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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개그는 개그일 뿐 따라하지 말자"란 예전의 유행어도 흔쾌히 웃어넘길 수 있었었으며, "정색을 하지 않은 소설에 정색을 하고 이러니저러지"하지 말자란 어느 역자(譯者)의 글엔 심지어/무려 열렬한 변호(辯護)까지를 했었다 하더라도 --- 웃음을 불러내오는 "개그가 맞긴 하나!" 그 웃음이 쌉쌀한 맛이라면, 또는 '이건 작정하고 정색을 한 채 써낸 작품이예요'라 은연중에/암묵적으로 독자를 향해 말을 거는 작품들을 만나게 될 때면 예의,나/독자는 과연, 어느 수준/정도까지 정색을 하여야 하는 것일까하는 고민을 매번 아니해볼 수 없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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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편함 】
"이혼까지 한, 쉰둘의, 남자치고는, 자신이 섹스 문제를 잘 해결해왔다고 생각"(p7)하는, 사회적으로도 꿀릴 것 없는 대학 교수인 주인공 데이비드 루리의 화려한 여성편력에 관한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합니다. --- 매춘부, 학과 사무실 직원을 거쳐 예의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인 멜라니 아이삭스에게까지 그의 욕망은 손을 뻗치지요. 헌데 말입니다!
이 남자, 루리 교수의 여성관이란 게 빨고, 핥고,싸고하는 류의 소설을 좋아하는 저 뿐 아니라 아마 빨고, 핥고,싸고하는 류의 소설을 혐오하는 남자들은 물론이겠고, 심지어는 대부분의 남자들에게서조차 선뜻 동의를 받아내기가 쉽지 않은 모양새를 띄고 있다라는 게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여자의 아름다움은 여자에게만 속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 그것은 여자가 세상에 가지고 오는 박애심의 일부야. 여자는 그것을 나눠가질 의무가 있지"(p28)
'여자의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제자 멜라니 아이삭스에게 이처럼 욕망 가득한 멘트를 날리며 작업을 걸기 시작하고, 이에 "제가 이미 그걸 나눠가졌다면 어떻게 되죠?"(p29)라 그녀가 반문하자, 우리의 작업남 루리 교수는 "그렇다면 더 광범위하게 나눠가져야지"(p29)라는, 거의 예수님 급(級)의 답변을 해냄으로써 기어이! 그녀의 '육체적 박애심'을 쟁취해내고야 맙니다. 게다가! --- 이처럼 여성의 아름다움을 공공재(公共財)라 우기는 말도 안되는 수준에만 머무는 여성관 뿐 아니라,
그는 몸을 가꾸지 않는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p109)
뭐, 저도 그렇습니다,라 고백(?)합니다. 외모를 가꾸지 않는 여자가 대신 자신의 내면을 가꿀 꺼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헌데, 저만 그럴까요? 세상 ('이반' 아닌) 남자치고, '몸을 가꾸지 않는 여자'를 좋아하는/싫어하지 않는 남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이건 페미니스트니 뭐니 하는 것까지 가져오지 않아도 답변되어질 수 있는, 지극히 정상적인 남성성(男性性)의 본질일 거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 우리의 루리 교수는 여기서 그치질 않아요. 자신의 딸 루시가 레즈비언인 것에 대해 "동성애. 몸무게가 늘어나는 것에 대한 핑계"(p131)라, 즉 자신의 딸에게조차 '몸을 가꾸지 않는 여자'라는 것에의 힐난을 이토록 잔인하게 쏟아내지요. 그에게 레즈비언이란 단지 "남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여자들"(p157)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동성애에 관해서만큼은 아직까지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공간이 없긴 하나, 위와 같은 루리 교수의 시선엔 어지간히 불편해지더군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
멜라니 아이삭스의 '육체적 박애심'을 향유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더랬습니다. 제 3자의 개입으로 인해 둘 사이의 관계는 암암리에 교내에 퍼져나갔고, 결국 그는 교내 위원회 출석을 요구받게 되지요. 하지만, 그러한 공식적인 절차가 시작되기도 전에 (소위 말하여지는) 여론의 재판은 이미! 그 스스로의 결론을 내놓은 태였었습니다.
