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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나 지음 / 다락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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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가끔은 두렵기도 하구요, 무언가 계기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 매번 마음 속에 생각만은 있지만, 실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다락원에서 출간한 이 책은 저의 언어 울렁증을 조금은 해소해 준 책입니다.
첫술에 배부른 법은 없으니, 이 책을 계기로 꾸준히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무엇보다 어려운 점은 역시 원어민을 마주할 기회가 있었을 때 떨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을 할 수 있느냐입니다. 저자 역시 '지은이의 말' 부분에서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데요.

'필자는 중국에 유학 갔을 때, 중국인들의 빠른 말 속도에 당황하기 일쑤였습니다. 누구도 교재 속 녹음 파일처럼 또박또박 천천히 말해 주지 않았죠. 말 속도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중국인과 많이 대화하며 그냥 부닥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책의 장점은 실제 말하는 속도로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접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저 같은 정말정말 초보자들은 여러차례 반복을 해야 겠지요.

본문에 한글로 기재되어 있는 점이 너무 다행이라 여겨졌습니다. 한글로 기재되어 있는 부분이 없으면 역시 가독성이 떨어지고 조금씩 포기하게 되거든요.

이 책으로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해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은 기회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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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3
공자 지음, 소준섭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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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한문학원에 한동안 다녔습니다.
사자소학(?)을 배웠던가. 아마 그 후의 진도도 나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책상다리를 하고 책상에 책을 세워 읽으면서 음과 훈을 배웠던 기억.
덕분에 대학생이 되었을 때 한문이 간간히 등장했던 전공서적을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글자 하나하나의 의미에 대해서 추측하면서 읽을 수 있었던 까닭은 한자 부수의 뜻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단어를 읽을 수 있다는 것과 전체적인 문장의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은 별개인 것 같습니다.

이 책을 보니 예전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눈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해석을 해 주시던 선생님은 이제 없지만, 뜻풀이와 해석을 읽으면서 내용을 곱씹어 봅니다.

분명 한문으로 몇 글자 적혀있지 않은데, 뜻풀이로 들어가면 뭔가 심오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예를 들자면 38쪽
子曰 : 君子不器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마땅히 큰 그릇이어야 한다."
라고 풀이됩니다. 아래 해설에는 '이 구절은 기분에 "군자는 그릇처럼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로 해석되어 왔다. 그런데 고대 한어에서 '불不'과 '비丕'는 많은 경우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비丕는 대大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군자불기를 "군자는 마땅히 큰 그릇이어야 한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군자는 그릇처럼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라고 해석하는 것보다 타당하다고 본다.

이 책의 서평단을 모집할 때, 두 부류의 집단으로 모집했습니다.
손글씨를 적어서 인증하는 부류, 이 책의 서평을 올릴 부류

저는 서평을 올리는 부류인데, 이 책은 두고두고 읽어야 할 책인 듯 합니다. 그리고 한자 공부를 하는 데 있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필기인 듯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종이에 옮겨쓰고 오래도록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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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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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상평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책장을 끝까지 넘기고 나면 제목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나'의 예감은 맞지 않았다.

"나"는 40년의 시간을 거슬러 20대 초반에 생을 마감한 친구의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처음에는 타인의 의사(유언)에 의해, 이후에는 자의로.

역사에 대한 '나'의 관점이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에서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로 변할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마주하는 '에이드리언'의 죽음의 진실에는 나의 치기 어린 저주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존재하는 듯 하다.
내가 만약 편지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평범하게 살았던 일생의 한 장면. 잊고 있었던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적은 편지가 하나의 계기가 되어 동경했고, 라이벌로 생각했고, 하지만 여전히 친구로 남고 싶었던 '에이드리언'이 자살을 택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40여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알게 되는 순간.

'나'는 잘못을 빌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상이 틀렸다.

명징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은 무지였고, 완전무결하다고 믿었던 친구의 스스로 선택한 죽음은 일종의 죄책감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들었다. 전 여자친구(베로니카)의 어머니. "그래도 마지막 몇 달 간은 행복했다고 믿는다"는 구절의 의미.

