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동서대전 - 이덕무에서 쇼펜하우어까지 최고 문장가들의 핵심 전략과 글쓰기 인문학
한정주 지음 / 김영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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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표지에서부터 '핵심 전략', '핵심 비결' 등의 단어를 대놓고 내세우는 이 책이,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있는 요즈음의 시류에 편승하려는 수많은 책들 중의 한 권일 뿐일지, 아니면 진정 우리가 원하는 글쓰기를 소개하고 있는 책일지에 대한 적잖은 호기심으로, 이 '벽돌'의 첫 장을 넘겼더랬습니다. 예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 책을 설명해주고 있더군요.


​이 책은 … 조선을 비롯해 중국, 일본 그리고 서양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장가 혹은 작가들이 선보인 글쓰기의 미학과 방법을 교차 비교해 살펴보면서 ①"어떻게 글을 써야 할까?"라는 문제에 대해 ②필자 나름대로 접근해 본 작품의 결과물입니다.(p5)


 【 어떻게 글을 써야 할까? 】

저자는 이처럼 책의 시작에 이 책이 "어떻게 글을 써야 할까?"라는 문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라 표현해놓았습니다. 이 구절은 신중히 읽어내지 않는 한, 이 책을 소위 말하는 '글을 잘 쓸 수 있는 테크닉'을 소개해주는 책으로 받아들일 충분한 소지를 가지고 있다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러했었었. --;;) 하지만!


​이 책에는 '글을 잘 쓸 수 있는 길잡이'가 될 만한 내용은 담겨 있을지 모르겠지만 '글을 잘 쓸 수 있는 묘책이나 비법'은 없다고 하겠다.(p595)

기껏 벽돌 다 읽어낸다 싶은 시점에 가서야 저자는 이처럼 오해의 소지를 가지지 말라,라는 소개를 해주고 있지요. 하지만! --- 이 벽돌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만을 본다면 다분히 앞뒤가 다른 듯 볼 수도 있겠으나, 벽돌 전체를 차근차근 읽어낸 사람이라면 "어떻게 글을 써야 할까?"라는 구절은 결국 저자의 표현인 "글을 잘 쓸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라는 것에 동의하게 되지않을까 생각합니다.


【 필자 나름대로 접근해 본 】

​"눈은 스스로 볼 수 없다. 코는 스스로 냄새를 맡을 수 없다. 혀는 스스로 핥을 수 없다. 손은 스스로 잡을 수 없다. 오직 귀만은 스스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거울을 스스로 비출 수 없다. 저울은 스스로 저울질할 수 없다. 검은 스스로 공격할 수 없다. - 장조, <유몽영> 중 "(p486)

​이 당연한 듯, 하지만 대체 뭔 소리인지 정확히 알아챌 수 없는 문장에 대해 저자는 "이것이 존재해야 저것이 존재할 수 있듯이, 만물을 홀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 연관되어 있다"(p487)라는 의미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 책은, 2016년의 독자에게 17세기 중국 학자의 글을 이해하기 쉽게 해석해준다라는 장점을 지니고 있기도 하지만, 그리하여 크게 보아 이 책 전체를 일종의 독후감 내지는 해설서로 이해해내도 무방하리라는 생각이 들기도하지만!


이옥의 글에서는 사물과 자아의 일체, 즉 주관적 일체감이라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요시다 겐코의 글에서는 사물과 자아의 구분, 즉 객관적 거리감이라는 특징을 엿볼 수 있다.(p472)

와 같은 저자의 주관을, 원문의 소개에 앞서 보여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만의 해석을 시도해볼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원천적으로 막아놓고 있다라는 단점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이걸 왜 단점이라 생각하느냐하면 --- 예를 들어, 산더미만한 곡식낫알들이 앞에 있고, 이 낫알들을 키1로 일일이 걸러내 최종적으로 15톨의 곱디고운 낫알을 골라내었다 해보죠. 그 15톨의 곡식을 자랑스레 타인에게 보여주며, 이 15톨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미세한 낫알들이다,라 말한다해도, 우리는 우선 이 주장이 과연 옳은 것이냐라는 의문을 가져보게 될 겁니다. 그가 사용한 키의 구조와 내가 생각하는/사용하는 키의 구조가 다를 수 있기 때문/ 더욱 미세한 구조의 키가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엄청난 노력을 통해 걸러진 15톨의 낫알, 즉 그가 사용한 키의 구조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단지 결과물만을 보게되는 것과, 아예 처음부터 나는 이러이러한 구조의 키를 사용할 것이며, 그리하여 결국 어떤 형태의 낫알들이 남게 되는가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히! --- 똑같은 15톨로 결과지어진다 할지라도, 그 15톨을 바라보며 갖게되는 놀라움은 엄청나게 다른 강도를 보여주게 된다라는 점입니다. 이처럼!

이 책은, 비록 책의 시작에 '필자 나름대로 접근해 본'이란 구절로 하여금 그 주관성을 미리 전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이의 시각에 따라서는 저자가 15톨의 낫알을 얻어내는 데에 사용한 '키의 구조'를 정확히 알 수 없다라는 점에서, 저자가 뽑아낸 15톨의 낫알에 대한 놀라움의 강도를 심히 저하시켜버릴 수 있다라는 커다란 아쉬움을 지니고도 있지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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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 책은 읽어내기에 상당히 재미있는 책입니다. 저자의 서술도 그러하거니와, 내용 역시 매우 잘 꿰인 구슬들처럼 전체적으로 상당히 아름다운 외양의 목걸이와도 같지요. 하지만, 이처럼 술술술 읽어내려가다보니 결국 남게 되는 건, 뭔가 좌절감스런 참담 밖에 없더군요. "다른 삶이었기에 그들은 다른 글쓰기를 해내었노라"라는, 「문장의 품격」이란 책에서 받았던 느낌이 훨씬 더 강해졌다3고나 할까요?

저자가 15개로 요약해 낸 이 책 속 문장가들의 글쓰기 특징을 다시 분류해 본다면 결국엔 '자기다움4, 자유로움5 그리고 자연스러움6'의 세 가지가 됩니다. 이 세 가지만 갖출 수 있다면 심지어 "이렇게 글을 써야한다고 덧붙이는 구성이니 논리니 문법이니 수사니 형식이니 하는 따위는 실상 부차적인 것에 불과"(p9)하다라 저자는 말하고 있기도 하지요.


【 자기다움 】

요즘의 청춘들이 '자기다움'을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낼 수 있는 글쓰기는 다름아닌 (참 이게 서글픈 현실인거지만) '자기소개서'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전 언젠가, (불법은 결코 아니었고, 일종의 observer쯤 되는 자격으로) 모 회사에 접수된 청춘들의 입시자원서 몇 백장을 대강이나마 읽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자기소개서'란 걸 한 번도 써보지 않았던 제가, 타인이 쓴 '자기소개서'를 판단한다는 게 우스운 상황이긴 하지만 어쨌든, 요즘 청춘들이 어떠한 표현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는 나름 흥미로운 시간이었었지요. 제가 그들의 당락을 결정하는 위치는 아니었었기에, 자기소개서의 내용이란 게 과연 당락에서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딱 봐도 대부분의 자기소개서(속 자신들의 소개)는 재벌들의 분식회계를 욕할 것도 아니다 싶을만큼 화려하고 다양했으나, 그 글을 통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파악이랄까, 더 나아가 믿음이랄까 같은 건 솔직히 말해 전혀 만들어내질 못하더군요.7 


"만약 그를 찾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글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비록 무쇠로 만든 신발이 다 닳아 구멍이 나도록 대지를 두루 밟고 다닌다고 해도 끝내 찾지 못할 것이다."(p83) - 이용휴 <혜환잡저> 중

즉,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자기다움'이란 바로 --- '나'는 '나의 글'로 표현되어야 한다라는, 뒤집어 말하면/그러하기에 '나의 글'은 반드시 '옳바른 나'를 표현하여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글'은 '말'보다 훨씬 유리한 도구이지요.)


