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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평점 :
#1.
가즈오 이시구로 --- 1989년 맨부커상 수상자이자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입니다. 이 작가의 이름을 소리내어 읽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참치집 실장님'의 이미지 (상호는 '가즈아~ 혼마구로')를 떠올리게 됩니다만, 제가 읽어 본 이 작가의 두 작품들은, 제가 가봤던 참치집의 실장님들과는 달리 그리 친절하지 않았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간되자마자 구매을 했고, 구매하자마자 이 작품을 읽었다라는 건 그만큼 제가, 이 작가의 작품들에, 뭐라 콕 찝어 적어내지 못하겠으나 차마 버려내지 못하겠는, 그런 강한 매력을 느꼈었기 때문입니다. 흡사 --- 막상 그 자리에선 더 이상 느끼해서 못먹겠어,라 했었지만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부터 벌써 좀 더 먹을껄~하는 후회를 하게되는, 그래서 다음 번에 갔을 땐 그 시작부터 '오늘은 정말 맛있게, 많이 먹을꺼야!'라 다짐하곤하는 참치집('가즈아~ 혼마구로')에서의 저녁 시간과 같다고나 할까요?
#2.
이 소설 「클라라와 태양」은 제가 읽어 본 작가의 전작들인 「남아있는 나날」과 「나를 보내지 마」에서 이야기되었던 주제들이 한데 어울어져 있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이게 작가의 의도인지 혹은 저만의 생각 (또는 착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이 작품에 대한 저의 이해와 감상문은 그리하여 --- 자연스레 전작들의 연결선상에서 쓰여져 있습니다. 일단,
세 작품 속 화자(speaker)의 지위가 모두 동일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남아있는 나날」에서의 화자는 주인에게 봉사하는 집사(butler)였으며, 「나를 보내지 마」에서는 인간 복제품들이 화자로 등장했었죠. 이 작품 「클라라와 태양」역시 AF(Artificial Friend)라 불리우는 인간형 로봇을 화자로 택하고 있습니다. 이 세 화자들의 공통점이란 게, 하인(servant)이나 로봇이라는 그들의 '신분/형태'가 아니라 --- 독립변수로서 존재하는 주체일 수 없는, 종속변수로서만 존재하여야하는, 종속변수이기에 존재 의미가 있는 정체성(identity)에 방점이 찍혀 있다라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공통된 정체성은 결국, 세 작품의 주제까지도, 약간의 변주(variation)는 있겠으나 크게 보아, 하나로 연결시켜주고 있다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자세한 스토리를 적지는 않았습니다만, 이하의 글은 소설을 읽지 않은 분들이 보시기엔 적절하지 않다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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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단, 이 작품의 표층적 주제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지성이면 감천'이라 적겠습니다.
지금 무척 지쳐 있을 텐데 방해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여름에 제가 온 적이 있고 그때 인자하게도 몇 분 시간을 내어주신 거 기억하시죠. 같은 중대한 문제를 다시 논의하기 위해 오늘 감히 찾아왔습니다. … 제가 여기에 이렇게 올 자격이 없다는 거 압니다. 해가 저한테 화가 났으리라는 것도 압니다. … 하지만 해가 그날 야적장에서 우리를 보고 있었으니 제가 열심히 노력했고 희생을 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 겁니다. 제 능력을 감소시킬 수 있는 일이었지만 오직 기쁘게 그렇게 했습니다. … 지금 조시가 하루하루 점점 약해지고 있어요. 제가 오늘 여기 이렇게 온 까닭은 해가 얼마나 인자한지 기억하기 때문이에요. 해가 거지 아저씨와 개에게 그랬던 것처럼 큰 연민을 보여주시기만 한다면요. 조시에게 너무나 간절히 필요한 특별한 자양분을 보내 주시기만 한다면요.(pp394~396)
