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아버지에게서 한 방울 한 방울 새어나가고 있다. 아버지의 인품이 아버지라는 사람에게서 한 방울 한 방울 새어나가고 있다.
치매 환자와 같이 지내면 상실을 보는 안목이 날카로워진다. 노년은 그 무엇도 되돌려주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진실이다. 노년은 일종의 미끄럼틀이고, 노년이 안겨주는 커다란 걱정거리 하나는 그것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후에 몇 시간 아버지를 돌봐줄 사람을 찾았다. 이웃집의 릴리안네에게는 믿고 부탁할 수 있었다. 릴리안네와 함께 아버지는 '화내지 마' 게임을 하고 산책을 하고 나들이를 다녔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요양원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낮시간을 보냈다. 그곳엔 우르줄라 형수가 모셔갔다. 여동생 헬가는 주말을 책임졌고, 남동생 베르너는 집과 정원을 건사했다. 어머니와 나는 빈에서 틈나는 대로 며칠 아니면 몇 주씩 다니러 와서,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한숨 돌리도록 모든 일을 떠맡았다. 모두가 절망하지 않고 각자 능력껏 힘닿는 데까지 나름대로 새로운 상황에 대처했다.맹세컨대 모두가 할 일이 있었고 삶이 다시 좀더 단순해지길 바랐다. 분담을 하긴 했지만 애초에 기운 빼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정신은 더는 온전치 않았다. 아버지는 배고 고픈지 목이 마른지도 몰랐다. 평소대로 먹고 마시는 것이 '전혀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한번은 앞에 놓인 접시의 빵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매일 아버지와 함께 지내다보니 허구 속에서 사는 듯한 느낌이 점점 더 자주 들었다. 불완전한 기억과 망상, 그리고 아버지의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것과 환각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낸 생각들, 이 모든 것에 우리는 적응했다. 우리가 함께 머무르는 유일한 곳은 아버지가 인지하는 세상이었다.
옛 관습을 염두에 두면, 가까운 가족을 요양원에 보내기로 결정할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 몇 년 동안 모든 것이 병든 아버지 중심으로 돌아갔다. 사실상 밤낮으로 아버지에게 매달린다는 것은 충분히 힘든 일이었다. 감당할 수 있는 한계는 이미 넘어섰다.
번역자의 말에 이런 게 있다. "따사한 보살핌과 위로만 있으면 치매에 걸린 사람도 인생의 즐거움과 품위를 누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르노 가이거는 치매에 걸려서도 기지와 품위를 잃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알츠하이머는 흔히 고통, 상실, 혼란, 갈등을 연상시키지만, 잃은 것만 아니라 얻는 것도 있으며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아주 절망적이지만은 않음을 보여준다. 알츠하이머는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을 다시 한자리에 모으기도 하고, 소원했던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새롭게 이어주기도 하고, 세상과 삶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