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열린책들 세계문학 17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상이 언어에 의존한다고 한다면... (pp349~350)

​문자라는 것이 더 이상 기록의 수단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고1, 그리하여 '사고의 표현 및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으로 언어만이 남게 된다면, 그와 동시에, '사상이 언어에 의존한다'란 역(reverse) 또한 자동적으로 성립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 민중을 통제하고자 하는 권력이 있다 할 때, 그 권력은 이제 민중이 사용하는 언어만 통제하면 된다,라는 결론에 이르르게 되고, 유효하게 그 통제를 수행해내고 있을 때2 결국,


그들은 의식을 가질 때까지는 결코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반란을 일으킬 때까지는 의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p85) Until they become conscious they will never rebel, and until after they have rebelled they cannot become conscious.

예를 들어,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를 더 이상은 확정지어내지 못하는 것이, 이제 완전한/하나의 평범한 일상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죠. 조지 오웰의 이 멋진 소설 「1984년」은 바로 이 상태, 즉 --- 복종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복종하고 있다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게 되는, 이 '완벽한 복종'이 일상화된 사회, 그리고 그 사회에서 일탈하고자 하는 한 개인3이, 그러한 시도로 인해 겪게 되는 (결국엔) 정신적 고통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원인은,

구전제주의자들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전체주의자들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우리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 (p297) The command of the old despotisms was “Thou shalt not”. The command of the totalitarians was “Thou shalt”. Our command is THOU ART”.

​<이렇게 되어 있다>는 권력의 명령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되어 있지도 않다'라 저항하는 와중에도 가시어지지 않는, --- 내가 틀렸고, 내가 거부하고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주의(principle)가 옳을 수도 있다란 가능성으로부터 시작된다라는 것이지요.


당은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고 발표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믿게 될 것이다. 무서운 것은… 그들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p95)

………………………………………………


【 WAR IS PEACE 】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그리고 이스트아시아의 "세 개의 초국가 three great super -states"(p215)는 동맹과 배신을 거듭하며, "지난 25년 동안 계속"(p216)하여왔습니다만, 그들간의 이 전쟁은, 일반적으로 떠올려지는 그런 개념의 전쟁이 아닙니다.4 그 차이점이 물론, 전쟁의 방식에도 있으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 전쟁은 … 본질적인 명분도 없고, 어떤 뚜렷한 이념적 차이점에 의해 구분되지도 않는다. (p216) 

'전쟁의 목적'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소설에서 가정되고 있는 1984년은 "1950년대의 핵 전쟁의 황폐가 아직 완전히 복구되지 못한 상태"(p220)입니다. 즉, 세 국가들이 다시금 빡터지게 싸울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죠.5 그럼에도 불구하고, ①25년 간의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아마도, --- 2017년 현재의 시점에서 주어질 수 있겠는 물음인, (3차 세계대전까지 거론할 것 없이) ②미국과 중국이 정말 한 판 뜰 일이 있기는 할까요?6에 대한 답변으로 갈음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공공연하게 떠들어 대지는 않지만 암묵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 끊임없는 전쟁에 의해 전쟁을 위해 존재하는 똑같은 경제가 있다. 3대 강국은 서로를 정복할 수 없을뿐더러 정복해 봤자 아무런 이익도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p228)

소설 속의 전쟁이건, 2017년에 가정해보는 전쟁이건 그 모두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닌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라는 겁니다. 아, 물론 전쟁 자체가 목적인 경우는 역사적으로도 거의 없었었겠죠. 모든 전쟁은 영토확장이라든가, 자원 또는 노동력의 확보 등이라는 목적을 위해 수행되었었으니까요. 하지만! --- 그러한 목적의 달성을 위해 사용된 '전쟁'(이라는 수단)은 분명, 목적의 달성이 그 과정에서 입어야 했던 손실을 만회해주어야만, 수단으로서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것이기에, "정복해 봤자 아무런 이익도 없다는 결론"이 이미 나있는 상황은, 전쟁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란 일종의 내쉬균형(Nash equilibrium)을 확인시켜 줄 뿐이지요.7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 왜, 소설 속 세 초국가들은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전쟁을 해왔던 것일까요? 


