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노화를 받아들이고 노년의 삶을 사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노년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법을 올바로 배워야 한다.(32)

그리스도인들은 몸의 부활로 풍성해질 그날을 고대한다.
그날이 오면 육체도 영혼도 근본적으로 새롭게 변화될 것이다.
그 소망대로 우리는 장차 변화된 육체 속에 다시 심어져 영원히 몸 안에 살 것이다.(52)

이 땅의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다른 모든 덕과 더불어 열정을 가꾸어야 한다.
적어도 자신의 생각을 의식적으로 집중하고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래야 한다.(85)

우리 노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볼 수 있다.
외롭고 우울한 사람들의 말벗이 되어 격려할 수 있다.
마음이 상한 사람들, 여태 아물지 않은 원망과 분노와 상처로 약해진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108)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있게 하라라˝(요14:2-3)

평생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고 나누는 늙은 전도자가 되게 하소서~~

은사는 노인이 된다고 해서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지 않아 무디어질 뿐이라고 한다.

상실과 곤란에 이르기전까지는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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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말에는 간극이 없다.
말이 곧 몸이고, 몸이 곧 그녀의 삶이다.

<호모큐라스, 고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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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잠시 위장된 선, 위선적인 위조 인물)

˝가면을 쓴다는 것˝은 사람의 자연적 형태를 따로 제쳐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이나 문제를 일시적인 기술로 덮는다.

그러나 거짓은 빨리 본성으로 돌아간다.

가장해서 속빈 겉치레나 위선적인 말과 외양으로 지속적인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매우 실수하는 것이다.

참된 영광은 깊이 뿌리를 박고 그 가지를 넓게 펼친다.

그러나 모든 가장들은 연약한 꽃들처럼 이내 땅에 떨어지며 위조된 것은 어떤 것도 지속될 수 없다.

지금 시대에도 정직의 외양과 가면을 썼으나, 속의 악덕이 뚝뚝 떨어지는 인간 괴물들이 있지 않은가?

가면을 쓰고 연기를 판 자들이 연기로 망할 때가 올 것이다.

덕이 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덕의 지속적인 가장도 쉽지 않다.

[제1권, 제1장 중에서 요약]



사람이 사람을 계산해서 적극적으로 이용하거나 이용하려는 의도의 가면을 쓴 사람들을 보거나 눈치 챘을 때, 그 참담하고 섬찟했던 순간은 잊혀지질 않는다.

사람과의 관계를 자신을 욕망의 수단으로 삼거나 탐욕의 자리로 이끌려고 할 때, 이 땅에서는 어떤 선한 것도 없을 뿐더러 지속적인 것은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그럼에도 어쩌면 여전히 속고 있는지도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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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실천으로서의 관용

정치적 덕목

˝권좌에 있는 자들에게 충고하기란 어렵다.˝

˝좋은 충고는 왕의 친구에게는 희생이 크다.˝

고삐 풀린 방종을 왕의 진짜 위엄과 동일시하는 자들은 이성에 따른 삶을 결코 왕같은 것으로 생각치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타인의 권위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굴욕적으로 여긴다.

따라서 그들의 법과 그들 자신의 관습, 아니 그보다는 그들 자신의 변덕에 의해 살아간다.

그들은 방해꾼을 조용히 참아낼 수가 없다.

오만함은 지속적이고 천부적인 악처럼 심겨 있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통치자의 통치 윤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의의 실천 과정에서 불의를 제거할 때, 사악한 자들을 처벌하는 것보다 선한 자들에게 언제나 안전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통치자의 잔인성과 야수성은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한 요소다.

통치자의 위엄은 많은 사람들에게 두루두루 안전을 제공하는데 있다.

이따금 정의의 엄격성을 가장한 잔인성이 있다.

가혹함은 정의를 가장하고 잔인함이 정의를 위한 열정으로 보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잔인함은 관용의 부족이고 엄격함의 과잉일 뿐이다.

사실 자신들을 계속 점검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하지만 선한 양심을 되풀이하여 점검하는 것은 기쁜 일이다.

˝사람이 그들이 원하는대로 할 가장 큰 허용이 주어질 때, 자제하기란, 다시 말해 욕망에 고삐를 당기기란 어렵다˝

ᆢ서론~제1권, 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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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 어르신은 역시 끄는 힘이 강렬하다.

익숙하지 않은 내용(칼뱅의 인문주의와 정치 윤리)이지만 시작부터 붙들린다.

성마른 시절이기에 더욱 그러한지도 모르겠다.



˝칼뱅의 학문적, 문학적 토양과 취향은 오늘날의 인본주의나 계몽주의 이후 휴머니즘과는 차원이 다르다.

16세기 기독교 휴머니즘은 신앙과 교회의 갱신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칼뱅의 인문주의적 태도는 회심 이후에도 여전했는데, 가장 뚜렷한 표지는 `성서가 철저하게 수사학적 문헌이며 해석의 작품이라는 그의 인식` 때문이다.

한편 칼뱅은 `관용`을 정치 사회 윤리의 최고의 미덕으로 꼽았다.

한 사회가 누려야 할 자유와 그것이 지켜야 할 정의에 관심을 보였다.

관용은 정의 이념의 실천적 측면이며 사랑의 관계 속에 있다.

그렇다고 관용이 처벌의 사면이 아니며, 범죄자들이나 위험 인물들을 위한 일종의 피보호권도 아니다.

곧 자유, 정의, 사랑은 그의 윤리의 바탕이다.

자유를 적당히 사용하라고 권면했다.
자유가 신중하게 통제될 때, 모두에게 축복이라고.

자유가 남용될 때, 다른 사람에게 고집스럽고 짐이 된다고.

정당하게 판단하는 사람은 정의와 긍휼을 갖는다.

정의를 통해서 위대한 판단을 내리고, 긍휼을 통해서 부드러운 처벌을 내린다.

공평을 통해 징계하고 긍휼을 통해 용서한다.

정의는 처벌하고 징계하나 긍휼과 용서는 사랑의 영역이다.

이로써 관용은 정의와 사랑과의 관계성 속에 있다.

그러나 이 관용이 동정심이어서는 안 된다.

동정심은 엄격함의 부족이요 관용의 과잉이다.

칼뱅의 정치 사회 윤리는 종교개혁자가 된 후에도 여전하다.

물론 훗날 칼뱅의 윤리가 정의의 엄격함에 다소 기울어지는 면을 간과할 수 없다.

인간의 부패한 본성과의 싸움 때문이다.˝

# 칼뱅의 인문주의와 정치 윤리, 서론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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