밤낮으로 돌아가며 명성을 찧고 부수는 소문의 방앗간. 구석에서, 전화로, 닫힌 문 뒤에서 회의를 여는 정의의 공동체. 기쁜에 들뜬 속삭임들. 남의 불행을 놓고 희희낙락하는 것. 판결부터 내리고, 재판은 나중에 하고.(p66)
위원회는 루리 교수의 행동을 "성희롱"(p82)이라 규정했으나, 당사자인 루리 교수는 자신의 행동이 "욕망의 권리에 관한 것"(p135)이었다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지요. 그가 "나는 에로스의 노예였다. …… 나를 통해 행동한 것은 신(神)이었다."(p135)라 고백하는 바로 이 지점에서 --- '인간의 본능(本能)'이란 것을 신으로부터 선사받은 '인간의 권리'로 해석하/받아들이는 루리 교수의 시선은, 단순히 '그럼 사람이 동물과 다를 바가 무어냐?'란 저급한 질문으로 입막음되어져선 안된다라, 더 나아가 이것이 반박할/되어질 수 없는, 혹 어쩌면 (반드시) 깨어져야(만) 하는 금기란 생각을 갖게도 됩니다.
"어떤 동물도 본능을 따랐다는 것 때문에 벌 받는 걸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p136)
여기에 더해, 루리 교수에 대한 인간적 공감 역시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연유로 하여) 저로서는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 결국 학교를 해고당하고, 딸 루시가 혼자 살고 있는 시골로 간 루리 교수는, 루시가 돌보는 (다른 곳에서 버림받은) 개들 중 늙은 암캐 한 마리에게 "우리는 버림받은 걸까?"(p118)이라는, 일종의 동류의식을 가지게 될 정도로 추락을 고백합니다. 어떻게 봐도 못생긴, 키도 작은, 그가 좋아하지 않는 "몸을 가꾸지 않는 여자"였던 한 흑인 여성과 섹스를 하고 난 후,
"이 날을 잊지 말자. 이것이 멜라니 아이삭스의 달콤하고 젊은 살 다음에, 다다른 지점이다. 이것이 내가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 아니 이보다 못한 것조차."(p225) …… 만약 그녀가 가엾다면, 그는 파산해 있다.(p226)
① 니시 가나코가 「사라바」를 통해 "구슬픈 말로(末路)"라는, 어쨌든 뭔가가 어떻게든 이어지는 앞날이 남아 있다라는 식으로 표현했던 남자의 전락(轉落)을, J.M. 쿳시는 더 이상은 없다라는 훨씬 강한 의미인 "파산"이란 한 단어로 표현하였다라는 점에서, ② 「사라바」의 주인공이 단지 "서른세 살의 머리숱 적은"이란,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흐름으로부터 젊음의 말로는 느꼈던 반면, 「추락」의 주인공 루리 교수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맞게된 상황이란 점이 또한 다르죠. 헌데 바로 이 더욱 강렬한/자극적인 표현과 상황이란 게, 심지어 그것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결과였었음에도 불구하고 전 --- 왜 ... 그랬을까요? 그저 (아마도 저는 그 답을 알고 있겠을, 허나 뭐라 표현해낼 수 없는) 구체적으로 잡혀지지 않는 이유로 생겨난 이 공감(共感)의 상황이 참으로/매우 처량하고 더욱 슬프더란 말입니다.
갑자기 그는 은둔자, 속세를 떠나 시골에 사는 사람이 됐다. 방황의 끝. 그러나 가슴엔 아직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달은 여전히 밝다. 그렇게도 빨리, 그렇게도 갑자기, 방황과 사랑에 종말이 오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 그는 여기서 날마다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pp181-182)
【 모든 불편함의 근원 】
'사람 살아가는 거, 어디나 다 거기서 거기야'란 말이, 외국소설을 읽을 때면 종종 무너져 버리곤 합니다. 이 작품 속에도 역시 --- 주인공 루리 교수의 딸, 루시라는, 어지간히 이해하려 해봐도 이해되지 않는 인물이 등장하지요.
