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어냄에 있어, 스페인 내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라는/아닐 수도 있겠다라는, 다시 말해 ---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일면(aspect)이란 게 어쩌면, 1930년대 초반의 스페인에서 일어났었던, "공산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 사이의 갈등"(p194)으로부터 기인된 '혁명의 실패'와 같은 결과로서의 일 현상(phenomenon)이 아닌, (그것이 반드시 '아나키즘'과 같은 특정의 것이 아닐 지라도) '이념', '사상' 혹 넓게는 '신념'으로도 표현되어질 수 있겠는 정신적 가치에 대한 일 개인/집단의 확신(이 지니는 숭고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을/까지를 해보기도 합/됩니다.
조지 오웰의 작품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고 썼던 감상문 속 위 구절처럼, 이 소설 「칼에 지다」를 읽기/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일본의 당시 역사를 알아야 한다,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역자 양윤옥이 밝힌 대로, 이 작품을 (메이지 유선 전후 시대의 일본 역사와는 그나마 비교적 무관할 수 있는) "현대 사회에서 점점 힘을 읽어가는 남성성, 참된 부성을 지닌 가장에 대한 천착"(p454)으로 이해하는 것도 이 작품을 받아들이는 (저는 절대 동의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시선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 자오팅양 · 레지 드브레, 「상실의 시대 :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 p231, 메디치, 2016.
마오쩌둥의 힘 있는 위 한 마디가 건네어 주는 무게감은 이내 --- 메이지 유신 근방의 일본사에 대한, 더 나아가 일본 '무사도'란 것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 이 작품에 대한 이해와 감정 이입의 폭(뿐만 아니라, 어쩌면 비판의 폭)을 훨씬 더 넓혀줄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에 힘을 실어줍니다. 물론, 이 작품에 대한 위 두 가지 방식의 이해 사이에 우열 같은 건 당연히 존재하지 않겠지요. 제가 읽은 건,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한 편의 문학 작품이지 문학적 감수성이 곁들여져 있는 역사서가 아니었으니까요. 선택은 그저 개인의 취향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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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부 체제의 유지, 그리고 몰락 】
막부 체제의 우두머리, 지금으로 말하자면 대략 국방부 장관쯤이지 않을까 싶은 '쇼군'이 실질적인 권력을 쥔 1600년부터 1868년 (메이지 유신) 간의 시대는 혹자의 서술에 따르면 '일본 역사상 유례없는 태평한 시기'였다고 합니다. 이 때 쇼군이 에도(지금의 도쿄)에 머물고 있었기에, 이 때를 '에도 시대'라고도 하지요. 어쨌든,
이 때를 가리켜 '태평한 시기'라 칭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지금 방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지방자치제의 실현 때문이었다라고 합니다. 전국을 대략 250여 개의 '번'(자치제의 단위)으로 나누어, 쇼군에게 일정의 공납을 하는 한 각 '번'들의 자치를 최대한 보장해주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근데 이 '번'이라는 것이 그저 지리적인 이유만으로 각자의 자리에 위치했던 것이 아니라, --- 쇼군이 자신에게 한껏 충성하는 다이묘(번의 수장, 영주)에게는 에도와 가까운 곳의 '번'을 맡겼고, 그저 그런 충성도의 다이묘들에게는 에도에서 아주 먼 곳의 '번'을 맡겼었다라는 데에서 문제의 불씨가 시작됩니다. 절대 권력과의 거리가 곧 자신이 지닌 힘의 크기와 동치되는 군사 정권의 속성 상, (그렇지 않아도 그저 그런 충성도 때문에) 에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번'을 맡게 된 다이묘들의 불만이 높아지게 되는/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겠죠.
"언제 어디에 사는지가 어떻게 사는가를 결정한다."
