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사랑학
목수정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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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난 맘에 드는 향수 냄새가 목 근처에서 풍기는 사람을 만나면 걷잡을 수 없이 매혹되곤 했다.(p67)

소개팅 상대(가 될 수 있는 여학생)의 첫 번째 조건으로, '내가 좋아하는 특정 향수를 뿌린 여자'를 내걸었을만큼, 지금도 여전히 엘리베이터에 남아 있는 향수의 진한 잔향으로부터 '그 주인공은 몇 층에 사는, 어떤 외모의 몇 살쯤 되는 여성일까?'하는 궁금증을 너무도 자동적으로 가지게 되는 저이기에 --- (저자로서, 공동 저자의 한 명으로서, 그리고 역자로서) 그녀, 목수정이 쓴 네 권의 책을 읽고 가지게 된 그녀에 대한 호감은, 이처럼 같은 취향/약점을 지니고 있다라는 점으로 인해 폭발적으로 증대됩니다. 마주 앉아 술 한 잔씩 주고 받아가며 나누는 어떤 주제의 이야기도, 그 어떤 강도(强度)의 반론도 모두 즐거울 것 같은 그녀가 이 책 「야성의 사랑학」을 통해 이야기 하는 '사랑'은 또 어떤 내용들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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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인류가 멸망하게 된다면, 사과나무를 심을 누군가도 있을 그 오늘, 당신을 무엇을 하시겠습니까?란 질문에 정녕 100% 솔직하게 답을 한다면, (내일 인류가 멸망하지 않을 방안을 찾아보겠다,같은 헛소리는 빼고!) 당신은 정말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지극히 단순하게 보자면 --- 당신의 대답 중 (그간 여러 가지 이유, 예를 들어 타인의 눈치, 사회적 규범·도덕 등에 의해 하지 못했던) 차마 해볼 수 없었던 것을 해보고 싶다가 포함될 가능성이 매우 크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남자의 경우) 여탕에 들어가 보기와 같은 향수 어린 행동에서부터 (내일 인류가 멸망한다는데 여탕에 손님이 있을 리가!) 사랑하는 가족과 조용히 종말을 기다리겠다 등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다양한 모습을 띨 겁니다. 그리고 게중엔 당연히!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친구인 납득이는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첫사랑이며,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마지막 사랑이라고 승민을 위로한다. 그 말이 일종의 통념으로 성립한다면, 사람들은 사랑의 진정성을 사랑이 더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셈이다.

김동조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 중.

현재 썸타고 있는 이성에게 '나 너 좋아한다/사랑해요'란 말 한 마디를 건네는 것도 분명 들어있을 것이며, 그 때를 놓쳤던 누군가에겐 '이루어지지 않았던 첫사랑'으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를, 삶의 마지막 이 순간에 하겠어,란 선택을 하게할 수도 있을겁니다. 그 때를 지내놓고 되돌아보니, 여전히 그대가 나의 첫사랑이었다라고, 하지만 그때엔 사랑이 더 있을 줄 알었었노라 말이죠. 이처럼!

내일 내가 죽어야만 한다라는 상황하에서 할 수 있는/하게 될 행동들을, 한 30년 쯤 후에나 죽게 될거야란 상황하에선 대체 왜 하지 못/할 수 없는 것일까요? 만약 내게 남은 시간이 29년 364일이라면? 하루쯤 줄어들었다한들 하지 못하는 행동들은 여전히 할 수 없는 행동으로 남을 겁니다. 남은 시간이 29년 363일이라면? 29년 362일이라면? 그렇게 하루쯤 줄어들어도 딱히 그 결과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 이 순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시간으로부터 현재를 보상받기 원하는 한1, 나의 (20대이건 30대이건 혹은 저와 같은 40대이건) 지금 이 순간을 미래의 어느 상황을 위한 볼모로 삼아 희생 시키기만 하는 한2, 풍성한 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느덧 대머리가 되어버리는 비극3을 우린 피할 수 없게 되지요. 우리가 대체 왜,

마음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를 마련해 준 채, 차마 지워내지도 못하고 있는, 물론 행동으로 옮기려는 시도는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채, "어느 순간부터 울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슬픈 일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감격하지 않아서였다. 감격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격할 수 없게 되어서였다"(p303)란 고백만을 우리는 하고 있는가/하게 되었나에 대해 이 책의 저자 목수정은 --- "유교사회, 군대, 권위주의적 사회는 감정의 분출을 극도로 억제한다. 투명하게 드러나는 감정은 천박한 것으로 여"(p305)기는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라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규정한 천박함은 자연스러움이다. 우린 웃고 울고 싶다. 그러나 마음껏 어디서나 그럴 수 없다."(p305)

​이러한 감정 억제의 강요가 비단 대한민국의 역사에서만 존재하는 건 물론 아닙니다. 중세 유럽의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권위를 품어 내는 제도들4' 역시) 역시, "생식의 목적이 아닌 성행위를 부부간5에도 금지"(p27)함으로써,


욕망이 억압된 집단은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그 불안을 다스려 줄 강력한 지도자를 기다린다. 이러한 원리를 이용하여 가장 오랫동안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해 온 집단이 교회인 것이다.(p27)

​대체 나/우리에게 내려져 있는 이 금지의 조항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지 서로 감히 묻지도 못한 채"(p40), 그 금지와 억압 아래에서 인류는 살아왔고, 그러했기에 지금의 사회로 진화되었다라는 거지요. --- 1992년, Coventry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만 사시는 집에서 하숙하고 있었던 때의 어느 날. 어찌하다보니 그 두 분과 저 셋이 마주앉아 담배를 물게 된 상황이 벌어졌었죠. 차마 담배불을 붙이지 못하는 저에게, 걍 밖에 나가 피우고 오겠다던 저에게, 왜 그러냐며 손수 불을 붙여주셨던 할아버지께, 사실 한국에선 어른 앞에서 술은 마실 수 있어도 담배는 절대 피우면 안 된다,라 대답하는 저에게, '왜 술은 되고 담배는 안되?'냐는 할머니의 당연히 나와야할 질문에 (또한 당연히! --;) 대답할 수 없었던 게 생각납니다. 그 금지의 이유가 무엇인지는 배우지 못한 채, 그냥 피우면 안된다라는 것만 배웠었기 때문이었죠. (사실은 지금도 왜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 그렇다면!


매우 극단적 예이기는 합니다만, '자신의 성기를 타인, 특히 이성에게 내보여서는 안 된다'라는 도덕은 과연 어떠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도 궁금해 할 수 있게 됩니다. ​free sex같은 걸 주장할 만한 용기를 지니고 있지는 못한 저입니다만 ---  얼마 전 '공연음란죄'인가로 야구 인생을 끝내야했던 모 선수의 경우, 단지 한 여성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라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육체적) 피해도 끼치지 않은 그에게 그런 가혹한 사회적·법적 처벌이 내려진 건 대체 어떤 명확한 이성(理性)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를 향해 다음의 의문을 똑같이 적용하려 한다면, 지나친 객기가 될까요?

프랑스를 비롯하여 서구유럽사회에서 통용되던 일상의 정치 질서에 실질적인 해방을 가져온 시발점이었던 68혁명은 여학생 기숙사에 남학생이 드나들 수 없게 한 대학기숙사의 반자연적6인 규율로 인해 발발하였다. 무엇을, 누구를 위한 도덕이고 검열인가? 누구를 위해 이 모순된 장벽은 존재하는가? 왜 아무도 원하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필요치 않은 규율들이 도처에서 작동하며 우리의 삶을 검열하고, 우리의 싱싱한 젊음이, 이 건강한 삶이 하늘 아래서 작열하는 것을 방해하는가? "금지를 금지하라!"(pp7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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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사이비 냄새를 풍길수록 더 많은 금기를 만들고, 그 금기를 넘어서는 자에게 가혹한 벌을 내리며, 규율의 잣대를 드높이는 것으로 자신의 허술함을 감추듯"(p15), 저자 목수정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향해 "구성원들이 억압에 잘 길들여져 있을 때에만 제대로 굴러갈 수 있는 사회"(p15)이며, 심지어는 "사랑을 조롱하는 사회"(p316)라고까지 비판합니다. 그 결과7!


