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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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뜯고 비꼬고 우스갯감으로 만드는 것은 그 풍자가 생산되어 나온 당대 사회의 실존 인물, 사회환경과 제도, 이데올로기, 사건, 편견 같은 것들"(p147)이란, 역자 도정일의 주장에 명백한 이의가 없다면, 다음 문장


일단 역사적 정치풍자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동물농장」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스탈린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소련에서의 정치 상황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pp147-148) …… 이 작품은 여전히 '배반된 혁명' 또는 '타락한 독재권력'에 대한 풍자이며, 우의적 풍자이면서 동시에 그 공격의 시대적 과녁(스탈린의 소비에트)이 분명한 역사적 풍자이다.(p152)

보다 더 정확한, 이 소설에 대한 묘사(이자 해석)는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그만큼 --- 심플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지요. 말 그대로 '사람 대신 동물'일 뿐! 좀 더 나아가, 그러니까 이 작품을, 이와 같은 단순한 풍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독재 일반'에 대한 우의적 정치풍자"(p150)이자, "인간 정치사외의 권력 현실을 부패시키는 근본적 위험과 모순에 대한 항구한 알레고리"(p151)로까지 넓혀 이해하여야 한다/되어진다라는 것 역시, 그다지 어렵지 않게 알게 됩니다. 이제, 


이 작품 「동물농장」을, 당신이 소설의 줄거리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가능한한, 제 능력이 되는 데까지, 한번 잘게 쪼개어 보려/볼까 합니다. 칼질이 서툴러 잘못된 결로 쪼개어낼 수도, 괜히 쪼갰다 싶은 부분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한 번, 해보는 걸로. 그런데 그 전에 우선,


"존즈 씨의 침실 불빛이 꺼지기 무섭게 농장의 모든 축사에서는 일제히 부스럭거리는 소리, 날개 퍼덕이는 소리들이 나기 시작했다." (p9)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제가 너무도 좋아하는 영화 <토이 스토리>가 떠오르더군요. 아마도, <토이 스토리>의 작가는 이 작품, 「동물농장」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뻬고, 대신 사랑 (또는 우정)을 넣어, 하나의 새로운 신화(myth)를 써보고자 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들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리하여 결국, 한 편의, 대중적으론 훨씬 더 거대한 신화가 탄생되었다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암튼, '경영'에서 인문학의 중요성이 커진다라는 건, 이런 면에서도 확인되어진/졌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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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의 잉태 · 혁명 발생의 조건 

「상실의 시대 :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에서 자오팅양은 "사회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일부 이익과 권력이 분배되는 상황을 바꾸라고 요구하고, 통치집단을 타도해서 그것을 대체하려"는 행위는 결코 혁명이 아니며, '반란, 봉기 또는 정변'등으로 불리어져야 한다라 주장합니다. 그는 혁명 "사회 전체의 생산양식과 정치법률, 제도의 변화를 요구하고 개개인의 생활방식, 사유방식, 가치관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라, 보다 엄격하게 정의하고 있지요.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란 마오쩌둥의 말을 떠올려 주는, "인간을 몰아내기만 하면 우리의 굶주림과 고된 노동의 근본 원인은 영원히 제거될 것"(p11)이란, 메이저의 연설을, 자오팅양의 구분에 따르자면, 작품 속 '동물반란'을 '러시아 혁명'과 매칭시켜 놓는 역자의 해석에 갸우뚱한 의문을 던지게 해줍니다. 작품 속 '반란'은 말 그대로 그저, '이익과 권력이 분배되는 과정을 바꾸라 요구하는' 반란일 뿐, '개인의 생활방식, 사유방식, 가치관의 변화'까지를 요구/수반하는 '혁명'이 될 순 없다라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정말, 그런걸까요?