"가면이나 거짓으로 꾸민 얼굴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생기 없는 죽은 얼굴이거나 가짜 표정일 뿐이다. 비록 추하다고 해도 생기 넘치는 자신의 얼굴이 그보다 몇 백 배 몇 천 배는 더 훌륭하다. 글의 문체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p661)

​이 '자기다움'과 관련지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차이와 다양성'이기도 합니다. 이덕무는 "글을 지을 때 역시 여러 상황과 경우 혹은 글쓴이의 수준과 자질에 따라 제각각 천변만환의 묘미를 갖출 수 있고 또한 갖추어야 한다"(p375)라 조언해주지요. 예를 들어,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제가 써놓은 독후감을 읽으며 '이건 참 독특한데!'라 자뻑하는 경우 말이죠. 그러했던 느낌을 제게 주었던 글인) 카린 지에벨 作, 「너는 모른다」을 읽고 써낸 저의 감상문과, 문학 전공자 혹은 심리학 전공자, 심하게는 경찰관이 읽고 쓴 감상문은 분명 다를 꺼라 생각합니다. 어떤 사전(事前)적 작위가 아닌, 그저 경제학 공부를 오래했던 저였기에 그 소설을 읽고 이건 이런 구도의 소설이네,란 (어느 정도는 기계적 도식에 의한) 생각을 가졌던 것이고, 심리학 전공의 독자라면 또 다른 구도로 그 소설을 이해해내고 그 바탕위에 쓰여진 감상문을 만드어내겠지요.  


​"사유가 곧 표현이다. … 만약 누군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 언제 어느 곳에선가 - 반드시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p388)

이틀 동안 몇 백장의 자기소개서를 대강이라도 읽어보니, 이 글이 어느정도의 솔직함을 가지고 있는가는 정말 보이더군요. 자신을 소개하는 글인 '자기소개서'에마저 '자기다움'을 담아내지 못하는/않는, 이건 시대적 안타까움이 될 수도, 혹은 경박함이나 부정직함의 만연일 수 있다라는 점에서 느껴 본 첫 번째의 '좌절감스런 참담'입니다.



【 자유로움 】

"문장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뜻과 기운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p291) 

(제가 잘 모르고 하는 말일 수도 있다는 전제 하에) 요즘의 청춘들, 뭐 저 역시도 포함되는 요즘의 우리들에게 '글쓰기'란 것이 자기소개서나 블로그 또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남기는 글 이외의 무엇이 있기는 할까요? 이 책에 등장하는 옛 사람들에게도 트위터나 블로그스런 글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8, 그것이 어떠한 형식과 길이를 지니고 있다할지라도, 글쓰기의 기본은 바로 "'자신에게서 나온 진실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글을 써야 한다'와 '무엇에도 얽매이거나 속박당하지 않은 진실한 마음과 감정으로 글을 쓰겠다'는 작가 정신"(p313)이어야 한다라 저자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천진한 마음과 순수한 마음은 가식이나 인위가 아닌 '진정성'을 공통분모로 삼는다. … 그것은 많이 배우고 지식을 쌓는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억지로 힘쓴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9"(p19) …… "어느 순간 -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 저절로 자신에게서 나온 느낌과 감정과 생각이 있는 그대로 글로 옮겨질 때 비로소 천연의 아름다움을 갖춘 지극한 문장이 된다. 따라서 세상에서 이른바 '이렇게 글을 지어야 맞다'라는 가르침은 모두 거짓된 견해이자 일종의 사기일 뿐이다."(pp45-46)




취직을 위한 '자기소개서'의 목적성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자신이 읽은 책의 감상문을 쓸 때조차 '서평 당선'이라는 특정 목적을 위해 그 형식과 스타일을 써내는 요즈음의 글쓰기를 보자라면, "명예나 출세에 속박당하거나, 권세나 이익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신의 감정과 마음을 진실하고 솔직하게 자유롭게 표현하려면 무엇보다도 글쓰기에 '목적'이 없어야 한다. 목적이 있게 되면 반드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글을 인위로 짓게 되고 가식으로 꾸미게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p255)라는 명나라 말기 '공안파(公安派)'의 가르침이 2016년의 대한민국에서는 사뭇 받아들여지지 않는/받아들여질 수 없다라는, 그리하여 "할 일이 없어 무료하고 따분한 나머지 쓴 글"(p461)이란 의미의 '도연초(徒然草)'를 만나볼 기회가 적다라는, 그것을 스스로조차 써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라는 것이 바로 두 번째의 '좌절감스런 참담'입니다. 불 위에 기름 붓는 격인 다음의 문장은, '세상 밖 견문과 경험과 체험'을 쌓을 수 없는 저, 그리고 저의 아이 세대에게, 이 두 번째의 참담함에 더욱 아픈 바늘을 찔러주지요.


지극한 경지에 이른 문장이란 "애써 그렇게 쓰려고 하지 않아도 그렇게 쓰인 글"이다. 웅혼한 문장 역시 그렇게 글을 쓰려고 인위적으로 노력한다고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세상 밖 견문과 경험과 체험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웅장한 기운이 자라나고 탁 트여 막힘이 없는 기질이 길러진다. 그러면 그 기운과 기질이 자연스럽게 글에 들어나 애써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오히려 문장은 웅혼하게 된다. (318)


【 자연스러움 】

 "장주(장자)가 꿈속에서 나비10가 되었다. 나비가 된 것은 장주의 행복이다. 나비가 꿈 속에서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된 것은 나비의 불행이다."(p486)

저자는, "글쓰기 철학고 미학의 궁극적인 경지는 '자득(自得)'일 수밖에 없다"(p596)라 말해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스스로 깨닫고 터득해 자신만의 글을 쓸 것인가'는 다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자기만의 몫"(p597)이라는 거지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자유로움'과 마찬가지로, 이 '자득의 글쓰기'란 것 역시 현재의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저로선 해낼 수 없는 것이 아닐까,하는 점에서 예의 세 번째의 '좌절감스런 참담'을 줍니다.


​"자득 … 이것은 배우고 익힌다고 해서 얻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위적으로 노력한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오래도록 가슴속에 맺혀있던 것이 마치 홀연히 풀리듯, 마치 술에 취해 있다가 갑자기 깨어나듯, 마치 가득 찬 물이 별안간 터지듯' 깨닫거나 터득할 수 있을 뿐이다."(p634) …… "애써 억지로 글을 지으려고 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자칫 언어의 감옥에 구속당하기 쉽다. … 스스로 깨닫거나 터득한 것이 나를 찾아올 때까지 묵히고 기다리고 또 묵히고 기다려라. 그렇게 하면 비록 한 달에 겨우 한두 편의 글 밖에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마침내 '천뢰', 즉 가장 진실하고 자연스러운 글을 자유롭게 지을 수 있게 될 것이다."(p636)

하지만! --- "평범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있는 그대로의 삶에 대한 기록 … 그저 자신들의 삶을 드러낸 것이 불과"(p498)한 글이라도/조차도 써내기 쉽지 않은 2016년의 대한민국 땅 위의 우리가 과연 '묵히고 기다리고 또 묵히고 기다린'다 하여/할지라도, 정녕 도돌이표로 장식되는 '평범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있는 그대로의 삶에 대한 기록' 이외의 것을 써낼 수 있겠는가라는, 한숨 푹푹 나오는 의문 앞에서, 개인적으론 이 책의 명확한 (시대적·현실적) 한계를 보게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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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부정적인 느낌으로 감상문이 쓰여지긴 했습니다만, 앞서도 언급했듯, 이 책은 꽤나 재미있게 읽어낼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딱히 어렵다거나 꼬아쓰여진 부분도 없는, 옛 문헌/글들에 대한 일종의 쉬운 해설서쯤 된다라 할까요? 참으로 인상깊었던, 혹여 저 스스로의 독서에서 접해볼 수나 있을까, 쇼펜하우어나 루소, 호메로스 같은 작가들의 책 속 구절들을 포함해, 여러 명문(名文)들을 적어놓았습니다만, (다른 글들은 다른 곳에서 인용하겠노라는 욕심을 가진 채) '독서'에 관한 가장 인상 깊었던 세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감상문 마무리를 지어볼까 합니다.