우리가 아는 성은 … 타락의 상징을 뒤집어 쓴 채 우리의 일생을 따라다닌다. …… 성은 들키지 말아야 할 추잡한 욕망일 뿐이다.(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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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회적 삶은 억압과 함께 시작된다.(p305) … 헤어날 수 없이 겹겹이 둘러쳐진 통제의 틀 속에 자신을 방치하며 살다 보면, 우리는 어느 날 통제할 삶 자체를 잃게 된다.(p33) … 당신이 받은 억압을 배설하라. 그렇지 않으면 억압이 당신을 배설해 낼 터이니."(p306)

'사랑과 성(性)'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은 물론 아닙니다. 그저 헨리 치나스키와 같은, '본능대로 움직이는/움직일 수 있는 사랑'에 대한 관심 때문에 펼쳐든 책이었었기에, 저의 관심이 그것에만 집중되었을 뿐, '한국 사회의 속살'이라는 구절의 부제처럼, 저자 목수정 특유의 매력적인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책이지요. 암튼! 저자 목수정은 분명한 어조로, 억압의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어느덧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본능을 억압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또한 --- '당신이 받은 억압을 배설하라' 요구하고 있습니다.

<메갈리아>로 시끌시끌한 요즈음, 혹여라도 (2010년에 출간된) 이 책 「야성의 사랑학」을 읽고, 저자 목수정을 향해 '얘도 메갈이었네!'란 판단을 하는 이가 있다면, 잘못 읽어도 한참을 잘못 읽은, 그저 자신 생각의 짧음만 내보인 거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으로 읽힐 소지가 있는 구절도 있긴 하나, 그녀가 그러한 구절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 이 책의 제목에 쓰인 '야성'이란 단어가 철저하게 gender-neutral 하게 사용된 것과 같은 맥락이기 때문이지요. 


당신의 마음이 설렐 때, 그 설렘에 화답하라. 그 설렘을 죽이고 죽이면 다시는 당신을 찾아오지 않는다. 삶을 모독하지 말라. 그러면 삶이 당신을 버릴 것 삶에 바람처럼 찾아오는 사랑의 소용돌이가 내 심장을 두드릴 때, 눈앞에 평소 내가 그려왔던 바로 그런 연인의 모습을 한 이가 지나갈 때, 준비된 훗날을 위해 직관이 말해주는 신호를 무시하 던 사람​은 영영 사랑을 느낄 수 없거나, 그런 건 소설에나 나오는 거짓이라고 치부해 버리게 된다. 돋아 오르는 열정의 뿔을 칼로 계속 베어 내기만 하면, 어느 순간 열정은 자라기를 멈추는 것이다. 그 자라나는 열정의 뿔의 이름이 바로 '야성'이다.(pp44-45) 

다만!!! --- "가까이 가족으로 공동 생활을 해온 관계에서는 성적인 욕구가 애착으로 전환된다"(pp167-168)라는 저자의 주장과, "사랑 없이 사는 것은 삶에 대한 모독"(p241)이라는 저자의 또 다른 주장으로부터, 물론 성적 욕구과 사랑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렇다면 과연 "사랑을 하면 비로소 내 안에 불처럼 타오르는 열정이 이끄는 삶을 만난다"(p242)라는 구절로부터는 또 어찌 성적 욕구와 사랑을 구분해내어야 하나,같은 약간의 혼란이 남는다는 아쉬움이 있기는 합니다. 이와 더불어,  

누군가에게는 가족이란 울타리가 실제로 "뛰쳐나가고 싶기도 한 감옥일 수도 있"(p189)겠으나, 사회적으로조차 "서로의 몸과 마음이 이미 서로를 원하지 않는 상황임에도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여 있어야만 하는 결혼제도의 부자연스러움"(p27)이 엄연히 도덕적·법적 규범으로 자리잡고 있는 현실에서 --- "불만은 터뜨리고 욕망은 충족시키면서 사는 것이 건강한 삶이다"8란 그녀의 또 다른 책 속 구절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낼 수 있을것인지라는, 풀어낼 수 없을 거란 예감이 확신에 가까운 숙제를 받게 되었다라는 건, 아무리 양보하려 해도 뭔가 좀 공평하지 않다9란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뭐 어쩌라고!!! 쩝~ --;;) 

 

 

 

※ 읽어 본, 목수정의 다른 책들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저자) · 「파리의 생활 좌파들」(저자) · 「자발적 복종」(역자) · 「리얼 진보」(공저)​

 

※ 이 책을 읽으라고 저를 꼬셨던 헨리 치나스키 :  팩토텀」 · 「우체국」  · 「여자들

 

 




 

  1. "우리의 삶은 왜 어느 한순간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살지 못하고, 왜 늘 다른 곳에서 보상받기를 원하는지 가슴치며 물었다." - 목수정 著,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p112, 레디앙 刊, 2008.
  2. "그 어떤 세월도 또 다른 세월을 위한 볼모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의 20대, 30대, 40대는 모두 똑같이 소중하고, 나의 모든 시간들에 적당한 노동과 적당한 즐거움을 배분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다." - 목수정 著,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p110, 레디앙 刊, 2008
  3. 철학에서의 '대머리 논쟁'
  4. 본문 p26.
  5. "성(性)은 우리가 그것을 원하는 모든 순간에 금지되었다. 결혼이라는 의식의 틀 안에서만,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것을 가장 흥미 없어 하는 조건 안에서만 허락된다."(p27)
  6. "인간은 즐겁기 위해 태어났다는 그 태초의 존재 이유"(p113)
  7. 이러한, 금지의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주어지는 억압이 비단 성(性)에만 국한되는 건 물론 아닙니다. - "종종 부모를 구타하거나 죽이는 패륜아, 선생을 패는 학생들이 보도된다. 이러한 사건은 군사부일체가 무너져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여전히 지배계급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군사부일체의 잔상에 대한 반발이 야기한 사건이다. 그 아이들은 부모들이 키웠고 선생들이 가르쳤다. 선생도 부모도 허점이 있고 언제나 옳지만은 않은 평범한 인간이다. 토론을 통해 의견들이 조정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그들에게 명령과 지시만을 하는 그 어른들의 모순을 보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그걸 보고 가슴에 뭔가가 쌓이지 않을 수가 있을까? …사회 전체가 괴물을 양산시키는 방향으로 질주하면서, 그렇게 해서 생산된 괴물들이 종종 눈앞에 있는 부모들을 공격하는 사태가 나타나는 게 뭐 그리 놀라운가."(pp197-198)
  8. 목수정 著,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p100, 레디앙 刊, 2008.
  9. 저자 목수정은, 한국에서는 법적으로 비혼이나, 프랑스에서 '시민연대계약(PACS)'을 한 동거인 희완 트호뫼흐와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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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제가 이해하는 바의 이 작품은 그저 --- 여자'들'을 만났으며, 그 수많은 여자들과 어떤 방식/느낌의 섹스를 즐겼고, 왜 헤어졌으며, 그러면서도 거의 매 장면에서 술 마시는 장면의 묘사가 빠지지/빼놓지 않는, 경마에서도 곧잘 돈을 따는 운도 따라주는, 결정적으론 지독히도 강력한 성욕의 소유자인 주인공 헨리 치나스키의 그렇게 살아 온/살아가는 이야기의 반복일 뿐1입니다. 뭔가의 더를 찾아내려 해도 That' It!!! 이라 말한들, 이 책을 저보다 먼저 읽었던 누군가로부터도 오독(誤讀)이란 비난을 받지는 않을 듯 싶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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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놀리는 건 아니지만 너무 만지고 싶게 생겼네. … 난 너를 만지고 싶어. 만지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러고 싶어."

- '기린(Kirin)'이 부른 노래 <Would You>의 가사 중.

(그리고 어쩌면 2016년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대부분 남녀의)속마음은 이러합니다. 방금 전 길을 걷다 마주쳐 바라보았던 여성에게서건, 며칠 전 버스 옆자리에 앉았던 첨 보았던 여자에게도, 아주 오래 전 내 앞에 앉아있었던 소개팅의 상대방에게도, 심지어 그렇게 만난지 몇 번 된 사이의 여자에게였더라도! --- 제 아무리 그녀들이 '너무 만지고 싶게' 생겼었다 했/하더라한들, '난 너를 만지고 싶어!'란 말을 죽어도 할 수 없었던 그때, 그리고 지금도 할 수 없는, 그저 마음 속으로만 '만지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러고 싶어'라 생각하다, 끝내 그 순간엔 만져보지 못했었고 '할 수 없지, 뭐' 그러했었던 세대와 문화에서 청춘의 시절을 보내었었던, 기질마저도 선뜻 그러해보길 주저할 수 밖에 없었던, 그러다 어느덧 그것을 금(禁)하는 세상에 살게 되어버린 저와는 달리, 이 작품 속 누군가는, 그리고 누구보다 우리의 헨리 치나스키는!2

​"세상에 이런 아름다움이 있으니 우리는 그저 손을 뻗어 만지기만 하면 돼요."(pp246-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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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간의 사랑은 시각과 후각에서 온다는데 여러분의 의견은?"

