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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주의 선언 - 좋은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문광훈 지음 / 김영사 / 2015년 2월
평점 :
우리는
<선언(Manifesto)>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인권선언>은 인권에 최우선의 관심을,
<독립 선언>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이 담겨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선언(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을 통해 부르주아지의 횡포 아래 고통당하는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문광훈의
<심미주의 선언(Manifesto for Life Aesthetic)>은 무엇을 추구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좋은 삶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삶은 먼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예술과 철학을 통해 자기기만의 가면을
벗을 수 있다고 봅니다. 문광훈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최후의 심판>에서 묘사한 ‘성 바돌로메’가 들고 있는 ‘가죽’에 집중합니다. 그
‘가죽’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허물입니다. 허물을 벗는다는 것은 가면적 삶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작을 갈망한다는 뜻일 겁니다.
깊이를
상실한 감각적인 글들만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문광훈의 <심미주의 선언>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성찰적인 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분명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때만 우리는 좋은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푸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말합니다. 특히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에 대해 글은 이 책의 압권입니다. 문 교수에 따르면, 공재는 ‘염정자수(恬靜自守)’, 즉 ‘담담하고 고요하게
자기 자신을 지킬’ 줄 알았습니다. 그의 자화상을 보면, 공재의 눈빛에서 현실의 불운과 어리석음을 직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공재는
푸코의 말처럼 ‘매일매일 불운을 연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광훈은
예술이 지금 현실의 삶을 쇄신하는 데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도대체 존재의 의미가 있는지 묻습니다. 그런 점에서 문광훈의
‘심미주의(aestheticism)’는 보들레르의 ‘심미주의 내지 유미주의’와는 다릅니다. 예술의 경험은 값싼 취향의 과시가 아니라 지금 현실의
삶에서 자신의 삶의 양식(style)을 만들어가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힘주어 말합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개인이 자기 물음으로 돌아가
자신의 삶을 살아내도록 도전하고, 그것이 결국 이 사회가 내면적으로
성숙해지는 일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책에 함께 끼어 있는 ‘별책부록’은 저자 문광훈과 편집위원 박광성의 대담입니다. 그들의 대화 속에서 저자의 저술 의도가 잘 드러납니다. 문광훈은
시와 예술을 통해 개인과 사회는 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의 삶과 연결시켜줄 수 있는 인문학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바로 심미적 방법이고 생각합니다. 정말 멋진 인문학을 접했습니다. 내가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해 놓친 부분도 많을 것입니다. 그래도 저자와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나는 나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가야 하며, 예술이라는 간접적 언어로 나 자신의
삶을 날마다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불행도 연습하며, 고요히 자신을 지키는 염정자수(恬靜自守)의 삶을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