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죽어야 하는 일곱 가지 이유 - 과학액션 융합스토리 단편선
정승락 외 지음 / 월간토마토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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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인터넷(IOT)에 인공지능(AI)가 결합되면, 뭐 오늘의 날씨에 맞춰 어떤 옷을 입을까 따위를 알려준다고, 이런 것이 '4차 산업혁명'이란 사뭇 거창한 단어로 표현되고 있는 게1 지금의 대한민국입니다. 이런 조악한 상황의 거론에 '혁명'이란 과격/신성한 단어를 붙인 이유가 그 편리함 증대의 '급격함'에 있다라면 그래도 이해가/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겠거늘, 만약 그 주안점(focus)이 뜻밖에도(?) 단지/오로지/그저 '(존나 상승된) 편리함'에만 주어져 있는 것이라면,

"빅데이터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시대, '내가 원하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구글이나 페이스북이 내가 원한다고 판단한 것'을 보는 현실. 내가 욕망하기도 전에 그들이 내놓은 선택지를 보고, 내가 그것을 원한다고 믿는 현실"2에 대한 "선택과 통제의 권한은 과연 누가 행사하는 것일까"3와 같은 의문은 그야말로 쓰잘데기 없는 것이 되버리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공중파 FM 라디오가 매일 아침마다 되풀이하는 것처럼 정말로 만약,

일상의 편리함 증대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4차 산업혁명'의 목적/의의라면 --- 인간이 지혜로웠기 때문이 도구를 만들 수 있었다가 아닌, 도구를 사용했기에 지혜로워졌다는 마빈 해리스의 사회·문화적 진화의 논리4는 더 이상 성립되지 않게 됩니다. 정말, 모두들 '4차 산업혁명'이란 것에, 보여지는 바 그대로 , 열광하는 그대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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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액션 융합스토리 단편선'이란, 흡사 '슈퍼울트라 초절정 MCU 스타일 서부 액션 활극'같은, B급스런 character를 부여받고 있는 이 여덟 편의 소설들은 한결같이, ---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신의 섭리에 따른, 유인원들이 (비교해 보아, 보다 더 무능력해진) 인간의 뒤를 계승하였다라는 「혹성탈출」의 결론이, 해당 세대5의 허황된 상상의 산물만은 아니더라구요, 그래서/다만, 2017년의 우리들은, 유인원의 자리에, 과학의 발전에 발맞추어 인공지능을 지닌 로봇을 한 번 넣어 보았죠!'란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메시지의 송신이, 수신자인 독자들이 사는 세상이란 데가, '4차 산업혁명'이란 표현엔 (이게 대체, 2017년의 대한민국 꼬라지에서, 5년 단임의 대통령 선거의 주요 주제가 되어야 하는 건지, 참 많이 짜증이 났었었고, 그래서 맨날 '4차 산업혁명의 적임자'는 자신 뿐이라며 양 손 들고 포효했던 후보가 참 어처구니 없었었는데) 온통 긍정적인 면만 쏟아부어놓으면서도, (왕년의 King) 이세돌에 이어 (현재의 King) 커제까지 완벽하게 꺾은 알파고의 기력(棋力)에 새삼스런 당혹함과 또 다시 새삼스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라는 게,

곳곳에 설치된 CCTV들이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한다라 반발하면서도, 막상 CCTV가 없는 곳에서 일어난 미해결 범죄/사건에 대해선 'CCTV만 있었어도~'와 같은 안타까움/아쉬움/힐난을 쏟아내는, 그러니까 이건, 누군가를 볼 수 있는 CCTV가 나 역시 볼 수 있다라는 것만은 인정하지 못하겠는, 다시 말해 우리 삶의 구석구석들이 보여지는 것이 안전하다란 이상한 믿음 하에, '나만은 죽어도 보여지면 안 된다'란 억지를 끝내 포기하지는 못하겠다라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논리의 결과일 뿐이란 것조차 알지 못하는 곳이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됩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이 그려낸 미래란 게, (권력욕을 버려내지 못하는)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기인된 우울함(distopia)의 전형이었다라면, 이 책의 소설들에 깔려 있는, 미래를 바라보는 우울함(distopia)은 --- "인간과 구분할 수 없는 외모에 인간보다 뛰어난 감정대응"(p67) 능력을 지닌 로봇이 우리의 시중을 드는 미래의 삶을 바라()면서도, 동시에 "인공지능이 자의식을 갖는 걸 두려워"(57)하고 있는, 이기적 욕망의 모순으로부터 기인된다라고, 조금만 더 잔인(!)한 실례(example)를 들어보자면, 

내 편리함의 증진에 도움되는 기능들을 죄다 갖추고 있지만, 그 기능들은 오로지 "제한된 공간에서의 존재"(p76)로서만 작동되어야 한다는, 흡사 귀여운 강아지의 애교와 위로는 즐기면서도 그의 성대와 자궁은 잘라내고 들어내어버린 후에도 서로에게 '애견인'이란 호칭을 스스럼없이 붙이는 뻔뻔함(이자 무식함)을, --- 이 책의 작가들은 힐난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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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기술은 드디어/기어이 "인간의 장점만을 고스란히 담아낸 인류 최대의 걸작"(p79)으로 평가받는 로봇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 로봇은 무려! "성감이 이 '인간' 못지 않더란 말이지"(p158)6란 찬탄까지 불러일으킬만큼 최대한 '인간스럽게' 만들어졌지요. 단!


이게 사랑인가 봅니다. 이쑤시개가 100년된 장송처럼 보이는 착각이요. (p113)​

로봇들에겐, 위와 같은 사랑의 감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 물론 로봇들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 지닌 기술의 한계 때문은 결코 아니에요. 인간들의 기술은, --- 귀여운 깨갱~소리는 내도 되는, 하지만 시끄러운 왈왈~ 소리는 허용할 수 없기에 강아지의 성대를 잘라버리는 것처럼, 로봇에게도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센서를 장착해놓기는 했으나, 그 센서의 기능은 오로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만 작동되어야 한다는 한계7 또한 너무도 명확하게 설정해 놓았었거늘, 그러니까 이건, 인간과 로봇의 유일한 차이점은 감정이라는 정신적 행위를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느냐, 혹은 수동적으로 밖에 하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라는, 방향성의 한계를 또한 말해주고 있기도 한 겁니다만,

​"자연선택은 종종 어느 한 가지 기능을 위해서 선택된 구조를 이용하여 전혀 다른 기능을 가진 구조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 마빈 해리스 , 「작은 인간」중 p68, 민음사, 1995.

 

 

(이것을 자연선택의 예와 섞어도 될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순간, 로봇이 "답답함이라는 감정을 이해"(p46)하게 되었고, 서서히, 그리하여 겨얼국 --- "언젠가 모든 것을 다 보면서 모든 것에 관여할 수 있는 사고행동체계"(p69)로까지 진화하게 되었거늘, 오히려 인간은8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을 위협하는 것은 자연과 야생동물이 아닌 타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를 끈끈해 했던 타인을 외면하고 때로는 짓밟아야 살아남는 경쟁시대. 인류는 생존을 위해 타인과 홀로 맞서야 했습니다. 때문에 감정은 인류에게 꼬리보다 불편하고 쓸모없는 것이 되어 빠르게 퇴화했습니다.9 감정의 퇴화에 힘입어 인류의 과학은 빠르게 진화했지요.(pp9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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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액션, 추리, 스릴러, 판타지 등의 장르소설은 폐기하기까지 한 시간여 남은 편의점 도시락 신세입니다. … 바야흐로 소설의 종말이 도래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라져 가는 소설을 지켜보는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릅니다." (pp5~6)

설마? --- 그 의문은, 이 책 속 한 편의 소설에 스스로 담아놓고 있는, 10'다수 동조 편견'과 11'정상화 편견'이 동원된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일본에선 이미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한 문학상의 예선을 통과했었다고도 하거늘12, 인간계의 최고수가 질 리 없다 했던 바둑에서 보여졌던 인공지능의 막강한 능력13은 언젠가/기어이, 앨런 튜링이란 필명/가명으로 진짜 노벨문학상을 받아낼 지 모르는 겁니다.14 이에 대해, 과해도 너무 과한 염려라 말하는 분이 혹여라도 있다면,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설명이 안 되는 현상들이 너무 많을 때, 또 지속적으로 반복될 때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 최준식 · 지영해 共著, 외계지성체의 방문과 인류종말의 문제에 관하여」, 김영사, 2015.

