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줄이고 마음 고요히 - 옛시에서 말을 긷다
흥선 지음 / 눌와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참 편합니다. 흥선 스님이 오래 전부터 박물관 홈페이지에 연재했던 한시와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글들을 묶어 놓았습니다. 절집 오랜 생활에서 우러나온 글들이라 수다스럽지 않고 담담합니다. 그러면서도 깊은 샘에서 길어 올린 생수처럼 마음을 시원하고 맑게 해줍니다. 지루한 장마와 폭염이 계속되는 이 여름에 읽기에 제격입니다.

  일이 많아 휴가도 미룬 채 사무실에 출근합니다. 모두가 떠난 한적한 서울, 사무실에 있으니 ‘여기가 진짜 피서지네’하고 위안하지만 한편으로는 약간 서글퍼지는 것은 왠일일까요? 이신(李紳)의 시(詩)가 위로를 주네요. “김매는 한낮 / 땀방울 포기 아래 흙을 적시네 / 뉘 알랴, 상에 오른 이 밥 한 그릇 / 알알이 농부의 땀방울임을”(p. 112). 농부처럼 여름에 땀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기에 이 세상은 행복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침에 사무실에 들어가면 실내온도가 벌써 27도를 넘어섭니다. 거의 30도까지 에어콘을 틀지 않고 선풍기로 버티며 일을 합니다. 한전이 전력비상체계에 들어섰기 때문이 아닙니다. 에어콘 바람을 조금 오래 쐬면 살이 아린 듯해서 에어콘을 멀리하는 편입니다. 점심 후 불볕더위에 야외에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곧장 사무실에 들어와 하는 수 없이 에어콘을 틉니다. 그리고 짬을 내어 이 책을 펴들고 옛 시 몇 편을 음미하며 스님의 글들을 읽어봅니다. “별원 깊어 대자리 시원도 하이 / 드리운 발 너머로는 환한 석류꽃 / 솔 그림자 마당 가득 바야흐로 한낮인데 / 낮잠 째자 이따금 흐르는 듯 꾀꼬리 소리”(p. 91). 나는 어느새 솔 그림자 드리운 계곡 근처에 돗자리를 펴고 시원한 바람을 즐기고 있습니다.

  이규보의 <여뀌꽃과 백로>라는 시가 재미있네요. “앞 여울에 물고기 많기도 하여 / 생각없이 물결 헤치며 들어섰다가 / 사람 보자 깜짝 놀라 날아올라서 / … / 목을 뺀 채 사람 가길 기다리느라 / 가랑비에 하얀 털이 촉촉이 다 젖도록 / 마음은 여전히 물고기에 있건만 / 사람들은 말하지, 세상 잊고 서 있다고”(p. 102). 흥선 스님은 이규보의 또 다른 시를 소개합니다. 이번에는 물고기 입장에서 쓴 글이네요. “조심조심 붉은 고기 잠겼다 떠올랐다 / 사람들은 말하지, 마음대로 노닌다고 / 생각하면 잠시도 한가한 때 없으리 / 어부 겨우 돌아가면 백로가 또 엿보니 …”(p.103). 나만 바쁘고 분주하고 다른 사람들은 유유자적하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은 지나치게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쉽지는 않지요. 그래도 타자(他者)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키우면 삶이 그렇게 팍팍하게 느껴지지는 않겠다 싶습니다.

  춘(春), 하(夏), 추(秋), 동(冬), 네 꼭지로 옛시들을 묶어낸 이 책은 사실 사계절용입니다. 각 꼭지 첫 장은 사진을 찍어 반으로 접어 감추어 두었습니다. 일부러 펼쳐 읽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이 또한 분주한 마음을 가라앉혀 주네요. 봄은 초록, 여름은 파랑, 가을은 갈색, 겨울은 빨강 색으로 옛시를 풀어 놓은 것에도 세심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책 뒤편에 손글씨 엽서로 옛시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엽서 한 장을 한 페이지에 크게 실어 책 중간 중간 삽입 했더라면 그 멋스러움을 조금 더 느낄 수 있었겠다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