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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자음과모음 / 2019년 6월
평점 :
#1. 매혈?
'자신의 피는 돈을 받고 판다'라는 의미의 '매혈'에 관한 소설입니다.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와 동일한 소재이지요. 위화의 작품을 읽었을 땐, 당시 처음 접했던 문화대혁명의 실상이 놀라워, '매혈'이라는 행위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못했었습니다만, 오직 '매혈'만을 다룬 옌렌커의 이 작품을 읽으면서는 대체 '당시'의 '중국 사람들'은 '왜' 피까지 팔아야 했던 걸까란 의문이 생기더군요.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만, 작가의 고향인 허난성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을 보아 1970년 중후반 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 의도적이지는 않습니다만, 외국에서 일어났던 과거의 사건에 관해 읽을 때면, '당시 우리나라는 어떤 시대였지?'란 의문을 종종 가져보게 됩니다. '1970년대 중후반'의 시기라면 중국과 한국의 현실 간에 엄청난 큰 차이가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기에, 혹시? 하는 생각에 검색을 해봤더만,

'매혈인파'(1975년 서울대 병원 앞, 전민기 作) - 노컷뉴스, 2015.02.05, "매혈세대와 꽃노년" 중.
'매혈'이라는 단어와 행위에 대해, 1969년생인 제가 놀랐다라는 자체가 차라리 놀랄 일이라 여겨질만큼, 그 즈음의 우리나라에서도 엄연히 존재했었던 현실이라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1975년 속 사진의 저 분들은 아마도 지금쯤이면 대략 70대 중반에서 80대 초반이 되셨겠죠. 우리가 실제로 만나뵐 수 있는 분들의 역사인겁니다. 다시 한 번, 곰브리치의 경탄을 그저 경탄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또 한 번의 경험을 해봅니다.
위 전민기 작가의 사진에 대해, 어느 기사는 '학비와 생계비 마련'이 당시 매혈의 주된 이유였었다라 적고 있습니다. 이 작품 「딩씨마을의 꿈」속 딩씨 마을 주민들에게도 매혈의 연유는 역시 돈일 수 밖엔, '매혈'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이미 보이듯 돈 이외의 것은 이유가 될 수 없었죠.
가난뱅이로 살 건지 부자로 살 건지는 여러분 스스로 결정할 일입니다. … 여러분의 딩씨 마을은 현 전체에서 가장 가난한 마을입니다. 정말 형편없이 가난하지요. 부자가 될 건지 계속 가난뱅이로 남을 건지 집에 돌아가 잘 생각해보세요. 다른 현들은 일찌감치 미친 듯이 피를 팔아서 마을에 한 채 한 채 건물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딩씨 마을은 해방된 지 수십 년이 지났고, 공산당이 지도한 지 수십 년이 지났으며, 사회주의가 실행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마을 여기저기에는 초가집이 이어져 있을 뿐이지요.(pp61~62)
#2. 상징과 주체의 조작
위 인용구는, 매혈에 미적지근한 딩씨마을 사람들을 앞에 놓고 상급기관인 현 교육당국의 관리가 매혈의 독려를 위해 한 연설입니다. --- 당시 중국 정부가 주창했던 '혈장경제(Plasma economy)'란 "국가와 성(省) 보건당국이 주민들의 피(혈장)을 헐값에 사들여 혈액제제 제약회사에 비싸게 팔아 넘기는 매혈 경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뭐, 집에 있던 솥까지 거둬 철강을 만들어내려 했던 중국 정부이니 뭔들 못했겠습니까. 암튼! 위의 인용구에서 나타난 ①상징의 조작과 ②주체의 조작은, 이 소설에 담겨진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두 가지 요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 상징의 조작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이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 류동민,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중 p109, 위즈덤하우스, 2012. (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 중 재인용)
현의 관리는 '초가집'이라는 단어를 '가난함'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스팔트 도로가 깔리고 2층 양옥이 들어서있는 다른 마을과 비교하자면 딩씨 마을의 비포장도로와 초가집이 '가난함'의 상징으로 차용된 것을 억지라고는 볼 수 없기도 합니다. 하지만! --- 물신(idol)의 한 폐해로 류동민 교수가 지적했던 악습인 "정조를 지키기 위해 자결하는 것, 죽은 남편에 대한 성실의무를 다하기 위해 본능을 억압하고 수절하는 것"이 내포하고 있는 '수단과 목적의 전이'를 상기해본다면 우리는, '초가집'이라는 단어가 의식의 전환을 위한 일 도구로 의도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천년만년 노천에서 쭈그리고 앉아 일을 보던 재래식 화장실도 좌변기가 설치된 실내 화장실로 바꿨지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좌변기에 아무리 오래 앉아 있어도 똥이 나오지 않자 다시 건물 밖에 있는 노천에 쭈그리고 앉아 변을 볼 수 있는 구덩이를 팠다. 건물의 화장실에는 세탁기도 한 대 있었지만 어머니는 대야를 마당에 내놓고 손으로 빨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좌변기는 장식물이 되어버렸다. 세탁기 역시 장식물이 되어버렸다. 냉장고도 있었지만 냉장고 역시 장식물이 되어버렸다. 식당과 식탁도 모두 장식물이 되어버렸다.(pp42~43)