아직 읽지 않으신 분에게는 뭔 뚱딴지 같은 글로 읽혀질 수도 있겠으나, 소설을 읽어 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이 부분은 매우 슬픈 맥락 하에서 읽혀지게 됩니다. 왜 이 부분이 슬프게 읽혀졌을까,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 나서 생각해보니 --- 사뭇 환타지 소설스런 내용의 작품입니다만, 제가 그런 류의 소설에 전혀 흥미가 없기도 합니다만, (적어도 2021년 현재의)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AF가 존재한다'라는 상황 하에서, 그렇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인공물인 AF의 바람(願)이 부디 짜잔~ 하고 이루어지기를 독자들도 바라게 되는, 이건 어쩌면 지금의 현실에서 제가 (혹은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라는 CCM의 가사처럼, 그리고 그 결과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스런 상황이 생겨나주기를 바라고 있는 마음을 작가가 만들어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커피잔 아주머니가 RPO 빌딩 쪽에 다다르자 두 사람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해도 그 모습을 보고는 두 사람 위에 자양분을 한껏 쏟아부었다.(p39)
「남아 있는 나날」의 화자 스티븐스는 자신이 설정해 놓았던 '훌륭한 집사'의 기준에는 완벽하게 들어맞는, 소위 말하는 "'목적 합리성'이 독립되어 따로 노는 것을 피하고 철저하게 '가치 합리성'의 차원에 복무하도록 묶어"져 있는 삶을 살았었으나, 결과적으로 보아 그의 헌신이 그의 주인과 그가 원했던 결과를 낳지는 못했었지요. 물론, 스티븐스의 바람(願)이 그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차원에서의 정치(political)적 이해관계로 인해 좌절되었다 할 수도 있겠으나, 이 소설 「클라라와 태양」에서 보여지는 클라라의 바람 역시, 그녀가 제어할 수 없는 차원임은 동일함에도 --- 특정 장면에 대한 클라라의 시선 (결국엔 오해)이 그녀에게 그 상황을 무언가 확실한 증표처럼 인식하게 해주었고, 그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사실은 허황된) 바람(願)이 꼭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믿고 있는 클라라, 그리고 그녀의 바람이 (역시나)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라 생각하게 되는 독자들에게 작가는 '조시를 위한 클라라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4.
「나를 보내지 마」의 화자인 캐시는, 인간의 생명 연장을 위해 복제된, 자신의 원본이 신체적 문제를 지녔을 때 해당 기관(organ)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인간 복제품이었습니다. 이 소설 「클라라와 태양」의 화자인 클라라는, 그 역할이 정확하게 적시되고 있지 않으나 아마도 AF라는 이름처럼, 아이들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친구 (혹은 심부름꾼 또는 보모)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인간형 로봇'으로 소개됩니다. 허나, 소설의 <4부>에 들어서면, 클라라에게 기대되었던 또 다른 역할이 있었음이 밝혀지지요. 이렇게 드러난, 인간 복제품인 캐시와 AF 클라라가 지니게 되는 (인간이 평가하는) 가치는 그들 자신의 기능이라든가 역할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닌, 클라라와 캐시를 대하는 소설 속 '인간들'의 생각/목적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조시는 모조품이 아니예요. 진짜 조시가 될 거예요. 조시가 계속 이어지는 거라고요"(p304)
독립변수로서 존재하는 주체일 수 없는, 종속변수로서만 존재하여야하는, 종속변수이기에 존재 의미가 있다는 정체성(identity)은 둘 간의 공통점, 그러나 --- 단순히 장기(organ)만을 빼오는 것이 아닌,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복사본 자체로 원본을 대체'하려한다라는 점이 클라라와 캐시가 부여받게 된 결정적 차이이지요. 제가 꼽은, 이 소설의 핵심이자 글로 쓰여진 표층의 내부에 존재하는 의미는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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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다는 건 어떤 것입니까."
- 구병모, 「한 스푼의 시간」중 p216, 예담, 2016.