그녀의 머릿속에 담긴 미래의 그림이 있었다면 그것은 굶주림과 회초리에서 벗어난 동물들의 사회, 모든 동물이 평등하고 모두가 자기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 … 강자가 약자를 보호해 주는 그런 사회였다. (p78) 

​작품 속 메이저의 사상이 발전된 "동물주의"(p19)가, '사회주의(Socialism) 혁명'과 마르크스 버젼의 '공산주의(Communism)' 중 어느 것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작품 속 메이저가 현실의 마르크스라는 역자의 해석에 기대어) "우리에게 있어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 부른다"에 비추어본다면, 작가 조지 오웰이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는 --- "혁명 자체가 아니라 그혁명의 배반"(p153)이었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현실의 역사와 연결시키지 않은 채, 오로지 텍스트 자체만으로 보아 작품 속 '동물반란'을  반란이라 규정짓건, 혁명이라 규정짓건, '배반'이라는 거지요. 도대체 무엇에 대한 배반이었을까요?



【 혁명의 이유 

그것이 '반란'이건 혹은 '혁명'이건, 모두 '변화'를 수반한다는 사실 자체는 동일합니다. '동물반란' 직후, 농장의 동물들에게도 또한 상당히 급격하고도 많은 긍정적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 "존즈 시대의 가증스런 통치의 흔적들을 남김없이 제거했다"(p23)란 한 문장으로 대변될 수 있겠는, 과거 자신들을 억압했던 굴레들이 사라졌다라는 것 이외에도 또한 예의,

모두가 그들의 것이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그들의 것이었다. 그들은 농장의 그 모든 것들이 이제 자기네 것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p24)

'획득'이라는 새로운 변화도 함께 맛볼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모든 동물은 알몸으로 다녀야 한다' … 복서가 이 말을 듣고는 여름날 귀에 엉겨붙는 파리떼를 막느라 그가 사용하던 조그만 짚모자를 갖고 와 쓰레기불에 처넣었다. (p23)

​도대체, 그들이/우리가 갈구했던, 그리하여 쟁취해 낸 '변화'의 이유가 무엇이었던 것일까요?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것이 되었음에도, 그들은, '모든 동물든 알몸으로 다녀야 한다'란, 즉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이라는 (일종의, 강력한) 교조주의에 매어, 자신의 삶에 이로움이었던 것들까지도 모두 '단절하여야하는 과거'로 치부해버립니다. 이는 어쩌면, (위에서 언급되었던)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에 대한 정의가 오독(誤讀)되어진, 그 오독으로 말미암은 '전체주의'로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라고, 그리고 그러한 타락은 이른바 --- <화장실에 문이 달려 있으면 사람들이 꾸물대고 잘 나오지 않는다. →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이 화장실 문을 발로 차는 바람에 문이 파손되는 경우가 많다. → 그래서 모든 화장실에 문을 없앴다.>란 논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전개를 따라간 결과라고도 생각됩니다. 화장실의 문이 문제가 아닌 것이듯, 복서가 쓰던 짚모자도 문제가 아니었으며, "존즈 씨를 생각나게 하는 것들"(p23) 그 모두가 곧, 청산되고 제거되어야 하는 문제는 아니었던 겁니다. 단지, 그것들이 존즈라는 인물에 의해 사용되어졌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죠.


【 다른 권력의 등장 

러시아 사회주의는 독재전체주의로 타락했고, 그 타락을 막지 못한 체제로부터 사회주의는 다시는 회생할 수 없다. - 이것이 오웰의 논리이다. (p155)

​작품 속, '동물반란'의 결과가 처참한 실패로 귀결될 수밖게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로, 작가 자신은 바로 '독재'를 들고 있다라, 역자는 전합니다. 바로 이 내용이, 제가 이 작품을 읽고 쓰는 감상문에, 가장 공을 들여 칼질을 하여 썰어내고자 하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어떤 사람이 왕인 것은 오직 다른 사람들이 그를 받들어 신하로서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대로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신하라고 생각한다." …… (이처럼)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질서'란 것은 자발적으로 지켜질 수/이행될 수는 있다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린 이후, 즉 혁명/반란 이후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규정/정립만큼은, 완벽하게 자발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분배의 규칙'이란 것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갈리듯, '새로운 규칙'에 대한 사회의 모든 성원들의 자발적 합의란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것이죠. 결국,


돼지들은 직접 일은 하지 않는 대신 다른 동물들을 감독하고 지휘했다. 아는 게 많았기 때문에 돼지들이 지도 역할을 맡는다는 건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다. (p28) 

