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어쩌다 보니"(p12) 보결 집배원1이 된 헨리 치나스키의 30대 초반부터 40대 후반까지의 삶2을 그려내고 있는 소설입니다. (이 작품 「우체국」의 이전 시기를 담고 있는) 「팩토텀」의 마지막 문장을 장식하고 있었던 "그리고 나는 내 그걸 세울 수 없었다"3라는 그의 고백은 거짓 혹은 기우였던 걸로 곧 밝혀지지요. 여전히 그는 여자가 꼬시면 기꺼이 넘어가주면서, 혹은 그가 꼬셔서 넘어와주는 여자와의 섹스를 즐깁니다. --- ​"세상에, 집배원들은 편지를 넣고 다니면서 여자들하고 같이 눕기도 하는구나. 이거 나한테 딱 맞는 일인데. 오 이거야, 이거. 이거라고."(p12) 하지만!


일 개인에게 (오로지!) 행복하기만 한 삶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시장자본주의의 내재적 본성은 예의 헨리 치나스키의 삶에도 드리워집니다. 그가 11년이란 시간을 보낸 우체국에서의 삶이 헨리 치나스키에게 안겨준 유일한 선물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이 잔인함의 시작은 이러했지요.


뜨거운 목욕물과 베티의 쭉 뻗은 다리 생각을 계속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해야 계속 걸어갈 수 있었다. … 하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너무나 먼 길이 남아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는 위스키 한 잔을 손에 들고 안락의자에 앉아 베티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방 안을 돌아다니는 걸 보는 것 뿐인데.(p32)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네가 가진 희망을 이루려면, 남아 있는 먼 길을 먼저 걸어가야 한다'라 단호하게 가르쳐줍니다. 뭐,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요. 저 역시 종원군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전에, 해야할 일을 먼저 해라'라 가르치고 있으니까요. (그러하기에) 저라는 사람 역시 철저한 자본주의의 산물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 (영화 <아일랜드>에서 자신들이 복제 인간임을 알고난 후 그들이 보여주었던 반응이라든가, 영화 <트루맨 쇼>에서 역시 주인공이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된 후 보였던 반응과 같이) '나의 현재/실체는 이러하다'라는 걸 알고 있다는 것4이, 그러한 현재/실체를 낳게해 준 과거 요인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려는 행위와 그 어떤 모순도 일으키지 않는다라 생각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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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것은 앞날에 남았으리' --- 저의 젊은 시절을 강렬하게 지배했던 문구였었습니다. 실제로, 더 좋은 것이 바로 앞날에 실재하고 있는 것을 보았었기도, 혹은 확신으로 기대하기도 했었었지요. 40대 후반이 된 지금에도 역시나 이 말을 가슴 한 구석에 넣어놓고는 있습니다만, 그 구체적인 '더 좋은 것'의 모습은, 더 중요하게는 그 '더 좋은 것'으로 도달하기 위해 현재 감내하여야 하는 실체란 게, 20대 때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습니다. 헌데 이런 변화가, 과연 저 개인에게만 일어난 특이한 예인걸까요?


자본주의 역시 우리를 향해 "Best is yet to come!"이라 항상 외치고/꼬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구체적인 'Best'란 것이 엄청난 부(富)이건, 혹은 '뜨거운 목욕물과 베티의 쭉 뻗은 다리'와 같은 단순한 차원의 것이건, 그들을 이루어내려면 반드시 '남아 있는 먼 길'을 먼저 걸어가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걸려 있지요. 그 가르침에 충실히 길들여진 우리는 먼 길을 일단 걸어갑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면 어김없이 항상 "Best is yet to come!"이란 달콤한 마약이 어디선가부터 들려오지요. 그 마약에 인이 박히게 되면, 이제 그 환청은 외부가 아닌 나의 내부에 아예 장착이 되어져버리고, 그 후론 --- 내가 원했던 'Best'가 무엇이었던건지조차 잊었다 해도, 심지어는 내가 원하는 'Best'란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나는 앞에 남아있는 길을 걸어가야하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게 되죠. 당신은 안 그러신가요? 전 그렇습니다. 이건 결코 겸손한 예의로 나오는 고백은 아니에요.하지만 이 소설에서 우리는!