① '소개팅 시켜줄께. 어떤 스타일 좋아해?'란 질문에 외모에 대한 설명 대신 특정 향수를 사용하는 여자여야 해!라 말했었을만큼, (이성으로부터의) 후각에 매우 민감했었던/한 저이기에,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남아 있는 향수의 잔향으로부터 그 주인공은 어떤 여자일까,란 상상을 해보기도 하는 저이기에 --- 위의 질문에 당연히 후각이란 대답을 떠올렸더랬습니다만,

② 히가시노 게이고 作, 「비밀」이란 소설은, 그 줄거리만 들어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매우 뭉클한 감동과, '딸의 육체에 아내의 정신이 들어가 있다'란 말도 안되는 상황임에도 자꾸만 스스로를 거기에 대입시켜보는 생각을 해보게만 되는, 정말로 매력적인, 그야말로 작품(作品)인 소설이었지요. 이런 상황에서라면 남편의 성적 욕망을 걱정하는 (딸의 모습을 한) 아내의 배려(!)가 당연할 겁니다. --- 섹스는 말도 안된다라 말하는 남편에게 아내가 말해주지요. "그럼 입으로 해줄께요."3

'부부간의 사랑'에는, 더 나아가 그냥 (요즘 시대의 흔한) 사랑에는 시각후각​, 그리고 빠질 수 없는 촉각 뿐만 아니라 --- 미각 역시 매우매우 중요한 일 구성요소라 말한다한들, 최소한 변태자식~ 소리는 듣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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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고 싶게 생긴 이성' 앞에서 하는 혼자만의 생각에서조차 "너를 놀리는 건 아니지만"이란 전제를 깔아야 하며, "만지겠다는 뜻은 아니지만"이란 선을 그어 놓은 후에라야 비로소 "난 너를 만지고 싶어"란 생각이라도 할/해 볼 수 있는 우리에게 ---만난지 채 몇 분 지나지 않은 여성을 향해 "난 당신 보지를 핥고 싶어"(p43)"한번 합시다"(p242)와 같은 말을 선뜻 해내는 헨리 치나스키는 분명! 호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인물은 아닐겁니다. 하지만! --- 그가 나오는 소설들을 읽다보면 웬지 헨리 치나스키에겐 그러한 감정의 표현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라 받아들여지며, 이는 결국 그는 그냥 솔직한 남자일 뿐이란 생각을 가지게 되어 버립니다. (그의 이야기 세 편을 읽고 나니, 마치 나도 모르게 빠져나와지지 않는 늪에 빠진 것처럼.)


건너편에서는 옷차림이 말쑥한 여자가 페이퍼백 소설을 읽고 있었다. 치마가 허벅지까지 올라가 스타킹을 신은 허벅지 살이 훤히 보였다. 어쩌자고 저러고 있을까? 나는 신문을 들고 있었고 그 위로 그녀의 옷을 흝었다. 허벅지가 근사했다. 저 허벅지를 가질 사람은 누구일까? … 여자가 다리를 꼬니 치마가 좀 더 기어올라 갔다. 여자가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신문 위를 넘겨다보던 내 눈과 여자의 눈이 마주쳤다. 여자의 표정은 무심했다. 여자는 치마를 끌어 내리지 않았다. 내가 보는 것을 알면서도.(p136)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은 이처럼, 남자이건 여자이건, 인간의 본능인 성욕(性慾)에 대해서만큼은 솔직합니다. 아마도 --- 신문 위로 힐끗 어떤 여성의 아름다운 다리를, 몸매를, 가슴을, 혹은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던 경험이, 100%에 가까운 수준의 '대부분'의 남자들에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쩌면! 심지어는 '만지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러고 싶어'란 생각도 어쩌면! --- 위에서 묘사되는 헨리 치나스키를 '솔직하다'라 아니말할 수 없도록 작동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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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토텀」의 옮긴이와, 「우체국」의 옮긴이 모두 헨리 치나스키를 묘사함에 있어  각각 '남성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빠져 있는 인간'4'남성 중심적 인물'5이라는, 결국 남성 우월주의자를 의미하는 뉘앙스의 단어를 선택했더랬습니다. 이 작품 「여자들」속에도, 자신이 "사랑을 두려워하니까"(p90) 여자가 아닌 창녀를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헨리 치나스키의 고백이 등장하지요. 읽기에 따라선 얼마든지 그를 남성 중심적 인물로 생각하게 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 「여자들」을 읽고 쓰는 독후감에서 전, 딴 건 몰라도, 헨리 치나스키가 남성 중심적 인물이란 생각에만큼은 명백한 반대의 의사를 표시하고 싶습니다. 그가 그토록 여자에 탐닉했던 이유는 바로 ---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여자를 끊임없이 갈망했다"(p109)였기 때문이죠.


이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얼마나 힘들었던가. 하지만 대개는 한 여자랑 헤어져야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다. 여자들을 진정으로 알기 위해서는 그들을 맛보아야 하고, 그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도 남자이므로 남자들은 마음속에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자들은 애초에 알지 못하면 허구로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여자들을 탐구하고 그들 안의 인간을 찾아낸다.(p324)

물론 헨리 치나스키가 수많은 여자들과의 관계에서 (남자라면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한6쾌락을 느꼈다고는 하나! --- "첫 키스, 첫 섹스는 언제나 극적이다. … 그다음에는 천천히, 그렇지만 반드시 모든 결점과 광기를 드러내게 된다"(pp105-106)라는 걸 경험한 그는, 그리하여 "연애가 틀어지면 진정으로 외롭고 미칠 것 같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느낄 수 있고 마침내 자기 인생의 끝을 맞았을 때 무엇을 대면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p324)라 말하는 그의 바람(願)은 다름 아닌,


고통은 기이하다. 고통은 쾅 도착해서, 그래 그렇게 우리 위에 내려 앉는다. 고통은 실재이다. 그리고 구경꾼의 눈에 우리는 바보 같아 보인다. … 고통에는 아무런 치료약이 없다. 나의 기분을 이해해 주고 도와주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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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많은 여자를 필요로 할 때는 그 여자들이 다 쓸모가 없기 때뿐이다."(p417)


결국, 헨리 치나스키는 자신의 기분을 이해해 주고 도와주는 법을 알고 있는 한 사람(한 여자)을 찾고 싶다는 바람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 소설의 1/4이 조금 지난 즈음 등장하는, 헨리 치나스키의 다음 독백이, 이 작품의 옮긴이에게서도 (「우체국」의 옮긴이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끝내 "과연 남성 중심적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적절할지 의문이 든다"(p424)란 고백을 이끌어낸 이 작품을 가리켜, "한 여린 남자의 사랑 이야기"라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하는 용기를 제게 쥐어주었죠. 한 발 더 나아가!

"여자들에게 사정(事情)하고 사정(射精)하는 것 뿐"(p422)인, 이 작품 속 헨리 치나스키의 기행은, 그 스스로의 말을 빌어보자면 그저,


 

 

사랑이 올 때는 보통 이상한 이유 때문이었다. 사랑을 자제하는 데 지쳐서일 수도 있고, 사랑이 어디든 가야 할 곳이 필요하기 때문에 놓아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보통, 말썽이 따라오기 마련이었다.(p138)

저에게는, 어쩌면 당신에게도 따라오지 않았던 말썽이, 유독 헨리 치나스키에게만 지독히도 따라다녔기 때문이었다라는 변명을 해주게까지 됩니다. 그 말썽이 저를 따라오지 않았던 이유가, 따라올 수 없었던 이유는 어쩌면 --- 헤어지는 순간의 마지막 말로, 사실은 '우연을 가장해서라도 너를 만나게되는 순간을 꼭 만들겠어'라 말하고 싶었었으나, 하지만 끝내는 '우연히라도 길에서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정말, 아마도 굉장히 반가울꺼야'란 솔직하지 못한 말을 선택했었던, 그토록 스스로의 감정에조차 솔직하지 못했었던 저였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란 늦어도 너무 뒤늦은 후회를 하며 말이죠.