이젠 진보/좌파도 섹시하고 댄디한 모습을 띨 수 있어야 합니다. 수염기르고 개량한복에 고무신 신고 나오는 것이 더 이상은 '민중'의 모습으로 상징될 수 없는/되어서도 아니되는 세상이라, 그런 세상이 되어야 한다라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도시의 번잡함으로부터의 불편함보다, 도시의 편리함과 화려함으로부터의 매력이 더 크기에 우리는 도시에 살고 있는 것이며, 그렇다라면 도시의 번잡함을 피하려해서는 안되는 거겠죠. --- 루시는, 일명 '히피'의 삶을 살고 있는 이십대 중반입니다. 홀로 외딴 농장에서 사는 그녀의 삶에 대한 아버지의 염려는 그녀로 하여금 농장 생활을 그만두게 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집단 강간을 당한 후에도 그녀는, (히피를 싫어하는, 그리고 한국인인 제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대며 그곳을 떠날 수 없다라 완강히 저항하지요.
"제게 일어난 일은 순전히 저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 전적으로 제 일이에요."(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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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남아프리카이기 때문에 그래요."(p169)
이 작품의 배경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이후의 남아프리카입니다. 흑백차별이 공식적으로는 종식되었다곤 하나, 여전히 그 나라는 "흑인 남자의 냄새만 맡아도 으르렁거리도록 훈련된 개들이 사는 나라"(pp167-168)이었던 거지요. --- 자신이 집단 강간을 당하던 순간, 루시는 그들의 행위 자체가 두려웠던 것이 아닌,
"그들은 제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처럼 그 일을 하더군요. 무엇보다도 그것 때문에 더 간담이 서늘해지더군요. … 그들이 저를 왜 그렇게 증오했을까요? … 제가 증오의 대상이었다는 충격이 가시지를 않아요. 그 행위중에요."(p235)
그들, 흑인 남자들의 증오가 더 충격적이었다라 말합니다. 그럼에도, 농장을 떠나라는 아버지 루리 교수의 조언에 그토록 강한 거부를 했던 이유를 루시는 다음과 같이 말해줍니다.
"만약 그것(흑인들로부터의 잠재적 위협)이 제가 여기에 머무는 것에 대한 값으로 지불해야 하는 거라면 어떻게 될까요? … 그들은 제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빚지고 있다고 생각하죠. 그들은 자신들을 빚쟁이나 세금징수원으로 생각하죠. 왜 저는 아무런 값도 지불하지 않고 여기에 살아야 하나요? 어쩌면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거예요."(p238)
위의 주장이 루시의 생각이었다라면 당장 이 소설을 덮었을 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첫 번째 읽기에선 그렇게 생각했었더랬죠. 설마,하는 마음에 다시 읽어보니 이건) 루시의 생각이 아닌, 오랫동안 자신의 땅에서 피지배 피착취 계층으로 살아와야 했던 흑인들이 가질 법한 생각이라는 거지요. 이처럼 작가는!
흑인 남성과의 교합(交合)을 "과거의 잘못을 보상하고 싶어 하"(p201)는 마음의 표현, 아니 인내로 받아들이는 루시라는 인물과, 흑인 여성과의 교합을 "파산"으로 표현하는 루리라는 인물을, 게다가 두 사람을 부녀지간으로 설정해 놓음으로써, 남아프리카 내에 여전히/분명히 존재하는 흑백간의 (공식적, 법적으로가 아닌) 비공식적 갈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그리하여 결국엔!