말 그대로 저의 감정을 한 순간에 무너지게 만들어주었던 문장이었었습니다. 당시 저의 감정과 동일하지 않은 감정을 받았던 독자들도 분명 있을진데, 대체 '너'는 왜 이 부분에서 감정의 무너짐을 느꼈었느냐라 누군가 묻는다면, 역시나 딱히 만들어 낼 답변이 없기도 합니다만, --- 작가 구병모는 이러한 저의 궁색함을 미리 알고라도 있었던 듯, "무너진다는 건 결국 그 현상을 대하는 사람의 슬픔이나 분노에 좌우되는 게 아닌가"라 저를 위로해주었죠.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변신」은 '뇌 이식' 이전과 이후의 정체성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작가 구병모는 위의 작품 「한 스푼의 시간」에서 더 나아가, 인간형 로봇이 과연 실제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독자에게 묻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 「클라라와 태양」에서도, AF인 클라라에게 부여된 애초의 임무(?)는 불치의 병으로 곧 죽을 것이라 예상되는 소녀 조시를 대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완벽한 대체를 위해,
너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걸 믿니? 신체 기관을 말하는 건 아냐. 시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야. 인간의 마음. 그런 게 존재한다고 생각해? 사람을 특별하고 개별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 만약에 정말 그런 게 있다면 말이야. 그렇다면 조시를 제대로 배우려면 조시의 습관이나 특징만 안다고 되는 게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걸 알아야 하지 않겠어? 조심의 마음을 배워야 하지 않아? …… 조시의 마음을 배워야, 그걸 완전히 알아야 하지, 아니면 너는 절대로 조시가 될 수 없어. (pp320~321)
대체 로봇 제작자는 클라라에게 조시가 아직 살아 있는 지금, 그녀의 모든 것을 관찰하는 것을 통해 '조시의 마음'을 배우라 클라라에게 조언(을 가장한 강요)을 하고 있죠. 인간의 이런 조언에 대해 AF 클라라는, 다시 말해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과연 어떠한 답변을 내놓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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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에서 작가는 (뇌이식 수술 집도의를 통해) 뇌이식이 '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불러 일으킨다라는 견해를 보였습니다. 그 작품을 읽었을 당시만해도, - 그렇다고 지금 그 작품을 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 그 질문, 인간의 장기를 복제품 혹은 동물의 그것으로 치환한다면 인간이 여전히 '인간성'을 지닌 인간으로 정의되어야 하는가/될 수 있겠는가란 질문이 정말로 머지 않은 장래에 문제가 될 수 있다라 생각했었었거늘, --- 구병모가 소설 속에서 창조해 낸 로봇 은결이 물었던, 보다 근본적인 질문, "보편적인 삶은, 아니 그냥 삶은, 어떤 것입니까"란 질문에 대해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다음과 같이 답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머니, 릭, 가정부 멜라니아, 아버지. 그 사람들이 가슴 속에서 조시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는 다가갈 수 없었을 거예요. 지금은 그걸 확실하게 알아요. …… 카팔디 씨는 조시 안에 제가 계속 이어갈 수 없는 특별한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 하지만 저는 카팔디 씨가 잘못된 곳을 찾았다고 생각해요.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분명히 있지만 조시 안에 있는 게 아니었어요.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있었어요.(pp441~442)
인간의 장기로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해 낼 수 있을 것인가란 의문이, 과학이나 철학의 영역에선 논쟁거리가 될 수 있을지언정, 그냥 일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우리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음을, 우리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나와 당신간의 관계로 인해 나와 당신이 존재할 수 있다라는 점, 결국,
"인간은 DNA의 산물이 아닙니다. 인간은 기억의 총합입니다."
