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페터 슬로터다이크 지음, 이덕임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7년 5월
평점 :
품절


분노에 대한 철학적 담론!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전체주의는 분노를 어떻게 다루어 왔는지, 오늘날 과격한 테러를 일삼는 극단주의 이슬람의 분노의 본질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겠다 싶어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이 책을 통해 분노가 어떻게 역사 발전과 변화의 중심 동력이 되었는지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처음 80페이지에 달하는 긴 서문을 읽으며 좌절했다. 지금까지 어려운 책을 읽을 때, 한번 읽어서 이해가 안 되면 내가 지식이 부족해서 그러려니 하고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 번 읽으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아니다. 읽고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아 다시 읽어도 감도 잡히지 않는다. 난해한 번역에 대해 분노가 생긴다. 어쨌든 오기가 생겨 다시 읽어볼 요량으로 저자의 프로필을 살핀다. 저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칼스루에 조형대학에서 미학 및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란다. 거기에 적혀있는 문구를 오래 생각해 보았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분노를 발전과 변화의 중심 동력이라고 말한다. …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20세기 전체주의는 분노를 모으고 조직함으로써 경제적으로 활용하고 거대한 이데올로기로 변모시킨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심호흡을 하고 다시 책을 펼친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종교, 철학, 정치 집단들이 분노를 사용해 무엇인가 역사의 흐름을 주도했다. <일리아드>의 첫머리도 이렇게 시작한다.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이 문장에서 어떤 비극적인 엄숙함이 느껴진다. 고대의 영웅들은 자신들을 분노하는 신의 팔다리로 느낀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분노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저자는 분노를 ‘티모스’라는 그리스어와 연결시킨다. 티모스(Thymos)는 자아 분출 에너지, 자존심,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등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구가 성립할 것이다. ‘나는 불만을 느끼며 분노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기독교 성서에 따르면, 하나님은 동생 아벨을 죽인 형 카인에게 말씀했다. “어찌하여 너는 격노하느냐, 어찌하여 네 안색이 그리 변하느냐” 결국 카인은 동생을 죽인 죄의식으로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카인의 표’란 피로 원수를 갚던 사람들에게 경고의 신호일 수도 있다. 분노하며 복수하려면 일곱 배에 달하는 복수를 당할 수도 있다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 기독교는 분노에 관해 이런 메시지를 전함으로, 좀 더 합리적이고 정의로는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가? 기독교는 분노하는 신이라는 개념 아래 자연스럽게 지옥도 가르친다. 그러나 과연 분노(심판)하시는 신과 지옥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을 정의롭게 살도록 할 수 있을까? 한편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분노를 어떻게 이용했는가?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분노를 에너지로 이루어졌다. 자본주의도 나름대로 분노를 이용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확실히 저자의 주장처럼 인류 역사는 ‘분노’라는 에너지에 의해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 표지에도 있는 구호 같은 문구가 강렬하게 다가온다. “기억하라. 분노하라 그리고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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