※ 읽어본, '헨리 치나스키' 이야기! : 팩토텀」 · 「우체국 

 

 

 

 

 

 



 

  1. 이 작품의 옮긴이 박현주 역시 "여성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 이 소설에서 치나스키가 하는 일이라고는 여자들에게 사정(事情)하고 사정(射精)하는 것 뿐"(p422)이라 표현하고 있지요.
  2. 세실리아라는 이름의 여성이 한 말입니다만, 헨리 치나스키 역시 그녀의 이 말에 "당신 말이 맞소"라 맞장구를 쳐주었지요.
  3. 이 대사는 영화 <하녀>에서도 나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임신중인 아내 역의 서우가 이정재에게 이 말을 했었던 걸로.
  4. 석기용 譯, 「팩토텀」 p316.
  5. 박현주 譯, 「우체국」 p424.
  6. pp29-30에 등장하는 서술과 장면의 묘사는, 일종의 성교육 교재로도 훌륭하지 않을까 싶은 자세함을, 그리고는 끝내, '나의 현실에서도 이러한 배움이 진작에 있었더라면!'같은 부러움 어린 아쉬움을 자아내게 해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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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어쩌다 보니"(p12) 보결 집배원1이 된 헨리 치나스키의 30대 초반부터 40대 후반까지의 삶2을 그려내고 있는 소설입니다. (이 작품 「우체국」의 이전 시기를 담고 있는) 「팩토텀」의 마지막 문장을 장식하고 있었던 "그리고 나는 내 그걸 세울 수 없었다"3라는 그의 고백은 거짓 혹은 기우였던 걸로 곧 밝혀지지요. 여전히 그는 여자가 꼬시면 기꺼이 넘어가주면서, 혹은 그가 꼬셔서 넘어와주는 여자와의 섹스를 즐깁니다. --- ​"세상에, 집배원들은 편지를 넣고 다니면서 여자들하고 같이 눕기도 하는구나. 이거 나한테 딱 맞는 일인데. 오 이거야, 이거. 이거라고."(p12) 하지만!


일 개인에게 (오로지!) 행복하기만 한 삶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시장자본주의의 내재적 본성은 예의 헨리 치나스키의 삶에도 드리워집니다. 그가 11년이란 시간을 보낸 우체국에서의 삶이 헨리 치나스키에게 안겨준 유일한 선물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이 잔인함의 시작은 이러했지요.


뜨거운 목욕물과 베티의 쭉 뻗은 다리 생각을 계속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해야 계속 걸어갈 수 있었다. … 하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너무나 먼 길이 남아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는 위스키 한 잔을 손에 들고 안락의자에 앉아 베티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방 안을 돌아다니는 걸 보는 것 뿐인데.(p32)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네가 가진 희망을 이루려면, 남아 있는 먼 길을 먼저 걸어가야 한다'라 단호하게 가르쳐줍니다. 뭐,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요. 저 역시 종원군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전에, 해야할 일을 먼저 해라'라 가르치고 있으니까요. (그러하기에) 저라는 사람 역시 철저한 자본주의의 산물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 (영화 <아일랜드>에서 자신들이 복제 인간임을 알고난 후 그들이 보여주었던 반응이라든가, 영화 <트루맨 쇼>에서 역시 주인공이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된 후 보였던 반응과 같이) '나의 현재/실체는 이러하다'라는 걸 알고 있다는 것4이, 그러한 현재/실체를 낳게해 준 과거 요인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려는 행위와 그 어떤 모순도 일으키지 않는다라 생각하기에,

……………………………………………………………………………………


'더 좋은 것은 앞날에 남았으리' --- 저의 젊은 시절을 강렬하게 지배했던 문구였었습니다. 실제로, 더 좋은 것이 바로 앞날에 실재하고 있는 것을 보았었기도, 혹은 확신으로 기대하기도 했었었지요. 40대 후반이 된 지금에도 역시나 이 말을 가슴 한 구석에 넣어놓고는 있습니다만, 그 구체적인 '더 좋은 것'의 모습은, 더 중요하게는 그 '더 좋은 것'으로 도달하기 위해 현재 감내하여야 하는 실체란 게, 20대 때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습니다. 헌데 이런 변화가, 과연 저 개인에게만 일어난 특이한 예인걸까요?


자본주의 역시 우리를 향해 "Best is yet to come!"이라 항상 외치고/꼬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구체적인 'Best'란 것이 엄청난 부(富)이건, 혹은 '뜨거운 목욕물과 베티의 쭉 뻗은 다리'와 같은 단순한 차원의 것이건, 그들을 이루어내려면 반드시 '남아 있는 먼 길'을 먼저 걸어가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걸려 있지요. 그 가르침에 충실히 길들여진 우리는 먼 길을 일단 걸어갑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면 어김없이 항상 "Best is yet to come!"이란 달콤한 마약이 어디선가부터 들려오지요. 그 마약에 인이 박히게 되면, 이제 그 환청은 외부가 아닌 나의 내부에 아예 장착이 되어져버리고, 그 후론 --- 내가 원했던 'Best'가 무엇이었던건지조차 잊었다 해도, 심지어는 내가 원하는 'Best'란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나는 앞에 남아있는 길을 걸어가야하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게 되죠. 당신은 안 그러신가요? 전 그렇습니다. 이건 결코 겸손한 예의로 나오는 고백은 아니에요.하지만 이 소설에서 우리는!


그래서 결국 그렇게 되었다. 나는 집에 있는 베티의 곁으로 돌아갔고 우리는 술병을 땄다.(p61)

장수(長壽)하길 원하기에 운동으로 자신의 건강을 지켜내려는 의도는 어느 새, (장수하기 위함이란 애초의 목표는 잊은 채) '건강 그 자체'를 최종의 목표로 만들어버리는 오류를 흔히 범하게 됩니다. 이처럼 --- 당신이 누릴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라는 속내를 지니고 있는 "Best is yet to come!"의 유혹을, 저는 (그리고 아마도/어쩌면 당신 역시) 이겨내지 못해왔습니다. 그러했기에,


"우리의 삶은 왜 어느 한순간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살지 못하고, 왜 늘 다른 곳에서 보상받기를 원하는지 가슴치며 물었다."5란 목수정의 글을 읽는 순간이 저로 하여금 똑같이 가슴치며 울고 싶게 만들어주었던 것이며, "그 어떤 세월도 또 다른 세월을 위한 볼모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의 20대, 30대, 40대는 모두 똑같이 소중하고, 나의 모든 시간들에 적당한 노동과 적당한 즐거움을 배분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다"6란 목수정의 글은 이 뒤늦은 나이에 뭔가 일상 가치관의 결정적 방향전환을 자아내었던 것이었었죠. 이처럼,


교육이란 것이, 그것도 '대한민국에서의 교육'이란 것은 지식의 주입으로만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 인간 본성 자체를 길들이는 것으로도 작동하고 있었다7라는 걸 --- 저는 깨닫지 못했엇었고, 뒤늦게야 (그 교육에 충실했었던 결과로 본성 자체를 잊었거나 죄악시하게 된 것을) 후회하고 있으나, 헨리 치나스키는 길들여지지 않았고 잊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이죠.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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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헨리 치나스키가 처음부터 완벽하게 자신이 살고 있는 체제와 그 체제가 요구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왔던 건 아니었습니다. 라스베가스에서의 혼인 신고로 자신의 아내가 된 열세 살 연하의 아내, 조이스의 끈질긴 요청으로 그는 다시 직장이라는 조직으로 들어가야 했었었고, 그렇게/어느덧 세월을 흘려보내다 보니,


"11년이라니! … 11년. 매일 밤이 길긴 했어도 세월 참 빨리 흘렀다. … 여기 올 때는 84킬로그램이었다. 지금은 101킬로그램이었다. 고작 오른팔만 움직이니까."(pp219-220)

옮긴이가 길게 서술해 놓은 부분9을, 헨리 치나스키는 "고작 오른팔만 움직이니까"란 단 한 문장만으로 그렇게10--- (당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체국이라는 조직 내에서 보낸 11년이란 세월은 그에게도 역시나,


"음식과 물이 여기 있긴 한데, 저 열린 공간은 뭘까? … 인간이건 새건 모든 것은 이런 결정을 해야 한다. 어려운 게임이다."(pp102-103)

과 같은 고민을 하게 만들주었지요. 밀튼 프리드만 교수가 말했던 <Free to choose>란 것이 주어진 platform 자체를 일단 받아들인 후에야 행사할 수 있는 자유이듯, --- "어디에서라도 일은 해야 하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그게 노예의 지혜였다"(p232)로 대변되는 환경 속에서의 11년은 그에게도 예의 "그런데 빠져나간들 천국일까?"(p236)이라는, 자신이 살아온 platform으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의문과 망설임을 심어놓았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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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자 아침이었고 여전히 살아있었다. 아마 소설을 쓸 것 같군, 생각했다. 그래서 소설을 썼다."(p241)