위의 한 문장은, "인간의 모든 혁명은 '반드시' 그것의 당초 약속을 배반하게 되는가?"(p156)란 질문에 대해 "다분히 결정론에 가까울 정도의 비관적인 관점과 태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p156)란 역자 도정일의 견해를 뒷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즉, --- "모든 동물을 평등하다"(p26)란 계명을 지켜내기/유지할 수 있기 위해, 불평등을 ("아주 자연스런 일"의 수준으로까지!) 고의적으로 인정하여야 한다라는, 그리고 이 사실에 모든 성원들이 합의한다라는 것이죠.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르게 되면, 또한 그 과정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라면 드디어/결국 우리는,


​"정치 권력은 결코 지배하는 자와 지배 당하는 사람, 주인과 노예, 착취하는 자와 착취를 당하는 사람의 구별을 철폐하지 않는다."

라는 아나키즘의 선언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작가 조지 오웰 역시,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p123)란,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이 묻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혁명은 '반드시' 그것의 당초 약속을 배반하게 되는가?"(p156)란 질문에 대해, "definitely Yes!"란 답을 하고 있기도 하지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 우리는, 기존 권력을 대체하는 '새로운 권력'의 등장이 필연적이다,란 사실이 곧 '혁명이란 개념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란 마지막 희망, 곧 "권력의 타락은 인간 사회의 불가피한 조건인가?"(p156)란 질문에 대한 답을 이 작품 속에서 찾아보아야 합니다.


"권력을 갖는 자는 실상은 다른 사람들이 그의 권력을 인정해 주기 때문에 비로소 권력을 갖는 것입니다. … 그러나 권력의 인정이 일상화되면, 권력을 가진 자는 자신의 권력이 스스로의 내적 특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 반대로 권력에 지배당하는 이들은 스스로가 그 권력을 부여한 원천임을 깨닫지 못하고 일상적으로는 권력을 두려워하고 그에 기꺼이 복종합니다.


【 권력의 유지 

"독재자에도 상·중·하의 등급이 있다. 박정희는 중급은 되는 독재자였다. 김일성은 최하급이었고"란 대학 시절 "한국경제론'을 가르쳐주셨던 은사의 견해는 권력/인간에 대한 희망을 여전히 놓지 않고 있는 그 분의 사고(思考)가 반영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에 반해, 에티엔 드 라 보에시는 오래 전 16세기 때 이미, 권력을 손에 넣은 군주는 근본적으로 그가 선인(善人)이라 하더라도 "언제든 악인(惡人)으로 돌변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권력자'란 자리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위대함이라 불리는 그 무엇에 홀려 기고만장"해질 수 밖에 없는, 그리하여 결국 "잘못할 수밖에 없는 자리"라는, 매우 비관적인 견해를 선보였었었지요. 하지만,


좁게 보아 '권력자 개인', 허나 궁극적으론 '권력 자체의 속성이 그러하다는 것과, 그 권력자/권력 자체가 유지될 수 있다라는 건 엄연히 별개의 문제로 취급되어야 합니다. 권력자는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일정 기간마다, 극단적으론 '혁명'을 통해 로 바꿔버릴 수 있거늘, 이 오랜 인류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듯이, 큰 틀에서 보아, 권력 자체의 속성이란 건, 변함 없이 내내 유지되어 오고 있지요. 도대체! --- 어느 것에서부터, 어떠한 방식으로 권력은, 유지의 원동력(driving force)을 얻어내고 있는 것일까요?


​"권력은 네 개의 서로 다른 통로, 즉 어떤 일을 강제로 하게 하는 완력, 윤리적 의무감을 부여하는 규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선전, 원하는 행동을 이끌어내는 을 통해서 작동한다. … 권력의 장벽은 완력, 규범, 선전, 보상이 효과를 발휘하는 한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

모이제스 나임이 제시한 네 가지의 원동력들 중, 눈에 보이는, 즉 현실로 체감되는 것은 '완력' 하나 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밖의 것들, 심지어 '보상'이라는 것마저도 권력이 얼마든지 심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지요. 조지 오웰이 이 작품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권력의 작동과 유지 역시, 이 네 가지 동인(動因)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도구는, 뜻밖에도(?)/당신의 예상대로(?) --- '선전'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인간은 가져본 적 없는 것을 갈구하지는 않는다. 아쉬움은 즐거움을 안 뒤에 오고, 지나간 기쁨에 대한 기억이 있는 까닭에 불행을 인식하는 것이다."