나는 지금 60대이고, 이혼한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대머리이고, 딸의 무심함에 가끔 서운함을 느끼는.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나름 평균적인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적당히 철학적이고 배려심이 있다고 느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에이드리언'이 너무 똑똑해서 죽은 것 같지?

세월에 묻고 살았던 진실은 어떻게든 전달되게 마련인 것 같다. '나'를 탓하면서, 그래도 '나'가 위안을 얻었으면 한다. 얼마간의 돈을 남긴 것도 그래서 일까. 상반된 듯 보이는 감정.

네 탓이다. 네 탓만은 아니다. 그래도 알아주기 바란다.

'나'는 둔한 사람이었다. '베로니카'가 나에게 왜 화가 나 있는지를 마지막이 되어서야 겨우 알았다.
'어머니'가 '아닌 '누나'라는 의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아니 맞지 않는다.

알지 못 했고, 알 수도 없었던 사실을 시간이 지난 후에 몇 가지 단서(일기장, 증언)를 통해서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
 
'나'를 포함한 3총사에 '에이드리언'이라는 일종의 천재가 들어온 어린 시절. 그리고 학우의 죽음.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가 사귀게 되면서 내가 인정한 존재이면서 인정받고 싶어했던 존재인 에이드리언과 멀어지게 된 과정을 그린 1부
 
베로니카의 어머니의 죽음. 유언장에 적힌 '나'의 이름과 얼마간의 돈, 일기장.
다시 만난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의 죽음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2부
 
마지막의 반전이 가슴을 때린다.

2. 인상깊인 구절, 첨언

잘은 모릅니다, 선생님. 하지만 하나의 사유 방식은 있는데, 그에 따르면 모든 역사적 사건 - 예를 들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까지도-에 대해 우리가 진실되게 할 수 있는 말은 '뭔가 일어났다'는 것 뿐입니다.
경우를 막론하고, 죽음의 원칙과 충돌하는 에로스의 원칙이죠. 그리고 그 충돌의 결과로 뒤이어 나타나는 것들까지도요.


'에이드리언'의 위 말들은 본인의 죽음에 대한 간접적인 예언인 듯 하다.

사실, 책임을 전가한다는 건 완전한 회피가 아닐가요? 우린 한 개인을 탓하고 싶어하죠,그래야 모두 사면을 받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개인을 사면하기 위해 역사의 전개를 탓하거나, 그도 아니면 죄다 무정부적인 카오스 상태 탓이라고 해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제 생각엔 지금이나 그때나 개인의 책임이라는 연쇄사슬이 이어져 있는 걸로 보입니다.

'나'에게 '에이드리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우리 대부분에게 첫사랑의 경험은, 비록 좋게 끝나지 않는다 해도 - 어쩌면 그럴 때 더더욱 - 삶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삶의 권리를 지지하는 실체가 이곳에 있다는 희망을 준다.
우리는 충동적으로 결정한 다음, 그 결정을 정당화할 논거의 하부구조를 만든다. 그런 후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를 상식이라고 말한다.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상식이라는 잣대로 판단이 가능할까

어쩌면 나는 대략 합의하에 결정된 역사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나'의 기억은 어느 정도 대략 합의하에 결정된 역사였던 것 같다. 내가 보낸 편지를 40여년이 흐른 뒤에 보기 전까지는...

그 일기장은 증거였다. 확실한 -아마도-증거물. 진부하게 반복되는 기억을 구제해주고 물꼬를 터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시간이란....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시간이 흘러 어떤 사건을 떠올릴 때. 회한없이 떠올릴 수 있었으면 한다.

장담컨대, 회한의 주된 특징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다. 이미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마당에 사과를 하거나 보상해봤자 부질없는 짓이다.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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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아는 와이프 1~2 세트 - 전2권 - 양희승 대본집
양희승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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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상평

우리는 모두 그 누군가의 아는 '그 사람'입니다.
작가님의 한마디.