우리, 현생 인류 스스로에 대한 '이런 의구심'15마저 생겨나는 시대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따위(?) 의구심까지 믿어내기엔 현실감이 너무도 떨어진다시면,

인류의 발전은 사랑이 운명이 아닌 엄연한 질병이라는 것을 깨닫는데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 사랑이 질병으로 규정되기 한참 전인 2016년, … 인류가 생존을 위해 가장 먼저 포기한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라 하여 삼포세대로 불렸던 그 세대 젊은이들, … (pp98~99)

이것은 더 이상 가설이 아닌 상황이 우리 모두에게 확실하며, --- '왜 물을 돈 주고 사마셔?'라든가, '남자가 남자를 사랑한다구? 이런 개같은...'와 같은, 저의 20대 시절, 우리에게 당혹한 질문과 당연한 판단으로 귀결되어졌던 것들이, 고작(?) 20여년 밖에 흐르지 않았거늘 어느새, 그 때완 완전히 정반대의 의미로서 당혹한 질문과 당연한 판단이 되어 있듯,


복제 과정이 거꾸로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흡충이 뇌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뇌가 흡충을 모방하게 된다. (p29) …… 사람이 로봇을 닮아 가는 게 요즘 추세 아냐? (p253) 

되돌아보니, "원래 애초부터 이곳에는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p183)가 맞는 말이었었다라는, "경고의 내용을 담은 예언이 가장 주목받는 건 참사를 미연에 방지했을 때가 아니라 예언된 참사가 실제로 일어났을 때"16란 소설 속 한 구절을, 더 이상 소설 속 한 구절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 에 대해서까지도 당신은 설명해낼 수 있어야 할 겁니다. 다시 말해, --- 1949년 발표되었던 조지 오웰의 「1984년」의 많은 부분이 현실로 보여졌었고 여전히 보여지고 있듯, 1963년에 프랑스 작가에 의해 발표되었던 「혹성 탈출」, 그리고 2017년 한국 작가들이 말해주고 있는 이 책 속 여덟 작품의 이야기들이 언젠가, 그러니까 뭐, 종원군의 아들? 혹은 손자 세대쯤?에선, 더 이상 예측이나 상상이란 단어로 국한되어질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란 생각을, '당연'의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확실하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개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상태'17란 의미의 '개연'으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학은 개인적인 것이며 점점 더 개인적이 것이 되어가고 있다."


박주영 , 「고요한 밤의 눈」중 p278, 다산책방, 2016.



이 나라의 소설가들이 … 쓰는 이유는 인간의 상상력은 완벽하지 않음을 바탕으로 자라나고 그 속에서 탄생한 이야기야말로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p7)

알파고의 바둑이 완벽했었다 하더라도, '인간과 두는 바둑이 훨씬 더 즐거웠다'란 커제의 말처럼, 인공지능이 써낸 소설의 플롯이 제 아무리 완벽할지라도18 여전히 우린, --- 약간의 헛점이 보이기도 하는, 인간에 의해 쓰여진 인간의 이야기에 더 빠지게 될 꺼라 믿어 봅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전, 이 믿음이 반박되어질 수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하겠기만 합니다.

할머니의 협박과 간곡한 부탁으로 할아버지는 10년 전에 담배를 끊었다. 다만 불붙인 담배를 손에 들고 그것이 타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10년 내내 그랬다. 나는 입과 손의 그 거리만큼이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이라 생각했다. (p256)

이런 생각과 표현이, 지능으로만 쓰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믿기에, 소설 속 로봇이 털어놓는 바 그대로 - "간접경험들과 직접 겪는 것과의 차이 …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건이며 다른 차원의 경험이다."(p49) - 사랑을 했었.었.었.었.고, 그로 인해 담배를 끊었.었.었.고, 그 사랑을 잃었.었.기에 다시금 담배를 피웠.어야 했던, 그 이후 겪어 온 여러 변주(variation)들이란 게, (제 나이 또래의 남자들에게 대략,적으로) 딱히 희귀한 건 아닌, 암튼! (로봇은 못하고) 인간만이 직접 겪어볼 수 있는 경험이기에, 여전히/역시나 --- 우리에겐 훌륭한 소설에 열광할 이유와 기회와, 자신만의 개성과 독특함을 지닌 여러 작가들이 사라지지 않을 꺼라 믿습니다, with "어쩌면 당신이 있기에 소설의 종말이 조금 늦춰질지도 모르겠습니다." (p7)란 작가의 인사말에, 이제까지/지금보다 조금 더 읽고,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더 늦춰질 수 있다면,이란 소망을 간직하고 실행하는 독자가 되겠습니다,란 다짐과 함께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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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려 있는 <할망구 17호>의 작가 전건우C가 <여는 글 : 인공지능이 소설을 쓰는 시대에 소설을 쓴다는 것>에 써놓으신, "이 책을 손에 들고 이 글을 읽어 내려가는 바로 당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 부디 재미있게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p7)란 겸손의 글에,

인공지능도 소설을 쓰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소설을 써내주셔서, 단지 써내줌에 그친 것이 아니라, 쾌감의 읽는 재미,와 인간으로서의 작가만이 독점할 수 있을 표현인 '작가적 상상력'의 산물들19에 대한 경탄 또한 만끽할 수 있게 해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드리노라는 (비록 상대방이 인식하지 못할지라 해도) 인사를 드립니다.


 


미래에 대한 소설들 : 어떤 소송」, 「1984년」, 「혹성탈출

 

... 금연 89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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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열린책들 세계문학 17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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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이 언어에 의존한다고 한다면... (pp349~350)

​문자라는 것이 더 이상 기록의 수단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고1, 그리하여 '사고의 표현 및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으로 언어만이 남게 된다면, 그와 동시에, '사상이 언어에 의존한다'란 역(reverse) 또한 자동적으로 성립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 민중을 통제하고자 하는 권력이 있다 할 때, 그 권력은 이제 민중이 사용하는 언어만 통제하면 된다,라는 결론에 이르르게 되고, 유효하게 그 통제를 수행해내고 있을 때2 결국,


그들은 의식을 가질 때까지는 결코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반란을 일으킬 때까지는 의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p85) Until they become conscious they will never rebel, and until after they have rebelled they cannot become conscious.

예를 들어,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를 더 이상은 확정지어내지 못하는 것이, 이제 완전한/하나의 평범한 일상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죠. 조지 오웰의 이 멋진 소설 「1984년」은 바로 이 상태, 즉 --- 복종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복종하고 있다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게 되는, 이 '완벽한 복종'이 일상화된 사회, 그리고 그 사회에서 일탈하고자 하는 한 개인3이, 그러한 시도로 인해 겪게 되는 (결국엔) 정신적 고통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원인은,

구전제주의자들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전체주의자들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우리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 (p297) The command of the old despotisms was “Thou shalt not”. The command of the totalitarians was “Thou shalt”. Our command is THOU ART”.