- 버지니아 울프, 「런던을 걷는 게 좋아,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중, 2017. 정은문고
1840년 아편전쟁에서 중국의 참패는 일본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었었거늘, 그 충격의 극복을 위한 충분한 준비를 하기도 전인 1853년 드디어 일본에도 서양의 함선이 출현하게 됩니다. 당연히 일본도 그들의 무력 앞에서 어쩔 수 없는 개방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인 각종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예의 민중들의 삶은 나날이 피폐해지게 되었죠. 봉건제의 특징인 (서열과 그에 따른 고정된 수입, 그리고 대물림 되는 직업으로 대표되는) 신분사회였던 당시의 일본에서 그와 같은 신분제는, 주어진 혼란을 극복하는 것이 아닌, 그저 하염 없이 당할 수 밖에 없게 하는 커다란 '억압'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란 마오쩌둥의 힘찬 한 마디는 이제 일본 사회에서도 작동하게 되었으며, 그 저항은 예의 --- 에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번'의 (그저 그런 충성도를 지녔던) 다이묘들로부터 시작되었죠.
제 아무리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해도, 그 저항에는 반드시 명분이 필요한 겁니다. 그저 '배고파서 못살겠다, 이 세상 갈아엎자'란 구호는 파급력이나 생명력의 관점에서 그리 유익하지는 못하겠죠. 그리하여 그 저항 세력이 내세운 명분이란 게 바로 '존왕양이' 즉, 일본이 힘을 모으려면 막부 체제를 종식시키고 천황 중심의 나라를 세워야 한다라는 것이었었으며, 이 와중에 발생된 반 막부파와 막부파간의 대립이 바로 --- 이 소설 「칼에 지다」의 주요한 역사적 배경이자 동시에 아이러니를 자아내는 기제가 됩니다.
【 삶의 이유, 그리고 삶의 명분 】
이자는 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가. 누구를 위해 사람 죽이는 짓을 하는가. (상권, p98)
지금으로부터 약 150여년 전 일본에서 살았던 한 인물의 한 생이 보여주고 있는 삶의 이유와 죽음의 이유를 통해, 작가 아사다 지로는 위 두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독자에게 건네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이미 읽은 독자라면 아마도 대부분,
"짐승의 발톱과 뿔은 누군가를 사냥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 구병모, 「파과」 p51, 자음과모음, 2013.
제가 너무도 좋아하는 작가 구병모가 적어놓은 위 구절이 가장 완벽한 정답임을, 그리고 그 정답의 의미란 게 결국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거예요.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p65, 더클래식, 2012.
처음 접했던 5년 전 그 당시, 뭔가 모르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었던, 이건 마치 주일날 듣게 되는 목사님의 설교스럽잖아란 느낌만을 받았던 위 구절, 누구나 다 알고 있을 작가 톨스토이가 직설적으로 적어놓은 구절에 적확하게 표현되어 있다라는 걸 알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1. 명분에의 구속
"전쟁이 구경거리인 한은 좋다. 그러나 우리를 선수로 끌어들이려고 할 때, 특히 우리가 아무런 준비나 경험이 없을 때 문제가 시작된다."
- 주제 사라마구, 「코끼리의 여행」 p155, 해냄, 2016.
이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막부 말기 시절은 대기근이 지속되었던 시기였습니다. "어떤 타자에게 충실하려면 다른 타자를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국가 우선의) 논리가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 '국가 우선'은 '가족 우선'이 되었다"라는 현실 논리 앞에서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거죠. 문제는 현실 논리로의 전환을 변호해줄 수 있는 명분을 가지고 있느냐입니다.
사무라이라는 건 체면에 살고 체면에 죽는 족속이에요. … 아무리 하잘것 없는 사무라이라도 일단 우국의 지사라는 걸 코끝에 걸지 않으면 안 되지요. (상권, p345)
소설의 주인공인 요시무라 간이치로에게도 예의, 가족 특히 자식들의 안위에 대해 스스로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한 삶의 방편 마련을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더랬습니다. "소멸의 한 지점을 항해 부지런히 허물어지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서글픔"을 이겨내기 위한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선택은 그리하여,
돈을 구걸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처자식은 먹여 살려야 한다. 그러니 존왕양이의 뜻을 이루고자 탈번했다는 것 말고는 생각나는 방도가 없었다. (하권, p193)
2. 명분의 실상
"'야스쿠니의 논리'를 창출해낸 국가의 의도, 그리고 '야스쿠니의 논리'를 '활용하는' 측에서는 '새로운 전쟁 속으로 국민을 동원하기 위하여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 행복하다고 유족들과 그 유족을 바라보는 국민 모두가 느끼도록 만드는' 의도가 있었다는 점이 가장 큰 핵심이다. … 이렇게 생각할 때 '희생의 논리'는 전쟁에 국민을 동원할 것이며, 또 그 전사자들과 유족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 것인가 하는 물음에 직면했던 국가가 창출해낸 하나의 프로세스(장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다카하시 데쓰야, 「국가와 희생」 p111, 책과함께, 2008.