예의, 인간에게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등장할 수도 있겠죠. 허나, 재래식 화장실에서 좌변기로의 변화가, 대야에서 세탁기로의 변화가, 그 모든 변화들을 설령 '진보'라는 단어로 감당케 한다하여도, 그 '진보'가 당사자들의 자연스런 필요로부터 기인된 것이 아니라면 그 변화는 결코 진보가 될 수 없는 겁니다. 그 변화들은 엄연히,
우리 현에 속한 각 국과 위원회에서 농민들에게 매혈 운동을 조직하라는 지시를 내렸소. 교육국에서는 나에게 쉰 개 마을을 배당했지 뭐요. 그래서 이번에 딩씨 마을에 내려와 매혈 운동을 조직하려 했는데 몇 마디 하기도 전에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구려.(pp56~57)
'초가집'이라는 현실은 '가난함'의 상징으로 조작해야만 본인에게 주어진 명령을 이행해낼 수 있는 관리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뒤에 적게 될, '무지한 민중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부패' 역시, 이같은 오도된 진보로부터 시작되기도 하지요.
반면, 이러한 '상징의 조작'에 상응하는, 다시 말해 실제 당사자들의 자연스런 필요로부터 기인된 조작의 예를 이 작품 속에서는 뭔가 가슴 아릿한 version으로 발견하게도 됩니다.
밍왕 마을은 도처에 관이 넘쳐나게 되었다. 마을이 온통 관 마을이 되었다. 그렇게 싼값에 관을 구입하게 된 사람들은 정부가 관을 지원해줬다는 생각에 자신이 열병에 걸린 것도 잊고, 집 안에 곧 죽음을 맞이할 사람이 누워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미소를 띤 얼굴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가볍고 즐거운 농담을 주고받았다. 너무 기쁜 나머지 얼굴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p329) …… 구허 마을에서는 열병에 걸린 사람이건 걸리지 않은 사람이건 관을 얻기만 하면 죽어도 아무 걱정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두 해 동안 거의 흔적을 감췄던 웃음이 다시금 마을로 돌아왔다.(p332)
임박한 죽음을 의미하는 '관'이, 이제는 하나의 물신(idol)이 되어 그 자체로, 죽음의 임박함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죠. 이제 더 이상 '죽음'이라는 것 자체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게 된 겁니다.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놓았느냐에만 초점이 모아진 것이죠. 이렇게,
"물신(物神)은 일단 만들어지고 나면, 거꾸로 자신을 빚어 만든 사람들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 류동민, 위의 책 p66.
'매혈'이라는 것은 그 자체 뿐만이 아니라, 매혈의 당사자들을 죽음으로 이끌 수 있다는 점을 관료들이 알고있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관료들은 민중들에게 죽음마저 잊게 만들 수 있는 물신을, 이러한 상징의 조작을 통해 안겨준 겁니다. 이는 온전히 자신들 통치의 편의/유지를 위해서였겠죠.
(2) 주체의 조작
"가난뱅이로 살 건지 부자로 살 건지는 여러분 스스로 결정할 일입니다. … 부자가 될 건지 계속 가난뱅이로 남을 건지 집에 돌아가 잘 생각해보세요." …… 국장은 말을 마치고 가버렸다. 우리 할아버지도 가버렸다. 딩씨 마을 사람들도 모두 흘어져 가버렸다. 집으로 돌아갔다. 가난하게 할 것인지 부자로 살 것인지는 그들이 결정할 문제였다.(pp61~62)
'상징의 조작'에 이은, 어찌보면 자연스런 과정입니다. 매혈을 할 것인가의 결정은 딩씨 마을 주민들이 한 것이며, 그러하기에 당연히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주민들에게 귀속된다라는 것이죠. 뭐,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기에 이에 관해선 별달리 쓸 말도 없습니다. 허나 ---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르겠다는 다음의 내용에 대해선 우리 스스로도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큰 특혜가 작은 특혜의 먹이 사슬로 이어지고, 독재자와 결탁해 얻은 이익이 또 새끼 이익을 가져와 자유인의 신분을 기꺼이 선호하는 사람 수 만큼이나 독재 권력의 배를 불려주는 사람 수도 늘어나게 된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중 p111, 생각정원, 2015.