집단강간으로 임신을 하게 된 루시가 자신의 뱃속 아이를 포기하지 않겠다라 말하는 장면, 또한 루시의 의견을 어찌하였든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된 루리 교수를 통해, 이 현실을 솔직하게는 '수치스러운 상태'라 생각하지만 (그러하기에 이 작품의 원제가 「Disgrace」인 것일 수도), 최소한 겉으로는 "이렇게 짜맞추면, 이야기는 그늘이 없이 펼쳐진다"(p259)로 포장해낼 수는 있는, 그러다 보면 언젠간!!!
시간은 정말로 모든 것을 치유한다. 아마 루시도 나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나아가는 게 아니라면 잊어가고 있을지 모른다. 그 날의 기억에 막이 생기고 딱지가 생겨 아물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어느 날, 그녀는 '우리가 강도를 당했던 그 날'을 언급하며, 그걸 단순히 그들이 강도를 당했던 날로 기억할지도 모른다.(p213)
이라는 자위(自慰)를 할 수 있을 것이란, 따지고 보면 여전히 '그늘이 보이지 않는 짜맞춤'으로 (억지) 화합을 만들어 내려한다라고 밖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 정색해야함의 정도(程度) 】
최고 강도의 정색을 하고, 작품 속 다음 구절들, 서로 떨어져 있기도 하나 한 곳으로 엮어보면 자못 --- '아파르트헤이트'는 여전히 남아프리카의 백인들에겐 'Disgrace'로구나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지경에 이르르게 됩니다. 이러한 저의 이해를 자신있게 내세우지는 못하겠기에, 각 구절들에 대한 저의 이해까지를 굳이 적지는 않겠습니다. 이 작품에 대한 저의 이해가, 스스로 생각해봐도 너무 잔인하다라 생각되서말이죠. --;;
◆ 그의 큰 키와 균형잡힌 골격과 올리브색 피부와 부드러운 머리는 자석처럼 여자를 끌었다. 만약 그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의도를 갖고 여자에게 눈길을 주면, 그 여자는 그것을 되돌려 주었다. 그는 그것에 의지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그가 살아온 방식이다. 몇 년 동안, 아니 몇 십년 동안, 그것은 그의 삶의 중추였다. 그런데 어느 날, 모든 게 끝났다. 경고도 없이, 그의 힘이 사라졌다.(p15) …… 불현듯, 그 여자에 대한 기억이 되돌아온다. 젖꼭지가 오똑 선 단아하고 작은 젖가슴, 그녀의 부드럽고 납작한 배.욕망의 물결이 그의 몸을 흝고 지나간다. 분명히, 그것이 무엇이었든,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p99)
◆ "정부? 딸? 그녀는 마음 속으로 무엇이 되려고 하는 걸까? 그녀는 그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는 걸까?"(p45) …… 침대 속의 두 사람. 더 이상 연인이 아닌 적. (p63)
◆ "그들은 가슴을 쥐어뜯고,뉘우치고,가능하면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구경하기 원했지. 사실상 TV쇼를 원한거지. 나는 그들의 뜻에 따르지 않으려했고."(101)
◆ 그의 생각은 어쩌면 다시는 못 보게 되겠지만 영원히 그의 삶의 일부가 되고 딸의 삶의 일부가 된 … 그들은 여자의 몸에 관한 한, 침묵이 담요처럼 드리워져 있다는 걸 분명하게 알 것이다. 너무 수치스러워서, 얘기하기에는 너무 수치스러워서. 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들이 한 일을 떠올리며 낄낄댈 것이다. 루시는 그들에게 승리를 인정해줄 준비가 되어 있는가?(p167)
◆ 폭행. 이것이 그가 페트루스로부터 듣고 싶은 말이다. 예, 그것은 폭행이었습니다. 예, 그것은 유린이었습니다. 그는 페트루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싶다.(p180)
하지만!!! |
그 어느 구절보다 섬뜩했었던 문장은 바로 --- 마태복음 8장 22절로부터의 다음 인용구였더랬습니다. 저의 이해가 크게 틀린 것이 아니라면, 이 작가 J.M. 쿳시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 아닐까 싶네요.
| | | | | |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라."(p278)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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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배우 김혜수가 읽고 있는 책!"같은 싸구려 선전 문구는 이젠 쪼옴!!!
