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땅의 시인, 소설가, 평론가, 국어교사들이 한뜻이 되어 국어시험을 바꾼다면. 그런 날이 온다면. 공감각적 심상, 은유법 따위를 묻지 않고, 이 부분이 발단인지 전개인지 묻지 않고. 아니 더 끝까지 밀고나가보자. 문학을 재료로 정답을 묻는 일이 없도록 하는 거다. 읽고 느끼고 나름으로 이렇게저렇게 생각해보는 거지 한용운 시의 임은 조국이라고 해석해주는 참고서를 따르는 일은 없는 거다. 가장 감수성이 풍부할 시기에 교과서에 실린 시와 소설을 꼴보기 싫어하고 더불어 다른 책을 펴보지도 않다가 시험과 관계없어진 다음에야 겨우 눈이 떠지거나 아니면 살기 바빠 아예 눈을 뜨지도 못하고 한 세상 마감해야 하는 처지. 슬프다. 단순하게 비관적으로 나는 상상한다. 수능과목 언어능력은 맞춤법 정도만 묻기를. 아니면 아예 없애버리기를.

 

300쪽짜리 책인데 혹시 이조차 다 읽기 귀찮은 사람이 있다면 세 꼭지만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11.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소리도 없이 12. 깨끗한 기침, 순수한 가래  그리고 5 그대 등 뒤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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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사람은 매순간 변한다. 변함은 성장일 수도 퇴화일 수도 있다. 멈춰있는 건 죽은 거다. 그러니 성장소설이란 없다. 그냥 소설이 있을 뿐이다.

 

2. 술집에서 술을 먹다가 쫓겨났을 때 그 술집을 미성년자를 받는다고 신고하는 것. 가출해서 아파트 옥상 계단에서 지내면서 우편함을 뒤지거나 집 문고리에 걸려있는 우유를 꺼내먹는 것.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를 철제 의자로 내리쳐서 어깨뼈를 부러뜨리는 것. 마음에 들지 않는 친구의 목에 식칼을 꽂아넣는 것. 어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인가.

 

예전에 내가 운영하던 가게 옆에 술집이 있었다. 허름한 곳이었다.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그렇듯 대출을 받아 시작했고 근근이 꾸려나갔다. 가끔 미성년자들이 왔는데 대개는 돌려보냈고 어떨 땐 당장 들어올 돈이 아쉬워서 받기도 했다. 어느날 가방에서 꺼낸 안주로 술을 먹던 미성년자들을 쫓아보냈고 그들은 술집을 신고했다. 미성년자 받는 술집이 있어요.

 

"나한테 무슨 원수 졌냐."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우리에게 접근할 수 없도록 경찰은 사장의 두 팔을 잡았다. 어깨를 눌러 의자에 앉혔다. 신고자의 신분이 되자 우리는 병신 취급을 받지 않았다. 병신이 된 건 사장이었다. 사장은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우리는 아무 처분 없이 풀려났다. (p 27)

 

영업정지 기간 동안 단골은 다른 가게로 갔고 정지가 풀린 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대단한 술집도 아니었으므로 당연한 거였다. 결국 몇 달 후 가게는 문을 닫았다. 사장에게 남은 건 빚뿐이었다.애초에 미성년자를 받은 사장이 잘못이다. 그리고 그 미성년자들의 신고가 아니었더라도 장사가 안 되어 접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근근이 꾸려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울 것 같은 사장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3. 대학소설상이 왜 필요하냐며 반신반의했다가 지금은 "세월이 남기는 상처와 상처가 선물하는 깊이에 크게 힘입는 장르"라서 문학에서 체급의 필요성을 인정한다고 신형철은 적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왜 대학소설상인가. 차라리 이십대소설상이라 부르지.

 