이 작품 속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인 딩후이는 사설 채혈소를 시작으로 돈맛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피를 파는 것보다 남의 피를 (눈속임을 동원해) 뽑아 되파는 것이 훨씬 돈이 된다는 것을 남들보다 먼저 알아챘던 것이죠. 이후 매혈의 후유증인 AIDS로 인해 사람들이 죽어가자 그는 불법적인 관 매매를 통해 더 많은 돈을 벌게 됩니다.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들 중 결혼을 못한 남녀가 많음을 안 딩후이는 일종의 영혼결혼식인 음혼 중개를 통해 또 돈을 벌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자본으로 마지막엔 묘지 사업까지를 계획합니다. (이 과정은 대한민국 재벌들이 자신의 사업 영역을 확장해왔던 역사와 너무도 흡사하죠.)
이 과정의 초기, 즉 매혈의 부작용으로 열병을 앓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마을 주민들은 매혈의 주동자였던 딩후이를 원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자신들의 필요 즉, 관이 필요하고, 결혼하지 못한 자식들의 음혼이 필요했다라는 점은, 이 모두를 해결(?)해 준 딩후이에게 외려 고마움과 경외의 감정까지를 갖게 되죠.
일은 이렇게 해결되었다. 딩씨 마을 사람들은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에게 미안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 딩씨 집안에게 미안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든지 의심을 품지 않게 되었다.(p249)
이같은 의식의 변화는, 딩후이가 과거 자신의 죄를 교묘하게 씻어내고 오히려 마을 사람들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기까지 된 현상,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마치 "모든 동물은 알몸으로 다녀야 한다. … 복서가 이 말을 듣고는 여름날 귀에 엉겨붙는 파리떼를 막느라 그가 사용하던 조그만 짚모자를 갖고 와 쓰레기불에 처넣었다"로 상징되는, 세뇌에 의한 사상의 주입이 일 개인과 일 국가, 그 이상의 사회를 어떻게 타락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례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와 타인들의 과거 역사 속에서 볼 수 있듯, 이같은 상징과 주체의 조작을 한 주인공(인 권력층)은 민중들이 자신에게 허여한 권력을 이용해 그러한 조작의 책임으로부터도 또한 피해나가죠.
잊지 마세요. 아버지. 앞으로 누가 매혈에 관해 물어보더라도 전부 제 동생 딩량이 한 일이라고 해야 돼요.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딩량의 무덤을 열어 물어보라고 하세요.(p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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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들이 우유와 사과를 가져가는 것은 건강 유지를 위해서입니다. 우유와 사과에는 돼지 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질들이 포함되어 있어요. … 우리 돼지들은 머리 쓰는 노동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이 농장의 경영과 조직은 전적으로 우리 돼지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밤낮으로 여러분의 복지를 보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돼지들이 우유를 마시고 사과를 먹어야 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 조지 오웰, 「동물농장」중 pp35~36, 민음사, 2006.
이같은 세뇌가 국가의 본질인 것인지, 혹은 특정 사상의 본질인 것인지에 대한 확신을 저는 갖고 있지 못합니다. 다만,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 '우리의 건강'을 유지해야 하겠다라는 논리는 <화장실에 문이 달려 있으니 사람들이 꾸물대고 잘 나오지 않더라. →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이 화장실 문을 발로 차는 바람에 파손된 문이 너무 많아졌다. → 그래서 모든 화장실에 문을 없애버렸다.>라는 식의 전개와 하등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 우리의 건강이 유지되어야 한다'라는 논리가 사회 구성원 모두의 동의를 얻으려면, '우리의 건강이 유지되는 것은 언제가 여러분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라는 역(reverse) 또한 항상 성립되어야 하거늘 --- 돼지들의 건강이 유지되었음에도 농장에 속해 있는 모든 동물들의 복지가 나아지지 않았던 것 (즉, 무지하도록 세뇌된 민중들의 희생 위에서 시작된 부패!)과 마찬가지로, 딩후이의 사업이 잘된다 하여 딩씨 마을 사람들의 형편이 좋아진 것은 결코 아니었었죠. 그렇다면 과연, 딩후이 스스로는 관리들로부터 허여받은 권한을 사용해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요?
