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와 다시 읽는 고전 나의 두 번째 교과서 시즌3
나민애 지음, EBS 제작팀 기획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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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라고 하면 부담이 앞선다.
<죄와 벌>, <안나 카레리나>, <파우스트>, <1984>, <프랑켄슈타인>, <돈키호테>… 제목은 익숙하지만 막상 펼치려면 방대한 분량과 낯선 시대적 배경 앞에서 망설이게 된다.

이 책은 그 거리감을 줄여주는 책이다.
저자의 관심은 완독이나 문학사적 지식이 아니라 “이 작품이 왜 지금까지 살아남았는가”에 있다.
책을 여는 문장부터 인상적이다. 고전은 강 같은 것이다. 아폴리네르가 <미라보 다리>를 쓰던 시절에도, 지금도 센강은 흐른다. 사람과 시대는 바뀌어도 강은 제자리를 지나가듯, 몇백 년 전 작품 속에도 지금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랑과 욕망, 두려움과 삶의 의미가 흐른다.

책의 출발점은 사랑이다.
<시경>의 <관저>에서 <향연>, <신곡>, <죄와 벌>, <안나 카레리나>로 이어지며 사랑은 매번 다른 얼굴을 보인다. <향연>에서 인간은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존재이고, 단테에게 베아트리체는 연인을 넘어 더 나은 곳으로 이끄는 존재다. <죄와 벌>의 소냐에게 사랑은 무조건적 용서가 아니라 죄를 인정하고 책임지게 만드는 힘이다.
반면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뜨겁지만 불안하다. 사랑이 삶의 전부가 되는 순간 상대의 마음을 끊임없이 확인하게 되고, 사랑을 잃는 것이 곧 자기 존재를 잃는 일처럼 느껴진다. 사랑은 인간을 구원할 수도, 집어삼킬 수도 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악’으로 넘어간다.
에덴동산의 뱀에서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까지, 과거의 악은 인간 바깥에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악마 없이도 인간은 충분히 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1984>에 이르면 악은 한 명의 악당조차 아닌 감시와 통제의 시스템이 된다. 빅 브라더가 없어도 스마트폰과 알고리즘이 취향과 행동을 예측하는 지금, 누군가 보고 있다는 감각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든다. SNS에 좋은 모습만 골라 올리다 보면 실제의 나와 보여주기 위한 나 사이에 거리가 벌어진다. 1949년에 나온 <1984>가 여전히 무서운 이유다.

<프랑켄슈타인>을 바라보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우리는 그 이름을 괴물로 기억하지만 정작 괴물에겐 이름이 없고, 그는 처음부터 악했던 존재도 아니다. 사랑받고 싶었던 존재를 만들어 놓고 책임지지 않은 것은 오히려 창조주였다. 그러니 크리처의 질문은 “왜 나를 만들었나”보다 “왜 만들어 놓고 버렸나”에 가깝다. 무엇을 만들 수 있느냐가 아니라 만든 것에 얼마나 책임질 수 있느냐를 묻는 이 질문은, AI와 생명공학의 시대를 사는 지금 더욱 섬뜩하게 다가온다.

<침묵의 봄>에서 고전의 범위는 문학에서 현실로 넓어진다. 레이첼 카슨이 고발한 DDT의 자리에 저자는 미세플라스틱을 놓아본다. 물질은 바뀌었어도 인간이 편리함을 얻는 대가를 자연과 다른 생명에게 떠넘기는 구조는 반복된다. 인간도 생태계의 일부이므로 자연을 파괴하는 일은 결국 자신을 해치는 일이라는 깨달음으로 이야기는 모아진다.

<돈키호테>와 루쉰의 <광인일기>를 나란히 읽는 방식도 흥미롭다.
두 주인공은 모두 당대에 미친 사람 취급을 받지만, 저자는 그 ‘미침’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기존 질서를 의심하는 사람은 언제나 처음엔 이상한 사람으로 불린다. 정상이라는 것은 결국 누가 정하는가—새로운 시대를 먼저 본 사람이 자기 시대에서는 미친 사람으로 불릴 수 있다는 해석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책의 후반부에는 전쟁이 등장한다.
헤밍웨이가 그리는 전쟁에는 영웅적 장면보다 상실이 먼저 있고, 살아남았지만 믿었던 세계를 잃은 이들에게서 ‘잃어버린 세대’라는 말이 태어난다.
그리고 시선은 마지막으로 빅터 프랭클에게 향한다. 강제수용소라는 극한을 겪은 그가 끝내 붙잡은 것은 ‘의미’였다. 인간을 살아 있게 하는 힘은 좋은 환경이나 행복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데 있으며, 그 의미는 누구도 대신 정해줄 수 없다.