"군사적 기능으로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직능집단"으로서의 사무라이의 사회적 책무를 빌어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존왕양이'라는 대의 명분을 탈번의 이유로 내세우게 된 겁니다. 이것이 과연 요시무라 간이치만의 선택이었느냐? 탈번 이후 요시무라 간이치로가 속하게 된 '신센구미'라는 조직 역시, 같은 이유로 탈번한 무사들이 대부분었었을 만큼 --- 천왕을 모시고 서양 세력을 배격한다라는 명분은 이제 더 이상 순수한 일 '명분'으로서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 것이지요. 이제 그들은,
3. 명분의 실종
전투는 죽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전투를 하는 것이다. 죽고 싶지 않아 남을 베는 것이다. (상권, p236) … 남의 칼에 죽지 않기 위한 방법은 단 한 가지, 내가 죽기 전에 죽이는 것뿐이다. 이제는 그 길 밖에 없다. (상권, p312)
개인의 생존, 더 나아가 그 개인이 책임지고 있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 전투에 참가할 뿐인 겁니다. "백성이 안심하게 살게 해주는 기구야말로 국가"라 믿었었기에 "우리의 목숨, 이 나라에 바치지 않겠나"라 다짐했던 사무라이들의 오랜 믿음이 깨어져 버리고 만 것이지요. --- 나를 죽이려는 자를 먼저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고, 내가 살 수 있어야 나의 가족이 살아갈 수 있다라는 생존의 절박한 이유 앞에서, 더 이상 '국가를 위하여'란 명분은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관군이고 역적군이고 없어요. 그저 내 눈앞에 들이닥친 굶주림과 추위가 있을 뿐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막부 말기란 그런 시대였습니다. (상권, p203)
4. 진정한 삶의 명분
이타 이인부치의 말단 무사에게 제 목숨 바칠 주군은 바로 제 식솔이었어. 그건 모든 말단 무사들의 본심, 아니, 입에 풀칠도 못하던 가난한 백성들의 본심이었을 거요. … 사내라는 건 제가 먹여 살려야 하는 자들을 위해 죽는 거요. 여자에게 반했다면 그 여자를 위해, 자식이 생겼다면 그 자식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거요. (하권, p262)
"이념, 사상 혹 넓게는 신념으로도 표현되어질 수 있겠는 정신적 가치에 대한 일 개인/집단의 확신(이 지니는 숭고함)에 대한 이야기"라 적었던 「카탈로니아 찬가」에 대한 소감의 구절을, 이 작품 「칼에 지다」에도 동일하게 적게 됩니다. '무사도'라는 이름의 당시 일본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이 지닌 '주군에 대한 충성',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죽음에 대한 성별(聖別)이 감추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행동을 했던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삶과 죽음의 과정을 통해 '아나키즘'(이라는 이념)에 대한 확신이 보여주었던 숭고함과는 또 다른 --- "시대의 진흙탕에 빠진 채 옴짝달싹을 못하는"(상권, p126) 상황을 기어이 이겨내고자 하는 (톨스토이가 말했던) '사랑의 힘'이 지닌 숭고함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인간에게는 각각 주어진 환경이 있고 그 속에서 웬만큼 노력을 하다 보면 이제 이만하면 됐다 하고 멈추는 지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물여 예전의 무가사회란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 있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 요시무라 선생은 끊임없이 노력하면 반드시 보답이 있을 거라고 믿으셨던 것일까요. 자신의 노력으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신분의 벽을 깨고 요시무라 가문을 꽁꽁 묶은 숙명을 초월할 수 있다고 믿으셨던 것일까요. (하권, p142)
과연 나는, 나의 이제까의 삶은 '이제 이만하면 됐다 하고 멈추는 지점'에 이르기까지의 노력을 해보았던 적이 있었던가라는 자문에, 세상의 불의에 맞서겠다는 결의 따위는 애초부터 내 삶의 영역 이외였었다라 하더라도,
