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60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원숙한 문명은 그 중심지보다 변두리에서 더 사랑받는다. 영국에서 교육받은 인도인보다 더 영국적인 사람이 있는가?"
- 복거일 作, 「비명을 찾아서」 상권 중 p54, 문학과 지성사 刊, 1987.
………………………………………………………………………………
파키스탄에서 태어나 미국 프린스턴 대학을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했고, 모두의 선망인 언더우드샘슨이란 회사에 입사한 주인공 찬게즈. 심지어 "정말로 마음이 끌리는 여자"(p30)인 에리카까지 알게 된 그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나의 새로운 삶이 나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모험들을 생각하니 그보다 더 짜릿할 수가 없었어요.(p30) …… 나는 그곳이 파키스탄과는 다른 세계라는 걸 깨달았어요. 내 발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기술적으로 가장 진보한 인류 문명의 성취였어요.(p34) …… 나는 뉴욕에 발을 디딘 젊은 뉴요커였어요. … 내 세계는 변하고 있었어요.(pp43-44)
젊음과 실력을 모두 갖춘 찬게즈의 시선은, 이처럼 뉴요커의 그것으로 변해있었고, 이는 결국 --- "조선인들이 내지인들보다 못한 것은 사실이다. 내가 조선인이라고 해서 그런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는 않다."라는 기노시다 히데요의 고백과 다르지 않은, 다음과 같은 스스로의 시선을 자인(自認)하게 만들지요.
"뉴욕이 라호르보다 더 부유한 것을 받아들이는 건 그래도 괜찮았지만, 마닐라도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힘들었어요. 나는 내가 장거리 선수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깨 너머로 흘깃 보고, 자기보다 앞서 가는 친구가 선두가 아니라 뒤처진 이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진 자신이 그다지 형편없지 않다고 생각하는 장거리 선수 말이죠."(p60)
스스로를 뉴요커라 말하는 찬게즈였지만, 자신이 미국의 진정한 일원이 되고 싶다란 욕망을 가지고 있었던 그였지만 그는 예의, 그렇게는 될 수 없는, 이 현실은 단지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p63)만을 주는 것임을 알게 되지요. 그러던 중, Boom!!! --- "영화가 아닌 뉴스"였던 9.11 테러가 벌어졌거늘, 이에 대한 찬게즈의 첫 반응은 "놀랍게도 즐거움"(p67)이었었으며 그 이유를 찬게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나는 그 모든 것의 상징성에 빠져들었던 거죠. 누군가가 그렇게 가시적으로 미국의 무릎을 꿇렸다는 사실에 그랬던 거죠."(p67)
그럼에도 불구하고!
·
·
·
"그런 일들은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변함없이 불운한 가난뱅이들한테 일어나지, 일 년에 8만 달러를 버는 프린스턴 졸업생들한테는 일어날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죠."(p86) …… "적어도 나는 주변 세계가 허물어지는 것과 곧 닥칠 내 아메리칸 드림의 파멸 사이에 명백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는 건 믿고 싶었죠."(p85)
이슬람권(圈)에 대한 미국, 그리고 미국인들의 증오와 혐오가 뉴요커, 그것도 "프린스턴 학위와 언더우드샘슨 비즈니스 카드"(p78)를 소유하고 있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지요.
………………………………………………………………………………
이 소설은 찬게즈라는 파키스탄인이 익명의 미국인한테 일방적으로 얘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대단히 상징적이고 의도적인 몸짓처럼 보인다. 작가는 세계의 독자들을 향해 9·11과 관련하여 미국을 포함한 서구 쪽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실컷 들었으니, 이제는 제3세계에서 그걸 어떻게 보느냐를 들어 볼 때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 파키스탄을 포함한 이슬람권은 일종의 담론 전쟁에서 미국을 포함한 서구에 늘 밀렸고 지금도 그러한 게 엄연한 사실이니까, 더 쉽게 말하면 서구의 목소리가 늘 제3세계의 목소리를 압도하는 게 현실이니까,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그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다른 목소리로 말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작가는 얘기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p165)
이 작품에 대한 위와 같은 옮긴이의 의견을 일견 탁월한 독해(讀解)로 받아들일 수도, 그리하여 이 작품에 '서구'가 그토록 열광하여, 수많은 각종 상(prize)들로 반응했던 게 아닐까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만!