그래서 사랑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전쟁과 절망을 거쳐 다시 사랑으로 돌아온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어렵다면 적어도 미워하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것. <향연>과 <죄와 벌>의 사랑이 <1984>의 감시, <프랑켄슈타인>의 버림받음, <침묵의 봄>의 파괴, 전쟁의 폐허를 모두 통과한 뒤 다시 도착한 결론이기에 이 문장은 단순한 위로로 읽히지 않는다.

이 책이 가장 좋았던 점은 고전을 떠받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조건 훌륭하다고 말하는 대신 인물의 선택에 의문을 던지고 지금의 기준으로 다시 바라보면서도, 수백 년 전 작품이 살아남은 이유를 분명히 보여준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인간은 놀랄 만큼 비슷하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 때문에 행복하고 괴로워하며, 시스템에 길들여지고, 기술을 만들어 놓고 책임을 고민하며,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느끼는 순간 다시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선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오래된 생각을 배우는 일이라기보다, 지금의 나를 아주 먼 시대의 거울에 비춰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강물은 같아 보여도 매 순간 다른 물이 흐르듯, 스무 살에 읽은 <죄와 벌>과 마흔에 읽은 그것은 같은 책이 아니다. 작품은 그대로 있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전은 한 번 읽고 끝내는 책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다시 읽어야 하는 책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 가장 오래 기억하게 될 단어도 결국 ‘고전’보다 ‘다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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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없는 영웅들
퍼디아 레넌 지음, 최리외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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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디세이>가 관객 1,000만 명을 넘기며 고대 그리스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 흐름 속에서 퍼디아 레넌의 데뷔작 <영광 없는 영웅들>은 묘한 경험을 선사한다. 두 작품 모두 2천 년 전 지중해를 배경으로 전쟁과 귀향, 인간의 존엄을 다루지만, 시선의 방향은 정반대다. <오디세이>가 위대한 영웅의 귀향을 그린다면, 이 소설은 역사에 이름조차 남지 않을 실직 도공 람포·겔론과 굶어 죽어가는 전쟁포로들을 바라본다.

기원전 412년 시라쿠사.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은 참패로 끝났고, 살아남은 아테네 병사들은 채석장에 갇혀 죽어간다. 승리한 시라쿠사도 온전치 않다. 무역은 무너졌고 사람들은 가족을 잃었으며, 도시 전체가 거대한 PTSD를 앓는 듯하다. 그런 도시에서 일자리를 잃은 람포와 겔론은 아테네 포로들을 배우로 세워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와 <트로이의 여인들>을 공연하겠다는, 말 그대로 미친 계획을 세운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낯선 것은 말하는 방식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장중한 문장 대신 현대 아일랜드 특유의 구어체와 농담, 빈정거림으로 말한다. 처음엔 어색하지만 곧, 로마인에게 영국식 억양을 입혀온 기존 역사물 쪽이 오히려 자의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작가는 식민 지배를 겪은 시칠리아와 아일랜드 사이의 역사적 공명, 그리고 고대 희극과 더블린 유머의 닮은꼴에서 이 선택의 근거를 찾는다. 그 결과 람포와 겔론은 술집 옆자리에 앉은 사람처럼 생생해진다.

소설은 두 얼간이가 사람들을 끌어모아 연극을 올리는 버디 코미디로 시작해 점점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리허설이 진행될수록 그저 '적군'이었던 구덩이 속 아테네인들은 이름과 가족,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 된다.

전쟁이 상대에게서 이름을 지우는 방식이라면, 연극은 그 이름을 돌려주는 일이다. 대사를 외운다는 이유로 한 사람이 굶어 죽지 않고, 시라쿠사 관객은 증오하던 적군이 연기하는 슬픔을 보다가 결국 자신의 슬픔과 마주한다. 사람은 전쟁으로 타인을 적으로 만들고, 이야기로 다시 인간으로 되돌린다.

여기서 두 소설은 다시 갈라진다.
"영웅은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는가"라는 <오디세이>의 질문에 이 소설은 "전쟁이 끝난 뒤 인간은 어떻게 다시 인간이 되는가"라고 되묻는다. 그 답으로 예술을 내놓는다.