그래서 결국 그렇게 되었다. 나는 집에 있는 베티의 곁으로 돌아갔고 우리는 술병을 땄다.(p61)

장수(長壽)하길 원하기에 운동으로 자신의 건강을 지켜내려는 의도는 어느 새, (장수하기 위함이란 애초의 목표는 잊은 채) '건강 그 자체'를 최종의 목표로 만들어버리는 오류를 흔히 범하게 됩니다. 이처럼 --- 당신이 누릴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라는 속내를 지니고 있는 "Best is yet to come!"의 유혹을, 저는 (그리고 아마도/어쩌면 당신 역시) 이겨내지 못해왔습니다. 그러했기에,


"우리의 삶은 왜 어느 한순간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살지 못하고, 왜 늘 다른 곳에서 보상받기를 원하는지 가슴치며 물었다."5란 목수정의 글을 읽는 순간이 저로 하여금 똑같이 가슴치며 울고 싶게 만들어주었던 것이며, "그 어떤 세월도 또 다른 세월을 위한 볼모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의 20대, 30대, 40대는 모두 똑같이 소중하고, 나의 모든 시간들에 적당한 노동과 적당한 즐거움을 배분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다"6란 목수정의 글은 이 뒤늦은 나이에 뭔가 일상 가치관의 결정적 방향전환을 자아내었던 것이었었죠. 이처럼,


교육이란 것이, 그것도 '대한민국에서의 교육'이란 것은 지식의 주입으로만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 인간 본성 자체를 길들이는 것으로도 작동하고 있었다7라는 걸 --- 저는 깨닫지 못했엇었고, 뒤늦게야 (그 교육에 충실했었던 결과로 본성 자체를 잊었거나 죄악시하게 된 것을) 후회하고 있으나, 헨리 치나스키는 길들여지지 않았고 잊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이죠.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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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헨리 치나스키가 처음부터 완벽하게 자신이 살고 있는 체제와 그 체제가 요구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왔던 건 아니었습니다. 라스베가스에서의 혼인 신고로 자신의 아내가 된 열세 살 연하의 아내, 조이스의 끈질긴 요청으로 그는 다시 직장이라는 조직으로 들어가야 했었었고, 그렇게/어느덧 세월을 흘려보내다 보니,


"11년이라니! … 11년. 매일 밤이 길긴 했어도 세월 참 빨리 흘렀다. … 여기 올 때는 84킬로그램이었다. 지금은 101킬로그램이었다. 고작 오른팔만 움직이니까."(pp219-220)

옮긴이가 길게 서술해 놓은 부분9을, 헨리 치나스키는 "고작 오른팔만 움직이니까"란 단 한 문장만으로 그렇게10--- (당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체국이라는 조직 내에서 보낸 11년이란 세월은 그에게도 역시나,


"음식과 물이 여기 있긴 한데, 저 열린 공간은 뭘까? … 인간이건 새건 모든 것은 이런 결정을 해야 한다. 어려운 게임이다."(pp102-103)

과 같은 고민을 하게 만들주었지요. 밀튼 프리드만 교수가 말했던 <Free to choose>란 것이 주어진 platform 자체를 일단 받아들인 후에야 행사할 수 있는 자유이듯, --- "어디에서라도 일은 해야 하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그게 노예의 지혜였다"(p232)로 대변되는 환경 속에서의 11년은 그에게도 예의 "그런데 빠져나간들 천국일까?"(p236)이라는, 자신이 살아온 platform으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의문과 망설임을 심어놓았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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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자 아침이었고 여전히 살아있었다. 아마 소설을 쓸 것 같군, 생각했다. 그래서 소설을 썼다."(p241)


새장 밖으로 나온 헨리 치나스키가 말해주고 있는,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천국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그가 '여전히 살아있'을 수는 있었었지요. --- "후회하지 않는 삶에 대한 표현11"(p253)이란 옮긴이의 표현을 가장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부분 역시 "아침이 되자 아침이었고 여전히 살아있었다"란 바로 이 구절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性)에 대한 인간의 본능이, 청소년기부터 죄악으로 가르쳐지고, 성인이 되어서조차 사회적 규제와 공적 가치관, 거기에 더해 스스로 만들어놓은 '타인으로부터의 평판(reputation)'이란 제재하에까지 억압되어져야만 하는, 그리고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12이 되어있는 2016년의 대한민국에서 사는, 살아갈 저에게 --- 헨리 치나스키의 일거수 일투족은, 그냥 스트레이트로 받아들이는13 헨리 치나스키의 삶은 '교육에 의해 이미 상실해 버린 인간의 본성에 대한 아쉬움을, 나를 대신하여 거침없이 발휘하여 주는 Hero'의 모습을 받아들여집니다. 소설이 선사해주는 효용 중,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에의 대리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란 점에서, 「팩토텀」와 「우체국」은 (비록 '읽는 재미'같은 건 거의 선사해주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읽어본 그 어느 소설들보다 훨씬 더 짜릿!한 쾌감14을 안겨줍니다. 게다가, "Best is yet to come!"이라 외치는 듯한 제목의 소설, 「여자들」이 바로 다음 이야기라는 점은 예의, 한여름날 헥헥거리는 저를 더욱 헉헉거리게 해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마저, 그리고! --- 「팩토텀」에 이어, 써놓고도 주저하게 되는 독후감으로 느껴지는 것 역시나 더욱 커져있기만... --;;   