아비는 인간의 길을 걷고자 하였을 뿐 부귀를 탐하였던 것은 아니다. 빈과 천을 부당하게 벗어나려 했던 것도 아니다. 호의호식까지는 못 시켜주더라도 너희가 비참한 마음이 들지 않게 해줄 수만 있었다면 아비가 그토록 어긋난 짓을 할 까닭이 없었다. 평생을 이타 이인부치의 말단 무사여도 좋았어. (하권, p100)
나의 아이에게 아버지로서의 제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구절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하는 자문에도 기어이 답해낼 수 없음이, 사뭇 창피하기까지 합니다. 자존심 때문에 회피했었던, 뭐 그렇게까지 해서 굳이,라는 변명성 접두어를 앞세워 나의 삶을, 그리고 내 가족의 삶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라는 의미에서의) 소홀하지는 않았던가 하는 (약간의) 반성까지도 해보게 되고 말이죠.
【 그러나 한 편으론... 】
사내라면 사내답게 살아야지. 지조 있게 죽자는 게 아뇨. 지조 있게 살자는 거야. 지조 있게 산다는 건 제 몫을 다한다는 거요. 내가 꼭 해야 할 일, 내가 안 하면 아무도 안 하는 일,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을 칼같이 해내면서 살아야지. …그거 어려울 거 아나도 없어. 처자식이나 수하의 고생을 사내라면 제 등판으로 짊어지면 되는 거야. (하권, p231)
「82년생 김지영」으로 대변될 수 있겠는, '남 탓' 내지는 '사회 탓'에 몰입되어 있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당연하겠으나, 그들의 생각에 동조할 수 없는 저에게도 또한 --- "현대 사회에서 점점 힘을 읽어가는 남성성, 참된 부성을 지닌 가장에 대한 천착"(p454)이란 시선으로 이 작품을 바라볼 독자가 있을 수 있다라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라는 점은 좀 아쉽기도 합니다. 남편/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내가 꼭 해야 할 일, 내가 안 하면 아무도 안 하는 일,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로 이해하는 건 요즘의 시대에선 아무래도 적합하진 않을 테니 말이죠. 더 나아가,
아버님은 도련님께 피에 더렵혀지지 않은 칼을 남겨주시려고 칼끝마저 부러진 다 닳아빠진 칼로 배를 가르셨다오." (하권, p279)
기어코 저의 눈에서 눈물을 핑 돌게 해주었던 위 구절 역시,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포장하는 것'에 오용될 수 있다라는 점에서 '과연 이 소설을 나의 고딩 아들에게 권해주어도 되겠느냐'란 의구심이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 "진공상태이던 우주를 불법들이 가득 채워버렸다면 사소한 불법 하나를 이 세계에 보태봐야 불법의 총량에는 거의 변화가 없을 것이다"란 작가 손아람의 견해가, 추가적 불법의 부당함을 지워낼 수 있다라는 점에서 비판 받아야 마땅하듯, '너를 위해 내가 사람을 죽였다'란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행동 역시 감성이 부여하는 정당성을 득할 염려/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인간의 삶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로구나. (하권, p190) … 이제 더 이상 고개 숙일 염치도 없으나 나는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고만. 아무리 몸부림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정도 뿐이었네. (하권, p197)
가난을 이겨내고자 했던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삶을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행동이 바로 근대적 의미에서의 혁명"이라 표현하는 것에는 이성적 동의를, 그의 죽음에 대한 "가난한 사람이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그 가난을 뚫어내려고 했던 처절한 죽음의 모습"(하권, p267)라는 표현은, 동료들의 수근거림을 이겨내었던 그의 삶을 떠올리게 하며 오랫만에 저로 하여금 "좋아도 한숨은 터진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만.... 그 한숨은 이내,
"최선의 선택은 패배를 받아들이고 승자에게 무릎을 꿇는 것 … 최선의 선택은 이제 투쟁을 포기하는 것 … 최선의 선택은 내가 따랐던 용감하고 위대한 사람을 가슴 속 깊은 곳에 묻는 것 … 최선의 선택은 그 시절을 지우는 것."