​<이렇게 되어 있다>는 권력의 명령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되어 있지도 않다'라 저항하는 와중에도 가시어지지 않는, --- 내가 틀렸고, 내가 거부하고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주의(principle)가 옳을 수도 있다란 가능성으로부터 시작된다라는 것이지요.


당은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고 발표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믿게 될 것이다. 무서운 것은… 그들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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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R IS PEACE 】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그리고 이스트아시아의 "세 개의 초국가 three great super -states"(p215)는 동맹과 배신을 거듭하며, "지난 25년 동안 계속"(p216)하여왔습니다만, 그들간의 이 전쟁은, 일반적으로 떠올려지는 그런 개념의 전쟁이 아닙니다.4 그 차이점이 물론, 전쟁의 방식에도 있으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 전쟁은 … 본질적인 명분도 없고, 어떤 뚜렷한 이념적 차이점에 의해 구분되지도 않는다. (p216) 

'전쟁의 목적'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소설에서 가정되고 있는 1984년은 "1950년대의 핵 전쟁의 황폐가 아직 완전히 복구되지 못한 상태"(p220)입니다. 즉, 세 국가들이 다시금 빡터지게 싸울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죠.5 그럼에도 불구하고, ①25년 간의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아마도, --- 2017년 현재의 시점에서 주어질 수 있겠는 물음인, (3차 세계대전까지 거론할 것 없이) ②미국과 중국이 정말 한 판 뜰 일이 있기는 할까요?6에 대한 답변으로 갈음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공공연하게 떠들어 대지는 않지만 암묵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 끊임없는 전쟁에 의해 전쟁을 위해 존재하는 똑같은 경제가 있다. 3대 강국은 서로를 정복할 수 없을뿐더러 정복해 봤자 아무런 이익도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p228)

소설 속의 전쟁이건, 2017년에 가정해보는 전쟁이건 그 모두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닌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라는 겁니다. 아, 물론 전쟁 자체가 목적인 경우는 역사적으로도 거의 없었었겠죠. 모든 전쟁은 영토확장이라든가, 자원 또는 노동력의 확보 등이라는 목적을 위해 수행되었었으니까요. 하지만! --- 그러한 목적의 달성을 위해 사용된 '전쟁'(이라는 수단)은 분명, 목적의 달성이 그 과정에서 입어야 했던 손실을 만회해주어야만, 수단으로서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것이기에, "정복해 봤자 아무런 이익도 없다는 결론"이 이미 나있는 상황은, 전쟁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란 일종의 내쉬균형(Nash equilibrium)을 확인시켜 줄 뿐이지요.7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 왜, 소설 속 세 초국가들은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전쟁을 해왔던 것일까요? 


결국 계층 사회는 빈곤과 무지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8 … 문제는 세계의 실질적 부를 증가시키지 않으면서 산업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물품은 생산되어야 하지만 분배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이것을 성취하는 유일한 방법은 전쟁뿐이다. 전쟁 행위의 본질을 인간의 생명이 아닌 인간 노동력의 산물을 파괴하는 것이다.(pp221~222) …… 현대 전쟁의 기본 목적은 전반적인 생활수준을 향상시키지 않고 기계 제품을 완전히 소비시키는 것이다. (p219) 

오늘날의 전쟁은 순전히 국내적인 문제이다. … 전쟁은 각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국민들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며, 전쟁의 목적은 … 사회 구조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것이다. (p231)

소설 속, 오세아니아가 수행하고 있는 전쟁은 바로 위와 같은 목적에 의해 발발되고, 이어지고 있는 전쟁이며 심지어, 내부에서의 소통 뿐 아니라 외부 세계와의 연락이 두절된 상황9에서 그 전쟁은 실체가 없는, 말 뿐인 전쟁10이 아니라 할 수도 없게 됩니다. 즉, 국내적인 문제로서 필요한 '타국과의 전쟁'이, 그 목적인 국내적인 문제를 풀어감에 있어 효율적이라 한다면, 다시 말해, 타국과의 전쟁이 국내의 혼란을 방지하는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는 한, 그 전쟁은 --- "전쟁이 문자 그대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한 전쟁은 위험한 것이 아니며"(p229)를 성립시키게 되어 결국 "전쟁은 평화"(p231)란 당의 슬로건을 완성시켜 주게 되지요. 물론, 우리가 아는 일반적 의미로서의 '전쟁'과 '평화'는 아니지만, 그러니까 이건 오로지 당/권력에게만 의미를 지니는 '전쟁'과 '평화'인 것이며, 그리고 이 '아니지만'은 또한!



【 IGNORANCE IS STRENGTH 】

<좋은good>이 있다면 <나쁜bad>이라는 단어는 필요 없다. 왜냐하면 필요한 의미가 <안 좋은ungood>이라는 단어에 의해 똑같이 표현 - 실제로 더 잘 -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개의 단어가 원래부터 반대의 짝을 가지고 있는 경우 반드시 어느 한쪽이 없어지게 된다. (p353)

오세아니아의 지배 권력이 만들고 있는 '신어 Newpeak'는 이처럼,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어휘들을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구축이 되어 갑니다. 즉, 언어에 있어 선택의 여지를 줄여나아가는 것11이고 이는 필연적으로 --- "어휘의 선택을 최소한도로까지 줄임으로써"(p350), 설혹 권력의 사상에 반대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도 "그걸 표현할 말 자체가 없기 때문에 사상죄12가 글자 그대로 불가능"13(p64)해지는 상황을 가져오게 되지요. 이처럼, 사고의 표현 수단인 언어에의 제약 뿐 아니라,


​알고 있으면서 모른다는 것, 완전한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 교묘하게 날조된 거짓말을 말하는 것, 말살된 두 개의 의견을 동시에 가지고 모순이라는 걸 알면서 그 둘 다를 믿는 것, 논리를 사용해 논리에 대항하는 것, 도덕을 주장하면서 도덕을 거부하는 것,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고 믿으면서 당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믿는 것, 잊어버릴 필요가 있는 것은 죄다 잊어버리고 필요할 땐 언제든지 다시 기억 속으로 끌어들였다가 다시 재빨리 잊어버리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 자체에 똑같은 과정을 적용시키는 것.14 (p46)

'이중 사고 doublethink'라 불리우는, 이러한 의식의 개조15까지가 더해지게 되면 대중은 드디어 --- "당이 요구하면 검은 것을 흰 것이라고 기꺼이 말하는 충성심"(p245) 뿐 아니라, 아예 "전에 반대로 믿었던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능력"(p245)까지를 갖춘, 그야말로 "과거는 지워졌고 지워졌다는 사실도 잊혀 거짓이 진실이 되어 버"16(p89)리는 '완벽한 망각'17, 즉 ignorance(=lack of knowledge)의 상태로 전락된 피지배계급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하여, 'Ignorance is Strength'는 저에게, '민중의 무지가 바로 당이 쥐고 있는 권력의 원천이 된다'라는 의미로 이해되게 되며, 실제 민중의 이와 같은 무지(ignorance)는 곧,


혁명의 세계에서 성장한 젊은 세대는 당을 하늘처럼 불변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당의 권위에 도전할 생각을 꿈도 꾸지 못하고(p155) …… 군중은 절대 자발적으로 폭동을 일으키지 않으며 압제를 받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폭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실제로 그들은 비교 기준이 없는 한, 자신들이 압제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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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전쟁으로 유지되는 평화(War is Peace)와, 압제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압제받고 있는 민중들(Ignorance is Strength)이 만들어내는 그 최종적 결말을, 작가 조지 오웰은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요?