권력의 작동과 유지에 종사하는 '선전'의 목표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세뇌'입니다. 세뇌는 아쉬움을 아쉬움으로 느끼지 않도록 만들어 내는, 지나간 기쁨에 대한 기억을 사라지게 하는, 그리하여 끝내, 불행을 불행이 아니라 인식하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선전의 결과, 첫 단계로 동물들은 "통과됐던 것 같은 기억이었고, … 기억한다고 '생각하고'"(p62)와 같이, 자신의 기억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기에 "존즈가 되돌아오길 바라는 것도 아닐 거고?"(p63)와 같은 일종의 협박이 더해지게 되면,


동물들로선 '반란' 이전의 상태가 어떤 것이었는지 지금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스퀼러의 발표를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p82)

과거에 대한 기억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는, 그리하여 결국엔 반란/혁명의 이유 자체마저 잊게 되는 단계로 가게 되지요. 일단 잊게 되면 이젠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 (p101)가 더이상 아닌, 이제부턴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더 좋다!"(p117)로 전환되는 본격적 '세뇌'를 접하게 됩니다. 그러한 끊임없는 세뇌의 결과, --- 반란/혁명이 향하였던 비난/극복의 대상이 형태만 바꾸어 나타났음에도, 그들은 새로운 권력/권력자에게 새로운 복종을 보이게 되지요. "통계 숫자보다는 먹을 것이나 더 많았으면 좋겠다"(p82)란 본능적 바람()까지는 버려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그들은 고달프게 일한다 해도 그 노동은 최소한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 모든 동물들은 평등했다. (p115)

자신이 속해 있는 이 사회 속 모든 구성원들은 평등하다라고, 그런데 또 그 평등이란 게 '절대적 평등'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까지도 받아들이는, 그리하여 결국,

​지난 날 존즈 시절에는 사정이 훨씬 더 나빴던 것임에 틀림없다고 동물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즐거이 그렇게 믿었다. 게다가 존즈 시절에는 모두가 노예였지만 지금은 누구나가 다 자유롭지 않은가, 그거야 말로 엄청난 차이가 아닌가. (p99)

이제! 사회 구성원의 일부는 이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믿음을 유지한 채 현실의 고통을 감내해내기 위해, '종교'라는 - 비록 종교계는 부인한다 할지라도 - 일종의 마약에 의존하게 됩니다. 작품 속 까마귀 모지즈가 언급하는 '슈가캔디 마운틴'에 대해 보이는 동물들의 반응이 점점 바뀌어, 그 존재를 믿고 싶어하게 된, 그리하여 믿게 된 것에 대해 작가는 --- 명확하게, 마약으로서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지요.


​지금 그들이 배고프고 몸 고달픈 이승의 삶을 살고 있으므로 어딘가 더 나은 세상이 마땅히 존재해야 한다는 건너무도 옳고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었다. (p103)


【 권력에의 복종 

새로운 권력이 선()한 권력일 수는 없었던 걸까요? 나폴레옹이 아닌, 스노볼이 권력을 행사했더라면 행여 그는 선한 권력자가 될 수 없었을까요? 권력의 속성이, 그것, 권력을 쥔 자를 타락하게 만든다라 하지만, 민중의 견제가 권력의 타락을 막아낼 수는 없는 것일까요?


​당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그 댕기라는 건 바로 노예의 표시야. 댕기보다 자유가 더 값지다는 걸 모른단 말이오? (p20) …… 몰리는 털을 새로 깎고 앞머리에 분홍색 댕기를 달고 있었다 한다. 비둘기들은 몰리가 썩 기분이 좋아 보였다고 말했다. (p45)

​1945년 발표된 이 작품에 실려 있는 위의 문장은, 위의 문장이 담고 있는 뜻은, 이미 16세기에 에티엔 드 라 보에시에 의해 똑같이, (심지어 그 주체마저도 '말'로 똑같이) 묘사되었었지요.


