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뒷 표지에 '독설과 풍자로 감옥에 갇힐 것을 각오하고 펴낸 책'이란 무시무시한 구절을 떡하니 적어놓은 출판사의 (사뭇 패기어린) 문구로부터,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유럽사, 적어도 영국사의 개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니스런 무언의 압박을 살짝이 느꼈었기도, 거기에 더해 --- 이 작품이 '풍자'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면, "물어뜯고 비꼬고 우스갯감으로 만드는 것은 그 풍자가 생산되어 나온 당대 사회의 실존 인물, 사회환경과 제도, 이데올로기, 사건, 편견 같은 것들"에 대한 사전적 지식을 가지고 그 풍자를 이해하는 것이 마땅히 옳지 않겠느냐는 나름의 자기 검열에 선뜻, 이 작품을 펼치지 못했었었거늘, 막상 다 읽고 나니...
"인간의 이야기는 딱 두세 가지밖에 없다. 그 이야기들이 마치 전에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인 양 강렬하게 계속 되풀이된다. 지난 수천 년 동안 다섯 가지 음조로 똑같이 노래해 왔던 시골의 종달새처럼 말이다"
- 미히르 데사이, 「금융의 모험」 p315, 부키, 2018.
1667년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태어난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지은 이 작품을 (최소한의 한도 내에서라도) 이해해냄에 있어 유럽이나 영국의 사회상, 역사까지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까지는 없다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들을 알고 있으면 이 작품에 대한 이해가 좀 더 정교해질 수는 있겠죠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시대를 초월하여 늘 현재와 소통하는 문학'이라 정의될 수 있겠는 '고전classic'이라 불리우는 작품들이 기본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 대상은 넓게 보아 '인간의 본성'이며, 예의 인간(본성)의 진화란 게 (지난 수천 년간 종달새의 레퍼토리와도 같이) 대략 350여 년의 시간으로는 변모하기 어렵기에 , 굳이 어려운(!) 유럽의 역사까지 알지 않더라도, 조선 시대의 역사에 대한 약간의 지식, 그마저 부담된다면 그냥 2018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라도 그것들을 충분히 대체해줄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점이 지엽적이 아닌, 뭐라 한계/특정지을 수 없겠는, 그냥...
'인간의 이야기'란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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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왕인 것은 오직 다른 사람들이 그를 받들어 신하로서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대로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신하라고 생각한다." (p67) …… (이처럼)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p109)
- 류동민,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중, 위즈덤하우스, 2012.
위와 같은 상대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란 게 이 작품 속 스토리들을 이해하는 결정적 렌즈라 이해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소인국(릴리퍼트)과 거인국(브롭딩낵)의 이야기는 이러한 상대성에 대한 인식이 필요함을(이 작품의 메인 스토리가 결코 아닌, 명백히!) 일종의 introduction 격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들일 뿐이죠.
작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존재로 나를 바라보았다. … (거인국에 있는 지금) 릴리퍼트의 작은 사람 하나가 영국에 온 것처럼, 이 나라에서 나는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보일지에 대해 생각하니 무척이나 억울했다. … 크거나 작다는 개념은 상대적인 것이라고 철학자들이 이야기한 것은 옳은 말이다. (p106)
동일한 인물이 한 곳에서는 '놀라운 존재'로, 다른 곳에선 '보잘것없는 존재'로 간주되는 이같은 상대성에 대한 인식의 착시는 "습관과 편견이 가질 수 있는 힘"(p190)에 의해 발생되고 또 강화되어 결국엔 사고(思考)의 범위까지도 한계지어버리게 된다라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의 얼굴이 넓으면서도 코가 오뚝하고, 눈이 정면에 붙어 있어서 고개를 돌리지 않고는 옆쪽을 볼 수도 없다고 비판했다.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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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프트는 인류 혐오자라고도 불린다. 「걸리버 여행기」는 신랄한 인간 혐오를 드러낸다. … 그는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천성적으로 착하다는 당시의 낙관적 견해에 대한 반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p380)
제가 이해하는 바 (그리고 아마도 읽은 이들 모두가 동의할 것 같은) 이 작품의 핵심은 너무도 당연히! --- 제 4부인 <말들의 나라 : 휴이넘 기행>입니다. 이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렌즈인 상대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 (더 좁게는 당시 영국 사회상에 대한 비판)을 위해 작가는, "공통된 유적(類的) 특성"의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인간도 아니며 당연히 영국인도 아닌,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옆쪽을 볼 수 있는) '말'이라는, 완전히 다른 종(種)의 입을 빌리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어린 톰은 그렇게 불행하지 않았다. 고생을 하면서도 그것이 고생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펄코트에 살고 있는 사내아이들이라면 예외 없이 누구나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톰은 그런 생활이 자연스럽고 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 마크 트웨인, 「왕자와 거지」 p20, 민음사, 2010.