【FREEDOM IS SLAVERY】

(원래는 그 반대가 되어야 하겠으나, 제 독서의 순서에 따르자면) 율리 체의 「어떤 소송」18속 '방법 The Method'을 떠올려 주는19, 여기에선 '빅 브러더'로 상징되는 권력은, 민중들의 삶을 완벽하게 감시20하고 있으며, 그러한 일상적 감시에의 순응/적응21은 끝내, 무조건적인 복종에서 기쁨을 느끼며, 원칙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에서도 또한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되는, 한 마디로 "아무런 의심 없이 열성적으로 충성하는"(p32) 노예와 다름없는22 백성을 만들어 냅니다. 이제 당/권력/빅 브러더는 드디어,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23 (p46)

현재를 지배하여 과거를 지배했고, 그럼으로 미래까지 지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지배는, 단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지배의 영속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Freedom is Slavery"가 의미하는 바,


그들은 당신에게 모든 것을 - <무엇이든> - 말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믿게 할 수는 없어요. 당신 마음속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어요. (p195)

​드디어, 대중의 마음까지를 포함하게 되는 것이죠. --- 말하게 할 수 있는 것 뿐 아니라, 믿게 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그를 증오합니다"(p329)라 말했었던 윈스턴으로부터 기어이,


그는 빅 브러더를 사랑했다. (p347)

​란, 이것을 거짓이라 생각할 수 없겠는, 그의 자발적 고백을 이끌어 내고 맙니다. 「어떤 소송」에서 일종의 선()으로 등장하는 "잘 기능하는 국가의 시민들은 공공복리와 개인 복리의 일치에 익숙했다"란 구절은, 빅 브러더의 권력 아래에선 "빅 브러더는 전지전능하고 당은 절대적이라는 신념"(p245)로 강화되어 보여지는 것이며 이로써,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p12)라는 당의 세 가지 슬로건은 반박불가(irrefutable)한 것으로 성립되게 되지요. 그리고 이 완성이 정말 무서운 이유는,


………………………………………………


​2분 증오에서 끔찍한 사실은 사람들이 할 수 없이 이것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이런 광란의 행위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p23)

"늙은 장사꾼 여자가 빅 브러더를 그려 놓은 포스터에 소시지를 싸들고 가는 걸 보고"(p76) 그녀를 신고하는 아이들이 이 작품에 등장하거늘, 이것이 단순한 소설 속 설정이 아니라, 최고존엄의 사진이 실려 있는 신문지로 신발을 감았다고 사람을 죽게까지 만든 현실로 보여지고 있다라는 것, 그리고 그 현실의 정권이 "과두 정치의 본질은 부자 세습이 아니라 죽은 사람에 의해 살아 있는 사람에게 부과된 세계관과 가치관을 고수하는 것"(p242)이란 작가 조지 오웰의 진단을 너무도 똑같이 따르고 있다라는 것이, 심지어 우리 시대의 로또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기능 역시 이미 빅 브러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존재하고 있었다라는 것24 등의 현실 등이 섬뜩하며, 이러한 섬뜩함을 다른 작가들 역시 이미 느꼈었던듯,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 등장하는 일본 무신정권의 가톨릭에 대한 핍박 역시 이 작품 「1984년」에 이미 등장하고 있었으며25, 주제 사라마구가 「예수복음」에서 보여주었던, 하나님이 악(evil)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 역시, 가상으로라도 자신에게 저항하는 세력을 존재하게 해야하는 권력의 필요로 이미 이 작품 속에 등장하고 있었다26라는, 그러하기에,


이것이 일종의 과잉반응일 수도 있겠으나, 이 작품 속 다른 상상들이 언젠가, 그러니까 나의 세대에서가 아니더라도 혹 다음 또는 다다음 세대에서 현실이 되어질 지도 모른다라는 상상은 분명, --- 그 '개연(蓋然)의 극대화'로서의 디스토피아를 어쩔 수 없이 그려보게만 해줍니다. "Freedom is Slavery"27가 설마, 그 유일한 해결책이 아닐까,하는 지극히도 우울한 염려도, 쉽게 지워지지는 않고 말이죠. 어쨌든, 


이 작품이 대체 왜, 그토록 많이 인용되었었는지,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과 관련해서도 회자되었던 이유 역시 (그 땐 몰랐었거늘), 이 작품을 다 읽고나니, 너무도 뚜렷이 이해가 되네요. 그나마, 지금 당장의 대한민국엔 "War is Peace, Ignorance is Strength, Freedom is Slavery"라 생각하지 않는/을 것 같은 대통령이 있다라는 점만이, 위안 되어줄 뿐.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컨디션이 최악인 며칠 간이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감상문을 쓰기도 싫었고, 써지지도 않았는데다가,

쓰고나서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작가 조지 오웰의 삶 :조지 오웰, 시대의 작가로 산다는 것

 읽어본, 조지 오웰의 작품들 : 「카탈로니아 찬가」, 「동물농장

이 작품 속 상황들을  떠올려주는 작품들 :어떤 소송」, 「침묵

※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지금 이 블로그에 와있는 당신에게마저 여하한 구실로라도 '나를 아는' 이란 형용사를 붙여 --- 꼭 한번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은 책들의 제목 앞에 ★표시를 붙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시이겠지만 가끔은, 타인의 주관을 한번쯤 믿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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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구두당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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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 모델은 특정한 말이 승리할 확률을 추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말이 승리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 애덤 쿠하르스키 , 「수학자는 행운을 믿지 않는다」중 p300, 북라이프 , 2016.  

작가 구병모가 직접 규정하고 있는 바, "옛 이야기의 변주"(p288)임에 틀림없는 이 소설집은, '옛 이야기의 변주' 같은 것도 창작이라 부를 수 있습니까? 라든가, '옛 이야기의 변주'까지도 그 작가의 창작물이라 할 수 있는걸까요? 와 같은, 혹여 제기될 수 있을 물음들에 대해 --- 이건, "제대로 된 관찰자"1의 역할을 하는 작가로서, 그 치열하게 관찰한/된 바에 대한 놀라울 정도로까지 확장된 해석, 그리고 그 기막히도록 멋진 해석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 낸, 새로운 창작이라 불리울 충분한 자격이 있는 이야기들이기에, 단 한 치 의심의 여지조차 없이, 그러니까 구병모의 이 '변주들'은, 흡사 '말이 승리할 확률의 추정 뿐 아니라 승리하는 이유까지' 모두를 완벽하게 담고 있는 예측 모델과도 같습니다~라 대답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제 '개인적 확신'은,

이 책 속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내용', 그러니까 현실에 대한 작가의 --- 흡사 (제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글이 아닌가 싶게, 집요하게 끝까지 파고 들어가, 발기발기 찢어버리고 만듯한, '해석'으로부터의 감동이 한 축, 그리고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는 대체로 현명하지 못하거나 착하기만 한 구닥다리 아버지에게 아름답고 지혜로운 딸이 있어, 위기에 놓인 아버지는 딸의 자문을 구하고 그녀의 조언에 따라 문제를 해결해나간 끝에 임금의 장인 자리를 차지하곤 했는데, 그런 서사가 있다는 사실부터가 현실 세계에서 동일 사례를 찾기 힘들다는 방증이었다. (p101)

어느 작품의 어느 구절이라 콕 찝어낼 순 없으나, 분명 (역시나 제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준, 또한 제가 참으로 좋아하는 작가인) 이문열의 작품들 어느 곳에선가 분명 만나보았었던 어느 구절의 느낌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다라는, 예의 '문장의 스타일'이라는 '형식'에 있어서마저, 이 작가 구병모가 제 마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예 바닥부터 천정까지 통째로 사로잡았다라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문장들이라는, 또 다른 한 축으로부터 기인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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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분홍신>이란 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2, 한 소녀가 분홍색 신을 가지기 원했고, 드디어 그것을 신게 된 소녀는 그 신을 신은 후 춤추기를 멈출 수 없었었다는, 간단한 스토리의 동화에 대해, 교사 박현희는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동화중 하나라 꼽고 있으며3, 이 이야기를 가리켜 '일반적 규범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에 관한 교훈을 담고 있다라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일반적 규범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을 가지는 것에 잘못이다 아니다를 결정짓는 것이 중요하다라기 보다는4, 그러한 욕망을 가졌을 때의 결과로 너가 죽을 때까지 춤을 춰야하는 형벌을 받을 수도 있다라는 걸, 즉 --- 가해지는 제재에 대해, 그것의 정당성에 의문을 갖기보다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을 때 주어지는 불이익을 먼저 떠올리게끔, 은연 중에 우리를 세뇌시킨다5라는 거지요. 얼핏,