"우리는 여기서 자발적 복종의 일차적 근거가 습관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말이 길드는 과정과 같다. 말에 재갈을 채우면 처음에는 재갈을 물어뜯다가 나중에는 익숙해져 재갈을 갖고 장난질한다. 말에 안장을 얹으면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항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장비와 장신구를 뽐낸다."

이같은, 두 작품 사이의 연관성은 이 밖에도 적잖게 보여집니다. 조지 오웰이 적어놓은 "여러 해가 흘렀다. … 많은 동물들이 새로 태어났는데, 그들에게 '반란'이란 그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흐릿한 전통일 뿐이었다"(pp111-112)라는 길지 않은 문장 속엔,

​"처음에는 강요에 의해 힘에 눌려 복종하지만 그 다음 세대들은 자유를 전혀 보지 못했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후회도 유감도 없이 앞선 세대들이 강제적으로 해야만 했던 일들을 자발적으로 행한다. …… 멍에를 지고 태어나 노예 상태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전 세대가 어떤 삶은 누렸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 태어난 대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재산,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도 하지 않고 출생 당시부터 주어진 삶의 조건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기게 된다.

또한, 혹은 반대로,  


​"큰 특혜가 작은 특혜의 먹이 사슬로 이어지고, 독재자와 결탁해 얻은 이익이 또 새끼 이익을 가져와 자유인의 신분을 기꺼이 선호하는 사람 수 만큼이나 독재 권력의 배를 불려주는 사람 수도 늘어나게 된다."

​에티엔 드 라 보에시의 이 한 문장에 담겨져 있는 뜻을, 조지 오웰은 다음과 같이 (잘게 쪼개어!) 풀어내주고 있지요.


- 돼지들은 직접 일은 하지 않는 대신 다른 동물들을 감독하고 지휘했다. 아는 게 많았기 때문에 돼지들이 지도 역할을 맡는다는 건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다. (p28)

- 그들은 나폴레옹의 곁에 바싹 붙어 있었다. 그들이 나폴레옹에게 꼬리를 흔드는 모습은 지난날 농장의 개들이 주인 존즈에서 꼬리치던 모습 그대로였다. (p51)

- 농장은 그 자체로는 전보다 부유해졌으면서도 거기 사는 동물들은 하나도 더 잘살지 못하는 (물론 돼지와 개들은 빼고) 그런 농장이 된 것 같았다. 돼지와 개들이 너무 많은 것

   이 그 한 가지 이유일 성 싶었다.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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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p117)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라 생각되는 문장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 이 문장 속 '평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집착하기 보다, 또한 이 결말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는, 이러한 결말이 나타나게 되는 과정의 개연성? 심지어 정당성?이라고까지 일컬어질 수도 있겠는, 바로 그것을 물어보는 것이 가장 의의있는 (한 글자 한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서) 독(讀).(後).(感).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저의 대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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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결의안을 제출하는 건 언제나 돼지들이었다. 다른 동물들은 투표하는 법까지는 알았지만 자기네 스스로 무슨 결의안 같은 걸 생각해 내지는 못했다. (p31)

권력의 타락을 비판하기에 앞서 --- ① 그러한 타락을 초래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혹 그것이 우리의 "무지와 무기력함"(p157)이 타락에 일조하지는 않았나하는 자기 점검과, ② "나폴레옹은 언제나 옳다"(p58)로 대변될 수 있겠는 권력에의 맹종, 그리고 아부가 바로, 두 발로 서서 걷는 돼지들의 등장에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p118)란 반응을 이끌어낸 것이 아니겠느냐,란 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전 믿습니다. 거기에 더해,


"이 단일국의 지도원리는 '자유와 행복은 양립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은 '행복'했지만 어리석게도 '자유'를 요구했다가 황야로 쫓겨나지 않았던가. 이제 단일국은 인간의 자유를 제거함으로써 행복을 되찾아준 것이다." (p127)

그 반성에, 위의 인용문처럼, 권력의 오남용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사용되지만 않을 수 있는 '나만의 지혜'를, '나만의 의지'를 우리 각자가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역시 반드시 살펴보아야하겠지요. 그나저나,

