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란 것은 자발적으로 지켜질 수/이행될 수는 있다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린 이후, 즉 혁명/반란 이후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규정/정립만큼은, 완벽하게 자발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분배의 규칙'이란 것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갈리듯, '새로운 규칙'에 대한 사회의 모든 성원들의 자발적 합의란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것이죠. 결국,
돼지들은 직접 일은 하지 않는 대신 다른 동물들을 감독하고 지휘했다. 아는 게 많았기 때문에 돼지들이 지도 역할을 맡는다는 건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다. (p28)
위의 한 문장은, "인간의 모든 혁명은 '반드시' 그것의 당초 약속을 배반하게 되는가?"(p156)란 질문에 대해 "다분히 결정론에 가까울 정도의 비관적인 관점과 태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p156)란 역자 도정일의 견해를 뒷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즉, --- "모든 동물을 평등하다"(p26)란 계명을 지켜내기/유지할 수 있기 위해, 불평등을 ("아주 자연스런 일"의 수준으로까지!) 고의적으로 인정하여야 한다라는, 그리고 이 사실에 모든 성원들이 합의한다라는 것이죠.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르게 되면, 또한 그 과정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라면 드디어/결국 우리는,
"정치 권력은 결코 지배하는 자와 지배 당하는 사람, 주인과 노예, 착취하는 자와 착취를 당하는 사람의 구별을 철폐하지 않는다."
라는 아나키즘의 선언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작가 조지 오웰 역시,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p123)란,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이 묻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혁명은 '반드시' 그것의 당초 약속을 배반하게 되는가?"(p156)란 질문에 대해, "definitely Yes!"란 답을 하고 있기도 하지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 우리는, 기존 권력을 대체하는 '새로운 권력'의 등장이 필연적이다,란 사실이 곧 '혁명이란 개념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란 마지막 희망, 곧 "권력의 타락은 인간 사회의 불가피한 조건인가?"(p156)란 질문에 대한 답을 이 작품 속에서 찾아보아야 합니다.
"권력을 갖는 자는 실상은 다른 사람들이 그의 권력을 인정해 주기 때문에 비로소 권력을 갖는 것입니다. … 그러나 권력의 인정이 일상화되면, 권력을 가진 자는 자신의 권력이 스스로의 내적 특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 반대로 권력에 지배당하는 이들은 스스로가 그 권력을 부여한 원천임을 깨닫지 못하고 일상적으로는 권력을 두려워하고 그에 기꺼이 복종합니다.
【 권력의 유지 】
"독재자에도 상·중·하의 등급이 있다. 박정희는 중급은 되는 독재자였다. 김일성은 최하급이었고"란 대학 시절 "한국경제론'을 가르쳐주셨던 은사의 견해는 권력/인간에 대한 희망을 여전히 놓지 않고 있는 그 분의 사고(思考)가 반영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에 반해, 에티엔 드 라 보에시는 오래 전 16세기 때 이미, 권력을 손에 넣은 군주는 근본적으로 그가 선인(善人)이라 하더라도 "언제든 악인(惡人)으로 돌변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권력자'란 자리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위대함이라 불리는 그 무엇에 홀려 기고만장"해질 수 밖에 없는, 그리하여 결국 "잘못할 수밖에 없는 자리"라는, 매우 비관적인 견해를 선보였었었지요. 하지만,
좁게 보아 '권력자 개인', 허나 궁극적으론 '권력 자체의 속성이 그러하다는 것과, 그 권력자/권력 자체가 유지될 수 있다라는 건 엄연히 별개의 문제로 취급되어야 합니다. 권력자는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일정 기간마다, 극단적으론 '혁명'을 통해 로 바꿔버릴 수 있거늘, 이 오랜 인류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듯이, 큰 틀에서 보아, 권력 자체의 속성이란 건, 변함 없이 내내 유지되어 오고 있지요. 도대체! --- 어느 것에서부터, 어떠한 방식으로 권력은, 유지의 원동력(driving force)을 얻어내고 있는 것일까요?
"권력은 네 개의 서로 다른 통로, 즉 어떤 일을 강제로 하게 하는 완력, 윤리적 의무감을 부여하는 규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선전, 원하는 행동을 이끌어내는 보상을 통해서 작동한다. … 권력의 장벽은 완력, 규범, 선전, 보상이 효과를 발휘하는 한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
모이제스 나임이 제시한 네 가지의 원동력들 중, 눈에 보이는, 즉 현실로 체감되는 것은 '완력' 하나 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밖의 것들, 심지어 '보상'이라는 것마저도 권력이 얼마든지 심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지요. 조지 오웰이 이 작품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권력의 작동과 유지 역시, 이 네 가지 동인(動因)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도구는, 뜻밖에도(?)/당신의 예상대로(?) --- '선전'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인간은 가져본 적 없는 것을 갈구하지는 않는다. 아쉬움은 즐거움을 안 뒤에 오고, 지나간 기쁨에 대한 기억이 있는 까닭에 불행을 인식하는 것이다."