● "소년의 독서는 마치 구멍을 통해 달을 엿보는 것과 같다. 중년의 독서는 마치 마당 가운데서 달을 바라다보는 것과 같다. 노년의 독서는 마치 누대 위에서 달을 구경하며 즐기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일은 모두 과거에 경험한 것들의 얕음과 깊음을 돌아본 것으로, 그 얻은 것이 얕은 것과 깊은 것이 될 뿐이다."(p488) - 장조, <유몽영> 중


● "독서한 것을 다시 생각할 때에야 비로소 독서한 것이 자신의 것이 된다. … 끊임없디 독서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이 읽어도 자기 속에 남아 있지 못하고 대개는 잃어버리고 만다.11"(p650) - 쇼펜하우어, <인생론> 중

​그러나! 이 책 속 그 어느 구절보다 저의 마음을 확! 끌어당겼던 구절은 장조의 <유몽영> 중에 나오는 --- "천하에 서책이 없다면 그만이겠지만, 서책이 있다면 반드시 읽는 것이 마땅하다. 술이 없다면 그만이겠지만, 술이 있다면 반드시 마시는 것이 마땅하다."(pp488-489)였었었네요. 이 구절은, 제가 좋아하는, 맥주 마실 수 있는 서점 <미스터 버티고>에 현판에 새겨 걸어놓아도 좋을 듯. ^^


※ 이 책을 읽고 읽어보면 더욱 멋지게 이해될 듯한 책들 :

- 안대회 著,문장의품격, 휴머니스트 刊, 2016.

- 안소영 著, 「책만 보는 바보」, 보림출판사 刊, 2005.

 

 

 

 

 

 

 

 

 

 



 

  1. "곡식 따위를 까불러 쭉정이나 티끌을 골라내는 도구" - <네이버 국어사전>
  2. 이 책에서 저자가 골라낸 가장 곱디고운 낫알은 다음과 같습니다. : "무목적성·주관성·일상성·다양성·개방성·독창성·참신성·기궤성·미시성·무한성·불온성·진정성·다원성·혁신성"(p6) - 책의 시작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 15개의 낫알은 예의 p6에서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지요.
  3. "그 이유는 이덕무가 스스로 지은 '영처고자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이 글을 읽으면 글쓰기에는 기술과 방법 이전에 반드시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p18)
  4. "자기 자신만의 글을 쓴다는 것"(p6)
  5. "무엇에도 얽매이거나 속박당하지 않은 채 자유롭게 읽ㄱ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행동하고, 자유롭게 쓴다는 것. … 오직 자신의 감정을 진솔하게 묘사하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면 될 뿐."(p7)
  6. "억지로 지으려고 하거나 애써 꾸미려고 하지 않으며"(p8)
  7. 어떤 지원자는 자신을 '맥주같은 사람'이라 표현했더군요. 맥주만 마셔도 시원할 뿐만 아니라, 소주와도, 위스키와도, 심지어 사이다와도 잘 어울리는 존재라면서 말이죠. 잘 모르겠습니다. 공적 문서인 입사지원서의 '자기소개서'에 이런 표현을 써도 되는 건지. 암튼 뭔가 절묘한 표현이긴 하네, 하며 기억엔 남더라는... --;;
  8. "5.7.5.의 음율을 지닌 17자로 되어 있는 짧은 시"(p96)인 일본의 하이쿠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사물을 관찰하다가 느끼고 깨달은 것을 소재와 주제로 삼은 글을 즐겨 썼던 이옥"(p441)의 <백운필>등이 그러하지요.
  9. 이덕무의 이 표현이 '많이 배우고 지식을 쌓는 것, 억지로 힘쓰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단지 그것들만으로 '진정성'이란 것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10. "아무 것에도 방해받거나 구속당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인간 세계와 자연 만물을 유영하고 다니는 그 자유분방한 영혼"(pp485-486)
  11. "다시 말해 독서란 자기 사상을 만드는 에너지의 공급원으로만 활용해야 한다는 얘기다. 독서라는 에너지를 바탕 삼아 자기 사상을 만드는 것, 그것만이 참된 독서법이다."(p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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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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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는 개그일 뿐 따라하지 말자"란 예전의 유행어도 흔쾌히 웃어넘길 수 있었었으며, "정색을 하지 않은 소설에 정색을 하고 이러니저러지"하지 말자란 어느 역자(譯者)의 글엔 심지어/무려 열렬한 변호(辯護)까지를 했었다 하더라도 --- 웃음을 불러내오는 "개그가 맞긴 하나!" 그 웃음이 쌉쌀한 맛이라면, 또는 '이건 작정하고 정색을 한 채 써낸 작품이예요'라 은연중에/암묵적으로 독자를 향해 말을 거는 작품들을 만나게 될 때면 예의,나/독자는 과연, 어느 수준/정도까지 정색을 하여야 하는 것일까하는 고민을 매번 아니해볼 수 없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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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편함 】

"이혼까지 한, 쉰둘의, 남자치고는, 자신이 섹스 문제를 잘 해결해왔다고 생각"(p7)하는, 사회적으로도 꿀릴 것 없는 대학 교수인 주인공 데이비드 루리의 화려한 여성편력에 관한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합니다. --- 매춘부, 학과 사무실 직원을 거쳐 예의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인 멜라니 아이삭스에게까지 그의 욕망은 손을 뻗치지요. 헌데 말입니다!


이 남자, 루리 교수의 여성관이란 게 빨고, 핥고,싸고하는 류의 소설을 좋아하는 저 뿐 아니라 아마  빨고, 핥고,싸고하는 류의 소설을 혐오하는 남자들은 물론이겠고, 심지어는  대부분의 남자들에게서조차 선뜻 동의를 받아내기가 쉽지 않은 모양새를 띄고 있다라는 게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여자의 아름다움은 여자에게만 속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 그것은 여자가 세상에 가지고 오는 박애심의 일부야. 여자는 그것을 나눠가질 의무가 있지"(p28)

'여자의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제자 멜라니 아이삭스에게 이처럼 욕망 가득한 멘트를 날리며 작업을 걸기 시작하고, 이에 "제가 이미 그걸 나눠가졌다면 어떻게 되죠?"(p29)라 그녀가 반문하자, 우리의 작업남 루리 교수는 "그렇다면 더 광범위하게 나눠가져야지"(p29)라는, 거의 예수님 급(級)의 답변을 해냄으로써 기어이! 그녀의 '육체적 박애심'을 쟁취해내고야 맙니다. 게다가! --- 이처럼 여성의 아름다움을 공공재(公共財)라 우기는 ​말도 안되는 수준에만 머무는 여성관 뿐 아니라,

 그는 몸을 가꾸지 않는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p109)

뭐, 저도 그렇습니다,라 고백(?)합니다. 외모를 가꾸지 않는 여자가 대신 자신의 내면을 가꿀 꺼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헌데, 저만 그럴까요? 세상 ('이반' 아닌) 남자치고, '몸을 가꾸지 않는 여자'를 좋아하는/싫어하지 않는 남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이건 페미니스트니 뭐니 하는 것까지 가져오지 않아도 답변되어질 수 있는, 지극히 정상적인 남성성(男性性)의 본질일 거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 우리의 루리 교수는 여기서 그치질 않아요. 자신의 딸 루시가 레즈비언인 것에 대해 "동성애. 몸무게가 늘어나는 것에 대한 핑계"(p131)라, 즉 자신의 딸에게조차 '몸을 가꾸지 않는 여자'라는 것에의 힐난을 이토록 잔인하게 쏟아내지요. 그에게 레즈비언이란 단지 "남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여자들"(p157)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동성애에 관해서만큼은 아직까지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공간이 없긴 하나, 위와 같은 루리 교수의 시선엔 어지간히 불편해지더군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

멜라니 아이삭스의 '육체적 박애심'을 향유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더랬습니다. 제 3자의 개입으로 인해 둘 사이의 관계는 암암리에 교내에 퍼져나갔고, 결국 그는 교내 위원회 출석을 요구받게 되지요. 하지만, 그러한 공식적인 절차가 시작되기도 전에 (소위 말하여지는) 여론의 재판은 이미! 그 스스로의 결론을 내놓은 태였었습니다.

​밤낮으로 돌아가며 명성을 찧고 부수는 소문의 방앗간. 구석에서, 전화로, 닫힌 문 뒤에서 회의를 여는 정의의 공동체. 기쁜에 들뜬 속삭임들. 남의 불행을 놓고 희희낙락하는 것. 판결부터 내리고, 재판은 나중에 하고.(p66)

위원회는 루리 교수의 행동을 "성희롱"(p82)이라 규정했으나, 당사자인 루리 교수는 자신의 행동이 "욕망의 권리에 관한 것"(p135)이었다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지요. 그가 "나는 에로스의 노예였다. …… 나를 통해 행동한 것은 신(神)이었다."(p135)라 고백하는 바로 이 지점에서 --- '인간의 본능(本能)'이란 것을 신으로부터 선사받은 '인간의 권리'로 해석하/받아들이는 루리 교수의 시선은, 단순히 '그럼 사람이 동물과 다를 바가 무어냐?'란 저급한 질문으로 입막음되어져선 안된다라, 더 나아가 이것이 반박할/되어질 수 없는, 혹 어쩌면 (반드시) 깨어져야(만) 하는 금기란 생각을 갖게도 됩니다.       


