는, 다만 노동자의 이러저러한 불평이 그의 고용주의 의해, 노동자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용주의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 고무·선동·지지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경청되지 않으며 별로 존중되지도 않는다."(p289) 



※ 좀 더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애덤 스미스의 사상 : 조나단 B. 와이트 作애덤 스미스 구하기





 

  1. 이 책에서 저자는 애덤 스미스의 사상과 공자 사상간의 유사점을 비교하고 있는데, 저 개인적 관심사가 아닌 관계로 공자의 사상에 관한 부분은 감상문에서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2. 정말 읽고 싶은 저작이지만, 그 방대한 양에 선뜻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책이죠.
  3. "국가가 지원하고 감독하며 항상 얼마간 국가에 의해 좌우되는 어떤 뚜렷이 구분되는 집단 안에서가 아니면, 자본주의란 있을 수 없다."(p101)
  4. 강수돌 外 共著, 「리얼 진보」중 p56. 레디앙 刊, 2010.
  5. "스미스는 시장경제만큼이나 중요하게 정부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통념 중 하나가 그가 작은 정부를 주장했다는 것인데, 이 역시 스미스를 오해한 것이다. 현재 기준에서는 작은 정부일지 몰라도 스미스 당시에는 큰 정부였다 …… 스미스가 가장 작은 정부를 이상적으로 본 것처럼 비춰지는 이유는, 당시 영국 정부가 낭비와 사치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 현재주의적 관점을 버리고 그 시점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스미스는 최소한의 정부 역할이 아닌 큰 정부를 주장한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예컨대 상비군제도나 의무교육제도에 대한 주장은 당시에는 대단히 진보적인 생각이었다."(pp128-130)
  6. ​조나단 B. 와이트 作, 「애덤 스미스 구하기」중. 생각의 나무 刊, 2010.
  7. 사실 경제학에서 사용되고 있는 거의 모든 가정(假定)은 이러한 수학적 전개에의 필요성 때문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물론! 수업시간에 그 가정들을 말로 풀어 듣노라면, 수학을 떠올리지 않아도 마치 너무도 당연한 가정들처럼 이해되기도 하지요. 그러한 수학적 전개의 필요성에 의해 전제되어 있는 가정들을 조금씩 제거해 가는 학문이 바로 '행동경제학'입니다.
  8. 이와 관련하여, 마이클 센델 著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김동춘 교수의 추천사 중 다음 서술은 경제학에 대한 가장 가슴아픈 비판이라 생각합니다. --- "경제학자들은 불평등하거나 강압에 의한 거래만 아니라면 시장의 공정성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난에 못 이겨 신장을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은 부당하지만, 그 거래가 한 생명을 살리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당장의 먹을거리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말한다. …… 센델은 시장의 공정성을 통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 모두에게 이로울 것이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이 사회에는 돈으로 구매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는데, 돈으로 구매해서는 안 되는 성, 입학자격, 노벨상, 환경, 사회봉사까지 돈으로 사고팔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적 가치가 밀려난다고 주장한다. 즉, 시장의 교환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재화의 가치를 변질시키게 된다는 말이다. 성적이 좋은 아이들에게 돈을 주면, 공부를 잘하게 하려는 본래의 의도는 사라지고 아이들은 돈을 받기 위해 공부할 것이다. 시장적 인센티브가 비시장적 인센티브를 밀어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시장에서 교환가능한 것으로 만들면 시민적 참여, 공공성, 우정과 사랑, 명예 등 인간사회의 모든 덕목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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