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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준열의 시대 - 박인환 全시집
박인환 지음, 민윤기 엮음, 이충재 해설 / 스타북스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박인희가 부른 <세월이 가면>을 통해 나는 대학시절 시인 박인환을 처음 알게 되었다. 기타를 튕기며 불렀던 그 노래 가사를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 바람이 불고 / 비가 올 때도 / 나는 / 저 유리창 밖 가로등 /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 그 벤치 위에 / 나뭇잎은 떨어지고 / 나뭇잎은 흙이 되고 / 나뭇잎에 덮여서 / 우리들 사랑이 / 사라진다 해도 … ”(pp. 79~80). 술 한 잔에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괜스레 슬픔에 젖어 한참을 동숭동 거리를 걷곤 했다. 그 때는 대학로가 따로 조성되기 전, 정말 가을이면 한적했다. 동시대 시인들이 그를 “서구적인 것에 경도된 경박하고 값싼 유행의 숭배자”(p. 234)라고 경멸했어도 나는 박인환이 좋았다. 그 감상적이고 허무적인 색채를 띤 시구들이 한없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당시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에서는 자주 <목마와 숙녀>가 낭독되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 …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 … /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 /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 인생은 외롭지 않고 /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 … / 가을바람 소리는 /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p. 81~82). 그 시절에는 약간 퇴폐적이란 인상을 주었던 이 시 때문에 버지니아 울프가 누군지 찾아보기도 했다.
청년시절 내가 사랑했던 시인. 이 두 시외에는 알지 못했던 시인의 모든 시를 묶어 <검은 준열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박인환전(全)시집’이 나왔으니, 어찌 관심을 갖지 않을까. 이 시집에는 박인환의 시가 주제별로 정리되어 있다. 사회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작품, 전쟁이후 소시민의 풍경을 보여주는 작품, 미국 여행 체험을 반영한 작품, 고향과 계절과 자연을 노래한 서정적인 작품 등이다. 해설자인 이충재 문학평론가는 박인환을 ‘주류 문단의 희생양’(p. 235)이라고 말하며 그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작품은 전후(戰後) 문학으로, 시대적 상황에서 나온 회의와 문명을 향한 비판이 담겨 있다. 전후문학 시인들은 새로운 세계를 동경하며 작품들을 썼다. 이 책 앞부분 ‘박인환 시를 위한 여행’(pp. 10~31)을 읽으면서 시인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 뒷부분의 ‘해설-박인환의 시에 대하여’(pp. 233~243)는 시인과 그의 시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시인 이상(李상)을 사랑해서 ‘이상 추모의 밤’을 개최하고 삼일의 폭음 끝에 사망한 시인, 그래서 그의 ‘전(全) 시집’은 너무나 분량이 적다. 삽 십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은 시인을 생각하면 내 젊은 날의 추억도 아련히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