"어떤 동물도 본능을 따랐다는 것 때문에 벌 받는 걸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p136)


여기에 더해, 루리 교수에 대한 인간적 공감 역시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연유로 하여) 저로서는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 결국 학교를 해고당하고, 딸 루시가 혼자 살고 있는 시골로 간 루리 교수는, 루시가 돌보는 (다른 곳에서 버림받은) 개들 중 늙은 암캐 한 마리에게 "우리는 버림받은 걸까?"(p118)이라는, 일종의 동류의식을 가지게 될 정도로 추락을 고백합니다. 어떻게 봐도 못생긴, 키도 작은, 그가 좋아하지 않는 "몸을 가꾸지 않는 여자"였던 한 흑인 여성과 섹스를 하고 난 후,  

​"이 날을 잊지 말자. 이것이 멜라니 아이삭스의 달콤하고 젊은 살 다음에, 다다른 지점이다. 이것이 내가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 아니 이보다 못한 것조차."(p225) …… 만약 그녀가 가엾다면, 그는 파산해 있다.(p226)

① 니시 가나코가 「사라바」를 통해 "구슬픈 말로(末路)"라는, 어쨌든 뭔가가 어떻게든 이어지는 앞날이 남아 있다라는 식으로 표현했던 남자의 전락(轉落)을, J.M. 쿳시는 더 이상은 없다라는 훨씬 강한 의미인 "파산"이란 한 단어로 표현하였다라는 점에서, ② 「사라바」의 주인공이 단지 "서른세 살의 머리숱 적은"이란,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흐름으로부터 젊음의 말로는 느꼈던 반면, 「추락」의 주인공 루리 교수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맞게된 상황이란 점이 또한 다르죠. 헌데 바로 이 더욱 강렬한/자극적인 표현과 상황이란 게, 심지어 그것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결과였었음에도 불구하고 전 ---  왜 ... 그랬을까요? 그저 (아마도 저는 그 답을 알고 있겠을, 허나 뭐라 표현해낼 수 없는) 구체적으로 잡혀지지 않는 이유로 생겨난 이 공감(共感)의 상황이 참으로/매우 처량하고 더욱 슬프더란 말입니다.


갑자기 그는 은둔자, 속세를 떠나 시골에 사는 사람이 됐다. 방황의 끝. 그러나 가슴엔 아직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달은 여전히 밝다. 그렇게도 빨리, 그렇게도 갑자기, 방황과 사랑에 종말이 오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 그는 여기서 날마다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pp181-182)

​【 모든 불편함의 근원 】

'사람 살아가는 거, 어디나 다 거기서 거기야'란 말이, 외국소설을 읽을 때면 종종 무너져 버리곤 합니다. 이 작품 속에도 역시 --- 주인공 루리 교수의 딸, 루시라는, 어지간히  이해하려 해봐도 이해되지 않는 인물이 등장하지요.

이젠 진보/좌파도 섹시하고 댄디한 모습을 띨 수 있어야 합니다. 수염기르고 개량한복에 고무신 신고 나오는 것이 더 이상은 '민중'의 모습으로 상징될 수 없는/되어서도 아니되는 세상이라, 그런 세상이 되어야 한다라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도시의 번잡함으로부터의 불편함보다, 도시의 편리함과 화려함으로부터의 매력이 더 크기에 우리는 도시에 살고 있는 것이며, 그렇다라면 도시의 번잡함을 피하려해서는 안되는 거겠죠. --- 루시는, 일명 '히피'의 삶을 살고 있는 이십대 중반입니다. 홀로 외딴 농장에서 사는 그녀의 삶에 대한 아버지의 염려는 그녀로 하여금 농장 생활을 그만두게 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집단 강간을 당한 후에도 그녀는, (히피를 싫어하는, 그리고 한국인인 제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대며 그곳을 떠날 수 없다라 완강히 저항하지요.


​"제게 일어난 일은 순전히 저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 전적으로 제 일이에요."(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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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남아프리카이기 때문에 그래요."(p169)

​이 작품의 배경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이후의 남아프리카입니다. 흑백차별이 공식적으로는 종식되었다곤 하나, 여전히 그 나라는 "흑인 남자의 냄새만 맡아도 으르렁거리도록 훈련된 개들이 사는 나라"(pp167-168)이었던 거지요. --- 자신이 집단 강간을 당하던 순간, 루시는 그들의 행위 자체가 두려웠던 것이 아닌,

 

​"그들은 제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처럼 그 일을 하더군요. 무엇보다도 그것 때문에 더 간담이 서늘해지더군요. … 그들이 저를 왜 그렇게 증오했을까요? … 제가 증오의 대상이었다는 충격이 가시지를 않아요. 그 행위중에요."(p235)

그들, 흑인 남자들의 증오가 더 충격적이었다라 말합니다. 그럼에도, 농장을 떠나라는 아버지 루리 교수의 조언에 그토록 강한 거부를 했던 이유를 루시는 다음과 같이 말해줍니다.


​"만약 그것(흑인들로부터의 잠재적 위협)이 제가 여기에 머무는 것에 대한 값으로 지불해야 하는 거라면 어떻게 될까요? … 그들은 제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빚지고 있다고 생각하죠. 그들은 자신들을 빚쟁이나 세금징수원으로 생각하죠. 왜 저는 아무런 값도 지불하지 않고 여기에 살아야 하나요? 어쩌면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거예요."(p238)

위의 주장이 루시의 생각이었다라면 당장 이 소설을 덮었을 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첫 번째 읽기에선 그렇게 생각했었더랬죠. 설마,하는 마음에 다시 읽어보니 이건) 루시의 생각이 아닌, 오랫동안 자신의 땅에서 피지배 피착취 계층으로 살아와야 했던 흑인들이 가질 법한 생각이라는 거지요. 이처럼 작가는!


흑인 남성과의 교합(交合)을 "과거의 잘못을 보상하고 싶어 하"(p201)는 마음의 표현, 아니 인내로 받아들이는 루시라는 인물과, 흑인 여성과의 교합을 "파산"으로 표현하는 루리라는 인물을, 게다가 두 사람을 부녀지간으로 설정해 놓음으로써, 남아프리카 내에 여전히/분명히 존재하는 흑백간의 (공식적, 법적으로가 아닌) 비공식적 갈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그리하여 결국엔!

집단강간으로 임신을 하게 된 루시가 자신의 뱃속 아이를 포기하지 않겠다라 말하는 장면, 또한 루시의 의견을 어찌하였든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된 루리 교수를 통해, 이 현실을 솔직하게는 '수치스러운 상태'라 생각하지만 (그러하기에 이 작품의 원제가 「Disgrace」인 것일 수도), 최소한 겉으로는 "이렇게 짜맞추면, 이야기는 그늘이 없이 펼쳐진다"(p259)로 포장해낼 수는 있는, 그러다 보면 언젠간!!!


시간은 정말로 모든 것을 치유한다. 아마 루시도 나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나아가는 게 아니라면 잊어가고 있을지 모른다. 그 날의 기억에 막이 생기고 딱지가 생겨 아물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어느 날, 그녀는 '우리가 강도를 당했던 그 날'을 언급하며, 그걸 단순히 그들이 강도를 당했던 날로 기억할지도 모른다.(p213)

이라는 자위(自慰)를 할 수 있을 것이란, 따지고 보면 여전히 '그늘이 보이지 않는 짜맞춤'으로 (억지) 화합을 만들어 내려한다라고 밖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 정색해야함의 정도(程度) 】

최고 강도의 정색을 하고, 작품 속 다음 구절들, 서로 떨어져 있기도 하나 한 곳으로 엮어보면 자못 --- '아파르트헤이트'는 여전히 남아프리카의 백인들에겐 'Disgrace'로구나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지경에 이르르게 됩니다. 이러한 저의 이해를 자신있게 내세우지는 못하겠기에, 각 구절들에 대한 저의 이해까지를 굳이 적지는 않겠습니다. 이 작품에 대한 저의 이해가, 스스로 생각해봐도 너무 잔인하다라 생각되서말이죠. --;;