4. 소설은 좋다. 대학소설, 성장소설이라 이름붙은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을 이해하지 않으면서 마음껏 욕하면서 시원하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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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떠나는 남자
로랑 그라프 지음, 양영란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누가 그럴 수 있겠어요. 여행할 꿈을 꾸면서 철저히 여행 준비를 하지만 절대로 지금 이곳을 떠나지 않았던 갑갑한 한 남자의 삶을 비난, 혹은 가여워할 자 누구일까요. 떠날 것이기 때문에 사는 곳을 임시 거처로 여기죠. 하여, 세들어 사는 집에 못도 하나 안 박고 제대로 된 침대도 없이 삽니다. 혀를 찰 건가요? 그러지 마세요. 파트릭은, 나름 잘 살았습니다. 카지노에서 일하고 퇴직하고 어느날 모아두었던 돈을 들고가서 룰렛 테이블에 몽땅 걸죠. 한 판에 말이죠. 일확천금을 노린 것도 인생이 허무해서도 아니에요. 그냥 살았던 거예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살려 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태어나버린 아들의 존재도 그의 인생을 바꿔놓진 못해요. 그는 그냥 그대로 에스페랑스 호텔 11호실에서 살아갑니다. 죽어 뼛가루가 된 다음에는 우주로 떠나게 되지만 그건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어요. 죽음 이후에 그토록 원했던 여행을 이루었다고 누군가는 말하더군요. 글쎄요. 그걸 그렇게 해석한다면 파트릭의 삶은 결국 그토록 원하던 걸 이루지 못한 보잘것 없는 게 되어버리지 않을까 싶어 주저됩니다. 그대로도 괜찮지 않았나요. 여행, 그거 꼭 가야하나요. 안 가면 어때요. 여행을 떠나고 싶어하고 여행 준비를 하면서도 지금 여기의 삶을 누리면 되죠. 뭔가 부족하고 부족한 걸 채우고 싶어하는 모자란 인간, 그 모자람이 좋습니다. 자신의 뼛가루를 들고 달나라여행을 떠난 아들에게 죽은 파트릭이 한 마디 할 기회가 있다면 뭐라 했을까요. 잠시 파트릭이 되어 짐작해봅니다. 곰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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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나날>은 소설 제목이다. 그리고 이 소설 주인공이 35세부터 입주해 살고있는 양로원 이름이다. 주인공 남자가 행복한 나날에서 지낸 시간들이 행복한 나날이었던 것처럼 (그랬기를 바란다) 이 소설을 발견하고 읽은 시간은 내게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래는 모두 옮겨적은 글이다.

 

열여덟 살에 나는 대체로 평범하다 싶게 인생을 메꾸는 그렇고 그런 일들, 예를 들어 연애나 일, 이상과 야심, 실망과 권태 등을 모두 겪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어린애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험이었겠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존재의 기쁨과 환멸을 겪었으면, 그 정도면 인생에 대해 나름대로의 견해를 갖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라면 앞으로 인생은 더 이상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그 어떤 '놀라운' 경이로움도 주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런 야심도 없이 체념한 채 살기로 결심했으며, 앞으로 닥쳐올 일들에 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다음 나는 구청으로 갔다. 거기서 나는 묘지 임대 담당직원을 만났다. 이렇게 해서 나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생애 최초의 자동차를 구입하는 나이에 내 묘지를 사기로 결정했다. 나는 하나의 돌로 나의 인생을 구획 짓고 싶었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마친 후 나는 대학에서 설렁설렁 한량처럼 공부를 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내 무덤을 찾았다.

 

나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유일한 목적, 즉 여자를 자기 침대로 끌고 가기 위해 치뤄야 하는 복잡한 절차에 도통 흥미가 없었다. 그뿐 아니라, 만년 고등학생 식의 유치한 사랑놀음 따위는 지긋지긋했으므로 하루 속히 결혼을 해서 더 이상 여자타령일랑은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랐다.

 

몇 달 동안 실속 없는 탐구를 계속한 끝에 마침내 나는 나랑 비슷한 나이에 가난하고 수줍음 많이 타며, 결혼을 원하는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는 위대한 사랑이 있다고 믿었으며, 어리석게도 내가 그 사랑을 이루어줄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 필요가 없었다. 여자 스스로 곧 알게 될 테니까. 그 점만 뺀다면, 여자는 그다지 요구 조건이 까다롭지도 않았고, 머릿속이 복잡하지도 않았으며, 자기에 대한 나의 감정이 진실하다고 확신을 시켜주는 한 아주 작은 것으로도 만족할 줄 알았다.

 

한 번 더 나는 내 운명을 앞질렀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떠나기로 결심했음을 알렸다. 나는 아열대지방 같은 곳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고요함과 평화를 원했으며, 생활과 붙어다니는 번거로운 일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다. 나는 삶의 표면 위에서 물결 이는 대로 천천히 부유하고 싶었다. 물 위를 떠다니다가  집 안에 틀어박히고 싶었다. 그래서 서른다섯 살에 나는 양로원에서의 삶을 택했다.

 

나는 양로원 측에서 기획하는 단체 외출과 공연 관람을 제외하곤 가능한 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한다. 스스로에게 최소한의 오락만을 허용함으로써 어떤 진실에 도달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늘 벤치를 좋아했다. 벤치는 은퇴의 상징이며, 세상과의 거리감, 평화스러운 가장자리의 상징이다. 벤치는 바깥세상을 관찰하는 특혜 받은 자리이며, 피난처이고, 멈춰 설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다. 나는 벤치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면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멋진 벤치도 있고 얄궂은 벤치도 있다. 벤치는 그 놓인 자리만으로도 많은 것을 상징한다.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은 더 이상 현실 세계에 속하지 않거나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이다. 이 단순한 좌석 하나가 그에게 시인의 자격을 부여하기도 하고 시야를 넓혀주기도 한다. 폭풍우나 소요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그건 바로 벤치다.