마크 트웨인도 지적했었듯, '예외 없이 누구나'라는 환경이 그 구성원에게 안겨주는 영향은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구성원이 '예외 없이 누구나' 인간이라면 인류 전체의 하비투스(habitus), 작게는 특정 국가나 민족의 하비투스를 뛰어넘는 사고를 한다라는 것이 참으로 지난한 일일 수도 있다라는 것이 일례일 테고, 그러하기에 심지어 특정 문제점을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도 종종 발생되게 되겠죠. 행여 문제를 비판한다 하더라도, --- 「금융의 모험」의 저자 미히르 데사이 교수가 지적했었듯, 문제의 근본을 파악하고 고치려기보다는 그 현상만을 비판하는, 한 때 유행했었던 구절인 '유체이탈식 화법'을 구사하기 일쑤이기도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50여년 전, 조너선 스위프트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 사회 문제의 핵심을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탐욕으로 규정짓고 있었던 것이죠.
주인은 우리를 아주 작은 분량의 이성을 부여받은 동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성을 좋은 일에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정을 더욱 악화시키고,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하지 않았던 새로운 잘못을 만드는 일에 이성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좋은 능력을 잃어버리게 됨으로써 인간의 단점은 더욱 늘어나게 되었으며, 아무런 소용도 없는 발명품에 의해 자신의 단점을 메우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p330)
물론 '화폐'라는 것이 작가가 적은 것처럼 '아무런 소용도 없는 발명품'이라고는 저도 생각지 않습니다. 허나 1667년 생 작가가 「걸리버 여행기」라는 작품을 통해 지적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아주 작은 분량의) 이성이 고안해 낸 ('화폐'를 비롯한) 각종 제도와 체제들에, 그 이성으로도 통제되지 못한 탐욕으로 인해, 심지어는 그 이성을 이용도 하여 애초의 목적과는 완전히 변질된/동떨어진 역할을 부여하게 되었다라는, 그리하여 그 제도의 피해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라는 점은, --- 얼마 전 읽었었던 '금융'에 관한 책들이 누누히 지적하였던 '수단과 목적의 전이'가 초래하는 부작용들과 완벽하게 동일하지요.
만들었을 당시에는 아주 좋았을 제도들이 그대의 나라에서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하다가 이제는 부패되어 완전히 희미해지거나 제멋대로 변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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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분명히 읽었었었던 <세계명작동화>의 리스트 중, 지금은 완벽하게 그 내용 모두를 잊어버린 작품들이 참 많습니다. 「소공자」와 「소공녀」가 대표적이죠. 당시 저의 이해력이 부족했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 없을 수도 있겠으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 작품들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자 했던 바라는 게 어린 나이의 한국 소년에게는 이해되기 싶지 않았었기 때문일 수도, 혹은 요약본식 동화로는 전달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성인이 되어 읽어 본 「왕자와 거지」라든가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 「톰 아저씨의 오두막」, 「프랑켄슈타인」, 「지킬박사와 하이드」, 「돈키호테」 등의 작품들은 위의 두 가지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내재되어 있거늘, 왜 여전히 어린이용 명작 동화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그들의 위대한 금언은, 이성을 기르며 이성에 의한 지배를 받으라는 것이다. (p340)
이 작품의 핵심주제를 표현하고 있는 위 구절에 대한 이해가, 깊은 바다를 걸어 상대국의 전함들을 끌어오고, 왕궁에 난 불을 오줌으로 끄는 거인 걸리버의 이야기만을 담고 있는 동화를 통해서 가능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런 이야기들만을 통해 아이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딱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당연하다 생각해 왔던 것들이, 더 이상은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라는 생각, 더 나아가 이전에 당연하다 여겼었던 것들이 기실은 당연한 것들이 아니었었음을 깨닫고 인정할 수 있는 유연함이, 적어도 현 세대 아이들이 교육에만큼은 발현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 읽어 본, '세계명작동화'의 원역본 : 「왕자와 거지」, 「로빈슨 크루소」, 「톰 아저씨의 오두막」, 「프랑켄슈타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 「돈키호테 1」, 「돈키호테 2」
※ 동물의 입을 빈 인간 사회에 대한 비판 : 「동물농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