그의 큰 키와 균형잡힌 골격과 올리브색 피부와 부드러운 머리는 자석처럼 여자를 끌었다. 만약 그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의도를 갖고 여자에게 눈길을 주면, 그 여자는 그것을 되돌려 주었다. 그는 그것에 의지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그가 살아온 방식이다. 몇 년 동안, 아니 몇 십년 동안, 그것은 그의 삶의 중추였다. 그런데 어느 날, 모든 게 끝났다. 경고도 없이, 그의 힘이 사라졌다.(p15) …… 불현듯, 그 여자에 대한 기억이 되돌아온다. 젖꼭지가 오똑 선 단아하고 작은 젖가슴, 그녀의 부드럽고 납작한 배.욕망의 물결이 그의 몸을 흝고 지나간다. 분명히, 그것이 무엇이었든,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p99)

◆ "정부? 딸? 그녀는 마음 속으로 무엇이 되려고 하는 걸까? 그녀는 그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는 걸까?"(p45) …… 침대 속의 두 사람. 더 이상 연인이 아닌 적. (p63)

"그들은 가슴을 쥐어뜯고,뉘우치고,가능하면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구경하기 원했지. 사실상 TV쇼를 원한거지. 나는 그들의 뜻에 따르지 않으려했고."(101)

그의 생각은 어쩌면 다시는 못 보게 되겠지만 영원히 그의 삶의 일부가 되고 딸의 삶의 일부가 된 … 그들은 여자의 몸에 관한 한, 침묵이 담요처럼 드리워져 있다는 걸 분명하게 알 것이다. 너무 수치스러워서, 얘기하기에는 너무 수치스러워서. 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들이 한 일을 떠올리며 낄낄댈 것이다. 루시는 그들에게 승리를 인정해줄 준비가 되어 있는가?(p167)

폭행. 이것이 그가 페트루스로부터 듣고 싶은 말이다. 예, 그것은 폭행이었습니다. 예, 그것은 유린이었습니다. 그는 페트루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싶다.(p180)


 

하지만!!!


그 어느 구절보다 섬뜩했었던 문장은 바로 --- 마태복음 8장 22절로부터의 다음 인용구였더랬습니다. 저의 이해가 크게 틀린 것이 아니라면, 이 작가 J.M. 쿳시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 아닐까 싶네요.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라."(p278) 

 

 

 

 




 

※ "영화배우 김혜수가 읽고 있는 책!"같은 싸구려 선전 문구는 이젠  쪼옴!!!

 

※ 피지배 계층, 아프리카인의 입장에서 쓰여진 흑과 백 :  응구기 와 시옹오 作, 「울지마, 아이야

※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 크누트 함순(1920) : 「굶주림」 

- 펄 벅(1938) : 「대지

- 헤밍 웨이(1954) : 노인과 바다

- 알베르 카뮈 (1957) : 이방인」 · 「페스트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 먼 자들의 도시· 죽음의 중지」 · 도플갱어」 · 예수복음」 · 「카인

- 헤르타 뮐러 (2009) : 「숨그네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1. 주제 사라마구 作, 정영목 譯, 「죽음의 중지」, 해냄 刊, 2009. <옮긴이의 말>중.
  2. 딱히 다른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매춘부'라 표현했습니다만, 소설 속 등장인물은 몸을 파는 직업여성은 아닌, 가정까지 가지고 있는, 일종의 part-timer이라 할 수 있는 여성입니다.
  3. "학생들 중 하나한테 빠지지 않고 학기가 지나가는 때는 거의 없으니까, 그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p22)
  4. 소~올직히 말해, 젊은 시절 한 번쯤 써봤으면 어땠었을까?란 생각이 들긴 하더군요.
  5. 이 문장에 대해서는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루리 교수는 예전에 살았던 집의 옆집에 수캐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수캐는 암캐 냄새만 맡으면 미쳐 날뛰었고, 수캐의 주인은 그럴 때마다 그 개를 무지막지하게 때렸다고 합니다. 그 결과 이후 그 수캐는 암캐 냄새를 맡게 되면 "귀를 납작하게 하고 꼬리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정원 주위를 내달리곤"(p136)하게 되었답니다. 이 상황을 가리켜 루리 교수는 "천박한 어떤 것"(p136)이 있었따라 표현하며 다음과 같이 그 '천박함'을 설명하지요. --- "그 광경이 천박했던 것은 그 불쌍한 개가 자기 본질을 증오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개는 더 이상 때릴 필요가 없었어. 스스로를 벌할 준비가 돼 있었던 거지. 총으로 쏴 죽이는 것이 더 나았을 거야. … 그 개는 마음 속 깊이, 총에 맞아 죽는 걸 선호했을지 모른다. 본능을 거부당하는 쪽과 거실 주위를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다가 한숨을 쉬고 고양이 냄새나 맡으며 살이 피둥피둥 쪄가는 쪽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개는 총에 맞아 죽는 걸 택했을 거란 말이다."(p136)
  6. 따라서 아래 부분은 객관적인 감상이 될 수 없습니다.
  7. 루리 교수의 '버림받음'은 두 번의 이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자유로운 섹스와 (어쩌면 그러한 섹스를 가능케 해주었던 배경인) 교수라는 사회적 위치로부터의 '버림받음'을 의미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8. "추락했다? 그래, 추락이 있었다."(p253) --- 이 작품의 역자가 원제 <Disgrace>를 굳이 <추락>으로 옮겼던 근거가 되는 문장이라 생각됩니다. 어쨌든, 저로선 '추락'이란 한국어 제목은 이 작품의 결말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라 생각되네요.
  9. 니시 가나코 作, 「사라바」 2권 p276, 은행나무 刊, 2016.
  10. 니시 가나코 作, 「사라바」 2권 p239, 은행나무 刊, 2016
  11. (교내 위원회가 해결방안으로 제안했던 "재교육, 성격 개조, 완곡한 말로 카운슬링"에 대해) "그것은 나한테는 모택동 시절의 중국에서 있었던 것과 비슷한 것 같더라. 자기주장의 철회, 자아비판, 공개적인 사과. 나는 구세대라고, 차라리 벽에 세워져 총살을 당하는 게 낫다. 그렇게 끝났다."(p101)
  12. ​"처녀를 강간하는 것보다 더 나쁘고 더 충격적인 레즈비언의 강간"(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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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민음사 모던 클래식 60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원숙한 문명은 그 중심지보다 변두리에서 더 사랑받는다. 영국에서 교육받은 인도인보다 더 영국적인 사람이 있는가?"

- 복거일 作, 「비명을 찾아서」 상권 중 p54, 문학과 지성사 刊, 1987.  

………………………………………………………………………………

파키스탄에서 태어나 미국 프린스턴 대학을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했고, 모두의 선망인 언더우드샘슨이란 회사에 입사한 주인공 찬게즈. 심지어 "정말로 마음이 끌리는 여자"(p30)인 에리카까지 알게 된 그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나의 새로운 삶이 나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모험들을 생각하니 그보다 더 짜릿할 수가 없었어요.(p30) …… 나는 그곳이 파키스탄과는 다른 세계라는 걸 깨달았어요. 내 발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기술적으로 가장 진보한 인류 문명의 성취였어요.(p34) …… 나는 뉴욕에 발을 디딘 젊은 뉴요커였어요. … 내 세계는 변하고 있었어요.(pp43-44)

젊음과 실력을 모두 갖춘 찬게즈의 시선은, 이처럼 뉴요커의 그것으로 변해있었고, 이는 결국 --- "조선인들이 내지인들보다 못한 것은 사실이다. 내가 조선인이라고 해서 그런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는 않다."1라는 기노시다 히데요의 고백과 다르지 않은, 다음과 같은 스스로의 시선을 자인(自認)하게 만들지요.