람포는 허세 있고 무책임하며 종종 비겁한, 결코 미화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예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가며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된다.
배우들이 처음엔 공연의 도구였다가 점점 공연보다 소중한 존재로 바뀌는 과정에서, 소설은 단순한 예술 찬가를 벗어난다. 예술이 사람을 자동으로 선하게 만들진 않는다. 다만 잠시 타인의 삶을 상상하게 하고, 그 상상이 가끔 한 사람의 선택을 바꾼다.

겔론은 다른 방식으로 슬퍼한다.
상처를 피하는 람포와 달리 그는 죽은 아이와 떠난 아내의 흔적을 사물 속에서 되짚으며, 세상이 망가졌는데도 아름다운 것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려 한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20년 전 들은 희곡의 한 구절로 목숨을 건지는 장면은, 문학이 살아남는 방식이 도서관이 아니라 기억을 건네는 순간에 완성됨을 보여준다.

후반으로 갈수록 소설은 초반의 유쾌함을 걷어낸다. 시라쿠사는 승리했지만 패자도 승자도 전쟁에서 온전히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제목 '영광 없는 영웅들'은 다르게 읽힌다. 이 책의 영웅은 괴물을 죽이거나 나라를 구하지 않는다. 대신 음식을 가져다주고, 배우를 구하고, 밧줄을 던지고, 친구를 끌어올리고, 이야기를 기억한다. 역사가 기록하지 않는 영웅적 행위는 대개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오디세이>가 바다와 신, 운명이 펼쳐지는 거대한 귀향의 서사라면, <영광 없는 영웅들>은 채석장과 술집, 조그만 무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한쪽은 한 인간이 세계를 건너 집으로 돌아오고, 다른 쪽은 망가진 사람들이 잠시 서로의 고통을 바라본다. 그런데도 책을 덮고 나면 후자의 위업이 결코 작게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죽은 이를 기억하고 적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며, 때로 자기 자신까지 구해낸다. 그래서 이 고대 그리스 배경의 소설은 놀라울 만큼 지금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효율적이지 않아도 된다.
당장 세상을 바꾸지 못해도 된다.
망가진 세계에서 아름다운 것 하나를 만드는 일, 그것만으로 충분히 영광스러운 위업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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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 영원한 고전, 철저한 고증,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 <오디세이>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호메로스 지음, 김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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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를 읽고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괴물도 영웅담도 아니었다. 한 사람이 끝없이 헤매면서도 돌아갈 곳을 잊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오뒷세우스에게 이타카는 단순한 고향이 아니다.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 왕의 자리, 오래전의 이름이 있는 곳. 무엇보다 그가 다시 오뒷세우스가 될 수 있는 장소다. 그래서 이 작품은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잃어버린 자신에게 돌아가는 이야기처럼 읽힌다.

우리는 흔히 그의 10년 방랑을 포세이돈의 분노 탓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오뒷세우스를 가장 오래 붙잡아둔 것은 적대적인 괴물이 아니라 달콤한 것들이었다. 로토스를 먹으면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잊는다. 키르케의 섬에서는 1년을, 칼륍소의 섬에서는 무려 7년을 머문다. 괴물은 싸우면 되고 폭풍은 견디면 된다.
그러나 편안함은 다르다. 굳이 떠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조금 더 있어도 되지 않을까.”

우리를 삶의 방향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은 거대한 불행보다 이런 작은 목소리들이다. 아침 알람을 끄고 조금만 더 자고 싶은 마음, 오늘 하루쯤은 괜찮다고 자신을 설득하는 순간들. 그러다 문득 돌아보면 생각보다 먼 곳까지 떠밀려와 있다.

오뒷세우스는 완벽한 영웅이 아니다.
중요한 순간에 잠이 들고, 부하를 통제하지 못하며, 수많은 선택 앞에서 흔들린다. 12척의 배로 떠났지만 결국 고향에 돌아오는 사람은 그 한 명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때문에 그가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의 위대함은 길을 잃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다. 수없이 길을 잃고도 다시 방향을 잡았다는 데 있다.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칼륍소의 제안을 거절하는 순간이다. 그녀와 남으면 늙지도 죽지도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오뒷세우스는 영원한 낙원 대신 언젠가 죽어야 하는 인간의 삶을 선택한다.
삶은 유한하기에 소중하다. 끝이 있기에 오늘이 특별하고, 돌아갈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에 우리는 귀향을 서두른다. ‘가리는 자’라는 뜻의 칼륍소의 섬에서, 오뒷세우스는 세상으로부터 조금씩 잊혀간다.
그래서 귀향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이름을, 잊혀졌던 자신을 되찾는 일이다.