​화가들은 회백색과 검은색으로 정물화와 풍경화를 그렸는데, … 태어나서부터 무채색의 세계만 알고 자랐으므로 그들이 화폭에 펼쳐 놓는 기괴하거나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 또한 흑백과 회색으로만 이루어졌다. (p12)

작가 구병모 또한 그러한 선천적 세뇌에 대한 방향으로, 이 동화를 해석하고 있다,라 생각해볼 수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6... 만, 아 물론, <학교-학원-학원-학원>의 스케쥴에 대해 '원래 삶이란 이런 것'이라 알고 있다는 강남 아이들에 대한 은유라고 볼 여지도 있겠습니다만, 그보다는...


그리 오랜 시일이 지나지 않아서 도시에는 색이 보이는 사람들끼리만 알 수 있는 유대감 내지는 결속력이 형성되었다. (p15) …… 그들은 자신들 눈에 빨강이 보인다고 주장했으며 빨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빨강이 얼마나 위험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인류에게 유용한 색깔인지를 설명했다. (p25)

(이 또한 교육의 산물일) 우리의 선입견이 이끄는 바로서의 '공산주의', 혹은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 등으로도 해석되어질 수 있겠는, 작가 구병모의 이 변주는 예의, 주제 사라마구를 떠올리게 해주는7다음 구절을 통해,


진작 빨강을 볼 수 있었지만 빨간 구두를 신지 않은 채 잠자코 일이 굴러가는 꼴을 지켜보던 이들 또한 검은 구두 신은 이들을 변호하러 나서지 않았다. ​빨간 구두 아닌 검은 구두라고 증언하기 위해선 제 눈에 빨강이 보인다는 사실부터 밝혀야 했고, 단지 빨강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도 빨간구두당의 일원으로 몰릴 위험이 있었다. … 세상은 다시금 검정과 하양 그리고 그 사이를 어중간히 맴도는 회색으로 물들었고 …(p26)

이 세상에서, 정의(justice)가 불의라는 것을 이겨내기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결과적으로 이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라 전 생각했습니다. 이 '이겨내기 쉽지 않음'을 향해 '기회주의'8란 단어를 빌어 개인, 그리고 그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며, 혹여는!

이제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한 데나리온과도 같아야 할 햇빛 한 줄기조차 들지 않는 공장 안이 바깥보다 더 춥다는 사실을 압니다. (p280) …… 다시 바깥세상의 추위와 마주한다는 상상만으로도 머릿속을 물처럼 흐르던 생각은 뚝 그치고 말라붙어 버렸습니다. 공장 안 숙소라는 작은 세상이 주는 최소한의 온열이란, 세상에 태어나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달콤한 초콜릿이나 부드러운 케이크와도 같은 장력으로 나를 끌어당겨 현실에 붙박아 놓았습니다. (p277)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해 발생되는, 행여 그것까지를 '기회주의'란 단어로 불러도 되는가에 대한 고민마저 필요없다 할지라도, 과연   


"영원한 을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자본가들의 갑질을 성토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 익명의 네티즌으로서의 성토일 뿐, 막상 현실에서는 을이라도 되는 상황을 감지덕지 끌어안는다. 갑질을 당할 수 있는 을의 입장에 있다는 건 적어도 여전히 링크 안에 함께 서 있음을 의미하므로, 아예 그 링크에서 낙오되는 일이 있을까 경계한다. 이런 현상은 투표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가진 게 없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이해를 대변해줄 사람에겐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그자에게선 내가 떠나온 비참한 출신 성분의 향기가 풍긴다. 중요한 건 누가 가장 힘이 센가,이다. 비밀투표일지언정, 내가 강자의 편이라고 느껴야 안심이 된다." (pp10~11)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의 <역자 서문> 중 pp10~11, 생각정원 , 2015.




위와 같은 (비참한? 최소한의?) 바람()까지를 비난할 수 있는 것일지, "현실은 언제든 꿈에 젖어도 되는 것이었고, 꿈이 증발한 자리를 예상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스스로의 몫"(p170)이란 개인적 감정의 up-and-down은 그냥 나 스스로 즐기게/괴로워하게 좀 내버려 두면 안되겠니,라 항변하고 싶은데, 문득!


"누구의 도움도 얻지 못한 소녀가 주검으로 발견된 사회적인 비극과 참상을, 안데르센은 할머니와의 만남과 승천이라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덮어 버린다. 소녀 입가의 미소는 자신을 보호해 주지 못한 사회에 대한 어떤 원망이나 집착도 없이 다만 간밤의 꿈이 행복했음을, 세상을 등지는 대신 천국으로 가는 길에 대한 기쁨만이 가득했음을 보여 준다."

- 「빨간구두당 : 이야기의 뿌리들」중 pp43~44, Internet copy

​나도 역시, 위와 같은 사회적 세뇌의 결과물만을 생각해낼 수 있을 뿐이며, 이러한 세뇌의 확장은 이내,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고 일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가늠하는 데 중요9"(p268)하지 않을까란 (나 스스로의 혹은 타인의) 의문에 대해 "노동 생산으로 먹고살아야 할 사람에게 감수성이라니, 그처럼 터무니없는 사치와 낭비라니"(pp191~192)와 같은 자기검열 내지는 비판을 스스럼 없이 가하게 되고, 그리하여 결국엔 "던져져도 파열음을 낼 줄 모르는 돌, 파문을 일으킬 줄 모르는 수면과 같은"(p100) 삶을, 마치 가장 이상적(ideal)인 상태의 삶으로 믿어버리곤, 급기야 그 믿음을, 그게 가능하다면, 나 뿐만이 아닌 타인, 완전한 타인 및 나의 후손들에게까지 강요까지 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을 때의 감정이란 게,


인간들은 살아 있는 한 신의 커다란 동그라미 안에 갇힌 것처럼 저마다 지겨운 일을 반복해야 하는 운명을 지녔으니까. 얼마나 더 지루하거나 위험하거나 더러우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p85)

​나 스스로 이걸 더 이상, '체념'이 아닌 '당연'이라 생각하고 있는 걸 깨닫게 되었을 때의 감정이란 건 참...


………………………………………………………


한 편의 이야기를 하나의 동그라미라고 할 저에 그 중심부에는 마법에 걸린 왕자와 공주의 행복이 있지요. 이 세상 어디로 간다 해도 중심이 아닌 모든 것은 주변이고, 수부는 자신이 가장자리의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주인공들의 충만과 상승과 고양을 위해 존재하는 이 세상의 수많은 지렛대 가운데 하나. 세상을 떠받친 아틀라스의 잊힌 어깨 같은 것들. (pp92~93)  



우리는, 자신의 삶이 다른 누군가의 삶에 수단으로 사용되길 원하지는 않을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내 몸과 마음은 당신께 바치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그에 따라 살아왔습니다"(pp53~54)와 같은 선서가, 더 이상은 강요되지 않는 세상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 내가 왕자이고 당신이 공주가 아닌 한, 그리하여 세상이 나/우리를 주변, 가장자리, 지렛대 중 하나로/일 뿐이라 간주한다면, 그런 선서는 명시적으로만 강요되지 않을 뿐, 마치 농부에게 주어진 "땅에 묶이고 땅을 부치는 보편적 삶의 필연성과 유한성"(pp181~182)과도 같이 살다가, "그러고 나니 이제 나란 사람은 줄 것도 별로 남지 않았구나 싶답니다"10와 같은 깨달음으로 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까지 강요되는 것은 아니다,라 전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처럼,

여기에 실려있는 8편의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우울합니다. 이 우울함이, 본연의 스토리로부터 기인된다라기 보다는, 물론 그런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뭔가 --- 작가 구병모의 글이, 작가의 문체가, 어쩌면 작가의 생각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란 생각을, 연이어 읽어 본 3 편의  책들로부터 받게 됩니다. 그리고 전... 작가의 이런 우울함에, 오랫만인 사정(ejaculation) 후의 노곤함과도 같이 완전히, 녹아져 버렸고 말이죠.