  

​"뉴욕이 라호르보다 더 부유한 것을 받아들이는 건 그래도 괜찮았지만, 마닐라도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힘들었어요. 나는 내가 장거리 선수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깨 너머로 흘깃 보고, 자기보다 앞서 가는 친구가 선두가 아니라 뒤처진 이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진 자신이 그다지 형편없지 않다고 생각하는 장거리 선수 말이죠."(p60) 

스스로를 뉴요커라 말하는 찬게즈였지만, 자신이 미국의 진정한 일원이 되고 싶다란 욕망을 가지고 있었던 그였지만 그는 예의, 그렇게는 될 수 없는, 이 현실은 단지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p63)만을 주는 것임을 알게 되지요. 그러던 중, Boom!!! --- "영화가 아닌 뉴스"였던 9.11 테러가 벌어졌거늘, 이에 대한 찬게즈의 첫 반응은 "놀랍게도 즐거움"(p67)이었었으며 그 이유를 찬게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나는 그 모든 것의 상징성에 빠져들었던 거죠. 누군가가 그렇게 가시적으로 미국의 무릎을 꿇렸다는 사실에 그랬던 거죠."(p67)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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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들은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변함없이 불운한 가난뱅이들한테 일어나지, 일 년에 8만 달러를 버는 프린스턴 졸업생들한테는 일어날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죠."(p86) …… "적어도 나는 주변 세계가 허물어지는 것과 곧 닥칠 내 아메리칸 드림의 파멸 사이에 명백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는 건 믿고 싶었죠."(p85)

이슬람권(圈)에 대한 미국, 그리고 미국인들의 증오와 혐오가 뉴요커, 그것도 "프린스턴 학위와 언더우드샘슨 비즈니스 카드"(p78)를 소유하고 있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지요.  

………………………………………………………………………………

소설은 찬게즈라는 파키스탄인이 익명의 미국인한테 일방적으로 얘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대단히 상징적이고 의도적인 몸짓처럼 보인다. 작가는 세계의 독자들을 향해 9·11과 관련하여 미국을 포함한 서구 쪽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실컷 들었으니, 이제는 제3세계에서 그걸 어떻게 보느냐를 들어 볼 때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 파키스탄을 포함한 이슬람권은 일종의 담론 전쟁에서 미국을 포함한 서구에 늘 밀렸고 지금도 그러한 게 엄연한 사실이니까, 더 쉽게 말하면 서구의 목소리가 늘 제3세계의 목소리를 압도하는 게 현실이니까,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그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다른 목소리로 말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작가는 얘기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p165)

이 작품에 대한 위와 같은 옮긴이의 의견을 일견 탁월한 독해(讀解)로 받아들일 수도, 그리하여 이 작품에 '서구'가 그토록 열광하여, 수많은 각종 상(prize)들로 반응했던 게 아닐까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만!

이처럼 (이슬람권을) 이해하지 못하는 서구로부터 그 이해하지 못함을 이해받지도 못하며 지금/여기까지 왔지만, 이제부터라도 부디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라는 ('영국에서 교육받은 인도인'과도 같은) 작가의 바람(願)으로 이 작품을 받아들이기엔, (이 작품의 주제 자체와는 큰 관계는 없으나, 스토리의 유연함을 위해 삽입된 듯한 설정인)'에리카의 자살'이라는 점이 제겐 못내 적잖은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헤어나올 수 없는 것으로부터는 결코/결국 헤어나올 수 없다'라는 것으로 밖엔 달리 해석되어지지 않는 그녀의 자살과 "한쪽에서 자연스러운 것이 다른 쪽에서는 부자연스러울 수 있는 것 같아요. 어떤 개념들은 다른 쪽으로 가면 쉽게 설명이 안 되니까요."(pp113-114)라는 주인공 찬게즈의 말을 한데 엮노라면,

"당신네들은 근본주의 때문에 심각한 문제를 겪잖아요."(p52) - 에리카의 아버지가 찬게즈에게 한 말.

"근본적인 것에 집중하라. 이것이 근무 첫날부터 우리한테 반복하여 주입된 언더우드샘슨의 기본 원칙이었어요."(p89) - 찬게즈의 말.

실제론 미국에서 더 넓게/강하게 작동되고 있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 - “자기 자신의 신념이나 근거가 합리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울 때조차도 그러한 신념이나 근거를 정치적 주장으로 자리매김하려는 특이한 사고방식이나 고집스러운 태도”2라는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정의(定義)를 따른다면, 국제정치에서 보여지는 미국의 행동/선택은 정확히 그에 걸맞는 실례(實例)이지요. - 이거늘, 미국은 이슬람권을 가리켜 '(문제적) 근본주의'라 지칭하는 모순적인 현실이, 그리하여 양자는 서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는/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저에겐 실제 그러한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1. 이 작품의 제목에 사용된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는 ① ~③중 ②의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이 책을 읽기 전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게다가 작품 속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①의 의미가 사전(事典)적으로는 제일 일반적이겠지만, 넓게 보자면 ③의 의미까지도 확장되어질 수 있겠지만! --- "나도 전에는 일에만 집중하라는 회사의 충고에서 위안을 얻었죠. 하지만 이제는 … 자신의 현재 가정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개인적, 정치적 문제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던 거죠. 달리 말해, 내 블라인드가 걷히고 있었던 거예요."(p129)라는 주인공의 고백은 이 작품의 제목 속 '근본주의자'를 ②의 의미를 가장 온전하게 보여주고 있다라 생각됩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2. 'reluctant'를 '주저하는'으로 간단하게 번역해 버린 것엔 아무래도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딱히 특정한 단어가 떠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히 저의 의견만을 말하자면 '뭔가 하기는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했어야했던'쯤이 아닐까 싶네요. (설마, '주저하는'의 뜻이 이런 건 아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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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are there lights on their home and  not on ours?"  --- "When you’re at another birthday party you don’t open up presents. It’s not our birthday."

(제가 학생이었던) 지금으로부터 무려 19년 전, 유명 작가의 작품도 아닌, 그저 대학의 학보에 실려 있었던  다음 기사3에 나오는 위의 두 문장이야말로 '이해받지 못하며 살아가는, 하지만 이해받기를 바라는 이들'의 마음을 (이 작품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보다) 훨씬 더 강하게, 더욱 절실하게 표현해주고 있지 않나라 생각합니다. 또한 그러했기에 --- 이 작품 「주저하는 근본주의자」가 저에겐 그다지 인상깊게 읽혀지진 않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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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었던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4 속 '수용소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는 삶'이란 것이 결국엔 --- 이 작품 속 인물인 첸가즈에게, 그리고 에리카에게도 그들의 최종 선택을 추려낸 단 하나의 원인이었다라 생각하기에, 그리하여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주제를 다음의 문장으로 표현해도 좋지않을까 싶네요. ​저에게도 어쩌면, 예의 당신에게도 어쩌면...

 

   
 

굳이 수용소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수용소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는 삶 역시 도처에 있다. 

 

 


 

 

 


※ 어딘가, 이 작품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라 생각되는 작품 : 복거일 作 「비명을 찾아서

 

 

 

  1. ​복거일 作, 「비명을 찾아서」 상권 중 p45. 문학과 지성사 刊, 1987.
  2. 네이버 검색.
  3. <Daily Brain>에서는 더 이상 이 기사가 검색되지 않더군요. 하지만, 우리에겐 구글이 있기에! ^^
  4. p341, 문학동네 刊,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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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그/그녀/그들이 부른 노래의 멜로디가 좋아서 그 가수를 좋아하기도, 때론 노랫말로부터 헤어날 수 없어 그 가수를 좋아하기도, 어쩌면 목소리가 좋아 그 가수를 좋아하기도, 아님 그냥 예뻐서, 춤을 잘춰서 … 그 가수를 좋아하기도 --- 그 어떤 이유였건 일단 '좋아해'하게 된 가수가 마음 속에 자리잡고나면 이후부턴, '그 가수가 부른 노래'이기 때문에! 그/그녀/그들의 노래들을 좋아하게 되기도 합니다. 원인이 결과를 만들어 내었고, 결국엔 결과가 이내 원인이 되어버린 거죠. 책을 읽는다,라는 것에도 역시나!




각자의 취향이, 선호가 존재하며, 그 취향이나 선호가 작품에 대한 기대/만족/해석 자체를 애초부터 아예! 결정해버리는 경우가 있다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주제 사라마구가 쓴 작품이 새로이 번역되어 나왔다, 류전윈의 새 작품이 나왔다,라면 언제 읽게될 것인가에 대한 고려가 채 생겨나기도 전에 이미 그 책은 제 앞에 이미 놓여있게되듯 말이죠. --- 스토리가 재미있어서, 웃겨서, 교훈 이빠이!어서 등등등 특정 작품에 대한 만족도는 참으로 여러 가지의 원인을 지니고 있으며, 각 작품에 대한 독후감은 당연히 그 특정 원인을 중심으로 써지게 됩니다만! '그냥 그 서술이, 그리고 묘사가 좋아서'란 이유만큼 개인적인, 그러하기에 타인에게 나의 만족감 그대로를 설명해낼 수 없는 작품을 읽고 쓰는 독후감은 예의, 개인적이고 그러하기에 타인은 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글이 되어버리곤 합니다.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이 그러했었듯, 이 작품 「숨그네」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싶네요.

