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그/그녀/그들이 부른 노래의 멜로디가 좋아서 그 가수를 좋아하기도, 때론 노랫말로부터 헤어날 수 없어 그 가수를 좋아하기도, 어쩌면 목소리가 좋아 그 가수를 좋아하기도, 아님 그냥 예뻐서, 춤을 잘춰서 … 그 가수를 좋아하기도 --- 그 어떤 이유였건 일단 '좋아해'하게 된 가수가 마음 속에 자리잡고나면 이후부턴, '그 가수가 부른 노래'이기 때문에! 그/그녀/그들의 노래들을 좋아하게 되기도 합니다. 원인이 결과를 만들어 내었고, 결국엔 결과가 이내 원인이 되어버린 거죠. 책을 읽는다,라는 것에도 역시나!




각자의 취향이, 선호가 존재하며, 그 취향이나 선호가 작품에 대한 기대/만족/해석 자체를 애초부터 아예! 결정해버리는 경우가 있다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주제 사라마구가 쓴 작품이 새로이 번역되어 나왔다, 류전윈의 새 작품이 나왔다,라면 언제 읽게될 것인가에 대한 고려가 채 생겨나기도 전에 이미 그 책은 제 앞에 이미 놓여있게되듯 말이죠. --- 스토리가 재미있어서, 웃겨서, 교훈 이빠이!어서 등등등 특정 작품에 대한 만족도는 참으로 여러 가지의 원인을 지니고 있으며, 각 작품에 대한 독후감은 당연히 그 특정 원인을 중심으로 써지게 됩니다만! '그냥 그 서술이, 그리고 묘사가 좋아서'란 이유만큼 개인적인, 그러하기에 타인에게 나의 만족감 그대로를 설명해낼 수 없는 작품을 읽고 쓰는 독후감은 예의, 개인적이고 그러하기에 타인은 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글이 되어버리곤 합니다.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이 그러했었듯, 이 작품 「숨그네」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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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복숭아를 먹다가 떨어뜨린 적이 있어. 다시 주워서 모래가 묻은 자리를 먹어보고는 또 떨어뜨렸지. 씨만 남을 때까지 계속 그랬어.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어. 모래를 맛있어 하니까 정상이 아니라고. 지금은 모래가 이렇게 많은데, 복숭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이 안 나."(p146)

p334로 끝나는 소설의 중간이 넘는 p219에 가서야 처음으로 주인공의 이름, '레오폴트 아우베르크'가 등장합니다. 이 작품은 이처럼 결코! 친절한 소설은 아니지요. 유럽에 역사에 대해 소위 말하는 '전문가급'의 지식이 없다면, 이 소설의 배경을 시작부터 딱! 알아채기도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 특별한 줄거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열일곱 살의 소년 레오폴트 아우베르크가 수용소에서 보냈던 5년에 대한 일상의 기록이 전부이니까요. 그런데 말이죠!


"지금은 모래가 이렇게 많은데, 복숭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이 안 나."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눈물이 (정말로!) 왈칵 솟아올랐더랬습니다. 크누트 함순이 써내었던 "그때는 산다는 것이 멋있었는데"1란 문장을 헤르트 뮐러는 이렇게 표현하여 써내었고, 이건 또 다시 제게


​"모든 독자는 자신의 일상적인 경험과 상상력에 기초해 문학작품을 읽는다. …… (또한) 모든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자기가 일상에서 느껴온 것들을 찾고 싶어 한다. …… 만약 이 작품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분명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깨웠기 때문일 것이다."

- 「허삼관 매혈기」 한국어판 개정판 서문 중 작가 위화의 말

를 다시 한 번, 실감하게 해주었지요. 수용소라는 곳에 수감된 적도 없으며, 수용소라는 것에 아예 가본 경험조차 없는 저에게, 수용소에서의 5년을 써낸 이 작품이, "지금은 모래가 이렇게 많은데, 복숭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이 안 나."란 단 하나의 문장을 통해 '저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깨워주었으며, 마찬가지로 저와 다른 당신은 다른 문장, 다른 구절에서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깨워 느껴볼 수 있을 여지를 지니고 있다라는 점이 바로! '그리하여 이것이 바로 문학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라 생각할 수 밖에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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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p10) …… 나는 가족들한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것이 수용소행을 뜻한다 해도.(p13)"   

주인공이 열일곱 살의 동성애자라는 걸 몰라도, 대체 그가 왜 수용소르 가야했는가에 관심 없다해도 --- 어느 순간 주인공 스스로 "내게는 수용소가 집이다. 오전에 있던 보초가 나를 알아보고 정문으로 돌아오라고 손짓했다. 따뜻한 보도블럭에 엎드린 파수견도 나를 안다. 점호 장소도 나를 안다. 나는 눈을 감고도 막사로 가는 길을 찾는다. … 내게는 수용소가 있고, 수용소에는 내가 있다."(p161)라 고백하게 되는, 그러다 결국엔!