읽어본, 작가 구병모의 다른 작품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파과

기존 동화의 '새로운 해석'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 「어른들을 위한 잔혹동화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지금 이 블로그에 와있는 당신에게마저 여하한 구실로라도 '나를 아는' 이란 형용사를 붙여 --- 꼭 한번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은 책들의 제목 앞에 ★표시를 붙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시이겠지만 가끔은, 타인의 주관을 한번쯤 믿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



... 금연 76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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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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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s Aim> ------------ 가지고 놀던 장난감 자동차가, 아빠와 엄마의 침대 밑으로 들어가 버려서, 그걸 꺼내려고 침대 밑으로 들어간 사이, 몇 명의 남자들이 들이닥쳐, 곤히 자고 있던 아빠와 엄마를 잔인하게 죽였고, 입을 막고 흐느끼지도 않으며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보았던 하이(High)는,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의 손목엔 전갈 모양의 문신이 있었으며, 그의 이름이 로우(Low)라는 걸 알게 되었고 …… 하이가 성장하여,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어코 로우를 찾아냈으며, 뒤늦게 하이를 알아본 로우는 용서를 빌지만 끝내 하이의 손에 잔인한 죽임을 당하게 되고, 근데 알고보니 그게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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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한 모든 일 가운데 필연적인 것은 많지 않았다. … 그야말로 어쩌다 보니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조형과 부착으로 이루어진 콜라주였고 지금의 삶은 모든 어쩌다 보니의 총합이었다. (pp 126~127)

왜 하필 그 때, 장난감이 침대 밑으로 굴러 들어갈 수 있었던건지, 그 어린 아이가 그렇게 참혹한 상황에서도 울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 장면들을 하나하나 바라보고 있을 수 있었던건지, 왜 그런 아이는 자라났다 하면 다 하나같이 원빈이나 공유같이 생긴 킬러가 되는건지,와 같은 모든 설정들은, 'ex ante & ex post'(의 관계)를 어찌하여도 성립시켜낼 수 없는 것이니, 아! 물론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으신다니까~'란 반론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은 '신은 동전 던지기도 하지 않으신다'란 재반론을 이겨낼 논리나 확증을 가지고 있지도 못한 것이니, 나름 맘 편하게, 간단하게 '세상 모든 어쩌다 보니의 총합'이라든가 등으로 돌려버리고 나면,


"삶은 정해져 있는 대로 흘러가는 것 같아도 실은 하나의 우연히 쌓여 필연이 되는 과정이라고, 불가피한 상황이 우연이라면 행동은 사람의 명백한 의지라고, 학규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 백가흠, 「마당뺑덕」중 p45, 네오북스, 2014.

이제 우리 앞엔 그저 --- 퇴적된 우연으로서의 필연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베일을 벗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지게 되는 건 예의, 누군가의 명백한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라는 것만 남게 되는 겁니다. 자라고 보니 원빈이나 공유같은 외모가 되었고, 타고나기를 이소룡의 운동신경과 함께였었다 할지라도, 하이에게 자신의 부모의 죽음에 대한 복수의 의지가 없었었다면, 로우의 삶 역시 그처럼 끝이 나진 않았을꺼란 거죠. 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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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발톱과 뿔은 누군가를 사냥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p51)

이 작품 「파과」에 등장하는 킬러1, '투우'가 지니고 있(다 할 수 있겠)는 자질 - 영화 속 예를 들자면, '원빈이나 공유같은 외모'와 '이소룡의 운동신경' - 을 가리켜, 그의 삶을 "사람 죽이는 걸 업으로 하고 살아온 사람"(p35)인 킬러가 되는 것으로 만들어 낸 원인(causation)이었다라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것들은 단지 필요조건이었을 뿐이죠. 그 필요조건에 '투우'의 의지가 더해져, 실제 그가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기회란 것이, 그에게 허락되었었으며2, 정확하게 말하자면 허락되어질 수 있게 그가 만들어 내었었으며, 만약 그 기회를, 그러니까 이 소설의 마지막에 펼쳐지고 있는 장면들 속에서 '투우'가, 자신이 원했던 바를 이루어냈었다라면, 관객으로서의 독자는 과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덤불 속>에서 보여졌던, (그 누구도 차마 부정할 수는 없을)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혹은 저지르고자 마음 먹은 죄에 대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정당성'과도 같은 무언가를, '투우'의 그 오랜 "의지"에게도 허용할 수 있겠느냐/허용해도 되겠느냐란 중요한 선택을 앞두게 됩니다. 물론, 그 반응은, 각자의 가치관/취향에 따라 (물론 대부분은 한 쪽으로 몰리겠지만,) 예의 둘로, 그러니까 예를 들어 <High's Aim>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 통쾌해!'의 카타르시스를 느낀 (다수일꺼라 추측되는) 부류와, '저건 엄연한 살인이지~'란 불의(unrighteouness)를 느낀 부류로 나뉘어지겠지만,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조각'은? 이 소설의 주인공은 '조각'이었던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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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s Aim>의 하이가 이 작품 속 '투우'라면, 구병모의 이 작품 「파과」는, 제가 만든 이야기 그대로 이해되어질 수 있겠으나, 만약 작가에게 --- '지나친 작위'라는 비난을 감수할 의지가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3, 이 소설 「파과」는, 하이가 '조각'일 수 있을, 원작 그대로의 <High's Aim>인 채, '투우'가 주인공이 되는 <Aim High>의 프리퀄로 변신되는 구조를 지닐 수도 있었다라 생각합니다. 이, 꼬이고 꼬인 이야기를 굳이 꺼낸 이유는 바로,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p222) 

소설의 주인공을 반드시 꼽아야 하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하더라도 이 소설의 주인공이 왜 반드시 '조각'일 것이라 거의 당연하게 여겨져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안타까움/불만 때문입니다. 거의 대부분, 거의 당연스럽게, 위 인용구에 걸맞는 인물은 '조각'일 것이라고, 그녀의 인생이야말로 너무도 일찍 갈변되어진 '파과(破果)'이라고, 심지어 도대체 이해해낼 수 없겠는 또 다른 선택지4인 '파과(破瓜)'에서도 '투우'에게 할당되어질 수 있겠는 점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란 이 상황이, 상당!히 맘에 들지 않는 겁니다. 제게 보이는 '조각'의 삶이란 그저,


한번 구축된 조직은 이미 더 큰 질서 안에 포섭이 되어버리고, 그다음부터는 그 질서가 조직을 움직이는 것일세. 기계의 부품이 모두 빠지고 더 이상 대체할 게 없어지기 전까지는 말일세. …… 그녀는 앞날에 대한 어떤 기대도 소망도 없었으며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오늘도 눈을 떴기 때문에 연장을 잡았다. … 오로지 맥박이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움직이는 그것은 훌륭하게 부속이 조합된 기계의 속성이었다. 그녀는,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pp 254~255) 