새장 밖으로 나온 헨리 치나스키가 말해주고 있는,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천국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그가 '여전히 살아있'을 수는 있었었지요. --- "후회하지 않는 삶에 대한 표현11"(p253)이란 옮긴이의 표현을 가장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부분 역시 "아침이 되자 아침이었고 여전히 살아있었다"란 바로 이 구절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性)에 대한 인간의 본능이, 청소년기부터 죄악으로 가르쳐지고, 성인이 되어서조차 사회적 규제와 공적 가치관, 거기에 더해 스스로 만들어놓은 '타인으로부터의 평판(reputation)'이란 제재하에까지 억압되어져야만 하는, 그리고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12이 되어있는 2016년의 대한민국에서 사는, 살아갈 저에게 --- 헨리 치나스키의 일거수 일투족은, 그냥 스트레이트로 받아들이는13 헨리 치나스키의 삶은 '교육에 의해 이미 상실해 버린 인간의 본성에 대한 아쉬움을, 나를 대신하여 거침없이 발휘하여 주는 Hero'의 모습을 받아들여집니다. 소설이 선사해주는 효용 중,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에의 대리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란 점에서, 「팩토텀」와 「우체국」은 (비록 '읽는 재미'같은 건 거의 선사해주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읽어본 그 어느 소설들보다 훨씬 더 짜릿!한 쾌감14을 안겨줍니다. 게다가, "Best is yet to come!"이라 외치는 듯한 제목의 소설, 「여자들」이 바로 다음 이야기라는 점은 예의, 한여름날 헥헥거리는 저를 더욱 헉헉거리게 해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마저, 그리고! --- 「팩토텀」에 이어, 써놓고도 주저하게 되는 독후감으로 느껴지는 것 역시나 더욱 커져있기만... --;;   

 


※ 청춘 시절의 헨리 치나스키! :팩토텀 

 



 

  1. ​"새벽 5시면 우체국에 앉아 업무를 배정받을 수 있기를, 정규 집배원이 병으로 결근한다는 연락을 해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정규 집배원들은 주로 비 오는 날이나 찌는 듯이 무더운 날, 배달 물량이 두 배로 느는 휴일 다음 날이면 아프다고 전화를 했다."(p13)
  2. 보결 집배원 생활 3년 후, 그는 정규 집배원이 되었으며 이후 등장하는 장면에서 "나는 서른여섯이었다"(p68)이란 표현이 나오며,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나는 이제 8개월만 있으면 쉰 살이 되었다"(p235)란 부분이 나오지요.
  3. 찰스 부코스키 作, 「팩토텀」 p312, 문학동네 刊, 2007.
  4. 즉, 무언가의 산물이라는 점.
  5. 목수정 著,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p112, 레디앙 刊, 2008.
  6. 목수정 著, 위의 책, p110.
  7. 물론 이러한 '교육의 비정상적 작동'이 대한민국에서만 발생되는 것은 아닙니다. --- "일찍이 부르디외가 명쾌하게 일갈한 바 있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취향이란 많은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처럼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출신계급과 교육수준, 집안 환경 등이 촘촘히 얽혀서 구조적으로 생산되고 또 확산된다. 개인의 의지로 쉽게 떨쳐낼 수 없는 유기적 습성이다."(목수정 著, 위의 책 p209)와 같은 일반론이 대한민국에서는 (예를 들어) "경제적 풍요가 도리어 최고급 메이커 제품에만 한정된 선택을 하도록 하는 족쇄가 되는 셈이다"(목수정 著, 위의 책 p210)으로 대변되는 현상을 유난히도 강렬하게 낳는다라는 점에서 '대한민국에서의 교육'에 강조를 하였습니다.
  8. 이 작품의 옮긴이는 이를 '헨리 치나스키는 이 조직의 위계와 규칙에 항의하는 인물이다.(p247) … 소설의 마지막, 치나스키가 우체국을 걸어나오는 것은 조직의 억압에 대한 자발적 저항이다.(p248)'이라 표현하고 있지요. 저의 이해와 비슷하기도, 약간 차이가 있기도 합니다.
  9. "(우체국에서의) 이 노동에서는 어떤 의미도 찾아볼 수 없으며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요식과 절차만이 맹목적으로 강요된다. 개인의 개별성은 말살되고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권리는 무시된다. 전후 미국은 과학적 경영을 표방하는 테일러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고 포드주의에 입각한 경영이 팽배하던 시기였다. … 이 소설 내의 <우체국>은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가 지배하는 노동 환경으로 묘사된다."(pp246-247)
  10. 이러한 은유적 서술은 다음에도 있지요. --- "그는 20대부터 집배원이었고 이제는 60대 후반이었다. … 그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우직한 말 같았다. 아니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멈춰버린 낡은 차 같거나. … 이 착한 아저씨가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pp50-54)
  11. 「팩토텀」과 이 작품 「우체국」을 읽는 내내, 백현진의 "학수고대했던 날"이란 노래의 가사가 떠올랐더랬습니다. 그 노래는 '미안합니다. 정말'로 끝맺음이 되지만, 예의 헨리 치나스키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이나 후회는 없지요. 아직!까지는.
  12. 심지어는 법률로까지 정해져 있는!
  13. 보수적 시선에서 헨리 치나스키의 삶을 써보자면 온통 가시돋힌 표현들로만 가득차게 될 겁니다. (비록 '보수적'이란 단어를 사용하긴 했습니다만, 그것이 '일반적'이란 단어로 대체되어야 한다라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주장, '보수적' 대신 '꼰대스런'이란 단어 역시 사용될 수 있어야겠지요.)
  14. 즉! --- 저 역시, 헨리 치나스키의 삶이, 제가 살아내고 있는 현실에서는 적합하지도, 옳지도 않다라는 걸 알고 있으나, 그러하기에 더더욱 그의 삶에 대한 '이루어낼 수 없는 부러움'이 자라난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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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토텀
찰스 부코우스키 지음, 석기용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고독한 인간 · 소외된 인간 · 떠돌이 인간 · 섹스에 탐닉한 인간 · 남성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빠져 있는 인간 · 고상한 인간 · 모순된 인간 · 패륜아 · 의협심 강한 인간 · 불합리한 인간 · 이중적인 인간 … 고달픈 백인 잡역부."(pp316-317)

옮긴이가 작품 속 주인공 헨리 치나스키를 표현하고 있는 열두 가지의 문구들입니다. '좋게 봐줘서'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위의 표현들 중 어느 하나 헨리 치나스키를 묘사함에 있어 '과한 비난'이라고 차마 대들어 볼 수 조차 없겠는, ('남성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빠져 있는 인간'이란 것에서만 개인적으로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는 점을 제외하면) 반박불가능한  지적이라 생각합니다. 옮긴이의 묘사가 아니더라도, 소설 속 주인공 헨리 치나스키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동의할 수 없음은, (물론, 제가 생각하는 '평균'과 당신이 상정하고 있는 '평균'이 다를 수 있겠으나) 평균적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에나 적용될 듯한 이 소설은 이러한 괴짜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뭔가 줄거리라 할 만한 것마저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직장 찾아 전전하고, 그 와중에 술 마시고 섹스하고, 갈 데까지 가보자는 듯 경마에도 잠시 빠지고 음주운전에 절도 장면도 나오는, 말 그대로 '막장'이라 일컬어질 수 있겠는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 "언제나 곧 관두거나 잘리겠지 하는 기분으로 일을 시작했"(p195)고, "어딘가로 떠나기 위한 버스 요금과 도착한 후에 몸을 건사하는 데 들 몇 달러 정도를 마련할 수 있을만큼만 더 일"(p53)하다가, "그냥 잠깐 들른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p281)이 직장을 관두거나 해고되는 주인공 치나스키 인생의 젊은 시절1을 적어내고 있을 뿐이죠. 한 마디로!