김헌 교수의 번역은 이 세계를 지나치게 매끈하게 다듬지 않는다.
마음이라 옮길 법한 표현을 ‘횡격막’으로, 분노를 ‘담즙이 치솟는다’는 식으로 살려낸다. 낯설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3천 년 전 사람의 몸과 감정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들은 몸 전체로 생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는 존재였다.

영화가 모험을 압도적인 이미지로 보여준다면, 원작은 그 모험의 의미를 묻게 한다.
왜 돌아가고 싶으면서도 자꾸 머물렀는지, 왜 인간은 불멸보다 유한한 삶을 선택하는지.

그래서 책을 덮고 나면 결국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당신의 이타카는 어디인가.
처음 품었던 꿈일 수도, 오래 잊고 지낸 사람일 수도, 어느 순간 놓쳐버린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다시 묻는 것이다. 나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모두 조금씩 오뒷세우스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돌아가야 할 곳이 남아 있다. 귀향은 장소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끝내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나 자신에게 돌아가는 일이다.

덧) 인생에서 한번쯤 고전을 읽어야 한다. 마침 영화 개봉과 맞물려 열풍이 일어나는 중이다. 슬그머니 동참해본다.
아직 늦지 않았다. 이왕이면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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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츠하우스 ANGST
강지영 지음 / 북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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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동에 있는 초고가 빌라 '프린츠하우스'. 겉으로 보면 부와 성공을 상징하는 곳 같지만, 강지영의 소설에서 이 집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람을 집어삼키고 그 안의 욕심을 부풀리다가, 결국엔 주인마저 지배해버리는 거대한 생명체처럼 그려진다.



주인공 선우는 부모님이 갑자기 사라진 뒤 이 집을 물려받는다. 자기가 집을 갖게 됐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반대로 그 집 안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다. 언젠가 집을 팔고 떠나겠다는 선우의 말도 어딘가 이상하다. 이미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게 느껴진다.



그러던 중 과거 이 집에 살던 집주인의 딸 전승아가 세입자로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인 오컬트 호러로 흘러간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냄새, 환청, 몸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감촉들이 이어지면서 읽는 내내 불안함이 쌓인다. 초반부는 뭔가를 직접 보여주기보다 감각을 슬금슬금 건드리는 방식이라 더 무섭게 느껴진다.



승아 몸에 깃든 건 여러 독한 생물들을 서로 잡아먹게 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하나에 원한과 독기를 몰아넣는 '고독(蠱毒)'이라는 것이다. 약한 게 강한 것에 먹히고, 그게 또 더 강한 것에 먹히면서 결국 가장 강한 하나만 남는 구조인데, 이걸 읽다 보면 프린츠하우스 자체가 딱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 좋은 집, 더 높은 자리를 향해 서로 밀어내다가 마지막에 남은 게 바로 이 집이 아닐까 싶어서다.



그런데 소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국 무속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구마사제 이사악이 등장하면서 가톨릭의 악마와 구마 의식 쪽으로 넘어가고, 결국엔 탐욕을 상징하는 악마 '마몬'까지 연결된다. 무당이랑 악귀, 구마사제가 한 이야기에 다 섞여 있으니 처음엔 좀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데, 뒤로 갈수록 왜 이렇게 여러 가지를 끌어왔는지 이해가 된다. 고독이든 악귀든 악마든, 결국 다 같은 거라는 얘기다.



이 소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설정은 '불티'다.

악마와 한번 접촉한 사람한테는 불티가 남는데, 이게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겨붙었다가 때가 되면 다시 살아난다.

이걸 그냥 무서운 설정으로만 보면 저주 이야기지만, 사람 욕심에 빗대어 생각하면 갑자기 확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남한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남보다 더 갖고 싶은 마음, 이미 가진 걸 놓치기 싫은 마음—그게 바로 불티인 셈이다. 더 소름 끼치는 건 악마가 항상 거짓말만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진짜 속마음, 그러니까 내가 애써 모른 척하던 욕심이나 열등감을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걸 그럴듯하게 포장해준다.



이 집엔 패닉 룸도 나온다.