'조각'으로 인해 p222의 인용구 속 "그러지 못한"의 당사자가 되어야 할, 그리하여 살아갈, 그리고 살아온 삶 속에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작동시켜 놓았던/놓을 수밖게 없었던 '투우'완 달리, --- '조각'의 삶은 그저 '훌륭하게 부속이 조합된 기계의 속성' 그 이상을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라, 전 생각합니다. 물론, 그녀, '조각'도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p332) 가졌었었거늘5, 그러했다하여, '파과(破果)'로서의 이 작품을 온전히 그녀만의 이야기로 보는 것은, 그녀 '조각'으로 인해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조각(shaped)된 삶을, 즉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렇게 살아지게 된(destined to live) '투우'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죠. (심지어, 죽게 되는 역할마저도 '투우'의 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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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s Aim>에 등장하는 로우. 그 역시, 그가 어릴 적, 하이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부모님을 잃었었던 거라면? 그래 그 복수를 한 것이라면? 그래도 여전히 --- 우리는 부모의 복수를 완성시킨 하이에게 박수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까요? 이 작품 「파과」가 이처럼, <Aim High>라는 후편을 낳을 수 없는 구도를 지니고 있기에,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조각'이어서는 안 된다라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하니?라 질문받아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끝내 이걸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건,


지금 만난 게 저 사람인데! 모두 그런 건 아니라고 해봤자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p16)​

소설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 억울한 임산부의 항변 역시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 처자의 투정쯤으로 치부해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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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전에 읽었던 작가 구병모의 다른 작품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과 마찬가지로, 「파과」 역시, 예의 '네이버 국어사전'을 열어놓은 채 읽어야 했던 소설이었습니다. "하얀 꽃잎이 난분분히 뒤섞여"(p107)을 읽고는, 이 단어 '난분분히'를 작가가 참 좋아하는 모양이네, 마치 이건 모르는 영어단어를 완전히 암기하기 위한 반복학습 같잖아,란 생각이 들기도 했으며. "익숙하지 아니하여 서름서름하다"란 뜻의 '서어하다'란 단어를 비롯, "설의를 머금은 하늘"(p287)처럼 지금이라도 연애편지에 써보고 싶은 구절등, 아주 꼼꼼하게 사전을 찾아 기록해가며 읽어내었다란 뿌듯함만으로도 충분하거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에서 보여주었던 "봄철의 몰상식했다"6의 경이로운 조합이, 이 작품 속에선


​당신이나 나나 소멸의 한 지점을 향해 부지런히 허물어지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서글픔... (p202)

'부지런히''허물어지다'란 두 단어를 함께 이어 써낸 문장으로, 다시 한번 저에게, 한국 작가가 한국 말로 써낸 소설만이 줄 수 있는 '읽는 쾌감'을 안겨 주기도 했습니다... 만, 무엇보다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 (p317)

쉼표가 사용된 위치에 마저, 정말 별 것 아닌 그것에까지 감탄하게 되는, 화자(speaker)인 '조각'의 심정을 상상해보며 나의 목소리로 따라해봤던 이 한 마디는 제게 --- 문학 작품을 향해서는 아마도 단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것 같은 그 (의미로서의) 단어, "쌀 것 같..."다란 단어, 읽는 내내 제 머릿 속에서만 맴돌던 이 단어를, 기어이 이렇게 적어내게 만들어 줍니다. 이 작가, 은근 집요하며, 은근 늘어지는 문장을 즐겨 쓰고, 단 번에 이렇게 제 마음을 사로잡은 점이 또한 은근, 하늘 나라로 가신 작가 주제 사라마구와 비슷하지 않나 싶... 

다 쓰고 읽어보니, 이런 적이 있었던가, 싶을만큼, 오로지 이 작품 「파과」를 이미 읽은 분들만 이해할 수 있게 쓰여진, 읽은 분들을 이해시킬 수나 있을까 자신없는 독후감이 되어버렸네요. 결코 저의 의도는 아니었으나, 독후감이란 게 줄거리의 요약은 아니어야 한다란 생각에, 뭔가 정리되지 않은 채 혼란스럽기만 한 저의 요즈음,이 더해져, 이 소설에 대해 쓴 저의 독후감을 이렇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네요. 왠지 죄송합니다,란 문구를 꼭 넣어놓아야 할 것 같은...   


읽어 본, 작가 구병모의 작품 :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금연 71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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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시대의 작가로 산다는 것
스테판 말테르 지음, 용경식 옮김 / 제3의공간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그는 유언에 자신의 전기를 원치 않는다고 썼다. (P283)

원치 않는다 썼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쓰여진 조지 오웰의 전기(life story)입니다. (타인이, 고인의 생전 삶에 대해 쓴) 이런 류의 책을 읽어본 기억이 없거늘, 작가 일 개인의 삶에 대한 조사와 기록인 이 책은 --- ① 작가 조지 오웰의 작품들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수 있다라는 걸, 얼마 전 「카탈로니아 찬가」와 「동물농장」를 읽은 제게 아주 강렬하게 알려주었을 뿐...  아니라! ②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작품, 「1984」에 대한 사전적(prior) 기대 역시 한껏 올려주었네요. 

한 사람의 생애를 정말 속속들이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야기하려면, 그의 부모에 대해, 어쩌면 조부모에 대해서까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p9)

물론! 한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그 작품을 쓴 작가의 삶을 알아야한다라는 게, 모든 작가 또는 모든 문학작품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모든 글쓰기는 프로파간다다. … 프로파간다는 모든 책의 심장부에 숨어 있다. 예술 작품은 어느 것이든 각각의 의미와 주제, 즉 정치적, 사회적, 혹은 종교적인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 (p231) …… 나는 완전히 비정치적인 문학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특정한 입장에 서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하다거나 바람직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pp271-272)

작가 조지 오웰이 살아냈던 시대란 게, 자신의 문학 작품에, 정치적 요소가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었음을 상기한다면, --- 이런 시대 작가의 역할은?이란 질문에 대한 답, "제대로 된 관찰자라도 되어야겠다, 생각해"1에 등장하는 '관찰자'로서의 작가가 (비단 생물학적 의미뿐만이 아닌) 어떻게 탄생하였는가를 아는 것이 때로는 하나의 must가 될 수도/되기도 하겠다란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암튼/헌데! 그가 살았던 그 '이런 시대'란 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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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생인 조지 오웰이 살았던 시대상이(란 것의 일부가), 2002년생인 종원군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라는 커다란 놀라움을, 이 책은 안겨줍니다.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선 좋은 대학을 졸업해야 하고,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선 좋은 고등학교엘 가야하고, 좋은 고등학교에 갈 수 있느냐의 여부는/가 무려! 초등학교 4학년 때 결정된다라는 2017년의 대한민국 인생 공식은 이미...

​예비학교의 학비는 엄청나게 비쌌고, 블레어 가문2은 큰 부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키고 싶어 했다. 그들은 이것이 사회적 신분 상승을 보장해주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pp26-27)

부모의 이와 같은 기대와 욕망은, 조지 오웰로 하여금 "돈의 역할과 사회적 계급에 따라 달라지는 개인의 운명"(p31)을 너무도 일찍이, 또한 너무도 명확하게 각인시켜 줍니다.3 그리하여/그렇게, "곤경에서 벗어나 사랑받는 유일한 방법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사람들에게 그에게 기대하는 것을 실현하는 것, 그리고 글을 쓰는 것뿐"(p46)이라 판단한 조지 오웰은, "크리스마스 식탁에 올릴 거위에게 억지로 많이 먹이는 것만큼이나 비인간적으로 지식을 주입"(p42)했던 예비학교4 생활을 여하히 감내해 내었죠. 그러나 이 모든 시간들은 결국,

​기숙학교에서 부적응아가 겪는 고통과 전체주의 사회에서 저항하는 개인이 겪는 고립감 사이에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받은 상처는 깊고 오래간다. (p50)

​역설적이게도, 훗날 (스페인 내전에서) 그로 하여금 '사회주의 사상'에 그토록 큰 매력을 느끼게 만든 것일 수도 있겠는, 개인적 상처를 만들어 냈을 뿐입니다.