 

여자는 특별한 점이 전혀 없는, 나이와 외모 때문에 하나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되어버린 노인, '이전에' 이렇다고 내놓을 만한 삶을 살았던 것 같지 않은, 마치 아무런 역사도 지니지 않은 것 같은 그렇고 그런 노인이었다. 여자의 주름은 시간의 흔적이라기보다 과거도 없고 미래라고는 임박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인 현재 상태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식일 뿐이었다. 여자는 오늘 드러나 보이는 모습, 늙음으로 고착되어버린 그 모습, 더 이상 다르게 생각되어질 수 없는 그 모습으로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수많은 인생 중 하나인 자기 인생을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 속에는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뻔하고 애절한 내용밖에 없었지만 나는 매우 관심 있는 척하면서 예의바르게 그 얘기를 들었다. 나는 마치 전쟁터에서 가까이 마주친 적군의 얼굴을 보면서 느낄 연민의 정을 이따금 느꼈다.

 

죽음이 임박해오면 그때까지 사용해오던 가면이 부서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완전히 부서지지는 않는다. 백 퍼센트 솔직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은 살면서 체득한 온갖 계략과 거짓말로 무장한 채 마지막 순간까지 싸울 것이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인간은 점점 밝혀지는 진실에 대항해서 어리석기만 한 체면을 세우려고 전전긍긍할 것이다. 인간은 진실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며 진실에 복종하기보다 그럴 듯한 외관을 유지한 채 죽는 편을 택하리라.

 

나는 그녀에게 아침인사를 건네고 창가로 가서 눈 덮인 공원을 바라보았다. "커튼을 걷어드릴까요? 죽기에 딱 좋은 날씨같지 않아요?"

 

사람들은 내가 신랄하고 잔인하다고 비난하거나 감정과 인간성이 메말랐다고 나무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되기까지 내가 기울였던 노력이나 내가 겪어야 했던 고통, 나로 하여금 그렇게 되도록 만든 필연성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신랄함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비참한 삶의 조건 뒤에 감추어져 있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즉 인간의 심장을 절개하고, 내장을 꺼내는 수술을 감행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 간 속에 깃들어 있는 인간을 찾아내기 위한 작업. 감정을 배제하고 냉정하게 바라보는 외과의사의 관점만이 나의 정신나간 연구에 필수불가결한 자유로움과 거리감을 유지시켜 줄 수 있다. 나의 이 같은 신랄함으 가장 큰 피해자는 아마도 나 자신일 것이다. 나는 인간에 대한 범보편적인 견해를 도출해내기 위하여 내 사생활을 희생시켜가며 나 자신을 임상표본으로 기꺼이 바친다. 나는 모든 쾌락을 배제하고 오로지 종말을 지켜보기 위해 행복한 나날에서 체류함으로써 인간의 삶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현재로서 나는 아직 납득할 만한 고상한 의미를 알게 해줄 숨겨진 보물 같은 그 무엇인가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인간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평가를 하거나 인간이 지니지도 못한 장점을 인간이 지닌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사람은 항상 추잡하게, 부조리하게 죽기 마련이다. '삶의 신비'에 대한 의문을 송두리째 남기고 죽기 때문이다. 종족의 지속과 신비를 유지한다는 이유 외에 우리의 삶을 정당화할 수 있는 만족스러운, 아니 최소한 고무적이라고 할 만한 그 어떤 대답도 얻지 못한다.  위안치고는 너무 빈약하고 그렇기 때문에 매몰차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으므로.

 

평생 나는 나를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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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은 가독성은 뛰어나나 그게 전부였다. 사기가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야 말해 뭐하겠나만 그저 그뿐. 게다가 개과천선한 인물이라니, 흠....

<이와 손톱>은 가슴 두근거릴 만큼 재미있었다. 재판 과정이 있고, 논리적 추리가 있다. 개인적 취향인데 재판 과정이란 게 속 터질 정도로 답답하면서도 은근 재미있다. 아무 단서도 없는 듯한 상황에서 아주 가느다란 실마리를 발견해서 차근차근 집요하게 범인에게 접근하는 과정, 좋다. 사법적 징벌이 아닌 개인적 복수는 금기지만, 마술사의 복수는 사는 힘이었다. 몰두함으로써 더 이상 헤매지 않게 되는 거지. 범인도 참 놀라웠다. 입맛에 딱 맞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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