"그 차는 스프링이 다 나갔고 라디에이터가 줄줄 샜지만, 어쨌든 달렸다"(p98)

  

'어쨌든 달렸다'로 표현될 수 있는, (어찌보면) 막무가내식이기도 한 청춘을 그려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헌데 재미난 건 --- 뭔가 하고싶은 말을 자꾸만 만들어내게되는, 독후감을 쓰고 있는 지금에도 뭔가를 자꾸만 튀어나오게 만드는, 그러나 그것들을 써내는 걸 또 주저하게 만드는 신기한 소설이기도 하다라는 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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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부러움 】​

이 소설의 시대적·공간적 배경은 2차 세계 대전 종전 직전의 미국입니다. "일손이 부족하리라 생각될 법한 2차대전 중에서 일자리마다 네댓 명의 지원자가 몰렸"(p78)었으며, 전쟁이 끝나자 "언제나 잡기 어려웠던 일자리를 더욱더 잡기 어려워졌"(p148)던 시대였지요. 그 와중에도 --- "어딘가로 떠나기 위한 버스 요금과 도착한 후에 몸을 건사하는 데 들 몇 달러 정도를 마련할 수 있을만큼만 더 일"(p53)하기만을 원했던 치나스키는, (크게 보아 다음과 같이 한 단어로 표현되어질 수 있겠는) "사적·공적 사회 시스템"에 의해, "내게 별다른 야망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야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도 있어야 한다"(pp189-190)란 언뜻 뻔뻔스럽게 들릴 수도 있는 생각을 하고 있는 그였음에도! 어찌되었든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돈을 안겨주는 일자리를 계속 찾을 수는 있었습니다.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에서와 같은 경험을 적어도 치나스키는 하지 않지요.) 여기서!

'고용의 유연성'이란 결국 '피고용인이 발휘할 수 있는 유연성'이 아닌, '고용인만이 발휘할 수 있는 유연성2'이란 부인불가(否認不可)의 2016년 대한민국 노동시장은 과연 헨리 치나스키와 같은 '야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를 제공하고 있는가,하는 의문이 등장합니다. 누군가는 그런 사람에게까지 사회의 책임을 부담시켜야 하느냐라 반발할 수 있겠으나, 그러한 반발은 고작/기껏해야 --- '야망'이라는 것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닐진데, 우리 사회는 일 개인에게 '야망'을 키워/길러낼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느냐라는 문제, 그리하여 결국!


러시아 목각 인형 마트로시카처럼 다양한 경험을 하며 살기를 갈망했던 그는 유럽을 종횡무진 누비며 DJ, 작곡가, 어학 교사, 통·번역가, 항공기 승무원, 서커스단 소속 마술가, 슬롯머신 청소원 등 여러 직업에 종사했다. 현재는 국경 담당 경찰로 근무하며 문서 위조를 가려내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 로맹 피에르톨라 作, 이케아 옷장에 갇힌 인도 고행자의 신기한 여행」, 밝은 세상 刊, 2015. <작가 소개> 중

위와 같은 이력의 '누군가'를, 2016년의 대한민국은 만들어낼 수 없음3을 승인하는 것일 뿐이며, 이는 곧 --- 「이케아 옷장에 갇힌 인도 고행자의 신기한 여행」의 결말에서와 같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든가, 헨리 치나스키가 보여주고 있는 "아무 일도 안 하고 술이나 마십니다. 그 두 가지 일을 하죠"(p68)와 같은, 자신의 삶에 대해 타인/사회의 평가와는 독립적으로,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자신감있는 삶의 표현을 절대로 가능치 못하게 만드는 것을 정당화시켜줍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에 '옳다/그르다'라는 주관적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그처럼 다양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부러워하는 감정이 먼저 생겨야 하는 게 맞다라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도 같았다,고. 우리는 그 전쟁에서 맨날 지기만 했다,고"4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과거를 지나, 지금의 고삐리들이 품고 있는 장래 희망마저 '부(富)'와 '변동없음'5을 상징하는 의사와 공무원, 이 둘로 수렴되어가는 2016년의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인 저는, 내 아이가 헨리 치나스키와 같은 삶을 살기 바라는 것도 아님에도, 예의 ---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라는 (소설적 작위이건, 작가의 실제 경험이건) 전개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헨리 치나스키에게 <그래도 부러움>의 감정을 가질 수 밖엔 없기 때문이지요. 

 


【 그래서 안타까움 】

​닭이 먼저일지, 달걀이 먼저일지와 같은 의문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장자본주의'에도 내재되어 있습니다. 경제원론의 서막을 장식하고 있는 '수요와 공급'이 바로 그것이지요. 경제원론은 수요와 공급은 즉각적(instantaneously)으로6, 그리고 언제나 균형을 이룬다라 가르칩니다. 물론! 그것이 초보적인 단계에서의 설명이라는 것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문제는 --- 그저 그 단계에서 경제학을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는 거죠.


'시장(market)'의 가장 핵심적 구성 요소는 아무래도 수요와 공급일 수 밖에 없습니다. 헌데 말이죠, 수요가 있기에 공급이 생겨나게 된 것일까요? 아니면 그 반대로 공급이 있었기에 수요가 생성된 것일까요? --- 수요와 공급 사이에 그 어떤 (외부적) 권력의 작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수요와 공급 역시 '동시적으로 ' 발생된다라 이해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하질 못해요!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무엇이든 전념할 수 있는 그런 곳에 가고 싶"(p17)했던 주인공 헨리 치나스키는 --- "그 일자리를 얻기 위해 나는 품위가 떨어지는 짓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직장을 제2의 가정처럼 생각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이 그 사람들을 기분 좋게"(p151)해주어 취업에 성공한 이후엔 또, "나는 처음으로, 단지 시킨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을 할 때는 그 일에 흥미를 가져야 하고, 어떤 열정까지고 내보여야 하는 것"(p20)을 알게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놈의 삶이란, "세상에는 원치 않는 직업을 얻는 일보다 더 나쁜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p246)만을 뼈저리게 가르치기만 하는 이 놈의 삶으로부터, 


도대체 어떤 빌어먹을 인간이 자명종 소리에 새벽 여섯시 반에 깨어나, 침대에서 뛰쳐나오고, 옷을 입고, 억지로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오줌을 누고, 이를 닦고, 머리를 빗고, 본질적으로 누군가에게 더 많은 돈을 벌게 해주는 장소로 가기 위해 교통지옥과 싸우고,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해야 하는, 그런 삶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p190) 

'그런 삶'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수요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그러한 사람들만이 '공급'의 pool에 속할 수 있는 세상이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며, 이것이 바로 --- 헨리 치나스키가 가졌던 "도대체 나한테는 분명히 없는데 그 작자들은 갖고 있는 게 뭔지"(p241)이란 의문에 대한 해답이었었던 겁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헨리 치나스키가 체득한 자본주의란, 그리고 그가 배우게 된 '수요와 공급'이란 결국,


"한쪽에 잔 다르크가 있다면, 언제나 그 시소의 반대쪽에는 히틀러 같은 자가 자리를 잡고 있기 마련이다. 선과 악의 오래된 이야기처럼 말이다."(p193)

​의 양극단(extreme)으로만 이루어진 도식(圖式)으로 정의내려집니다. 그리고 그 역시 (삶에서 배운 바 대로) 스스로 때로는 잔 다르크가, 한 때는 (작은 틀 안에서나마) 히틀러가 되기도 하지요. 어쩔 수 없습니다. '시장자본주의'란 당시에도 그러한 것이었으며, 2016년 현재에도 여전히 그러한 것이니까요. '고용의 유연성'이란 것이 고용인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듯, '수요와 공급'이란 결코 동시적으로 발생되고 균형을 이루는 것이 될 수 없는, 그런 '자본주의' 체제를 우리는 벗어나지 못했으며, 또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라는 예감을 그저 안타까워만 할 뿐, 그리고 그러다가/그러면서 '현명'해질 우리도 역시 언젠간/결국...


인간의 영혼은 위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찌 됐든 인간은 동전 한 푼짜리 막대사탕보다는 고급 비프스테이크를 먹고 0.5리터들이 위스키를 마신 다음에야 훨씬 더 글을 잘 쓸 수 있다. 궁핍한 예술가라는 신화를 새빨간 거짓말이다. 모든 것이 다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뒤에야 사람은 더 현명해지고 동료 인간의 피를 짜내고 그를 태워 없애기 시작한다.(p91) 


【 그리하여 】

​남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게 전부다. 희망. 사람을 낙담시키는 것은 바로 희망의 결핍이다.(p91)

​'희망의 결핍'을, 이 소설 속에서 헨리 치나스키가 내내 마시는 술과 탐닉하는 섹스에의 이유라 할 수는 없다라 생각합니다. --- (물론 어느 정도는 '희망의 결핍'이 그로 하여금 술과 섹스를 찾게 하였겠으나) "길 건너편에 술집이 있었다"(p63)라는 단순한 사실도 치나스키가 술을 마셨던 이유가 되었기도 했으며, "인간은 단지 먹고, 자고, 자기에게 맞는 옷을 챙겨 입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침대에 틀어박혀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실 때, 세상은 여전히 저만치 떨어져 온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당신을 목구멍 속으로 집어 삼키지 않는다"(p96)와 같은 안식처로서의 효용이 이유가 되기도 했지요. 저에게도 진짜, 위의 두 가지 이유로 술을 마셨던 적이 적잖이 있었/많았었었으나, 그래 무릎을 탁 치며 공감을 했었으나, 아쉽게도(?)