- 박주영, 「고요한 밤의 눈」중 p36, 다산책방, 2016.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나 혼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닌, --- 서로에 대한 기억이 축적되어 '나'를 만들고 '우리'를 만들어간다라는, 하여 무미 건조한 여덟 글자인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라는 사실을,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렇게 풀어내준 것으로, 이 작품을 이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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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간,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이란 한정구를 지녔던 일들이 실제 우리의 현실에서 이루어질겁니다. 종원군이, 성치 않은 자신의 장기들을 복제인간 혹은 동물의 그것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에 대한 의문보다는 긍정이 더 크며, 그의 자녀들인 제 손주들은 인간인 친구 이외에도 AF라는 '만들어진 제품'의 친구를 '구매'하는 세상을 살아갈 가능성 또한, 그렇지 않을 것이다보다는 더 높다에 손을 들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인간이게 하는 그 무엇, 인간이 만들어 낸 기술이 도저히 학습해낼 수 없는 그 무엇은 그같은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 믿습니다. 이 믿음이 어쩌면 '그 무엇이 그 시대에도 존재한다면 좋겠다'란 저의 바람(願), 그러니까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란 일말의 의구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으나,
"할머니의 협박과 간곡한 부탁으로 할아버지는 10년 전에 담배를 끊었다. 다만 불붙인 담배를 손에 들고 그것이 타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10년 내내 그랬다. 나는 입과 손의 그 거리만큼이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이라 생각했다."
- 정승락 외, 「당신이 죽어야 하는 일곱 가지 이유」중 p256, 월간토마토, 2017.
또 다른 미래의 이야기를 그려냈던 작가가 적어 준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이란 게, 지금 저의 믿음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 대신 말해주고 있는 듯 합니다. 인간의 '제작/창조'로 만들어 진 피조물이 과연, 담배를 피지 않고 들고만 있는 그 '입과 손의 거리'에 대해 물리의 영역이 아닌 감정적 영역에서의 측량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저는 지극히 부정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 저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제대로 된 관찰자"인 작가들의 상상으로 그려진,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모습은, 그것이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 실현될 수 없을 것이라는 / 실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우리들의 바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끝내 그렇게 믿게 됩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을 위협하는 것은 자연과 야생동물이 아닌 타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를 끈끈해 했던 타인을 외면하고 때로는 짓밟아야 살아남는 경쟁시대. 인류는 생존을 위해 타인과 홀로 맞서야 했습니다. 때문에 감정은 인류에게 꼬리보다 불편하고 쓸모없는 것이 되어 빠르게 퇴화했습니다. 감정의 퇴화에 힘입어 인류의 과학은 빠르게 진화했지요."
- 정승락 외, 위의 책 pp95~96.
- p69.
- "리모컨이나 중앙컴퓨터로 원격 제어하는 로봇이 아니라, 기초 설정이 완료된 직후부터 외부의 모든 자극을 데이터베이스화하며 때로는 스스로 판단하고 그 계산과 선택의 결과를 새로이 자동 프로그래밍하여 움직이는 인간형 로봇" - 구병모, 「한 스푼의 시간」중 p39, 예담, 2016.
- "만일 현실 세계에 이런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있다면 일은 편할 겁니다. 곤란하게 됐다, 옴짝달짝할 수 없게 됐다고 생각되면, 하느님이 위에서 스르르 내려와 와 모두 처리해 줄 테니까요." -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중 p296, 문학사상사, 2000.
- 독자의 감정선을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유도해내는 것이 바로 작가의 능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작게나마 기여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슴에 품고 있었으며, 직업인으로서 그 소망을 실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명을 떠맡고 있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신사를 섬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중, 민음사, 2009.
- 홍기빈,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중, 책세상, 2001.
- "커피잔 아주머니와 레인코트 아저씨가 만난 날 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기억해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죠. 그래서 저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라도 다시 만나는 걸 해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아요. 그들이 잘되길 바라고 어쩌면 서로 만날 수 있게 돕기도 한다는 걸요."(p398)
- 구병모, 위의 책 p112.
- 창해, 2013.
- 역자 이선희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해줍니다. - "뇌를 이식받으면 어떻게 될까? 나는 나일까? 아니면 뇌를 이식해 준 사람일까? 나의 분노는 내 것일까? 아니면 뇌를 이식해 준 그 사람의 것일까? 나의 기억은 내 것일까? 아니면 뇌를 이식해 준 그 사람의 것일까? 이것이 이 소설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 구병모, 위의 책 p114.
- 박주영, 위의 책 p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