종영된 드라마 극본을 찬찬히 읽고 있는데, 지성 배우님과 한지민 배우님, 가현동 지점 근무 직원들 등 인물과 배경이 영상처럼 떠올라서 즐거웠습니다.

사실 본방사수 못 하고, 대본집 발간 소식에 반가워서 조금씩 찾아보고 있는데 대본집 읽다보니 드라마 보고 있는 듯 하네요. 2권까지 전부 읽었더니 영상으로 접하지 않았어도 배부른 느낌입니다.

배경이 된 2006년과 2018년. 극중 주혁보다 저는 2살 정도 많네요. 연령대가 비슷하다보니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아 옛생각도 해가면서 읽었습니다.

한 아이의 아빠이고 육아를 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못난 남편이기에, 초반에 벌어지는 일들이 남 이야기 같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래도 해 볼만 한데, 까칠한 우리 아이 보고 집안 일 하고 하루종일 파김치가 되어 있는 와이프를 보면 언뜻 우진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어요 ㅎ

드라마 초반에 남편인 주혁의 모습에 대해 비판하는 기사도 나왔던 것 같은데, 초반의 모습이 있었기에 극 후반부의 주혁의 심정이 더 절절하게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돌고 돌아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면, 결국 지금 이 자리에서 지금 이 사람에게 집중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소중한 아이를 다른 누군가의 남편 혹은 아내가 될 기회하고 바꿀 수는 없으니까요.

Go백부부를 보고 판타지를 느꼈다면, 아는 와이프를 보고서는 뭔가 더 현실적인 부부의 모습을 본 것 같아요. 전체적으로 3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은데 - 과거 회귀 전, 과거 회귀 후 다른 선택, 우진과 주혁의 동시 회귀 - 두 사람 중 어느 한 쪽이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본인의 선택을 하는 것이 그려져서 좋았습니다.

행복을 찾아 과거로 갖다가 자신으로 인해 우진과 혜진, 은행동료들에게 불행을 안겨준다고 자책하고 좌절하고 우진과 단절하려고 하는 주혁의 선택,
뭔가 모르게 끌리는 마음에 대해 고민하다가 결국 주혁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고 직진하는 우진의 선택.

현실이라는 장벽은 그냥 넘을 순 없는 거니까요. 조건이 달라진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닌 거 같아요. 지금 이순간에도 서로 부딪히면서, 모난 부분 깎여가면서 혹은 깎아가면서 살아가는 모든 부부를 응원합니다.

인생의 동반자인 부부는 '서로 같은 곳을 보는 사람'이지만, 같은 곳을 보면서 정작 마주 보는 것을 잊어버리는 건 아닌지. 가끔 아니 자주 서로 마주 보는 사람이길 바랍니다.

차주혁, 서우진 부부. 차은주, 오상식 부부, 윤종후 부부,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 앞에 선 혜원과 현수. 그들에게 행복이 있기를

 

2. 인상깊은 구절

0은 곱셉에선 뭐가 붙든 다 0으로 만드는 절대 권력이잖아요. 근데 덧셈에선 아무 힘도 없잖아요. 0이 더하기를 사랑해서 그런 거거든요.
그래,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우진이 때문에 비루한 세상이 빛나 보이고, 우진이를 웃게 만들기 위해 기운 내 또 하루를 살아가던 시절...
그때 너는 울고 싶었구나 ..., 그때 너는 위로받고 싶었구나..., 그때 너는 ..., 사무치게 외로웠구나...
니가 괴물이 된 게 아니라 내가 널 괴물로 만든 거였어...
하나만 물어볼게요, 아저씨.
저 다시 그날로 돌아갈 수 있어요? 예?
어떻게 하면 그날로 가요?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어요? 네? 네?!

 

아닌 줄도 알고 안 되는 것도 아는데, 처음부터 내 마음대로 안 됐어요, 고장 난 것처럼.