길지 않은 소설이기에 뭔가, 잘개 쪼개놓을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렇게 잘게 쪼개놓으면 보기에, 그리고 먹기에도 편할 것 같다라 생각했었었거늘, 여러 번을 읽어봐도 이건 '어떤 요리다!'란 게 느껴지지 않는 글이 되고 말았네요. 암튼! --- 참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해준 소설이었습니다. 비록 이 독후감에선 '권력'의 (재)등장과 타락에 관하여만 썼지만, 예를 들어, '동물주의'로 표현되고 있는 '사회주의/공산주의'란 사상이, 권력 또는 권력자의 선의(goodwill)가 뒷받침되기만 한다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와 같은 주제 역시 매우 흥미롭지요. 좋은 소설이란 게, 훌륭한 문학이란 게 이처럼,

이후의 독서/지적 호기심을 남겨 주는 것으로도 정의(define)된다면, 이 길지 않은, 술술 읽히는, 간단한 줄거리의 이 작품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허나 그만큼 어려운 숙제를 남겨준다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숙제가 마냥 싫은 게 아닌,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뭐 그런, 아직은 그런 숙제인 듯 싶네요. ^^ 



※ 함께 읽어보면 좋을 책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 자발적 복종」, 생각정원 , 2015.

- 류동민 ,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위즈덤하우스 , 2012.

- 하승우 , 아나키즘」, 위즈덤하우스 , 2012.

※ 읽어본, 조지 오웰의 작품

-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 2001.


※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지금 이 블로그에 와있는 당신에게마저 여하한 구실로라도 '나를 아는' 이란 형용사를 붙여 --- 꼭 한번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은 책들의 제목 앞에 ★표시를 붙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시이겠지만 가끔은, 타인의 주관을 한번쯤 믿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


어찌어찌/그럭저럭/꾸역꾸역/그나저나/고군분투/위태위태  

... 금연 52일째.


 