- 안토니오 아타리바 · 킴,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pp123-124, 길찾기, 2013.
아버지의 삶을 접어둘 수 밖에 없다란, 결국엔 그 시절을 지우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수 밖에 없다라 말하는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막내 아들의 강요된 체념을 보며 다른 의미의 한숨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하여/그렇게 당시 일본 역사에 대한 평가는,
"메이지 체제는 지금까지의 명예문화의 구성에서 세습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서 보다 순수한 능력사회를 향한 길을 개척했다. 도쿠가와 시대 평민의 아들들에게는 명예공동체에 참가하는 형태로 진정한 사회적 신분상승을 이룰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것을 생각해 보라. … 새로운 유행 이데올로기 즉, 평민의 아들이라도 근면하게 일해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면 세상에 '이름'을 떨칠 수 있다는 확신은 이 명예지향 사회의 기업가적 활동에 엄청난 탄력을 주었다. 즉, 메이지 유신은 일본 민중의 잠자고 있는 능력주의적이고 실적본위적인 욕구를 불러일으켰고 이런 야심은 시장에서의 성공과 명예를 목표로 하는 새로운 정렬로 나타났다."
- 이케가미 에이코, 「사무라이의 나라」 pp528-530, 지식노마드, 2008.
위와 같은 승자의 소회로 이루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승자의 평가가 틀렸다라 말할 지식은 제게 없습니다만, ---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처럼) '막부파'와 '반막부파'를 선악의 기준만으로 보는 우(愚)를 범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저의 선택은
"인류가 공존하는 사회의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사상은 결코 서양의 이념과 대립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경애해 마지않는 메이지라는 시대에서 역사상의 커다란 실책을 찾아낸다면 나는 일본과 서양의 정신, 새것과 옛것의 이념을 철저히 대립함으로만 취급했다는 점을 들겠다. …… 근대 일본의 비극은 근대 일본인의 교만 그 자체였다.
- 아사다 지로, 「고로지 할아버지의 뒷마무리」 p249, 문학동네, 2013.
아사다 지로의 평가에 손을 들어주게 됩니다. 현재 우리의 삶이란 게 "기나긴 시대의 지혜와 인내가 축적된 것"(상권, p118)임을 부인할 수 없다면, 옛 시절의 불합리한 점들 역시 그러한 불합리가 있었었기에 그것들의 극복을 통해 현재의 합리를 얻어내었다라는 것, 현재의 합리 또한 미래엔 불합리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자각이야말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지녀야 할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겸손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지요.
이보쇼, 손님. 한 가지 우리하고 당신네들이 다른 점이 있는데, 일러드릴까? 잘 들으쇼. 윗사람에게 딱 한 마디 "모가지다"라는 소리가 떨어지면, 우리는 정말 모가지가 몸통에서 뚝 떨어져나갔소. (상권, p110)
세르반테스 작품 속 '돈키호테' 이후,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아~ 이제 이 주인공과도 이별이구나'란 아쉬움을 처음으로 느껴본 주인공이었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 「칼에 지다」 속 '지다'라는 동사의 의미가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바람에 꽃잎이 지다'라는 의미의 '지다'일 꺼라 믿습니다.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삶이란 걸 결코, '패배'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잘 가요, 간이치로...
※ 읽어본, 아사다 지로의 작품 : 「고로지 할아버지의 뒷마무리」
※ 위대한 개인의 신념 :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카탈로니아 찬가」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지금 이 블로그에 와있는 당신에게마저 여하한 구실로라도 '나를 아는' 이란 형용사를 붙여 --- 꼭 한번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은 책들의 제목 앞에 ★표시를 붙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시이겠지만 가끔은, 타인의 주관을 한번쯤 믿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