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드리 노니다가 - 라종일의 탐미야담, 1983년 어느 가을밤, 젊은 정치학자 마음에 깃든 옛이야기
라종일 지음, 김철 옮김 / 헤르츠나인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삼국유사에 수록된 <향가>하면, 대표적으로 헌화가(獻花歌)와 구지가(龜旨歌) 그리고 저 유명한 처용가(處容歌)가 떠오릅니다. <헌화가>는 한 노인이 아름다운 수로부인에게 꽃을 바치는 노래이며, <구지가>는 임금이 없던 시절 백성들이 임금을 맞이하기 위해 부른 민중의 주술적인 노래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라종일은 두 향가를 연결해서 용과 미녀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용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여인을 경외하고 숭배한다는 사실에 분노합니다. 오직 자신만이 사람들의 숭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용은 여인을 납치합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여인은 수많은 군중을 모여들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닷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녀가 사라짐으로 더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용은 인간의 소원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면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여인을 포기합니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여인은 사람들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저자가 만들어 낸 이야기에는 용과 싸우는 영웅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바닷가에 모인 민중의 모습이 보입니다. 민중 앞에서 권력가를 상징하는 용은 슬그머니 여인을 돌려보냅니다. 주술적으로 임금을 맞이하는 <구지가>가 아름다운 여인에게 꽃을 바치는 <헌화가>와 엮여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로 변했네요. 작가의 탐미적인 상상력이 빛을 발합니다.

<처용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습니다. 통일신라 사회의 정치적 도덕적 퇴폐를 보여주는 은유, 혹은 지방 귀족과 중앙 귀족 간의 권력 투쟁의 표현, 혹은 무당 처용이 역신을 쫓아내기 위해 부른 노래 등등. 저자는 이런 학설에 별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오직 탐미적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저자는 처용을 혼자서 호랑이를 해치운 용맹한 남자라고 상상합니다. 용감한 자가 아름다운 아내를 얻는다는 말처럼, 처용은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처용은 외로웠습니다. 그는 애욕의 허망함을 깨닫고 탐욕과 집착을 벗어던집니다. <처용가>를 이렇게 해석하다니, 참신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분 같습니다. 고대 향가를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로 엮은 그 파격적인 상상력에 존경의 박수를 보냅니다. 살짝 아쉬운 점은 본래 이야기를 앞에다 싣고 다양한 학설을 간략히라도 소개한 뒤, 저자의 자유로운 상상력에서 나온 이야기를 펼쳤다면 독자도 상상의 나래를 펴며 더 재미있게 이 책을 읽었을 것입니다. 나는 <주몽(朱夢) 설화>, <유리(琉璃) 설화>, <지귀(志鬼) 설화>의 원작(?)을 일일이 찾아보았습니다. 학창 시절 공부했던 내용도 상기하면서, 작가의 상상력으로 쓴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추억과 상상력의 바다에 풍덩 빠진 멋진 독서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