  1. successful matching을 위해선, 양쪽이 간결해지는 것이 우선입니다. 목적이건 수단이건 대상이건, 그 어느 것이건 말이죠.
  2. "알레고리는 '무언가 다른 것을 말하기(other speaking)'의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알레고리아(allegoria)를 어원으로 한다. 우유(愚喩), 우의(寓意), 풍유(諷諭)로 불리기도 하는 알레고리는 인물, 행위, 배경 등이 일차적 의미(표면적 의미)와 이차적 의미(이면적 의미)를 모두 가지도록 고안된 이야기이다. 예를 들면 『이솝우화』와 같은 동물 우화는 일차적으로는 동물 세계를 보여주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인간 세계에 대한 풍자와 교훈을 담고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3. "「동물농장」은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 보고자 한, … 첫 소설이었다."(p143)
  4. 자오팅양·레지 드브레 共著, 메디치 刊, 2016.
  5. 자오팅양 외, 위의 책 p30.
  6. 자오팅양 외, 위의 책 p31.
  7. 자오팅양 외, 위의 책 p231.
  8. "지주는 이미 농장에서 일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을 서류 위에서만 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흙을 잊고, 흙의 향기와 흙의 감촉을 잊었다. 단지 자기들이 그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 기억했고, 땅에서 돈을 벌고 손해를 본다는 것만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떤 농장은 너무 커져서 이미 한 인간의 머리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 이윽고 그러한 농장주들은 상인이 되어 상점을 경영했다. 그들은 농장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고, 그들에게 식량을 팔아 지급한 돈을 되찾았다. 얼마 안 가서 그들은 노동자에게 전혀 돈을 지불하지 않게 되었으며 장부를 만드는 성가신 일을 덜게 되었다." - 존 스타인벡 作, 「분노의 포도」중, 홍신문화사 刊, 2012.
  9. "편의상 「동물농장」의 이야기세계와 그것의 시대적 문맥이 된 현실세계 사이의 연결관계를 1대1로 표시하면..."(p148)
  10. "The most fundamental difference is that under Communism individuals are provided for or compensated based on their needs, in effect meaning that in a true communist system you wouldn't have money and you'd simply be given what the government thinks you need in terms of food, clothing, accommodation, etc. Central to socialism is that individuals are compensated for based on their individual contribution, so people that work harder or smarter would receive more than those that don't contribute. This difference highlights a key flaw in the Communist model, where no one has any motivation to work harder or smarter as it would have no impact or benefit for them." - "Communism VS Socialism", BusinessDictionary.com
  11. 마르크스·엥겔스 共著, 「독일 이데올로기」중 - 류동민 著,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중 p248 재인용, 위즈덤하우스 刊, 2012. --- 류동민은 이 책에서 이를 다시 "현실에서 완전하게 달성될 수는 없으나 현실이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가까워지도록 노력하게 만드는 이념적 원형"(p249)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오팅양의 '이상(理想)'에 대한 견해 - ​"저는 이상을 하나의 척도로 간주하기를 희망합니다. 다시 말해, 이상은 실현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측정하는 데 쓰여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현실과 이상의 거리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고, 현실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자오팅양, 위의 책 p24) - 와 거의 완벽하게(near-perfect) 흡사하지요.
  12. 역자가 적어놓은 다음의 글 역시, '혁명' 또는 '반란' 그 어떠한 이름으로 불리우건, 작가가 그 자체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 "권력 자체만을 목표로 하는 혁명은 주인만 바꾸는 것으로 끝날 뿐 본질적 사회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한다는 것, 대중이 살아 깨어 있으면서 지도자들을 감시 비판하고 질타할 수 있을 때에만 혁명은 성공한다는 것 등이 그가 작품 「동물농장」에 싣고자 한 메시지라 말하고 있다."(p153)
  13. "여러분이 그를 정복하더라도 절대의 그의 악한 짓거리들을 모방해선 안 됩니다. … 인간의 모든 습관은 사악합니다."(p14)
  14.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오독은 다음과 같습니다. :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라는 것이 있다면, 그 또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하기 전까지는 성립하기 어려우며 우연히 성립하더라도 지속될 수 없습니다.(p121) --- 러시아라는 후진농업사회에서 선도적 정치의식을 지닌 소수의 직업혁명가에 의해 시작되었던 20세기 '사회주의 혁명'과 그 실패를 가리켜 '마르크스 역사이론의 실패'라 규정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오해이며, 오히려! 마르크스 역사이론의 (정당한) 입증이라 평가받아야 한다라는 것이지요." - 류동민, 위의 책을 읽고 쓴, 감상문의 일부.
  15. ​이 때 '전체주의'는 (러시아) 사회주의 타락의 원인일 수도, 동시에 타락의 결과일 수도 있다라 생각합니다.
  16. 류동민, 위의 책 p67.
  17. 류동민, 위의 책 p109.
  18. <각주 10> 참조.
  19.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하는 상황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 하에서 만든다." - 류동민, 위의 책 pp 102-103