 

진짜 이제... 그날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없어? 다른 어떤 날로도?
어, 없어. 지나간 시간 돌아보는 거 이제 안 해. 앞만 보고 갈 거야...너랑.
(보며) 응, 그게 맞아. 우리 미래는 우리 힘으로 만들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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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제국 2
이주현 소설, 박경수 극본 / 소네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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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글

박경수 작가의 전작 '추적자'를 워낙 재밌게 본 터라 차기작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기대감을 안고 봤다.

전작보다 8부작이 늘어난 24부작. 매 회마다 하나의 완결된 구조를 가진 작품을 쓰고 싶다는 작가의 말대로 매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작품의 호흡도 상당히 길어서 한 회의 마지막과 다음 회의 처음 사이에 간격이 몇년이 훨쩍 지나있기도 하다. 그래서 몰아보는 것보다는 긴 호흡을 가지고 시간을 들여 보는 것을 추천한다.

드라마가 종영된지 몇 년 지났지만, 촌철살인의 대사가 생각이 나서 전자책을 구입했다. 종이책은 출간 즉시 구입했지만 고향 집 책장에 있는고로.

2. 인상깊은 구절

"잘못하긴요...하지만, 아버지가 판단하는 게 아니구. 이긴 놈이 판단하는 게 세상이에요."
"그래. 그라믄 태주야. 요번에는 아버지가 함 이기볼란다."

최민재는 최원재가 싫었다. 늘 한심했다. 하긴 그래서 최민재가 더 큰 꿈을 꾸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만약에 최원재가 자기만큼 열정적이었다면, 아니 최서윤 만큼이라도 똑똑했다면 애당초 자신의 꿈은 지금보다 작았으리라. 꿈이라는 건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목표들을 나는 할 수 있다고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으로 포장하는 것이니까.

"사람을 만나면 어디 사는지 물어보지? 그게 동네가 궁금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강남 사는 애들은 대답할 때 눈빛이 달라. 근데 얄궂은 동네 사는 애들은 지 주소 말하는데 목소리가 기어들어가요. 주소가 계급이거든."


"미사일 단추 신드롬이란 말이 있습니다. 화려한 미사일 발사실에 앉아서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단추를 누르는 군인한텐, 사람을 죽인다는 의식이 없죠. 그 미사일로 사람들이 죽고, 다쳐도, 자기는 단추만 눌렀을 뿐이라고. 당신도 그랬겠지. 상가를 철거하라는 전화만 했을 뿐이라고."

"당신하고 나, 같은 도박판에 앉아 있습니다. 이기고 싶으면 레이스를 하세요. 난요. 뻥카에는 한성제철 인수! 다이 안 합니다. 최서윤씨. 당신한테 있는 건, 나한테도 있습니다. 돈도 있고, 꿈도 있습니다. 당신이 나보다 판돈 좀 많은 거. 아, 그건 좀 부럽네요."

"성진그룹. 대단하네요. 하지만 이건 알아둡시다. 최서윤. 당신은 이 집 안방에서 태어나서 거실을 지나서 여기 서재까지 왔지만, 나 장태주는 신림동 판잣집에서 태어나서 여기 서재에서 당신하고 마주앉았습니다. 쉽지 않을 겁니다. 조심하세요."


3. 더 이상 없을 것 같은 신화

가진 것이 없어 잃을 것이 두렵지 않은 장태주는 끝을 모르는 높이로 올라간다. 찰라의 순간이 지나면 황금의 제국의 주인이 될 것만 같았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던 이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본 순간. 거짓말 처럼 날개가 꺾이고 만다. 날개를 잃은 그에게 남은 것은 예정된 추락 뿐.

마냥 정의롭지만은 않았던 장태주를 응원할 수 있었던 건 그가 가졌던 절박함과 판에 뛰어들때 그가 잃었던 것을 연민의 감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처음부터 가졌던 사람들과는 다르다. 아버지를 죽인 자들과는 다르다'는 신념이 절박한 순간 자신이 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다행스럽게도 그는 내려놓을 줄 알았다.

남이 아닌 자신이 결정한다는 신념대로 마지막도 그 답게 끝을 낸다.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신화는 그렇게 미완으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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