 


※ 청춘 시절의 헨리 치나스키! :팩토텀 

 



 

  1. ​"새벽 5시면 우체국에 앉아 업무를 배정받을 수 있기를, 정규 집배원이 병으로 결근한다는 연락을 해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정규 집배원들은 주로 비 오는 날이나 찌는 듯이 무더운 날, 배달 물량이 두 배로 느는 휴일 다음 날이면 아프다고 전화를 했다."(p13)
  2. 보결 집배원 생활 3년 후, 그는 정규 집배원이 되었으며 이후 등장하는 장면에서 "나는 서른여섯이었다"(p68)이란 표현이 나오며,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나는 이제 8개월만 있으면 쉰 살이 되었다"(p235)란 부분이 나오지요.
  3. 찰스 부코스키 作, 「팩토텀」 p312, 문학동네 刊, 2007.
  4. 즉, 무언가의 산물이라는 점.
  5. 목수정 著,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p112, 레디앙 刊, 2008.
  6. 목수정 著, 위의 책, p110.
  7. 물론 이러한 '교육의 비정상적 작동'이 대한민국에서만 발생되는 것은 아닙니다. --- "일찍이 부르디외가 명쾌하게 일갈한 바 있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취향이란 많은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처럼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출신계급과 교육수준, 집안 환경 등이 촘촘히 얽혀서 구조적으로 생산되고 또 확산된다. 개인의 의지로 쉽게 떨쳐낼 수 없는 유기적 습성이다."(목수정 著, 위의 책 p209)와 같은 일반론이 대한민국에서는 (예를 들어) "경제적 풍요가 도리어 최고급 메이커 제품에만 한정된 선택을 하도록 하는 족쇄가 되는 셈이다"(목수정 著, 위의 책 p210)으로 대변되는 현상을 유난히도 강렬하게 낳는다라는 점에서 '대한민국에서의 교육'에 강조를 하였습니다.
  8. 이 작품의 옮긴이는 이를 '헨리 치나스키는 이 조직의 위계와 규칙에 항의하는 인물이다.(p247) … 소설의 마지막, 치나스키가 우체국을 걸어나오는 것은 조직의 억압에 대한 자발적 저항이다.(p248)'이라 표현하고 있지요. 저의 이해와 비슷하기도, 약간 차이가 있기도 합니다.
  9. "(우체국에서의) 이 노동에서는 어떤 의미도 찾아볼 수 없으며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요식과 절차만이 맹목적으로 강요된다. 개인의 개별성은 말살되고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권리는 무시된다. 전후 미국은 과학적 경영을 표방하는 테일러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고 포드주의에 입각한 경영이 팽배하던 시기였다. … 이 소설 내의 <우체국>은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가 지배하는 노동 환경으로 묘사된다."(pp246-247)
  10. 이러한 은유적 서술은 다음에도 있지요. --- "그는 20대부터 집배원이었고 이제는 60대 후반이었다. … 그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우직한 말 같았다. 아니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멈춰버린 낡은 차 같거나. … 이 착한 아저씨가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pp50-54)
  11. 「팩토텀」과 이 작품 「우체국」을 읽는 내내, 백현진의 "학수고대했던 날"이란 노래의 가사가 떠올랐더랬습니다. 그 노래는 '미안합니다. 정말'로 끝맺음이 되지만, 예의 헨리 치나스키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이나 후회는 없지요. 아직!까지는.
  12. 심지어는 법률로까지 정해져 있는!
  13. 보수적 시선에서 헨리 치나스키의 삶을 써보자면 온통 가시돋힌 표현들로만 가득차게 될 겁니다. (비록 '보수적'이란 단어를 사용하긴 했습니다만, 그것이 '일반적'이란 단어로 대체되어야 한다라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주장, '보수적' 대신 '꼰대스런'이란 단어 역시 사용될 수 있어야겠지요.)
  14. 즉! --- 저 역시, 헨리 치나스키의 삶이, 제가 살아내고 있는 현실에서는 적합하지도, 옳지도 않다라는 걸 알고 있으나, 그러하기에 더더욱 그의 삶에 대한 '이루어낼 수 없는 부러움'이 자라난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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