이처럼 (이슬람권을) 이해하지 못하는 서구로부터 그 이해하지 못함을 이해받지도 못하며 지금/여기까지 왔지만, 이제부터라도 부디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라는 ('영국에서 교육받은 인도인'과도 같은) 작가의 바람(願)으로 이 작품을 받아들이기엔, (이 작품의 주제 자체와는 큰 관계는 없으나, 스토리의 유연함을 위해 삽입된 듯한 설정인)'에리카의 자살'이라는 점이 제겐 못내 적잖은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헤어나올 수 없는 것으로부터는 결코/결국 헤어나올 수 없다'라는 것으로 밖엔 달리 해석되어지지 않는 그녀의 자살과 "한쪽에서 자연스러운 것이 다른 쪽에서는 부자연스러울 수 있는 것 같아요. 어떤 개념들은 다른 쪽으로 가면 쉽게 설명이 안 되니까요."(pp113-114)라는 주인공 찬게즈의 말을 한데 엮노라면,
① "당신네들은 근본주의 때문에 심각한 문제를 겪잖아요."(p52) - 에리카의 아버지가 찬게즈에게 한 말.
② "근본적인 것에 집중하라. 이것이 근무 첫날부터 우리한테 반복하여 주입된 언더우드샘슨의 기본 원칙이었어요."(p89) - 찬게즈의 말.
실제론 미국에서 더 넓게/강하게 작동되고 있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 - “자기 자신의 신념이나 근거가 합리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울 때조차도 그러한 신념이나 근거를 정치적 주장으로 자리매김하려는 특이한 사고방식이나 고집스러운 태도”라는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정의(定義)를 따른다면, 국제정치에서 보여지는 미국의 행동/선택은 정확히 그에 걸맞는 실례(實例)이지요. - 이거늘, 미국은 이슬람권을 가리켜 '(문제적) 근본주의'라 지칭하는 모순적인 현실이, 그리하여 양자는 서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는/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저에겐 실제 그러한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1. 이 작품의 제목에 사용된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는 ① ~③중 ②의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이 책을 읽기 전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게다가 작품 속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①의 의미가 사전(事典)적으로는 제일 일반적이겠지만, 넓게 보자면 ③의 의미까지도 확장되어질 수 있겠지만! --- "나도 전에는 일에만 집중하라는 회사의 충고에서 위안을 얻었죠. 하지만 이제는 … 자신의 현재 가정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개인적, 정치적 문제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던 거죠. 달리 말해, 내 블라인드가 걷히고 있었던 거예요."(p129)라는 주인공의 고백은 이 작품의 제목 속 '근본주의자'를 ②의 의미를 가장 온전하게 보여주고 있다라 생각됩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2. 'reluctant'를 '주저하는'으로 간단하게 번역해 버린 것엔 아무래도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딱히 특정한 단어가 떠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히 저의 의견만을 말하자면 '뭔가 하기는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했어야했던'쯤이 아닐까 싶네요. (설마, '주저하는'의 뜻이 이런 건 아니지요? --;;)
·
·
·
"Why are there lights on their home and not on ours?" --- "When you’re at another birthday party you don’t open up presents. It’s not our birthday."
(제가 학생이었던) 지금으로부터 무려 19년 전, 유명 작가의 작품도 아닌, 그저 대학의 학보에 실려 있었던 다음 기사에 나오는 위의 두 문장이야말로 '이해받지 못하며 살아가는, 하지만 이해받기를 바라는 이들'의 마음을 (이 작품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보다) 훨씬 더 강하게, 더욱 절실하게 표현해주고 있지 않나라 생각합니다. 또한 그러했기에 --- 이 작품 「주저하는 근본주의자」가 저에겐 그다지 인상깊게 읽혀지진 않았었네요.
·
·
·
앞서 읽었던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속 '수용소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는 삶'이란 것이 결국엔 --- 이 작품 속 인물인 첸가즈에게, 그리고 에리카에게도 그들의 최종 선택을 추려낸 단 하나의 원인이었다라 생각하기에, 그리하여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주제를 다음의 문장으로 표현해도 좋지않을까 싶네요. 저에게도 어쩌면, 예의 당신에게도 어쩌면...
| | | |
| | 굳이 수용소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수용소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는 삶 역시 도처에 있다. | |
|
| |
※ 어딘가, 이 작품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라 생각되는 작품 : 복거일 作 「비명을 찾아서」
- 복거일 作, 「비명을 찾아서」 상권 중 p45. 문학과 지성사 刊, 1987.
- 네이버 검색.
- <Daily Brain>에서는 더 이상 이 기사가 검색되지 않더군요. 하지만, 우리에겐 구글이 있기에! ^^
- p341, 문학동네 刊,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