권력의 작동과 유지에 종사하는 '선전'의 목표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세뇌'입니다. 세뇌는 아쉬움을 아쉬움으로 느끼지 않도록 만들어 내는, 지나간 기쁨에 대한 기억을 사라지게 하는, 그리하여 끝내, 불행을 불행이 아니라 인식하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선전의 결과, 첫 단계로 동물들은 "통과됐던 것 같은 기억이었고, … 기억한다고 '생각하고'"(p62)와 같이, 자신의 기억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기에 "존즈가 되돌아오길 바라는 것도 아닐 거고?"(p63)와 같은 일종의 협박이 더해지게 되면,
동물들로선 '반란' 이전의 상태가 어떤 것이었는지 지금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스퀼러의 발표를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p82)
과거에 대한 기억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는, 그리하여 결국엔 반란/혁명의 이유 자체마저 잊게 되는 단계로 가게 되지요. 일단 잊게 되면 이젠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 (p101)가 더이상 아닌, 이제부턴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더 좋다!"(p117)로 전환되는 본격적 '세뇌'를 접하게 됩니다. 그러한 끊임없는 세뇌의 결과, --- 반란/혁명이 향하였던 비난/극복의 대상이 형태만 바꾸어 나타났음에도, 그들은 새로운 권력/권력자에게 새로운 복종을 보이게 되지요. "통계 숫자보다는 먹을 것이나 더 많았으면 좋겠다"(p82)란 본능적 바람(願)까지는 버려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그들은 고달프게 일한다 해도 그 노동은 최소한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 모든 동물들은 평등했다. (p115)
자신이 속해 있는 이 사회 속 모든 구성원들은 평등하다라고, 그런데 또 그 평등이란 게 '절대적 평등'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까지도 받아들이는, 그리하여 결국,
지난 날 존즈 시절에는 사정이 훨씬 더 나빴던 것임에 틀림없다고 동물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즐거이 그렇게 믿었다. 게다가 존즈 시절에는 모두가 노예였지만 지금은 누구나가 다 자유롭지 않은가, 그거야 말로 엄청난 차이가 아닌가. (p99)
이제! 사회 구성원의 일부는 이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믿음을 유지한 채 현실의 고통을 감내해내기 위해, '종교'라는 - 비록 종교계는 부인한다 할지라도 - 일종의 마약에 의존하게 됩니다. 작품 속 까마귀 모지즈가 언급하는 '슈가캔디 마운틴'에 대해 보이는 동물들의 반응이 점점 바뀌어, 그 존재를 믿고 싶어하게 된, 그리하여 믿게 된 것에 대해 작가는 --- 명확하게, 마약으로서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지요.
지금 그들이 배고프고 몸 고달픈 이승의 삶을 살고 있으므로 어딘가 더 나은 세상이 마땅히 존재해야 한다는 건너무도 옳고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었다. (p103)
【 권력에의 복종 】
새로운 권력이 선(善)한 권력일 수는 없었던 걸까요? 나폴레옹이 아닌, 스노볼이 권력을 행사했더라면 행여 그는 선한 권력자가 될 수 없었을까요? 권력의 속성이, 그것, 권력을 쥔 자를 타락하게 만든다라 하지만, 민중의 견제가 권력의 타락을 막아낼 수는 없는 것일까요?
당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그 댕기라는 건 바로 노예의 표시야. 댕기보다 자유가 더 값지다는 걸 모른단 말이오? (p20) …… 몰리는 털을 새로 깎고 앞머리에 분홍색 댕기를 달고 있었다 한다. 비둘기들은 몰리가 썩 기분이 좋아 보였다고 말했다. (p45)
1945년 발표된 이 작품에 실려 있는 위의 문장은, 위의 문장이 담고 있는 뜻은, 이미 16세기에 에티엔 드 라 보에시에 의해 똑같이, (심지어 그 주체마저도 '말'로 똑같이) 묘사되었었지요.
"우리는 여기서 자발적 복종의 일차적 근거가 습관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말이 길드는 과정과 같다. 말에 재갈을 채우면 처음에는 재갈을 물어뜯다가 나중에는 익숙해져 재갈을 갖고 장난질한다. 말에 안장을 얹으면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항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장비와 장신구를 뽐낸다."
