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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 인간과 괴물의 마음 - 나를 잃지 않고 나와 마주하는 경계의 감정
이창일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1년 4월
평점 :
철학 박사이자 상담심리학 박사인 저자는 이 책에서 수치에 관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펼쳐나갑니다. 1부에서는 수치라는 감정을 과학의 언어로 탐색하고, 언어학의 관점에서 수치와 관련된 단어들을 설명합니다. 특히 ‘부끄럽다’의 어원인 ‘ᄇᆞᆰ’이 ‘붉다’와 관련 있을 뿐 아니라 나체를 뜻하는 ‘벌거숭이’와 관련이 있다는 설명(pp. 70~71)이 흥미롭습니다. 나는 이 설명을 읽으면서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성서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부끄러움과 관련된 한자 표현을 설명하면서 소개한 <시경> 한 구절도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대가 홀로 방에 있을 때에 방안 귀퉁이에도 부끄럽지 않게 할지니,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도 나를 보는 이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p. 79). 그렇습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 인간 윤리의 근간을 이룹니다. 시인 윤동주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마침, 이 책 5부에서도 윤동주를 소개하고 있군요(pp. 306~310). 우리 말을 쓰면 불이익을 당하는 일제시대에 시인은 부끄러움이 없는 삶에 대한 탐색을 우리말로 잘 표현했습니다. 그의 시에 부끄러움에 대한 고백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줄 몰랐습니다.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코스모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쳐다보면 /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길>),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별 헤는 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 /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 /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든가”(<참회록>), “인생을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씌여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쉽게 씌여진 시>).
이 책은 수치와 부끄러움의 두 얼굴을 깊고 예리하게 탐색합니다. 수치 혹은 부끄러움은 아래로 향하는 얼굴과 위로 향하는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래로 향하는 얼굴은 성서 이야기를 통해, 위로 향하는 얼굴은 유교의 가르침을 통해 풀어냅니다. 故 노무현 전직 대통령의 고백과 참회록의 내용도 흥미로웠습니다(pp. 315~323). 지금은 ‘후안무치(厚顔無恥)’가 판을 치는 시대입니다. ‘후안무치’란 ‘뻔뻔스러워서 부끄러워해야 할 때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런 점에서 ‘후안무치’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수치’는 아래로 향하는 얼굴로 인간성을 파괴할 수 있는 가장 어두운 감정이고, ‘부끄러움’은 위로 향하는 얼굴로 인간다운 인간으로 완성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의 자세입니다. 저자가 제안한 정당하게 ‘수치 주기’는 인간답게 만들기 프로젝트(?)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시대는 부끄러워할 것이 너무 많게 됩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양심이 사라지면, 인간은 짐승으로 전락해 더욱 포악해지고, 세상은 더욱 삭막해질 것입니다.
이 책은 과학, 언어학, 신화학, 심리학, 철학으로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장 방대하고 깊이 있게 고찰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워할 줄 몰라 부끄러운 일이 많은’ 이 시대에 가장 적절한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꼭 읽어보세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과 윤리에 관해 많은 통찰력을 얻을 것입니다. 강추 또 강추!