내 자지를 거의 절반쯤은 물어뜯고, 불알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당기던 그녀는 나를 바닥에 넘어뜨렸다. 라디오에서는 말러가 연주되고 그녀의 빨아대는 소리가 온 방안을 가득 채웠다.(p50)

​와 같은, 뭔가 강압적/몽환적/막장스런 분위기는 아쉽게도 경험해보지 못했었기에, (그저 '섹시하다, 야하게 생겼다' 수준이 아닐듯한) "섹스를 뚝뚝 흘리고 다7"(p82)니는 여자를 만나보지 못한 저이기에,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섹스 장면에는 딱히 뭔가 반응이 되지는 않더군요. (뭐래) 어쨌든! --- 헨리 치나스키가 경험했던 여자들과의 섹스는 그저 육체적 유희였을 뿐이었다라 생각합니다. 그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그로 하여금 사랑이 결부된 섹스란 단지 (승자들만이 등장하는) 로맨스 소설에서나 해볼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요.


​"사랑은 진짜 인간들이나 하는 겁니다."(p85)

 

​………………………………………………………………………………………… 


분명! --- '이런 미친 놈의 방랑과 방탕을 내가 왜 읽어야 하지?'란 의문을 가진 독자들도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20대 초반 혹은 60살이 넘어 만약 이 소설을 읽었다라면 저 역시 아마도 그리 생각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의 제 나이는!


"그 차는 스프링이 다 나갔고 라디에이터가 줄줄 샜지만, 어쨌든 달렸다"(p98)


'내일엔 내일의 태양은 뜬다'류의 대책없는 희망 강요에 기대는 삶보다는, '어쨌든 달렸다'란 헨리 치나스키의 삶이, '좆까! 내일 뜨는 태양도 어차피 진다고!'라 말한 것만 같은 헨리 치나스키의 가치관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라 (다행히도?) 아직은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러하기에,

위에 써놓은 저의 독후감이 '매우 매우 잘못된 이 소설의 감상'이다란 확신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작가 찰스 부코스키의 묘비명이라는 "Don't Try!"가 이에 대한 가장 적절한 채점일 겁니다,란 스스로의 변명을 반드시 명기한 후에라야 마지막 <확인>을 클릭해낼 수 있을 듯 합니다. 암튼!

 

   
 

"그리고 나는 내 그걸 세울 수 없었다"(p312) 

 

 

 

 

 

로 끝맺음되는 이 소설의 다음 이야기, 「우체국」은 또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 헨리 치나스키를 보여줄 지 무지무지 궁금하네요. 2016년의 여름휴가는 이렇게, 헨리 치나스키와 함께 쭈욱 보내게 될 듯.

 

 



 

  1. <미스터 버티고> 사장님께서는 이 소설을 'beat generation'과 관련있다 소개해주셨습니다.
  2. "노동자가 기업에서 받은 소득을 '시장임금'이라고 한다면, 사회에서 받는 보육료 지원금, 기초노령연금 등은 '사회임금'이라고 부를 수 있다.(p223) …… 2000년대 중반 한국의 사회임금은 7.9퍼센트이다. 우리나라 가구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가계 지출의 92.1퍼센트를 직접 시장에서 벌어야 한다는 이야기다.(p226) …… 한국에서는 왜 구조조정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갈등하는가? 다양한 사회,정치적 요인이 있지만, 사회임금이 전체 가구 운영비에서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원인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 구조조정은 '가계 파탄'을 의미한다. … 최근 쌍용자동차 사태는 시장임금에만 의존해 사는 한국 사회가 얼마나 구조조정에 취약한지, 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 비용이 얼마나 큰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낮은 사회임금은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왜 초과 노동에 얽매이는지도 설명해 준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노동시장의 위기를 완화해 줄 수 있는 사회임금에 대한 기대가 없다. 일감이 있을 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어려움에 대비해 조금이라도 더 시장임금을 모아 두어야 한다. 종종 언론들이 한국의 노동자들이 지나치게 임금 올리기에 몰두한다고 비판하지만, 노동자들이 시장임금에 목숨을 거는 건 척박한 현실에서 살아남으려는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다.(p227) ……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과도한 초과 노동, 격렬한 구조조정 비용은 역설적으로 낮은 사회임금에 대응해 노동자가 선택할 수 밖에 없는 '합리적' 경제 행위일 수 있다. 노동자 개인에게 이것을 탓할 수는 없다."(p228) - 강수돌 외 著, 「리얼 진보」, 레디앙 刊, 2010.
  3. 헨리 치나스키가 명명한 '훌륭한 추가 볼베어링형 인간'에 관한 다음의 묘사는, 여전히 2016년의 대한민국에서도 유효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할아버지 덕에 유학도 다녀올 수 있었고, 떵떵거리며 살아올 수 있었던 정일선C 같은 사람이 원했던 인재상이 바로 다음이었던 듯) - "추가 볼베어링이란 별다른 의무 조항 없이 언제든 그냥 내보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 그 사람은 무엇이 세상사를 계속 순조롭게 흘러가게 만드는지를, 무엇이 어머니처럼 우리를 돌봐주는 회사를 최선의 상태로 유지하게 만드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해야 회사의 불합리하고, 지속적이고, 쩨쩨하고, 사소한 모든 요구 사항을 만족시킬 수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훌륭한 추가 볼베어링형 인간은 얼굴도 없고, 성(性)도 없이, 그저 희생적인 사람이다. 그는 항상 열쇠를 가진 첫 출근자가 도착할 때까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는 곧이어 호스로 물을 뿌려가며 가게 앞 인도를 청소한다. 그리고 그는 직원들이 속속 도착할 때마다 그 사람 이름을 불러주며 기쁘게 인사한다. 얼굴에는 언제나 밝은 미소를 띠고 듬직한 태도를 선보이면서 말이다. 공손한 사람, 그것이 끔찍한 노역의 시작을 앞둔 모든 사람의 기분을 조금 낫게 만든다. 그는 화장실 휴지가 충분한지 확인한다. 특히 여자 화장실에서는 더 철저히 확인한다. 여자 화장실의 휴지통들은 절대로 넘쳐나서는 안 된다. 유리창에 찌든 때가 있어서는 안 된다. 책상이나 사무실 의지가 조금이라도 망가졌을 때는 즉시 수선해야 한다. 문들은 쉽게 여닫을 수 있어야 한다. 시계는 잘 맞춰져 있어야 한다. 카펫은 바닥에 잘 고정된 채로 있어야 한다. 너무 먹어서 힘이 넘치는 여자들이 가벼운 짐 하나라도 직접 옮기게 해서는 안 된다."(pp193-195)
  4. 신경숙 作, 「외딴방」 p209, 문학동네 刊, 2014.
  5. 좋게 표현하면, '예측가능성'이겠죠만, 공무원을 직업으로 선택하는 솔직한 이유가 '예측가능성'이라기보다는 '변동없이 살 수 있음'임을 부인할 수 없다라 생각하기에.
  6. 다른 표현으로는 "동시적으로(simultaneously)".
  7. "난 다리라면 사족을 못 쓰죠'(p48)라는 헨리 치나스키의 성적 취향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 「열쇠」를 떠올려줍니다. : "나는 어떻게든 저 멋지고 아름다운 발을 나의 혀로 마음껏 애무하고 싶은,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온 염원을 이제야 풀 수가 있었다" - 다니자키 준이치로 作, 「열쇠」 p36, 창비 刊,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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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부신 친구 나폴리 4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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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그런 친구가 있다. 「나의 눈부신 친구」는 그런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p443)

- <옮긴이의 말> 중

'그런 친구'에 대한 옮긴이의 서술1에는 절반만의 동의를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그럼 무어라 표현하겠느냐,란 질문에 어떠한 대답을 하여야할지/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절반만의 동의'란 것을 거둬들이지는 못하겠네요. 아마도! --- "살아온 세월이 길지 않을 때에는 혼란스러운 감정의 바탕에 있는 혼란의 실체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다"(p27)란 작품 속 구절이, 표지마저 눈부신 이 작품, (4부작 중 1부작인) 「나의 눈부신 친구」를 읽고 난 후, 그 감상문을 쓰기 시작하는 이 시점의 제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


끔찍하지만 빛나는(p54) …… 릴라는 너무나 뛰어나서 우리 같은 평범한 아이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그녀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었다.(p55)   

 

릴라와 레누라는 이름의 두 '소녀'가 '여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 빼박할 수 없는 성장소설2입니다. 성격도 나쁘고, 외모도 별로인, 하지만 (이야기의 화자이자 소설 속 두 주인공 중 한 명인 '레누'라는 이름의)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릴라. 그러나 --- 어릴 적에는 그 차이가 모든 면에서 그리 큰 격차를 보였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언제나 2등이었던 나는 언제나 1등인 릴라라면 가는 법과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 바다까지 가는 길에 대한 모든 정보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p95)라는 정도였으며, 고작 그런 수준의 실체에 대한 기대와 기댐이 있는 믿음이었을 뿐이었죠. 그리고!!!