  20. "충성과 복종이 필요해요. …… 강철같은 기율이 필요해요."(p53)
  21. 하승우 著, 「아나키즘」 중 p74, 책세상 刊, 2008.
  22. "돼지들이 우유와 사과를 가져가는 것은 건강 유지를 위해서입니다. 우유와 사과에는 돼지 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질들이 포함되어 있어요. … 우리 돼지들은 머리 쓰는 노동에 종하사고 있습니다. 이 농장의 경영과 조직은 전적으로 우리 돼지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밤낮으로 여러분의 복지를 보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돼지들이 우유를 마시고 사과를 먹어야 하는 것을 바로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pp35-36) --- "오웰은 바로 이 대목이 혁명의 부패가 시작되는 전환점이라는 말도 하고 있다."(p153)
  23. "혁명이 반드시 스스로를 배반하게 되어 있다면 어떤 혁명도 이미 가치가 아니며 애당초 시도될 이유도 없다"(p156)
  24. 류동민, 위의 책 p69.
  25. 에티엔 드 라 보에시 著, 「자발적 복종」 중 p35, 생각정원 刊, 2015.
  26.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위의 책 p64.
  27.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위의 책 p39.
  28. 모이제스 나임 著, 「권력의 종말」 중 p150, 책읽는수요일 刊, 2015.
  29. "젊은 식용 돼지 네 마리가 이번에도 쭈뼛쭈뼛 항의하고 나섰지만 개들이 무시무시한 소리로 으르렁거리는 통에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p60)
  30.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위의 책 p80.
  31. 그 반대의 경우, 그러니까 "내 임무는 … 사실을 사실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지."란 주제로 쓰여진 정말 멋진 소설도 있습니다. --- 존 르카레 作,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중 p243, 열린책들, 2009.
  32. "농장의 동물들이 바랐던 것은 오늘 같은 날이 아니었고 허리가 휘게 일한 것도 이런 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p78)
  33. "돼지와 개들만 빼놓고 다른 동물들에 돌아가는 식량 분배량은 또다시 줄어들었다. 식량 분배에 지나치게 엄격한 평등을 적용하는 것은 동물주의의 원리에 어긋난다고 스퀼러는 설명했다."(p98)
  34. "그해 내내 동물들은 노예처럼 일했다. 그러나 그들은 행복했다. 그들은 노동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그들 자신의, 그리고 다음에 올 후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 게으른 도둑 인간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p56)
  35. 추가로, '미신' 또는 우리에게 좀 더 친근(?)한 용어로는 '색깔론'도 또한 등장합니다. --- "뭐든 잘못된 일이 있으면 모두 '스노보링 그랬다'가 되었다. …… 동물들은 완전히 겁에 질렸다. 스노볼이 마치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허공을 떠다니며 온갖 위험한 일로 그들을 위협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pp71-72)
  36. 즉, 종교란 것이 존재(sein)의 차원이 아닌, 당위(sollen)의 차원으로 변모되어, 마약으로서의 역할을 이행하게 되는 것이죠. 종교가 설파하고 있는 당위의 문제에 대한 의문이 --- "설령 한 푼도 없더라도 그저 가만히 팔짱을 끼고 얌전하게 견디고 있으면 죽어서 금쟁반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얘기밖에 가르쳐주지 않아요." (존 스타인벡 作, 「분노의 포도」중, 홍신문화사, 2012.) --- 이 작품 「동물농장」(사회주의로부터 받은 상처에 대한 위로/돌파구)과 「분노의 포도」(자본주의로부터 받은 상처에 대한 위로/돌파구)에서 각기,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37.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위의 책 p81.
  38.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위의 책 pp68-69.
  39.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위의 책 p111.
  40. 물론, 이 문장 속 '평등'은, 우리가 사전에서 보게 되는 의미 그대로의 '평등'은 아니겠지요.
  41. "무슨 일이 성공적으로 완수되거나 운수 좋게 잘 풀리면 그 공로는 어김없이 나폴레옹의 것으로 돌려졌다. … 암소 두 마리가 웅덩이에서 물을 마시다가 '나폴레옹 동무의 영도력 덕분에 물맛이 그저 그만이군 그랴!'라고 말하는 소리를 종종 들을 수 있었다."(p83)
  42. "돼지 하나가 두 발로 서서 걷고 있었다. … 다음 순간, 돼지들이 길게 한 줄로 행렬을 지어 본채 문 밖으로 걸어나왔다. 모두 … 직립보행의 자세였다."(p116)
  43. 같은 맥락에서 전,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p123)란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 과연 우리는 '분간할 수 있어~'란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지금 당장 답하라면 전... 분간할 수 없,다라 말해야 할 것 같아요.
  44. 성경을 이렇게 해석해낼 수도 있구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헌데, --- 그 반대, 그러니까 '행복을 제거함으로써 자유를 되찾아준 것'이란 상황은 아무래도 상상이 되질 않네요. '행복을 제거함으로써 자유를 되찾아준 것'이 과연 성립 가능할까요?
  45. ​"저자 진중권 교수는 '서구의 근대화는 …… 토론과 대화로 정신을 설득하는 관념론적 과정이 아니라, 감시와 처벌의 채찍으로 신체를 길들이는 유물론적 과정이었다'라는 미셀 푸코의 말대로,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근대화 또한 '전태일의 분신'으로 상징되는 잔인한 폭력적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그 말로 '근대화 자체를 비판'했던 푸코완 달리 대한민국의 우익은 푸코의 그말을 자의적으로 인용해 서구의 근대화도 어차피 감시와 처벌, 군대식 훈육의 결과였다라는 '한국적 근대화의 폭력성을 옹호하는 논리'로 둔갑시켜버렸다는 것이지요." - 진중권 著, 「호모 코레아니쿠스」, 웅진지식하우스 刊, 2007. 을 읽고 쓴 감상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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