​"집이 있는 바깥세상의 소식을 오래도록 듣지 못하면 집으로 가고 싶기는 한지, 그곳에서 내가 원하는 것이 뭔자 자문하게 된다. 수용소는 마음속의 소망을 박탈했다. …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기억이 그 바람(願)을 뒤로 밀어두었다. 감히 그리움을 앞세울 수 없었다. 기억이 이미 그리움이라고 믿었다. 머릿속에 항상 똑같은 장면이 돌아가고 세상과의 격리가 익숙해지면 그리운 것은 기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p290)

​이라 고백하게만 되는 과정을, 그 과정들을 담고 있는 문장 하나하나들을 읽어가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독자에게 선사해주는 즐거움이라 믿습니다. 거기에 더해! --- 역시나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작가 크누트 함순이 「굶주림」에서 써내었던 다음의 문장과,


"배고픔이 내 신경계를 물어뜯기 시작했다.(p90) …… 잔인하도록 배가 고팠다. 죽어서 없어져 버렸으면 싶었다.(p96)"

헤르트 뮐러가 써내고 있는 "추위가 살을 에고, 배고픔이 기만하고, 피곤함이 짓누르고, 향수가 먹어치우고, 이와 빈대가 문다. … 나는 몸 없이 존재하고 싶었다."(p278)과 비교하여 읽는 찌릿함을, 그러나 예의 그 정반대의 감정 역시 아래에서와 같이 존재하고 있음을,


"사람들은 점점 맥이 빠지고 숨소리만 거칠어진다. 이 모든 것은 양배춧국 한 대접을 얻기 위해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지급되어야 할 한 그릇의 양배춧국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 슈호프는 미리 봐둔, 건더기가 좀더 들어 있는 국 두 그릇이 자기 자리에 올 수 있도록 방향을 잘 조정해서 쟁반을 내려놓는다." 

역시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서 보여졌던 위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헤르트 뮐러 역시


"우리는 수용소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시체를 치우는 법을 배웠다. 사후경직이 시작되기 전에 죽은 이들의 옷을 벗긴다. 얼어 죽지 않으려면 그들의 옷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이 아껴둔 빵을 먹는다. 그들이 마지막 숨을 거두면 죽음은 우리에게는 횡재다.(p136) …… 그렇게 말끔히 정리하는 것이 우리가 애도하는 방식이다. …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감정과는 다르다. 죽은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줄어들수록 삶에 더 악착같이 매달리게 되는 듯하다.(p168)"

로 그려내고 있다라는 점, 그리하여!!! --- 작가 한강이 자신의 작품 「소년이 온다」에서 묻고 있는 다음의 질문,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고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슴,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2

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보게 해주는, 그리하여 이 작품들을 읽고 써내었던 독후감 모두를 정독하게 하고, 언젠가는 초면이 아닌 구면으로 그들을 다시금 만나야겠다란 다짐어린 바람(願)을 가지게 해준 '그리하여 이것이 바로 문학임'을 절절히 느껴보게 된, "잔잔한 흥분"을 느껴가며 읽었던 작품이었었습니다.


'개인적이고 그러하기에 타인은 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글'이 되어버릴지 모르겠다,란 애초의 염려/기대는 정확!히 그러하며, 그러하기에 어수선해진 독후감을 만들어내었네요. 제가 쓴 이 짜집기스런 독후감은 감히 담아내지 못했을, 저와 다른 '당신만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기대해봅니다.  


※ 당연히! 함께 읽어보길 권하여 보는 작품들 :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프리모 레비 著, 「이것이 인간인가

- 한강 作, 「소년이 온다

- 크누트 함순 作, 「굶주림」 

※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 크누트 함순(1920) : 「굶주림」 

- 펄 벅(1938) : 「대지

- 헤밍 웨이(1954) : 노인과 바다

- 알베르 카뮈 (1957) : 이방인」 · 「페스트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 먼 자들의 도시· 죽음의 중지」 · 도플갱어」 · 예수복음」 · 「카인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지금 이 블로그에 와있는 당신에게도 여하한 구실로라도 '나를 아는' 이란 형용사를 붙여 꼭 한번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은 책들의 제목 앞에 ★표시를 붙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시이겠지만 가끔은... 타인의 주관을 한번쯤 믿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

 



 

  1. 크누트 함순 作, 「굶주림」 중 p182. 창 刊, 2011.
  2. 한강 作, 「소년이 온다」중 p134. 창비 刊,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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