………………………………………………………………………


​"어릴 때 복숭아를 먹다가 떨어뜨린 적이 있어. 다시 주워서 모래가 묻은 자리를 먹어보고는 또 떨어뜨렸지. 씨만 남을 때까지 계속 그랬어.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어. 모래를 맛있어 하니까 정상이 아니라고. 지금은 모래가 이렇게 많은데, 복숭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이 안 나."(p146)

p334로 끝나는 소설의 중간이 넘는 p219에 가서야 처음으로 주인공의 이름, '레오폴트 아우베르크'가 등장합니다. 이 작품은 이처럼 결코! 친절한 소설은 아니지요. 유럽에 역사에 대해 소위 말하는 '전문가급'의 지식이 없다면, 이 소설의 배경을 시작부터 딱! 알아채기도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 특별한 줄거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열일곱 살의 소년 레오폴트 아우베르크가 수용소에서 보냈던 5년에 대한 일상의 기록이 전부이니까요. 그런데 말이죠!


"지금은 모래가 이렇게 많은데, 복숭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이 안 나."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눈물이 (정말로!) 왈칵 솟아올랐더랬습니다. 크누트 함순이 써내었던 "그때는 산다는 것이 멋있었는데"1란 문장을 헤르트 뮐러는 이렇게 표현하여 써내었고, 이건 또 다시 제게


​"모든 독자는 자신의 일상적인 경험과 상상력에 기초해 문학작품을 읽는다. …… (또한) 모든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자기가 일상에서 느껴온 것들을 찾고 싶어 한다. …… 만약 이 작품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분명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깨웠기 때문일 것이다."

- 「허삼관 매혈기」 한국어판 개정판 서문 중 작가 위화의 말

를 다시 한 번, 실감하게 해주었지요. 수용소라는 곳에 수감된 적도 없으며, 수용소라는 것에 아예 가본 경험조차 없는 저에게, 수용소에서의 5년을 써낸 이 작품이, "지금은 모래가 이렇게 많은데, 복숭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이 안 나."란 단 하나의 문장을 통해 '저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깨워주었으며, 마찬가지로 저와 다른 당신은 다른 문장, 다른 구절에서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깨워 느껴볼 수 있을 여지를 지니고 있다라는 점이 바로! '그리하여 이것이 바로 문학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라 생각할 수 밖에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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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p10) …… 나는 가족들한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것이 수용소행을 뜻한다 해도.(p13)"   

주인공이 열일곱 살의 동성애자라는 걸 몰라도, 대체 그가 왜 수용소르 가야했는가에 관심 없다해도 --- 어느 순간 주인공 스스로 "내게는 수용소가 집이다. 오전에 있던 보초가 나를 알아보고 정문으로 돌아오라고 손짓했다. 따뜻한 보도블럭에 엎드린 파수견도 나를 안다. 점호 장소도 나를 안다. 나는 눈을 감고도 막사로 가는 길을 찾는다. … 내게는 수용소가 있고, 수용소에는 내가 있다."(p161)라 고백하게 되는, 그러다 결국엔!


​"집이 있는 바깥세상의 소식을 오래도록 듣지 못하면 집으로 가고 싶기는 한지, 그곳에서 내가 원하는 것이 뭔자 자문하게 된다. 수용소는 마음속의 소망을 박탈했다. …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기억이 그 바람(願)을 뒤로 밀어두었다. 감히 그리움을 앞세울 수 없었다. 기억이 이미 그리움이라고 믿었다. 머릿속에 항상 똑같은 장면이 돌아가고 세상과의 격리가 익숙해지면 그리운 것은 기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p290)

​이라 고백하게만 되는 과정을, 그 과정들을 담고 있는 문장 하나하나들을 읽어가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독자에게 선사해주는 즐거움이라 믿습니다. 거기에 더해! --- 역시나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작가 크누트 함순이 「굶주림」에서 써내었던 다음의 문장과,


"배고픔이 내 신경계를 물어뜯기 시작했다.(p90) …… 잔인하도록 배가 고팠다. 죽어서 없어져 버렸으면 싶었다.(p96)"

헤르트 뮐러가 써내고 있는 "추위가 살을 에고, 배고픔이 기만하고, 피곤함이 짓누르고, 향수가 먹어치우고, 이와 빈대가 문다. … 나는 몸 없이 존재하고 싶었다."(p278)과 비교하여 읽는 찌릿함을, 그러나 예의 그 정반대의 감정 역시 아래에서와 같이 존재하고 있음을,


"사람들은 점점 맥이 빠지고 숨소리만 거칠어진다. 이 모든 것은 양배춧국 한 대접을 얻기 위해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지급되어야 할 한 그릇의 양배춧국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 슈호프는 미리 봐둔, 건더기가 좀더 들어 있는 국 두 그릇이 자기 자리에 올 수 있도록 방향을 잘 조정해서 쟁반을 내려놓는다." 

역시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서 보여졌던 위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헤르트 뮐러 역시


"우리는 수용소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시체를 치우는 법을 배웠다. 사후경직이 시작되기 전에 죽은 이들의 옷을 벗긴다. 얼어 죽지 않으려면 그들의 옷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이 아껴둔 빵을 먹는다. 그들이 마지막 숨을 거두면 죽음은 우리에게는 횡재다.(p136) …… 그렇게 말끔히 정리하는 것이 우리가 애도하는 방식이다. …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감정과는 다르다. 죽은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줄어들수록 삶에 더 악착같이 매달리게 되는 듯하다.(p168)"

로 그려내고 있다라는 점, 그리하여!!! --- 작가 한강이 자신의 작품 「소년이 온다」에서 묻고 있는 다음의 질문,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고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슴,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2

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보게 해주는, 그리하여 이 작품들을 읽고 써내었던 독후감 모두를 정독하게 하고, 언젠가는 초면이 아닌 구면으로 그들을 다시금 만나야겠다란 다짐어린 바람(願)을 가지게 해준 '그리하여 이것이 바로 문학임'을 절절히 느껴보게 된, "잔잔한 흥분"을 느껴가며 읽었던 작품이었었습니다.


'개인적이고 그러하기에 타인은 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글'이 되어버릴지 모르겠다,란 애초의 염려/기대는 정확!히 그러하며, 그러하기에 어수선해진 독후감을 만들어내었네요. 제가 쓴 이 짜집기스런 독후감은 감히 담아내지 못했을, 저와 다른 '당신만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기대해봅니다.  


※ 당연히! 함께 읽어보길 권하여 보는 작품들 :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프리모 레비 著, 「이것이 인간인가

- 한강 作, 「소년이 온다

- 크누트 함순 作, 「굶주림」 

※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 크누트 함순(1920) : 「굶주림」 

- 펄 벅(1938) : 「대지

- 헤밍 웨이(1954) : 노인과 바다

- 알베르 카뮈 (1957) : 이방인」 · 「페스트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 먼 자들의 도시· 죽음의 중지」 · 도플갱어」 · 예수복음」 · 「카인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지금 이 블로그에 와있는 당신에게도 여하한 구실로라도 '나를 아는' 이란 형용사를 붙여 꼭 한번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은 책들의 제목 앞에 ★표시를 붙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시이겠지만 가끔은... 타인의 주관을 한번쯤 믿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

 



 

  1. 크누트 함순 作, 「굶주림」 중 p182. 창 刊, 2011.
  2. 한강 作, 「소년이 온다」중 p134. 창비 刊,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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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품격 - 조선의 문장가에게 배우는 치밀하고 섬세하게 일상을 쓰는 법
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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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등장시킨/하는 '허균, 이용휴,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이옥, 그리고 정약용' 등 일곱 명의 조선 문장가들을 가리켜 저자 안대회는 (어딘가 모르게, 격 떨어져 보인다싶은 표현인) "지금의 파워블로거에 비유할 수 있다"(P6)라 비유하며, "형식적으로는 짧은 길이의 글에 개별적이고 작은 가치, 현실 세계의 구체적 진실을 생생한 언어로 표현했"(P6)기 때문이라 그 이유를 적고 있습니다. 여기에 (아마도) 출판사가 더해놓은듯한 문장인 "조선의 문장가에게 배우는 치밀하고 섬세하게 일상을 쓰는 법"이 책의 제목인 「문장의 품격」을 한껏 치장하고 있지요. 하지만! 