"독재자에게 접근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 스스로 자유로부터 멀어지는 행위가 아니던가. 다시 말하자면 제 양손으로 기꺼이 노예의 자리를 끌어안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p115) …… 그들은 자신의 영혼을 헌상한 대가로 의식주에는 궁핍함이 없지만 자유가 전혀 없는 삶을 살고 있으며(p116) …… 그들은 재화를 차지하고자 애쓰지만 바로 자신들이 독재자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을 수 있는 권력을 줬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못한다.(p118)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위의 책 중.
에티엔 드 라 보에시는 딩후이 스스로도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 주장했었죠. --- 일견, 자신의 집에 있는 현금의 총액이 얼마인지조차 모른다 말하는 딩후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 주어진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자유가 전혀 없는 삶'이 의미하는 바는 예의 딩후이도 이겨낼 수 없는, 어찌보면 권력의 속성 같은 것인, 속박이었습니다. 열네 살에 독살당한 자신의 아들의 음혼 상대로, 아들보다 너댓 살 많은 나이에 죽었던, 현장의 딸을 고를 수 밖에 없었었죠. 그 상대는 절름발이에 간질까지 있었던, (요즘 세상의 PC로 따지자면 큰일 날 표현이겠지만) 만약 살아있었다면 '정상적인' 혼인을 할 수 없는 여성이었었거늘, 딩후이는 기꺼이 그 결혼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의 사돈이 될 사람이 현장이라는 점이 딩후이의 사업에 도움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으나, 반대로 생각하자면 그 결혼을 반대할 권한이 딩후이에게는 주어지지 않았기도 했던 것이죠. 여기서!
마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아직도 그렇게 많은 열병 환자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상부가 마을 사람들에게 뭔가 말을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상부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으며, 와서 살펴보지도 않고 관여하지도 않을 수 있단 말인가.(p211)
지극히 당연한 민중의 요구와, 지극히 당연한 국가의 의무는 모두 무시되었다라는 점 --- 바로 이 부분이 어쩌면, 작가 옌렌커가 이 작품을 통해 쓰고자 한 주제들 중 "탐욕의 강대함"(p7)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단일국의 지도원리는 '자유와 행복은 양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은 '행복'했지만 어리석게도 '자유'를 요구했다가 황야로 쫓겨나지 않았던가. 이제 단일국은 인간의 자유를 제거함으로써 행복을 되찾아준 것이다."
- 조지 오웰, 위의 책 p127.
다른 시대, 다른 환경에서 각기 다른 작가에 의해 쓰여진 소설들 속에, '인간 사회'라는 큰 틀에 대한 지적들이 이토록 정확하게 일맥상통하고 있다라는 사실은 <각주 3>에 나타나있는 곰브리치의 경탄을, 다음의 인용문과 결부시켜 또 달리 해석해볼 수도 있지 않겠나라는 여지를 제게 선사해주기도 합니다.
할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힐끗 쳐다보면서 꿈에서 본 광경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할아버지는 장탄식을 내뱉었다. (pp596~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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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껀주가 말했다. … "아저씨, 저는 딩후이가 죽기만을 바라고 있어요. 최근에도 줄곧 딩후이를 죽게 할 방법만 생각했지요. 꿈을 꿔도 딩후이가 제 눈앞에서 죽는 꿈을 꾸지요."(pp533~534) … 가서 딩후이에게 한 마디만 해주세요. 제발 딩씨 마을로 돌아오지 말라고요. 돌아오기만 하면 저와 딩씨 마을 사람들이 그를 때려 죽일거라고요.(p537)
……
쟈껀주의 집 대문을 밀어젖히자 뜰 안에 검을 관리 하나 놓여 있었다. 이를 본 할아버지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쟈껀주의 관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개두하면서 말했다. "조카, 내가 자네에게 좋은 소식을 알려주지. 자네 형 딩후이가 나한테 맞아 죽었다네. 이제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됐어. 내가 그 녀석 뒤통수를 몽둥이로 내리쳐서 죽게 했네."(p607)
민중 간의 다툼과 그로부터 기인된 비극적 결말을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발 딩씨 마을로 돌아오지 말라"라는 쟈껀주의 호소는 중국 공산당을 향한 중국 민중의 바람(願)을, 자신의 큰 아들을 직접 죽인 후 "나한테 맞아 죽었다네"라 말하는 할아버지의 절규는 <각주 15>에 있는 작가의 주제 중 "오늘과 내일에 대한 기대와 인성의 가장 후미진 구석에 자리한 욕망의 그 꺼지지 않고 반짝이는 빛"을 그야말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저에게는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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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들의 행복은 타인의 불행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경들께서는 모든 것을 소유하셨지만, 그 모든 것들은 다른 사람들의 가난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경들이시여, 저는 절망한 변호사이며, 패소한 사건을 변호합니다. 이 소송을 신께서 다시 승소로 바꾸실 것입니다. … 신께서 저를 배고픈 사람들과 뒤섞어 놓으신 것은, 배부른 사람들 가운데에서 제가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 모든 사람들 사이에는 우열이 없습니다. … 억압하는 사람과 억압당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그들이 처한 장소가 다르다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경들의 발이 사람들의 머리를 밟지만, 그것은 경들의 잘못은 아닙니다. 사회라는 바벨탑의 잘못입니다. 모든 것이 위에서 짓누르도록 되어 있으니, 실패한 건축물입니다. 한 층이 다른 층을 버티기 힘들 정도로 짓누릅니다. …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신다면, 경들 중 어느 누구도 행복해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 경들이시여, 여러분께서 결정하신 세금을 누가 감당하는지 아십니까? 죽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 경들께서는 부자들의 부를 키워 주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을 키워 주고 계십니다. 경들이 해야 할 일은 그 반대입니다. … 낮은 곳이 죽으면 높은 곳이 죽기 마련입니다."