※ 피지배 계층, 아프리카인의 입장에서 쓰여진 흑과 백 : 응구기 와 시옹오 作, 「울지마, 아이야」
※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 크누트 함순(1920) : 「굶주림」
- 펄 벅(1938) : 「대지」
- 헤밍 웨이(1954) : 「노인과 바다」
- 알베르 카뮈 (1957) : 「이방인」 · 「페스트」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 먼 자들의 도시」 · 「죽음의 중지」 · 「도플갱어」 · 「예수복음」 · 「카인」
- 헤르타 뮐러 (2009) : 「숨그네」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 주제 사라마구 作, 정영목 譯, 「죽음의 중지」, 해냄 刊, 2009. <옮긴이의 말>중.
- 딱히 다른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매춘부'라 표현했습니다만, 소설 속 등장인물은 몸을 파는 직업여성은 아닌, 가정까지 가지고 있는, 일종의 part-timer이라 할 수 있는 여성입니다.
- "학생들 중 하나한테 빠지지 않고 학기가 지나가는 때는 거의 없으니까, 그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p22)
- 소~올직히 말해, 젊은 시절 한 번쯤 써봤으면 어땠었을까?란 생각이 들긴 하더군요.
- 이 문장에 대해서는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루리 교수는 예전에 살았던 집의 옆집에 수캐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수캐는 암캐 냄새만 맡으면 미쳐 날뛰었고, 수캐의 주인은 그럴 때마다 그 개를 무지막지하게 때렸다고 합니다. 그 결과 이후 그 수캐는 암캐 냄새를 맡게 되면 "귀를 납작하게 하고 꼬리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정원 주위를 내달리곤"(p136)하게 되었답니다. 이 상황을 가리켜 루리 교수는 "천박한 어떤 것"(p136)이 있었따라 표현하며 다음과 같이 그 '천박함'을 설명하지요. --- "그 광경이 천박했던 것은 그 불쌍한 개가 자기 본질을 증오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개는 더 이상 때릴 필요가 없었어. 스스로를 벌할 준비가 돼 있었던 거지. 총으로 쏴 죽이는 것이 더 나았을 거야. … 그 개는 마음 속 깊이, 총에 맞아 죽는 걸 선호했을지 모른다. 본능을 거부당하는 쪽과 거실 주위를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다가 한숨을 쉬고 고양이 냄새나 맡으며 살이 피둥피둥 쪄가는 쪽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개는 총에 맞아 죽는 걸 택했을 거란 말이다."(p136)
- 따라서 아래 부분은 객관적인 감상이 될 수 없습니다.
- 루리 교수의 '버림받음'은 두 번의 이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자유로운 섹스와 (어쩌면 그러한 섹스를 가능케 해주었던 배경인) 교수라는 사회적 위치로부터의 '버림받음'을 의미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 "추락했다? 그래, 추락이 있었다."(p253) --- 이 작품의 역자가 원제 <Disgrace>를 굳이 <추락>으로 옮겼던 근거가 되는 문장이라 생각됩니다. 어쨌든, 저로선 '추락'이란 한국어 제목은 이 작품의 결말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라 생각되네요.
- 니시 가나코 作, 「사라바」 2권 p276, 은행나무 刊, 2016.
- 니시 가나코 作, 「사라바」 2권 p239, 은행나무 刊, 2016
- (교내 위원회가 해결방안으로 제안했던 "재교육, 성격 개조, 완곡한 말로 카운슬링"에 대해) "그것은 나한테는 모택동 시절의 중국에서 있었던 것과 비슷한 것 같더라. 자기주장의 철회, 자아비판, 공개적인 사과. 나는 구세대라고, 차라리 벽에 세워져 총살을 당하는 게 낫다. 그렇게 끝났다."(p101)
- "처녀를 강간하는 것보다 더 나쁘고 더 충격적인 레즈비언의 강간"(p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