결국 계층 사회는 빈곤과 무지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8 … 문제는 세계의 실질적 부를 증가시키지 않으면서 산업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물품은 생산되어야 하지만 분배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이것을 성취하는 유일한 방법은 전쟁뿐이다. 전쟁 행위의 본질을 인간의 생명이 아닌 인간 노동력의 산물을 파괴하는 것이다.(pp221~222) …… 현대 전쟁의 기본 목적은 전반적인 생활수준을 향상시키지 않고 기계 제품을 완전히 소비시키는 것이다. (p219) 

오늘날의 전쟁은 순전히 국내적인 문제이다. … 전쟁은 각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국민들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며, 전쟁의 목적은 … 사회 구조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것이다. (p231)

소설 속, 오세아니아가 수행하고 있는 전쟁은 바로 위와 같은 목적에 의해 발발되고, 이어지고 있는 전쟁이며 심지어, 내부에서의 소통 뿐 아니라 외부 세계와의 연락이 두절된 상황9에서 그 전쟁은 실체가 없는, 말 뿐인 전쟁10이 아니라 할 수도 없게 됩니다. 즉, 국내적인 문제로서 필요한 '타국과의 전쟁'이, 그 목적인 국내적인 문제를 풀어감에 있어 효율적이라 한다면, 다시 말해, 타국과의 전쟁이 국내의 혼란을 방지하는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는 한, 그 전쟁은 --- "전쟁이 문자 그대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한 전쟁은 위험한 것이 아니며"(p229)를 성립시키게 되어 결국 "전쟁은 평화"(p231)란 당의 슬로건을 완성시켜 주게 되지요. 물론, 우리가 아는 일반적 의미로서의 '전쟁'과 '평화'는 아니지만, 그러니까 이건 오로지 당/권력에게만 의미를 지니는 '전쟁'과 '평화'인 것이며, 그리고 이 '아니지만'은 또한!



【 IGNORANCE IS STRENGTH 】

<좋은good>이 있다면 <나쁜bad>이라는 단어는 필요 없다. 왜냐하면 필요한 의미가 <안 좋은ungood>이라는 단어에 의해 똑같이 표현 - 실제로 더 잘 -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개의 단어가 원래부터 반대의 짝을 가지고 있는 경우 반드시 어느 한쪽이 없어지게 된다. (p353)

오세아니아의 지배 권력이 만들고 있는 '신어 Newpeak'는 이처럼,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어휘들을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구축이 되어 갑니다. 즉, 언어에 있어 선택의 여지를 줄여나아가는 것11이고 이는 필연적으로 --- "어휘의 선택을 최소한도로까지 줄임으로써"(p350), 설혹 권력의 사상에 반대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도 "그걸 표현할 말 자체가 없기 때문에 사상죄12가 글자 그대로 불가능"13(p64)해지는 상황을 가져오게 되지요. 이처럼, 사고의 표현 수단인 언어에의 제약 뿐 아니라,


​알고 있으면서 모른다는 것, 완전한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 교묘하게 날조된 거짓말을 말하는 것, 말살된 두 개의 의견을 동시에 가지고 모순이라는 걸 알면서 그 둘 다를 믿는 것, 논리를 사용해 논리에 대항하는 것, 도덕을 주장하면서 도덕을 거부하는 것,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고 믿으면서 당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믿는 것, 잊어버릴 필요가 있는 것은 죄다 잊어버리고 필요할 땐 언제든지 다시 기억 속으로 끌어들였다가 다시 재빨리 잊어버리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 자체에 똑같은 과정을 적용시키는 것.14 (p46)

'이중 사고 doublethink'라 불리우는, 이러한 의식의 개조15까지가 더해지게 되면 대중은 드디어 --- "당이 요구하면 검은 것을 흰 것이라고 기꺼이 말하는 충성심"(p245) 뿐 아니라, 아예 "전에 반대로 믿었던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능력"(p245)까지를 갖춘, 그야말로 "과거는 지워졌고 지워졌다는 사실도 잊혀 거짓이 진실이 되어 버"16(p89)리는 '완벽한 망각'17, 즉 ignorance(=lack of knowledge)의 상태로 전락된 피지배계급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하여, 'Ignorance is Strength'는 저에게, '민중의 무지가 바로 당이 쥐고 있는 권력의 원천이 된다'라는 의미로 이해되게 되며, 실제 민중의 이와 같은 무지(ignorance)는 곧,


혁명의 세계에서 성장한 젊은 세대는 당을 하늘처럼 불변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당의 권위에 도전할 생각을 꿈도 꾸지 못하고(p155) …… 군중은 절대 자발적으로 폭동을 일으키지 않으며 압제를 받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폭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실제로 그들은 비교 기준이 없는 한, 자신들이 압제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p239)

·

·

·


계속되는 전쟁으로 유지되는 평화(War is Peace)와, 압제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압제받고 있는 민중들(Ignorance is Strength)이 만들어내는 그 최종적 결말을, 작가 조지 오웰은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요?