이 책은 결코 '쓰는 법(how to)'에 관한 무엇을 말하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무엇을(what)' 써야하는 지에 관해 이야기해주고 있는 책은 더더욱 아니지요. 이 책 속 문장가들에게 글쓰기란 그저 "먹 형님, 붓 동생과 함께 말없이 수작을 나누는 일"(p255)이었을 뿐이며, 그들이 글로 표현해 낸 수작이란 것 역시 즉흥적으로 떠오른 문장들이 아닌, "하루가 쌓여 열흘이 되고 한 달이 되고 한 계절이 되고 한 해가"(p73)되듯, "하루하루 행동을 닦은 뒤에야 크게 바뀐 사람에 이르"(p73)른 자연스러운 결과물들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하루하루 행동을 닦은' 방식이란 게 무려!

 "《서경(書經)》은 겨우 사백 번을 읽었고, 《시경(詩經)》은 백 독(讀)을 했는데 … 《주역》은 삼십 독을 했고, 공자·맹자·증자·자사가 지은 《사서(四書)》는 그보다 이십 독을 더했다. 내 성품이 <離騷>를 가장 사랑하여 입에서 읽기를 그만둔 적이 없었으나 그조차도 천 독을 채우지 못했다. … 눈으로 섭렵한 책을 … 통계를 내보면, 서책이 수레 한 대를 채우지 못할뿐더러 … (pp248-249)

​25세의 이옥이 겸손하게 이 정도라 표현했으니, 그런 분들 일곱의 몇몇 글들을 모아놓은 이 책을 읽는다하여 '치밀하고 섬세하게 일상을 쓰는 법'이 즉각적으로 깨우쳐질 꺼란 기대는 당췌, 애초부터 말이 되지 않는 바람(願)일 뿐인 거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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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온 것을 알려주는 학이 없어서1 문설주에 봉자(鳳字, 凡鳥)를 써놓고 가시게 하다니!2 유감입니다. 송구하고 송구합니다. 이후로는 달이 환한 밤에는 절대로 외출하지 않으렵니다."(PP123-124)​

벗 홍대용이 자신이 출타 중에 자신의 집에 찾아왔었다는 걸 알고, 박지원이 홍대용에게 써보낸 사과(謝過)의 편지 중 일부입니다. 이게 --- 사과의 표현을 이토록 멋지게 할 수 있다라는 건 바로! 그의 일생이 '하루가 쌓여 열흘이 되고 한 달이 되고 한 계절이 되고 한 해'가 되듯 이루어져 왔었었기에, 그 과정 속에서 체화(體化)된 지식과 품격이 자연스레 발현되었기 때문일 테고, 상대방 역시 이 편지를 받아 읽고 본 뜻을 이해할 수 있을만큼의 같은 지식과 품격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대화였었던 것이겠지요. 그러하기에,

삐삐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의 연애사(史)엔 급작한 이유로 그 시각, 그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여/남자친구를 그야말로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던 일도 적잖게 들어 있으며, 그로 인해 헤어졌던 경우마저 다반사였었던 저의 세대조차, '사과의 편지'란 걸 써본 기억이 딱히 부재하거늘 --- 말대신 문자로 대화하는 요즘의 청춘들은, 그리하여 ('미안'이란 두 글자도 아닌) "먄~"이란 한 글자에 자신의 온전한 감정을 담아 보내(었다라 생각하)는 요즘의 청춘들이, 그리고 그들과 한 시대를 공유하는 (어느덧 --;;) 40대 후반의 저 역시!

과연 이 책 한 번 읽는다 하여, "글을 짓기 위해 갉아벅은 자기 정신에게 사죄하는 의미로 제(祭)"(p253)까지 올렸던 선조들이 써내었던 것 같은 '품격 깃든 문장'을 써낼 수 없음이란 너무도 허황된 바람(願)임을 잘 알고 있습/있어야 합니다. 그저 단지!!! --- 아름다운 내용을 지닌, 거기에 더해 정녕 '품격깃든 문장'이 무엇이며, 어떠하여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이 멋진 글들을 읽어볼 수 있었음이란 즐거운 경험을 통해, 그들의 여유로웠던 일상을 부러워하고, 그들의 부단했던 노력을 우러러보는, 또한 잊지않아야하겠는, 신분제로부터의 억압에 아파했던 그들의 아픈 가슴에 조금이나마 공감하여 보는 것만이, 지금의 우리가, 이 책을 읽고 표현해낼 수 있는 그 전부가 아닐까 어림하여 볼 뿐.

……………………………………………………………………

   

"​(銘)에 말한다. 여름 이후로는 점차 음(陰)에 이르고, 오시(午時) 이후로는 점차 저녁에 속하며, 중년 이후로는 점차 죽음에 속하는 법. 연객이 이를 알아 미리 준비를 하는구나. 내 연객에게 고하니, 달관한 듯 달관하지 못하여, 아직도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가 자네의 나이요, 아름다운 산 아름다운 물이 그대의 거쳐요, 빠지지 않은 치아와 머리털이 그대의 권속(眷屬)이요, 애환(哀歡)과 행불행(幸不幸)이 그대의 이력이라. 이용휴가 명을 짓고 강세황(姜世晃)이 글씨를 썼으니 이것이 죽지 않은 자네일세."(pp76-77)

이용휴의 벗인 연객(煙客)3이 그의 나이 쉰 셋에, 자신의 묘비에 적혀질 글을 미리! 이용휴에게 부탁하였고, 이에 이용휴가 흔쾌히 써내어 준 생지명(生誌銘)4입니다. 멋있죠, 저에겐 너무나 멋있게 그리고 한없는 부러움으로 읽혔더랬습니다. 허나 이는 분명!

"다른 글쓰기는 다른 삶을 만든다"라는, 단언컨데! 출판사의 오류일 수 밖에 없는 문구가 아닌 "다른 삶이었기에 그들은 다른 글쓰기를 해내었노라"가 되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면, --- 한문으로 되어 있는 구절들을 한글로 옮긴 것은 분명 이 책의 저자 안대희 교수이기에, 이 책이 '문장 자체의 품격'을 논할 수 있다라기 보다는, '글의 내용'이 만들어 낸, 그리하여 그것이 후대 한문학자의 손에 의해 현재의 언어로 변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추어지지 않아 발(發)하여질 수 밖에 없는, 선조들의 '인간적 품격'이, 또한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품격'이야말로 진정 우리가 느끼고, 부러워하고, 배워야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위에 인용한 이용휴(李用休)의 글 이외에도, 박제가(朴齊家)가 쓴 글인 <궁핍한 날의 벗>5<광인의 인생, 장인의 인생>6역시 예의, '문장의 품격'을 뛰어넘는, '인간적 품격'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글들이라 생각합니다. 무튼! --- 글재주(라는 하나의 기술)보다는 사람됨(이란 본질)이 더 중요!함을 깨닫는 좋은 기회였었었네요.

※ 역시나 멋진 선조의 옛 문장들을 만나볼 수 있는, 아련하고 아늑한 느낌의 책 : 안소영 著, 「책만 보는 바보」, 보림출판사 刊, 2005.

 

 

 

  1. "송나라의 임포는 학을 자식처럼 길렀는데, 그 학은 손님이 찾아오면 임포에게 알렸다고 한다."(P123, 각주 11)
  2. "중국의 삼국시대 여안은 혜강과 친하여, 보고 싶을 때마다 천 리 길을 멀다않고 찾아갔다. 어으 날 여안이 혜강을 찾아갓을 때 혜강을 출타하고 그의 형 혜희가 문을 나와 반갑게 맞이했다. 여안은 집에는 들어가지 않고 문설주에 '봉(鳳)'자를 써놓고 그냥 돌아갔다. 혜희는 자신을 봉황이라 여겼다고 좋아했으나, 혜강이 돌아와서 '범조(凡鳥)' 곧 '평범한 새'를 합자(合字)한 것으로 읽었다. 여안이 '너 같은 평범한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써놓은 것이다. 여기서는 사람을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상황을 비유했다."(P123, 각주 12)
  3. ​"허필은 독특한 예술가였다. 담배를 너무 좋아하여 호를 연객(煙客)이라 했다."(p78)
  4. "생지명이란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묘지명이다. 망자를 위한 묘지명을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 쓴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일인데, 18세기 이후 작가들은 살아 있는 벗의 생지명을 서로 써주는 것을 풍류운사(風流韻事)로 생각했다."(p78)
  5. pp194-200.
  6. pp20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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