원래는 위험할 때 사람을 지키려고 만든 공간인데, 소설 속에서는 오히려 과거의 비밀을 숨기는 곳으로 쓰인다. 스스로를 지키려고 만든 공간이 결국 진실을 감추는 곳이 돼버리는 이 아이러니도 이 작품이 하고 싶은 얘기랑 잘 맞아떨어진다.



<프린츠하우스>는 읽는 재미가 확실한 오컬트 호러다.

한국 무속과 서양 구마 의식을 섞어놓은 설정도 새롭고, 미스터리와 반전 덕분에 마지막까지 손에서 놓기 힘들다. 근데 다 읽고 나면 귀신이나 악마보다 좀 더 찜찜한 게 남는다. 귀신은 책 속에 두고 나오면 그만이고 악마도 허구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좋은 집 갖고 싶고 돈 더 벌고 싶고 지금 가진 거 잃기 싫은 그 마음은 이미 내 안에 있는 거니까 그럴 수가 없다.



작가는 귀신 들린 집 얘기를 하는 척하면서 결국엔 독자한테 자기 마음을 한번 들여다보게 만든다.



내 안에는 지금 불티가 얼마나 남아 있을까—이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 이 소설의 진짜 무서움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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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의 텔레패스
가미조 가즈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북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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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짧은 한 문장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대학 오컬트 동아리 모임에 마지못해 나간 카렌은 기리야마라는 학생한테서 어둡고 위험한 물속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섬뜩한 괴담을 듣는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흘려들었는데, 이틀 뒤부터 집에서 걸레를 바닥에 내리치는 것 같은 '철퍽'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비릿한 냄새가 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물웅덩이가 생기고, 무엇보다 그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이 소설이 진짜 무서운 건 괴물이 튀어나와서가 아니다. 제일 안전해야 할 우리 집이라는 공간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만든다는 점이다.

카렌이 결국 도움을 요청하면서 이야기는 '아시야 초자연현상 조사'의 하루코와 조수 고시노 쪽으로 넘어가고, 소설 분위기도 같이 바뀐다.
쫓기는 사람의 공포담이었던 이야기가 어느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를 파헤치는 미스터리로 바뀐다. 조사해보니 기리야마의 괴담을 들은 사람이 카렌 말고도 여럿 있었고, 다들 비슷한 일을 겪은 뒤 실종됐다는 게 밝혀진다.
사라지기 직전에 남겼다는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 이야기 내내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다.

이 소설이 진짜 재밌어지는 건 여기부터다.
하루코와 고시노는 초자연현상을 덥석 믿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조건 아니라고 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꾸민 일인지, 심리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정말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있는 건지 하나씩 따져본다. 괴상한 사건도 일단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원인을 찾아가는 두 사람 덕분에, 소설에는 공포와 추리물 특유의 재미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겉으로 보면 완벽한 저주 구조인데, 두 사람은 계속 "정말 괴담 때문에 사라진 게 맞아?"라고 물으면서 이야기를 끌고 간다.

괴담, 실종 사건, 초심리학, ESP처럼 서로 안 어울릴 것 같은 소재들이 한 이야기 안에 섞여 있는데도 산만하지 않다.
초반에 슬쩍 던져놓은 작은 단서들을 후반부에서 하나씩 다시 꺼내 쓰면서 이야기를 넓혀가는 구성이 좋았다. 무서운 대상도 계속 바뀐다. 처음엔 '철퍽' 소리가 무섭고, 그다음엔 기리야마라는 사람이 무섭고, 그다음엔 괴담 자체가 무서워진다. 그런데 읽다 보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지금까지 무섭다고 느꼈던 게 정말 이 사건의 핵심이었을까.

보통 호러소설은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무서움이 좀 가시는데, 이 소설은 하나 밝혀지면 그 뒤에 더 큰 질문을 하나 더 놔둔다.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이야기가 오히려 예상 못한 방향으로 커진다. 카렌 파트가 만든 서늘한 분위기와 다르게 하루코와 고시노가 나온 뒤로는 두 사람 특유의 티키타카가 적당히 숨통을 틔워줘서, 300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인데도 술술 읽힌다.

<심연의 텔레패스>는 귀신을 물리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해 안 되는 현상을 끝까지 들여다보고 거기 숨은 규칙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무서운데 동시에 미스터리이고, 초자연현상을 다루면서도 묘하게 이성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다. 평범한 집 안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 하나에서 시작해 생각지도 못한 큰 진실로 나아가는 이 소설을 덮고 나면, 조용한 방 안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혹시 누가 날 부르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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