【FREEDOM IS SLAVERY】

(원래는 그 반대가 되어야 하겠으나, 제 독서의 순서에 따르자면) 율리 체의 「어떤 소송」18속 '방법 The Method'을 떠올려 주는19, 여기에선 '빅 브러더'로 상징되는 권력은, 민중들의 삶을 완벽하게 감시20하고 있으며, 그러한 일상적 감시에의 순응/적응21은 끝내, 무조건적인 복종에서 기쁨을 느끼며, 원칙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에서도 또한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되는, 한 마디로 "아무런 의심 없이 열성적으로 충성하는"(p32) 노예와 다름없는22 백성을 만들어 냅니다. 이제 당/권력/빅 브러더는 드디어,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23 (p46)

현재를 지배하여 과거를 지배했고, 그럼으로 미래까지 지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지배는, 단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지배의 영속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Freedom is Slavery"가 의미하는 바,


그들은 당신에게 모든 것을 - <무엇이든> - 말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믿게 할 수는 없어요. 당신 마음속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어요. (p195)

​드디어, 대중의 마음까지를 포함하게 되는 것이죠. --- 말하게 할 수 있는 것 뿐 아니라, 믿게 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그를 증오합니다"(p329)라 말했었던 윈스턴으로부터 기어이,


그는 빅 브러더를 사랑했다. (p347)

​란, 이것을 거짓이라 생각할 수 없겠는, 그의 자발적 고백을 이끌어 내고 맙니다. 「어떤 소송」에서 일종의 선()으로 등장하는 "잘 기능하는 국가의 시민들은 공공복리와 개인 복리의 일치에 익숙했다"란 구절은, 빅 브러더의 권력 아래에선 "빅 브러더는 전지전능하고 당은 절대적이라는 신념"(p245)로 강화되어 보여지는 것이며 이로써,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p12)라는 당의 세 가지 슬로건은 반박불가(irrefutable)한 것으로 성립되게 되지요. 그리고 이 완성이 정말 무서운 이유는,


………………………………………………


​2분 증오에서 끔찍한 사실은 사람들이 할 수 없이 이것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이런 광란의 행위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p23)

"늙은 장사꾼 여자가 빅 브러더를 그려 놓은 포스터에 소시지를 싸들고 가는 걸 보고"(p76) 그녀를 신고하는 아이들이 이 작품에 등장하거늘, 이것이 단순한 소설 속 설정이 아니라, 최고존엄의 사진이 실려 있는 신문지로 신발을 감았다고 사람을 죽게까지 만든 현실로 보여지고 있다라는 것, 그리고 그 현실의 정권이 "과두 정치의 본질은 부자 세습이 아니라 죽은 사람에 의해 살아 있는 사람에게 부과된 세계관과 가치관을 고수하는 것"(p242)이란 작가 조지 오웰의 진단을 너무도 똑같이 따르고 있다라는 것이, 심지어 우리 시대의 로또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기능 역시 이미 빅 브러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존재하고 있었다라는 것24 등의 현실 등이 섬뜩하며, 이러한 섬뜩함을 다른 작가들 역시 이미 느꼈었던듯,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 등장하는 일본 무신정권의 가톨릭에 대한 핍박 역시 이 작품 「1984년」에 이미 등장하고 있었으며25, 주제 사라마구가 「예수복음」에서 보여주었던, 하나님이 악(evil)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 역시, 가상으로라도 자신에게 저항하는 세력을 존재하게 해야하는 권력의 필요로 이미 이 작품 속에 등장하고 있었다26라는, 그러하기에,


이것이 일종의 과잉반응일 수도 있겠으나, 이 작품 속 다른 상상들이 언젠가, 그러니까 나의 세대에서가 아니더라도 혹 다음 또는 다다음 세대에서 현실이 되어질 지도 모른다라는 상상은 분명, --- 그 '개연(蓋然)의 극대화'로서의 디스토피아를 어쩔 수 없이 그려보게만 해줍니다. "Freedom is Slavery"27가 설마, 그 유일한 해결책이 아닐까,하는 지극히도 우울한 염려도, 쉽게 지워지지는 않고 말이죠. 어쨌든, 


이 작품이 대체 왜, 그토록 많이 인용되었었는지,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과 관련해서도 회자되었던 이유 역시 (그 땐 몰랐었거늘), 이 작품을 다 읽고나니, 너무도 뚜렷이 이해가 되네요. 그나마, 지금 당장의 대한민국엔 "War is Peace, Ignorance is Strength, Freedom is Slavery"라 생각하지 않는/을 것 같은 대통령이 있다라는 점만이, 위안 되어줄 뿐.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컨디션이 최악인 며칠 간이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감상문을 쓰기도 싫었고, 써지지도 않았는데다가,

쓰고나서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작가 조지 오웰의 삶 :조지 오웰, 시대의 작가로 산다는 것

 읽어본, 조지 오웰의 작품들 : 「카탈로니아 찬가」, 「동물농장

이 작품 속 상황들을  떠올려주는 작품들 :어떤 소송」, 「침묵

※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지금 이 블로그에 와있는 당신에게마저 여하한 구실로라도 '나를 아는' 이란 형용사를 붙여 --- 꼭 한번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은 책들의 제목 앞에 ★표시를 붙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시이겠지만 가끔은, 타인의 주관을 한번쯤 믿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