- 빅토르 위고, 「웃는 남자」중 pp966~976, 더스토리, 2020.
마르크스가 지적했던 핵심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가 실패한 건축물'이라는 점이었다고, 제 얕은 지식으로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 스스로도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 부른다"라 정의(define)했었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2022년의 우리가 (이에 만족하는지의 여부를 차치하고)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를 향유하고 있다는 건 분명 마르크스가 주창했던 공산주의의 결과/덕분이라 봐야한다라는 지점에까지 이르르게도 되죠.
위의 인용문에서, 주인공 그윈플렌이 (본인의 원래 신분인 클렌찰리 경의 자격으로) 상원의 귀족들을 상대로 행한 연설문 속 "그 반대"는 좁은 의미에서의 '국가의 책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현실의 공산주의가 실패로 끝났다라는 평가를 받게 된 이유는 아마도,
"공산주의는 단지 사적 소유(사유 재산)를 철폐하고 국가계획을 도입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본질이 온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지는 상태, 인간과 인간의 충돌이 진정으로 해결되는 상태여야 하는 것입니다."
- 류동민, 위의 책 p265.
그 궁극적 목표를 구현해내지 못한 채 결과적으로 (사적 소유의 철폐와 그를 통한) 지배 계층의 축적만을 낳았기 때문이겠죠. --- 이 작품의 제목인 '딩씨 마을의 꿈'에서 '꿈'이 과연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딩씨 마을 주민들의 바람(願)이 결국엔 비극으로 끝이 나버린 것에 대한 은유적 표현일 수도, 혹은 자신의 꿈이 모두 현실로 나타나버린 할아버지(딩수이양)의 그 '꿈'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어쩌면
할아버지가 자신의 큰 아들 딩후이를 직접 때려 죽인 후, 다시 마을로 돌아와 꾼 그의 마지막 꿈 속처럼 "새롭게 펄쩍펄쩍 뛰는 세상"(p618)에 대한 희망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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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복종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질서는 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나키스트는 모든 권위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을 거부한다. 아나키스트는 스스로 동의한 권위라면 전체의 결정이라도 자신이 결정한 것처럼 따르려 한다."
- 하승우, 「아나키즘」중 p12, 책세상, 2008.
(한때, 지금까지도 아마, 그 매력에서 제가 벗어나고 있지 못한) '아나키즘'의 위 정의(definition)에 충실한 것으로 이해되는 두 사람(이자 한 커플)인 딩량과 링링이 이 작품에 등장합니다. 결국엔 아름답고 비극적인 모습으로 끝맺음되는 두 사람의 (불륜인) 사랑이 시작되는 그 시점에서 보여진,
방은 아주 따뜻했다. 방으로 들어서자 두 사람은 곧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따뜻해진 두 사람은 삶의 의미를 움켜쥐기 시작했다.(p147)
그 '삶의 의미'.
뭔가 이 시점의 저에게 꼭 필요하지 않나 싶네요. 제가 들어서 있는 이 방도 결국엔 따뜻해질겁니다. 그렇게 만들어야겠죠.
※ 읽어 본, 작가 옌렌커의 작품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 '매혈'을 주제로 한 다른 소설 : 「허삼관 매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