​"사회주의의 '비결'은 평등 사상에 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란 계급 없는 사회일 뿐이다.

-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중 p140, 민음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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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찍 - 그러니까 대여섯 살 때부터 - 나는 언젠가 작가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p21)

대여섯 살 때, '작가'란 것이 무언지를 이미 알았다라는 것도 신기해 죽겠는데 이미! 그 작가가 될 것 같다란 예감을 가졌다라는 그는 --- (우리나라로 치면 초딩인) 세인트 시프리온 시절, 「현대의 유토피아 A Modern Utopia」란 책을 읽고, "자신도 언젠가 이런 종류의 책을 쓸 거라고"(p44) 친구에게 말했다 합니다. 쓰는 것의 준비과정으로서의 그의 읽기5는, 이처럼 일찍 시작되었던 거지요. 이후 이튼스쿨 시절 읽었던 문학들6과, 스승이었던 「멋진 신세계 A Brave New World」의 올더스 헉슬리로부터의 영향7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훗날 조지 오웰 탄생을 빚어냅니다.8 허나!

 

예의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그만의 감성도 분명 있었었으니, 그건 바로, (세상에! 여친에게 「드라큘라」를 선물하는 감성도 특이해 죽겠거늘,)        

그는 자기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 한 권을 여자친구에게 건넸는데, 바로 1920년대 초에 나온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였다. "그는 특히 주의 깊고 세심하게 배려할 줄 아는 소년이었기에, 책을 넣은 꾸러미 안에 조심스럽게 실크종이로 따로 포장한 십자가와 마늘 한쪽을 넣어두었다. 뱀파이어에 대항하기 위한 이런 안전조치는 나를 안심시켰고, 그 책을 두려움 없이 즐겁게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9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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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된다."

 

 

집 근처 술집... 의 벽에 낙서되어있는 문구입니다. 이게 원래 유명한, 누군가의 어록 중 하나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작가 조지 오웰이야말로, 이 구절처럼, 생각하는대로 살아내려 끊임없이 노력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에서의 경찰 시절, "그런 입장에서라면 정확히 나도 그렇게 할 수밖게 없었을 그런 일"(p117)을 했던 버마 현지인들을, 단지 그들이 식민지 국가의 국민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보내야 했던 경험은 그로 하여금 제국주의에 대한 "강한 증오심"(p109) 뿐 아니라, "양심의 가책"(p116)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와 같은, 제국주의 "압박 시스템의 톱니바퀴 중 하나"(p116)로서 작동했었던 버마에서의 경찰 시절에 대한 죄의식은 결국,


 내가 벗어나고자 했던 것, 그것은 단지 제국주의만이 아니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의 온갖 형태였다. 억압에 대한 나의 증오심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p117)

"(거지, 부랑아, 범죄자, 창녀와 같은) 사회의 밑바닥 인생"(p122), 그리고 광부, 부두 노동자들과 같은 "불공정함의 상징적 희생자들"(p181)을 위한 싸움이야말로, "작가가 분담해야 할 참여 의무"(p181)라는 생각까지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그러한 신념에 따라, 작가 조지 오웰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떤 종류의 전쟁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왜 의용군에 입대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싸우느냐고 묻는다면 '공동의 품의를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중 p66, 민음사, 2001.

 

 

"내가 싸워서 지킬 만한 어떤 가치가 있다"(p13)라는 자신의 판단에 충실했으며, 충실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내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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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란 글10에서 조지 오웰은, 작가가 글을 쓰게 되는 네 가지 동기로 ① 순전한 이기심11, ② 미학적 열정, ③ 역사적 충동12, 그리고 ④ 정치적 목적을 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충동들은 사람과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무게를 지니게 되는데, 스스로를 "네 가지 동기들 가운데 1,2,3번 동기가 네번째 것을 족히 압도했을 그런 사람"13이라 소개하고 있는 그에게, '그가 살았던 시대'는 결국,

"우리 시대처럼 소란한 세월을 살면서 이런 문제들 -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를 위해 - 을 회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넌센스다. 이 시대의 작가는 누구나가 다 이런저런 형태로 그 문제들을 다룬다."

- <나는 왜 쓰는가> 중, (「동물농장」 p141)​  

"불의에 대한 의식"14으로서의 정치적 글쓰기를 (어쩔 수 없이) 강요했었다,라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즉! --- 에릭 블레어로 태어난 한 남자가 어찌하여 결국 조지 오웰이 되었듯, 정치적 목적의 글쓰기를 하는 작가가 '되도록 태어났던(born to be)' 것은 아니었었으나, 그가 태어나고 살아내어야 했었던 시대/사회란 것이 결국 그로 하여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destined to be)' (일종의) 타고난 운명을 선사하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 시대에 태어났고, 그 사회를 살아낸 모든 '에릭 블레어'들이 모두 '조지 오웰'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었듯, 역시나 그, 개인만의 예술적 감성과 능력이겠지요. "나쁜 전체주의에 관한 최고의 일화"(p280)라는 평을 받았다는 「1984」가 아직 남았습니다. 과연 그 작품은,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15을 일깨워 줄지, 많이 궁금하네요.      

※ 읽어본, 작가 조지 오웰의 작품들 : 「카탈로니아 찬가」, 「동물농장

 


 

  1. 박주영 作, 「고요한 밤의 눈」중 p265, 다산책방 刊, 2016.
  2. 조지 오웰의 부모.
  3. ⁠"나는 일찌감치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10만 파운드 이상을 갖지 못하면 하찮은 인간이라는 사실, … 그런 사회적 명예의 기준에 따르며, 나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였다."(p31)
  4. 세인트 시프리언.
  5. "읽는 것은 쓰기의 준비 과정"(p44)
  6. "거기에서, 그는 미래 자신의 작품들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두 권의 책을 읽었따. 그의 우상인 H.G. 웰스의 「모로 박사의 섬」과 잭 런던이 쓴 「강철군화」였다. 아마도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규칙'은 전자에서 따온 것 같고, 「1984」에 나오는 디스토피아는 후자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러나 열네 살에 무슨 대단한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그때 접한 책들의 내용이 천천히 지속적으로 그의 정신에 스며든 것으로 보인다."(pp58~59)
  7. "오웰이 훗날에도 구체적인 영어, 즉 고유의 의미를 가지되 진부하지 않은 단어들을 찾아내려 애썼던 것은 헉슬리의 영향임이 분명하다." (p65)
  8.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들 속 등장인물들 중 많은 이들이, 실제 그의 삶에 존재했었던 이들이라는 걸 책은 알려줍니다. 심지어,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염소 '뮤리엘'은 그가 길렀던 염소의 실제 이름이더군요.
  9. 종원군에게, 훗날 여친에게 꼭 써보라 강추할 예정.
  10. 조지 오웰 作, 「동물농장」, 민음사 刊, 2006, 중 pp133~144
  11. "남들보다 똑똑해 보이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죽은 후에도 기억되고 어린 시절 자기를 무시했던 어른들에 보복하고 싶은 욕망"(「동물농장」중 p137)
  12. ​"사물/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한 사실들을 발견하며 후대를 위해 이것들을 모아두려는 욕망"(「동물농장」중 p138)​
  13. 「동물농장」중 p138.
  14. 「동물농장」중 p141.
  15. 위화 作, 「허삼관 매혈기」, 푸른숲 刊, 2013, 중 <한국어판 개정판 서문> 중 작가 위화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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