이같은, 두 작품 사이의 연관성은 이 밖에도 적잖게 보여집니다. 조지 오웰이 적어놓은 "여러 해가 흘렀다. … 많은 동물들이 새로 태어났는데, 그들에게 '반란'이란 그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흐릿한 전통일 뿐이었다"(pp111-112)라는 길지 않은 문장 속엔,
"처음에는 강요에 의해 힘에 눌려 복종하지만 그 다음 세대들은 자유를 전혀 보지 못했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후회도 유감도 없이 앞선 세대들이 강제적으로 해야만 했던 일들을 자발적으로 행한다. …… 멍에를 지고 태어나 노예 상태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전 세대가 어떤 삶은 누렸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 태어난 대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재산,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도 하지 않고 출생 당시부터 주어진 삶의 조건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기게 된다.
또한, 혹은 반대로,
"큰 특혜가 작은 특혜의 먹이 사슬로 이어지고, 독재자와 결탁해 얻은 이익이 또 새끼 이익을 가져와 자유인의 신분을 기꺼이 선호하는 사람 수 만큼이나 독재 권력의 배를 불려주는 사람 수도 늘어나게 된다."
에티엔 드 라 보에시의 이 한 문장에 담겨져 있는 뜻을, 조지 오웰은 다음과 같이 (잘게 쪼개어!) 풀어내주고 있지요.
- 돼지들은 직접 일은 하지 않는 대신 다른 동물들을 감독하고 지휘했다. 아는 게 많았기 때문에 돼지들이 지도 역할을 맡는다는 건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다. (p28)
- 그들은 나폴레옹의 곁에 바싹 붙어 있었다. 그들이 나폴레옹에게 꼬리를 흔드는 모습은 지난날 농장의 개들이 주인 존즈에서 꼬리치던 모습 그대로였다. (p51)
- 농장은 그 자체로는 전보다 부유해졌으면서도 거기 사는 동물들은 하나도 더 잘살지 못하는 (물론 돼지와 개들은 빼고) 그런 농장이 된 것 같았다. 돼지와 개들이 너무 많은 것
이 그 한 가지 이유일 성 싶었다.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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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p117)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라 생각되는 문장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 이 문장 속 '평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집착하기 보다, 또한 이 결말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는, 이러한 결말이 나타나게 되는 과정의 개연성? 심지어 정당성?이라고까지 일컬어질 수도 있겠는, 바로 그것을 물어보는 것이 가장 의의있는 (한 글자 한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서) 독(讀).후(後).감(感).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저의 대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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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결의안을 제출하는 건 언제나 돼지들이었다. 다른 동물들은 투표하는 법까지는 알았지만 자기네 스스로 무슨 결의안 같은 걸 생각해 내지는 못했다. (p31)
권력의 타락을 비판하기에 앞서 --- ① 그러한 타락을 초래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혹 그것이 우리의 "무지와 무기력함"(p157)이 타락에 일조하지는 않았나하는 자기 점검과, ② "나폴레옹은 언제나 옳다"(p58)로 대변될 수 있겠는 권력에의 맹종, 그리고 아부가 바로, 두 발로 서서 걷는 돼지들의 등장에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p118)란 반응을 이끌어낸 것이 아니겠느냐,란 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전 믿습니다. 거기에 더해,
"이 단일국의 지도원리는 '자유와 행복은 양립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은 '행복'했지만 어리석게도 '자유'를 요구했다가 황야로 쫓겨나지 않았던가. 이제 단일국은 인간의 자유를 제거함으로써 행복을 되찾아준 것이다." (p127)
그 반성에, 위의 인용문처럼, 권력의 오남용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사용되지만 않을 수 있는 '나만의 지혜'를, '나만의 의지'를 우리 각자가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역시 반드시 살펴보아야하겠지요. 그나저나,
길지 않은 소설이기에 뭔가, 잘개 쪼개놓을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렇게 잘게 쪼개놓으면 보기에, 그리고 먹기에도 편할 것 같다라 생각했었었거늘, 여러 번을 읽어봐도 이건 '어떤 요리다!'란 게 느껴지지 않는 글이 되고 말았네요. 암튼! --- 참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해준 소설이었습니다. 비록 이 독후감에선 '권력'의 (재)등장과 타락에 관하여만 썼지만, 예를 들어, '동물주의'로 표현되고 있는 '사회주의/공산주의'란 사상이, 권력 또는 권력자의 선의(goodwill)가 뒷받침되기만 한다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와 같은 주제 역시 매우 흥미롭지요. 좋은 소설이란 게, 훌륭한 문학이란 게 이처럼,
이후의 독서/지적 호기심을 남겨 주는 것으로도 정의(define)된다면, 이 길지 않은, 술술 읽히는, 간단한 줄거리의 이 작품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허나 그만큼 어려운 숙제를 남겨준다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숙제가 마냥 싫은 게 아닌,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뭐 그런, 아직은 그런 숙제인 듯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