레누가 느끼는 릴라에 대한 '2등 의식'은 면면에 따라선 '자신이 더 우월함'의 모습을 띠기도 했습니다. 첫 생리를 경험한 자신에 비해, 아직 생리를 하지 않은 릴라를 향해 화자(話者)인 레누가 가지는 (남자들은 결코 경험해볼 수 없는!) 우월감 - "갑자기 그녀가 작게 느껴졌다. 이제까지 보아온 모습보다 더 작게 느껴졌다. … 생리가 뭔지도 몰랐고 사내아이에게 고백을 받은 적도 없다."(p120) - 은, 그 나이의 소녀에게 다음과 같은 잠시동안의 만족을 선사해주기도 하였죠.


그녀의 약한 면을 감지함으로써 생긴 불편한 감정은 나의 우월함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비밀스럽게 변질되었다.(p102) ……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릴라는 갈 수 없게 된 학교에 나는 가게 됐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을 은밀히 만끽하고 있었다.(p116)

이러한 '비밀스런 욕망과 은밀한 기쁨'이 서로를 '나의 눈부신 친구'라 부르게 되는 훗날로 가는 과정 중의 하나라 볼 수도 있겠으나 결국! --- (릴라는 진학하지 못한 중학교에서 얻은) 자신의 성취를 "진정한 1등이 없는 상태에서 1등을 했다는 생각"(p154)라는3, 일종의 '역전시켜낼 수 없는 열패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레누에겐 그나마의 위안이었었죠.4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보티첼리의 그림에 나오는 비너스보다 더 아름다워질 여인"(p189)이란 어느 50대 신사의 말처럼, 레누 스스로 "나폴리 전체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그 묘한 얼굴"(p193)이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시기를 거쳐, 릴라는 실제로 "역광에서조차 빛이 나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p349)가 되어갑니다. 그 과정들 중의 결정적 순간은 바로 다음의 장면이었죠.

  

릴라에게 고백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마르첼로였다. 그 이름을 듣자 나는 명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파스콸레의 사랑은 릴라가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마르첼로는 잘생기고 부유하고 자가용이 있는 데다 무뚝뚝하고 거칠고 마피아와 연관이 있고 원하는 여자는 언제라도 취할 수 있었다. 그런 마르첼로의 사랑을 얻는다는 것은 그가 악명 높은 악당인데도 또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쩍 마른 소녀에서 어떤 남성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인으로 승격되는 것을 의미했다.(p241)

……………………………………………………………………………

​옮긴이는 이 작품이 큰 성공을 거둔 비결을 "시간과 장소를 떠나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띠고 있기 때문일 것"(p444)라 적고 있습니다만, 시대와 장소도 익숙치 않은, 더군다나 '첫 생리의 시기'로 우월감을 느끼는 소녀들의 성장기가, 적어도 2016년을 만 47세의 대한민국 남성인 저에게, '첫 자위의 시기'로 우월감을 내보였던 중삐리 시절을 보내지는 않았/못했던 저에게, (그리고/어쩌면 당신들에게도) 과연 '보편적으로' 보편성을 느끼게 해주었다라 말해내도 되는가란 점은 솔직히 의심스럽기만 합니다. 게다가 이 작품에 대한 '만족하지 못했음'이 단지 이러한 '보편적이지 않은 보편성'으로부터만 기인되는 것이 아닌, --- 적어도 60대 초중반임에 틀림없는 화자5가 털어놓은 자신의 성장기인 이 작품을, 이어지는 이야기들인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나폴리 4부작> 중 1부라는 이 작품을, 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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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못난 구두네. … 머리에서 태어난 꿈이 발밑으로 추락했잖아."(p418) 

​아마도 이 4부작의 최종 결론이 아니지 않을까 싶은 릴라의 중요한 위의 말을 담고 있는 이 작품만을, 굳이 따로 이렇게 먼저 출간했었었야 했는가하는, 차라리! 4부작 모두가 번역된 후 한 번에 출간했었더라면 --- "마르첼로는"으로 시작되어 "바로 그 신발이었다"라는 이 작품의 마지막 구절이 자아내는 궁금증을 훨씬 더 극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훨씬 더 아름다운 잔향을 선사해줄 수 있지 않았었을까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습니다. 언제 2부가 출간될지 알 수 없으나, 그 전까지 이 작품의 마지막 구절을 그저 다음 회를 꼭 보게 만들기 위해 억지로 장면을 정지시키는 주말 드라마의 마지막과 다름 없는 수준으로 격하시켰을 뿐인, 출판사의 조급함아 자아낸 아쉬움 말이죠. 어쨌든!!! 

​"최악인 것은 릴라의 삶이 내 삶보다 우월할 것이라는 확신이었다."(p366)

​레누의 이 확신이 2,3부를 통해 어떻게 변화되어 갈 것이며, 4부의 마지막에선 어떻게 마무리지어질까야말로 - 시리즈의 4부작인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가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었다니, 소녀들의 성장과 더불어 진행될 2·3·4부엔 뭔가 '결정적 한방'이 들어있겠을 꺼란 (「채식주의자」가 가져왔던 2016년版 '한강의 기적'스런) 기대와 함께 - 독자들로 하여금 이 연작을 읽어보게 하는 주 원동력으로 작용할 것 같습니다. 암튼!

드라마는 다 끝나고 난 후, IPTV로 한꺼번에 돌려보는 게 정신건강에 좋듯, 연작소설은 자고로 시작하여 끝을 봐야 그 진짜 재미를 즐기게 되는 것인듯.

 

  1. "별로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성적은 언제나 상위권을 차지하고, 아무런 옷이나 걸쳐도 맵시 있게 보이고, 가만히 있어도 모든 사람의 시선을 독차지하는 친구. 언제나 한 걸음 앞서서 모든 것을 이루어내는 친구. 따라잡으려고 아무리 열심히 뒤쫒아도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친구. 추구해야 할 인생 목표에 언제나 기준이 되는 존재. 인생의 동반자이자 경쟁자이고 애정의 대상이자 증오의 대상이기도 한 그런 존재."(p443)
  2. 옮긴이는 이를 "시스터후드(sisterhood)에 가까운 우정 이야기"(p443)이라 묘사하고 있지요.
  3. 심지어는 --- "싸늘한 새벽에 일어나 주방에서 복습을 하다보면 내가 귀족들이 다니는 학교 선생님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생 그래왔던 것처럼 구둣방 딸내미에게 잘 보이려고 달콤한 잠을 포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p202)
  4. 레누에게 릴라는 심지어 '두려움을 안겨주는 존재'로까지 인식되기도 했지요. - "이것은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어온, 살면서 단 한 순간도 사라지지 않은 두려움이었다. 나는 릴라의 삶의 일부분을 놓침으로써 내 삶의 밀도와 중요성까지 희석될 것 같아 두려웠다."(p277) : 이 두려움이, 4부작을 통해 내내 레누에게 지속되었던것인지, 혹은 1부작의 시기에서만 그러했었던 건지를 확실하지 않습니다. 4부작 중 고작 1부만 읽어낼 수 밖엔 없다라는 것이 주는 아쉬움이겠죠. --;;
  5. "지난 60년 동안 내게 그녀는 '릴라'였다. 만약 내가 그녀를 갑자기 리나나 라파엘라라고 부른다면 그녀는 우리의 우정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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